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06a 울산강의-레위기 26장 : 나의 오류
20201106a 울산강의-레위기 26장 : 나의 오류
(강의:이근호 목사)
레위기 26장 33절부터 보겠습니다. 33절부터 보면, “내가 너희를 열방 중에 흩을 것이요 내가 칼을 빼어 너희를 따르게 하리니 너희의 땅이 황무하며 너희의 성읍이 황폐하리라 너희가 대적의 땅에 거할 동안에 너희 본토가 황무할 것이므로 땅이 안식을 누릴 것이라 그 때에 땅이 쉬어 안식을 누리리니 너희가 그 땅에 거한 동안 너희 안식 시에 쉼을 얻지 못하던 땅이 그 황무할 동안에는 쉬리라“ 일단 거기까지 보겠습니다.
사람이 살아갈 때에 이런 질문이 성립이 안 될 정도로 당연한 질문인데요. 사람이 채우려고 삽니까, 비우려고 삽니까? 채우기 위해 사시는가, 비우기 위해 사시는가? 안 그러면 하나 더, 더 채우기 위해 잠시 비우는가? 어느 쪽이겠습니까? 사람이 사는 이유가 채우기 위해 사시는가, 비우기 위해 사시는가, 더 채우기 위해서 잠시 비우며 사시는가? 어느 쪽일까요?
보통 사람들은 자기 집에 있는 것 거덜 내기 위해서 살진 않잖아요. 거덜 난다는 것은 텅텅 비었다는 것이고, 꽉꽉 채우는 것, 치매 걸린 노인이 온 동네 쓰레기를 자기 집에 갖다 안길 때 인간 본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채우는 맛이 사는 거예요. 텅텅 비워있는 맛에 사는 게 아니고.
아이를 하나 낳고, 둘 낳고, 셋 낳고, 계속 낳는 이유가 허전한 나의 과거, 뭔가 풍성한 가족애가 그리웠던 지난 나의 성장과정에서 맛보지 못한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 자식이라도 풍성하게 낳고, 낳고, 또 낳고, 또 낳고, 낳기를 바라지요. 그런데 자식을 넷 낳았는데 셋 죽고 하나 남았다. 이걸 복이라고 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집을 보니까 좁은데 애 넷 낳았는데 셋 죽고 나니 속이 시원하죠?” 이걸 위로라곤 할 수 없는 겁니다. 집이 비좁더라도 많이 꽉꽉 채워지길 원하지요. 방이 몇 개 되지 않더라도 누가 준다면 거절할 사람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까 하나님께서 그 약속의 땅이 꽉꽉 채우길 원하시는 게 아니고 반대로 나가시는 겁니다.
너희가 대적의 땅에 거할 동안에 너희 본토가 황무할 것이므로 땅이 안식을 누릴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땅의 안식에 있었고, 그 땅의 안식이 되는 방식은 다 비우는 거예요. 들어가 살지 말아야 될 것을 다 비우는 것이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에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안식을 위해서 다 나가라, 이렇게 되는데요.
그것을 하나님의 기준을 우리 평소에 일상의 나의 삶의 기준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는 겁니다. 우리 일상에 있어서 우리의 기준은 ‘나’입니다. 나거든요. 내가 잘 되기 위해서 필요한 기준을 하나님 쪽에서 제공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➀➁➂ 다시 보면, 채우기 위해서 사는가, 비우기 위해서 사는가, 더 채우기 위해서 잠시 비워놓는가? 할 때 나의 입장에서는 어느 쪽이냐 하면, 비우는 것이 아니고 자꾸 채우고 싶어 하지요. 내가.
채우고 싶어 할 때 비워있는 나의 뭔가 충만하게 채워지는 것, 그것을 우린 누구한테 호소하느냐 하면 타인에게 호소해요. 타인 중에 누가 있느냐 하면 바로 하나님이 계시겠지요.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이유가 채우려고 기도합니까, 있는 것 다 가져가라고 기도합니까? “주여, 내 목숨이고 뭐고 다 가져가세요.” 이렇게 기도합니까? 아니지요. 채우려고 기도하잖아요.
그러니까 이미 기도라는 것을 하기 전에 내가 있다는 그 이유 때문에 나는 채우고 싶다는 그 기준이 계속해서 내 안에서 활발하게 작동을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오늘 본문 레위기 26장 33절, 34절, 35절, 36절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 없고, 거기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어떤 기준을 제시하느냐는 아는 바 없고 그냥 교회 와서나 기도를 하든지 뭐든지 하나님께서 내 원하는 걸 채워지기를 바라는 거지요.
만약에 내가 만족스럽게 채웠다면 그것은 내가 나답다고 할 수 있는 그 목표에 이를 때까지 이 정도하면 더는 안 주셔도 됩니다, 하나님, 라고 할 때까지 꽉꽉 하나님이 내 기도의 응답이라든지 내 봉사의 응답이라든지 보상이라든지 뭔가 꽉꽉 채워주기를 바라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기준이에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기준은 뭐냐 하면, 이 땅이 안식하기 위해서 다 나가라, 이거에요. 인간이라고 생겨먹은 것은 다 나가라는 거예요. 그러면 다 나갈 때 저 예쁘니까 남아있어도 되지 않습니까, 라는 저는 착하니까 약속의 땅에 그냥 있어도 되지요, 라는 내 기준이 써먹을 데가 없어요. 내가 사는 기준과 하나님이 사는 기준이 서로 맞지 않는 겁니다. 주님의 기준은 나가라는 거예요.
속 시원하지 않습니까. 꼴 보기 싫으니까 나가라는 게 기준이에요. 내 나라에서 쉽게 말해서 천국이죠. 또는 하나님 나라에서 나가라는 게 하나님의 기준이에요. 나가라, 다 나가라. 그런데 우리는 내가 잘 되기 위해서 타인을 모시고 싶은 거예요. 나+타인, 나와 타인이 결합하게 되면 이게 우리가 된다 이 말이죠.
사람이 남을 찾는 이유가 필요한 게 있기 때문입니다. 아가씨나 총각이 혼자 살지 않고 결혼하겠다는 것은 혼자 사는 것보다 마음 통하는 사람들끼리 같이 사는 것이 나의 나다움에 충족시킨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결혼하는 거예요. 혼자 사는 것보다 마음 맞는 사람끼리 같이 살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게 우리가 된다고요.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 하면 하나님을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을 떼놓고 생각하잔 말이죠. 하나님을 떼놓고 생각할 때 가동이 되는 우리의 삶의 기준은 무엇이냐? 윈윈, 서로가 서로에 필요한 것들을 충족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만들어가는 거예요. 내 모자란 걸 네가 채워주고 네 모자란 걸 내가 채워주자. 그러면 우리로서는 나 혼자 사는 것보다 너 혼자 사는 것보다 행복해질 수 있다는 그 행복이 우리의 기준이라면, 그 기준의 주님의 기준에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지요.
그러면 여기서 제가 빨간 걸로 주님의 기준이 뭔가 알려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주님의 기준이 뭐냐? ‘안식+인간의 배신’입니다. 이게 주님의 기준입니다. 주님의 기준에 레위기 26장 33절에서 36절, 37절, 38절 뒤에 나오는 기준에 부합하려면 필수조건으로서 뭐가 들어가야 되느냐 하면, 인간의 배신이에요.
인간이 배신하려면 뭐가 필요하냐 하면 인간이 나를 위한 기준이 필히 배신의 내용으로 들어가면 되는 거예요. 내가 나만을 위해서 남을 찾더라도 내가 꽉꽉 채우기 위해서 살고 싶다는 그 기준이 어디에 포함되느냐 하면, 주님이 주님답게 되는 기준에 포함되어서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원하는 그 조건에 부합되지 않게 하나님 쪽에서 배신해버리는 겁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찼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배신했다. 하나님은 인간의 기준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런 조건을 전제해서 하나님께선 안식을 얻고자 하는 겁니다. 옛날에 이 땅에 사람이라고 칭하는 것들의 있었는데 내가 속이 상해서 확 쫓아내버렸더니만 땅이 드디어 만족스럽게 안식이 되었다.
이게 레위기 오늘 본문에 나오는 26장 34절부터 38절에 관한 내용입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몰라도 너무 몰라요. 우리는 내가 인간으로서 하나님께 협조하면 하나님 기뻐하실 줄 알고 있어요. 그게 하나님의 기쁨의 조건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쫓겨나가는 것이 조건인데 우린 달라붙는 게 조건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여태껏 지금껏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은 게 좋지 않습니까? 너나 좋지. “하나님 좋은 게 좋습니다. 하나님 봐주세요. 하나님 살고 싶어용.” 하고 재롱을 부리면서 달라붙으면 하나님이 되게 좋아할 것 같지요? 하루 종일 맞벌이하는 아들과 며느리 대신해서 할머니가, 자기 할아버지는 집에 내팽개쳐버리고, 아들 집에 와서 아들이 낳은 손자, 손녀 둘을 저임금에 하루 18시간 근무할 때 그것도 모르는 손자가 하는 말이,
“나 할머니 좋아요. 나 할머니께 딱 들러붙고 싶어요. 이러면 할머니가 되게 좋아하지요?” 이러면 할머니가, “좀 떨어져라. 떨어지는 게 좋다. 나 좀 쉬자. 지금 팔다리가 다 끊어질 고통에 놓여있다. 너 좀 떨어져. 나이가 몇 살인데 달라붙어있나. 떨어져주면 그게 내 안식이다.” 그게 안식이에요. 사람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안식이 하는 유일한 표준입니다. 기준입니다. 우리가 도대체 무슨 하나님을 생각합니까.
여러분들이 예수 믿는 것과 십자가 믿는 걸 구분해주셔야 돼요. 예수 믿는다 하니까 제자들은 철이 없어서 예수님을 버렸지만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있고 싶어요. 이렇게 제자들보다 우리가 더 우수한 성향을 지녔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삼 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하고도 예수님을 떠났다면 제자들의 배신뿐만 아니고 그 배신이 오늘날 우리들이 배신이에요.
우리가 주님을 배신한 이유는 십자가 없는 예수님을 상대하기 때문에 십자가 없이 주님과 우리가 사이좋게 이웃사람처럼 친구처럼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십자가를 빼버리니까 그런 현상이 일어나요. 왜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는지 알아요? 비우려고 찾는 게 아니고 채우려고 한 거예요. 이 땅에선 고생했지만 죽어선 천국 가겠다. 자꾸 채우려고 하기 때문에 그래요. 채우려고 하다보니까 결국은 마지막 예수님에게는 설마 그런 일이 안 벌어질 것이란 일이 벌어진 겁니다.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는 대목인데 새삼 제가 읽어드리는 것도 민망스러운데 읽어드려야 되겠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1절,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많은 고난을 받고, 이것까지는 제자들도 각오했을 거예요. 그 다음에 죽임을 당합니다. 고난 뒤에 낙이 있는 게 아니고 고난 뒤에 뭐가 있다? 죽음이 있는 거예요.
주님이 내가 죽는다는 이야기를 한 거예요. 십자가에 죽기 전에. 제자들에겐 산 예수님이 의미가 있고 유용한 겁니다. 예수님이 살아 있을 때 유용한 거예요. 자식도 죽은 자식 말고 살아 있을 때 내 자식이라니까요. 자식으로서 예쁘다니까요. 손자, 손녀도 마찬가지고. 남편도 아내도 마찬가지에요. 살아 있을 예뻐요. 말로는 나가 죽어라 하지만 죽는 것보다 살아 있는 게 아마 나을 거예요. 뭐든지 살아 있는 것이 선이고 죽으면 악이 되는 겁니다.
제자들이 예수님 따를 때 죽는 예수 보고 따랐습니까? 나 죽는다 할 때 빈말인 줄 알았지요. 제자들이 필요한 예수는 산 예수에요. 죽는 예수 아닙니다. 오늘날 교인들도 마찬가지에요. 산 예수를 원하지 죽은 송장 예수를 원하지 않잖아요. 그게 얼마나 인간들 사고방식이 하나님 쪽 거꾸로 돼있다는 걸 반영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안 돼요. 십자가 지신 예수를 믿어야 되는데 십자가 빼버리고 대단한 예수를 믿어버리면 그건 더 채워달라는 자기 뜻의 기준을 일방적으로 하나님에게 억지를 부리고 강요하고 뒤집어씌운 거예요. 내 기준을 충족해주시기 바란다고 억지를 부린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은 이쯤해서 네 뜻 알고 내 뜻 알고 갈라서자. 베드로야 오지 마라. 우리 갈라서자. 내 뜻 모르는 베드로야, 너와는 빠이빠이다. 헤어지자. 영 사고가 안 맞는다는 거예요.
제가 어떤 문장을 말씀드릴 테니 이 문장이 어디가 잘못 됐는지 보세요. 당신 나와 결혼하게 되면 물에 손 한 방울 안 묻히게 해줄게, 라는 문장을 날렸다면 어디가 잘못된 문장입니까? 지금 저녁때라 무슨 말인지 모르지요. 물에 손 한 방울 대는 것은 없어요. 손에 물 한 방울을 대야지요.
사람들은 예수님을 볼 때에 내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해줄 그런 예수님을 좋게 여기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거예요. 이건 내가 설정한 기준이 하나님께 통할 것이라고 아주 긍정적으로 좋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 물에 손 한 방울 못 대게 해줄게, 할 때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그 기준을 들어줄 애초에 그런 뜻은 일말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물에 손 한 방울 못 댈게, 이렇게 해버리면 이런 문장은 이걸 상식으로 알고 있는 사람한테는 들어올 여지가 전혀 없어요. 예수님, 반대로 이야기한 것 아닙니까. 자꾸 반대로 이야기했다는 거예요. 모든 성경말씀, 오늘 본문 레위기 이 말씀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 반대로 이야기하신 게 아니에요?
베드로도 마찬가지에요.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은 죽어야 일이 되는데 베드로와 제자들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죽어 버리면 모든 일이 다 깨진다는 거예요. 주님은 그게 깨져야 돼야 된다는 겁니다. 너라는 작자가 너라는 인간 자체가 죽는 것이 하나님 뜻이라는 거예요. 다 깨져야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커튼(요새 말로 휘장인데)이 있다는 걸 몰라요. 커튼이 그게 끝인 줄 알아요. 커튼 뒤의 세계가 있는 줄 모르고 하나님은 나를 위한 하나님이라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최종적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해가 여러분 안 되시면, 오늘 본문 자체가 파격적입니다. 제가 예를 들 테니까 이런 말씀은 어떤지 들어보세요.
로빈슨 크루소 들어봤지요. 로빈슨 크루소가 무인도에 와서 살다보니까 해안가에 사람 발자국이 있는 거예요. 첫째 이 발자국은 자기 발자국이다. 두 번째, 자기 외에 다른 사람 발자국이다. 로빈슨 크루소가 해안가에 발자국을 발견할 때 이 섬은 무인도에요. 주인 없는 낯선 발자국을 발견했을 때 본인이 얼마나 무섭고 공포스러운지 몰랐어요. 너무너무 겁난 거예요.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예수님은 하나님이잖아요. 하나님이 왔을 때 제자들은 예수님 생각이나 내 생각이나 예수님은 하나님이지만 사람으로 왔으니까 같다고 생각한 거예요. 자,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이야기합니다. 인간이 사는 기준은 뭐다? 비우는 게 아니고 채운다. 채울 때 여력이 없으면 타인의 도움을 요청한다. 그 타인 가운데 누가 있다고 했어요? 타인 중에 제일 힘센 타인은 누구라 했습니까? 하나님.
따라서 나라는 걸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거예요. 날 죽여 달라고 기도하는 게 아니라니까요. 날 지옥 보내라고 지옥 가서 나를 죽여 버리라고 기도하는 게 아니고, 그냥 내가 아니라, 이게 참 중요한 건데, 인간은 그냥 내가 아니라 내가 여기 있는 동시에 내가 갖고 있는 기준도 함께 있어요. 심지어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할머니 몸 아픈 건 생각 안 하고 자꾸 달라붙어서 뭐라고 변명하느냐 하면, 할머니 제가 옆에 붙어있으니까 좋지요, 라고 일방적인 생각으로 할머니한테 치댄다 이 말입니다. 참 딸이 멀리 있으니 천만다행이지. 가까이 있으면 도와 달라할 때 안 갈 수도 없고. 전도사님 많이 시달려보니까 경험자 아닙니까.
어린아이든 어른이든 할머니든 할아버지든 관계없어요. 그냥 내가 여기 있다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나는 나답게 되기 위해서 어떤 기준을 세웠습니다. 그 기준과 더불어 내가 있는 거예요. 비우는 게 아니고 채우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 뜻은 뭡니까? 다 나가라는 거예요. 하나님 뜻과 인간 뜻이 맞질 않는 거예요.
그 맞질 않는다는 것이 제가 그냥 한 소리가 아니라 이 말씀이 주님도 양보할 수 없는 기준이 있고 인간도 양보할 수 없는 두 기준이 충돌한 사건이 신약에서 무슨 사건입니까? 십자가 사건 아닙니까. 예수 믿지 말고 십자가를 믿으란 말이 뭔 뜻이에요? 예수님은 내가 원하는 예수, 내가 초정하는 그런 예수로 생각하지 말고 나를 대신하는 주님이 나 보고 죽어라, 나가라고 하신 그 기준을 우리가 수용하라 이 말입니다. 십자가를 수용한다는 말은 주님이 나를 내쫓는 그 기준에 동의하라 이 말입니다. 주님이 나를 추방하려고 한단 말이죠.
그 섬에 새 발자국이 새로운 주인 없는 발자국이 등장했습니다. 로빈슨 크루소가 공포에 휩싸였어요. 왜? 여기는 누구만 있어야 된 기준입니까? 무인도니기 때문에 나만 있어야 되고 발자국이 있더라도 내가 남긴 발자국 외에 일체 다른 발자국이 있으면 안 돼요. 그런데 발자국이 있었던 거예요.
인간세계에는 인간의 기준만 동의하는 인간들만 고스란히 인간들의 세계가 돼야 돼요. 하나님은 도와주시고 인간이 살아보려고 애쓸 때 하나님이 힘을 보태줘야 된다는 것이 인간들의 합의에요. 인간세계의 합의라고. 오늘날 교회의 합의고요. 우리가 그걸 선뜻 합의에 동의했고요.
마태복음 16장에서 베드로가 죽으시면 안 됩니다. 제가 지켜드리겠어요, 할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뭡니까? 사람으로 간주 안 했지요. “어디 내 앞에서 사탄을 들이밀고 있어. 악마야 저리 가! 가. 베드로야 저리 가.” 가라 이 말입니다. 너는 십자가 질 때 갈 사람이야. 그런 뜻이에요. 열두 제자 몽땅 갈 사람이에요. 우리고 마찬가지고.
예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거예요. 하나가 될 수 없고 우리 뜻이 나라는 자아, 나를 의식하면 의식할수록 우린 주님과 하나 될 수 없는 그런 존재입니다. 그냥 나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나답게 되는 기준을 우리는 포기 못하잖아요. 그냥 내가 하루아침에 내가 됩니까? 계속 나답게 뭔가 채워야 나답게 되잖아요.
성경말씀이 이렇게 나와도 사람들은 거부해요. 이 기준을 표준을 안 믿으려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발자국을 찍어버리는 거예요. 예수님 이 땅에 와서. 로빈슨 크루소의 해안가에 발자국 찍듯이 발자국 찍어버리는 겁니다. 실제로 그 소설에서는 로빈슨 크루소가 굉장히 이성적이에요. 자를 가지고 발자국을 꼼꼼하게 체크합니다. 재보니까 이게 내 발자국이 아니었어요. 자기 발자국보다 컸어요. 나중에 보니까 이 섬이 무인도가 아니고 거기 원주민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 이름이 없어요. 왜? 인간이 기준이기 때문에. 무인도에 있는 로빈슨 크루소 본인이 기준이기 때문에 없어야 되기 때문에 나만 있어야 되고 그 외에 없어야 되기 때문에 나 말고 다른 이름이 그 섬에 일체 필요치 않았던 거예요. 필요하지 않았는데 원주민이 하나 있었거든요. 그래서 이름을 뭐라고 지었느냐 하면, 그 사람 위주로 원주민 고유의 특성을 살리는 이름을 짓는 게 아니고 내가 너의 이름을 지었다는 특성을 살리는 이름을 주는데 그 이름이 뭐냐? 프라이데이, 금요일.
그건 뭐냐 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향하여 내가 당신을 예수라 믿어줌으로써 비로서 당신은 나에게 의미가 되었다는 겁니다. 나에게 도움이 된다는 조건 하에 나는 당신을 믿는다는 뜻이에요. 이 믿음이. 하나님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하나님을 여호와를 여호와라고 인정하기 위해서 여호와는 있어줘야 한다는 생각을 우리는 갖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내가 추방되기 전까지는. 내가 주님과 좋은 관계에 있다고 스스로 착각을 할 때까지는. 이게 나의 오류입니다.
물에다 손 한 방울 묻힌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말고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겠다고 해야 인간들 사는 우리 동네에선 통하니까 하나님 당신도 우리 인간이 사는 법에 따라달라는 요청을 우리가 은연중에 하게 됩니다. 우리 없이 하나님 홀로 안식한다는 것은 반칙입니다. 그건 전혀 하나님답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우리와 함께 사는 걸 소원했잖아요. 따라서 이스라엘을 내친다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있을 수 없습니다, 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그 이스라엘이 나중에 약속의 땅에서 어떻게 됐습니까? 다 쫓겨나갔지요.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추방됨으로써 어떤 분이 저한테 물을 수가 있어요. 목사님, 우리가 하나님께 강제로 추방됨으로써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이익을 뭡니까, 라고 물을 수 있을 거예요. 로빈슨 크루소에서 발자국을 재보니까 이 발자국은 자기 발자국이 아니지요. 그러면 1이 되던 그 섬 주민이 몇 명 됐습니까? 1이 아니고 두 명이 됐지요. 두 명이 되면 평등할까요, 여기서 누가 센가, 누가 높은가, 누가 잘났는가, 투쟁이 있게 마련이겠지요.
내가 알아서 패배하겠다는 마음이 없다면 두 번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나는 그에게 주인이 되고 지배하고 내 뜻대로 다뤄져야 내가 만족해요. 기도를 하든지 아부를 하든지 뭐 헌금을 하든지 간에 어떤 방법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을 내 마음대로 다뤄질 때 비로소 나의 나다움은 계속 유지되는 거예요. 이것은 나의 안식이 되겠지요. 지금까지 이야기한 게 뭐냐 하면 안식을 놓고 주님의 안식이냐, 나의 안식이냐 대결하는 구조에요.
그런데 우리가 사는 이 땅,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우리가 출생한 땅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출생해놓고 이 땅이 누구 땅이라고 우깁니까? 내 땅이라고 우기지요. 집사님 출생지가 어딥니까, 서울입니까? 의성. 그나마 잘됐습니다. 나의 출생지가 의성이다, 라고 했을 때 내 출생에 대해서 의성이라는 방식으로 우리는 설명할 때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건 의성이 아니야. 이건 하나님이 나의 땅이야, 라고 한다면 졸지에 집사님은 출생지를 하나님께 빼앗긴 셈이 돼요. 의성에게 쫓겨난 게 돼요.
그러면 이건 어떻습니까? 나는 의성에서 태어났다는 것 말고 나는 가을에 태어났다. 상당히 낭만적이 아닙니까. 단풍이 들 때 가을에 태어났다. 주님은 말합니다. 사람들은, “당신은 어디서 태어났어요?” 주님은, “나는 아버지께로부터 왔다.” 아버지께로 왔다는 게 낭만이 아니고 나는 이 땅을 접수하러 왔다는 것과 같은 말이에요. 따라서 이 땅의 사람은 나 빼놓고 아무도 이 땅이 내 출생지라고 할 사람은 없게 만들겠다, 나가라 인간아. 이 땅은 내가 접수한다. 이 예수님의 말을 알아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아들이 자기 땅에 왔는데 영접할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아무도 없으라고 오신 거예요. 인간 같은 인간은, 예수님처럼 아버지와 함께 살 그러한 권한이나 자격이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아무도 없음을 알려주려고 온 거예요. 자기 땅에 왔어요. 그러면 누가 나가고 누가 머물러야 돼요? 주님이 머물러야 되고 나머지는 이 땅에 살 권한이 없어요.
그런데 인간들은 이 땅을 자기 땅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반대로 이야기해버리지요. 나는 아버지께로 왔다. 너희들은 이걸 아버지의 세계로 생각하는데 내가 그 아버지께로 왔다. 그런데 네 생각과 내 생각이 안 맞지. 과연 너희들이 생각하는 아버지와 내 아버지와 같다고 생각하지 마라. 이걸 틀려도 한참 틀렸다고 알려주려 오신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 생각을 잠시 접고 인간들 생각을 해보겠어요. 여고동창회 한다. 고등학교 졸업한지 40년 됐다 합시다. 열여덟에 졸업했으니까 쉰여덟 됐겠지요. 40년 만에 여고동창회를 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친구들끼리 제일 궁금한 게 뭐냐 하면 넌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가? 왜냐하면 졸업할 땐 똑같은 교복을 입었으니까.
우리 때는 똑같이 단발머리 했거든요. 옛날에 두발자유화 되지 않았을 때 왜 단발머리 하느냐? 머리에 신경 쓰지 말고 공부나 하라고 똑같이 단발머리 한 거예요. 왜냐하면 이게 자유화되면 비교가 되니까 오직 공부만. 고등학교란 통과하는 곳이니까. 영원히 고등학생 하라는 게 아니잖아요. 영원한 자리는 나중에 성인 되어서 정하고 고등학교는 그냥 통과하는 거예요. 거기다 인생을 걸고 그러지 말란 말이죠. 일종에 튜브 같은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여고동창생 가운데 A, B, C, D 있는데 기니까 예를 들어 네 명만 하겠습니다. 일단 이 사람들 나이는 몇 살입니까? 전부 다 동갑이죠. 58. A라는 여자는 자기 하는 일이 너무 재미있어서 결혼을 안 했다. 결혼 안 했음. B라는 여자는 20대 초반에 눈에 불이 붙어서 동갑인 남자 만나서 결혼했는데 5년도 안 돼서 깨져서 혼자 산다. 애도 없고. C라는 여자는 남자와 결혼해서 애 셋 낳았는데 중간에 남자가 바람 펴서 50살부터 8년 동안 혼자 산다. D라는 여자는 애 둘 낳고 여태껏 한 남자와 가정을 산다.
그리고 A란 사람은 결혼 안 하고 성공하겠다고 미국 가서 산다. 남자와 헤어져 혼자 사는 여자는 전라도에 산다. 이 사람은 경상도에 산다. 이 사람은 충청도에 산다. 이렇게 될 때에 이걸 선으로 표현해보자. A라는 사람은 줄곧 결혼 안 했으니까 이렇게 가겠지요(⟶). B라는 사람은 결혼해서 신나게 가다가 올라갔다 내려가서 살겠지요. 내 마음대로 그리는 거예요. C라는 사람은 이리 갔다, 이리 갔다, 이리 간다. D라는 여자는 이렇게 갔다.
이것을 영화에 보면 미국의 LA 야경을 보신 적 있습니까? 보게 되면 정방향의 선들이 있지요. 거기에 가로수부터해서 새까만데 불빛이 있고 다운타운의 고층건물에는 불빛이 많고 나머지는 주택가라서 적은 불빛이 정방향으로 선이 보이는 게 있을 거예요. 이 선 하나하나가 우리 인간 자기 살아온 인생 하나하나로 보자 이 말이죠.
그러면 성도는 뭐냐? 바로 이것을 위에서 볼 수 있는 드론 띄워서 전체를 보는 거예요. 그러면 이 땅에서 속했습니까, 속하지 않았습니까? 성도는 이 땅에 속하지 않은 거예요. 여고동창생이든 남고동창생이든 뭘 만나도 이 땅에 속하지 않는 겁니다. 방금 A, B, C, D라는 여자들에겐 뭐가 없느냐 하면 수평적으로 LA란 적막한 야경처럼 하나의 선만 표시되는 선으로 표현되는 자기 인생역사, 선으로 표시는 것만 있지 그걸 초월해서 볼 수 있는 안목은 이 여인들에겐 하나도 없는 거예요.
우리는 어디서 뭘 하며 어떻게 살았느냐 하면, 구구절절 소설책 열권으로도 모자란다고 하면서 밤새도록 이야기할 수 있어요. 물론 남편 있는 사람은 빨리 가야 되지만 남편 없는 셋은 밤새도록 이야기할 수 있을 거예요. 밤새도록 아무리 이야기해봤자 이건 벌레처럼 무당벌레, 자벌레처럼 땅만 기어가는 거예요.
그걸 위해서 나이 58까지 평생을 두고 피부 다 늙고 모든 것이 몸은 몸대로 갱년기에 망가질 때까지 오직 땅에 기는 자기의 선과 선을 그냥 수평적인 지상의 선, 평지의 선을 조금씩 이어가는 것, 그 외에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날아본 적이 없어요. 하나님이 세상을 보는 안목이 전혀 없는 거예요.
혹시 A, B, C, D 여고동창생 가운데 교회 간 사람도 있을 거예요. 교회 가면 뭐합니까? 교회 가서 내가 지상의 인생 잘 피게 해 달라, 채워 달라 그것 기도하다가 복음도 모르고 아무 것도 모르고 그냥 자기 잘되게 해 달라고 교회 왔다갔다하다 그게 끝이지요. 뭔가 훌쩍 독수리처럼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그런 여유분이 전혀 없는 거예요. 대부분 사람들이.
제가 LA 야경을 이야기한 이유가, 울산도 마찬가지에요. 밤 되면 전부 다 죽은 도시에요. 도로에 자동차 불빛만 있을 뿐이지 가로등으로 하여금 여긴 주택가라고 표시할 뿐이지 사람은 집구석 다 기어들어갔는지 깜깜해서 보이질 않아요. 그게 사는 겁니까? 그게 주님께서 그런 안목이나 유지하라고 교회 다니라 했겠어요?
주님께서 자기 땅에 오매 영접치 아니했다는 말, 아무도 주님 알아보지 못했단 말이 뭔 뜻입니까? 주님의 안목은 독수리 안목이에요, 드론 안목이에요. 위에서 쳐다보는 거예요. 그러면 정말로 성령 받아서 정말로 그리스도와 함께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세상을 볼 때 위에서 볼 줄 알아야지요.
세상을 볼 때 얼마나 깜깜하고 어둡고 낮에도 전부 다 평지를 기어 다니는 그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거예요. 생각하는 것, 사고방식, 아침에 눈 뜨고 하는 게 전부 다 오늘 하루하루 밥 먹고 살아야지, 하고 벌레 기어가는 것 외에는 아는 게 아무 것도 없는 그러한 존재, 이 땅에 참여한 주님의 안목과 공통성이 하나도 없는 그런 존재가 오늘날 인간들입니다. 자기 기준밖에 몰라요.
하나님 채워줘서 남은 인생 편하게 살라, 행복하게 살라, 건강하게 살라, 그런 요구조건 외에는 내 자신이 누구냐고, 내 자신이 어디서 잘못 되어서 주님께서 십자가 피 흘려 죽어야 됩니까, 왜 우리는 예수를 믿는 게 아니고 십자가 지신 예수를 믿어야 될 이유가 뭡니까, 그렇게 물을 수 있는 인간 같으면 사람 다 됐지요. 그건 일단 내 인생 기준에 문제 있다는 것을 간파한 사람이잖아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 쪽에서 인간을 배신해요. 그것은 인간이 인간들 본인이 배신한 것도 모르고 이미 주님을 배신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간과 약속은 이스라엘과의 약속은 이미 틀어진지 오래에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다 나가라고 하시는가? 여고동창생들 왜 다 지옥 보내는가? 그것은 이스라엘을 새로 모집하기 위해서예요. 마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이 제자 뽑을 때 제자 숫자 몇 명입니까? 열두 명이죠.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아브라함의 언약, 그 다음에 이삭언약, 그 다음에 무슨 언약입니까? 야곱언약. 야곱언약의 축복의 결실, 자식이 몇 명입니까? 열두 명이죠. 야곱의 이름의 뭐로 바뀌지요? 이스라엘로 바뀌지요.
완성된 야곱언약을 품은 새로운 이스라엘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열두 제자를 선택을 한 겁니다. 선택의 의미는 너는 구원받을 자격 없다는 걸 명시해버리는 겁니다. 선택을 했다는 말은 협조를 구하는 게 아니에요. 일방적이거든요. 선택은 일방적으로 선택해버리는 거예요.
선택에서 효과적인 것은 뭐냐? 제비뽑기에요. 제비 뽑히지 않은 자가 억울하다는 소리를 하지 말라는 말이죠. 제비를 뽑았다는 것은 뽑히지 않은 사람과 뽑힌 사람을 구분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독수리의 안목으로 새롭게 이스라엘을 구성하고자 하시는 거예요. 인간의 기준이 왜 문제 있으면 왜 하나님의 기준은 인간의 기준과 합치되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의 기준에 준해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드는 작업이 뭐냐 하면, 내 땅에서 너희들 이스라엘 다 나가라, 입니다.
10분 쉬고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