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06b 울산강의-레위기 26장 : 나의 오류
20201106b 울산강의-레위기 26장 : 나의 오류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입니다.
36절부터 39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너희 남은 자에게는 그 대적의 땅에서 내가 그들의 마음으로 약하게 하리니 그들은 바람에 불린 잎사귀 소리에도 놀라 도망하기를 칼을 피하여 도망하듯 할 것이요” 잎사귀 소린데 칼이 있는 줄 알고 경기 나 도망간다 이 말이죠. “쫓는 자가 없어도 엎드러질 것이라 그들은 쫓는 자가 없어도 칼 앞에 있음 같이 서로 천답하여” 천답이라는 것은 함부로 서로소로 밟아버리는 거예요. 미답(未踏,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음)이란 말 있잖아요. 함부로 천하게 밟아버리는 거죠.
“넘어지리니 너희가 대적을 당할 힘이 없을 것이요 너희가 열방 중에서 망하리니 너희 대적의 땅이 너희를 삼킬 것이라 너희 남은 자가 너희 대적의 땅에서 자기의 죄로 인하여 쇠잔하며 그 열조의 죄로 인하여 그 열조 같이 쇠잔하리라” 한 마디로 말해서 뭐냐 하면 있으나마나한 있어도 있는 둥 없으면 그만인 그런 별 볼일 없는 존재가 되게 하겠다는 겁니다. 누가요? 원래 약속의 땅에 들어왔던 이스라엘이.
그러면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이스라엘이 망했습니까, 라고 할 수 있겠어요. 이스라엘이 망했습니까, 여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이 망했느냐고 걱정스럽게 질문하게 되면 이 질문 자체가 하나님 앞에 성립되지 않습니다. 너 지금 누구 편드느냐고 나와요.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신 분은 안 망했잖아요. 활동함을 나타냈잖아요. 이스라엘 자기 백성을 망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의지와 뜻을 명백하게 확실하게 보여줬으면 그게 바로 성공이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의 실재성이 됩니다. 실재성이라 하는 것은 무엇이 리얼리티reality냐, 무엇이 실제로 있는 것이냐를 놓고 인간과 하나님과 경쟁했다 이 말이죠. 인간은 인간이 노력한 문명과 역사로 실재로 있다. 다른 말로 하면 현실이라고 할 수 있고 실제라고 할 수 있는데 복잡한데 어쨌든 간에 진짜 있는 게 뭐냐? 진짜 있는 게 무엇이며 누가 뭘 해서 없는 게 여기 나타났느냐? 거기에 대한 인간의 모든 해답은 인간이 노력해서 여기 있게 했다는 거예요. 세상의 모든 것이.
해와 달 누구 만들었느냐, 그런 것은 인간에게는 질문대상이 안 돼요. 거기 있다가 중요하지 달이 있고 별이 있다가 중요하지 누가 만들었다는 말을 인간세계에 하게 되면 실례입니다. 왜? 해답 없는 말은 꺼내지 말란 말이죠. 왜 그러냐 하면 누가 만들었다고 해도 증명이 안 되니까. 실용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실용성이 떨어지면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질문조차 하지 말라는 거예요.
어쨌든 간에 인간은 뭐냐 하면 인간이 노력한 것, 내가 애쓴 것 이게 전부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집에 애가 있는데 손자가 있든지 누가 있던지 간에 애가 커가는 걸 보면서 엄마는 거기서 자기역사를 뽑아내지요. 내가 어릴 때부터 너 키운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하고 자기역사를 뽑아내는 겁니다. 그게 실재고 그게 진짜로 있는 유일한 현실이라고 보는 거예요. 그러면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과 하나님의 계획이란 게 전부 다 어떻게 돼요? 인간들의 노고와 수고, 인간의 존재에 대한 열망, 이런 것 때문에 다 가려지겠지요.
그런데 제가 아까 첫째 시간 마지막에 뭐라 했습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만들 때 뭐로 만든다고 했지요? 제비뽑기, 선택을 한다 했지요. 특히 이삭언약 같은 경우에 이삭은 누굴 밀어줬습니까? 복을 주는 당사자 이삭은 누구를 복의 실재로 봤습니까? 에서입니까, 아니면 야곱입니까? 큰 아들 에서를 밀어줬지요. 그래서 이거는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 했잖아요.
복을 주면서 그냥 복 주면 되는데 에서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시킵니다. 노골적으로 너한테 가게 돼있어, 말을 이렇게 해도 되는데 같은 말로, 나는 사냥한 고기를 먹게 한 아들에게 주겠다고 이야기를 한 겁니다. 이미 이삭은 누굴 선택했느냐 하면 이삭 자기의 권한으로서 에서를 선택한 거예요. 그럼 에서와 이삭은 동질이라 본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누굴 선택했습니까? 야곱을 선택으로 말미암아 야곱과 하나님이 동질 됨으로 말미암아 이삭과 에서는 동시에 이 동질성은 주님 앞에 버림받는 겁니다. 너의 선택과 하나님의 선택이 다르다는 거예요. 네가 생각한 언약의 실재성과 하나님이 친히 나서서 이뤄나가는 언약의 실재성이 일치하지 않고 대립된다는 겁니다. 그게 쌍둥이로 남들 보기에 같은 아버지, 엄마에게서 태어났다고 누구나 다 같은 운명으로 갈 것이라고 단정 짓는 쌍둥이가 태어나면서부터 안에서 서로 복싱하고 있는 거예요. 서로 붙들고 씨름하고 싸우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 하나의 중요한 원칙 나옵니다. 하나님의 뜻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 있느냐? 아니요. 그럼 하나님 뜻이 인간에게 있느냐? 아니요. 그럼 하나님 뜻은 어디 있느냐? 하나님과 인간이 싸우는 그 와중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 믿으면 안 되고 십자가를 믿어야 될 이유는 뭐냐? 십자가를 통해서 십자가는 인간과 하나님과 대치되는 뜻을 지니고 있음을 투쟁의 형식으로 보여주거든요.
인간은 하나님은 죽이려 했고 밟으려 했고, 하나님은 인간이 밟은 예수님을 인간이 싫어서 밟은 그것을 하나님 아버지는 좋다고 사흘 만에 부활했잖아요. 인간이 좋아하는 것은 하나님이 좋아하지 않고 인간이 싫어하는 것은 하나님이 싫어하지 않고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은 인간이 싫어하고 인간이 좋아하는 것은 하나님이 싫어하고.
그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뜻이 합치했다는 것은 어디가 실재성이 됩니까? 바로 예수님의 존재가 실재성이 아니라 십자가가 실재성 돼야 돼요.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보면,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어느 악마를 너를 꾀더냐? 악마는 인간 편이거든요. 악마는 모든 걸 다 양보해도 딱 하나는 양보 안 합니다. 십자가에 다 이루심에 대해서는 악마는 제발 그 이야기만은 하지 말라는 거예요.
제가 강남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악마가 인간을 다루는 방법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과 네 행동을 일치시키라고 닦달 내는 그 일은 악마가 시켜요. 그걸 강남강의에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양심의 소리라 해요. 양심의 소리는 뭐냐 하면 강남강의 보시면 나옵니다만 양심의 소리가 악마의 소리거든요.
“네가 그렇게 살아서야 되겠어?” 이거에요. 악마는 계속 나에게 치중하게 만들어요. “하나님의 자녀로서 백성으로서 네가 그렇게 살아서 되겠어? 말씀에 순종해야지.” 계속 순종될 수도 없는 목표에 대해서 인간이 파닥거리면서 계속 추적해서 따라가서 일치하도록 악마가 자꾸 부추기는 거예요. 평생을 해도 할 수도 없는 그 과제를 숙제를 인간에게 주는 겁니다. 지치게 만들어요.
그래서 예수님, 십자가, 복음 믿고, 예수 피 믿고 하다고 나중에는, 철봉에 매달리다가 나중에 진이 빠져서, “하나님 나 복음 그만 믿을래요. 십자가 그만 믿겠습니다. 그냥 가끔은 주일 날 교회만 나올게요. 나 보고 더 하라 하지 마세요. 내가 지쳤습니다. 이제 예수 믿는 것도 지쳤습니다. 나도 나름대로 하려고 해봤는데 안 되겠습니다.”
언제 주님께서 하라 했어요. 마귀가 시킨 걸 마치 주님이 시켰다고 마귀가 그렇게 거짓말한 거예요. 주님은 우리 보고 하라 한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선택이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한다면 끝까지 사랑하거든요. 주님의 선택의 우리의 행함을 이깁니다. 주님의 제비뽑기의 가치를 자꾸 악마가 모독하는 거예요.
“네가 할 수 있는데 왜 주님의 선택에 의지하려 하느냐. 네가 열심히 하면 괜찮은 인간 될 수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런 소질 있어. 순종할 수 있어.” 자꾸 부추기는 거예요. 그리고 인간들은 전부 다 악마 편이기 때문에 자기 안에 있는 악마의 뜻을 포기할 생각이 없어요. 율법을 지켜서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답게 하겠다는 거예요.
주님은 뭡니까? 나가라, 다 나가. 안식을 방해한 죄목으로 처벌이 점점 더 정교해지는 겁니다. 철저하게 가는 겁니다. 가혹하게. 더는 나의 가능성, 내가 순종할 가능성, 말씀 지킬 가능성이 never 전혀 없음을 나는 너의 자질과 재질에 대해서 애초부터 기대한 적이 없음을 네가 알 때까지 밀어붙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십자가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거예요.
우리는 성령을 받았으면 나는 나에게 제발 이 고백을 하세요. 나는 끝났다. 어떤 것도 나에게 기대하면 안 돼요. 믿는 놈이 바보에요. 나를 믿는 내가 나쁜 놈이에요. 내가 악마에요. 오늘 어떤 분의 글에 댓글 달았습니다만 왜 인간이 자기를 관찰합니까? 뭐가 걱정돼서 관찰하는 거예요? 자꾸 자기가 자길 지키려고 해요.
주님이 우릴 지킬 것이면 약속의 땅에서 내쫓지 않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에서 살게 한 이유가, 맛 봤나? 나가라. 전부 다 나가. 너희들 있음 자체가 하나님의 기준을 모독하고 훼손하고 있다는 사실을 율법을 줘서 그들로 하여금 저주되게 하고 심판받게 하고 내보내 일을 하기 위해서 약속의 땅이 있는 거예요. 다른 이방민족은 손도 안 대고. 약속의 땅에서 자기 민족을 내쫓아 보내는 거예요.
내가 스스로 나는 남들 보기엔 그럴싸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개뿔도 아무 것도 아닌 존재에요. 아무 것도 아닌 존재거든요. 뭐 헌금 좀 했다고 기도했다고 주님이 그 꼬라지 보게 되면 같잖아서. 더러운 것에서 더러운 것밖에 안 나오는데 뭐 했다고 복 주세요, 장래일 잘 되게 하옵소서. 진짜 LA 야경 비춰줘야 돼요? 사람은 안 보여요. 점들 빛만 있을 뿐이에요. 정방향으로, 바둑판 모양으로. 그 어두움에 모든 인간이 묻혀버리고 없는 거예요.
열두 제자를 하나님께서 선택하실 때 그 열두 제자에게 뭘 가져다 입히느냐 하면 아브라함언약을 입힙니다. 아브라함언약이 뭐냐 하면 내 몸에 난 자식이란 이유 때문에 이건 하나님의 자식이 아니다. 육에서 나온 자식이기 때문에 육에서 나온 자식을 낳았기 때문에 너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 네 머리에서 나오는 것은 너라는 것, 나라는 것에서 나온 것은 육밖에 나올 게 없어요. 나의 자식도 육이에요. 육에서 육을 낳은 거예요.
따라서 나에게서 나온 어떤 것도 하나님이 받지 않는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심어주기 위해서 누굴 낳게 했느냐 하면 약속의 자식을 낳게 하는 거예요. 약속의 자식과 육의 자식은 동거할 수 없어요. 한쪽을 내쫓아야 돼요. 서로가 서로를 구박하고 핍박하고 싸우고 난리도 아닙니다. 약속의 자녀로 하여금 복을 받지 육의 자녀는, 복의 반대말이 뭐지요?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 선택을 아주 쉬운 예가 요즘 미국에서 일어난 일을 보면 쉬운데요. 개표하는데 미국의 아나운서나 전 세계 모든 언론에서 크게 잘못된 주장을 해요. 뭐냐 하면 트럼프가 우세한 지역인데 바이든이 역전했다고 하거든요. 여러분, 역전 같은 건 없습니다. 왜냐하면 개표에서 아직 개봉이 안 됐을 뿐이지 역전은 없어요.
개표란 이미 투표가 끝난 상태에서 안에 뭐가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하나둘 드러나는 것이지 무슨 역전이 됩니까. 제 말이 틀렸습니까? 표는 이미 확정된 거예요. 확정된 것을 개표로 확인할 뿐이지 역전이란 말은 뭐냐? 둘이 달리기하다가 앞서가다 뒤에 가다 역전이잖아요. 그건 수평적 안목이에요. 수직적 안목에서 보게 되면 이미 여기는 확정된 거예요. 누가 천국 가고 누가 지옥 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이미 끝난 거예요. 이미 확정된 거라고요.
복음을 주시는 것은 개표에요. 누가 영벌 받고 누가 영생을 받는지 개표하는 거예요. 그 개표할 때 오시는 게 성령입니다. 성령이 와서 뚜껑을 여니까 너는 천국이네. 너는 지옥이네. 우리가 뭘 했습니까? 하나님 두 분이 투표했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이 선거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냥 당하기만 했을 뿐이에요. 인생 역전 없습니다. 우리는 될 사람이 될 뿐이에요. 우리가 모른다고 해서 역전이라고 말하면 안 돼요. 우리는 모르지만 우리는 몰라도 괜찮아요. 주님이 아시잖아요.
어떤 분이 이번 주일 제 동영상 밑에 거의 댓글이 안 달리는데 댓글이 하나 달려서 저도 댓글 둘인가 셋 달았고 그분도 두세 개 단 게 있어요. 그분이 하는 이야기가 십자가마을 집사님들 이야기를 끄집어냈어요. 하시는 말씀이 목사님 복음대로 십자가마을 사람들 그렇게 살아야 되는데 보니까 죄만 이야기하고 불교신자인지 구분도 안 되고 감사도 별로 없는 것 같고 그것은 목사님이 설교에서 뭔가 빠진 게 있어서 그렇지 않습니까, 라고 책망하듯이 댓글을 달아놓은 거예요.
그래서 제가 댓글을 이렇게 했습니다. 목사는 설득용이 아니기 때문에 그 사람 구원받고 아니고는 제 소관 아닙니다. 요한복음 6장 39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는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주님의 소관이지 제 소관 아닙니다. 그리고 난 뒤에 감사하다고 끝냈는데 이 말은 뭐냐 하면 그걸 여러분 인생에다 적용시켜 보세요.
내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관찰한 그 자체가 잘못이에요. 내 인생을 내가 아직도 포기 못하는 것은 내가 사는 기준을 포기 못한다는 이야기에요. 아주 고집스러워요. 마귀적 고집이에요. 세상 망해도 나는 살겠다는 거거든요. 세상 망해도 나는 살겠다는 그 기준은 어디서 정당성을 얻을 수 있지요? 네 기준 옳아, 라고 남 다 죽고 나만 살겠다는 기준은 이 세상에서 그걸 정당화할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요. 있습니까?
만약에 집사님 아드님이, 나는 세상 다 망해도 살아야겠다고 하면, 아버지는 그럴 자격 있어. 아버지는 너무 고생했기 때문에 있어, 이랬다면 그 다음에 집사님이, 너 죽고 나 살아야겠다고 이야기해보세요. 쑥 들어가지요. 세상 다 망해도 나는 살아야겠다는 그런 주장, 그런 본성을 누구나 다 갖고 있는데 누구나 갖고 있는 본성이 옳다고 누구한테 추인 받고 허가받은 거예요? 누굽니까? 나만 옳다는 누가 심어준 마음이에요. (악마)
악마를 거론해야 될 이유가 거기 있는 거예요. 이건 악마가 아니면 다시 말해서 악마가 집어넣어준 마음이 아니면 내가 이렇게 돛대처럼 나만 챙기는 그런 못돼먹은 사고방식은 그 어디에서도 올 수 없어요. 그래놓고 자기 자신을 지키려고 합니다. 차라리 마귀를 지키세요. 악마를 품에 안고 악마를 보호해주세요. 차라리 그럴 것 같으면.
주님께서 오실 때 주님께서는 우리의 겉모습을 보는 게 아니고 우리의 중심을 보시잖아요. 우리가 모르는 우리중심에 독한 괴물이 들어있는 거예요. 그걸 보면서 모든 말씀을 다 주신 거예요. 그런데 또 악마는 악마대도 세기 때문에 우리 보고 격려하기를 네가 설교 듣다가 너를 채우려는 것에 대해서 별로 도움이 안 되거든 그 말씀을 다 밀어내라. 또 악마가 시키는 대로 밀어내네.
복 주시는 예수님은 받아들이고 십자가 앞에서 이미 우리는 끝났다는 그 이야기하거든 밀어내라고. 또 악마가 시키는 대로 해요. 왜? 악마는 우리 편이니까. 태어날 때부터 단짝이니까. 나는 의성에서 태어났다. 아니지요. 가을에 태어났지요. 다시 말해서 땅 없이 태어났지요. 혹시 생일이 가을입니까, 봄입니까? (봄이요) 그럼 다른 분 이야기.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뽑고 새로운 언약공동체, 언약적 성공, 열둘을 뽑았다는 말은 아까 뭡니까? 제비뽑았다, 또는 선택했다. 주님이 열두 명을 선택했어요. 열두 명을 선택해서 이스라엘을 만들 때 이것은 무엇을 내다보느냐 하면 언약의 승리에요. 언약의 실재성, 이 세상이란 커튼에 있는 문양, 무늬는 이게 주저앉으면 그 안에 진짜 세계가 나타나지요.
이 세상은 하나의 커튼지에요. 펄럭이는 커튼이라니까요. 지난번에 이야기했는데 히브리서 11장 3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된 게 아니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그 배후에 보이고 나타난 것은 커튼이에요. 커튼 뒤에 무슨 세계가 있는 게 아니고 커튼 뒤에 누가 계셔요. 예수님이 계신 거예요. 예수님을 위한 시간과 공간이에요, 이 세상은. 그 말은 뭐냐? 나를 위한 시간과 공간은 아니란 말이죠.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그건 아무 의미도 없어요. 왜? 수평으로 기어 다니는 이 땅에 흠만 내는 그런 거니까요. 인간은 이 세상에 유일한 존재로 봅니다. 로빈슨 크루소에요.그런데 그 해안가 모래사장에 내가 찍지 않은 발자국이 나타나니까 로빈슨 크루소가 얼마나 놀랬겠습니까. 내가 최고인 줄 알았는데 나 있기 전에 먼저 계신 분, 나타난 내가 처음이라 생각했는데 내가 나타나기 전에 먼저 이 땅에 주인 되신 분, 그분을 내가 만난 것만 해도 여러분 복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그 존재를 낯선 발자국 발견한 것으로 가슴 철렁 내려앉든 말든 간에 복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의 일방적인 객기와 일방적인 판단을 우리가 스스로 부정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뭔가 개뿔도 모르면 아는 척했다. 전부 다 나 살려고 하는 꼼수를 쓰면서 그게 진실이고 진리인 줄 알았지요. 남들 다 그렇게 사니까.
그래서 성도의 특징은 뭐냐? 주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고 일을 나가십니다. 마태복음 10장 구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제가 보는 것은 여러분 다 아는 이야기니까. 여기에 너희들은 이방 길로 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으로 가라, 하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깝다고 말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8~10) 이렇게 쭉 나오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 이 뜻을 길게 쓰겠어요. “그동안 나를 규정해온 것을 철거당해도 상관없음” 이것을 물으시는 거예요. 선택이 내 스스로 인간답게 사는 조건보다 더 우열하니까 더 우선되니까. 주님의 선택하심이 내가 이 세상에서 밥 빌어먹고 살려고 애쓰는 것보다 더 먼저 선행되니까 내가 나답게 되기 위해서 규정해온 모든 것을 하나둘 철거시킨다 할지라도, 주여 괜찮아요. 괜찮아유, 뭐. 하는 것처럼 괜찮다고 여길 마음의 준비가 돼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런 마음이.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달리 이야기할 때 빨간 걸로 써볼게요. “세상 모든 사람으로부터 배제당하고 무시당해도 견딜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는 거예요. 제자들은 천국만 주신다면 주님 악착같이 따라붙겠습니다. 이렇게 나온 거예요. 아까 제자들이 왜 철없는 소리인줄 아시겠지요. 예수님의 언약에는 필히 십자가는 예수님 홀로 져야 돼요.
그럼 다른 제자들은 뭐냐? 배신 때려서 도망가야 돼요. 그게 조건이에요. 목자를 치니 양들이 흩어지는 조건 하에서 십자가에요. 그게 언약의 성공입니다. 제자들의 달라붙는 언약 성공은 없어요. 예수님만 홀로 남아야 언약이 성공 돼요. 왜? 다른 이름으로는 하나님께서 구원을 안 시켜주니까.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 구원시켜주니까. 예수 이름만 남아야 돼요.
우리 이름은 철거당해야 돼요. 우리 이름은 이게 무너져야 돼요. 무너지는 것을 내 인생의 실패로 보지 말고 성공이라 보세요. 나의 성공이 나의 이름이나 나의 가치, 나의 의미가 무의미로 바뀌는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고마워할 줄 알아야 돼요. 주님이 아니면 누가 그렇게 하겠어요.
그래서 성도는, 이건 파란 걸로 쓸게요. “성도는 주님이 가신 길을 답습한다.” 모든 사람으로부터 무시당하고 모든 사람으로 밀침을 당하고 배척을 당하신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 길을 누가 답습한다고요? 바로 제자가 답습합니다. 인간의 능력이 아니지요. 그래서 누가 오느냐 하면 그 길을 가신 분의 영이 오는 거예요.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은 주님 가신 길로 가게 하십니다. 주님 가신 길이 뭐냐 하면 아까 말한 남이 나를 공격하고 무시하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은 나의 나다움으로 갖고 있던 기준과 규정이 주님께서 그걸 일체 허망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 데서 오는 그 서글픔이에요. 나다운 게 잠시도 하나님께서 용납이 안 돼요. 나답다는 게 용납을 안 해요.
전에도 그런 예를 든 기억이 나는데요. 옛날 초등학교 때 놀이 가운데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는데 같은 방향으로 가는 친구가 있을 때 심심하잖아요. 하나가 앞에 가면 뒤에서 눈 감고 따라가면서 하는 이야기가, 어디까지 왔나, 묻는 거예요. 미장원까지 왔다. 어디까지 왔나? 문방구까지 왔다. 이렇게 묻듯이 자기는 눈 감고 있기 때문에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철저하게 종속되는 거죠.
지가 눈 뜨고 가면 될 텐데 기쁨으로 자발적으로 목자한테 모든 걸 일임하는 거예요. 목자님 어디까지 왔습니까? 지금 미장원까지 왔다. 목자님 어디까지 왔습니까? 왜냐하면 내가 가야 될 길을 나는 모르는데 누군 아십니까? 주님은 아시거든요. 주께서 친히 길을 열어줘야 우리가 그 길을 갈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길을 아시는 분이 아니고요. 예수님 자신이 길이에요. 예수님 자신이 길이기 때문에 우리는 내가 따로 그 길을 알아 버리면 안 돼요. 우리는 계속해서 어느 길이 천국 길인지 몰라야 돼요. 몰라야 누구만 의지합니까? 예수님만 잡고 의지해서 물을 수밖에 없지요. 그러면 주님께서 물을 때 알려주는 게 아니고 이미 주님께서 우리에게 드론처럼 이 세상을 떠서 보는 안목을 계속해서 심어주는 사태와 상황을 우리에게 만들어줘요.
만약에 딸이 하나 있는데 전교1등 했다. 그럼 엄마가 LA 야경을 보는 드로처럼 떴다면, 딸아 그것 아무 것도 아니다. 그것 해봤자 나중에 의사 밖에 더 되나. 너는 사람이 뜨질 못해. 그러니까 네가 공부 잘하는 것도 좋지만 더 중요한 게 있어, 라고 엄마 아이한테 복음을 전할 기회가 백점 맞을 때 할 수 있는 거예요. 그것 아무 것도 아니라고.
자, 이제부터 좀 더 난해한 걸로 들어갑니다. 그렇게 난해한 건 아닌데 오늘 레위기 26장으로 돌아가 봅시다. 하나님이 안식을 위해서 자기 백성을 쫓는다는 그것이 언약이거든요.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기준이거든요. 그러면 언약의 승리, 언약의 승리는 언약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완성 안에는 언약 안에는 조건의 완결, 조건이 충족된, 같은 뜻이에요.
그러면 언약 조건이 충족되려면 자기 백성이 어떻게 돼요? 자기 백성이 약속의 땅에서 추방당한다는 내용이 필히 언약 완성 속에 있어야 되겠지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참 고생 많이 했어요. 오늘날 우리에게 하나님의 언약이 무엇인지 알려주는데 시범조교로서 많이 애썼습니다. 왜? 택함 받아놓고 버림받았으니까.
그들을 택했을 때 언약의 완성을 위해서 그들은 선택되어서 선택된 일을 해야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이란 나라가. 그래서 그들이 해야 될 역할은 뭐냐? 추방당하는 일을 해야 돼요.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는 그 역할을 해야 돼요. 그런데 이 역할을 할 때 결국 이 언약은 이런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런 조건을 포함해서 완성이 된다면 오늘날 십자가가 십자가답게 완성된 모습으로 전달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떻게 돼야 됩니까? 이 조건에 충족되는 자리에 우리가 들어가게 되지요.
그러면 우리는 늘 뭐가 되느냐? 나는 nothing, 나는 아무 것도 아니죠. 여러분 아무 것도 아닐 때 내 인생이 가벼울까요, 안 그러면 짜증나고 무거울까요? 가볍지요. 근심걱정은 사치입니다. 왜 내가 나를 관찰합니까? 나를 관찰하니까 악마가 달라붙는 거예요. 날 파리가 달라붙는 거예요.
좀 더 잘하지. 그때 실수 없었으면 좋았잖아. 그때 정신 차려서 더 기도하고 애썼으면 헌금했으면 복 받잖아. 이런 식으로 악마 와락 달려드는 거예요. 악마는 나의 성공을 원하고 있습니다. 언약의 성공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기준의 성공이 아니고 내가 있는 내 기준의 성공을 악마는 간절히 부탁하고 있습니다. 다른 교회 옮겨봐. 기도해서 복 받은 교인들 많은 교회 가봐. 이런 식으로.
여기에 나는 가난하다. 나는 상대적으로 부자다. 이런 것 자체를 신경 안 쓰면 되는 거예요. 나는 아프다, 건강하다. 이 자체를 신경 안 쓰면 돼요. 왜?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니까. 아파도 아무 것도 아니고 건강해도 아무 것도 아니고 부자나 가난해도 아무 것도 아니니까. 여기서 뭐냐 하면 감사가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날 성도는 바보 같아. 나만 믿고 살아온 이 바보 같은 착한 사람아. 고맙고 감사하지요. 나 하나 믿고 바보 같이 살아온 이 착한 사람아. 남자는 말합니다. 고마워요. 이걸 반대로 하면 나 하나 믿고가 아니라 너 하나 챙기고 살아온 이 독종 같은 여자야. 난 너한테 말한다. 악하고 저주받으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지요. 그리스도의 색시지요. 주님 남자 하나 믿고 살아가는 거예요.
이사야에 보면 이스라엘을 맹렬하게 심판한다고 해놓고는 나는 색시를 원한다고 나와요. 나는 나의 신부를 원한다고 돼있어요. 그건 선택이 기본이고요. 그러면 신부는 남자 하나 믿고 했기 때문에 나의 야망이라든지 야심 같은 것은 신경 쓸 필요가 없어요. 고개 숙여서 자기를 쳐다볼 이유가 없다고요. 사람이 언제 가벼우냐 하면 자기 안 쳐다볼 때 제일 가벼워요. 자기만 쳐다보게 되면 아무리 가져도 욕심나게 돼있어요. 좀 더 완벽할 수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좀 더 큰 것 가질 수 있었는데, 이렇게 된다고요.
그래서 오늘 쫓아내고 하는 조건을 이루는데 있어서 누가 동원되느냐 하면, 이런 게 좀 복잡하고 난해하다 할 수 있어요. 누가 동원되느냐 하면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바로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를 압축시켜서 단시간 내에 다 보여줍니다. 그 열두 제자 중에 누가 있었습니까? 아주 중요한 인물이 있지요. 이름은 들어봤나 가룟 유다.
가룟 유다는 사탄이에요. 이 말은 뭐냐? 예수님을 누가 선택했다? 사탄을 선택해서 뭘 이루려합니까? 언약을 이루는데 사탄의 선택이 필수요건인 거예요. 이스라엘이 왜 망했느냐, 같은 말이 뭐냐? 인류는 왜 망해야 되는가? 같은 말이에요. 이스라엘이 인류의 표본으로 뽑아낸 거니까.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사탄이 들어와 있다는 말은 악마가 들어와 있다는 말은 악마가 어떤 짓을 해도 그 짓은 결국은 언약의 승리를 굳히게 하는 조건의 범위를 못 벗어나요. 그러니까 악마가 무슨 짓이라도 하면 할수록 언약의 다 이루심은 요지부동으로 확실한 사실이 되는 겁니다. 다 이루었다. 그게 하나님의 긍휼하심입니다. 다 이룬 거예요.
자꾸 나를 쳐다보니까 여기서 결핍이 생기고 모자람이 생기는 거예요. 내가 나에 대해서 짜증이 나는 겁니다. 너 왜 그렇게 사느냐고, 왜 그것밖에 안 되느냐고. 그런데 우리의 역할은 주님으로부터 추방당한 거예요. 우리의 역할은 주님을 배신하는 것이고 주님은 우릴 배신 때리는 것이 주의 역할이고. 그러니까 제가 역할을 말하는데 이 역할이란 것을 이해한 사람은 이미 다 이루었다는 예수 안에 포함된 사람이에요. 이 역할인 것을 아는 사람은.
그런데 가룟 유다는 역할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에게 너는 차라리, 역할은 맡겨놓고, 네 입장에서 볼 때 차라리 안 태어난 것이 너에게 낫다. 이렇게 하지만 태어나고 안 태어나는 것도 가룟 유다 본인 마음대로 안 되잖아요. 그걸 비자발적이라 하는데 본인도 태어나고 싶어서 한 게 아니고 태어나다보니까 태어난 거니까. 그게 피조물의 한계입니다.
나는 끝났다. 나는 망했다로 우리가 웃을 수 있어야 돼요. 나는 잘됐다고 웃어버리면 여기에 마귀가 꼬입니다. 날 파리가 꼬여요. 너 그러다 한방에 훅 가는 수가 있다. 이렇게 협박 공갈이 들어온다고요. 십자가는 너 망했다고 기정사실화시킵니다. 이게 얼마나 그러니까 나를 망하게 한 그 십자가만 믿는 거예요. 십자가만 붙드는 거예요. 그래야 내가 망했음을 늘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자랑하지 않아요.
최고의 자랑은 뭐냐? 내가 십자가 믿은 걸 자랑하지 말고 십자가 그 자체를 자랑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십자가 빠져버리면 아는 안 망하려고 애쓰는 그런 무의미한 짓을 또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십자가를 깔아버리면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은 주님의 언약에 관련된 일만 나에게 일어나는 거예요.
네가 어느 학교 나왔으며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이걸 LA 밤 야경에 드론 띄워서 보게 되면 내가 그렇게 살아야 되고 그렇게 이만큼 와야 될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예수님이 선택했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드러내기 위해서 이미 투표한 거예요. 개표 이전에 이미 투표함 안에 들어있는 내용인 겁니다.
이제는 그것을 40대면 40대에 개봉 되어서 알았고 50대면 50대에 개봉되어 어떤 것을 개봉해도 주께서는 이미 그 선택 자체가 완성이란 것을 알려주는 일들만 계속해서 내가 주님 품에 갈 때까지 끄집어내는 거예요. 너는 다 이루었어. 너는 죄 사함의 대상이 되었어, 라는 것을 계속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 일은 일어나야만 할 일들만 일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단독적으로 나의 나다움의 규정을 따로 할 필요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 다시 봅시다. 여기에 남은 자들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다시 말씀드려서 그 남은 자들이 이방나라에 가서 허무한 존재가 되었고 별 볼 일 없는 존재가 되었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남은 자들이 이방나라로 쫓겨 가서 노예가 되고 그렇게 할 때에 비로소 그들은 시편 107편 같은데 보면 누굴 아느냐 하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들이 등장한다는 겁니다. 추방됨으로써.
그리고 구약에 나오는 시편 107편을 잠시 보게 되면, 107편이 아니고 126편에,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이것은 그들이 원해서가 아니라 주께서 찾아오셔서 어디에서 어디로 돌려놓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가 하나님 앞에 망하고 주님의 기준에 부합됨을 아는 사람한테는 주님이 어떤 모습으로 찾아왔는지 알아요.
다시 말해서 죄 사하는 모든 체제를 다 갖추고 내 백성 어디 있느냐, 이스라엘 어디 있느냐, 하고 찾아오시는 그 찾아오심을 아는 거예요. 마치 사도 바울이 주님 만나는 그 자체가 이미 구원이 되는 것처럼 구원의 완벽한 조건은 주님 쪽에 가져오시는 것이지 내 쪽에서 마련한 게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주님 찾아올 때는 이미 십자가 피로 다 이룬 거예요.
이건 뭐냐? 나, 너를 용납했다는 겁니다. 하는 걸 봐서가 아니라 용납해주기 위해서 오신 거예요. 모든 걸 용납해주기 위해서. 무엇을 더 말하리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아쉬운 것을 다 갖추어서 우리에게 찾아오시고 성도라 불러줬는데 아직도 우리가 세상에 미련이 남아있습니다. 주여 여러 가지 일으킨 사건을 통해서 주님의 조건으로만 구원됨을 깨닫게 해주시고 따로 우리의 조건을 만들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