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3장 21절 (임플란트 구원) 200922a-이근호 목사
강남-누가복음 3장 21절 (임플란트 구원) 200922a-이근호 목사
오늘은 누가복음 3장 18절부터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3장 18절. “또 그밖에 여러 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분봉 왕 헤롯은 그의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자기가 행한 모든 악한 일로 말미암아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그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 그렇게 되어 있지요.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이렇게 되어 있는데 세례 요한이 헤롯에 대해서 책망을 했다고 되어 있어요. 배다른 그 자기 남동생의 아내가 헤로디아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혼을 했는데 거기에 대해서 세례 요한이 지적을 했어요. 지적한 이유는 이것 때문에 지적한 거에요. 원래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 때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거든요 인간은. 그런데 이게 빠져버리면 그냥 흙입니다.
흙+형상 할 때에 이게 하나님께서 인간이라고 인정하는 거에요. 이 점에 대해서는 인간으로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이 인간에게는 없어요. 왜냐하면 형상은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에 그 인간이 그 형상을 잃어버리면 다시 회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 없으면서 형상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인간의 형상을 신약적으로 하나님의 형상대신 인간의 형상이죠.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의 형상이 긍정적이죠. 긍정적, 옳은 거죠. 그런데 인간은 뭐를 긍정으로 보느냐 하면은 인간의 형상을 긍정으로 보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의 형상은 이것부터 시작점이에요.
출발점으로 하니까 인간의 형상에 있는 것에 대해서 자체적으로 존엄성을 고수하지요. 존엄성을. 어떻게 인간이 인간을 죽일 수 있느냐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것이 사형이라면 그러면 인간을 코로나로 죽이는 하나님은 어떻게 됩니까? 인간 입장에서 완전 사형감이죠. 사형감이 되는 거에요.
그럼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 인간이 필요해서 인간을 만든 거에요. 하나님의 형상이 필요해서 인간을 만드셨잖아요. 그렇지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형상에서 뭐로 변하시느냐 하면은 하나님의 형상을 이게 긍정적이니까 이건 부정적이니까, 부정적인데서 하나님의 형상을 하는 이 작업을 하나님이 하십니다. 이 작업을. 하나님의 모든 활동은 인간의 형상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는 작업이에요.
그럼 하나님의 형상의 원형, 모델이 있어야 되겠지요. 모델이 누구냐 하면은 골로새서에 1장 15절에 보게 되면 하나님의 형상을 누구라고 하느냐 하면 바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이렇게 되어있거든요. 하나님의 형상은 보이지 않는 거에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 보이는 형상으로 나타났어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 보이는 형식으로.
그러니까 하나님 보고 일 안한다 하지 마세요. 하나님 일하시고 계십니다. 어떤 일을 하느냐 하면은 인간의 형상을 부정하는 일을 해요. 부정하는 일을. 자, 헤롯의 사람들은 오늘 본문을 보면서 여기 누가복음 3장에서 인간의 형상을 하나님께서는 부정하지요.
부정하기 위해서는 지적질해야 된다 이 말이죠. 선지자로 오신 세례 요한이 누굴 지적했느냐 하면은 헤롯보고 지적한 거에요. 그건 악하다고. 지적질을 했는데 헤롯이 도로 누굴 옥에 가두게 했습니까? 하나님의 선지자 세례 요한을 옥에 가두어버렸지요. 그래서 여기 본문에서는 한가지 악을 더했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자체가 품고 있는 그 자질, 품고 있는 그 자질이 뭐냐 하면은 인간은 인간이 인간을 고집한다 이 정도가 아니고 그 인간이 인간 자체를 긍정적으로 보는 것으로 인하여 필히 누구를 부정으로 보느냐 하면은 이쪽 하나님의 형상을 거부하고 공격하는 성향을 지녔다 라는 사실을 견주기 위해서 세례 요한과 헤롯을 맞닥뜨리게 한겁니다. 세례 요한과 헤롯을 맞닥뜨려요.
일반 백성들은 둘 사이를 머뭇거리면 안돼요. 선지자 쪽이면 선지자 쪽을 하든지 아니면 헤롯이 갖고 있는 그 힘의 권세 무서우면 그쪽을 하든지 이렇게 둘 중의 하나를 골라라 이 말이죠. 너희들이 한번 선택해보라 이 말이죠. 사람들은 자기 다치는게 싫어가지고 둘 다 같이 갖고 있으면 안되겠습니까 이렇게 하는데 한쪽은 부정이고 한쪽은 긍정이기 때문에 화합할 수 타협할 수 있는 여지는 전혀 없어요.
여러분들이 알아야할 것은 인간의 형상과 하나님의 형상이 같이 들어와요 같이. 우리 내부에. 같이 들어와 버린 사람이 뭐냐 하면은 성도입니다. 같이 들어와 있어요. 그래서 주님의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불러서 뭐되게 한다? 하나님의 형상되게 하는 거에요.
주님께서 마중 나올 때 뭐로 마중 나오느냐 하면은 예수님의 피로서 마중을 나왔습니다. 피 안에서 인간의 형상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전환됩니다. 바뀌어집니다. 피 안에서. 바뀌어진다는 말은 인간의 형상 자체가 이게 죽음이다 이 말이죠. 그래서 인간은 흙이잖아요. 그러면 인간의 형상 이 자리는 어디로 가느냐 하면은 이 자리에 올라와요. 이 자리에 올라와요.
이 자리에 올라가게 되면 인간의 형상 가운데 아무나 이 자리에 가는 것이 아니고 이것은 뭐냐 하면은 언약대로, 언약의 공식대로 수학정석 있지요. 정석대로 언약에 의해서 흙으로 뽑힌 사람은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형상과 결합이 되어서 하나님이 인정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만 하는 겁니다. 이 작업은 우리가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 자신은 항상 자기 자신을 뭐로 봅니까? 자기 자신을 긍정으로 보죠. 긍정으로 보는 거에요. 자기 자신을 긍정으로 보고 신약적으로 본다 했지요. 그렇다면 인간에게서 인간의 형상 자기 자신을 긍정적으로 보기 때문에 인간이 긍정으로 보는 여러가지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여러 가지 인간 긍정의 예.
성령받고 싶어요. 두 번째 구원받고 싶어요. 세 번째 죄 씻음받고 싶어요. 전부다 받는 거에요. 받고 싶어요. 이게 바로 인간 긍정이죠. 아까 혹시 하나님의 형상에 우리는 뭐로 들어간다고 했습니까? 흙으로 돌아갈 때 하나님이 인정하는 인간 되지요?
현재 인간들은 하나님의 형상에다가 플러스 뭘 시키느냐 하면은 성경에 나오는 성령받고 싶어요. 구원받고 싶어요. 죄 용서, 죄 씻음받고 싶어요를 자기의 뒷부분에다가 이렇게 집어넣습니다. 집어넣으면 이거는 뭐냐 하면은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약속을 내 위주로 곡해하는 방식이에요. 곡해하는 방식.
성령 받으면 영적 사람이 되서 천국갈 수 있다라는 이야기를 인간의 형상이 듣게 되니까 탐이나는 거에요. 그 다음에 구원받으면 천국간다. 이것도 탐이 나는 거에요. 죄 씻음받으면 의인이 되어서 구원받는다 이게 탐이 나는 거에요. 탐이 나니까 가만있을 수가 없잖아요.
인간의 욕망은 결핍을 채우는 것이 욕망이기 때문에 이걸 달라고 하는 거에요. 기도가 됐든 간구가 됐든 하나님이여 이것 세 가지 주시옵소서. 성령 주세요, 구원 주세요, 죄 씻음 주세요. 이걸 위해서 기도하는 겁니다.
만약에 인간긍정 하나님의 형상을 시작점으로 하는게 이게 하나님 보시기에 부정적이라고 했지요. 하나님의 긍정은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에다가 플러스 뭘 하고? 인간을 흙으로 하게 되면 이게 뭐가 된다? 하나님의 언약이 되지요. 하나님의 언약된 백성이 되지요. 그렇지요? 왜냐? 하나님의 형상이 긍정이고 인간의 형상은 부정적인 거에요. 이거는 창세기 5장 아담의 죽었다 죽었다를 반복입니다. 부정적인 거에요.
그런데 인간의 시작은 뭐냐? 항상 시작은 뭐냐? 하나님의 부정부터 시작해야 되겠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부정부터 시작됐는데 왜 하나님의 부정부터 시작되야 될 인간이 왜 내가 여기 인간이라는 것을 왜 긍정합니까? 긍정하는 이유가 뭐라고 했던가요?
인간 내부에 뭐가 있다고 했던가요? 하나님의 형상 온 것에 대해서 강력하게 도발하고 공격하는 성향이 있다고 했지요. 강력하게. 내가 일을 벌리는데 끼어들지 말라는 거에요. 내가 나 긍정해서 일 한번 꾸며볼까 시작하는데 내가 시작점이 되는 거 말고 다른 쪽에서 시작점이 되는 그 노선은 내가 용납을 못하겠다는 거에요.
기도를 해도 내가 기도하고 전도를 해도 내가 하고 헌금도 내가 하지 다른 사람이 해서 결과를 낳는 것은 나는 추호도 내 존엄성에 입각해서 나는 도저히 그걸 용납 못하겠다. 그런데 성경은 약속이라고 이해하니까 그 약속이라고 이해한 게 누가 이해합니까?
인간의 형상을 긍정으로 보는 나부터 그걸 성경을 긍정으로 보는 거에요. 나부터 출발한다는 조건하에 성경을 보는 거에요. 하나님의 언약, 약속이 주어진다니까 그 약속을 달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달라는 겁니다.
그렇게 되버리면 마치 오늘 본문 누가복음 3장 거기에 21절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만약에 우리 식대로 하게 되면 하늘이 열리는게 아니고 땅이 열려서 이게 마치 부스처럼 성령이 하늘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땅에서 솟아나야 이 말이 맞아요. 이 논리가 맞는다고요.
중요하기 때문에 다시 반복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공식은 ‘하나님의 형상+흙’이죠. 인간 아닙니다. 흙이에요. 흙이 될려면 인간의 형상은 여기서 뭐로 포함돼요? 살아있다는 인간이 뭐로 변해야 돼요? 죽은 존재로 하나님의 형상과 엮어져야 백성 되는 겁니다. 참된 인간 되는 거에요. 이게 진짜 유월절 어린양의 그 원리입니다. ‘예수님의 피+죽음’이 생명이 되는 거에요. 죽는다는 게 필수적이죠.
그런데 인간들은 뭐냐 하면은 내가 여기 있고 내가 천당갈려면 뒤에 여기 플러스 뒤에다가 뭘 하는 겁니까? 인간의 형상 플러스 여기에다가 하나님의 언약을 해서 이게 천국 백성으로 되고 싶은 거에요. 왜? 긍정적에다가 플러스 긍정적을 보태면 하나님의 앞에 긍정적 존재로 부각된다고 보는 겁니다. 이게 인간의 방법이에요.
그러면 이 약속 준 것을 추스려보는 겁니다. 노아 언약은 방주이지요. 방주는 만들면 되고 아브라함 언약은 아브라함 믿으면 되고. 그 다음에 또 모세 언약은 율법 지키면 되고 다윗 언약은 다윗을 왕으로 인정하면 되고 예레미야의 새언약은 성령을 받으면 되고 그래서 신약에 와서 성령 받아야 구원받는다 이렇게 하니까 성령 주세요, 구원 주세요, 죄씻음 주세요.
하여튼 좋은 거는 자기한테 다 땡기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은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죄가 되지요. 예를 들어서 설교 시간에 여러분 성령 받아야 구원받습니다 할 때 그 성령은 반드시 뭐를 집어넣어야 됩니까? 성령 받고자하는 것이 죄라는 것을 여러분 아셔야 됩니다. 이걸 집어넣어야 돼요. 이걸 집어넣어야 돼요. 내 쪽에서 시작해서 좋은 결과를 얻는 방법은 하나님이 주신 적이 없습니다. 자, 헤롯이.. 지금 누가복음 3장 18절하고 있지요.
자, 헤롯의 일에 대해서 세례 요한이 지적질을 한 이유가 헤롯 그쪽 노선은 헤롯 식으로 유대 나라를 구성하는 그 식은 하늘나라 보시기에 부정적이다? 긍정적이다? 부정적이다라는 것을 지적하는 거에요. 부정적이다. 그러면 긍정적인 것은 뭐냐? 그 뒤에 나오는 26절부터 거기에 누가 나옵니까? 예수님이 나오죠. 예수님이 나오십니다.
예수님과 그 다음에 누구와의 만남입니까? 지금 세례 받을 때 예수님 말고 다른 사람도 세례 받았잖아요. 여러 사람들이 세례 받았잖아요. 차이점이 뭐냐 하면은 예수님이 세례 받을 때 무엇이 왔습니까? 성령이 왔지요. 성령 오셨다 이 말이죠.
성령이라 하는 것은 진리가 한 곳에 모이는 것, 이게 성령이에요. 진리가 한 곳에. 진리의 영이니까. 모든 진리는 한 곳에 다 몰려 있어요. 집결되어 있어요. 한 곳에 모인다는 말은 다른 곳에는 진리가 있다? 없다? 진리가 없는 거에요. 진리가 없어요.
자, 그 한 곳이 하늘이 열리고 바늘구멍처럼 뚫린 그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거기서 왔지요. 왔는데 땅에 있는 누굴 노리고 수직하강합니까? 예수님이죠. 그러면 진리가 한 곳에 모인다는 것은 예수님 빼놓고는 진리가 있다? 없다? 없지요.
그러니까 아까 제가 이야기한 하나님의 형상 플러스 이 작업이 언약이거든요. 언약. 이 작업이 언약이란 말이죠. 결과적으로 참된 인간이 나오지만. 이 언약, 이 언약을 이루는데 있어서 인간의 어떤 방법도 다 거부하고 배제하는 겁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이고 그 다음에 예수님 자신이 육신, 육신과 해서 언약을 이루었고 그 언약이 우리에게 그대로 주어지게 되면 그러면 제가 지난번에 제주도 갔을 때 제주도 섬이 중간에 화산이 터졌단 말이죠. 화산. 그럼 제주도의 모든 토지와 땅을 형성케 하는 그 모든 재료가 오직 한 지점에서 나왔어요. 백록담. 한 지점에서 나와서 이게 퍼져버린 거에요. 폭발해서 퍼졌지요 마그마가.
그렇다면 모든 진리, 모든 하나님의 언약은 성령 받은 예수 그리스도부터 시작해서 이게 퍼져 나오면서 이 세상을 잠식하면서 자기 백성들을 챙기는 겁니다. 자, 여기에 성령이 올 때 어떻게 왔다 했습니까? 비둘기같이 왔다는 거죠.
비둘기같이 온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여기에 16절에 보면 그가 오게 되면 성령과 불로써 오는 거죠. 불로써 오는 것과 대비적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비둘기라는 것은 온화하게 평화롭게 오신 거에요. 초장부터 아주 작살내시는 건 아니다 이 말이죠. 초장부터.
초장부터 불로 오는 것은 오순절날 오는 거고요 지금 여기서는 부드럽게 온화하게 오는 거에요. 다시 말해서 처음부터 도끼들고 이렇게 싸그리 다 치는게 아니고 오히려 도와주는 방식으로 굉장히 약한 모습으로 깃털처럼 이렇게 같이 있어도 다치지 않을 정도로.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이 하나님이니까 하나님과 함께 있어도 식사도 가능하고 잠자리도 가능한 모습으로.
심지어 예수님의 귀싸대기를 때리고 옷을 뺏어도 주께서 성내지 아니하고 화내지 아니하는 모습으로 온화한 모습으로 예수님 자신이 마치 우리들 속에 있는 인간의 누구나 쉽게 다룰 수 있는 비둘기같은 그러한 존재로써 이 땅에 오시는 겁니다.
성령이 그렇게 예수님을 유화하게 부드럽게 만들었다 해서 비둘기처럼 오셨다. 나중에 비둘기 끝나면 불같은 성질로. 한 성질하시죠. 아주 작살을. 여기 비둘기처럼 오시는 이유를 알겠지요? 초장부터 작살내는 것이 아니고 누가 건드려도 약한 모습으로 보이면서, 약한 모습으로. 누가 그렇게 만들었다?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 거에요.
어쨌든 우리가 알 것은 바로 모든 진리가 한곳으로 확정되었다는 거에요. 이말은 예수님이 오심으로서 진리가 한곳으로 모았다는 것은 예수님 오시지 않으면 그 어디에도 진리가 없다는 말이에요. 일체 진리는 없는 겁니다.
자, 예수님께서 진리로 오실 때 성령으로 오셨잖아요. 그렇다면 강의 다시 한번 되풀이 한다면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께 긍정적이다. 인간의 형상이 없고 뭐가 있다? 인간 또는 아담의 형상 밖에 없다. 그러면 인간의 형상에서 그냥 인간의 형상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어떻게 하든지 긍정적으로 하는 거에요. 인간의 형상 그리고 ‘나’라는 형상, ‘나’라는 인간.
인간은 부정하지 않고 할 때 뒤에 자꾸 뭐가 오느냐? 긍정 붙이고 꼬리처럼 또 긍정 붙이고 또 긍정 붙이고 긍정 붙이고 자꾸 붙이는 거에요. 그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은 헤롯의 다스리는 유대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자기 나라를 뭐로 보느냐 하면은 부정으로 보지 않고 긍정으로 보는 겁니다.
인간에게 진리라는 것은 뭐냐 하면은 자기네들의 소망입니다. 인간에게 그냥 소망이 아니고 간절한 소망보다 더 진실다운게 없어요. 왜 그게 진리냐 물으면 내가 원하니까. 내가 원하니까. 어떻게 원하면 되는데? 시큰둥하게 원해? 아니. 간절하게 원해. 내가 원하니까.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한번 확인 해 볼까요? 아까 인간이 뭘 원한다고 했습니까? 세가지. 3종 세트 뭘 원한다고 했습니까? 성령을 원하고 두 번째는 구원받기를 원하고 세 번째는 죄 씻음 받기를 원하죠. 이게 바로 인간에게 진리라는 거에요. 진리. 이게 진리에요. 이래야 교회 장사가 되니까. 교회는 이걸 상품화해야 장사가 돼요.
그런데 그들이 원하는 것은 자기가 원하는 소망이니까 그게 어떤 소망이냐 하면은 간절함입니다. 내가 간절하게 원하는 거에요. 간절하게 원하는 것이 뭐였다? 그 근거가 뭡니까? 자기긍정이에요. 자기긍정에서 긍정의 긍정을 붙이면 나중에는 천국이라는 긍정적 결과가 나오지 않겠는가라고 본인이 기대한다, 바란다, 원한다 이 전부 한마디로 뭐냐 하면은 그냥 자기들의 소망입니다. ‘소망’, ‘희망’. 전부 그런 거에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누가복음 3장 본문에 보면 이 간절함과의 대척이 되는 대척 관계되는게 뭐냐 하면은 어떻게 대척하느냐 하면은 오직 한 곳. 오직 한 곳이에요. 예수님에게 성령 옴으로서 구원문제 성령문제 이 모든 문제는 네가 관여하지 말라는 거에요. 왜냐하면은 네 간절함과의 정반대가 뭐냐 하면은 주님이 알아서 하신다란 말이죠. ‘주님이 알아서 하신다’.
그러면 우리는 말하기를 내가 아무리 간절해도 그러면 주께서 원하지 않으시면 그러면 안되는겁니까? 안되는 겁니다. 그러면 나는 어떡해요? 라고 묻지요. 그 어떻게 해요라고 묻는 그게 뭐냐 하면은 성령이 오지 않기 때문에 성령의 마그마가 덮치지 않기 때문에 다른 희망이 없는 거에요. 다른 희망이.
주님이 하시고자 하는 그 희망대로 나를 수단으로 사용해서 맘껏 펼치소서가 안되잖아요 그게. 이미 내 소망 말고 다른 소망, 내 사랑, 내 믿음 말고 주님의 소망과 믿음이 나한테 와버리면 나는 그냥 주님이 한 곳밖에는 진리가 하나로 모든 것에 집중, 집중된 것이 나를 진리답게 쓰시겠다는데.
한 마리의 노새가 되어도 좋고 나는 당신을 위한 하나의 참새라도 좋아요. 가지가 붙어도 괜찮습니다 이럴 정도로 자기가 자기 주체가 아니고 주체를 이미 넘겨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주께서 쓰시겠다 내가 하겠다는 것에 대해서 그것이 바로 주님의 소망인 동시에 나의 기쁨이 되는 거에요.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성령이 오지 않은 사람의 특징이 뭐라고 했습니까?
주님 안 오시면 내 인생 지옥 가잖아. 어떡해요 하는 것은 여전히 뭐에 긍정합니까? 자기 자신을 긍정하는 겁니다. 인간의 형상을 긍정하는 거에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지금 세 번째 이야기하는데 인간의 형상을 긍정하면 왜 안 된다고 했습니까? 이 안에 어떤 마음이 품고 있다고 했습니까? 주님의 형상을 공격하는 마음이 들어있어요.
그냥 내 일 내가 알아서 해 그게 아니에요. 강력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에 대해서 강력한 반발심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헤롯이 그걸 대표로 보여주는 겁니다. 네가 선지자면 선지자지 어딜 나한테 지적질이야!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런데 세례 요한 입장에서는 그렇게 지적질하는 이유가 있어야 돼요.
세례 요한이 너무 정치적인가? 왜 광화문 나가서 태극기 흔들고 왜 자꾸 사회적으로 헤롯이 정치하든 말든 복음 전하면 되지 자기가 왜. 헤롯왕이 자기 배다른 형제의 부인하고 결혼했다고 해서 그걸 왜 지적질을 하는가? 이렇게 생각하겠지만 세례 요한이 지적질을 하는 이유가 있어요. 하나님 나라에 침투돼 있는 것을 색출할 지적질할 의무가 있어요. 색출할 의무.
“이런 것은 아닙니다. 이건 아니에요.” 라고 지적하는 거에요. 헤롯이 이거 말고 정상적인 결혼 했으면 다른 거 또 지적해요. 반드시 이거는 주님의 지적은요 이거는 도저히 피할 수가 없어요. 이거 아니면 다른거 지적해요. 다른거 지적한다고요. 기어이 하늘나라에 침투하는 것을 색출할 의무를 가진 거에요. 저거는 우리 편 아닙니다. 저런 것은 하늘나라의 속성에 위배됩니다 라는 것을 세례 요한이 지적하는 거에요.
그런데 세례 요한이 지적하는 그 지적이 일반 대중들한테는 진짜 하나님 나라의 복처럼 느껴지고 어떤 자기가 뽑아나올 권세처럼 본인도 거기 권세에 속해져가지고 발을 빼기에는 완전히 이건 콘크리트를 잘못해가지고 자기 발 빼고 콘크리트해야 되는데 자기 발 집어넣고 콘크리트해서 자기 발을 못 빼요. 발 빼면 자기 발만 아파. 깁스해야 돼요.
권세라는 것이 이미 인간의 몸에서는 굳어졌어요. 왜 굳어졌는가? 인간은 자기를 뭐하기 때문에? 부정하는게 아니고 자기를 긍정하기 때문에. 나도 나 긍정, 너도 나 긍정 그럼 우리는 한편이네. 이 세상에는 인간의 형상을 긍정하는 쪽에서는 모두 한편이이에요. 인간긍정을 이걸 성경으로 정당화시킨 학문이 있어요.
그 학문을 가지고 여러분 들어봤나 모르겠는데 그 학문 이름이 바로 신학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이게 신학이에요. 그 신학 교육받은 사람을 목사라고 하지요. 신학교육을 마친 사람을 목사라고 하고 중간쯤에 있는 사람을 전도사라고 해요. 이 사람들은 오직 인간긍정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인간긍정에다가 성경적인 개념들을 플러스시키게 되면 긍정적인 ‘나’가 나중에 천국 가는 긍정적인 존재로 전환될 수 있다는 희망을 상품으로 제공해서 교회가 유지가 되는 겁니다. 지금 누가복음 3장에서 교회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교회는 없어요. 교회라는게 없어요. 교회는 마태복음 16장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교회의 반석 될 때 그 때 시작되는 거에요. 교회는 없어요. 교회 없다는 말은 기존의 이스라엘이 없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그 유대나라는 자기를 뭘로 봅니까? 이스라엘로 보는 거에요. 유대나라가 이스라엘 마지막 맥을 잇는 남은 자, Remnant, 하나님의 남은 자라고 자부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남은 자가 남은 자 될 이유가 있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은 하나님 창으로 찔려 죽일려고 남은 자 들이에요. 인간의 악마의 본성을 궁극적으로 집약해서 하나의 모아서 힘을 모아모아 모아서 하나님에게 돌격하라고 남은 자들이 유대인들이에요.
제가 그 대구강의 하면서 그런 이야기했지요.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하나님을 안 믿고도 살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어요. 여유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 없어도 살 거 다 살아요. 하나님보다 다급하지가 않아요. 바리새인들이. 주님께서 너희 아비가 악마다. 악마하고 직통이다. 악마하고 직통 계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이유가 있어요.
그들은 자기 역할이 있어요. 인간의 모든 속성을 모아 모아서 모든 기를 다 모아서 힘주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창을 찔러줘야 돼요. 그 역할을 해야 합니다. 가룟 유다까지 한패 먹어가지고 팔아먹으면서 가룟 유다한테 돈 30냥 주면서 그걸 해야 돼요.
인간 긍정이 남긴 마지막 모습은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 진작에 다 보여준 거에요. 아 내가 나를 긍정하는 나의 긍정의 마지막 모습 저 모습이구나. 진리를 향하여 공격하는 모습. 이미 세례 요한도 침투하는 그것을 침투하는 적들을 침투할 때 세례 요한이 그냥 옥에만 갇혔습니까? 자기 목이 잘렸어요? 어떻게 됐어요? 목이 잘렸지요. 목이 잘렸을 때 비참하게 잘렸지요.
그 목 자르라고 김여정이 이야기했다고요. 김정은 여동생. 김정은 여동생이 세례 요한 목 자르라고 했다 이 말이죠. 여자 말 듣고 김정은이 목 자른 거에요. 세례 요한 목 자른 거에요. 그럴 때 백성들이 데모했습니까? 왜 죽이냐고 데모한거 없어요. 왜냐하면 전부 다 자기 긍정이 우선이기 때문에.
아직도 뒤에 달려 있는 하나님의 약속, 말씀 있잖아요. 나 성경100독했다 1000독했다 달라붙은 것. 인간의 형상 뒤에 있는 이건 하나님의 약속이다 신학교 때 이거. 급하면 다 떨어집니다. 급하면. 어머나 어머나 떨어진다고요. 나라도 살아야지. 내 가족이라도 살아야지. 이것만 달랑 남아요. 객차는 떨어져도 기관차는 달린다. 꼬리는 떼버려라. 몸통 살아있으면 산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하나님이 오신 것은 인간의 형상을 뭐로 바꾼다? 이 노선. 하나님 형상+흙, 노선에 인간의 형상을 집어넣기 위해서 오신 거에요. 인간의 형상을 그대로. 그래서 하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오신 거에요.
죄인을 부르러 오실 때 이 긍정을 뭐로 바꾸는 작업을 해야 됩니까? 부정으로, 절대적 부정으로 바꾸는 작업을 주님께서는 말씀과 기적으로 계속 베푸시는 겁니다. 베풀어 주는 거에요. 네가 시작하는 진리는 진리가 아니다. 진리는 이미 따로 한 지점으로 확정되었다. 성령이 임한 성령이 급직하해서 꽂아서 만나게 했던 그 예수 그리스도 그 외에는 이 땅에 진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성령을 주시든 진리를 주든 죄사함을 주시든 천국을 구원을 받게 하든 그건 누구 소관이냐 하면은 예수님의 자기의 활동 소관입니다. 예수님의 활동 소관. 누가복음 4장 한번 봅시다. 4장 26절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뿐이고. 뿐이고. 뿐이에요.
그 다음에 한번 보세요.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고”. 나아만 장군 뿐이에요. 이게 무슨 뜻일까요? 주님께서 병 고치러 온 게 아니란 뜻이죠. 이초석 그 교회처럼. 병 고치러 온 게 아니에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채워주러 온 게 아니에요. 인간의 자기 긍정을 주께서 긍정을 마중나온 게 아닙니다. 주께서 긍정함으로써 오히려 긍정을 뭐로 바꿉니까? 부정으로 바꾸는 거에요. 내가 너한테 병고쳐주는 것은 네가 나에게 요구해서가 아니라 네 요구와 전혀 상관없어 라는 거에요. 문둥병환자가 10명 있었지만 고침 받고 난 뒤에 한사람도 오지 않고 단 한사람 이방인 사마리아인만 주님께 왔잖아요. 주님께 오셨다고요.
중풍병자가 내려올 때 병 고치려 지붕 뚫고 왔잖아요.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뭐냐 하면은 네 믿음이 좋구나 이게 아니에요. “네가 바로 죄인이다. 네가 죄인이다. 너 하는 모습이 죄의 절정이다. 병 고치겠다고 발악하는 모습이 죄인이기 때문에 나는 이 땅에 병 고치러 온 것이 아니고 나는 죄사함을 하러 왔다.” 죄사함을 하는데 적절한 대상자가 드디어 주님 앞에 걸려든 거에요. 병 고치겠다는 것, 그 자체가 자기 주제파악을 못하고 있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나 병 안 고쳐주면 “나는 예수님 미워할꺼야!!!!! 미워 할거야.” “미워해 그래. 미워해.” 그게 네 죄의 모습이다 이 말이죠.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네가 진리냐?” “아닙니다.” “진리도 아닌게 왜 말이 많냐? 네가 길이야?” “아닙니다.” “길이 아닌 게 왜 길을 언급해? 네가 생명이야?” “아닙니다.” “그럼 뭐야?” “죽음입니다.”
그럼 끽소리 말고 가만있어. 죽었으면 죽은 티를 내야지. 죽은 놈이 팔딱 살아가지고 망둥이 같이 살아가지고 왜 그러고 있냐 말이죠. 죽었으면 입에 거품 물고 있어야지. 마스크를 하든지. 인간이 주님의 성령이 온다는 것은 이건 기적입니다.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에요.
여러분들의 고깔있잖아요. 고깔. 깔대기를 거꾸로 해보세요. 깔대기를 거꾸로 해놓고 여기에다가 쌀알을 여기에다가 부어보세요. 여기에 쌀알 몇 개 남아 있습니까? 인간 자체가 긍정인데 복음을 전하고 뭘 전해도 벌써 돌아서면 싹 다 실려나가는 거에요. 이게 뾰족해가지고 하나도 남아있지 않아요. 인간 마음속까지 말씀이 들어온 것은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 조건에 부합되야 돼요. 언약 조건.
예레미야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돌판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고 율법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 들어온다고 했습니까? 히브리서 10장에 보면 하나님 말씀이 또는 예레미야에 나오지요. 여러분 아시는데 한번 보고 지나갈까요? 10장 16절에 언약의 절차가 나와 있어요. 언약의 절차가.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어디에 둡니까? 마음에 두지요. 신명기에서 그렇게 마음해도 안돼요.
왜냐하면 자기 긍정이 된 이상은 언약의 원칙이 아니면 들어오지를 못합니다. 언약의 원칙은 뭐냐 하면은 이 언약에 내 것을 제거하고 내 것을 치워버리고 거기 주의 것을 거기에 담기는 거에요. 십자가의 피가 뭐냐 하면은 내 것을 죽이고 확인한 다음에 그 다음에 주의 것이 들어오는 것이 주님의 법칙입니다. 그 법칙을 저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어요. 이빨 하는 것을 뭐라고 합니까? ‘임플란트’.
임플란트 원칙에서 기존 이빨 뽑아야 이게 들어가요. 이빨 뽑아야. 내일 아침에 할거에요. 지금 한 개 남았는데. 내 것에다가 받는 것이 아니고 내 것을 뺀치로 뽑듯이 뽑아버려야 돼요. 뽑는데 그게 안 아플 수가 있어요? 그동안 자기 긍정으로 평생을 살아 왔는데. 대표적인 자기긍정의 표어가 그거 잖아요. Boys be ambitious. 소년들이여 MBC를 봐라.
입을 크게 열라 이런 거 있잖아요. 입을 크게 열라. 채워줄게. 어떻게 우리가 농협 포대기입니까? 입을 적게 열려서 안 들어갔다. 크게 열어야 들어간다. 이거는 뭐냐 하면은 자기 긍정이에요. 이 긍정 자체를 뿌리 채 뽑아버려야 돼요. 뿌리 채.
날마다 나는 주 예수의 죽음에 나를 넘기운다. 나를 넘기운다. 고린도후서 4장에 10절에 우리가 항상 예수 죽으심에 우리를 넘기운다 했지요. “우리가 항상 예수 죽으심을 우리 몸에 짊어짐은 예수 생명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함이라.” 내 몸을 넘겨버리는 거에요.
우리는 넘길 때 어떤 모습으로 넘기느냐 하면은 우리 혼자 간절함으로 철야기도해서 넘기는게 아니에요. 옛날에 제가 젊을 때 20대인가 30대 때 봤던 영화가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표를 너무 많이 팔았어. 앉을 자리도 없어서 서서 본 영화가 있어요. 영화제목이 Ghost. 우리말로 번역하면 사랑과 영혼. 데미 무어하고 그리고 몇 년 전에 죽었던 남자. 패트릭 스웨이지 그 사람하고 둘이 나오잖아요.
자, 앞에 있는 이걸 할 때 어떻게 하느냐? 뒤에서 합니다. 뒤에서. 뒤에서 하는데 도자기가 물레 돌다가 부서져요. 부셔져도 관계없어요. 뒤에서 만든다고요. 뒤에서. 주님께서 우리 힘으로 내가 나를 뽑아내는 이것은 불교에서 도 닦을 때 그때 하는 거에요. 내가 나 뽑는다고 방문 닫아 놓고 온 겨울에 혼자서 불 때놓고 앉아가지고 점 하나 찍어놓고 쳐다보는 것처럼. 도 닦겠다고. 그 도 닦는 것이나 성령 받겠다고 기도원에 가는 것이나 차이점이 뭡니까?
주님께서 뽑을 때 우리는 어떤 착하면 착할수록 잘 뽑힐까요? 잘 안 뽑힐까요? 착하면 착할수록. 미리 남아가지고 자꾸 해서 안돼요. 주님께서 뽑을 때는 우리로 하여금 신경 다 죽이고 뽑아요. 우리의 신경이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연줄, 가족, 자식, 남편, 아내 전부 다. 목사 집사 모든 것 다 뽑아내고 그냥 시커먼 죄 덩어리 그 자체를 “내가 이제 뽑아도 너 이제 미련 없지?” “미련 없습니다.” “확 뽑아 버린다.” “뽑으세요.”
아까 진리라고 하는 것을 다시 보자. 진리란 우리 인간 세계의 진리란 뭐라고 했습니까? 자기 진리란 자기 간절한 자기 소망이 진리죠. 그것만이 인간의 진리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뽑을 때는 결국 간절한 소원보다 더 진리다운 게 없기 때문에 뽑을 때 우리에게 뭐가 없어요? 소망 차체가 없다는 것을 일깨우면서 우리를 뽑아버려요.
네 자체로서는 뭘 아무리 헌금, 기도, 전도 집사 되고 목사 되도 너는 소망 없음을 분명히 하면서 뽑아내버립니다. 그러니까 이빨을 죽여놓고 뽑아내겠죠. 냉동하든지 얼얼하게 만들어서 뽑아내지요. 미련 없지? 확 뽑는다! 또 딴소리 하지 말고. 의사가 잘못 뽑았습니다 이런 소리 하지 말고. 뽑는다. 의료보험 안 되는데 뽑습니다 그런 소리 하지 말고 확 뽑아버리는 거에요.
그러니까 그 뽑는 방법이 뭐냐 하면은 우리를 아프게 하는게 아니고 ‘뿐이고~’ 이거에요. 왜 하나님이여 왜 저 사람 놔두고 왜 저를 구원하십니까? 이거에요. 본인도 의아해. 이 순서가 내 순서 맞나? 왜 내 차례가 됐지? 주여 왜 제가 구원되야 됩니까 라는 이러한 의아함. 감당이 안돼요 이 기적에 대해서. 왜? 내가 내 구원에 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세리와 창기가 그래서 바리새인보다 천국 간 이유를 아시겠지요? 강도가. 살인강도. 사람 죽인 살인강도가 왜 구원받는지 아시겠지요? 그야말로 본인도 어이벙벙해요. 지은 죄가 분명하고 이건 나도 그걸 충분히 인정하는데 내가 지옥 갈 사람이란 건 충분히 인정하는데 바로 그 인정하는 그것이 인정하는 그 마음이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구원하는 그 마음의 전개로써 마그마가 터지듯이.
주님의 성령의 부드러운 마음이 비둘기 같은 마음이 퍼졌기 때문에 부드럽게 확 뽑아버리는 겁니다. 참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주님께서 나의 구원을 삭제시키고 구원하신다 이렇게. 내가 구원받고자 하는 그 소원과 열망을 하나님께서는 그걸 거절하시면서 구원하신다. 나의 구원은 나의 긍정에서 나왔지요.
그럼 나의 구원을 구원 됐냐 안됐냐를 누가 측정하느냐 하면은 나의 긍정적 마인드가 이걸 측정해요. 조금 모자라다 싶으면 착한 일 더 해. 이웃 배려하고 이렇게 해가지고 구색을 갖춘다 하지요 구색. 가게 구색이 있어야 단골이 모이죠. 왔는데 물건 없으면 따지고.
온갖 주께서 원하는 구색을 다해. 십일조 했어? 네 했습니다. 구색 갖췄구나. 전도는? 일년에 두 번씩 합니다. 이렇게 구색을 갖춰서 계속 긍정적인 것만 남깁니다. 나의 구원, 나의 착한 일 , 나의 모든 구원이 이 자체가 나를 깎아내시면서 구원합니다. 그걸 제거하시면서.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가 아니라 주께서는 네가 남긴 결과가 어떠냐? 결과를 봐라. 내가 어떻게 하면 이렇게 구원을 달성하겠습니까 묻지 말고 내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묻지 말고 지금 주께서 손댄 그 작품을 보라 이 말이에요. 너 하는 모습을 보라 이 말이죠. 그 자체가 주님의 섬세한 손길이 가득 들어있다는 겁니다.
회사 다니다가 잘렸다. 불평하지요. 그러나 잘리면서 밤에 참 슬퍼하면서 보세요. 거기에 달이 떠있지요. 그러면 시편 136편 “달 지으신 분께 감사하라. 그 너그러움이 그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넘친다.” 이렇게 할 때 그 동안 취직, 취직만 생각하다가 달보다도 더 못해. 달은 존재 자체가 하나님께 감사 덩어리로 존재하잖아요.
그럼 우리는 뭐에요? 그 달 보고 난 뒤에 그 다음날 아침에 새벽에 들풀을 밟았다. 그 들풀을 보라 이 말이죠. 그 들풀을 누가 키우십니까? 주께서 키우시지요. 들풀 치워보니까 참새 한 마리가 우다닥 뛴다 이 말이죠. 그 참새는 누가 키우는데? 주님이 키우죠.
이 모든 만물이 부지런한 주님의 손길의 작품으로 있는데 도대체 나는 패트릭 스웨이지를 못 만나서 그런지 혼자 도자기 굽겠다고 내 도자기. 남이 가져가면 안돼. 내가 구원 받아야 돼. 내가 도자기 구워야 돼. 내 작품이여야 돼. 나는 내가 내 작품이여야 돼.
그런 고집을 하니까 바로 주님께서 참새 키우시다 오신 주님을 우리가 창을 들고 찔러버린 거에요. 그런 메시아 필요 없어. 나 하는 일을 긍정하는 그런 예수를 원해. 성경공부해서 천당 가는 그런 예수를 원해. 다른 예수를 갖고 원할 때 그게 바로 악마의 쏟아져 나오는 악마의 본성입니다. 이게 악마의 본성이에요.
다시 말해서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믿는 것은 본인이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는 자신감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 믿는다고요. 오늘날 교인들이. 예수 믿는 것도 혼자 살 자신감이 어느 정도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약간만 도와주시옵소서. 이런 식으로 예수 믿는 거에요. 아직 자기한테 소망이 있습니다. 본인이 진리인줄 알고 있어요. 그것은 잘못입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