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201127a 마가복음15장 40-41절(나 대신에)-이 근호 목사
광주강의20201127a 마가복음15장 40-41절(나 대신에)-이 근호 목사
마가복음 15장 40절-41절 말씀입니다.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는데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 이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좇아 섬기던 자요 또 이외에도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자가 많이 있었더라”
예수님을 십자가 처형시킨 주도세력들은 전부다 남성들이겠죠. 남성들은 율법에 의해서 권력을 독점하고 있었고 율법의 세계 안에서 여성의 설 자리는 없습니다. 그래서 거의 남성들이 주도해서 벌인 예수님의 처형 현장 중심부에서 빠져 있는 사람, 이것을 주변부라고 하는데 주변부는 중심부와 대비가 되겠죠. 주변부, 아웃사이더라 할 수 있는데. 그 중심부에 있는 사람들이 갖다버린 분이 있죠. 중심부에서 “꺼져라”하는 식으로 처리한 겁니다.
유대사회가 이렇게 있다면 여기(가운데) 중심부, 핵심부가 있겠죠. 핵심부 주변에 주변부가 있는데 성전 자체도 그런 구분이 있어요. 여성의 뜰, 남성의 뜰, 이스라엘의 뜰, 제사장의 뜰 이렇게 구분되어 있습니다. 핵심부에서 최종 처리해서 예수님을 떨궈 내버린 겁니다. 그럼 이 핵심부는 예수님을 제거한 세력권이 되겠죠, 세력자들이 되겠죠.
여기(핵심부)에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이 다가서고 있습니다. 여성들이 다가설 때에 그 여성들이 뭐를 생각해서 다가섰느냐. 두 개의 중심부를 생각하는 겁니다. 현재 실권을 갖고 있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거기에서 정치적으로 밀려버린 살해당한 예수님. 여기에 여성들이 모여 있습니다. 주변부가 이렇게(예수님께로) 가는 거예요.
이렇게 가게 되면 여기(중심부)는 권력이 있기 때문에 권력으로 장악되어 있습니다. 그럼 중심부에서 떨궈져나간 예수님은 권력 제로, 권력이 전혀 없는 분이 되겠습니다. 권력이 없으니까 이 주변부에 있는 여성들이 권력 없는 자에게 쉽게 다가설 수 있겠죠. 자기도 주변부니까, 권력에서 멀리 있는 위치니까 뭔가 통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주변부로 밀린 본인들이나 주변부에서 아예 퇴출당한 예수님의 공통점은 기존의 이 세상 권력으로부터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는 자들이라는 그런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성들이 예수님께 가까이 갔다는 이 이야기를 성경에서 이렇게 기록하시는 그 이유가 뭐냐. 그것은 기존의 이런 세상, 기존의 이 세상에서는 더 살아도 소용없다. 이 세상에서는 계속 살아봐야 의미 없다. 소용없다는 것이 확연하게 드러난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중심부로부터 배척받을 때 고난 받았죠.
기존의 중심부, 주변부로 굳어져 있는 이 세상에서는 더 이상 희망 같은 것은 없는 거죠. 왜냐하면 막달라 마리아와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 이들은 갈릴리부터 따라왔던 사람들이에요. 그러면 예수님이 잘렸다는 말은, 예수님이 떠나고 난 뒤에 본인들이 이 세상에 남아 있을 이유가 더 이상 없죠. 더 살아도 소용없는 겁니다.
예수님이 잘릴 때 우리는 이걸 고난이라 하잖아요, 고난. 그런데 주님께서는 십자가라는 자체가 권력이 없으니까 텅 빈 공백의 상태이고 세상 사람으로부터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그 빈자리를 여성들은 찾아가고 있다는 것, 이것은 결국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하느냐 하면 “자아의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느냐.”
인간의 자아는, 자아를 뚫으려고 한다면 자아는 자꾸 주춤주춤 물러가기 때문에 자아를 뚫을 수가 없어요. 자아를 뚫었다고 했지만 이미 자아가 뚫는 그 행위로 말미암아 주춤 뒤로 물러가있기 때문에 처음에 자아가 있던 지점은 뚫었지만 그 지점에 가니까 자아는 저만치 또 물러서가지고 “여기까지 뚫어야 뚫은 거야”라고 자꾸 부르는 것 같죠.
그러니 인간의 자아는 뚫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뚫리지 않지만 인간들이 궁금해 하는 것은 자아가 뚫고 나면 거기에 어떤 세계가 기다리고 있는가, 그게 이제 궁금한 거예요. 내가 없는 세계. 이 자아가 ‘나’거든요. 내가 없는 세계에 무슨 세계가 펼쳐져 있을까. 이것이 궁금하다는 것은 이 문제 해결 안 되면 백날 자아들이 웅성거리는 세계, 자아들이 집단으로 모여서 코로나 걸리는 이 세계에서 더 살아도 아무 의미도 없고 소용도 없는 거죠. 해답이 없죠.
그런데 갈릴리에 있는 여인들은 해답이 있을 수 있다는 어떤 낌새를 얻은 거예요. 왜냐하면 이 세계에서 추방이 됐다는 말은 이 분이 이 세상의 끝, 그 뒤에도 계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감지한 겁니다. 이 세상에서 추방되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받아줄 수 없기 때문에, 어쩌면 이 세상에서 받아줄 수 없다는 그 이유 때문에 이 세상의 끝자락 그 너머에 있는 또 다른 세계의 시작일 수가 있는 겁니다. 또 다른 세계의 시작.
개인이 “이 자아의 끝을 보고 싶다. 자아를 뚫고 가면 뭐가 있을까” 하는 것은 다시 말해서 “제대로 나에 대해서 알고 싶다.” 이게 같은 말이에요. 내 뒤에 뭐가 있고, 내 앞에는 뭐가 있다. 앞에는 우리가 알잖아요, 우리가 경험한 이 세상에 대해서 아는데 내가 뚫렸을 때, 더 쉽게 말해서 내가 죽은 다음에 나는 어느 세계에 도달되어 있을 거냐. 라는 것까지 알아줘야 제대로 나를 안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내가 뚫어져서 관통되어서 내가 하나의 칸막이처럼 되어있는데 이게 문풍지처럼 찢어지고 난 뒤에 어떤 세계가 있다면, 그 세계는 나를 지금 있게 한, 나를 여기 있게 만든 세계인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 세계를 마저 알아야 지금 내가 제대로 나에 대해서 전부를 안다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아이고, 갈 때까지 가보자. 이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 너무 무책임한 짓이죠, 갈 때까지 가보자 하는 것은.
칠십을 살고, 여기 팔십 가까이 사신 분도 계시지만, 팔십을 살고 구십을 살아봐야...구십 살이 됐다 칩시다. 그러면 구십 살 되어서 물어보는 거예요. 테스 형, 구십까지 사니 어떻습니까? 나도 모르지. 구십 한 살 안 되었으니까 나도 모르지. 그럼 구십 한 살 되면 테스 형 아십니까. 내가 안 죽어봐서 모르지. 죽어봤을 때 어떻게 되는가. 그런 질문을 근원적으로 인간은 하게 되어 있는 겁니다.
인간들이 살아있는, 이 중심부/주변부 이러한 구조는 산 사람들의 세계 아닙니까. 산 사람들의 세계에서 특이하게 배척받았다. 죽음에 넘기웠을 때에 그 분이 죽었으니까 그 분의 자리는 빈 자리가 되죠. 공백이죠. 공백의 자리, 고난 받고 공백의 자리에 갔을 때 만약에 여성들이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서 애틋해하면서 그분의 죽으심을 잊지 못하고 그 현장까지 갔다는 말은 이것은 단순히 고난의 문제가 아니라 고난보다 더 중요한 게 기다리고 있다는 겁니다.
고난보다 더 중요한 게 뭐냐. 고난이 문제가 아니고 바로 낯섦, 생소함. 생소하다. 생소한 세계에요, 상상도 못한 세계. 여기 중심부에 있는 사람이 다 똑똑한 사람들이거든요. 이 사람들이 다 서울 법대 나온 사람들이에요. 인간이 아는 지식을 농축해서 누적해서 다 알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런 사람들의 판단이라는 것은 인간을 대표하는 판단이죠. 인간의 지혜를 대표하는 판단이에요. 그 판단에 의해서 추방되었을 때에 인간의 대표, 이것은 자아의 대표죠, 자아를 대표하는 이것들이 추방했을 때 비로소 그것은 자아의 끝이 추방된 예수님의 죽음 그 자체에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갈릴리에서 따라오던 여인들이 끝까지 예수님의 죽음 자리까지 따라가고 있는 겁니다.
놀이동산에 가면 귀신의 집이라는 게 있죠. 귀신의 집이라는 걸 저는 돈이 아까워서 안 가봤습니다만, 귀신의 집이라는 게 있답니다, 놀이동산에. 사람들이 귀신의 집 갈 때에 동떨어진 세계죠. 번잡스러운, 바깥의 복잡한 그런 세계보다도 귀신의 집 가면 산 사람이 아니고 죽은 귀신이 나오니까 동떨어진 세계잖아요. 그 동떨어진 세계에서 이 바깥에 있는 거리에 애들, 풍선 들고 하는 그 놀이동산의 복잡한 큰 대로변에서 귀신의 집 안에 들어가게 되면 이쪽(귀신의 집 바깥) 세계는 산 사람의 세계거든요. 산 사람의 세계에서 1,2,... 숫자가 500명 왔다면 한 500명, 1500명 오는데 이 귀신의 집에서는 이 숫자가 다 의미가 없어집니다.
지금 여기 여성이 몇 명입니까. 마리아와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또 살로메 세 명이잖아요, 세 명. 이 세 명이 여기 귀신의 집에 들어가 버리면 3이라는 자체가 의미를 상실하고 전부다 한 세트가 돼요, 한 세트가 됩니다. 그러면 놀이동산의 귀신의 집, 죽은 자의 집이죠, 죽은 자의 세계. 산 사람 세계에서 보는 프레임, 상당히 중요하거든요, 프레임, 액자, 틀, 이 프레임을 이쪽 귀신의 집에서는 산 사람끼리의 프레임은 다 버려야 돼요. 새로운 프레임을 부여받는 겁니다, 새로운 프레임을.
그러니 이 귀신의 집은 세상의 마지막 페이지, 이 세상의 마지막 페이지죠. 마지막 페이지에서 그 시대에 가장 배제당하는 여성들이 이 마지막 페이지로 다가서고 있어요. 그러면 이 여성들이 가는 곳으로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뒤따라가는 겁니다. 귀신의 집으로. 개개인 자아라는 것은 다 희석되고 소멸되는 세계. 여성들이 인도하는 거예요. 그 시대에 십자가의 사건으로 우르르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선도해서 지금 앞장세워 가는 거예요.
여성들은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기존의 권력을 탐하지 않기 때문에 권세를 잡아서 편하게 살겠다는 그런 생각이 없고 나의 한도, 자아의 한도, 내 뒤에 내가 끊어지고 내가 마지막 페이지라면 내 마지막 페이지 그 너머에 뭐가 있을까, 그것이 궁금해서 예수님 죽으시는 그 현장으로 접근해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잖아요. 돌아가실 때 여성들이 있었다는 말은, 여성들 입장에서 십자가에 다가서는 것이 되지만 우리 주님 입장에서는 십자가의 의미가 여성들을 통해서 일부 개방되었다고 할 수 있어요. 여성들의 움직임을 통해서 십자가가 고정된 어떤 지점만의 십자가, 한 시점의 사건으로의 십자가에서 벗어나서 이 여성들과 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자들에게 십자가가 개방되었다. 자아의 끝자락, 그 뒤의 세계를 주님 쪽에서 허용하셨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특히 이 막달라 마리아 같은 경우에 이 막달라 마리아가 전에 어떤 사람이었느냐 하면 누가복음 8장 2절에 보면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 이렇게 되어 있어요. 막달라 마리아. 제 이스라엘 방문 사진에 보면 갈릴리 호숫가에 영어로 ‘막달라’ 간판 커다랗게 지어 놨어요. 막달라 마리아가 여기서 살았다고 되어있어요. 아주 유명하죠. 이스라엘에서는 장사 아주 잘하고 있죠.
그 일곱 귀신 나간 막달라 마리아. 귀신의 집이 고향인 막달라 마리아가 귀신 들렸는데 예수님께 고침을 받았잖아요. 그렇죠? 그럼 이 세상을 멀쩡하다고 생각하고 제가 놀이동산의 귀신의 집이라고 이렇게 음침한 곳으로 설정했지만 따지고 보게 되면 멀쩡하다고 하는 이쪽이 귀신의 집이 되고 귀신에서 풀려난 막달라 마리아가 앞장서서 뭔가 우리 성경 보는 사람을 데리고 들어가는 곳, 그 곳은 멀쩡하다는 사람은 도저히 갈 수 없는 곳. 권세와 권력에 대해서 아직도 미련이 있는 사람은 갈 수 없는 그 곳, 그 곳으로 데려가는 겁니다.
권세와 권력은 인간의 자아성을 더욱더 강화시키고 돈독히 하는 겁니다. 더 단단하게 만들죠. 인간의 자아를 설명하는 가운데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하나는 뭐냐 하면 과거의 집합체. 자아라 하는 것은 과거의 집합체 또는 과거 기억의 집합체, 이런 식으로 설명되고요. 그리고 경제적 입장에서는 'property'라 해서 소유 또는 소유성, 소유된 재물.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내 재산이 없으면 자아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정신적으로 보면 자아라 하는 것은 과거 기억의 집합체가 자아에요. 내가 살아오면서 기억나는 것 있잖아요. 기억나는 것을 다 모아놓으면 그게 자아가 되는 겁니다. 만약 차사고 나서 두뇌의 일부가 다쳐서 갑자기 기억이 날아가 버리면 그 가운데 있었던 자아가 다 날아가 버리죠.
그래서 자아라 하는 것은 과거의 기억의 집합체, 모아놓은 책이라고 볼 수 있는데 결국 과거의 집합체, 기억이라 하는 것은 자아가 실체가 아니라는 뜻이죠. 기억이니까 실체가 아니고 그냥 이미지에 불과한 거예요. 이미지에 불과하지만 이미지가 우리와 무관한 게 아니에요. 옛날 내가 살던 동네에 가면 갑자기 어릴 때 내 모습이 생각나고 기억나지 않았던 장소들이, 그 때 뛰놀던 곳이, 기억이니까, 기억의 다발이니까, 기억의 다발이 적당하네요, 기억의 다발이 자아니까 다시 ‘나’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 겁니다.
기억의 다발이니까 자아는 다른 타인과 일치됩니까, 일치가 되지 않습니까? 절대로 일치되지 않죠. 본인만의 기억이기 때문에 일치되지 않아요. 이거 상당히 중요합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예수님을 믿는다 할 때 예수 믿는다는 것이 결국 뭐냐 하면 교회 다니면서 그 때 일곱 살 때 예수의 기억, 일곱 살 때 들었던 설교, 아홉 살 때 들었던 것, 이런 기억들이 집대성되어서 예수님이라고 규정해버리거든요. 그러니 이것은 나 혼자 알고 있는 예수기 때문에 이 예수는 ‘나만의 예수’가 되는 거예요.
한번 적어볼게요. 나만의 예수. 나만의 예수니까 다른 말로 하면 ‘예수는 나의 것’이 되죠. 예수는 나의 것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엉터리 예수죠. “너희는 예수님의 것이다” 할 때 맞습니까, 틀렸습니까? 이 말이 맞아요, 틀려요? 이게 틀린 말입니다. 정답은 뭐냐 하면 “예수님의 것은 예수님의 것이다” 이게 정답이거든요. 아니 몸이고 뭐고 내 것이 없는데 어떻게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말이죠.
2005년도 8월 22일 여기 광주강의에 나왔던 녹취된 내용이에요. 아까 책상 앉아서 보니까 이게 나왔데요. 고린도전서 강의할 때 나온 거예요. 너희는 예수의 것이 되어버리면 예수는 나의 것이 되어버려요. 기억 속에, 내가 일곱 살 때부터 주일학교 갔는데 주일학교 때 들었던 선생님, 목사님 설교, 거기서 들었던 이미지, 예수라는 이미지를 긁어모아서 예수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가상 이미지가 되고 실체는 누가 돼요? 내가 실체가 되거든요. 그러니까 이것은 나에게서 나왔던 이미지, 내가 투사한 이미지, 내가 가상으로 만들어놓은 나의 이미지가 되는 거예요. 나의 이미지가 예수가 되면 이것은 완전히 엉터리죠.
물론 오늘 본문에 나온 여성들도 갈릴리에서부터 따라다녔으니까 자기가 알고 있는, 기억 속에 있는 예수님을 따라갈 수가 있어요. 있는데 예수님을 만나러 간 게 아니고 예수님의 무얼 만납니까? 예수님의 죽음을 만나는 거예요. 예수님이 죽었다는 사건을 만나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인지.
산 사람이 자기가 죽지 않으면서 산 채로 예수님의 세계를 만난다는 게, 이게 가능합니까?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거기 글로바라는 사람이 있어요. 24장 18절에 글로바가 있는데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면서 부활하신 예수님과 대화했던 두 사람 중 한 사람 이름이 글로바라는 거예요. 이 글로바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만날 때 지금 죽은 채로 만났습니까, 산 채로 만났습니까? 산 채로 만나죠. 산 채로 죽음의 세계를 만나는 거예요.
보통 죽어야 죽음의 세계를 만나잖아요. 그러면 이미 그 사람은 구원의 기회, 시효가 끝나버렸어요. 죽고 난 뒤에는 심판이 있기 때문에 그 때는 구원이라는 게 없어요. 구원이라는 것은 산 채로 주님을 만나야 이게 구원이 되는 겁니다, 산 채로. 그래서 주님께서는 성령을 미리 주는 거예요, 우리 죽기 전에. 죽기 전에 성령주시는 이유가.
마가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이 운명하셨잖아요. 시작이 뭐냐 하면 여자들이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현장에 가서 우리가 흔히 아는 이 세상에서 감당이 안 되어서 강제로 추방시킨 그 분의 죽음을 보러, 그 분의 살아있음을 보는 게 아니고 그 분의 죽음을 보러 가는 거예요. 이런 마음의 자세가 장차 성도에게 성령이 왔을 때에 마음 자세의 시작이 되는 겁니다. 죽었던 예수님이 진짜 지금 나를 있게 하는 나의 세계라면 지금 눈에 보이는 이 세계는 예수님의 세계에 비해서 죽음의 세계가 되는 거예요.
살아있으면서 예수님의 죽음을 접할 수 있다는 이 아이디어를, 이런 생각을 세 명의 여성들이 하고 있는 겁니다. 죽은 예수를 만나는 거예요. 나중에 사도바울의 복음에 의하면 죽은 하나님이죠. 죽은 하나님이 되지만 이 여성들은 아직 성령 안 받았으니까 거기까지는 모르고 어째든 간에 세상이 감당 못할 분이 죽으셨다면 그 분이 가신 그 죽음의 세계가 오늘날 우리를 있게 한 진짜 세계라는 겁니다, 이 세 명의 여인에 의하면. 진짜 세계는 살아서 권력 쥐고 까부는 이 세계가 아니라. 주변부에 있는 아무런 힘이 없는 그 여인이 기존의 사람들은 그렇게 예수님을 미워했지만 자기는 권력이 없으니까, 소유한 게 없으니까 굳이 예수님을 미워할 이유 없죠.
두 번째, property, 인간이 소유가 있을 때 자아가 있는 겁니다. 소유가 그 자아를 대변해주는 거예요. 아무것도 가지지 않으면 자아라는 것이 살아도 죽은 모습이거든요, 이 세상에서. 그래서 소유, 소유물, 소유재산 이것이 자아를 대표한다면 생산과 소비의 균형이 이 세상 인간들의 삶의 방식입니다. 생산과 소비, 수입과 지출을 적당하게 균형 맞추는 것. 월 300들어오면 200만원 쓰고 100만원 저축하고, 있잖아요. 균형을 맞추는 거예요. 수입은 100만원인데 200만원 쓰고 이러면 안 되잖아요. property, 자기 소유가 고갈되면 내가 죽은 자가 되잖아요.
인간들은 소유, 힘, 권세, 이것이 있어줘야 자아가 생성되는 겁니다. 하나의 자아는 정신적으로 기억의 다발을 자아라 하고 또 하나는 경제적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실제적으로 자아라 하는 것은 소유가 있어야 돼요.
그럼 여러분들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이 여성들은 균형 잡힌 삶, 생산과 소비가 유지되는 균형 잡힌 삶일까요, 아니면 화목일까요? 화목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하심과 거기에 대한 평화. 진노하심에 대한 해결책이 화목이잖아요. 로마서 3장에 나오죠.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되었다 했죠. 그런데 오늘날 교회 다니는 사람이나 안 다니는 사람이나 전부다 균형 잡힌 삶을 원해요. 이것은 이 여성들처럼 자아의 끝을 보는 게 아니고 그냥 자아만 붙들고 있는 거예요, 자아만. 계속 자아만 붙들고 있는 거예요. 이러니 참 어리석은 거죠.
그 자아가 뚫렸을 때에 그 뒤에 어떤 세계가 있느냐는 것은 귀신 들렸다가 풀려나온 막달라 마리아의 주도 하에 움직이는 이 여성들은, 자아는 1,2,3,4...가 되잖아요, 그런데 주님의 죽음 앞에서는 ‘1,2,3 우리는 세 명 갔다’가 의미 없어요. 새로운 프레임, 그 죽음 앞에 우리 세 쪽은 전부다 하나가 돼요. 하나가 된다고요, 동질이 돼요, 동질이.
네가 어떻게 살았든 너는 어느 동네 살았고 네 고향이 어디든 관계없이 주님의 죽으심 앞에서는 전부다 우리는 귀신 들렸다가 귀신에서 떠난, 구원받은 그러한 새로운 동질, 하나의 동질이 된다고요. 너, 나의 구분, 우리가 설정했던 나와 남이라는 구분 자체가 의미가 없는 겁니다.
이걸 이렇게 얘기할 수 있어요. “복음이 빠진 상태에서의 분류는 의미 없다.” 이 말입니다. 복음이 빠진 상태에서 너는 북한 사람이냐 남한 사람이냐, 너는 좌파냐 우파냐 이 자체 분류가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너는 선진국이냐 후진국이냐, 의미가 없어요, 복음이 빠진 상태에서는. 복음이란 예수님의 죽으심입니다.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이 모두는, 죽음에 합류하는 자들은 이미 분류 당할 이유가 없어요. 그들은 자기의 원천인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한 사람이기 때문에. 만난 사람이기 때문에.
복음이 빠진 상태에서는 분류에 자꾸 신경 쓰는 거예요. 우리가 신앙생활하고 이렇게 복음으로 살지만 복음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면... 복음에 대한 관심이 떨어질 때가 있잖아요. 사실 성도는 그래서는 안 되는데 간혹 복음이 생각 안 날 때가 있어요. 목욕탕 들어갔는데 갑자기 물이 뜨거울 때, 이럴 때 “아이 뜨거워라.” 이러지, “복음이 뜨거워라. 복음이 뜨겁게 하셨다.” 그런 생각 안 든다고요. 그것은 한 5초 뒤에 “아, 주님이 뜨겁게 하셨구나.” 이렇게 되지 처음에는 “아이고 뜨거워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고구마 삶았는데 왜 이리 맛이 없어.” 이것은 복음 생각 안 한거잖아요.
그래서 기대가 죄죠. 뭔가 기대하면 죄가 돼요. 자꾸 마귀는 관심사를 복음을 빼버리는 쪽으로 관심을 돌려버려요. 그러면 사람들은 복음이 빠진 상태에서는 뭘 하느냐 하면 분류를 해요. 내가 선한 쪽인지, 내가 지금 제대로 잘 살고 있는 쪽에 속하는지, 내가 훌륭한지, 내가 악한 고기인지 선한 고기인지, 양인지 염소인지 자꾸 본인을 분류하려고 하는데 이것은 자아가 구멍 뚫린 게 아니고, 자아 뒤편에 가있는 것이 아니고, 여전히 자아에 목매는, 자아를 어떻게 처리해볼까, 자아를 제대로 어떻게 간수해볼까 하는 자기 자아 간수에 몰두하는 사람이에요. 이것은 아까 얘기한 자기의 기억이, 쌓아온 평생이 분류 당하고 또 자기가 분류 당한대로 분류해왔던 그런 인생을 보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분류하는 세계가 친숙한 세계죠. 그런데 자아가 구멍 뚫린 세계는 어떤 세계입니까. 낯섦의 세계. 아주 낯설어요. 친숙한 세계에서 낯선 세계로 들어가려고 하니까 벌벌 떨죠. 벌벌 떤다고요. “Dangerous~" 마이클잭슨 춤추는 것처럼 자꾸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위험이라는 말 자체가 뭐가 잘못되었느냐 하면 반대로 쓰고 있어요. 내가 망치니까 위험한 게 아니에요, 그것은! 나는 당연히 망치기 때문에 내가 망치는 것을 가지고 dangerous, 위험하다고 하면 안돼요. 주님 세계에서 내가 이런데, 복음 빠진 이 세상에서 좋게, 괜찮게 분류된 자아로 규정하려는 이게 위험한 거죠.
이걸 아주 쉽게 이해하려고 하면, 저는 제목으로 괜찮지 싶은데요, 오늘 제목으로 한다는 말이 아니고, . 잘 만들어진 수영장 말고 계곡의 수영장, 지리산 계곡. 무허가 상인들이 지 마음대로 수영장 만들어놓고 구청의 허락도 없이 평상 펴놓고 돈 받아먹고 백숙 팔아먹고 그런 거 있잖아요, 계곡의 수영장. 계곡의 수영장은 어설프게 비닐로 떡 막아놓고 아이들 빠지지 말라고 한 1m50cm 해놓고 계곡에다가 간이 수영장 만들어 놓는 거예요. 간이 수영장에 왔을 때 사람들은 자기 애들 들어가고 자기도 들어가고 해가지고 돈 한 만원 주고 백숙도 먹고 여기서 논다 이 말이죠.
그런데 간이 수영장에 있으면서 이 물이 어디서 왔고 어디로 흘러 들어가는지는 아무도 관심두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이것(계곡의 수영장)을 가지고 현실이라고 하죠. 현실은 계곡의 수영장 같은 거예요. 이 현실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현실이 어떻게 나중에 망가지는지 아무 관심이 없어요. 그저 이 현실 속에서 자아의 집단에서 권력 찾기, 돈 찾기에 따라서 인간을 분류시키고 못난 놈, 인생 잘난 놈 이렇게 분류하는데 이런 식으로 살아온 거예요.
막달라 마리아가 이 속에서 뭘 느꼈느냐 하면 이게 바로 귀신들린 존재다. 막달라 마리아 입장에서는 이게 귀신들린 존재에요. 자기가 이런 생활을 해봤기 때문에. 귀신으로부터 놓였기 때문에 갈릴리부터 예수님을 따라다녔잖아요. 그러니까 자기 과거가 보이는 거예요, 계곡의 수영장에서. 이게 어디서 흘러들어옵니까? 바로 예수님께로부터 흘러 들어와서 예수님의 심판대로 빠지는 거예요. 이 수영장 안의 내부가 얼마나 오인되었으면, 모든 게 착각 속에 있었으면 예수님을 감당 못하는 거예요. 이 현실이 다 인줄 알고.
그래서 계곡의 수영장, 이 현실이요. 수영장을 현실이라고 할 때 소위 일반 사람들은 여기서 돈 벌고 재미나게 우리 아이들 행복하고 우리 가정이 행복하면 최고지 뭐. 나는 임영웅이나 들을란다. 뭐 이래가지고 살면 그만이지만 소위 공부깨나 했던 철학자들은 여기서 뭘 보느냐 하면 ‘시간의 흐름’을 알아요. 왜냐하면 어린아이가 여기서 한 팔십, 구십 살면 나중에 죽죠. 어린애가 죽는다는 말은 그동안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은 시간을 당해내지 못하는 겁니다. 시간에 다 쭈글쭈글해지는 거예요.
그래서 소위 철학자들은 ‘시간의 멈춤’을 진리라고 하는 겁니다. 시간이 멈춰졌다고 생각했을 때, 그 때 진리가 나온다는 거예요. 예를 들면 SF드라마 같은데 보면 나와요. 전지현이 미남배우와 스위스마을에서 촬영한 거 있는데, 400년 전의 어떤 남자를 만났을 때 거기서 둘이 만나는 것만 움직이고 나머지 등장인물들은 전부다 정지가 되는, stop되는 장면이 있잖아요. 라는 그 드라마 보면 만나는 순간은 모든 게 정지되고 그것만 보여요.
그래서 이 철학자들은 시간이 정지되어 있는 그 진리를 전하려고 하는 겁니다. 모든 걸 stop시키고 모든 원인의 원인이 되는, 궁극적인,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는 그 진리를 찾으려고 애를 쓰는 거예요, 이 사람들이. 과학자들도 마찬가지고. 원천의 원천. 그런데 문제는 어떤 특정, 영원한 것을 모델로 정했으면 모델이 가만히 있으면 그걸 그림으로 그릴 수 있잖아요. 그런데 모델이 막 뛰어다닌다면? 진리를 얻고자 하는 모든 수고가 헛수고가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양심이라는 것, 도덕이라는 것, 칸트는 이걸 진리라 여기고 이걸 찾으려고 했거든요. 인간 속에 양심이 있고 인간 속에 도덕이 있다. 인간 속에 별처럼 영원한 게 있다. 그런데 이게 시대에 따라서 양심이고 도덕이고 윤리고 다 변해요. 시대에 따라서 문화에 따라서 문명에 따라서 환경에 따라서.
그래서 요즘에는 인간의 자아를 영원한 것으로 하려 하는데 이 자아를 정신분석학에서 조사해보니까 ‘미지의 a’라고 하는데 미지의 자아가 따로 있고 앞에 있는 사람들에게 내보이는 것은 가짜 자아인데 이 가짜 자아를 상상계라 합니다. 내가 상상한 이미지를 남들에게 자꾸 보이는 것과 동반해서 본인도 모르는 진짜를 자꾸 뒤로 빼는 거예요. 빼면서 이 자아가 뭔지를 본인도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럼 과학자들은 뭐냐. 과학자들은 인간의 모든 진리는 두뇌 세포의 활동이라고 규정하는 겁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모든 이미지나 형상, 이 모든 것은 인간의 두뇌에서 나왔다. 그러면 내가 슬프다. 슬프려고 하면 두뇌에다가 약물 주입하면 기쁘다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과학자들이 이걸 연구하면서 자기들도 나가 떨어졌어요. 왜냐하면 왜 이 약물이 슬픈 감정을 기쁘게 하는지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여러 가지 약품 중 어느 하나가 딱 맞아떨어지면 되는데 왜 그런지를 모르겠는 거예요, 왜 그런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모르겠다는 것을 양자물리학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모든 것은 관찰하는 시선이 진리 사태를 망쳤다는 겁니다. “한번 볼까” 하고 보는 순간 관찰되는 대상의 입자가 “나 너네 말 안 들어. 삐쳤어.” 이게 불확정성 원리에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 “요게 입자야, 파동이야?” 보는 순간 입자 보여주고 싶으면 입자 보여주고 파동 보여주고 싶으면 파동 보여주니까 도대체 불확정. 진리는 영원히 미궁에 빠진 겁니다.
아, 그냥 써먹기만 하자. 써먹기만 하는데 진리에 대해서는 모르겠다 라고 할 인간들이 아닙니다. 이렇게 모르잖아요. 알 때까지 계속 가는 거예요. 이게 인간들이 일곱 귀신 들렸어요. 도대체 자아가 뭔지를 계속 파보는 거예요. 파보면 악마가 만든 자아가 계속 뒤로 물러가면서 완전히 귀신의 집이에요. “이리로 오너라~이리로 오너라” 네가 아무리 공부하면 할수록 파악이 되지 않습니다. 참 이런 경우가... 복음을 파헤치겠다고, 십자가가 뭔지 연구하겠다고 성경 들여다보는 사람들, 백날 들여다봐도 알겠다는 본인이 살아있는 한 계속해서 진리는 그들의 구미를 맞춰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전에 개혁주의 논문 할 때 그 때 그 논문의 제일 앞부분 서론, 영문 초록 한번 보세요. 성경은 우리가 진리에 다가가는 것을 막습니다. 거기에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분노한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오목사님도 같이 분노했고. 초록 올려놨어요, 십자가마을에 제가 올려놨죠. 하나님은 당신들이 접근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이것은 뭐냐. 주님 쪽에서 흘러들어온 것이 없으면 인간이 이성적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은 진리를 내놓지 않습니다. 보여주지 않습니다. 일곱 귀신 들렸다가 일곱 귀신이 나간 자만이 그리스도의 가치를 아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가치를.
마르크스가 하는 이야기인데, 인간이 하는 모든 행동은 교환행위이다. 무엇을 교환하느냐 하면 나를 가치 있게 하도록 항상 바꿔치기하는 교환의 세월, 이게 뭐냐 하면 인생입니다. 저 남자하고 사는 것 말고 갈아탈까. 내가 저 남자말고 다른 남자하고 있으면 더 가치 있을 건데. 항상 교체를 생각하는 거예요. 바꿔치기를 생각하는 거예요, 항상.
시장에 간다. 시장에 왜 갑니까? 바꿔치기하려고 가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내가 농기구 만드는 작은 회사를 만든다. 농기구를 만드는 작은 회사해서 돈을 벌죠. 그 돈 가지고 마트에 가서 만두를 산다. 이게 뭡니까? 뭐 한 거예요? 교환하는 거예요. 집에서 삽 뜯어먹으려고 하면 이빨 나가서 안 되잖아요. 삽 뜯어먹어도 배도 안 부르고 굶어죽죠. 그러니까 삽을 마트에 가서 만두나 쌀로 바꾸죠. 이게 교환이에요.
인간은 늘 바꿔칠 준비하는 겁니다. 이게 수요일에 얘기한 것처럼, 담요 펴놓고 화투패가 돌아가는데 어떻게 거기서 발을 뺍니까. 어떻게 발을 빼요. 삼성전자 빼가지고 LG전자로 바꿀까. 맨날 이 생각하고 있는데요. 주식 이거해서 이걸로 바꾸고. 1% 정기예금 빼서 펀드 넣을까. 맨날 이런 생각하잖아요. 포트폴리오, 여러 가지 운빨이 분산되면 어느 하나도 폭삭 망하는 경우는 없다, 이런 아이디어. 전부다 누굴 가치 있게 한다? 나를 가치 있게 해서 바꿔치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어느 정도 가치 있다는 것은 고정되어 있어요, 영원히 미지입니까? 영원히 본인을 모르는 거예요. 아무리 죽을 둥 살 둥 살아보려고 해도 내가 왜 살아야 되는지, 자기 가치를 모른다고요. 이 가치를 어디서 바꾸느냐 하면 같이 살아있는 인간들끼리 남의 손에 있는 괜찮은 것으로 바꾸는 겁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하고 두 명의 여인은 무엇하고 바꿉니까? 자아와 뭐와 바꿔요? 예수님의 죽음과 바꿔버리잖아요. 그것은 본인이 바꾼 게 아니에요. 십자가가 그 여인에게 흘러 들어와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더 이상 바꿀 필요도 없이 확정된 진리체제로. 진리체제는 예수님의 죽음 안에 있습니다. 그 죽음 안에 있는 것을, 이 세 명의 여인은 살아있는 채로 지금 예수님의 죽음, 자아의 원천을 계곡 수영장에 물 들어오는 그 장소에서 조심스럽게 다가서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보고 뒤에 따라오는 거예요. 코로나 이런 거 신경 쓰지 말고 코로나 걸렸다, 안 걸렸다 그런 분류하지 말고 아예 그런 분류조차 의미가 없는 십자가의 죽으심에 다가서는 겁니다. 산 채로 주님의 세계를 만나게 하는 것. 이게 지금 세 명의 여인이 우리에게 알리고 있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는 주변부이기 때문에 별로 기대하거나 할 필요 없죠. 이 세상은 전부다 오인의 세계거든요. 오늘 제목을 이걸로 할까. . 착각의 세계. 착각이라는 건 딴 얘기가 아니고 내가 어느 정도 가치 있는가에 대해서 우리는 매일같이 오인하고 있다. 내가 어느 정도 가치 있는 존재인가. 앞에 뭐가 붙어요? ‘내’가 붙죠. 이걸 십자가가 없애버립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