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마 21:18-21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
Re..마 21:18-21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
이름 : 이근호(IP:)
무화과 나무에 대한 저주
2005년 1월 2일본문 말씀: 마태복음 21:18-22
21:18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21:19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21:20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가로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21:2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것이요
21: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사람을 제쳐놓고 바로 바로 무화과 나무와 대화에 나서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도대체 우리 인간이 하나님에게 무엇인가 하는 점을 다시 생각게 합니다. 인간들의 머리 속에는 항상 다음과 같은 의식이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서만 일하신다. 인간을 비켜가서 일 하는 경우는 없다"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그동안 우리 인간들의 안일함입니다. 교회 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고 싶다면 보이는 인간이 일을 통해서 알 수 있다고 말입니다.
더구나 특별히 신성한 사명을 띠고 일하는 인간을 통해서는 하나님을 뜻을 제대로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잘못입니다. 이렇게 되면 성도 사이에도 계급이 발생되고 맙니다. 즉 특별한 사명을 입은 그룹과 그렇지 못한 그룹 사이에 차등이 생기고 맙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해서' 일하십니다. 즉 "네가 진정한 인간다움을 갖고 있느냐?"라고 추궁하시면서 일하십니다. 오늘 본문도 예외가 아닙니다. 멀쩡하다는 제자들을 제쳐놓고서 예수님은 무화과 나무에게 다가가십니다.
그리고 시장하니 열매를 내놓아라고 하십니다. 마치 사전에 예수님과 무화과 나무는 미리 알고 있는 사이처럼 보입니다. 서로가 모르는 사이가 아니라 서로가 아는 사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 관계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무화과 나무는 마땅히 주님을 섬겨야 될 임무같은 것이 주어져 있는 듯 합니다. 예수님께서 시장하다 싶으면 언제라도 열매를 맺어서 예수님께서 따먹기 좋은 상태로 유지해야 하는 역할을 담당해야만 하는 그런 입장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무화과 나무는 마침 예수님이 원하는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놀랍게도 당연하다는 식으로 예수님은 그 무화과 나무를 저주해 버리니 그 즉시로 무화과 나무는 말라 비틀어지고 말았습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제자들은 크게 당황할 수 밖에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화과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던 나무입니다. 예수님이 싫어서 과실을 일부로 안내어놓는 것이 아니라 아직 과실 맺을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과실이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들 같은 마땅히 지적 당할 상황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사정없이 저주하시는 행위를 보고 제자들은 무엇을 느끼겠습니까? 그것은 축복이나 저주란 인간 고유의 선택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인간들은 평소에 자신을 중립지역에다 둡니다. 그래서 축복 쪽에다 손을 대면 축복을 받고, 저주 쪽으로 나아가면 저주를 받는다는 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인간들에게 있어 무화과 나무가 받아버린 저주에 대해서 해석이 불가능합니다.
만약 그 무화과 나무가 우리 자신들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이보다 더 억울한 일이 또 있겠습니까? 일말의 말미로 없이 당장 저주받아 말라비틀어진 그 무화과 나무가 우리 자신들이라고 간주해도 과연 우리가 그런 예수님을 믿고, 이해하고 따르겠습니까?
인간들은, 선과 악에 관심을 표하지만 실은 선과 악 보다는 자신 몸에 유리하냐 불리하냐 하는 식으로 이 세상을 비집고 살아가고 행동합니다. 즉 어디까지나 자기 위주로 되돌아오는 식으로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이런 의식을 그대로 무화과 나무에다 적용시켜 보세요.
아마 주님으로부터 참으로 억울한 일을 당했다는 울분을 감출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편 1:5-6를 봅시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악인 아니면 의인, 의인 아니면 악인입니다. 결코 제 3의 영역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에게는 축복 아니면 저주, 저주 아니면 축복이지 결코 축복도 아니고 저주의 아닌 제 3의 중립 영역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도 모르고, 자기에게 주어진 축복을 신이 당연히 자신에게 축복주어야만 하는 것처럼 곡해하고 있는 겁니다. 제자들도 이런 사고방식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제자들 앞에서 예수님은 참으로 황당무계한 일을 벌리신 것입니다.
상대방의 인격이나 자존심이나 권리 같은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예수님 일방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열매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사정없이 저주해 버리는 일을 벌리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 인간들은 자력으로는 이런 예수님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이 드러납니다.
그 당시 제자들이나 오늘날 우리들이나 다같이 무화과 나무에 대해서 동정심을 보내고 싶은 심정입니다. 한순간에 예수님이 원하시는 열매가 맺히지 않았다고해서 자기 딴에 평생에 노력한 그 모든 것이 순식간에 저주스러운 몰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비참하게 망했느냐 하는 것도 저주이지만 극히 순식간에 무화과됨의 그 모든 것이 상실되어 버렸다는 점에서 그동안 스스로 무화과 되기 위해 애쓰고 노력해 왔던 것이 무의미하게 되어 버렸다는 점에서 저주의 강도는 극에 달합니다.
즉 자기가 되고 싶은 '자아상'을 따로 가질 자격이 애초부터 허락되지 않은 것이 피조물로서의 무화과 나무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무화과 나무의 신세를 예수님 앞에서 우리 신세로 수용할 수 있습니까? 만약 수용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기적 '신앙'이라는 기적을 받은 자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저주 강조는 곧 축복 강조입니다. 축복이란 이 땅에 마땅히 저주받아야 함을 전제로 한 상태에서의 축복입니다. 그러한 경우가 노아 홍수 이후에도 있었습니다. 노아의 세 아들 가운데서 두 아들은 자신들이 아버지의 은혜 아래 놓여 있음을 알았고 함이라는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주어지는 은혜성을 그는 망각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은혜를 잊어버린 자는 누구에게는 당연히 즉시로 저주가 주어져야 마땅한 법입니다. "너희들에게도 이런 믿음이 있다면 이런 저주를 해낼 수 있느니라"고 예수님은 나서시고 계십니다. 결국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이란 자기 자신을 침공해서 파괴시켜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자기 자신이 저주의 원인제공자임을 자인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의 어떤 점에 예수님이 원하시는 열매가 아닌가에 우리에 우리가 놓치면 안됩니다. 우리도 무화과 나무와 같은 꼴 납니다.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 하신 모든 일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무화과 나무를 저주했다고 한다면 그 저주가 동일하게 우리에게도 적용이 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굳이 구원하지 않더라도 여전히 예수님이 사랑의 하나님으로 믿어져야 합니다. 이런 자가 실은 구원된 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을 중립 지역에 두지 말고 축복의 자리에 놓인 마땅히 저주받을 자임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