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행 16" 6-10 (성령의 활동)
Re..행 16: 6-10 (성령의 활동)
이름 : 이근호(IP:)
성령의 활동
2004년 12월 29일본문 말씀: 사도행전 16:6-10
16: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16: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16:8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16: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6:10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복음을 전하는 주도권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사람에게 만약에 주도권이 주어져 있다면, 그 복음 전달의 인간의 뜻이 개재될 것이 뻔합니다. 즉 자신의 야심과 야망과 결부된 채 전도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렇게해서 전달된 복음은 복음도 아니요 그들이 전하는 주님은 주님도 아니라 가짜 주님입니다. 제대로 복음을 아는 자라면 전도라든지 복음의 주도권은 오로지 예수님에게만 있지 결코 인간들에게 있지 않음을 확실히 파악하게 됩니다.
복음이란 이런 겁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나를 구원시킬 수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조차도 자신을 구원해 낼 수 없음을 아는 것이 복음을 아는 자들의 소감입니다. 복음이란 예수님께서 직접 자신에게 믿음을 심어주었음이 명백한 경우를 말합니다.
그래서 정말 복음을 받은 자라면 그 때부터 사람의 종이 되거나 자기 자신의 종이 되지 않고 주님의 종으로 탈바꿈됩니다. 인간이란 누구나 사람들 틈 속에서 태어나고 자라왔기에 주위 사람들의 위세에 기죽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두렵고 또 사람들의 칭찬에 약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모두 눈에 보이는 실체들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알게 된 자는 눈에 보이지 않으신 분이 눈에 보이는 인간보다 더 훨등하게 우세하게 활동하시고 또한 자신을 찾아와서 이미 자신을 장악해 버렸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복음을 전하는 주도권이 결코 사도 바울 본인에게 있지 않음을 찾아낼 수 알아야 합니다. 복음의 주도권은 주님에게 있고 그 일을 위해 성령님께서 '주님의 영'으로 활약하고 계심을 발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도리어 그 주님의 영으로부터 자신의 의지가 가로막힘을 당하는 인물로 등장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의 활동은 인간의 의지를 북돋아주는 것이 아니라 일일이 인간이 하는 일을 가로막고 나서시는 분입니다.
즉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성령님에 의해서 이것도 성사, 저것도 성사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성령님에 의해서 이것도 막혔고 저것도 막혔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동으로 가서 아시아 쪽으로 복음을 전해 볼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주도권을 쥐고 계시는 주님께서 단호하게 사도 바울의 의사를 방해나고 나서십니다. 이로서 복음은 결코 인간이 많이 전한다고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졌습니다.
막으시고 시키시는대로 움직여야지 제멋대로 전도한답시고 설쳐대는 짓은 도리어 복음 전도를 훼방하는 행위에 해당됩니다. 이렇듯 전도란, 눈에 보이지 않으신 분이 실제로 지금도 살아 움직인다는 사실을 늘 같이 할 때 비로소 파악됩니다.
인간들은 항상 지신의 행위만 주목합니다. 어느 날 망대가 무너져 18명의 사람이 그 망대에 깔려주었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저와 같이 망하리라"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세상을 보는 안목은, 결국 모든 인간들에게 대해서 동일하게 적용시키시는 원리가 따로 있음을 알리는 증거들로 보고 계시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께서 활약하시는 바는 모든 인간들이 갖고 있는 공통적인 속성을 겨냥해서입니다.
그 속성이란 다름 아닌, 인간이란 스스로 절대 구원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성령께서 오신다는 것은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연결시켜 주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단절성을 명확히 해 두시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인간들은 나름대로 하늘과 땅을 연결시키려는 인식을 품고 살아갑니다. "나도 이 정도했으면 하늘 나라와 연결되어 있는 사람이겠지"라는 바탕을 형성하고 싶어합니다. 그것이 바로 종교라고 하는 겁니다.
이 종교성이란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음먹기에 따라 그대로 흉내내고 실천 가능한 조건들을 사전에 미리 만들어 채어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오시면 이 모든 바가 다 부질없이 되어 버린 다는 겁니다. 왜 성령께서 그렇게 하십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는 철없는 양으로 보시기 때문입니다. 양이 오죽 제멋대로 같았으면 성경에 다음과 같은 표현이 다 나오겠습니까? "우리는 다 양 같아서 제 갈 길로 갔거늘"이라고 말입니다.
따라서 성령님은 우리의 모든 행위를 가로막는 분으로 활동하십니다. 그래야 전도라는 것도 순전히 예수님 손으로만 가능하는 겁니다. 로마서 10:15에 보면,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면' 전도도 복음이고 아무 것도 없습니다. 구원은 사람의 여망이 아니라 예수님의 여망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함부로 전도하답시고 설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났을 때나 빌립 집사님이 이디오피아 내시를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결코 베드로의 전도 아이디어나 빌립 집사님의 전도 열정이 전도를 달성해 낸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나 오늘 본문의 사도 바울은 그저 중매쟁이에 불과합니다. 오늘 우리도 이 중매쟁이로서만 만족해야 합니다. 그래서 전도를 통해서 자기에게 돌아오는 이익을 계산하지 말고 주님에 의해 직접 구원받은 자가 일어남에 대해서만 같이 감사하고 고마워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도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막으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저 주님께서 건질 자만 건지시는 일에 대해서 감사히 동의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