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존강의20201112b 베드로전서4장 17절(가짜 교회)-이 근호 목사
서울의존강의20201112b 베드로전서4장 17절(가짜 교회)-이 근호 목사
첫째 시간에 제가 말씀드렸듯이 복음을 방해하는 자가 본인이에요, 내가 방해해요. 옛사람이 아주 끈질기게 방해합니다. 뭐 남들 때문에 신앙생활 못하겠다든지 가족이 반대해서 그렇다든지 전부다 핑계입니다. 본인이 이 악마의 세계, 음부의 세계의 관행, 관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어서 본인 고집 때문에 기쁨이 없어요, 주님이 주신 함께 있다는 기쁨. ‘나 좋으면 됐지, 굳이 주님이 꼭 함께 있어야 되는가. 잔소리만 해서 난 못 견디겠다.’ 이런 생각이 든단 말이죠.
그래서 구약 이스라엘이 보여주는 것은 뭐냐 하면 말씀과 인간이 대척관계이다. 서로 반대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가 멸망한 이유를 말씀에 두지 않고 자꾸 선지자 탓을 하는데 선지자는 말씀대로 그냥 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선지자는 없애버리고 그냥 말씀이라고 해도 됩니다. 말씀이라고 하는 게 옳아요. 말씀과 인간이 서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말씀이 뭐라고 되어 있어요? 육신이 되었잖아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해서 말씀이 육신 된 이 육신과 인간이라는 육신과는 영원히 결합할 수 없고 만날 수 없는 관계에요. 서로 싸우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주님의 육신은 세례요한을 통해서 성령 받았기 때문에 영으로 난 것은 영이고. 그러니까 육으로 난 것이 아무리 애쓰고 율법 지켜봐야 소용없어요.
예수님께서 이루시고 아버지 우편에서 성령을 주시는데 그 성령을 주실 때 성령에다가 뒤에 뭐가 붙느냐 하면 그냥 성령 주시는 게 아니고 성령+세례를 주는 거예요. 이 성령세례의 원형이 있어요. 그건 예수님에게 성령세례 왔다면 성령은 영원히 예수님을 떠나지 않는다는 그러한 환경과 더불어 온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한테 주었던 성령이 성도한테 와버리면 이 성도는 주님의 성령에 의해서 예수님과 똑같은 형편에 놓여 있어요. 성령은 결코 떠나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것이 성령+세례이기 때문에. 성령세례에요.
성령의 능력을 맛보는 게 아닙니다. 성령세례에요, 성령세례. 로마서 6장에 보면 이미 성령세례 받은 사람은, 죽고 다시 산 사람이에요. 죽었으니까 죽었다는 흔적이 있어야 될 게 아니겠습니까? 살아났으면 살아났다는 흔적이 있어야 되겠죠. 그러니까 성도는 이게 중복되어 있는 거예요. 옛사람도 있고 새사람도 있는데 옛사람은 성령받기 전에는 이렇게 살았었다. 새사람은 성령 받고 난 뒤에는 이런 게 있었다. 둘 다가 있는 겁니다.
로마서 7장에 보면 사도바울 같은 경우에 성령받기 전에는 내가 아무리 선을 행하고 싶어도 악이 나의 선을 이겼다. 이게 나의 옛사람인데 이것은 성령 받은 사람만 알지 다른 사람은 몰라요. 다른 사람은 두 개가 없어요. 사나 죽으나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본인이 살았던 그거밖에 없기 때문에, 다른 이질적인 요소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함께 있지 않기 때문에 꾸역꾸역 모든 일의 해결을 누가 해야 되느냐 하면 본인 인생은 본인이 책임져야 된다고요. 안 믿는 사람의 특징이.
그러니까 안 믿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어떤 복음을 이야기해도 극구 대들고 반대하는데 반대하는 근거가 뭐냐 하면 ‘자기의’입니다. 나는 기어이 잘났다. 나는 죄인 아니다. 이것가지고 복음을 들이받듯이 박아대고 시작합니다. 막 박아요.
성도는 죄 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죄 사함이 드러나려면 자기는 뭘 해도, 찹쌀모찌를 먹든 뭘 해도 이게 뭐가 되어야 돼요? 죄가 되어야 되죠. 죄가 되라고 한평생 계속 수명이 지연, 연장되고 있기 때문에. 오늘은 오늘 지은 죄가 있고 내일 되면 내일 지을 죄가 있고.
그러니까 성도는 죄짓는 즐거움이 아니고 죄를 아는 즐거움이에요. 또 죄짓는 즐거움이라고 해서 칼 들고 또 설치지 마시고요. 죄를 아는 즐거움. 왜? 모든 죄는 다 처리가 된 상태에서 돌아볼 수 있기 때문에. 이미 그 죄에 대해서 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부담 없이, 넉넉하게 자기의 지은 죄에 대해서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성도가 지은 죄는 뭐냐. 마찬가지에요. ‘나 잘났다’입니다. 똑같아요. 불신자하고 똑같아요. 사람은 지 잘난 맛에 사는 거, 똑같죠. 성도는 뭐냐. “나도 나 잘난 맛에 살아. 하지만 그것은 바로 죄였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어.”라고 인간 육신으로 살면서 그것 가지고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 연결될 때는 성령께서 그렇게 하게하신 거예요.
예수님은 죄가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하는 희생양으로 가는 길을 인도하고, 예수님 승천하고 난 뒤 성령은 이미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그 희생양의 취지와 가치를 높이는 데에 성령께서 전적으로 참여시키는 일을 하게 하시는 겁니다.
이 말은 네가 따로이, 특별히 너의 일이라고 할 것은 전혀, 전혀 없다. 절대로 이건 내 일이라는 게 전혀 없는 거예요. 내 믿음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내가 믿음이 없기 때문에 주의 능력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내 소망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내 소망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주님의 능력으로, 주님의 소망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사랑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성도는 십자가만 자랑한다는 말은 사도바울에 나오는 모든 편지에 명령들이 있죠. 모든 명령들을 어디로 한 곳으로 모으냐 하면 십자가의 다 이루심으로 모아 넣기 위해서 사도바울이 잔소리를 그렇게 해대는 겁니다, 잔소리를. 태어날 때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게 없으니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리라.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다. 그런 잔소리를 해대는 이유가 ‘그걸 지켜라’가 아니라 그걸 지키기 위해서 나선 우리의 옛사람이 결국은 그 말씀에 비춰볼 때 죄가 더 업그레이드된다는 거예요.
모세 법에 의하면 이혼할 때는 이혼증서만 써주면 합의이혼이 됐었어요.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간음한 연고 외에는 이혼하지 말라고 했거든요. 그리고 살인죄도 사람을 안 죽이면 살인죄가 안됐는데 마태복음 5장에 형제를 가지고 욕만 해도 살인죄가 돼요. 왜 자꾸 이렇게 주님께서는 율법의 깊이를 계속 깊이 가져가느냐 하면 예수그리스도가 사해줬던 그 죄의 깊이가 너희들이 추적해서 얻는 그 죄의 깊이를 능가한다는 겁니다.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죄고 어느 정도는 의라는 자체적인 경계선을 가지고 있어요. 이 경계선을 빼버리는 겁니다. 다 죄야, 다. ‘선과 악 중에서 선을 행하면 선이고 악을 행하면 악이다’가 아니라 “선악을 안다는 그 자체가 악이야.” 라고 창세기 2장의 이야기로 되돌아가고 있죠, 주님께서는.
그래서 성도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것이 나를 죽어 마땅한 것으로 만드는 죽음의 무기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것. KT하고 두산하고 야구하는 중계방송도 나를 죽이는 무기에요. 무기라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선악과하고 마찬가지로, 크게 쓰겠어요, 오늘 제목일 수도 있는데 세상, 교회 전부다 이게 뭐냐 하면 ‘유혹’입니다. 유혹이라는 말은 내가 아직 죽지 않아야 될 이유를 댈 수 있는 근거가 유혹이에요. ‘나는 안 죽어야 돼.’라는 근거를, 내가 살아야 될 정당성을 제공하는 게 유혹입니다.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할 때 그 ‘죽으리라’ 자체를 없애버렸죠. 아예 죽음이라는 일말의 가능성도 내 손으로 제거해버리고 싶은 거예요. 아예 죽음이 없는, 신처럼 영원불멸할 수 있는 그것을 시도했는데 그것은 사실은 인간의 마음이 아니고 악마의 마음입니다.
자, 이런 인간에게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의 말씀을 하시는데 이것은 누구나 봐야 돼요. 정말 봐야 돼요. 평생을 두고 놓치지 말아야 될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은 다 같이 해볼까요,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이것조차도 하나의 율법으로 작용하죠. 우리의 옛사람이 있으니까. 20년, 30년, 40년, 50년 복음 듣더라도 ‘아이고 뭐, 나는 신학공부 그만 할란다.’ 하고 이게 말씀이 아니라 신학공부 되었어요. 사람의 갖가지 아이디어를 꽃다발처럼, 칵테일처럼 모아놓은 것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러면 당신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 있습니까?” 물으면 “말씀이 어디 있어요. 다 우리 같은 인간이 낸 하나의 의견이지요.”
그러니까 이 말씀에 의하면 인간은 애초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어요. 사도바울이 아무리 이야기하고 성경을 아무리 봐도 그것은 전부다 사람의 말로 듣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지 않고요. 사람의 말로 들으면 내가 나서서 내가 다 조정해요, 편집하고. 받아들일 거 받아들이고 거부할 거 거부하죠.
그러나 오늘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에 보면 말씀이 우리의 허락도 없이 쑥 들어와서 우리 안에 아예 활동을 개시해버린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점검대상이다, 아니면 우리를 초월한다? 우리를 초월하죠. 그것을 제가 전에 성도의 사귐 이야기할 때 몇 번 이야기한 게 뭐냐 하면 ‘초과’.
오늘 강의 다시 해봅시다. 진실된 교회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있어야 되겠죠, 교회라는 것은. 교회는 하나님이 함께 있는 곳이에요, 그 공간은 하나님이 빠진 공간이 아니고. 하나님이 빠진 공간은 사람의 공간이죠, 임마누엘이 아니고 사람의 공간이에요. 그러면 진짜 교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여기 두 사람이 함께 만난다면, 상대방에게 뭐를 찾아야 됩니까? 초과적인 것. 다시 말해서 인간에게 나올 수 없는 이야기가 나오는지를 봐야 되죠. 인간에게 나올 수 없는 것.
“예배 참석 안하는데 뭐 바빴습니까?”, “아휴, 요새 김장한다고 바빠 가지고 못나왔습니다.” 이것은 전혀 초과적인 게 아니에요. 이것은 사람에게 나올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요즘 뭐 교회에 잘 안보이고 바빴습니까?”, “예, 요새 김장한다고 교회 못나왔습니다. 그런데 이게 바로 나의 죄입니다.” 이것은 초과적인 거예요. 교회 나오라, 안 나오라가 아니라 그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있는가를 보는 것은 나는 뭘 해도 핑계에 불과하고 뭘 해도 나는 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거예요. 그래야 죄 사함이 드러나잖아요. 피 뿌림의 의미가 살아나잖아요.
그러니 이런 교회는 이미 심판,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해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것은 음부가 인간을 장악했던 모든 세력권에서 벗어났다 이 말이에요, 모든 세력권에서. 그러면 악마는 인간을 이겼잖아요. 이겼으니까 악마가 인간을 지배할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교회는 악마가 못 이긴다는 말은 거기에 뭐가 있다? 주님이 계시고 그 주님을 저는 뭐라고 표현합니까? 초과적인 것. 초과적인 거예요.
이 ‘초과적’이라는 말을 좀 더 어렵게 달리 표현하겠습니다. ‘인간은 인간을 소유할 수 없기에 타인의 소유물이 되지 마라.’ 인간은 인간을 소유할 수가 없어요. 이것은 누구한테 해당되느냐. 성도한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성도는 초과적인 게 있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성령이 있기 때문에 누구의 소유가 될 수 없어요. 어떤 인간에게도 소유될 수가 없어요. 사람의 종이 되지 마라는 거예요, 사람의 종이.
그런데 기존 교회는 어떻습니까? 기존 교회는 음부의 권세, 악마의 권세가 지배하죠. 악마의 권세가 지배하는 그 완전한 모델이 십자가 사건을 유발시킨 그 세력을 통해서 그 진수가 보입니다. 그 핵심이 보여요. 일치단결해서 예수님을 살해했을 때 정치적인 법과 질서가 거기에 총동원되었잖아요, 그렇죠? 그게 마귀의 권세거든요. 나를 죽이는 것은 어둠의 권세다. 어둠의 권세 때문에 죽습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어둠의 권세, 악마의 지배를 받는다면 그 교회는 무엇으로 무장되어 있겠습니까? 교회법으로 무장되어 있죠. 교회법은 무엇을 노립니까? 질서. 질서는 서열관계가 형성되겠죠. 위계질서가 있어요, 위계질서가. 사도바울이나 예수님이 갔으면 이단 소리 듣는 위계질서. 사도바울이나 예수님이 그 교회 가면 이단소리 들을 수밖에 없는 위계질서가 있어요. 주님이 세운 교회에 주님이 들어가 버리면 주님이 이단 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주님이 거기에 들어갔다는 자체가 오늘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이미 하나님의 성전부터, 하나님의 집부터, 교회부터 시작되었다는 이 말은 주님과 함께 있는 사람은 이렇게 주님의 심판에 대해서 당연시하겠죠. 죄인이기 때문에.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나는 죄 지은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구원을 하시든 지옥을 보내든 그것은 주님 소관이지 제가 거기에 대해 아쉬워할 것은 전혀 남아있지 않습니다.” 이런 고백이 나온단 말이죠.
자기가 조상을 잘못 만나서, 만나봤자 그 조상이지만, 날 때부터 우리는 버림받았기 때문에. 내어 쫓음을 당했기 때문에. 내어 쫓았다는 주님의 취지가 그대로 살아 있는 거예요. 이렇게 주님의 취지가 살아 있는 사람은 주님의 성령이 함께 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 이야기가 바로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나옵니다. 오늘따라 유난히 성경책을 많이 찾아가지고 제가 굉장히 미안한데요.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이것도 죄라고 생각하시고.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두 사람이 등장하는데, 예수님한테 의인 소리 들은 사람은 무슨 소리했습니까? 나 이렇게 하면 의인이다. 이런 소리했습니까? 반대로 이야기했죠. 감히 고개를 못 들고 뭐라고 했어요? “나는 죄인입니다.” 했죠. 죄인이라고 하면 의인이라고 해주겠지. 이런 꼼수 말고요. 그냥 죄인이에요. 감히 고개를 못 들어요. 그냥 죄인이에요.
그런데 바리새인은 어떻게 했습니까? 바리새인은 나보고 죄인이라고? 그러한 얼토당토 않는 그런 모함하지 말라고. 왜냐하면 나는 토색이나 불의나 간음한 자와 같지 아니하고 그리고 십일조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하고 금식하고 이랬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 바리새인은 선악체계에 철두철미하겠죠, 선악체계에. 선이 많은 쪽은 질서의 피라미드에서 제일 꼭대기에 앉을 권한이 있고 너처럼 선하지 못한 사람은 세리처럼 저 바닥에 있어야 된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바닥에 있는 세리를 의롭다 했어요.
사람이 윗선에 있어버리면 질서를 위한, 질서를 잡기 위한 명분 가지고 같은 사람을 소유화시켜버립니다. 소유화시켜요. 저 사람 같으면 우리교회 와가지고 내 설교에 지금 완전히 반했다. 뿅 가고 있다. 그렇다면 저 사람을 슬슬 내 것 만들어 볼까? 그런 생각이 안 들겠어요? 제가 얼마 전에 설교하기 전 광고시간에 했죠. 새로운 부부가 오셨거든요. 그 분이 ‘십자가마을 포항’하는 유튜브도 올리고 해요. 복음을 굉장히 사랑하고. 포항이 얼마나 거리가 멉니까? 시속 120km 달려가지고 한 시간 와야 될 거리인데 거기서 오신다고요. 누구보다 일찍 오셔요.
그러면 목사 입장에서는 어떻겠습니까? 저 사람은 완전히 나한테 뿅 갔제? 그렇다면 저 사람에게 아쉬운 것을 내가 달라고 해도 거절하지 않겠지? 저 사람은 내 소유물쯤 됐고. 저 사람 다리 한쪽 빼가지고, 잘만 하면 꼬실 수 있을 것 같은데. 꼬시지 않은 듯 하게, 내 것인듯 내 것 아닌 내 것 같은 너. 이런 식으로 뭔가 이거 가능성 있고.
그런 생각을 모든 인간은 만남이라는 것, 만남 알죠?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요, 모든 인간의 만남에서 다 그게 아우라가 나와요, 이미지가 나온다고요.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부부사이입니다. 나 너하고 결혼하면 물에 손 한 방울 안 만지게 해줄게. 말 거꾸로 한 것도 모르고 하여튼. 손에 물 한 방울이지, 물에 손이 아니고. 손에 물 한 방울 안 닿게 해줄게. 해놓고는 나중에 기껏 한다는 게 고무장갑 하나 사주고 그걸로 때워 버리고. 왜 관심을 안 두느냐. 이미 내 꺼잖아요. 내가 정복했잖아요.
그러니까 정복한 그 남자도 문제지만 뒤에 뭐라고 했습니까? 타인의 소유물일 수 없어요. 초과적인 게 있으니까. 내 몸이 내 게 아니고 성령 것이에요. 주님의 것이라고요. 그러면 성령은 이 초과적인 것, +α 초과가 왜 있느냐. 이것이 세상을 심판하는 겁니다. 어떤 세상을? 뭐든지 힘으로, 힘이 세다면 그리고 착하다면 그보다 못한 사람을 전부다 소유화하려는 이 세상의 형편을 심판하기 위해서 주께서 초과적인 성령을 주신 거예요.
만약에 우리교회에서 교인이 몇 명 더 왔다. 그러면 제 입장은 뭐냐. 잔소리쟁이 두 명 더 온 거예요. 내 심사위원 두 명 더 온 거예요. 면접관이 두 명 더 온 거예요. 매일 심사하는 거예요, 매일 심사하고 나는 매일 심사받고 있는 겁니다. 그저 두세 명 있어서 뭘 해도 아이고, 잘했습니다. 이러면 마음이 편한데 좀 더 오게 되면 보는 눈이 점점 더 많아져요. 진짜 보는 눈이 일곱 영이에요. 점점 더 많아져요. 이거 막으면 이 쪽 새고 이거 하면 이거 새고. 뭘 누가 누구를 소유해요. 소유당하고 있는데. 감시당하는 사람이 많은데.
초과적인 것이 왔을 때는 상대방을 귀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소유는 터무니없고요. 상대방에게 뭘 해야 되냐. 성경에서 뭐라고 하느냐면 봉사하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로마서 12장에 나오는 서로가 서로에게 섬기고 봉사하라. 너보고 하는 게 아니야. 네 뒤에 있는 아우라 보고 하는 거야. 성령보고 하는 거예요. 그 사람이 좀 무식하다, 행동이 뭐하다. 그것 가지고 탓하지 마라. 그 형제를 위해서 죽으신 분이 그리스도다.
로마서 14장에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하지 마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다 (로마서 14장 15절,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 이게 뭐냐 하면 사람을 볼 때에 초과적인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같은 교회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초과적인 교회의 특징은 뭐냐. 이미 이 사람들은 뭡니까. 심판을 받은 거예요. 그래서 심판 오는 것에 대해서 이 사람들이 두렵지 않은 거예요. 이미 죽었으니까. 내 행함을 내세울 그런 군번은 지나갔으니까. 이미 내가 내세운 것은 뭐를 내세워도 죄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뭐든지 죄가 되기 때문에. 죄가 되기 때문에 죄에 대해서 초과적인 것이 뭐냐. 죄 사함이 된다. 죄 사함만 보여주면 돼요. 그래서 성도와 성도가 문안하고 인사할 때는, 사랑의 인사를 할 때는 무엇을 교환한다고 했습니까? 선물 교환할 때 무엇을 교환한다고 했습니까? 죄 사함을 교환한다고요, 죄 사함을.
“아이고, 집사님. 민낯 보니 얼굴 엉망이대.” 그러면 그 소리 듣고 난 뒤에 “어!” 화내면 안 되죠. 왜? 죄인이기 때문에. “괜찮아유~ 뭐. 아담의 얼굴이 그 얼굴이지 뭐. 늙어가는 게 아담의 얼굴이지, 뭐. 그런데 댁도 뭐 만만치 않네요.” 이렇게 서로의 허물을 즐겁게 교환할 수 있는 모임. 교회입니다. “뭐 성도님, 보니까 이 세상 중에 하는데...”, “목사님, 설교시간에 유행가 부르고 뭐.”, “괜찮아유~” 이렇게.
모든, 어떤 것도 주님 보시기에 의로운 것이 있어요, 없어요? 주께서 원하는 의로움은 그리스도의 피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피 안에 들어있기 때문에 피 뿌림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출애굽 할 때 죽음의 사자가 폭격할 때, 애굽 사람들한테만 왔습니까, 전체 애굽나라 다 뒤집어썼습니까? 미국 폭격기가 일본 동경의 일부입니까, 완전히 다 까맣게 덮었어요? 전체 다 왔죠. 다 온 거예요. 그럴 때 이스라엘의 맏이는 어떻게 살았습니까? 이미 우리는 죽은 자라는 것을 앞장세웠잖아요. 문설주에 뭘 발랐어요? 피에요, 피.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피 빼놓고 다 없애버립니다, 성도한테는. 피 빼놓고. 그리스도의 피, 초과적인 것 빼놓고 다 없애버려요. 군말하지 마라, 군말하지 마. 내가 찾아온 것은 어린 양의 피지, 딴소리 하지마라. 그래서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을 자랑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왜 굳이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서 처참하게 죽어야 되는가.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한 온 우주의 움직임입니다. 온 우주가 움직입니다. 우리의 움직임도 그 중에 포함되어 있고.
그렇다면 여기 오늘 본문에서 모든 사람이 심판 받는다면 18절에 “또 의인이 겨우 구원” 받는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이 말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이 말을 설명하려면 베드로전서 3장 6절을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 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그의 딸이 되었다. 우와, 그의 딸이 되었다. 누가요? 사라가. 누구의 딸? 아브라함의 딸.
어떻게 남편과 아내 사이가 아니고 부녀지간이 되어버렸네요. 베드로전서 3장 6절에 부녀지간 되어버렸어요. 이것은 서열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새로 탄생된 가족을 의미하는 겁니다. 사라는 아브라함 언약 안에서 자기의 신분을 얻었어요. 자리를 얻은 거예요, 영원한 자리, 언약의 자리를.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 누구 가족? 하나님과 함께 있는, 하나님과 한 패밀 리가 된 겁니다.
아브라함은 아브라함 언약을 이야기하고 아브라함 언약은 하나님의 언약이 아브라함 속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초과적인 것, 하나님과 함께 있는 그 덕으로 인하여 그 부인이 그냥 이혼이 가능한 그런 부인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태생이 하늘나라 출신이라는 그런 뉘앙스를 띄는 개념, 딸, 우리가 너를 낳았다는 딸 개념으로 바뀌죠.
이것은 나중에 구약에 보면 ‘예루살렘의 딸’ 그런 개념으로 나오거든요. 예루살렘이 건축 구조물인데 무슨 딸을 놓습니까. 그러나 예루살렘의 딸이라고 이야기해요. 시온의 딸. 가족이란 말입니다. 이것은 원래부터 한 뿌리에서 나와서 갈라서도 갈라설 수 없는 입장이 된다. 이것이 바로 겨우 구원받은 상태에요.
‘겨우’라는 말은 인간적인 힘으로, 이런 신분을 얻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들의 힘으로. 인간들의 힘 같으면 겨우 얻겠어요? 와락 달려들어서 얻죠. 철저한 하나님의 품질관리. 품질 관리 거쳐서 겨우 구원되는 거예요. 이 ‘겨우’라는 말은 그만큼 이 자리가, 이 신분이 고귀하다는 뜻이에요. 네가 함부로 예상하고 넘볼 그런 자리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아브라함의 딸이 되고 그 전에 또 하나 6절에 보게 되면 사라가 아브라함을 뭐라고 칭합니까? 주인. 나의 주인이여. 그리고 난 딸. 그러니까 이 말은 지금 아브라함이 사라한테 으스댈 수 있는 처지라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아예 그 아브라함 가정을 하나님이 함께 상주하는 가정으로 만들어버렸다 이 말입니다.
뭐 남편이 마누라의 주가 되고 싶어서 환장한 게 아니고 하나님의 의도에 의해서 그 가정에 아브라함이 주가 되게 함으로 말미암아 다른 식솔들이 또는 후손들이 도대체 우리 아버지는 어떻게 해서 언약을 얻게 되었지? 누가 손대서 언약의 주인공이 되었지? 라고 주목하고 주시하라 이 말이죠. 그게 초과적이고 그게 고귀한 것이니까.
제가 아까 구원에 대해서 누가 반대한다고 했습니까? 내가 나를 반대한다고 했죠. 여기에 초과적인 성령이 관여합니다. 성령이 세례를 줬으니까 관여한다는 말이죠. 다시 말씀드릴게요. 예수님은 죄가 없는 분이기 때문에 성령이 오게 되면 어린양의 희생제물이 되는 쪽으로 갔다면 예수님의 그 성령세례를 받아버린 우리는 처음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죄가 배설물로 계속 나와야 된다 이 말이죠. 죄가 나오기 위해서 맨날 우리는 옛사람을 드러낼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철저한 품질 관리가 필요한 거예요. 할 때 우리는 뭘 주목하느냐. 하나님이 함께 계셨다는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되게 하시는 거예요.
그 좋은 예가 뭐냐 하면 아브라함은 남편이지만 주가 되고 사라는 아내이지만 딸이 되었다. 이 정도로 결속 관계가 다져진 것은 아브라함 본인의 인간의 뜻이 아니고 여기에 개입된 하나님의 뜻이다 이 말입니다. 남한테 밀렸다고 기분 나빠하지 말고 네가 받은 그 자리가 귀하게 구원된 자리에요, 이게. 딸이면 어떻고 주인이면 어때요. 구원이 되었다면 이게 얼마나 감사할 일인데. 얼마나 고귀한 신분입니까, 성도라는 게.
피 뿌림이 내 피 짜가지고 내가 칙칙 뿌리는 게 아니에요. 그리스도의 피 뿌림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내가 죄인인 걸 안다 이 말입니다. 악마에 눌린 인간들은 악마의 품성을 그대로 보여줘요. 악마의 품성은 뭐냐 하면 내가 최고다. 나는 죄인 아니다. 양심은 있다. 맨날 자기 변명하잖아요, 인간은. 성령이 없는 사람은 그걸로 쭉 가요. 이 자리는 내가 획득한 내 자리다. 내 인생은 내가 한다.
아까 제가 말씀의 반대, 대척관계에 누가 있다고 했습니까? 네, 말씀의 반대관계는 사람이죠. 사람인데 이걸 자세히 이야기하면 말씀의 반대 관계는 역사입니다. 나의 스토리. 나 때. 내가 왕년에, 내 때는 이랬다. 이게 뭐냐 하면 역사에요. 말씀의 반대. 말씀은 영속성을 갖고 있는데 인간 역사는 이게 단발성입니다. 딱딱 끊어져요. 지 자랑하고 쑥 들어가 버리고 지 자랑하고 또 들어가 버리고. 누가 뭐라고 하면 또 내 자랑거리 끄집어낼 게 있는가 하고.
그런데 사라 같은 경우에, “네 자랑해봐라.”, “나는 내 남편 딸 되었다.”, “애걔, 그게 무슨 자랑거리고? 얼마나 맞았으면 딸 되었겠나.” 그게 아니고 내가 할 수 없는 초과적인 것이 이 언약적 집안의 가족으로 굳어졌다 이 말이죠.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딸이라고 아버지가 소유하고 이런 거 안돼요. 인간은 이미 초과적인, 성령에 의해서 소유하신 분이 따로 있어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잖아요. 소유격이에요, 소유격. ~의 것.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면 더 이상 사람의 것이 되면 안 됩니다. 상대방을 소유하려고 하면 안돼요. “뭘 도와 드릴까요?” 해야죠.
너 나하고 아는 사이 아이가. 20년 단골 아이가. 우리 20년 친구잖아. 당신 우리 교인된 지 25년째야. 다른 사람은 그래도 당신이 나한테 이렇게 섭섭하게 하면 안 되지, 응? 내가 당신을 얼마나 아끼고 심방해주고 기도하고 했는데. 다른 사람은 헌금해도 잔소리했지만 당신은 헌금 안 해도 패밀리기 때문에 내가 눈 찔끔 감아 줬잖아. 그런데 뒤통수 치냐.
이것은, 목사가 이렇게 나와야 그게 목사입니다. 모든 교회가 유혹거리잖아요, 교회가 유혹거리에요. 교회가 있어야 자존심이 살고 목사 자기의가 살잖아요. 목사 지 꼬라지가 교회 꼬라지거든요. 교회가 크고 헌금 나와 보세요. 얼마나 으스대겠어요. 목사 하는 보람과 뿌듯함을 느낄 게 아니겠습니까. 주의 종이 되었으니까 이렇게 도와준다. 이런 과시욕이 바깥에 나오겠죠.
그러나 어떤 인간도 인간을 소유해서도 안 되고 소유하려고 해서도 안돼요. 이미 우리는 초과적인 것에 소유되어 있고 만약에 정말 봉사한다면 초과적인 게 있는 사람, 자기 죄를 아는 사람한테는 함부로 굴면 안 되고 귀하게 여겨야 됩니다. 말 함부로 툭툭 하고 하면 안돼요.
서로 편한 사이라고 함부로 하면 나중에 그 편한 사이가 뒤에 쓱싹쓱싹 칼을 갈고 있어요. 세상 일이 다 그렇잖아요. 아이고, 사장님, 검사님. 하다가 나중에 무슨 일 있으면 검사님이 술집에서 내 돈 받아먹었다. 이렇게 모함하고 고발할 수 있는 관계가 모든 인간관계거든요.
내가 너를 소유하지 않으면 너한테 소유 당한다는 그러한 불안의식, 두려움 이것이 악마가 지배하는 세계의 모습입니다. 따라서 목사에게 교인은 단 한명도 없어야 되고 전부 다 섬기는 자만 있어야 돼요. 내 소유는 없어야 되고.
자, 그 다음에 19절 봅시다. 아 참, 이런 말이 어렵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찌어다” 부탁한다는 게 맡긴다는 거예요.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오늘 제목을 이걸로 할까 생각하는데 이게 뭐냐 하면, . 인간 대 인간의 상호 섬김이 아니고 하나님과 성도 사이의 상호 섬김의 모습.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주님과 우리 사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고 오히려 너희를 섬기려 함이라. 했잖아요. 그게 십자가로 끝났을까요, 십자가 이후에도 마찬가지로 될까요? 십자가 이후까지 계속 될까요, 안될까요? 계속 되죠. 성령의 간섭 없이는 인간은 주님 가신 길을 못갑니다.
성령께서 성도를 섬기는 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 본인이 닦아놓은 그 십자가의 길을 늘 가도록 하게 하시는 거예요. 십자가의 길은 성경에서는 좁은 길이라고 하잖아요. 찾는 이가 적은 거요. 성경에서 적다는 말은 없다는 뜻이에요. 다시 말해서 길은 없어요. 그러니 기존의 공간과 시간에 휘둘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존의 공간과 시간은 우리에게 어떤 도움도 주지 않아요. 주님이 도움 주시지.
어떤 특정한 공간에 가면 은혜 받고 특정한 시간 돼서 기도하면 은혜 받고 이런 건 없어요. 어떤 특정한 시간을 자꾸 하게 되면 이게 역사가 되가지고 이것은 말씀과 대척관계에 있습니다. 내가 이만큼 20년 동안 믿었는데, 30년 동안 성경 읽었는데, 50년 교회 나왔는데. 이것은 시간에 휘둘리는 겁니다. 자기 시간에 자기가 속아 넘어가는 거예요.
시간이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특정 공간의 문제가 아니에요. 이 말씀이 늘 쉬지 않고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말씀이 활동되는 거예요.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인간의 몸은 단발성이죠. 결심해도 얼마 안가요. 그러나 말씀은 인간이 달라 해서 주고 그런 거 없어요. 이 말씀은 계속해서 지금 활동하고 있어요, 계속해서.
우리가 낙담했을 때도 실망했을 때도 우리가 좌절했을 때도 하나님은 우리의 뜻대로 하지 않고 아버지의 뜻대로 된다는 그 사실이 성령 받은 사람에게만 그게 위로가 돼요. 성령 없는 사람은 내 뜻대로 되는 게 나한테 위로가 되어버려요. 그것은 사기입니다. 주여, 이렇게 어려웠는데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주께서 이렇게 은혜로 해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게 아까 이야기한 거잖아요, 소유. 내가 여기 있기에 자꾸 소유하려 하는 거예요. 권세를 끌어 모으려고 하는 겁니다.
이미 우리는 아무것도 없어도 괜찮아요. 초과적인 것, 성령만 있으면 돼요.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고 두드리라 열릴 것이라.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무엇을 주신다? 누가복음에 보면 성령을 주시는 거죠. 주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는 거예요 (누가복음 11장 9절~13절).
워낙 넓은 길을 가는 것이 버릇이 되어 가지고 좁은 길로 안 가잖아요. 좁은 길 정도가 아니고 이 길은 아예 없어요. 우리가 찾아내는 길은 좁은 길이 아닙니다. 그건 넓은 길의 일종이에요. 우리가 찾아내는 길. 선교사를 간다든지 20일, 50일 금식기도 한다든지, 어떤 어려운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자기는 밥 안 먹고 굶는다든지 이 모든 것은 다 넓은 길입니다. 결국 자기 역사, 자기의가 사라지지 않는 그러한 상황이기 때문에. 사람은 뭐 행동하게 되면, 그게 의미 있다 싶으면 선악체계에서는 그걸 꼬깃꼬깃 다 기억하고 있어요.
따라서 주님이 인도하는 좁은 길의 특징은 뭐냐. 생뚱맞아요, 생뚱맞아. 예상도 못했어요. 이럴 수가. 예상도 못했다고요. 내 인생 이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주님은 뭐라고 합니까? “네 인생이 어디 있어? 왜 네가 너를 소유하려고 해? 내가 봉사한 거야.” 주님의 것을 주님이 봉사한 거예요.
우리는 주님께 봉사하고 주님은 우리에게 봉사하고, 상호 봉사입니다. 제목 괜찮네, 상호 봉사. 상호 봉사니까 우리는 주님을 귀히 여기고 주님은 우리를 귀히 여기고 상호 봉사가 되는 거예요. 상호 봉사니까 어떻게 돼요? 내 자랑할 수가 없죠. 주님의 섬김의 결과물로 있었기 때문에 내 자랑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다시 말씀드리면 내가 아는 시간과 공간, 다시 말해서 내 역사에 속아 넘어가서 내 역사 자체를 소유하려고 하지 마세요. 결국 모든 게 소유에요, 소유. 여러분들이 이렇게 강의를 듣고 집에 가셔가지고 잠을 잔다. 잠을 자게 되면 어떤 그림이 그려질 거예요. 풍경이나 가을 풍경. 그림이 그려지게 되면 어떤 풍경을 보게 되면 내가 마치 국민학교로 되돌아가가지고 지난 주 가을 소풍 갔다 온 그 풍경이 떠오르게 되면 그 풍경만 떠오르는 게 아니고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내가 어릴 때 보았던 그 아줌마, 아저씨들로 보이게 될 거예요.
이게 인간의 옛사람은 어디에 휘둘리는 거예요? 시간과 공간, 기억하고 있는 시간과 공간에 휘둘리면서 거기서 낭만을 위해서라든지 세상을 아주 낭만적으로 보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세상은 유혹이죠.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는 다 잊어버리고 내가 저 단풍든 이쁜 산에 우리 초등학교 때 같이 소풍갔다. 소풍갔다 하니까 참, 전화해봐야겠다. 초등 동창생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전화해봐야겠다. 그거 해가지고 시간 다 보내버리고. 말씀은 없고 옛날 내가 나답게 살아왔던 나의 옛 생활로 다시 푹 잠기죠. 푹 잠기면서 어느새 보면 벌써 잠들어 있어요.
그러니 주님의 성령으로 섬기지 않는 한 우리는 절대로 천국 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다가 사흘 뒤에 다시 한 번 십자가 피를 우연한 기회에 예상 밖으로 깨닫게 된다면 사흘 전에 있었던 소풍 갔던 기억조차도, 이것도 죄였구나. 그러니까 우리는 가는 곳마다 죄를 풀풀 날려요. 죽을 때까지. 옛사람에게서, 육신에서 죄가 풀풀 날리는데 그것은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차이점은 뭐냐. 초과적인 것이 십자가를 근거로 해서 우리로 하여금 죄라고 지적하고 그 죄에 대해서 이미 사함을 받았다는 그야말로 하나님의 딸이 되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사실, 하나님의 언약의 사람, 언약의 완성자이신 예수님은 주가 되시고 우리는 그 주가 되신 언약의 주님의 딸, 아들, 한 식구가, 패밀리가 되었다는 그 기쁨을 우리에게 누리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은 나의 세계가 아니고 그게 바로 나와 대척관계에 있는 말씀의 세계입니다. 나의 세계는 단발성이고 끊어져 있지만 말씀의 세계는 영속성이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평생 살아오면서 우리가 살았던 모든 만난 것들, 우리가 마주쳤던 모든 것들은 나를 죽이는 하나님의 심판이었다는 사실을 이제 와서는 아주 즐겁게, 감사하면서 받아들여야 돼요.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우리가 아무리 예수 믿어도 나이 들면, 나이 들기 전에도 난데없이 죽을 수가 있어요.
제가 지금 이렇더라도 저녁 먹고 돌아서서 죽을 수가 있어요, 어느 판사처럼. 저녁에 누가 독을 넣었나. 갑자기 죽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죽는 이유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아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됐네, 이 사람아. 이제 고만 살아. 이렇게 데리러 오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든지 이미 죽었기 때문에 죽는 것에 대해서 서러워할 이유가 없어요.
사나 죽으나 우리는 누구의 것입니까? 주의 것이죠. 로마서 14장 8절에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입니다. 사나 죽으나 소유가, 내가 내 것이 아니라는 거죠. 그런데 우리 옛사람은 무슨 그런 고집이 많은지, 이렇게 복음 앞에서는 주여, 제가 주의 것입니다. 해놓고 꼭 친구 만나고 아는 사람 만나면 꼭 내가 내 것이라는 것을 과시하고 싶어서 아주 안달이 났어, 안달이 났어.
누구 만나면 자랑거리 안 꿀리려고. 아, 우리 애는 그냥 놀러 시험 쳤는데 또 백점이라. 얘는 돈도 없는데 의대 가려고 하면 어떻게 해. 자랑인지 안 그러면 진짜 짜증내는지 분간 안 되죠. 그러면 상대방도 못지 않게, 애가 뭐 유학을 보내 달라 해서 보내줬지. 보내줬는데 코로나 때문에 잠시 들어와 있다. 이게 지금 짜증내고 있는지 자랑인지 구분 안 되는. 전부다 그런 식으로 왜 타인을 만나면 자랑해야 되는가. 갑자기 초과적인 것이 왜 날라가 버렸는가. 성령께서 그렇게 또 너 주제파악 하라고 만나게 해주시는 겁니다. 할 수 없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알게 하옵소서. 복음 들을 때 지식으로 아는 것 같지만 막상 세상에 나오면 남한테 기죽지 않고 밀리지 않기 위해서 악을 부리는 그 모습 자체가 예수님을 죽게 한 죄라는 것을 성령을 통해서 깨달아서 우리가 주님의 식구인 것을 확인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