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4장 12절 (시험) 201006a-이근호 목사
강남-누가복음 4장 12절 (시험) 201006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4장 1절부터 13절까지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홀로 광야에서 마귀를 만난 그 대목입니다. 그 대목에서 무슨 구조적으로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인간을 빼고 간다는 것. 인간을 제치고 악마와 예수님이 직접 만나는 생각이에요. 다수의 인간들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군상이라고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많이 있지요. 인간들은 전부 다 같은 인간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악마가 그 중에서 단 한사람, 예수님하고 꼭 집어서 그렇게 만나도록 성령께서 그렇게 주선을 하셨어요. 그러면 모든 인간들은 뭐냐 하면은 들러리가 되는 겁니다. 어디 들러리냐 하면은 진실의 들러리가 되어요. 예수님 빼놓고 어떤 인간도 악마와 상대해봤자 거기서 진리가 나오지 않는다. 진실은 나오지 않는다. 예수님 빼고 어떤 인간과 상대해도 진리는 안 나오는 거에요.
그래서 내가 진리를 찾아가는 것을 철학이라고 하고 과학, 학문이죠. 그건 진리가 아니고 진실도 아니에요. 왜냐하면 우리를 제쳐놓고 사용한다. 그러면 인간은 예수님하고 상대할려고 하다가 이 자체가 이 노선 자체가 허락이 되지를 않아요. 이거는 끊어집니다.
그럼 뭐냐 하면은 여기 중간에 뭐가 끼어드느냐? 악마가 끼어들어서 예수님과 이 형성된 그 관계 속에서 진실이 나올 때, 이 진실에 대해서 그 다음에 인간은 이것을 받아 챙길 수가 있습니다. 인간은 빠지고 악마가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구성되는 진실. 그 진실에서 인간은 그 다음에 이것이 마련되고 난 뒤에는 인간은 여기에 접촉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광야에서 예수님이 악마하고 만났다는 이 사실 하나만 해도 무슨 뜻이냐 하면은 인간이 살고 죽는 것은 의미 없다. 인간이 살고 죽는 것. 내가 인생이 힘들다 안 힘들다 내가 편하다 행복하다 이 자체는 의미 없습니다. 의미 없다는 것은 진실하고 무관하다. 진리하고도 무관합니다. 인생을 힘들게 어떻게 사느냐 안 사느냐 그런 것 자체가 전혀 진실과 무관한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들러리이기 때문에. 우리를 빼놓고 일을 시키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그러면 이제 우리가 알 것은 우리는 뺍시다. 빼고 예수님하고 악마하고 무슨 일이 있었는가? 그것만 주목합시다. 일단 우리는 빠지는 거에요. 빠지게 되게 되면 여기서 정리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오심이 특정 시간과 특정 공간을 일시 사용하셨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광야라는 장소가 특정 공간입니다. 광야. 거기는 누가 있었습니까?
예수님 빼고 다른 인간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없었지요. 특정 시간, 특정 공간에 예수님께서는 악마와 만나서 진실한 진짜 진리된 것을 내놨다고 한다면 이것은 예수님께서 특정 시간, 특정 공간을 그냥 일방적으로 점유하신 거에요. 그걸 사용하신 거에요.
제가 말한 이 뜻은 뭐냐 하면은 인간이 주님을 붙잡을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진실은 주님의 일방적인 특정 공간과 특정 시간을 일방적으로 그걸 진리를 만드는 재료로 사용했기 때문에 사람이 나서서 저건 진리야 라고 손 내밀 수 없습니다. 우리 시간과 우리 공간은 안 받기 때문에.
그걸 쉽게 하면 교회는 어디 있느냐? 교회는 없지요. 교회는 없는 거에요. 그래서 교회는 출몰될 때만 교회 있고 출몰된 교회를 교회라고 붙잡는 순간 교회는 사라져버립니다. 왜? 우리는 들러리니까. 그러면 도대체 인간들은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출몰했다가 사라져버린 그 진리를 왜 우리는 자꾸 갖고자 하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인간은 객관적인 것을 소유격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은 어떤 특정 객관적 형성된 것을 소유, 내 것으로 만들어버릴려고 해요. 뭐든지 내 것. 진리, 복음, 십자가, 하나님 모조리 전부 다 소유, 내 소유. ‘~~~의’죠. ‘~~~의’로 만들어버려요. 그 앞에 주인공에 자리에 누가 있습니까? 내가 있는 겁니다. ‘나’를 위한 진리. ‘나’를 구원해 주는 진리.
왜냐하면 나는 출몰되는 게 아니고 나는 여전히 여기 고정 자리가 있으니까. 내가 고정되어 있으니까. 고정되어 있는 나. ‘나’에 의해서 예수는 나에게 무슨 도움을 주고 무슨 의미를 주고 무슨 가치를 줄 것이냐를 누가 생각하느냐 하면은 내가 일방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에요. 나는 고정적인데 놀랍게도 주님은 고정적이 아닙니다. 출몰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귀하고 만났다는 이 내용에 대해서 어떤 이 근처에 이 현장에 제자들이 있을 수가 없지요. 제자들 하나도 안됐으니까. 제자도 하나도 없어요. 뽑지도 않았어요. 예수님 단독입니다. 단독 작업이에요. 방금 이렇게 설명한 것은 이렇게 생각하면 더 쉽습니다. 인간세계의 공허함은 인간들이 모른다. 인간세계의 공허함을 인간들은 몰라요.
왜? 자기는 늘 있으니까. 거울 보면 내가 여기 있으니까. 여기 있는데 왜 공허해요? 공허할 수가 없지요. 인간은 허상이다. 허상일 수가 없습니다. 눈앞에 있고 내가 손으로 만지면 만져지고 이게 왜 허상이에요. 이미지에 불구한 거 아니잖아요. 실제가 있잖아요. 여기 숨 쉬고 있고 팔이 있고 손이 있고 다 있단 말이죠. 내가 허상이 아니지요.
허상이 아니라면 허상이 아닌 것은 반드시 거기에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들의 생각이에요. 무의미라는 것은 인정하겠는데 허상이 아니면 내가 왜 사는가? 왜 여기 있는가? 그 의미는 당연히 뒤에 붙어있는 게 당연하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러한 생각을 거부해요. 인간들이 공허함을 인간들이 모르고 있습니다. 그걸 어떻게 비유하느냐 하면은 이렇게 비유하면 쉬워요. 화롯불. 자, 화롯불은 어떤 기능이냐 하면은 화롯불이 없을 때 인간은 어두움을 모릅니다. 감지 못하죠. 화롯불이 없으면.
그런데 두 번째 화롯불이 있을 경우에는 화롯불을 피워 놓게 되면 그 주변이 어두움으로 둘러 쌌다는 것을 비로소 감지가 돼요. 빛이 옴에 비로소 얼마나 지독한 어두움인가를. 그냥 어둠이 아니고 지독한 어두움인가를, 화롯가에 손 쬐면서 아는 거에요.
사막 같은데 여행 가가지고 화롯불 피우면 그렇지 않아도 깜깜하다고 여겼는데 화롯불 피우는 그 지점으로 인하여 더욱더 깜깜해요. 정말 깜깜해요. 화롯불 없으면 그냥 뭐 공기가 밤공기네 이렇게 하다가 화롯불 피우면 진짜 칠흑같이 어둡다는 표현이 적절합니다. 더 적절해요.
인간이 어느 정도로 어두움을 모르냐 하면은 이 세상이 얼마나 어두운지도 모를 정도로 본인 자체가 어두워요. 본인도 어둡다 보니까 자꾸 긍정적 의미를 얻고자 하는 겁니다. 내가 이 땅에 그냥 태어난 게 아닐거야. 무슨 의미가 있을 거야. 주께서 나를 태어나게 한 이유가 있을 거야. 자기가 공허하다는 생각이 없고 절대로 공허하지 않다고 남들에 의해 가치가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 예수님이 빛으로 오는 순간 우리는 그 어두움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우리의 살고 죽는 것은 아무 의미 없어요. 살고 죽는 것은. 그러면 예수님께서 화롯불처럼 오셨다는 말은 예수는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은 재개발업자 같애요. 재개발업자. 자기 회사에 불도저하고 포크레인 한 100대 가지고 있는 재개발업자.
자, 서울시 봉천동에 옛날 피난민들 살던 그 동네에 시대가 지나가지고 재개발한다고 합시다. 한 몇 년 동안 보상금 토의하고 보상금 협의 끝나고 난 뒤에 보상금 다 받고 갈 사람 80% 이상 되가지고 갈 사람들은 가고 거의 다 가서 빈집 있다고 합시다. 거기 재개발업자가 거기 들어간다고 합시다. 한 달도 안 되어서 이 봉천동 언덕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뭐가 되겠어요?
폐허가 되겠지요. 완전히 폐허가 되겠지요. 이게 바로 예수님께서 마귀하고 만났을 때에 그 때 우리가 사는 동네가 이렇습니다. 그냥 폐허에요. 아무 의미도 없고 가치도 없어요. 산다는 게 다 부질없는 거에요. 산다는 게 다 부질없는 것. 구태여 부질없는데다가 의미를 찾지 마세요. 분명한 것은 이 폐허를 만든 이유는 뭐냐 하면은 왜 주께서 폐허라는 것을 분명히 하시는 이유가 뭐냐?
이 세상은 인간이 대표자가 아니고 악마가 대표자기 때문에. 악마가 대표자 된 세상은 뭐 그 꼬락서니는 보나마나죠. 하나님 보시기에. 어느 한구석도 제대로 된 구석이 하나도 없이 다 폐허입니다. 우리는 폐허에서 태어났고 폐허에서 살죠.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과 공간, 그것 다 폐허 위에 흘러가는 겁니다.
그 시간과 공간의 의미라고 하는 것은 주님께서 특정 시간대의 특정 공간대의 악마와 만나서 진실을 뽑아낼 때 비로소 그 현장에만 진리가 있고 그 현장에만 그게 의미가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현장에서. 그렇게 보시고 누가복음 4장 읽어보면 여러분 의미가 확 당겨옵니다. 폐허를 빼지 말고 읽으세요. 우리가 살고 죽고 의미 없다는 것. 우리는 아예 들러리로 여기고 우리 자신을 빼버리세요.
그러면 그 현장은 뭐냐? 딱 석자가 적당해요. ‘음소거’. 음소거가 너무 난해합니까? 그러면 쉬운 단어 할께요. ‘먹먹함’. 갑자기 먹먹해져 버려요. 이 세상 전체가. 음소거되는 거에요.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는. 요란스럽게 시끄러워야 변화가 있을 때 변화를 하는데 그런게 없어요. 완전히 모든 것을 음소거에요.
이 말은 뭐냐? 하나님께서 인간아 너희들은 가만 있거라. 제발 좀 가만 있거라. 그냥 뭘 하든 어디서 살든 그냥 살아. 그냥. 그냥 뭘 하든지 미국 가서 살든지 북한 가서 살든지 모르겠어. 뭘 해서 살든지 살아. 어떻게 살아도 너는 먹먹해. 너는 먹먹한 거에요.
진리는 네가 이 땅에 살면서 구한 진리는 쪼가리 난 이불 같아가지고 한창 크는 사춘기 남자 아이들 보세요. 남학생들. 엄마가 이불 덮어줬는데 2년도 안 지나가지고 발 나오죠. 짧아가지고. 이불이 작아져버린 거에요. 몸은 큰데 다 못 덮지요.
인간이 만든 진리라고 하는 것은 덮어보면 슝슝 사지가 다 나와요. 이쪽은 덮었는데 이쪽은 안 맞아. 이쪽 사항은 그럴싸하게 적용이 되는 것 같은데 이게 또 의문점으로 남는 거에요. 온전하게 덮을 수 있는 온전한 진실과 진리는 인간세계에서 없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이 먹먹함, 우리를 배제하고 악마하고 싸우는 이유가 뭐냐? 이게 중요해요. 하나님께서는 시험받는 예수님의 몸을 장차 성도가 된 우리에게 떠넘깁니다. 떠넘겨버려요. 그러면 우리는 몸은 하나인데 여기 주인공 쟁탈전이 벌어져버리지요. 나 나름대로 의미 있습니다. 객관적인 것을 나는 소유화시킵니다라고 버티는 것과 네 육체 내가 접수할게. 너는 악마를 안 만났잖아. 악마의 시험을 못 이겨. 네가 네 식대로 하는 악마를 이길 수가 없다고. 악마 이길 수가 없다 이 말이죠.
내가 시험을 이겼잖아. 그럼 나한테 일임해야지. 너의 모든 행사를 여호와께 맡겨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 안에서 이루리라. 오늘 이 본문 두 번째 하지만 잊어버릴 수가 없어요. 뒤에 있으니까. 방금 한 걸 여러분들이 실력들이 있기 때문에 좀 진짜 난해하게 써보겠습니다.
강의한 것 중 가장 난해한 이야기가 아닌가 모르겠습니다만은 하나님 안에 예수님과 예수님 안의 하나님은 달라요. 이게 다릅니다. 하나님 안에 예수님은 인간이 관여할라고 만들어 낸 하나님이 이 하나님이에요. 하나님 안에 예수님은 하나님은 일단 재벌 총수, 그럼 예수님은 재벌 2세라는 그러한 감각을 가지고 이해가 시도되는 거에요. 인간 속에서.
왜? 우리는 신을 안다고 여기기 때문에. 일단 하나님부터 먼저 하나님이 제일 높은 분이니까 챙기고 그 다음에 부수적으로 추가해서 우리가 모르는 새로운 정보. 아! 하나님에게 아들이 있었어? 그럼 아버지 먼저 챙기고 그 다음에 숟가락 하나 얹는 식으로 아들까지 챙기면 온전하게 하나님까지 아는 게 아니냐?
오! 뒤에 보니까 부수적으로 또 하나 달라붙은 분이 있어요. 그게 하나님의 영, 성령. 그래서 삼위일체. 그까짓 것 뭐 이해하기 쉽잖아요. 전부다 아버지, 아들, 영 전부다 한곳에서 나왔기 때문에 하나가 되기 때문에 세분이고. 삼위일체 뭐 어려운거 있어요? 방금 10초만에 이야기 했어요. ‘삼위일체’. 이게 뭐가 어려워요.
하나님은 하나이시며 세분으로 일하신다. 세가지 기능을 하신다. 이거 알았으면 몽땅 한꺼번에 진리에 대해서는 다 습득한게 되잖아요. 그렇지요? 그런데 그게 바로 엉터리다를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인간 손에 붙잡히지 않고 단독으로 마귀를 만난 거에요.
왜냐하면은 인간은 내가 마귀 속에 속해서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것을 인간들은 인정을 안할려고 해요. 마귀의 생각에 중무장되어서 악마적 생각을 품고 하나님을 삼위일체다 하든 이위일체다 하든 하나님을 내뱉는다는 그런 한계를 갖고있는다는 것을 생각 안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 먼저 챙기고 그 다음에 메시아 챙기겠다는 것은 그 당시 유대인들의 생각이고 그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못 박아 죽였지요. 주님께서는 어떤 방법이냐. 예수님 안에 하나님 되야 되는데. 정확하게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아니고 아버지에요. 왜냐하면 이 아버지는 예수님만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다른 누구의 아버지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철저하게 폐쇄적입니다. 그 누구로부터도 알려지지 않은 하나님. 그걸 에베소서 1장이나 3장에 보면 이게 비밀입니다. ‘비밀’.
그러면 악마의 하는 일은 이제 드러났습니다. 악마가 예수님 만나기 전부터 인간을 다루었던 방식은 이 비밀은 수수께끼죠. 이 비밀 자체가 아예 비밀 자체가 없다고 여기는 일을 악마가 인간 세계에 유포하고 있는 겁니다. 비밀은 없다. 비밀 있어도 인간은 찾아낼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거에요. 비밀은 폐쇄적입니다. 예수님 자체가 비밀이거든요. 예수님 자체가 비밀이에요. 따라서 예수님이 다가온다는 것은 비밀이 다가오는 거에요. 비밀 자체가 다가오는 거에요.
그러면 거기서 여러분들이 악마라면 그 비밀에 의하면 악마는 이미 지옥불에 들어간 게 확정되었기 때문에 악마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비밀이 이 땅에 움직이고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안 들키게 하는 거기에 전력을 다하겠지요. 그 방법이 뭐냐? 궁금해요? 악마가 우리에게 비밀이 있고 수수께끼가 있다는 것을 그런 것은 아예 없다는 사실을 그런게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한 악마의 방법. 궁금해요? 궁금하면 오백원. 이겁니다. 이거에요.
노동입니다. ‘노동’이에요. 마르크스적인 노동이고 리카도의 노동, 경작이란 노동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자기가 일하게 되면 그 일의 의미가 있겠어요? 없겠어요? 수고해서 일했는데 힘들여서 이마에 땀 흘리며 수고해서 일했는데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그 노동을 함으로써 내가 더욱 고정적 존재가 되고 고정적 존재에서는 객관적인게 필요해요.
노동의 객관성은 바로 임금이라고 합니다. ‘임금’. ‘삯’. 월급이에요. ‘월급’.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일했는데 월급 보니까 분명히 300 원했는데 월급 보니까 50만원 주더라. 그러면 화나겠어요? 화나지요. 그 때 우리는 뭘 들이대냐 하면 계약서를 들이대는 겁니다. 계약서. 노동 계약서 하니까 점점 더 현실적이죠. 복음이 현실적입니다. 계약서가 뭐냐 하면 이게 바로 인간의 법이에요.
자, 악마의 방법은 인간의 법으로 신의 법을 뭉개버리는 겁니다. 인간의 법으로 신의 법을 뭉개버려요. 이 땅에서 인간들은 신의 법을 어디서 찾느냐 하면은 이거는 가족과 가정에서 찾아요. 왜? 엄마가 설거지 한다고 아빠보고 월급 달라고 하던가요? 이상해. 일은 했는데 값을 못 받는 것. 일은 했는데 값을 못 받는 것 어느 직장에서 그런 현상이 일어나지요?
어느 공간에서? 일은 하면서도 값을 못 받는 공간이 어디 입니까? 가정이잖아요. 가정. 가족이잖아요. 가족이라고요. 인간은 태어나면서 자기 엄마, 아빠, 가족들, 형제들 밖에 몰라요. 그런데 이 가족은 뭐냐 하면은 자연법이에요. 인간은 혈육적으로 타고난 법 있잖아요. 자연법. 이 신의 법은 성경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인간 세계에서 이건 세상법이 관여하지 못한 아주 고상하고 존엄한 것. 사람들은 그렇게 분류를 한다 이 말이죠.
노동을 왜 합니까? 자기 결혼한 가정 밥 먹고 살기 위해서 하잖아요. 또는 결혼 안하신 분은 나 혼자 밥 먹고 살기 위해서 한다고요. 그럼 내가 나의 법은 자연법이에요. 나는 절대적이니까 신의 법이죠. 그러나 세상에서는 나 여기 있다 돈 줘 하면 돈 아무도 안 줍니다.
왜냐 사회에서는 노동법, 인간의 법이에요. 줄 것 주고 받을 거 받아 챙기라는 노동법. 노동에 있다. ‘노동’. 일도 안했는데 월급 줄 수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대한항공에서 다 쫓아내잖아요. 일해야 주지 일도 안했는데 무슨 돈을 생기겠습니까. 안주지요. 섭섭하게 생각하면 안돼요. 세상의 법이 이렇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이 가정법에 있는 이것을 이 세상에 가정만 있습니까? 국가도 있잖아요. 국가가 일을 하기 위해서 가정법을 이걸 쪼개야 되겠지요. 쪼개는 방법이 뭐냐 하면은 이거에요. 쪼개는 방법이. 전쟁입니다. 옛날에 봉건사회부터 해가지고 전쟁을 하게 되면 무조건 각 집안의 남자 하나는 다 나와야 돼요. 뮬란이라는 영화에도 나오지요. 전부다 하나는 끄집어내야 돼요.
그러면 가정에서는 울고불고 합니다. 전쟁하지 않더라도 전쟁을 대비해서라도 그 가정의 맏이는 아들 둘 있으면 아들 하나는 군에 가도록 되어있어요. 지금 법은 안 그래도 옛날 법은 그랬어요. 4대 독자는 군에 안가고 그런 거 있었단 말이죠. 지금도 모르겠습니다만은. 그러면 그 집안에서는 아들 군에 간다고 엄마가 논산 훈련소에 따라 와가지고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지요. 면회 오면 치킨 사가지고 김밥 싸가지고 가지요. 군대 갔다왔어요.
어쨌든 간에 중요한 게 아니고 의미 없으니까. 우리가 성경말씀을 이게 무슨 뜻입니까? 이렇게 보지 말고 현실과 결부시킵시다. 현실은 내가 노동함으로서 나의 출근부터 월급날 될 때까지 모든 관심은 이 직장에서 내가 잘리지 않아야 되고 여기에서 돈이 있어야 내 가족과 내가 산다. 여기에 몽땅 모든 정신을 쏟아붓게 되면 봉천동 폐허가 생각이 납니다.
모든 것이 공허하다는 사실이 그게 감추어져버린 거에요. 지금도 우리가 그렇게 살아갑니다. 진실? 누가 진실을 말합니까? 진실? 진리? 그딴 거 알아서 뭐하는데. 돈이 중요하지 그 진리, 진실 알아서 뭐할건데. 그거는 배부를 때 시간 남을 때 나 천당갈려고 대비할려고 보는 것이지요. 이 노동을 하게 되면 음소거가 아닙니다. 막막한 게 아니라 되게 바빠요. 직장갈려고 준비할려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그러면 노동을 하게 되면 결과는 노동의 결과는 뭐냐? ‘산다’지요. 그러면 방금 제 이야기를 들었으면 여러분 이런게 떠오를 거에요. 사는 것이 뭘 방해한다? 구원을 방해하는 거에요. 사는 것이. 내가 열심히 살면 살수록 구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거에요. “예수 이름, 피 믿었으면 구원받겠지” 끝이에요. 구원이 현실화 되지 않는다.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현실 속의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 내가 구원을 훼방하는 자에요. 내가 구원을 방해하는 자가 되어버린 거에요. 이게. 그러다보니까 예수님하고 악마가 만났다. 예수님하고 악마가 만났다고 하지마세요. 예수님하고 내가 만났다고 생각하세요. 그래야 이 본문이 이해가 돼요. 예수님과 내가 만났다. 그리고 나는 평소에 할 소리가 이만큼 있다. 할 소리를 다 터놓는 거에요.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한테 먼저 들이대고 공격하거에요. 내가 열심히 노동했는데, 나 왜 힘들게 삽니까? 노동했는데. 월급이 왜 이것밖에 안됩니까? 내가 죽기 싫고 살고 싶은데 예수님 당신이 나한테 도와준 게 뭐가 있습니까? 그렇게 이야기하죠. 그럼 예수님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이렇게 이야기해요. 그 누구도 나를 건들지 말아야할 조건을 내가 노동해서 이걸 챙기게 되어있어요.
나는 할 때 여러분 ‘나’ 하니까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이 ‘나’인줄 알지요. 나를 조금 더 뒤에 붙여봅시다. 나는 어떤 존재냐? 거울로 봐서는 몰라요. 나는 어떤 존재냐 하면은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어떤 존재냐 하면 그 누구도 나를 건드리지 말아야 될 조건을 내게 쌓는 것. 내가 둘둘 감는 것. 그게 나에요. 건들기만 해봐. 진짜 죽여버릴 참이에요.
그런데 아까 제가 말한 세상의 모든 객관적인 것은 뭐가 된다? 소유욕이 되지요. 그러면 조금 더 구체적으로 하게 되면 나의 것이 되는 거에요. 나의 것. 그래서 소유를 둘러싸게 되면 이게 바로 ‘나’라는 존재가 되는 거에요. 내 것이 없으면 자살해야 됩니다. 왜? 내 것이 없으면 그건 존재가 아니에요. 죽은 존재에요. 살아도 죽은 것과 마찬가지에요.
그러나 내 것이 있다면 그게 내 것이 되는 거에요. 내 것이 있다면 내 존재가 되는 겁니다. 죽고싶지만 자식 봐서 못 죽는다 이게 무슨 뜻이에요. 내가 지금 죽고 싶지만 자식 봐서 내가 지금 기어이 살아있다 이거 무슨 뜻입니까? 자식은 뭐가 돼요? 자식은 내 소유가 되는 그 자식을 둘러치면서 그게 나의 존재가 돼요. 자식보고 네가 있기 때문에 내가 있는 거에요.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나는 힘써 노동을 하게 되고 그 노동을 하면서 자연적으로 뭐냐? 인간 대 인간이 만든 법에 억매여야 되고 그 법에 의해서 결과는 어디에서 돌리느냐 하면은 전부 다 나의 자연적인 법. 내가 떨어질 수 없는 혈육적인 관계, 가족이죠. 내 가족과 가정을 위해서 그걸 전부 다 저축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매정하게 끊어버리는 법이 있다고 했지요. 그게 무슨 법이라고 했습니까? 국가. 국가가 뭘 해요? 전쟁을 벌리게 되면 전부 다 착출돼요. 그 귀한 자식들. 그래서 출애굽에 보게 되면 하나님과의 인간과 전쟁할 때도 맏이가 착출되었습니다. 그걸 유월절이라고 하지요. 유월절. 왜 둘째는 안 되고 맏이여야 되느냐? 맏이가 아버지 어머니를 대리하기 때문에.
그걸 성경에 보면 기력의 시작이다. 나의 시작을 내가 죽기 전부터 ‘나’라는 존재가 시작이 되는 것은 맏이가 있기 때문에 그렇다 이 말입니다. 아버지의 모든 뜻은 맏아들 되신 예수님이 다 갖고 있잖아요. 맏이. 그래서 로마서 8장에 보면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예수님의 맏아들 형상을 본받기 위해서. 맏아들이 맏아들 됨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가 성도가 양자로 같이 성령받은 겁니다. 성령을 받아야 예수님이 맏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요.
다시 해볼께요. 중요한 것. 이렇게 이야기하고 여러분들이 한번 이 차이점을 여러분들 속으로 한번 생각해보세요. 하나님 안에 예수님과 예수님 안의 하나님의 차이점. 막상 이야기할려니까 모르겠지요? 막상 이야기하면 모르겠지요. 하나님 안에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는 하나님을 안다는 전제하에 예수님을 거기에다가 하나의 추가적인 내용으로서 딱 갖다붙이는 거에요. 하나님을 안다는 조건하에.
그런데 하나님을 지금 누가 안다는 거에요? 내가 안다는 거죠. 나는 뭐다? 나는 누구든지 나를 건드리지 않는 조건으로 무장된 나에요. 그냥 ‘나’가 아니고. 거울 앞에 있는 내가 ‘나’가 아니라 거울 앞에 있는 나는 ‘나’가 아니죠. 내 얼굴 보인다고 내가 아니라 나는 나의 그 본성을 알아야 돼요. 누구든지 나를 건드리지 않는 조건하에 나에요.
그러면 나는 누구를 필요로 합니까? 타인이에요. 남이에요 남. 그러니까 악마가 인류를 대표해서 광야에서 오늘 누가복음 4장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은 결국은 악마는 철저하게 예수님을 뭐로 봅니까? 뭐로 봐요? 타인으로 보잖아요. 타인으로. 남으로 본다고요. 그런데 예수님은 홀로 오셨지만 자기 백성을 남으로 보지 않고 자기 속으로 집어넣어버리죠. 이게 인간의 힘으로는 가능치 않지요. 불가능한 일입니다.
나는 누구든지 나를 건드리면 가만있지 못하는 조건을 걸쳐서 ‘나’라는게 규정되는 거에요. 그때의 이 나는 몸을 보고 ‘나’라고 하지 않고 이 나를 자아라고 합니다. ‘자아’. 그렇다면 아까 우리가 이야기한 것처럼 이 자아는 어떤 일을 합니까? 노동을 한다고 했지요. ‘노동’. 노동을 하니까 노동을 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기존의 현실에 인간 대 인간이 만든 법에 종속되는 거죠. 법이니까.
몇 시간 일하면 월급 얼마 준다 법 아닙니까 ‘법’. 이런 법들, 인간의 법들. 인간의 법이 있는 한 인간들은 인간들 세상에서 사는게 굉장히 요란스럽죠. 음소거가 안됩니다. 먹먹함이 아니에요. 되게 바빠요. 무지하게 바빠요. 그런데 광야에서 광야 분위기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시험받은 광야는 조용해요. 모든 인간을 다 배제해버렸어요.
자, 이제 여러분 어느 쪽이 진리입니까? 분주하고 요란스럽고 바쁜 시장통이 진리입니까? 아니면 인간 빼버리고 악마하고 예수님 만남, 그 만남에서 진리가 나오는 겁니까? 어느 쪽이 진리입니까? 악마하고 예수님하고 진리죠. 왜? 우리는 들러리니까.
우리는 결과만 기다릴 뿐이에요. 결과만. 결과만 기다릴 뿐이지 내가 나서서 어떻게 하겠다 이런 것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마치 드라마 보는 것이 지루하거든요. 이렇게 보세요. 제일 마지막회만 보시면 됩니다. 앞에 것 설명 다 해줘요.
인간은 자기만 쳐다보게 되면 그 자체가 사실을 의미에서 배제된 죽음이지요. 템플대학교 신입생 여학생들이 파티에서 셀카봉으로 사진 찍는다고 4층에서 두명이나 떨어져 죽진 않고 다쳤다고 되어있지요. 셀카봉, 본인이 본인 찍는 거에요. 세상 사는게 그렇잖아요. 다 본인이 본인 위해서 살잖아요. 본인이.
자기의 노동 이 전체가 이미 인간에게는 진리가 없는게 아니고 진리가 있어요. 진실이 있는데 누구를 위한 진실입니까? 나를 위한 진실이죠. 나를 위한. 나를 위한 진리고. 내가 여기 고정적으로 있다는 거에요. 그러나 고정적으로 있을려면 우리가 시간과 공간이 나에게 쏠려야 되는데 우리는 내가 점령하고 있는 시간과 공간에 주님께서 자동적으로 오지를 않는다는 거에요. 주님은 나름대로의 시간과 공간을 따로 그걸 사용하고 있다 이 말이죠.
우리가 주님을 붙잡아도 주님께서는 가보면 그 현장에 없어요. 지금 가봐도 주님 안 계셔요. 저도 이스라엘 광야에 가본 적 있지만 주님 못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특정 시간과 특정 공간을 다녀갔지요. 그 다녀간 특정 시간과 특정 공간은 그냥 다녀간 것이 아니고 누굴 만났습니까? 영원한 타인, 그냥 타인이 아니고 만났다가 그냥 헤어지는게 아니고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없는 영원히 갈라서야 될 타인, 그 이름은 사탄입니다. 악마. 악마에요.
악마와 만났던 그 몸을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맡겨버립니다. 안겨버립니다. 던져놔버립니다. 악마와 만났던 예수님. 그 예수님 만나는 순간 아! 내가 하는 모든 생각이 예수님 힘들게 하기 위한 악마의 생각을 악마가 대변했구나 하는 사실을 우리가 접수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다음부터는 신앙생활할 때 그야말로 신앙생활이 정말 자유롭지요. 고맙소. 고맙소. 그냥 고마운거 밖에 없지요. 고맙고 그 누구한테도 나한테도 누구한테도 미안하다 할 이유가 없습니다. 전혀 미안하면 안돼요. 우리가 미안하다 할 권한이 없습니다. 뭐 잘할 수 있어야 그다음에 앞으로 잘할게요 가 되는데 애초부터 우리한테 주님께서 어떤 것도 원한 적이 없는데 뭘 미안해요. 원한 적도 없는데.
예를 들어서 자식이 아들이 논산훈련소 군에 갔는데 그 상사가 자기 이등병보고 막 나무래고 일 그렇게 하면 너 벌 받는다 고쳐라 이렇게 하니까 우연히 그 소리를 듣고 엄마가 군대까지 찾아와가지고 에미가 못나서 그렇습니다 하고 나올 때 그 부대장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아줌마는 상관없고요 아줌마는 상관없어요 하는 것처럼 빼는 것처럼 우리가 주님한테 미안할 게 없어요. 우리는 애초부터 상관없어요. 구원은 상관없다니까요.
구원은 아버지하고 아들하고 의논해서 일방적으로 합격통지 내려가지고 누구는 구원하고 누구는 버리기로 확정해서 자기 백성 훑어서 가져가는 것뿐인데 왜 우리가 주님한테 미안해야 됩니까. 자꾸 우리가 나를 고정적으로 봐가지고 잡을려고 하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주님은 잡히지 않아요. 주님은 우리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한다고 포착되는 게 아니에요. 거기에 적당한걸 제가 생각하다가 적당한 노래가 있어서 적어왔습니다.
이연실이라고 옛날 우리 60년대에 불렀던 목로주점 가사에 보면 “멋들어진 친구 내 친구야” 하는 노래거든요. 중간에 보면 “삼십 촉 백열등이 그네를 탄다. 잡을 수가 없어. 삼십 촉 백열등이 그네를 탄다. 그네를 탄다” 늘 이렇게 우리는 고정적인데 주님은 종잡을 수없이 흔들려요. 주님 어떻게 하면 만날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 네가 진리야? 왜 나를 만나? 너는 노동이야.
기적은 내가 기적이야. 주님이 미라클. 주님이 기적이지 우리는 기적이 아니고 노동이에요. 그것도 열심히 살려고 하는 노동에 불과한 겁니다. 우리는 인간의 법에서 굴레에서 못 벗어나요. 그런데 인간의 법보다 더 센 거 무슨 법이라고 했습니까? 아까 국가의 법이죠. 그 국가가 바로 짐슴의 나라, 악마의 나라입니다. 자, 계속 진도 나가보겠습니다. 아직 본문 들어가지도 않았어요.
어디까지 이야기했느냐 하면은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구원을 훼방한다. 내가 살아 있기 때문에 구원을 훼방하는 거에요. 구원을 방해하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가 왜 주님을 붙잡을 필요도 없고 붙잡으려 해도 소용이 없는 이유가 평소에 나의 모든 생활이 주님의 구원을 훼방하는 짓을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은 노동이었고 노동에서 소유가 생기고 소유를 둘러치는걸 뭐라고 했습니까? 이게 존재에요. 내 것이라도 있어야 살맛이 나요. 내 것도 없는데 왜 삽니까? 내 것도 없는데. 집도 논도 아무것도 없는데 ‘나’라는 자체가 껍데기만 남아있는데 살 수가 없지요. 내 것을 존재하기 위해서 노동을 할 수밖에 없고 그게 소유가 돼서 그 소유가 내 것이라고 있어야 산다.
그런데 내 것이라는 것이 노동이 되어버리면 반드시 세상 법에 묶이게 되어있다 이 말이죠. 세상법이 뭐냐? 짐승이고 아까 화롯불 이야기했지요. 그거 뭐라고 했습니까? 이 세상은 서로가 서로에게 어두움인줄 모르고 있는 거에요. 그런데 “빛이 오매” 비로소 어두움이 제대로 짙은 어두움답게 빛과 대비해보니까 아 이게 악마에 속한 세상이구나 라는 것을 이렇게 밝히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본문 한번 봅시다. 그렇다면 여기서 노동에서 소유, 존재, 존재 다음 살아야 되겠다. 그러면 예수님 앞에 악마가 영원한 타인이다라는 말은 도약할 수 있는 길은 없어요. 타인이니까. 나는 누구든지 나 건드리면 건드리지 말아야 할 조건을 만드는데 노력을 다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악마는 자체적으로 자족해서 건드리면 안 되는 조건들을 만들어놨어요. 그것들을 인간들도 그 마음을 인간에게 그대로 주었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조치에 없는 한, 악마의 자리 말고 여기에 제자들이나 우리가 들어선다 하면 예수님하고 얘기가 통하겠습니까? 안 통하겠습니까? 십자가 전에는. 안 통하지요. 악마도 건너가지 못하고 우리도 마찬가지로 예수님 광야에서 만나봤자 예수님하고 얘기가 통할 수가 없어요. 악마로 하여금 우리가 아 이래서 우리는 주님과 괴리상태에 있구나 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마귀와 만나서 뚜렷하게 드러내줍니다.
문제, 원인은 뭐냐? 살아있다는 거에요. 그러면 살아야겠다와 구원의 관계는 중간에 뭐가 있어야 돼요. 그냥 살아야겠다고 해서 구원을 챙겨버리면 이거는 구원을 방해하는 거에요. 그러면 살아야겠다가 중간에 뭐가 있어야 돼요. 죽어 마땅하구나가 경유해야 비로소 그 때 보이는 것이 뭐냐 하면 그게 구원이 보이는 겁니다.
살아야겠다가 아니라 살아야겠다라는 그 자체가 나를 죽이는 내 발등을 찍는 그러한 의식이었구나를 아는 게 그럴 때 내 자신이 자살한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고 내 자신이 살아야겠다는 이 자체가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짓인 것을 아는 그 순간이 바로 비로소 구원이 보이는 순간이에요. 구원되는 순간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살 이유가 없어요. 천국에는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고 천국은 우리가 주님께서 시키시는 일을 하는 곳이 천국이죠. 산다가 아니라 한다. 제가 주일날 설교했잖아요. 산다가 하는 거에요.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하는 거에요. 내가 인생이 어떻게 풀리든 간에 그것은 내가 관여할 바가 내 인생에 대해서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에요. 만약에 주님이 우리와 하나가 되지 못하면 자꾸 둘둘 말리는 것이 뭐냐? 누구든지 나 건드리면 이 정도 되니까 나 건드리지 마라 조건만 자꾸 추가되고 추가될 뿐입니다.
이렇게 보셨으면 오늘 본문을 들어갈 수 있는 준비는 됐다 싶습니다. 4장 1절에 한번 봅시다.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이렇게 되어 있는데 거기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럼 성령 없이는 예수님께서 악마를 만날 수 없다 이렇게 되겠지요. 주선을 한 겁니다. 자, 예수님이 계시고 여기 악마가 있는데 여기 중간에 주선을 누가 했습니까? 성령께서 주선을 해서 둘이 만나게 했습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모든 인간은 빠집니다. 모든 인간은 이 공간과 이 시간에 대해서 전혀 도통 모릅니다. 이런 일이 있었는지도 몰라요. 자기 노동하기 자기 밥 먹고살기 바빠가지고. 진리가 여기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몰라요. 성령에서 집어넣은 것은 이미 이 세상이 악마의 세계라는 것을 굳히기 위해서 분명히 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그래야 이 세상의 모든 산과 들과 바다는 뭐해야 돼요? 불 심판을 당해야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만나서 이 세상이 개선되면 안돼요. 이 국가가 좋은 국가가 되면 안돼요. 절대로 아름다운 우리나라 하면 안 된다니까요. 이 세상은 어떤 경우라도 살만한 세상 되면 안 됩니다. 그걸 추구해서도 안 되고. 성도는 이 세상이 살만한 세상 되라고 기도하는 게 아니에요. 이 세상이 망하기로 운명 지어진 세상인 것을 알기를 원하는 기도를 해야지요.
악마가 있다는 말은 지옥이 있다는 말이에요. 이거는 아주 충격적인 이야기잖아요. 어느 교과서에 나옵니까 지옥이 있다는 게. 악마가 있다는 게. 심지어 주일에도 아이들에게 지옥 이야기하지 말라고 압력 받는 입장인데. 지옥이 있고 이 세상에 악마가 있다는 말은 곧 무슨 의미냐 하면은 인간이 백날 해봐야 소용없다는 이야기거든요. 소용없잖아요 그래. 맞잖아요. 소용없잖아요. 그게 얼마나 마음 편하게 다가오는 이야기입니까.
내가 뭘 해도 내가 뭘 꼭 해야 된다 이게 불편해요. 성도한테는. 이거 에비앙 이거 먹어봤자 다른 물보다 비싼 물 먹어봤자 뭐 하겠노. 좋다고 소고기 사먹겠나. 뭐 하겠어요. 고맙습니다 써놔 봤자 목마른데 아무거나 먹자. 이래야 마음 편하지 나는 에비앙 먹었으니까 빰빠라 빰빰빠 뽀빠이처럼 시금치 먹은 것처럼 힘내고 그런 거 기대하지 마세요. 기대하는 게 죄입니다.
인생의 어떤 기대나 목적을 만들지 마세요. 희망을 갖지 마세요. 우리는 의미 없습니다 그거. 그냥 하루하루 주께서 맞닥뜨린대로 그냥 휘파람 불면서 그냥 시키는대로 살 뿐이죠. 괜히 욕심부려봤자 더 살기 좋은 내 미래, 더 행복한 나의 가정, 더 우수한 우리나라. 이번에 대통령 한번 바꿔볼까? 바꿔 봐도 몰라 나훈아가 하면 몰라도 다른 사람 안 된다니까요. 나훈아는 자기목숨 논개처럼 받치겠다는데 뭐. 이 세상은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것이 그거는 불행할래야 불행할 수가 없어요. 절로 행복이 돼요.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