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3장 16절 (멈춤) 200915a-이근호 목사
강남-누가복음 3장 16절 (멈춤) 200915a-이근호 목사
오늘 누가복음 3장 15절부터 보겠습니다.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의논하니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 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라고 되어있지요.
왜 세례 요한은 일반인의 범주에 못 들어가는가? 그것부터 생각해야 됩니다. 다른 사람이 오는 것은 사람들이 안 기다리고 왜 세례 요한이 오는 것은 사람들이 기다리는가. 처음부터 좀 어렵게 하겠습니다. 실력들이 있으니까.
사람의 범주, 사람의 범주는 무슨 범주냐 하면은 사람이 있다. 사람이 있다의 범주에요. 있음과 있음의 범주에요. 이것은 일반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들끼리 그냥 살면 되지 않느냐. 왜 또 누구를 기다리느냐? 그것은 바로 세례 요한은 있음의 범주에서 없고 이것은 사람들 입장에서는 없음의 범주에 해당돼요. ‘없음의 범주’.
그렇고 그런 인간들은 우리는 안 기다리고 싶다. 우리의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 분을 기다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전달할 수 있는 분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하늘과 땅, 인간들 세계에서 안 계신 분이 하나님.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에 따로 계시고.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뭔가 보여준다는 것은 이 인간 범주에 없음이 되는 분이 우리 속에 들어오신다는 개념이 되는 겁니다. 여기에 요한에 대해서 혹 그리스도이신가라고 해서 이 세례 요한을 없음의 범주 안에는 누구도 같은 묶음이 되느냐 하면은 그리스도가 세례 요한과 같은 영역의 같은 집합으로 묶을 수가 있다 이렇게 보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세례 요한이 기다리는 사람들이 세례 요한 말을 듣고 상당히 당황했어요. 왜냐하면은 자기들은 있음의 범주에 있잖아요. 여기 있는데 하나님은 어디에 계실 것이고 지금은 우리 눈에 안보이지만 그분이 우리 속에 아닌 다른 엉뚱한 분을 보내셔서 선지자로 보내게 되면 우리 있음들은 현재도 있지만 나중에 구원받는 자로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 거에요.
그런데 그들이 뭘 오해했느냐 하면은 세례 요한이 선지자 없음의 세계에서 온 세례 요한이 있음의 세계에 들어와버리면 사람의 있다가 뭐로 바뀌느냐 하면은 이게 없음으로 바뀐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몰라요. 사람들의 신앙생활의 기본이 뭐냐 하면은 영구 없다 입니다. ‘나’가 내가 여기 없는 거에요.
만약에 내가 있어버리면 여기 있는 나를 잘 살리기 위해서 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혼신의 노력을 다하게 돼요. 그러면 신앙이 있으나마나 소용없습니다. 온갖 세상 걱정과 근심 전부다 자기가 건사를 해야 돼요. 관리 대상이 되어버려요.
그 목적은 뭐냐? 살아야 된다. 무조건 살아야 된다에요. 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살아남아야 된다. 이게 무슨 신앙입니까? 무슨 그런 신앙이 있어요. 그런 신앙들은 여기 있음, 일반이죠. 일반인 자기들끼리 얼굴 주고받으면서 고대했던 신앙들이에요.
하늘에서 주신 신앙이 아니고 자기들끼리 주고받으면서 이게 신앙이겠지. 그럼 그게 신앙이지. 자기들끼리 납득이 되고 이해하는 수준 하에 신앙이 뭐냐? 여기 있는 나를 더 확실하게 있게 만드는 것. 죽어서도 있게 만드는 것. 그걸 사람들은 신앙이라고 하고 세례 요한은 그걸 초를 쳐버립니다.
있음과 없음 사이에서 있음의 인간의 있다라는 세계와 없다고 여기는 새로운 세계 하늘나라와 사이에는 뭐가 성경전체에 뭐가 경계선을 쳤느냐 하면은 이겁니다. ‘밤’. 영어로 하면 ‘night’, 밤이에요. 여기 창세기 32장에 야곱에게 천사가 언제 나타나죠? 대낮에 나타났습니까? 밤에 나타나죠.
마태복음 27장 4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힐 때에 제 육시로부터 온 땅이 어둠으로 인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 됐다’.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완전히 온 천지가 깜깜했어요. 이 밤의 의미는 뭐냐? 밤의 의미는 이걸 아셔야 돼요. 밤은 깨어있는 사람에게만 고통으로 짓누른다. 이게 밤의 의미입니다.
밤에 그냥 눈감고 자라 이 말이죠. 만약에 밤에 잠 안 오면 그 밤시간이 press가 대단한 press입니다. 왜 밤에 시간이 그리 안 가는지. 좀 됐다 싶어서 시계 보게 되면 30분 지나고. 좀 해보면 밤 10시 반. 실컷 잤다 싶으면 0시 25분. 이제 새벽이라고 일어나 보면 새벽 2시반. 새벽 두시반에 일어나서 운동할 일 있습니까?
밤에는 깨어있는 사람에게 고문이고 고통이에요. 이게 지옥입니다. 지옥은 더욱더 그 인간성을 팔팔하게 살게 만들어요. 아 이거는 진짜 사람 환장하게 만들어요. 지상에서 부자로 살던 사람이 앞집에는 거지 나사로고 자기는 부자다. 부자가 이렇게 죽으면 좀 성질 좀 죽으면 좋겠는데 이 땅에 이 생에 가지고 있던 성질 그대로 다 노출시킵니다.
깨어있기에 고통스러운 거에요. 밤은 그런 겁니다. 밤은 그런 거에요. 밤과 함께 그냥 아무 소리 없이 눈 감으면 참 좋겠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살아있을 때는 예수님을 아주 하찮게 봤던 사람이 지옥 가서는 그 낮에 봤던 그 주님이 아니고 밤을 통과한 주님을 봤을 때 그 주님은 우리가 함부로 상대할 분이 아니죠.
따라서 뭐냐 하면은 뭐가 원망스러우냐 하면은 이 밤을 통해서 그걸 느끼는데 출애굽기 12장에 보면 그 이스라엘 처음 시작할 때도 밤이에요. 유월절 밤이거든요. 살아있음이 원망스럽게 만들어줄게.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 원망스러운 짓이다. 그런데 신앙이 없는 일반해석은 뭐냐? 어쨌든 살려고 하지요. 그게 도끼로 제 발등 찍는 겁니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나는 산 게 아니고 죽어있구나. 예수님만 살아있으면 되지, 하찮은 내가 왜 살아야 돼? 이렇게 마음먹으면 되는데 저 예수님 이용해가지고 이왕 살아온 것 악착같이 더 살아가겠다고 살아간다면 그 성깔을 지옥에서도 생생하게 살아있게 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주님께서 또는 세례 요한께서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성도에 대해서 어떤 변화를 주느냐 하면은 ‘네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살아있다’로 전환시켜 버립니다. 네가 살아있다는 그 자의식은 거의 소멸하거나 거의 느끼지를 못하고 턱하니 내 앞에서 주님의 그 등치가 주님이, 또는 야곱에게 찾아온 하나님이 크게 느껴지는 거에요.
크게 느껴지고 나는 작게 느껴지고. 이게 바로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사랑이 그런 거 아닙니까. 사랑이라는 게 그런 거거든요. 자기 생각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게 사랑이거든요. 그대 앞에 서면 나는 왜? small. 왜 작아지는가. 그대 앞에 서면 왜 작아지는가. 남자 신랑 키가 160. 신부키가 박찬순처럼 190. 그래도 사랑하게 되면 여자는 160한테 매미처럼 매달려가지고 나는 그대 앞에 서면 왜 작아지는가.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그대만 크게 있다면 그대만 존재한다면 나는 그대 안에서 나는 존재 안 해도 괜찮아 이거거든요. 내 걱정하지마. 당신만 생각해. 그게 내 소원이야. 한때 그런 마음 있었지요. 한때. 처음 죽고 못 살아 할 때 있었지요. 나 너 때문에 못 살겠다 지금은 이렇게 나오지만.
그래서 이 없음의 세계와 있음의 만남에서 있음의 세계를 천국 보내주려면 있음을 뭘로 바꾸느냐? 없음으로 바꿔줘서 구원하는 겁니다. 제 이야기가 아니고 창세기 32장에 나오는 그 야곱 이야기에요. 야곱이라는 이름은 없어요. 이제는 이스라엘로 바뀝니다. 야곱 생각하지 말고 너는 이스라엘이다.
그러면 있음에서 없음으로 어떻게 바뀌는가가 중요해요. 어떻게 바뀌는가. 여기서 오늘 제목 나갑니다. ‘멈춤’이에요. 좀 어려운 한자말로 할까요? 정지하는 것, stop 여기까지 stop 한다. 그게 ‘성령’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너는 이 앞에까지. 더 나가지마. 자꾸 나가면 있음이 나가기 때문에 내가 허락 안 해.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지금 터널공사중이니까 차들 stop 하는 것처럼. 터널 앞에. 신종코로나19 앞에서 stop, 차들 전부 stop 시키는 거에요. 죽은 자로 전환 시키는 것, 성령을 통과해서 죽은 자로 전환시키는 거에요. 그래서 오늘 제목은 ‘멈춤’. 다른 말로 하면 ‘정지’. ‘stop’. 여기까지 stop이에요.
살아있는 것은 여기까지만 해라. 그 다음부터 없음으로 하는 것은 그것은 없음 하는 것은 네가 나대서 하는 것이 아니고 여기서부터는 천사가 하시든지 성령이 하시든지 전문가가 여기서 너한테 관여할 것이다. 전문가가. 공항검색대로 마찬가지고 다 마찬가지잖아요. 딱 스탑시키고 그 다음부터는 힘 빼시고 우리가 처리하겠습니다. 통과시키든지 말든지 우리가 처리하겠다는 거에요.
그러면 있는 사람은 이 스탑하기 이전에 있는 사람은 본인이 있기 때문에 어떤 생각을 못 버리느냐 하면은 현재 있는 나를 천국 넘어서도 이대로 있는 내가 되고 싶은 그런 욕심이 있지요. 이것은 성경에서 용납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에덴동산에서 이미 추방했기 때문에 추방 취지하고 충돌이 돼요. ‘충돌’.
충돌에 대해서 미리 말씀드리면 여기에 오늘 누가복음 3장 19절부터 보면 분봉 왕 헤롯은 그의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자기 배다른 남동생 부인하고 혼인했지요. “헤로디아의 일과 또 자기가 행한 모든 악한 일로 말미암아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그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
이게 뭐냐 하면은 충돌이에요. 무슨 충돌이냐 하면 헤롯은 힘과 힘의 충돌로 여겼던 겁니다. 힘에 대해서는 자기가 이 세상을 꽉 쥐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뭐로 보느냐 하면은 힘과 하늘의 권세의 충돌로 본겁니다.
있음에서 오는 힘과 없음에서 오는 힘의 마주침, 마추짐이 인간들이 이 땅에서 힘 있는 자들이 은근히 기대하는 승리는 없습니다.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정의의 칼날을 가지고 악한 놈들을 전부다 쳐부셔서 결국은 정의가 승리한다는 어떤 실적 같은 것을 은근히 원하거든요. 이 땅에서 모든 절들은 다 불타버려라.
모든 절에 있는 불상들은 시한폭탄해서 다 터트려 버리고 천주교도 다 없애버리고. 마리아상부터 해가지고. 오직 교회만 되기를. 지금도 기도하는 사람이 한두명이 아니에요. 그걸 자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로 보는 거에요. 예를 들어서 여기 예배당이 있는데 앞에 큰 강남의 봉은사라고 절이 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여기 있는 교회가 새벽마다 새벽기도 해가지고 어느날 봉은사가 불나가지고 없어질 때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걸로 이해, 그런 식으로 이해하겠지요. 여리고성의 무너짐으로. 안 그러면 아파트 전체를 손으로 둘러가지고 가나안 정복사를 새로 쓴다든지. 그렇게 그런 승리를 원하는데 그건 바로 헤롯이 헤롯세계에서 하는 짓이에요. 헤롯세계.
그러니까 이게 교회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그것은 제가 주일 낮에도 그런 이야기했지만 교회가 생산적이어야 하는 시장경제논리에 같이 녹아졌기 때문에 다른 종교단체도 커지지만 우리 기독교도 커져야 된다. 그래야 하나님의 살아계심의 확실한 증거가 된다. 이것가지고 선교의 승부를 걸려고 해요.
없어도 감사하는 걸로 승부로 거는 것이 아니고 거지 되도 고맙습니다로 승부 거는게 아니고 뭔가 손에 쥐어야 승리가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누가? 헤롯과 그리고 세례 요한을 기다렸던 모든 사람들이. 야 이제 선지자 왔으니까 이제 헤롯 죽었어 너는. 로마 너는 작살났어. 이러고 있단 말이죠. 이런 것들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는 거에요. 근원적으로 있음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는 사실을 모르죠.
그러면 있음은 어디서 성립되는가? 성령 안에서 스탑이 되야 돼요. 멈춤이 되야 돼요. 그 다음에 뭐가 있느냐? 16절에 보면 성령과 뭐로써 오십니까? 불로써 세례 주죠. 세례는 통과. 터널같은 것. 살아서 들어가서 죽어서 나오는 거에요. 살아서 나갈 때는 내가 나의 주인공이 되었다가 통과하고 난 뒤에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제는 내 주인공은 따로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은 채 나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은 구약에서는 밤으로 되어있지요. 신약에 베드로전서에 보면 1장 3절인가에 피뿌림으로 되어 있어요. 뿌리는 거에요. 베드로전서 1장 2절에 나와요. 피뿌림을 얻기 위해서 피를 뿌리는 거에요. 자, 피뿌림이 되게 되면 이거는 여러분 쉽습니다.
피를 뿌리게 되면 있음은 하나님 보시기에 있음은 피만 있고 인간은 없어요. 인간은 없습니다. 인간은 어디 있느냐? 없지요. 피뿌림 앞에 죽었으니까 없는 거에요. 그런데 피 뿌리게 되면 거기에 뭐가 등장하게 되느냐 하면은 인간은 없는데 뭐가 드러나느냐 죄가 드러나는 거에요. 죄가 드러나요.
피뿌림으로 용서함 받는 게 아니에요. 피뿌림으로 용서함 받는 게 아니고 피뿌림으로 말미암아 죄와 연계가 되어버려요. 그러면 피하고 죄하고 연계가 되어버리면 이것은 무엇의 반복이냐 하면은 이게 바로 십자가 사건의 반복이에요. 주님의 관심사는 예수님의 하신 일의 반복이 그게 마감이에요. 끝이에요. 십자가가 반복되면 돼요.
피 할 때 나오는 이게 뭐냐 하면은 ‘하나님의 의’가 됩니다. 죄인에게 피뿌림을 함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가 되는 거에요. 나의 의는 있어요? 나의 의는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없으니까 나의 의가 있을 리가 없지요. 그냥 의죠 ‘의’. 의가 등장하는 거에요. 의가. 피뿌림으로 죄 안에서 의가 등장하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은 하나님의 언약이 언약대로 되어지는 하나님의 언약의 실체입니다. 이 땅에서의 언약의 실체는 피와 연계되어 있는 죄, 이렇게 드러나는 겁니다. 피와 죄.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를 스탑시키고 그 다음부터는 우리로 하여금 인간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은 죄로 바꿔 버려요. 자기 백성을 죄로 바꾼다고요.
구체적으로 말로 이렇게 설명하기보다는 창세기 32장 한번 보겠습니다. 창세기 32장 26절에 보게 되면 야곱과 하나님이 만나는 대목이에요. 여러분들 아시다시피 하나님은 야곱에게 뭘 주느냐? 언약을 줬잖아요. 언약을 주는데 언약을 주고 왜 또 찾아오는가? 언약을 던져준 분이 알아서 완성을 해요. 던진 분이 완성을 한다고.
그러니까 우리는 도마고 주님은 쉐프가 되는 거에요. 그럼 주님께서 뭘 하느냐? 도마 위에 고등어를 하나 던집니다. 도마는 그냥 가만 있을 뿐인데 뭐가 자꾸 치는 거에요. 탁탁 치는데 쉐프는 아 오늘 고등어찌개 맛있겠다 하면서 손질하면서 꼬리 쳐내고 지느러미 쳐내고 도마는 퉁탕퉁탕. 주님이 가져온 고등어를 주님이 손질하는 거에요. 어머니는 고등어가 싫다고 하셨어 뭐 그런 거 있습니까? 짜장면이 싫다고 했지.
야곱의 몸을 도마로 사용해가지고 본인이 던진 그 고등어 언약을 손질을 누가 하느냐? 언약 손질을 하나님이 나서서 하는 거에요. 이게 야곱이 그 점에서 몰랐던 모양이죠. 창세기 28장에 보면 나오는데 야곱이 잠을 자는데 돌 위에 돌베개 잠을 잤어요. 돌베개. 야곱의 돌베개 저 봤어요. 안 믿어요. 안 믿는데 무조건 돌베개라고 갖다놨으니까 사진 찍고 했는데 이스라엘에 가서. 야곱이 돌베개 잠을 잤다 이 말이죠. 여기서 어렵습니다.
언제? 낮이 아니고 밤에. ‘밤에’에요. 항상 밤은 뭐하는 거라고요? 중지시킵니다. 스탑시켜요. 있음은 여기까지. 이제부터는 없음의 소관이다. 있음은 여기까지만 해. 밤이 됐는데 거기서 뭘 하느냐 거기서 꿈을 꿔요. 꿈을 꾸는 거에요. 제가 언젠가 그런 이야기했는데 꿈이라고 하는 것의 특징은 본인이 거기에 본인의 저의적인 의도가 개입할 수 없는 낯선 현실이라는 겁니다.
꿈속에 현실은 펼쳐지는데 그 현실이 드라마가 시작부터 중간 마지막까지 어떤 식으로 그 꿈을 꾸는 당사자가 개입의 여지가 없어요. 대표적인 것이 뭐냐 하면은 요셉입니다. 요셉. 그러니까 그 요셉의 운명도 일대기도 본인이 개입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은 있음에도 뭐로 바꿉니까? 없음이 있음을 막아놔야 되는 겁니다.
분명히 우리가 거울 앞에 보면 우리가 있잖아요. 있는데 거울 앞에 우리가 있으면 주님께서 거울 앞에 내 모습을 잘 비추어봤나? 네 잘 비춰봤습니다. 내가 너를 있어도 없는 자라 할게. 이렇게 돼요. 왜? 도마니까. 하나님의 언약이 오는데 꿈에 뭐가 바빠. 뭐가 바쁘냐 하면은 그 사다리에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굉장히 자기들끼리 바빠요. 천사는 누구 말 듣습니까? 야곱 말 안 듣지요.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죠.
어제 밤에 11시 넘어서 우리 동네 그렇게 요란스럽고 바빠요. 우리 동네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무려 6차선이에요.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6차선. 그게 왜 그러냐 하면은 노태우가 대통령할 때 닦아놓은 길이기 때문에. 노태우 생가가 거기 있거든요. 6차선이에요. 6차선에 화요일날 되면 오토바이 이 차량들이 윙윙~~ 자기들끼리 왔다갔다 하는 거에요.
꼭 야곱의 사다리같애. 나는 잠자고 있는데 저들은 잠도 안자요. 분주해요. 굉장히 분주하다고요. 내가 거기 끼어들면 안되지요. 그냥 가만 있어야 돼요. 가만 있으면 그 오토바이들이 시끄럽게 한 것처럼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그것도 올라갔다 내려갔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뭔가 분주해요. 뭘 이루느냐?
나중에 이제 꿈에 이야기하는데 내가 너한테 준 언약을 내가 다 마무리 짓겠다고 일방적으로 약속을 해버립니다. 야곱에게. 야곱은 오해해가지고 자기 복이 자기 소유화될 수 있는 복인 줄 알았어요. 이게 복은 수혜자를 없애버립니다. 죽여버려요. 복은 수혜자가 복 스스로 수혜자를 만들지 우리보고 복을 갖고 있으란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다시 복은 오게 되면 내가 복 받을 사람이라는 자체가 이게 날라가버려요. 복은 누가 받는가? 복은 주님이 복을 받아요. 주님이 복 주고 주님이 복 받는 하나님이 복 받는 거에요. 우리는 거기서 빠져야 돼요. 너는 빠져라 이 말이죠. 왜냐하면 언약에 개입한 자만 복 받을 자격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언약을 성취하는 거기에 개입한 자만 복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에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 복이 있습니까? 자기 이름이 날라간 사람이에요. 나의 영토가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내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 주 안에 있는 사람. 주 안에 있는 사람. 주안이 인천 근처에 있지요? 주 안에 있는 사람만 복을 받아요. 주 이름 안에 있는 사람만 복 받는다 이 말이죠.
내가 평생에 내 일기장 썼다고 복 받는 게 아니고 내가 쓴 적도 없는 주님의 일기장, 생명책에 있는 자만 복 받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항상 주님의 복에 주님의 일관성이 있는 복의 수혜자 작업에 누가 방해자가 되겠어요? “복 주세요!” 하는 이런 인간들이 방해자 되는 거에요. 기도했으니까 복 주세요. 헌금 했으니까 복 주세요 이런 인간이 방해가 되는 거에요. 저 인간 빼라. 꼴보기 싫다 빼라. 죽여버려. 빼라. 이렇게 되는 거에요. 복의 방해물이 되니까.
복은 복 받을 자에게만 주는 거에요. 복은 누구한테 오는가? 율법에 의하면 복은 모든 율법을 항상 지키는 자, 다시 말해서 의로운 자에게만 오게 되어있어요. 그런데 인간은 뭡니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지요. 게임 끝났지요. 없는 거에요.
사도 바울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할 때는요 복 받을 생각하지마라 천국 갈 생각하지마라. 너는 해당사항이 안돼. 너는 천국에 갈 인간도 아니고 복은 더더구나 받을 위인도 아니고 그냥 너 하는 행세 있잖아 있음이 있음을 걱정하는 그것. 그대로 그 성질 그대로 살려서 밤의 세계, 밤이 얼마나 긴지 혹독하게 한번 체험해봐.
밤 되거든 성냥개비 눈에 집어넣어서 눈 감지도 못하고 눈 부릅 뜬 채 긴긴 밤을 영원토록 한번 보내봐. 고통은 바로 인간이 눈 감지 못하는 것, 안 죽는게 고통인줄 네가 알아야 된다. 죽음은 되는데 자살은 영동대교 자살은 되는데 죽어도 물에 빠져도 안 죽어. 이게 얼마나 큰 고통입니까? 이게 얼마나 큰 불행이고 비극이에요.
괴로우면 그냥 죽으면 자살하면 좋은 방편 마지막 카드가 있잖아요. 마지막 카드가. 괴로우면 콱 죽으면 되잖아요. 가래 뱉듯이 콱 죽으면 되는데 이게 죽어도 살려내는게 문제가 되는 거에요. 이게. 환장합니다. 살려내는데서 환장해요. 못 죽게 만드는데 환장한다고요.
잠은 자는데 아침 7시 출근해서 밤 10시에 퇴근해서 직장 퇴근해서 좀 잘려고 하는데 7개월 된 애가 젖 달라고 시계도 못 봐. 새벽 2시반에 젖 달라고 깨가지고 온 동네 아파트 다 떠나라고 울 때 정말 성질 급한 사람은 아파트 창문 열어놓고 애 집어 던져버려. 차마 자식이라서 못 던지지. 남 애 같으면 집어던집니다. 남의 애 같으면. 천하의 지금까지 날 건드린 위인이 없었다. 그런데 7개월 네가 나를 건드렸다. 그래서 애 낳아봐야 인간 된다니까.
세상만사가 잠도 못 자게 만들지요. 잠도 내 맘대로 못자요. 잠은 좀 자야 되지 않습니까 제발. 다른 건 몰라도 잠이라도 좀 자야 내일 일이라도 하지. 잠도 못자게 만들어요. 깨가지고 성질부리면서 애 좀 어떻게 해봐라. 네가 해라! 나 혼자 낳았어? 너도 같이 낳았지. 이렇게 해가지고 일주일동안 말 안하고.
바로 이 모든 것이 있음에 대해서 감당을 못해서 그래요. 있음에 대해서 감당을 못해요. 있는 게 내가 여기 살아 있다는 게 원망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냐 하면은 욥이에요. 욥은 자기가 태어나서 사는 걸 후회했습니다. 내가 이럴려고 태어나게 하셨습니까 하나님. 해답을 좀 이야기 해보세요. 지금 왜, WHY 무엇 때문에 내가 이 땅에 태어나서 이러한 고통을 굳이 나같은 걸 뭘 밟을게 있다고 왜 저를 밟습니까 주님.
옆에 친구 셋 와가지고 야 그러지 말고 회개해봐라. 너 뭐 잘못한 거 있잖아. 곰곰이 생각해봐 잘못한 거 있어. 욥이 “너 주둥이 다물어라! 네가 내 고통을 알아?! 어줍잖게 아마추어가 프로한테 네가 내 고통을 알아? 아이고 잘났다 그래. 너 입 다물고 있어. 나는 하나님하고 이야기할게 너는 가만히 있어. 하나님이여 왜 저한테 이런 고통을 줍니까?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라고 언급하는 거에요.
그래서 다시 이야기하지만 모든 문제가 어디 있습니까? 있음에 있어요. 있음. 있으니까 천국 가고 싶고 지옥 안가고 싶은 거에요. 그게 얼마나 일방적인 터무니없는 그게 망상인지를 있는 나를 본인이 감당을 못해. 본인이 감당을 못해. 처리가 안 되고. 분리수거 할 수도 없고. 내가 나를 있게 했습니까? 내가 이렇게 생겨먹게 했습니까. 없잖아요.
그런데 고맙게도 야곱한테는 야곱이 찍 날아가 버립니다. 세상에 얼마나 감사한지. 야곱 본인이 사라지는 게 야곱이 받은 복이에요. 여기서 유명한 말 영구 없다 에요. 영구 없~다. 내가 여기 내가 없는 거에요. 내가 여기. 나는 없고 여기에 그리스도가 있다. 나는 있긴 있는데 그리스도 밑에 뭐냐? 도마에요 도마. 도마 알지요? ‘도마’.
도마 위에 뭐가 얹어있습니까? 고등어. 하나님의 언약이 얹어져 있고 그 언약은 주님이 자기가 있는 언약을 나를 도마로 사용해가지고 뭐로 사용한다? 나를 죽음으로 사용해가지고 죽음으로 사용해가지고 죽음을 사용해서 왜 죽었느냐를 따지는 거에요. 인간은 왜 죽었겠어요? 인간은. 왜 죽었어요? 죄 지어서 인간이 죽습니까? 죄인으로 태어나서 죽습니까? 죄인으로 태어나서 죄 짓는다는 사실을 언약을 통해서 알게 하는 거죠.
다시 말해서 네가 착해도 천국가기 글렀다는 것을 네가 살아있을 동안에 이 땅에 있을 동안에 제대로 알아라 이 말이죠. 안 그러면 사기꾼한테 넘어가기 때문에. 예수 믿고 구원받는다고요? 이거 말도 안돼요. 예수 믿는 것이 죄가 돼요. 왜? 우리는 나를 위해서 믿고자 하기 때문에. 그게 바로 죄에요. 그것도 지옥 갈 죄에요. 예수 믿고 지옥 가는 거에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지옥 갈 것이다” 그 이야기. 사도행전 16장 31절. 예수를 믿으면 지옥 갑니다. 앞에 뭐가 붙느냐 하면 이거 하나 떼면 큰일 나요. 예수를 믿으면 지옥 간다 앞에 뭐가 붙느냐? ‘주’. 주 예수를 믿게 되면 이 믿는 자체는 어디서 왔느냐 하면은 주인공에서 제공된 거죠.
다시 말해서 내가 예수 믿는 것이 언약 달성의 일부가 돼요 일부가. 내가 예수 믿는 것이 언약 달성의 일부로 개입이 된다니까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내가 안 믿고 싶어도 언약 때문에 내가 믿어야 돼요. 믿지 않을 수밖에 없어요. 사역형 또는 피동형이라고 하는데 이게 믿지 않을 수밖에 없는 거에요. 믿지 않을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믿지 않을 수밖에 없는 사람의 특징은 뭐냐? 믿는 사람과 대조가 돼요. 교회 내에서. 믿는 다고 떠벌리는 그 인간들과 믿지 않을 수밖에 없다는 것과 결과적으로 같은 게 같은 게 아니에요. 그 과정 자체가 달라요. 하나는 내가 믿던 주인공 자기 주체가 주 자리에 있지만 저쪽은 뭐냐? 주 자리가 주님이 주 자리로 가지 마세요. 나는 아니라고 이야기해줘야 돼요 그때는.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말을 하도 많이 들어가지고 그것도 믿지 마세요. 예수님이 나를 믿게 했다 그런 말도 믿지 말고 어쨌든 나는 아니야. 나는 아니야. 그리고 그때뿐만 아니라 지금도 나는 아니야. 지금 내일까지 살지 안 살지 그것도 내 소관 아니야. 모든게 내 소관 아니다. 내 소관 아니면 내 책임도 없는 거죠.
죄는 날 때부터 지었고 죄에 대해서 내 책임 없고. 세상에 이렇게 배짱 대단한 사람 봤습니까? 아니 내가 태어날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태어났게 했고 태어났는데 어떻게 태어났다고 했어요? 죄인으로 태어났죠. 그러면 우리는 마땅히 죄만 내놓는 것은 그것은 당연한 거지요. 이상할 게 뭐가 있어요?
그 왕자표 크레파스 보세요. 거기에 길쭉한 게 4개 있어요. 노랑색, 하얀색, 까만색 이런 것은 많이 쓴다고. 그 까만색 크레파스 가지고 한번 그려보세요. 도화지에다가. 이건 가를 써도 까만색이고 나를 써도 까만색이고 나무를 그려도 까만색이고. 선생님께서 너 초가집은 왜 까맣냐? 물으면 선생님 까만 크레파스로 그리니까 까맣지요. 뭐 이상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이상한 듯이 이야기합니까?
우리에게는 단 하나의 가능성만 줬어요. 그거는 지옥가는 거에요. 태어날 때부터. 그걸 로마서 5장에서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아담에 속한 자’. 또는 ‘죄의 왕노릇’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노선이 단 하나의 노선이에요. 브레이크가 없는 벤츠에요. 홍준표가 지었던 책 이름인데. 내리막길을 가는데 브레이크가 없어요. 그냥 중력에 의해서 꼴아 박지요.
그런데 단 하나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만 있어요. 그 죄. 일체의 그 죄의 방향틀기나 또는 그걸 방향을 변경시켜서 방향을 반대로 하거나 그것을 할 수 있는 나의 역량은 일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언약에 속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에 속하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나하고 하나님하고 약속한 게 아니에요. 예수님하고 아버지하고 약속한 것이기 때문에 제 3자인 우리가 끼어들 자리는 전혀 없습니다. 여지가 전혀 없어요. 이것을 아는 자가 바로 그 사람 도마 위에 하나님의 언약을 실리는 사람이에요. 고등어가 있는 사람이에요. 이걸 아는 사람이.
“나는 죄인 중에 괴수로다”. 아주 신나요 신나. 내가 내놓을 수 없는 것은 죄 밖에 없습니다. 아주 신바람 이박사 신바람이 났어. 신이 나는 거에요. 왜냐하면 내가 구원받는 게 신나는 게 아니고 내가 하나님의 언약 작업에 뽑혔다는 것. 거기 가담이 되었다는 이 사실. 언약을 구성하는데 있어서 내가 거기에 간택되었다는 선택되었다는 이 사실이 신바람 나는 거에요.
도마 위에서 주님께서 고등어를 이렇게 내치던지 저렇게 내치던지 주님 마음대로 하시옵소서. 내가 가난에 취하던지 부자에 취하던지 그건 내 소관 아니에요. 그건 내게 능력이 주는 한 알아서 고등어를 펄펄 뛰게 하든 구워먹든 삶아 먹든 찌개를 해 먹든 마음대로 하시옵소서. 그건 주님이 쉐프지 내가 쉐프가 아니기 때문에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기 때문에. 요리하시면 되는 거에요. 요리하시면.
이게 다 어디서 나오는가? 바로 멈춤입니다. 성령이 왔다는 것은 무슨 뜻이라고 했습니까? 모든 있는 자들아 성령 앞에서 스탑. 멈춰라. 성령께서 요단강에서 예수님 세례주시고 예수님께 주신 그 업무가 뭐냐 하면은 바로 십자가에 죽기까지 성령이 계속 이끄시는 거에요. 죽고 난 뒤에 부활도 해당되지만. 그 대표적인 것은 십자가 죽기까지 계속 성령께서 이끄십니다.
그게 예수님이 마태복음 3장에서 내가 받을 세례다. 마지막 세례는 하나님의 진노의 세례. 그걸 불세례라고 해요. 이스라엘에 보게 되면 하나님이 진노하게 되면 불로서 진노를 보여주거든요. 하나님의 진노. 아까 누가복음 3장 16절에 나오지요.
그는 성령과 불로서 하나님의 진노를 표현한 거게요. 하나님의 진노가 있는 곳에 예수님도 아담의 몸을 입었기 때문에 착착 줄 맞춰가면서 예수님께서 앞장 서가면서 주님께서 그 십자가에 하나님의 진노가 기다리는 그 장소에 쑥 들어가지요.
거기에 대해서 여러분 갈라디아서 3장 13절 기억할겁니다.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받으시니라. 예수님께서는 가자! 아버지께서 주실 저주가 있는 곳으로 가자! 이 죽을 인간아. 가자 이 말이에요. 주 안에서 우리를 주의 저주로 가게 하시는 거에요. 저주로 가야 우리가 살아있다는 이것이 얼마나 죄스러운 존재인지 알기 때문에 그래요.
거기서 그 십자가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바로 나의 죽음이에요. 나의 죽음인데 정확하게 해서 예수님 것을 플러스하기 때문에 합쳐서 이게 뭐냐 하면은 우리의 죽음. 함께 죽음. 함께 죽으심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주의 이름에 합류한 죽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 주님이 죽었잖아요. 주님이 죽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주님께서 버스 운전하고 있는데 성령께서 예수님 보고 예수님 잠깐만! 얘도 태워가세요 하고 주님이 운전대를 잡은 그 버스에 주의 이름으로 운행되는 그 버스에 401번 버스에 우리를 같이 태워서 우리가 맛 볼 수 없는 아버지의 저주가 있는 곳으로 함께 가게 하시는 거에요. 그걸 가지고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와 내가 십자가와 함께 죽었다”.
그러니까 같은 버스에 함께 탔으니 저주 쪽으로 가는 버스에 함께 갔다는 것은 그 말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도 죽고 나도 죽고. 다른 말로 하면은 나도 죽고 예수님도 죽고 그 다음에 살려내는 것은 내 이름으로 살려내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살려내지요.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받을 이름이 없기 때문에 내 이름으로 따로 하는 게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통합해서 우리를 끄집어내요. ‘주의 이름’으로.
그러면 이름 하나에 몸 하나지요. 몸 두 개인데 이름 하나 그런 거 없죠. 이름 하나에 몸 하나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왜? 그리스도의 몸의 이름은 주의 이름 단 하나이기 때문에. 그 주의 몸을 성령의 연합체를 그걸 교회라고 이야기하는 거죠. 교회라는 말 나오기까지 이렇게 길어요. 이야기가.
대한예수교 간판 걸고 홀 얻어서 하는 게 이게 교회가 아니죠. 교회라는 것은 주님의 언약으로 이뤄진 게 교회이기 때문에 우리가 교회를 키운다든지 작아진다는 것은 교회에게는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가족을 키우기 위해서 애 낳고 애 낳고 이러면 가족 큰 겁니까? 가족은 크지만 가정이라고 하는 것은 애 많이 낳았다고 가정이 더 커지는게 아니에요.
몸집이 커지는 게 아니에요. 두 식구라도 두 부부라도 가정은 가정이에요. 교회는 패밀리에요. 신의 혈통입니다. 가정이기 때문에 숫자는 관계 없어요. 두 세 사람도 나와 함께 있으면 주님께서 내 식구로 봐요. 이거 뭐 두 사람 밖에 없네. 이거 내 식구 아니다 이런 것 없어요. 주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이거는 주님의 식구가 되는 겁니다.
따라서 이게 언약에 속했기 때문에 교회는 미완성 교회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두 명이라도 그게 완성된 교회에요. 주님의 목회는 그렇게 하는 거에요. 항상 교회에 숫자 몇 명이 아니라 헌금 얼마냐가 아니라 뭐를 누구 때문에 모였느냐를 묻고 있어요. 누구 때문에. 지금 누구 작업으로 모였느냐를 묻는 거에요.
그거는 나는 죽어있는데 살아계신 주님께서 모이게 하심으로서 모이게 하셨습니다가 되는 겁니다. 이제 지금까지는 약간 어려운 이야기고요. 특히 이게 본문에서 우리가 첫째 강의하면서 어려웠던 것은 바로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있음에서 없음으로 전환하는데 이게 어렵다. 어떻게 어렵느냐 하면 우리의 있음은 멈추고 여기 뭐가 개입되느냐 하면은 하나님의 언약, 약속이 개입되는 겁니다.
약속이 개입되는데 창세기 32장 다시 읽어 봅시다. 창세기 32장 26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해요. 26절 아니고 29절.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 당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이게 질문이 성립이 안 되는 거에요. 왜냐하면 이름을 물어도 주님 쪽에서 물어야지 인간이 물을 수 있는 질문은 아닙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은 야곱은 해서는 안 되는 거에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29절에 보면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라고 하지요. 자, 있는 자는 있는 자리에서 이름을 묻습니다. 이름 묻는다는 말은 나는 여기 내 이름 따로 있고 여기서 여기까지는 나인데 여기 바깥에 있는 당신은 당신의 영역은 이름을 뭐라고 호칭하면 됩니까? 라고 나와 너의 관계에 있을 때는 서로의 이름을 물을 수가 있어요.
나 따로 너 따로가 되면 이름을 물을 수가 있단 말이죠. 그런데 통합이 되어버리면 이미 야곱의 이름은 누구 이름으로 흡수, 통합됩니까? 주의 이름으로 통합되지요. 그러면 이스라엘의 이름은 야곱의 이름이 아니에요. 누구 이름이냐? 찾아오신 주님의 이름이에요. 주님이 앞으로 이스라엘처럼 기능을 하게 될 거에요. 그게 언약이거든요.
언약이 흡수될 때는 주여 누구십니까? 묻지 말고 주의 이름으로 이렇게 합류돼요. 회사가 흡수 통합되듯이 이미 주께서 나를 안아버린 거에요. 어린애가 태어나가지고 어린애가 응애응애 하면서 태어나가지고 말도 못하는데 갑자기 말문이 트여가지고 아줌마 이름이 뭐에요? 이렇게 물으면 안돼지요. 엄마가 이름을 엄마가 지어주는 거에요.
없는데서 있음의 확장으로 연장으로서 너는 우리 둘이 해서 너를 만들었다. 우리 둘의 연장선에서 우리 집안의 사람으로서 만들었다 해서 성을 우리 집안에 있는 아빠의 성을 따라서 그대로 이름을 짓는 거에요. 이래서 너는 한 가족이라고 하는 겁니다. 주님께서 이름을 이스라엘로 지어줬으면 그 이스라엘은 야곱의 이름이 아니고 이름 지어주신 주님 자신의 이름이에요.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