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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강의20201127b 마가복음15장 40-41절(나 대신에)-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마가복음

광주강의20201127b 마가복음15장 40-41절(나 대신에)-이 근호 목사

첫째 시간에서 제가 말씀드린 것은 여인들이 정확히 진리 쪽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정확히. 발걸음을 옮기면서 ‘진리가 무엇이냐’ 할 때 흔히 십자가, 복음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여인이 이야기한,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진리는 무엇이냐. “진리란 나를 대신하는 것”. 진리란 나를 대신한다. 나를 대신하는 거예요.

더 이상 변동하고 바꾸고 내가 나의 가치를 날마다 더 좋은 가치로 바꾸기 위해서 노력해서 돈 벌어가지고 그 돈으로 아파트 옮기고 더 좋은 가치로 바꿀 필요 없을 정도로, 아예 나 자체를 대신하는 분을 만나는 것, 이게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의 진리란 이 세상에서 추방되는 분, 이 세상이 하나가 되어서 추방한 분, 그 분이 진리가 되죠. 그 분이 바로 진리,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 예수님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필히 추방되셔야 되죠. 진리가 진리답기 위해서는. 이 세상을 대표하려면 이 세상에서 추방되셔야 하는 겁니다.

그리고 성도라면 성도도 예수님을 따라서 이 세상에서 추방되어야 되겠죠. 이 세상에서 누가 나를 공격해서 “너도 십자가에서 죽어라” 하고 체포하는 게 아니고 내가 나를 포기해야 되죠. 나를 대신하는 분이 있기 때문에 나는 얼마든지 포기될 수 있습니다. 만약에 포기를 안 한다면 나는 나를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을 나의 교체멤버로 사용할 수가 있어요. 나를 살리기 위해서 나를 포기하는 게 아니고 보다 더 가치 있는 나를 위해서 예수 믿는 수가 생긴다니까요. 예수 믿어서 뭐 어쩔 건데? 괜찮은 나가 되고 싶은 거예요.

이것은 옛날에 진리가 없는, 귀신 들린 자의 행세를 또다시 계속해서 지속하는 거예요. 대부분의 교회 다니는 사람이 이런 짓을 많이 하죠. 교회 다니고 새벽기도 듣고, 라디오로 TV로. 이게 전부 뭐냐 하면 교체해서 질적으로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는 겁니다.

그런데 나를 대신해버리면 나는 어떻게 됩니까? 대신한 분이 계시기에 이제는 미련 없이 나를 버려도 상관없는 거예요. 여인들이 산 채로 십자가에 갔다는 말은 예수님을 죽였던 살아있는 권세자의 편이 아니고 그 권세자에게 내침을 당한 저쪽으로 난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날 따라 오세요. 우리가 진리의 길로 인도하겠습니다. 본인들은 그러한 의도가 없지만 주님에 의해서 이 세 명의 여인은 예수님 죽는 쪽으로 가고 있는 거예요.

그 당시 모든 사람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권력자가 무서워서 감히 그리스도하고 거리두기를 하잖아요. 그래, 괜히 예수님 옹호했다가 나만 또 잡혀간다. 그런데 주변부에 있는 이 여인은 잡아가려면 잡아가고 나는 예수님께 가겠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 사람 또 하나 있어요. 여기 43절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당돌히”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뭘 달라고 합니까?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렇게 되어 있죠. 예수의 시체, 그 당시 언론의 표현에 의하면 사형 당해도 마땅한 자의 시체를 달라는 거예요. 조두순의 시체를 달라는 것과 똑같은 거죠.

누구나 할 것 없이 예수는 과대망상증이다. 우리 민족의 번영과 안정과 발전에 지대한 장애물이 된다. 곧 나의 장애물이다. 예수는 누구냐? 나의 장애물이다. 안 믿는 가장들 보세요. 예수 믿는다고 하면 뭐라고 합니까? 예수는 우리 집안의 행복을 박살내는 사람이다. 내 장애물이다. 그렇게 하잖아요. 둘 다 예수 믿는다고 웃지 마세요.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냐, 우리 가정의 행복이냐?” 딱 물으면 어느 쪽입니까. 우리 가정을 건사해서 나중에 5년 후, 10년 후 더 가치 있는 가정으로써 바꿔치기할 수 있는 여지를 그래도 좀 남겨둬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 그 생각이 바로 귀신들린 자들의 생각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옛날에 귀신 들릴 때 했던 자기 모습을 그대로 보고 있죠. 사람들이 예수님을 쓰레기로 취급할 때 단호하게 “그래. 나도 쓰레기 될래.”하고 거기에 합류하고 있습니다. 정확히 진리 쪽으로 가죠. 그 분만이 나를 대신할 수 있기 때문에. 죽었던 그 분이 살아있는 나를 대신한다면 내가 살았다는 자체에 대해서 내가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겁니다. 내가 살았다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죽으신 예수님이 나한테 더 의미 있지, 예수님 때문에 살아있는 나는 의미가 없어요. 내가 바라보는 곳은 내가 아니라 주님 쪽이다 이 말이죠.

마귀는 자꾸 우리로 하여금 관심사를 우리 자신에게 자꾸 쏘아대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을 잠시 우리가 놓치는 순간 그 자리가 그냥 비어있는 게 아니에요. 확 다 메워버리죠, 메꾸죠, 그걸. 나는 어떻게 하면 지금보다 더 가치 있을 것인가. 이런 생각이 확 밀려온다고요. 지금 이 행동이 나를 가치 있게 할까, 행동 안하는 게 더 가치 있을까? 갑자기 내가 주인공이 되면 뭐가 빠집니까? 대신하심. 대신하심이 누락이 되잖아요. 대신하심이 날라가 버린다고요.

자, 예수님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누가 나를 대신했다는 생각을 악마가 와서 파내버린 거예요. 그럼 나를 대신하는 사람이 없다면 여전히 내가 주인공이고 중요한 거예요. 내가 다치면 안 되는 겁니다. 내가 아프면 안 되고 내가 가난하면 안 되고. 그게 바로 막달라 마리아 입장에서는 귀신 들린 자의 모습이에요.

사람들에게 밉상 받아서 사형당한 시체를 달라고 해서 뭐하려고요? 박제 할라고 하나, 뭐하려고 합니까? 여기 43절에 보니까 그는 무엇을 기다린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죠. 여기서 이러한 변화, 대신하신 분을 만났을 때 아낌없이 나를 포기하는 그 변화는 첫째 강의에서 내 자아를 감싸고 변호하고 위로하려고 하는데 자아에다가 아예 구멍을 뚫어서 나 자체가 구멍 뚫렸으니까 쓸모없는 거예요.

나 자신이 쓸모없다는 생각을 한번 가져보세요. 그래야 대신 있음이 부각되잖아요. 나를 대신하심이 부각된다는 말은 나는 구겨져버리고 쓸모없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하나의 작은 이벤트를 한번 해보겠습니다. 어떤 노래가사를 제가 적어왔는데, 제 주특기 중에 하나죠, 이 노래가사가 어떻게 되는가 한번 보세요. 노래가사를 보세요.

당신
김정수

내 품에 안기어 곤히 잠든 그대여
어느 덧 그대 눈가에도 주름이 졌네
내 가슴에 묻혀 꿈을 꾸는 그대여
야위어진 그댈 바라보니 눈물에 솟네
고왔던 여자의 순정을 이 못난 내게 바쳐두고
한마디 원망도 않은 채 긴 세월을 보냈지
나 맹세하리라 고생 많은 당신께
이 생명 다하는 날까지 그대를 사랑하리
고왔던 여자의 순정을 이 못난 내게 바쳐두고
한마디 원망도 않은 채 긴 세월을 보냈지
나 맹세하리라 고생 많은 당신께
이 생명 다하는 날까지 그대를 사랑하리

라고 옆에 있는 남편이 아내보고 이렇게 노래할 때, 아내가 볼펜 들고 이걸 구멍 뚫어버리는 거예요. 구멍 뚫려야 이게 이벤트인데. 나는 이런 여자를 포기했거든. 이렇게 남편한테 애절한 애정공세 받는 이 여자를. 이게 자아가 찢어지는 순간이에요, 자아가. 자아가 찢어지는 순간이에요. 만약에 이 여인이 이 가사처럼 이런 이미지를 상상하면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을 포기 못한 사람이에요. 이거 귀신 들린 거예요. 이 세상이 그런 세상입니다.

이게 팍 뚫어졌어야 됐는데...어째든 이게 찢어졌어요. 이런 나를 잊어주세요. 남한테 사랑받기 원하는 나를 잊어주세요. 그러니까 이 세상의 유행가가 얼마나 필요한가를 아시겠지요. 바로 내가 누군지를 모르는데 그런 가사를 딱 불러주게 되면 그래, 저게 내가 되고 싶은 나였어! 갑자기 복음은 사라지고 복음은 없어지고 보다 가치 있는, 남편한테 사랑 안 받던 내가 사랑받는 나로 교환, 교체될 생각하는 겁니다.

있잖아요, 김목경이 불렀던. 가사 한번 들어보세요. 아내가 죽었던 모양이죠. 죽었는데 남편이 후회해가지고 당신을 이제 떠나보내리라. 임영웅이 노래 부르면 눈물 흘리고 훌쩍훌쩍해요. 그리고 또 임영웅이 이라는 노래 부르면 두 손 모아서 ‘사랑은 늙어가는 것이 아니고 익어가는 것입니다’하면 흑흑...

이게 뭔가 본인을 건사하고 곱게 유지하려고 하면서 십자가를 알려고 하면 십자가는 자꾸 도망을 가는 거예요. 뚫어져야 너 대신인데 우리는 너 대신이 아니고 나는 그대로 있고 여기다가 덮치려고 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피로 포장하려 하고 예수님의 복음으로 포장해서 가치 있는 나로 바꿔치기하려고 시도하면서 성경을 보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성령을 안 받으면. 성령 안 받고 악령 들려버리면 맨날 이런 식이에요. 그래놓고 뭐 칠십, 팔십 살았다, 구십 살았다, 백 살았다 그러면 뭐 합니까. 세 살 때 하고 똑같은데요. 어릴 때부터 똑같이 달라진 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들이 예수님이 죽으신, 이미 죽었다는 십자가 현장을 끝까지 찾아가는 것은 결국 이런 이야기에요. “아무 문제없다.” 아무 문제될 것이 없다. 예수님의 죽으심에 합류된 사람의 특징은 인생에 대해서 아~무 문제될 것이 없는 거예요. 그럼 자기는? 나는? 있는 둥 없는 둥. 나는 있는 둥 없는 둥. 이걸 쉽게 말하면 아까 처음에 말씀하셨죠. 멍청한 나. 되게 편해. 사모님이 고백했잖아요, 되게 편하다고. 멍청해. 아무것도 몰라. 이걸 두 자로 이야기하면 ‘허당’. 본인 딴에는 되게 똑똑한데 사기 당하고 보이스피싱 당하고 허당이에요. 주께서 그렇게 만들어내요.

자 그렇다면 요셉은 왜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가려고 하는가. 요셉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가. “세상은 비어있는 곳이 아니다.” 무엇으로 꽉 채워져 있는가.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 사건이 새로운 현실의 중심부를 차지하는 거예요. 모든 힘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 흘러나오는 힘으로 꽉 차있다는 것을 요셉이 알게 된 겁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니까.

하늘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이 세상 나라가 자기의 본색을 다 보여주고 여기서 손 털고 나가야 되니까 그런 겁니다. 이 세상의 끝자락이 되어야, 이게 구약에 있는 선지자의 종말 아닙니까, 이 세상의 끝자락이 될 때 비로소 등장하는 그 나라여야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겁니다. 마태복음 3장에서 세례요한도 그런 이야기를 했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깝다.

천국은 뭐냐. 이 세상이 어떤 절차를 거쳐야 돼요? 이 세상 자체가 허망하다는 것. 그것을 분명히 하고 난 뒤에 하늘나라가, 심판의 나라가 오잖아요.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될 것은 그 세상나라가 왜 허망한지를 알아야 되겠죠. 우리가 이 세상나라에 속했기 때문에. 그걸 다른 말로 번역하면 나는 왜 아무것도 아닌가. 날마다 제대로 된 내가 되려고 애쓰는 이 행동과 이 시도가 왜 아무것도 아니고 헛짓인가, 헛발짓인가, 허구냐. 그걸 알아야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친절하게도 이 세상을 헛되게 만든 요소들을 주님 쪽에서 다 끌어 모았어요. 수사극 보면 이런 게 있습니다. 경찰서에 귀한 다이아몬드가 있을 때 경찰서에 있는 다이아몬드를 도둑이 털기 위해서는 그 경찰서 관내에 있는 경찰들을 모조리 어떤 사건 안에 몰리게 해놓고 텅텅 비어있는 경찰서를 터는 수밖에 없죠.

예수님께서 지금 이 세상이 얼마나 허접한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모든 세상의 권력이 자기 쪽에 쏠리도록 그렇게 유도하신 겁니다. 다 해가지고 예수님 죽고 난 뒤에 세상이라는 것이 이 허접스러움으로 인하여 진짜 악마가 지배하는 세상인 것을 다 보여줌으로써, 세상 포기는 어렵고요, 뭘 포기해야 돼요? 이 세상에 속한 나 자신에 대해서 새로운 가치로 되겠다는 그 자체를 포기해야 되죠. 구멍 뚫려야 되겠죠.

이것은 우리 자력으로 되는 게 아니고요. 아리마대 요셉이나 막달라 마리아나 두 여인처럼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진짜 현실인 것을, 이끌린 사람만이 허당처럼 있는 둥 없는 둥 그리고 이 세상 문제가 전혀 문제거리가 안된다는 사실을 성도만큼은 알죠. 그러니까 굉장히 용맹하죠. 사람들 눈치 안보고 시체 달라고 하고 또는 예수님을 사형시킨 현장에 여인들이 가까이 가면서 끝까지 예수님의 죽으심과 함께하는 그러한 용기는 예수님 쪽에서 이미 마음 굳혔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입니다. 갈릴리부터 따라와 가지고 그렇게 되는 거죠. 이러한 마가복음의 기록들은 바로 이러한 현상이 오늘날 신약시대에 성령 받으면 십자가의 재현이기 때문에 똑같은 현상이 우리에게 일어나는 겁니다.

세상에 살면서 거기서 산 채로, 아 이거 정말 중요한 건데, ‘산 채’로 누굴 만난다? 예수님을 만난다. 어떻게 만나는가. 수요일 설교에 여호와를 찾으라 했죠. 여호와를 껴안고 막 이럽니까? 어디서 만납니까? 피에서 만나죠, 피에서. 십자가 피에서 만나는 거예요. 산 채로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만나게 되면 이 피는 지식이 아니라 나를 대신하심이죠, 피가. 이 피 흘린 분의 생명이 내가 그렇게 귀하게 여기는 목숨을 대신하는 분이에요. 그래서 산 채로 예수님을 만나기 때문에 자살하면 돼요, 안돼요? 자살 이건 말도 안 되는 거죠. 산 채로 만날 수 있는데 왜 죽어서 만나려고 하느냐는 말이죠. 죽어서 만나봐야 이거는 끝났지 뭐.

두 번째 시간의 주제를 본격적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아까 내가 적었어요. 이 세상은 텅 빈 세상이 아니다.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하는 것처럼 그냥 꽂아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실생활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에서, 가정주부의 일부터 직장 다니는 사람 모든 일에서 뭘 만날 수 있습니까? 텅 빈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어떤 힘을 만납니까? 복음의 작용을 우리는 모든 순간에 만날 수 있습니다. 애를 키우든지 젖을 준다든지 밥을 먹는다든지 밥을 짓는다든지 전기밥솥이 칙~하고 뺑뺑뺑 돌아가는 그 가운데에서도 복음의 작용과 접촉하는 거예요, 꽉 차있으니까.

꽉 차있다는 말은 과학적으로도 이미 많이 언급된 거예요. 옛날 중세하고 근세에 들어와서도 사람들은 이 세상이 비어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옛날 사람들, 과학이 발달되지 않았을 때는. 공기 있음을 반구의 실험으로 비로소 안다고요. 이 공간이 공기로 꽉 차있고 공기는 질소 몇%, 산소 몇%로 되어 있으며 그것이 하나의 실체가 되면 실체는 고유한 질량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기압, 공기압, 대기압이 발견된 겁니다.

결국 이 세상은 텅 빈곳이 있다, 없다? 전혀 없는 거예요. 지금 천문학자들이 이야기하기를 이 세상은 수소원자들이 우주 공간을 채우고 있다고요. 그리고 생물학적으로 한번 보세요. 마스크 왜 합니까? 이 바이러스가 안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바이러스가 전염되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는 눈에 보이지 않은 세균들이 엄청 많거든요. 이 세상은 뭔가 꽉 차있어요.

멀리서 보게 되면 산이 참 아름답죠. 제가 아침마다 산책하는 우리 동네, 팔공산 자락에 있는 산에 올라가보세요. 제가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 가본 적 있습니다. 그곳 못지않습니다. 그 산에 들어가면 도로만 있고 첩첩산중이에요. 도로 때문에 내가 접근할 수 있지만 사람이 아무도 없는 풍경을 보면 정말 오스트리아의 모차르트 고향인 잘츠부르크,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그 배경, 그 동네 못지않아요. 정말 가을 이럴 때 보면 너무 좋습니다.

그런데 그 숲이 그렇게 좋잖아요. 막상 숲에 들어가 보세요. 벌써 방해물들이 등장합니다. 벌레 달려들죠, 가시가 여기서 쏘죠. 마치 들어오지 말라고 하는 것 같아요. 전원주택이 좋다고 가죠. 전원주택의 나쁜 점은 모기, 파리, 잡초, 벌 떼. 잡초 뽑는 것은 가사노동이라고 하는데 가사노동은 임금을 주지 않는 노동이거든요. 노동해도 누가 월급을 안주는 게 가사노동이에요. 무의미한 노동이라니까요. 전원주택 껴안는 그 자체가 바보 같은 짓이 되어버렸어요. 잡초는 올라오죠. 네가 살만한 곳이 못 된다 그런 뜻이잖아요.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것은 다시 말해서 세상이 나를 죽였다. 두 번째는 그 중에 나를 반기는 자들이 있어야 된다. 주님께서 그렇게 했기 때문에. 이 세상은 빈 공간이 아니고 빈 역사가 아니고 빈 시간이 아니고 십자가를 꽂아버리면 이 두 가지 상황이 매일같이 우리에게 적용이 되는 겁니다. 복음적 상황이에요. 복음적 상황이라는 말은 좋은 것만 온다는 뜻이 아니고 복음을 유발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그 사태가 한시도 거르지도 않고, 참 부지런해 성령께서, 한시도 쉬는 법이 없이 끊임없이 찾아와요, 끊임없이. 내 다리 내놓으라는 식으로. 내가 나를 죽였잖아. 네 자아가 너를 죽였잖아.

그렇게 되게 되면 하나님 나라는 소유가 아니죠. 하늘나라는 우리가 과정과 흐름 속에 말려들어간 겁니다. 하늘나라 되기 위해서 우리는 어제도 막달라 마리아, 오늘도 막달라 마리아, 내일도 막달라 마리아. 세상에서 쫓기면서 겁내지 않고 십자가만 쳐다보는 그 모습을 우리는 매일같이 이 연극무대에서 하는 거예요. 어제라는 연극무대, 오늘이라는 연극무대, 내일이라는 연극무대. 매일같이 우리는 막달라 마리아 또는 아리마대 요셉, 계속 하늘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상황 속에서 그걸 매일같이 과정과 흐름 속에서 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분에게 제가 이런 문자를 보낸 적이 있거든요. “주님께서 온종일 비천한 내 몸 안에서 수고가 많으신 것에 대하여 감사드립니다.” 하루 일과를 끝내면서 기도할 때 들판에서, 저 멀리 자그만 예배당의 종소리가 들리는 그 가운데에서, 감자농사 짓는 농부 부부가 모자를 벗어요. 저쪽 노을 석양이 져있고(밀레의 ). 모자를 벗으면서 감사기도를 할 때, 보던 사람은 오늘도 내가 일하게 해줘서 감사하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하면 안 되고 주님께서 온종일 비천한 내 몸 안에서.

그러니까 내 몸이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니까 온종일 감자 캐면서 자기가 일 했습니까, 안했습니까? 자기는 일 안했죠. 누가 일했어요? 내 안에서, 비천한 몸 안에서 누가 비천한 일을 했습니까? 주님이 비천한 일을 해야 십자가 사건의 반복이 된다니까. 주님만이 ‘나’가 돼요. 나는 뭐냐. it(그것)이 돼요. 사물, 기계, 물건이 되죠. 주께서 작용하는 기계가 되는 겁니다.

매트릭스 3탄에 보게 되면 돔 구멍 뚫고 기계들이 공격할 때 예수 안이 박살난 거예요, 시온성이 박살나가지고 구멍 뚫고 들어왔을 때 사람이 조종하게 되면 커다란 기계가 총을 막 쏴요. 사람은 안에서 조종하고 기계는 바깥에서 막 총 쏘고 있고. 그러니까 우리는 바깥에 있는 외형의 기계가 되고 안에서는 예수님께서 온종일 비천한 몸 안에서, 하루 종일 감자 캔다고 수고가 많아요. 우리의 비천한 몸을 입으시고 하시는 겁니다. 그게 이미 시작된 하늘나라에요.

그 요셉이 당돌하다는 말은 관심사가 이 세상에 있다, 없다? 이 세상에서 내일은 보다 더 가치 있는 인간이 될 것이라는 데에는 관심 하나도 없고 아예 자기를 포기한 거예요. 뭐로 바꿔치기했습니까? 예수님이 날 대신한 걸로 본 거예요. 이 세상에 내가 가치 있다는 자체가 나는 망하고 있는 중이니까. 이 세상이 무너지면 같이 무너지잖아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깨닫게 하셔서 예수그리스도가 하늘나라에서 오신 분이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이 권세로써 협박과 겁박을 주는 이 세상에서, 요새 전부다 겁박 아닙니까, 겁박, 협박 요새 정치판이 전부 이런 거 아닙니까, 협박하는 가운데서 굴하지 아니하고 멍청하게 등신같이, 권력이 뭐에요? 이런 식으로. 거기에 아무 신경도 쓰지 않고 주님이 날 대신했음을 현재 이 자리에서 마음껏 보여주는 겁니다. 힘없는 여인들이. 어떤 이방사람 아리마대 요셉이 그렇게 하는 겁니다. 이방인은 아니지만 이방사람이에요, 전혀 권력과 관계없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44절에 보면 “빌라도는 예수께서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이상히 여겨 백부장을 불러 죽은 지 오래냐 묻고 백부장에게 알아 본 후에 요셉에게 시체를 내어 주는지라” 여기서 빌라도가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이 죽은척하고 살아났겠어요, 안 그러면 확실하게 죽고 난 뒤에 시체를 넘겨 줬겠습니까? 확실하게 죽었죠.

이것은 뭐냐 하면 ‘절단성’. 이 세상과 하나님 나라는 어딜 봐도 통하는 구석이 전혀 없다. 이 세상은 자아의 세계 아닙니까. 나의 프레임의 세계거든요. 나의 가치를 옹호하기 위해서 늘 살피는 세계 아닙니까. 이 자아의 세계에서 자아 뒤쪽에 갈 수 있는 방법은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내가 잘되려고 하는 이 자아 자체가 무의미하게 되어야 되는데 어떤 경우라도 자아가 무의미하게 되는 경우는 없어요.

자아를 무의미하게 하려는 노력을 어디서 하느냐면 한 쪽은 불교에서 하고 한 쪽은 천주교에서 하고 있잖아요. 방법은 비슷해요. 둘 다 방법은 참선이죠. 또는 명상. 명상과 참선의 특징은 뭐냐 하면 시간의 정지. 시간이 정지되게 되면 사람들은 이걸 영원성이라 보고 영원성은 진리 그 자체로 보는 거예요. 그런데 이 자체가 잘못 된 게 참선, 명상 해봐야 밥 먹으러 나와야 되고 점점 늙어간다는 거예요. 참선하는 본인이 시간에서 정지하고 싶은데 이미 시간에 떠 밀려 가고 있다는 거예요.

아까 이거 제목으로 괜찮은데... 너무 은유라서 말을 못하겠다만, 계곡의 수영장에서 이 시간이 계속 여기서 적용되는 거예요. 헤엄치다가 하나 둘씩 장례식장으로 관속에 묻히고 또 다른 사람 뛰어들고. 이 계곡의 현실이 어디서 왔는지 아무도 몰라요.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고. 들어온 곳 모르고 가는 곳 모르면 간단히 말해서 이렇게 되죠. ‘모른다’가 되죠.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 그냥 모르는 거예요.

모르면 입 다물어야죠. 그런데 모르면서도 입 안 다문다고요. 내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거 하나는 안다. 보다 가치 있는 걸로 바꾸고 싶은 이 악마의 충동, 이건 멈출 수가 없는 거예요. 이건 멈출 수가 없어요. 추미애 장관한테 네가 누구냐고 물으면 몰라요. 모르지만 윤석열을 떨쳐내야 한다는 그것만 알아요. 어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네가 누구냐?”고 하면 몰라요.

거리 난전에 시장 장사하는 사람이나 포장마차 하는 사람들, 초밥 뷔페 하는 사람들에게 당신 누구냐고 하면 몰라요. 그럼 초밥 이거 얼마입니까? 하면 그건 잘 알아요. 25000원입니다. 이건 또 잘 안다고요. 그러면 그건 왜 알아야 되는가. 그 상품의 25000원이 뭡니까? 가치가 붙잖아요, 상품의 가치가 붙는다고요. 얼마를 해야 이 단가가 높은가를 늘 생각하잖아요. 단가 알아서 뭐하는데? 돈을 벌잖아요. 돈을 벌면 뭐하는데? 돈 벌면 내가 잘 되지. 네가 잘 되서 뭐할 건데? 그 다음에는 답변이 없어요. 네가 잘 되서 뭐할 건데? 행복할 건데. 그럼 행복이 뭐냐? 몰라요.

행복이 뭐냐고 물었던 사람이 있어요. 테스 형. 소크라테스가 맨날 물었던 게 그거 시비한 거예요. 행복을 이야기하니까 “행복이 뭔데?” 온 사람마다 다 쫓아다니는 거예요. 정의가 무엇인가. 온 사람 다 묻고 다니고 얼마나 귀찮게 했으면 잘라냈을까요. 그만 그만 그만! 사람들이. 아니야, 내가 그걸 알아야 되겠어. 누가 알아야 된다고? ‘내’가 알아야 되겠어. 그러니까 소크라테스는 본인을 알고 싶어서 남을 귀찮게 한 겁니다. 남자만 여자를 귀찮게 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누구냐를 알고 싶어서.

그거 포기하면, 내가 누구냐는 그냥 있는 둥 없는 둥 살면 돼요. 주님이 무슨 일을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내가 어떻게 이 땅에서 분류되는가, 어느 쪽에 분류되는가, 그건 의미 없고 아무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멍청한 사람 되자. 허당. 오늘 제목을 뭐라고 했습니까. 죠.

이 세상에서 철저하게 끊어졌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절대로 다가갈 수 없는 세계. 그게 바로 하나님의 나라. 그걸 어떻게 아느냐. 십자가로 보여준 겁니다. 그럼 그 당시에 여기서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지만 다시 한 번 간단하게만 생각해봅시다. 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은 극구 예수님을 못 잡아먹어서 그렇게 난리를 쳤습니까? 그것은 하늘나라가 둘 될 수 없기 때문에. 이 땅에 태양이 둘 될 수 없잖아요.

일단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 나라가 있죠. 이건 인간이 갈 수 있는 나라에요. 하나님께서 인간이 갈 수 있는 나라라고 하늘에서 율법을 줬기 때문에 율법을 순종하는 사람은 갈 수 있는 나라, 그게 그들은 하나님 나라라고 본 겁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이 사람들보고 무슨 자식이라 했습니까? 독사의 새끼라고 했어요. 요새 같으면 명예훼손으로 걸립니다, 이거. 독사의 새끼, 뱀의 새끼다. 악마의 자식들이라는 뜻이거든요.

그러면 두 번째 하늘나라는 뭐냐. 두 번째 하늘나라는 제가 이 점을 이야기하고 싶어요. 두 번째 하늘나라는 없어요. 없습니다. 없는데 인간이 갈 수 있는 나라에서 핍박을 해줘야 돼요. 그래야 생기는 나라에요.

그럼 아까 했던 응용문제 해봅시다. 우리가 태어날 때 자아가 있죠. 다시 한 번 기억합시다. 자아라 하는 것은 무엇의 다발? 기억의 다발. 또 자아라 하는 것은 내 것, 내 소유가 있어야 그게 자아다. 자아가 어렵습니까? 그럼 나. 내가 속한 나라는 뭡니까? 인간이 갈 수 있는 첫 번째 하늘나라에 속하겠죠. 그러니까 내가 누굴 핍박해야 돼요? 내가 나를 핍박하지 않으려 하고, 내가 나를 버리지 않으려고 하고, 내가 나의 가치를 유지하게 될 경우에 그때 갈수 없는 나라로서 우리에게 나타나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건 성도에게만 해당되는 겁니다, 성도에게만.

그래서 우리 육의 본성상 내 가치를 포기 못하잖아요. 포기 못할 때 그때 성령이 하늘나라로부터, 주님으로부터 오잖아요. 오게 되면 성령께서 우리를 바보로 만들어버리죠.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허당이고 헛수고라는 것을 깨닫게 할 때 비로소 우리는 뭘 할 수 있느냐면 ‘확인’될 수 있는 겁니다. 그런 나라 가는 게 아니고 이건 아무도 못가요! 다시 강조합니다. 어느 인간도 하늘나라 못갑니다. 못 가는데 성령이 와버리면 가는 게 아니고 이미 우리는 하늘나라 속했음을 확인하게 되죠.

나는 나의 것이 아니고 누구의 것입니까? 나는 나의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죠. 주님의 것으로서의 주님의 것이 된다 했죠. 주님의 것으로서의 주님의 것. 그런데 주님의 것이 되게 되면, 그것 가지고 또 육신을 살게 되면 이 주님의 것이 곧장 누가 되어버립니까? ‘나’가 되어버리죠. 그럼 또 성령이 와가지고 또 이런 사태, 우리 몸이 여기 속하니까 죽을 때까지는 이 세상에 속해있으니까 단짝 돼가지고 우리는 괜찮은 분류, 또 구원받은 분류에 속했다고 어떤 안도감 같은 것을 또 생각하는 거예요.

여기서 주일에 했던 어려운 것 한번 해봅시다. 강둑이 이렇게 있어요. 강둑이 있고 물이 있고 또 강둑이 있는데 이 두 강둑 사이에 뭐가 흐르냐 하면 예수님의 구원 정보가 흐릅니다. 예수님의 구원 사역이 여기 흐르고 있어요.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고 다시 아버지로부터 받아들여지는 그 정보가 흐르거든요. 이 정보는 말씀 성취 관점에서 이 정보가 흘러요.

그러면 우리로 하여금 (아담 안의 강둑에서 주님의 강둑으로) 가려면, 우리가 참깨라면 우리 속에서 말씀을 끄집어냅니다. 이걸 참기름이라 했죠. 참기름을 빼내는 거예요. 그럼 주께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는 거예요. 로마서 8장 9절~11절의 말씀 같은 것, 너희 속에 성령이 임하면 너희는 죽은 자라도 성령에 의해 다시 살리라는 말씀을 준다고요. 그러면 우리는 그 말씀을 지식으로 받고자 하잖아요. 지식으로 받고자 하면 이게 안돼요.

그 말씀이 나와야 되는데, 아까 자아의 특징을 뭐라고 했습니까? 자아의 특징은 자꾸 지식을 소유하려고 하는 거예요. 소유하게 되면 전에 없을 때보다 내가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나는 생각하면 안 되는데 자꾸 내가 있고 그 다음에 내 가치를 포기 안하고 괜찮은 가치로 발전하려고 생각하는 겁니다. 가장 가치 있는 자들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라고 이 악마의 세계에서는 주장했잖아요. 막달라 마리아 같은 경우에는 귀신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그들이 보였죠. 귀신 들린 자가 어디서 가치 있다고 내 앞에서 하느냐. 그런 식으로 우습게보죠.

그래서 이 주도권이 성령으로 넘어가면 여기서 말씀을 끄집어낸다고요. 말씀을 끄집어 낼 때 아까 것을 다시 이야기해봅시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뭐냐 하면 첫째는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거죠. 저주의 자리까지 버림받은 거죠. 이게 하나의 방향을 이루는 겁니다, 방향. 두 번째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아서 부활 되었죠. 이것도 하나의 방향을 이루죠. 이 두 방향이 서로 반대방향이죠. 이 반대되는 두 방향이 강둑을 건너가면서 우리한테 계속 반복된다는 겁니다.

따라서 지금도 마귀가 활동해줘야 되고 지금도 우리의 육신은 이 세상에 속해서 조금 좋으면 좋다고 까불고 “은혜 받은 거 같아요.” 이렇게 하다가 조금 뭐하면 “나는 죽을 거 같아요. 내가 하나님을 막 방해하는 것 같아요.” 하고. 아주 Dangerous~해가지고 아주 위험해요. 이 방향이 왔다갔다 왔다갔다 하는 이유가 그렇게 왔다갔다 함으로써 뭐를 떨궈내느냐 하면 주도권이 ‘내가 늘 은혜를 유지해야지’ 라는 주도권자로서의 내 자격이 박탈당하는 겁니다.

대신. 제목을 바꾸고 싶다. 주님이 나를 대신하는 거예요. ‘대신’ 이게 중요한데. . 그러니까 내가 가는 게 아니고 누가 가게 한다? 나에게서 참기름, 말씀을 끄집어내서 그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 때문에 우리는 껍데기로, 하나의 기계로 사용하고 우리 안에 있는 주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살아생전동안에 우리를 통해서 충분하게 보여주시고 이제 보여줄 거 다 보여줬다 싶으면 이주일처럼 죽는 거예요. 뭔가 보여드릴까요? 하다가 보여준 것도 없이 죽었잖아요. 자기 폐암 걸린 것만 보여줬는데.

뭔가 보여줄 거 다 보여주고 개판인 거 다 보여 주시고 “가자, 이제 내 역할은 다 끝났다.”하고 데려 가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모습이 사도바울이 말하기로는 뭐냐. 내가 약한데서 강함이라. 나는 약한데서 강함이라. 내가 약해지는 것이 은혜다. 이런 뜻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나와요 (고린도후서 12장 5절~10절). 내가 약한 데서 기뻐하노니 약한 이것이 나한테는 은혜다. 약했기 때문에 자아의 가치 추구를 할 엄두가 안 난다 이 말이죠.

몸이 아픈데 빼달라고 빼달라고 기도를 세 번 했거든요. 쉽게 예를 들면 우리도 할 수 있잖아요. 이 아플 때 치과에 가면 시간 아깝고 무엇보다 돈 아깝고. 또 치료받는다고 몸살 나고. 주께, “좀 쉽게 갑시다, 주님. 기도할 테니까 안 아픈 기적 줘서 나도 기적 받았다고 기적 받은 주의 종 되고 싶습니다.” 뭐 그러한, 지금보다 더 가치 있는 주의 종 되기 위해서 기도한다고요. 기도 세 번해도 안 들어줬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너는 처음 방향으로 저주 받아 마땅한 자라는 것을 다시 터치해줘야 그 자리에서 죄 사함이라는 게 얼마나 귀한 긍휼인지, 귀한 사랑인지를 다시 한 번 느끼게 될 겁니다. 그러니까 이 방향이 왔다갔다 해줘야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늘 놓치지 않고 감격하게 될 수 있는 겁니다. 이걸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거예요. 모든 것이 주님 보시기에는 최적의 상태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적절하고 적당합니다. 최적의 상태.

끝으로 46절 봅시다. “요셉이 세마포를 사고 예수를 내려다가 이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 여기서 아리마대 요셉이 사실은 예수님을 최종 처리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러니까 요셉 보기에도 예수님은 확실하게 죽었어요. 예수님이 죽을 뻔하고 뭐 기절한 정도가 아니라 확실하게 죽었어요.

이 말은 사람이 예수님을 죽인 게 아니고 예수님이 스스로 확실하게 죽음의 세계, 자기 세계에 들어가신 거예요. 그러니까 산 사람으로서는 주님의 세계를 따라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죠. 다만 그 당시에 아리마대 요셉이나 마리아 등 세 명의 여자들은 방향이 눈에 보이는 이쪽 방향이 아니고 저쪽 방향, 예수님의 무덤이 있는 쪽이 이게 바로 진실이 있는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무덤에 확실하게 넣었는데 여기 47절에, “때에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 둔 곳을 보았더라” 확실하게 최종적인 증인은 뭡니까? 아까 교류 방향에서 예수님은 확실하게 죽었더라. “예수님은 확실하게 죽었다.” 같은 말은 “나는 확실하게 이미 죽었다.” 같은 말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 세상의 나를 포기했기 때문에. 이 세상에 있는 나를 포기하고 육신은 여기 있지만 나의 ‘나’는 이미 예수님의 죽음 쪽에 내가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확실하게 죽었다는 말은 내가 확실하게 죽었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확실하게 죽었다는 방향이 끝입니까? 그 뒤에 빈 무덤 나오죠. 안식일 후에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보니까 무덤이 비어 있잖아요. 그러니까 방향이 저주 방향에서 도로 부활의 방향으로 나오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뭡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같은 말이 “나는 확실하게 살았다.”가 되는 겁니다.

성령이 있으면 이미 산 사람이에요. 같은 말이 뭐냐 하면 성령이 없으면 그 사람은 죽어가는 것이 아니고 이미 죽은 자에요. 인간은 늙어가는 게 아니고 이미 늙은 거예요. 이미 죽은 거예요. 죽어가는 게 아닙니다. 이미 죽은 거고 그걸 반대로 바꾸면 이미 성령이 있는 사람은 살아가는 자가 부활되어 가는 자가 아니라 이미 산 자에요. 첫째 부활이죠. 이미 산 자, 부활된 자가 돼요. 둘째 부활은 남아있지만.

둘째 부활은 뭐냐 하면 옷 갈아입는 시간이에요, 옷 갈아입는 시간. 흙에서 영적으로 옷 갈아입는 시간. 그걸 어떻게 아느냐. 예수님 보세요. 확실하게 시체가 들어갔는데 사흘 뒤에 여기 확실하게 시체가 없어요. 그 시체가 살아났어요. 기절초풍할 지경이죠. 예수님보고 기절초풍하지 말고 저와 여러분 자신보고 기절초풍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이야기를 내가 믿다니. 이건 내가 기절초풍할 일입니다. 제목 .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거짓과 조작과 오인과 가짜만이 있는 세계인 것을 저희들이 모르고 거기서 남한테 출세했노라, 잘났노라, 괜찮은 사람으로 분류받기를 원했던 저희들입니다. 정말 사람의 능력으로 믿을 수 없는 기절초풍할 이 내용을 저희들이 담대하고 과감하고 자신만만하게 자랑스러워하면서 십자가만 증거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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