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존강의20200910b 베드로전서4장 14절(자아 표준모델)-이 근호 목사
서울의존강의20200910b 베드로전서4장 14절(자아 표준모델)-이 근호 목사
14절 보겠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이라고 되어 있죠.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아무도 예수님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고 욕의 대상이 되었다 이 말이죠, 이 세상 자체가. 둘째 시간 참 어렵긴 어려운데 여러분들 실력이 있으니까 그냥 갑니다. 어렵더라도 여러분들이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시간과 공간은 있는데 인간은 없어요, 이 땅에. 지금 인간이 있다고 생각해버리면 시간과 공간이 죽어버립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야고보서에서 인간은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이기 때문에. 인간보다 더 긴 게 뭐냐 하면 시간이고, 인간보다 더 넓은 세상이 뭡니까? 공간이에요.
이 세상의 모든 문제점은 뭐냐 하면 시간에 끼여서 내가 없는데 자꾸 내가 여기 있다고 여기는 것. 이게 문제가 되는 겁니다. 대구강의에 보면 이게 있어요. 창세기 강의하면서 이런 이야기했죠. 이미 우리는 죄인으로 태어났잖아요. 우리는 모친의 죄 중에 태어났죠. 죄인으로 태어났으면 죄가 우리를 지배하게 되면 지배하는 죄에서 우리가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이 육체는 도로 흙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이미 죽은 자이거든요. 사람들이 살아가는 게 성경에서는 이미 죽은 자인데 인간은 ‘자기가 안 죽었다’를 증명하는 식으로 살아가요. 나 여기 살아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본인이 살아있어 버리면 뭐가 죽어버리느냐 하면 시간과 공간을 주신 창조의 취지가 죽어 버려요.
빈 공간에 저렇게 아름다운 꽃이 있고 넝쿨이 있다고 봅시다. 그러면 저 꽃을 보는 순간 나는 여기 없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택배 왔습니다. 누구 계십니까?” 할 때에는 갑자기 없는 내가 생겨요. 누가 받아야 될 거 아닙니까? “네 있습니다.” 답변해줘야 되잖아요. 그 순간 꽃의 존재, 시간, 공간이 없어지고 관심, 의식의 집중이 나한테 꽂히는 거예요.
나한테 꽂혀 버리면 시간과 공간 안에 나는 없는 존재인데 모든 의식이 ‘나는 없는 존재’가 아니고 무엇으로 증명하느냐 하면 ‘나 여기 있습니다’ 라는 존재로 나오면서 시간, 공간이 있어야 될 그 의미를 내가 강압적으로 이걸 훼방하고 방해하는 작업이 개시되는 겁니다. 이것은 이 세상을 살면서 스트레스가 돼요. 내가 여기 있는데 왜 나를 안 알아줘. 이게 바로 암 걸리는 거죠. 말기암 걸리는 거죠, 뭐.
또 어려운 거 해볼게요.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고쳤죠. 병든 자를 고쳤습니다. 자, 생각해보세요. 병든 자를 고치는 예수님이 좋습니까, 아예 병 안 걸리는 게 좋습니까? 어느 쪽이 좋습니까? 아예 병이 안 걸리면 좋잖아요. 그런데 아예 병이 안 걸리면 이 분, 시간과 공간의 주인이 등장할 자리가 마련되지 않아요.
두 형제, 형이 있고 동생이 있습니다. 누가 세상을 제대로 파악했는지 여러분 맞춰보세요. 형은 멀쩡한 제비다리를 분질러놓고 고쳤어요, 형은. 동생은 제비다리를 그냥 고쳐줬습니다. 어느 쪽이 자신의 존재성이 드러납니까? 형이죠. 형이잖아요. 아, 이런 게 어려워요. ‘내가 정당하다’가 평소에 잘 안 나타나니까 일부러 악한 일을 해놓고 그걸 반성해보는 거예요, 내가. 이유가 뭡니까? 정당한 존재가 나 여기 있음을 과시하기 위해서 이 짓하고 있는 거예요, 과시하기 위해서.
정치적인 발언처럼 들릴지 모르겠는데 한 좋은 예가 되기 때문에 예를 드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다리가 아파서 군에 안가도 돼요. 군에 안가도 되는데 자기 엄마가 민주당 대표위원이나 되어가지고 엄마 위신 세워주려고 자기가 군에 갔어요. ‘안가도 되는데 군에 갔기 때문에 마음 놓고 휴가 써도 된다’ 라는 주장을 하게 되면 이게 뭐가 문제가 돼요? 내가 처음부터 많이 봐줬잖아. 좀 봐줘. 안가도 되는데 갔으니까 내가 휴가 몇 일간 더 써도 좀 입 다물고 봐줘. 내 쪽에서 양보했으면 너희 쪽에서도 양보해줘. 이런 식이에요. 그런 식이 되면 결과적으로 뭐가 부각돼요? ‘나는 정당하다’가 부각되는 거예요.
지금 흥부는 제비새끼다리 고쳐주면 제비 자기들끼리만 알고 아무도 몰라요. 그런데 놀부는 부러뜨리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다 보여주고 고치기 때문에 누가 부각됩니까? 놀부가 부각되죠. 우리는 모두 무슨 심보입니까? 놀부 심보에요, 표준모델이 있기 때문에. ‘나는 정당하다’를 날마다 보여주는 표준모델을 고수하기 때문에 우리는 놀부 심보라니까요.
그러니까 인간은 가만히 있으면 문제가 없는데 가만히 있는 게 아니고 자꾸 꼼지락거리는 거예요, 정당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나 여기 있음을. 다시 얘기하면 내가 여기 있어버리면 시간과 공간이 여기 있을 이유가 없어요. 시간과 공간은 배후에 주님께서 작용합니다. 시간과 공간이 작용해버리면 은혜가 거기에서 흘러 들어와요. 시간, 공간에서.
아까도 얘기했지만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 잠이라 하는 것은 ‘잠.자.자.’ 한다고 해서 잠이 후딱 오는 게 아니거든요. 하다보니까 그냥 잠이 오는 거예요. 세상의 모든 것은 내 의지대로 되어지지 않아요. 의지대로 되는 게 아닙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예를 들어 누가 지갑을 잃어버렸대요, 누가. 한 예니까. 지갑을 잃어버렸다. 그러면 지갑 찾기 위해서 나름대로 분주하게 뛰겠죠. 내가 지갑을 찾을 때 하나님께 감사기도 하겠죠. 하나님 고맙습니다. 이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감사기도 하는 순간 내 존재가 부각되죠.
그래서 하나님 감사기도 합니다. 고마워하고 기뻐하는데 밖에 나와 보니까 타이어에 빵꾸가 났어요, 오래 되어가지고. 그래서 그 타이어 갈아 넣을 판이에요, 너무 오래 되서. 그러면 정비소에 가면 또 타이어 장사해먹는다고 이건 하나만 교체하면 안되고 네 개다 갈아야 돼요. 이렇게 나올 가능성이 많아요. 균형이 맞아야 돼요, 이래가지고.
그러면 그 사람은 지갑은 하나님 은혜로 찾았다고 감사기도 했는데 그럼 타이어는 누가 바람 뺐습니까? 이건 시간이죠. 시간은 우리를 죽입니다. 아무것도 안하나 열심히 설쳐대나 늙으면 다 죽어요. 지금 이 이야기가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제가 예를 듭니다.
제가 어떤 사람을 그림으로 한번 그려볼게요. 머리 까져있고 이런 사람이 있다 합시다. 이 사람이 누구냐 하면 김정은입니다. 37살 먹은 김정은이에요, 철딱서니 하나도 없는. 자, 김정은은 뭐냐? 김정은은 시간과 공간에 의하면 진흙인데 돌출부분과 들어간 부분을 갖고 있는 진흙 덩어리에요.
그런데 북한 사람들은 이 진흙덩어리한테 꿈쩍도 못하고 있어. 이거 희한한 일이에요. 왜 그렇습니까? 왜 그러느냐 하면 시간과 공간의 원칙을 모르고 이것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인간 대 인간의 관계로 이걸 가지고 평생을 여기에 주눅 들어 살아왔거든요. 인간 대 인간의 관계. 영의 관계가 아니고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요.
유다 나라가 멸망하는 순서가 이래요. 처음에는 유다나라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였습니다. 중간에 언약이 들어가서. 이렇게 되어 있죠, 유다나라, 이스라엘. 그 다음에는 ‘인간 대 인간의 관계’로 갔어요. 임금님이 잘해야 되고 왕이 잘해야 우리가 잘 먹고 살지. 인간 대 인간으로. 제사장이 똑바로 해봐라. 그래야 우리가 복을 받지. 세 번째는 뭐냐 하면 ‘인간 대 대물’. 대물이라는 말은 다시 말해서 물건, 재물 또는 땅. 재산될만한 것과의 관계. 이게 바로 이방민족이에요. 잘 먹고 잘 사니까.
이제는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저게 나한테 얼마나 돈을 벌어줄 것인가를 생각하는 거예요. 결혼도 마찬가지고 애 공부시키는 것도 마찬가지고. 쟤를 공부시켜놓으면 쟤가 밖에 나가서 월급을 한 달에 얼마나 물고 들어올 애가 되는지를 생각하는 거예요. 나와 무엇의 관계?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사물로 보는 겁니다. 물체로 보는 거예요. 시장에 내놓는 하나의 상품으로 보는 겁니다.
여러분 초밥집에 가면 이런 비싼 초밥집 있죠. 한 접시에 3000원 하는 거. 내가 보기에 원가 200원도 안되는 걸 가지고 계란 지단 해놓고 돌아다니면서 3000원 받는 거 있잖아요. 아 참. 좀만 먹으면 3만원어치 나와. 아니 아까워 죽겠어요. 그거 조절한다고 애먹어서 밥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돈 3만원 나오고 말이죠. 그거 계산하느라 마음 놓고 먹지를 못해. 이건 얼마짜리고. 접시가 황금접시. 그 접시 돌아다니는 거 하고 접시에다가 이 세상에서 사람을 실어서 돌아다니는 거하고 차이점이 없어요. 저거 얼마짜리고?
바로 이스라엘이 이래서 망한 거예요. 잘사는 나라가 부러운 겁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는 언약이 주어졌고 시간과 공간은 누구 말을 듣느냐 하면 이 언약 말을 듣고 하는 거예요. 홍해가 갈라지고 요단강 갈라지고 가뭄이 오고. 농사지어도 가뭄이 오면 농사 안 되거든요. 이스라엘 백성자체가 농사지어도 약속의 땅에서는 말씀대로 살아야 농사가 되게 되어 있어요. 모든 자연재해도, 풍해나 메뚜기재앙이고 뭐고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고요, 하나님의 손에.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작용하는 말씀에 달려있다 이 말이죠. 그리고 인간이라 하는 것은 그 말씀의 생산물이에요, 인간이라는 것은.
사람은 풀이요, 모든 영광은 풀의 꽃 같으니. 이사야 40장. 무엇이 영원합니까? 풀은 마르고 영광은 없어져도 무엇은 영원하다? 말씀은 영원하다 (이사야 40장 8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요한복음 1장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또는 생명이 되었다. 생명이 왔으되, 빛이 왔으되 지금 우리는 ‘나’라는 것을 부각해버리면 생명이 왔으되 영접치 아니해버려요. 자기 주제파악을 못해서.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아들을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것은 혈육으로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는 거예요.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된다. 이 모든 시간과 공간은 뭐로 가득 차 있다? 아까 공식했죠. 시간과 공간은 뭐로 차 있다고 했습니까? 말씀으로 가득 차 있는 거예요.
14절 보기 전에 제가 얼마 전에 춘천을 다녀왔습니다. 우리 의존교회 교인들이 춘천에 많이 갔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갔다 오고 난 뒤에 했어요. 춘천강의, 그 강의에서 제가 강의한 것을 짧게 요약해드리면 이렇습니다.
시간과 공간은 보이지 않는 어떤 분으로부터 나와서 그 분으로 다시 소환된다. 시간과 공간은 인간 보기에는 그냥 허하고 망망하지만 성경에서는 어떤 보이지 않는 인물, 어떤 어르신이 있어요, 어떤 분. 그래서 시간과 공간이 더하기해서 어떤 인물로 나타나요. 그러면 날과 달, 절기 지키고 할 필요 없어요. 왜냐하면 율법에 나오는 날과 어떤 특정한 지점, 성소에서 지켜야 한다 이런 거 필요 없이 이게 인물로 집대성되면 우리 성도는 그 분을 사랑하면 돼요. 참 쉽죠?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이게 아무리 세상의 불심판 날짜가 언제냐 알든 모르든 관계없이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면 불심판이 오든 물심판이 오든 유황불이 오든 상관없어요. 왜? 주를 사랑하는 자에게는 복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라는 인물은 시간과 공간을 집대성한 거예요.
그렇다면 시간과 공간은 주님 쪽으로 가는데 인간들은 자기의 표준모델을 고집하다 보니까 시간공간을 누구 위주로 억지로 잡아당기느냐 하면 나 좋으라고 시간, 공간이 작용하라고 자기를 자꾸 돋보이게 만들어요. 자기 존재를 중심에 놓고 시간과 공간이 여기에 따라줘야 된다고 그렇게 억지를 부리는 겁니다.
10월 9일에 우리 교인 딸 결혼식을 하는데 만약에 그 집사님은 그전에 예수님 재림하면 싫은 거예요. 왜? 딸 시집 보내고 난 뒤에 재림하라고. 시간과 공간을 자기 위주로 보는 거예요. 우리 초등학교 때 그런 거 있잖아요. 왜 자꾸 소풍가면 비가 와요? 김밥 먹을 기회를 다 놓치잖아요.
제 국민학교 때 이런 일이 있었어요. 우리 5학년 때 6학년 한해 선배 되는 그 사람이 선도라 하는 거 있죠. 교문에서 선생님도 아닌 게 선생님 흉내 내면서 아이들 막 패는 거 있잖아요. 거기서 제일 독한 교관처럼 독한 선배가 있어가지고 모든 우리 국민학교 5학년 소원이 뭐냐. 걔 빨리 졸업하라고. 1년만 기다리면 졸업하니까. 6학년에서 중학교 가니까 우린 산다. 우리가 6학년 되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그 형이 뒷자리에 앉아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유급되어가지고. 끽소리 못하고, 동급생 되었으니까 가만히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시간과 공간이 인간들이 기대하는 순서대로 진행되지 않아요. 언제 죽을지 언제 태어날지 언제 건강할지 그것은 전도서의 말씀에 의하면 모든 것은 때가 있으매 그 ‘때’에는 손 떼라. 네가 정하는 게 아니야. 사랑할 때가 되고 미워할 때가 되고 그런 거예요. 그래서 남녀가 서로 사랑하는 것도요. ‘사랑하자 사랑하자’ 이래서 사랑하는 게 아니고 그냥 부딪쳤는데 그냥 지나가면서 사랑하게 되고 그런 거예요.
나이 서른다섯에 시집도 못가냐고 막 닦달낼 게 아니고. 명절, 추석날 온 집안에 딸내미 하나 붙들고 압력을 가하듯이 “나이 서른 다섯이 적나? 아이도 못 놓는다.” 합리적 이유를 대가면서 막 시집가라고 하는데 시집을 아무랑 합니까? 김정은이랑 할까요? 아무나 해요? 뭔가 마음이 딸려야죠, 마음이. 집안 빵빵하고 자기 오빠가 서울대학 나왔단다. 뭐 백날 해도 자기 오빠하고 결혼합니까? 막상 만나보게 되면 못났다. 헤어질 이유가 딱 하나, 못난 거밖에 없죠. 그래도 네가 교회 다니면서 믿음 좋다고 해놓고 조건 찾는 거봐라. 믿음은 믿음이고 조건은 조건이고 뭐 땡겨야 뭘 하죠. 믿음 좋다고 다 합니까? 노틀담 꼽추하고 할까, 그럼.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믿음이라 하는 것은 내 능력을 발휘하는 게 아니고, 말씀에 맞추는 게 아니고 말씀에 위배되었음을 인지하는 게 믿음이에요. 내가 어떤 경우라도 말씀과 합치될 수 없는 나밖에 모르는 인간이라는 그게 믿음이에요. 그래야 예수를 믿지 그럴 것 같으면 예수를 안 믿고 잘난 나를 믿지, 예수를 왜 믿습니까?
예수님이 욕을 봤다는 말은 어떤 뜻이냐 하면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이 율법을 지켰다고, 그 당시 예수님 태어난 그 유대나라가 율법을 지켰다고 자부했다는 말입니다. 율법을 지킨 사람은 천국에 안 넣어줍니다. 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은 율법을 지킬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지키죠.
수요설교처럼 서너가지 죄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불로 싸질러버렸는데 그러면 그 죄 안 지으면 어떠냐? 그 죄 안 지으면 다른 죄 찾아내요. 다른 죄 찾아놓고 또 서너가지라. 그럼 그 죄 안 지으면? 그 죄 안 지으면 또 다른 죄 가지고 서너가지 찾아내요. 어째든 저째든 간에 불로 심판하는 것을 네가 못 빠져나온다. 처음부터 인간은 죽을 죄인이기 때문에 그래요, 죽을 죄인이기 때문에. 이것은 변경사항이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죽을 죄인이라는 말은 죽을 죄인값을 하면서 살아라 이 말이죠. 자꾸 의인인 채 하지 말고. 아, 나는 진짜 나밖에 모르네. 라는 고백을 왜 주님 앞에 못합니까? 그걸 하나님께서는 답답해하는 거예요.
‘저는 제 생각만 하는 그 순간에 나의 이익을 생각하기 때문에, 남한테 안 지려고 하기 때문에 주님의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르고 세상에 불평밖에 할 줄 모르는 그런 인간입니다.’ 라는 그런 말을 왜 못해? 그렇게 살아가고 있으면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으면서 왜 말을 못합니까? 다른 이중적인 것, 주님께 보여주는 나 따로 있고 꼬깃꼬깃 감춰놓는 나 따로 있고 그게 무슨 수작이에요? 뭐 그런 수작이 다 있어요. 주님께서 그걸 모를 리 있습니까?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영이거든요. 하나님께만 깊은 영이 아니에요. 우리에게도 깊은 영이 와요. 우리의 가장 깊숙한 곳에, 나도 못 찾는 곳에 성령이 깊게 들어가서 그걸 지적질 할 때 그건 복 받은 사람입니다. “네 안에 이거 있다. 네 안에 이 괴물 들었네.”, “아이고, 전 몰랐습니다.”, “걱정하지 마, 내가 찾아줬잖아. 내가 찾아줬어.” 그게 주님의 사랑이 아니고 뭐에요.
자, 율법은 못 지킵니다. 율법을 못 지키는데 율법을 지키겠다고 하기 때문에 지옥 가는 거예요. 왜냐하면 율법을 지키게 되면 가짜 천국이 만들어집니다. 율법을 지킨 사람은 들어갈 수 있는 천국을, 따로 표준모델을 만들어요. 세상에, 이거 가짜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했습니까? 율법의 위반자로 등장했죠. 그들이 율법 지키는 것과 동일한 것이 단 하나도 없어요. 안식일이면 안식일, 간음한 자를 돌로 치니까 때리지 말라 하고. 어떤 율법 말씀의 해석도 동일한 말씀이 단 하나라도 없는 거예요. 단 하나도 없어요. 저쪽에 금식할 때 주님은 뭐했습니까? 술 잡쉈어요. 저쪽에서 금식하고 고난 받을 때 주님께서는 술 잡숫고 노셨다니까요.
의도적으로 틀어지게 하는 거예요. 왜? 따라 오려면 따라와 봐! 너희들이 너희들 세계의 한계를 아무리 해도 절대로 주님이 하신 해석을 열두제자를 비롯해서 어떤 인간도 눈치 챌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 때문에. 율법 지켜서 가는 나라는 없어요.
그럼 천국은 뭐냐. 율법 지켜서 천국 못갑니다. 사랑으로 가요, 사랑. 사랑으로 가는 거예요. 사랑해주시는 분에 의해서 사랑 받으면 갈수 있어요. 그러면 사랑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어떻게 압니까? 참 쉬워요. 어렵다 어렵다 했는데 오늘 강의에서 이게 제일 쉬워요.
뭐냐 하면 사랑받은 사람한테는 율법에 대해서 부담 느끼지 않습니다. 부담 느끼지 않아요. 왜? 사랑이란 서로를 알고 싶어하는 충동이 강렬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사랑은 사랑해주는 사람, 그 인물에 꽂혀서 내가 얼마나 율법을 잘 지키나 자기한테 더 이상 꽂히지 않기 때문에.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면 누구를 사랑해야 돼요?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면 죽자 살자 나만 사랑해야 되기 때문에 그다음부터 나는 율법으로 무장합니다. 하나님이여, 한번 봐주세요. 이 정도로 저는 공부 잘합니다. 저 백점 맞았어요. 또 율법대로 살았습니다. 또 선한 일을 했고 모든 행동에, 매사에 조심 또 조심,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식으로 행동 하나 경솔하게 하지 않고 혹시 남에게, 이웃에게 피해 줄까봐 조심조심. 어디가도 마스크 턱에 안 걸치고 두손 가지고 코끝까지 꽉 막아서 비말 튈까봐 이 정도로 하는 걸 봐주시기 바랍니다. 이 정도로 남에게 배려밖에 할 줄 모르는 인간입니다. 지옥가거라, 인간아. 네가 지옥 가는 거야, 네가. 왜? 사랑하는 자가 없어요. 자기 외에는 달리 사랑하는 자가 없어요.
아, 이거 참 무서운 이야기에요.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받죠. 그런 이야기하면 저쪽에서 하는 말이, 주님이 사랑 안 되는데 어쩌란 말인가. 다른 말로 하면 내 사랑이 너무 강렬해서 다른 사랑은 내 자리에 끼어들지를 못하는데 어쩌란 말인가. 이런 뜻이에요.
사랑은 자기파괴에요. 사랑은 자기파괴입니다. 모든 사랑노래에 다 들어 있잖아요. 어쩌란 말인가 이 아픈 가슴을. 보고 싶어서 가슴 아픈 걸. 지가 거울에 비친 지 모습 보면서 가슴 아파요? 아니에요. 다른 사람 보고 싶은 거예요. 당신이 떠나면 내가 안보면 그만이지만 꿈속에 당신이 나타나면 난 어쩌란 말인가. 녹색지대가 부른 노래 아닙니까. 당신이 보고 싶어도 앞에 안보이면 그만인데 꿈에 나타난 걸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 꿈에 나온 걸 지울 수도 없고.
사랑은 나한테 미치는 게 아니고 그 사람한테 미쳐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고린도후서 5장에서 뭐라고 합니까? 사람들이 자기보고 “너는 미쳤다” 할 때 “그래, 나는 미쳤다. 미쳤는데 나는 예수님의 사랑에 미쳤다. 예수님께 미쳤다.” 와, 이게. 예수님의 사랑의 영을 받으니까 사람이 이렇게 되는 거예요.
지금 사랑이야기 나와 버리면 신앙생활, 교회생활 같은 거 없어요. 무슨 생활입니까? 사랑생활이에요. 뭐 교회는 어떻게 하고 헌금 어떻게 하고...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그냥 사랑하세요. 누구? 예수님을. 그러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사야 11장 봅시다. 1절부터 보면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죠. 2절, “여호와의 신”이죠. 장차 올 성령입니다. 여호와의 신은 어떤 신이냐 하면 지혜, 총명, 모략, 재능, 지식,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 그렇게 되어 있죠. 이런 것 가지고 자기 자랑하고 무장하라는 뜻이 아니고, 이사야 61장 1절,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했을 때” 분명히 이것은 아까 같으면 나는 지혜가 뛰어나고 나는 모략이 뛰어나고 자기 자랑하겠잖아요.
그러나 실제로 여호와의 신이 임하니까 “나를 보내서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라”했는데 포로 되었다, 갇혔다, 마음이 상했다. 다 무엇 때문에 그러느냐 하면 인간은 자기 잘난 맛에 살고 싶은데 하나님의 율법이 오니까. 율법은 왜 오느냐 하면, 어제 수요설교에서 그런 이야기했죠, 율법은 경찰이에요, 경찰. 죄가 있는 곳에 율법이 온 거예요. 율법이 온 것은 죄를 더욱 더 죄 되게 드러나도록 하기 위해 오는 거예요.
어떤 마을에 범인이 있으니까 여기 경찰이 온다고 했잖아요. 이 말은 율법이 온 것은 우리가 날 때부터 의인이라는 말입니까, 죄인이라는 말입니까? 날 때부터 범죄인이에요, 우리가. 아니 주제파악 해야 돼요. 우리는 착한 일하고 배려해주고 이웃사랑 필요 없어요. 우리는 무슨 짓을 해도 그 죄는 변경이 돼요, 안돼요? 절대로 변경이 안됩니다. 이게 성령이 임해야 알 수 있는 거예요. 아, 이게 안되는구나. 내가 천국 가는 것이 이게 안되는구나.
천국 가는 것은 한국 기독교가 만든 구라에요. 김구라, 박구라가 아니라 완전히 구라에요. 세상에, 사람을 보고 이야기해야지. 못가는 인간보고 간다는 말을 하면 안되죠. 열심히 기도하세요, 헌금 하세요, 교회 봉사하세요. 이런 구라 치면 안되죠. 원래 물 안 먹는데 물 한번 먹어야 되겠다. 이 사기에, 보이스피싱에 도대체 참지를 못해.
예배당 지으면 천당 갑니까? 마스크 쓰고 이웃배려하면 천당 가는 거예요? 마스크 쓰고 배려하면 악함이 약간이라도 착함으로 변합니까? 오늘 베드로전서 4장을 유념해서 보셔야 돼요. 이것은 우리 솜씨가 아니라는 뜻이에요, 이게. 말씀이 없는 게 아니고 이 시공간은 말씀으로 꽉 차있어요. 지금 굉장히 분주하게 움직여요. 그 분주함의 결과가 뭐냐.
너희가 바로 그리스도의 종이 될 수 없는데 종이 되었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할 수 없는데 참여했잖아. 그러니까 너희 복 받은 자야.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 것을 복 받은 줄 알라 이 말입니다. 그 말은 우리가 실력을 기르라는 뜻이에요, 키우라는 뜻입니까? 우리가 제대로 열심히 살라는 뜻이 아니에요. 주제파악 하라는 이야기에요.
이사야 61장에 여호와의 신이 임하면 바로 율법이 와서 우리를 망가뜨립니다, 율법이 오게 되면. 우리는 포로 잡힌 자가되고 마음이 상한 자가 되고 갇힌 자가 되고 가난한 자가 되고... 우리는 희망 없어요. 그런데 여호와의 신이 임한 자가 우리에게 무엇을 주느냐. 또 율법주면 안되죠. 율법이 안되는 게 뻔한데. 아니 바탕 자체가 인간은 안 되는데 인간 되라고 하는 게 말이 돼요?
공부하기 싫어 죽겠는데 공부해라. 이게 애한테 먹히겠던가요? 반항심만 늘어나지. 공부 좀 하라 하면 수영장 보내주면 할게. 이런 식으로. 애들이 원하는 것은 엄마의 잔소리가 아니라 엄마의 사랑입니다. 공부 못해도 이뻐해 주는 사랑 있잖아요.
자, 사랑이란 상호 가장 깊숙한 곳에 들어가는 것. 이게 아까 고린도전서 6장 17절, 그리스도와 우리는 한 영. 왜 가장 깊숙한 곳이냐 하면 성령은 하나님의 가장 깊숙한 곳이거든요. 그러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실 때는 빈손으로 오지 않고 십자가 피를 가지고 오죠. 이 피는 유월절에 의하면 무슨 피입니까? 심판과 저주를 차단시켜주는 cover에요. 막아주는 거예요. 위에는 막고 밑에는 생명수가 흐르게 하는 거죠. 그게 성전 아닙니까. 위에서 막아주는 거예요, 진노를. 그게 속죄소에요, 언약궤이고. 7월 10일날 피를 뿌려버려요.
자꾸 신앙을 모호하게 만들지 마세요. 객관적으로 성경에 보면 피를 뿌려서 유월절에는 발랐고 속죄소에서는 피를 뿌렸잖아요. 십자가는 뭡니까? 실제로 죽었어요. 그리고 그 분이 사흘 만에 실제로 살아났어요. 그게 신앙의 객관적인 유일한 토대이고 근거입니다. ‘내가 은혜 받았다’ 그런 거 생각하지 말고 주님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를 봐야 돼요.
그거 안보게 되면 자기 체험에 자기가 속아 넘어가는 수가 있어요. 나는 기적 6개했는데 너는 기적 몇 개 했나. 이런 식이에요. 나는 성경공부와가지고 빵 3개 먹었는데 배탈 안났다. 그것도 기적입니까, 기적이에요? 빵 3개 먹고 죽어버리면 마찬가지지 뭐. 적어도 기적이라면 ‘죽었는데, 죽은 게 맞는데 살게 되었다’ 이래야 기적답지. 그 정도 되어야 기적이죠. ‘죽었는데 무덤이 비어있다.’ 이정도 되어야 기적이죠. 몸 아프다, 시험 잘 쳤다, 그건 기적 아니죠. 시험 잘 쳐서 지옥 가서 시험 쳐라. 지옥 가서 시험 친다고 천국 보내주는 것 아닙니다.
천국에는 아무도 못갑니다. 그래서 예수님만 갔죠. 예수님만 의인이기 때문에. 그 의가 공통적인 의에요. 나 개인적인 의는 필요 없어요. 나의 의는 필요 없어요, 천국 가는데. 그 공통적인 의가 성령을 통해서 가장 깊숙한 십자가를 고루고루 분배받을 때 그게 하나님의 의가 들어와서 그 의 때문에 우리가 천국 백성되는 겁니다. 구원받은 거예요.
까짓 거 그 정도 받았으면 이 땅에서 예수님이 받은 수난 좀 받아도 괜찮아요. 예수님이 모욕당했던 그 모욕을. 모욕 당하고 목욕하면 그만 아닙니까. 때 밀면 되잖아요. 이 세상 더러워라. 그러면 되잖아요. 그 뭐 고소하고 너 죽고 나 살자 붙들고 싸울 필요 없어요.
고린도전서에도 나오지만 성도끼리는 세상일로 고소하지 마라고요. 차가 가다가 서로 접촉사고가 일어났어요. 따지고 보니까 저쪽엔 목사, 이쪽엔 장로라. 그냥 자차보험 처리하고 헤어지세요. 이 목사야, 네가 뭔데 들이대냐. 이럴 필요 없죠. 요새 목사가 성도인지 아닌지 분간 안됩니다만.
주님의 사랑은 먼저 우리가 사랑한 게 아니고요. 주께서 들어옵니다. 그러면 사랑은 뭐냐. 상대방을 더욱더 알아가는 거예요. 그러니 주님의 사랑이 오게 되면 네가 어느 정도로 괴물인가를 죽을 때까지 계속 알게 만들어 줘요. 그러면 주님에 의해서 까발려지는 나의 괴물성에 대해서 우리는 즐거워합니다. ‘아, 이 괴물이 주님을 힘들게 했구나. 내가 주님의 가해자구나. 주님이 고난을 이것 때문에 받았구나.’를 알면 알수록 우리는 내 걸 따로 가지려는 스트레스를 안 받아요.
누가 나 건드리면 가만 두지 않는다. 이런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왜? 천하의 죄인이 나인데 내가 주님한테 못되게 했는데 남이 나를 험담했다고 해서 그것가지고 내가 ‘너 죽어라. 나 살자’ 그런 식으로 달려들 필요 없거든요.
모든 인간은 인간에게 기대 걸지 마세요. 죄인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어진 사람이 이 자리에 있다고 봅시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너무 순하게 생겨서 누가 봐도 저 사람은 욕심 하나 없을 것처럼 생긴 사람이 만약에 나타나서 이 자리에서 저를 흘낏 본다면 저는 여러분한테 이렇게 이야기할 겁니다. “저렇게 못돼먹은 사람 처음 본다.” 이렇게 말할 거예요. 그 말이 맞아요. 인상이 아무리 후하고 좋아도 주님 보시기에 못돼 처먹은 인간이라니까요, 흘낏 봤는데. 아이고, 나 소름 끼친다. 저 못된 괴물의 얼굴. 그 말이 맞는다니까요. 그 말이 맞아요.
방탄 소년단 7명이 춤추죠? 저 못돼먹은 얼굴들 한번 보세요, 저 못돼먹은 얼굴. 미주에서 2주 연속 1등한 노래 한번 들어보세요. ‘다이너마이트’인가. 얼마나 못돼먹었어요. 그 방탄소년단의 어느 누가 “방시혁 사장님, 저 죄인이에요.”, “왜?”, “이거 또 히트 쳐서 저 죄인이에요.” 이런 애 있습니까?
이 세상은 절대로 방탄소년단을 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욕할 사람은 따로 있기 때문에. 주님이 있기 때문에. 주님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죄인이라 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인간 쪽에서는 주님을 욕하는 거예요. 안 그러면 기독교처럼 가짜 예수를 만들든지.
진짜 예수님은 너는 죽어 마땅함을 이야기한다고요. 우리는 그게 듣기 싫은 거예요. 나한테 표준모델이 있기 때문에. 오늘 제목을 로... 우리는 날 때부터 표준모델이 있어요. 나는 착하고 이쁘고 나는 남한테 사랑받아야 마땅하고. 이게 나중에 커서도 40대, 50대에도 계속 가는 거예요.
내가 너한테 진심을 이야기했는데 감히 나한테 상처를 줘? 이런 식이라. 표준모델이에요. 우리는 죄인인 거 다 잊어버렸어. 이 세상 일도 혼자 지가 제일 바빠요. 주님은 하나도 안 바빠. 나는 내 일한다고 바빠. 내 자존심 간수한다고 바빠요.
이번에 태풍 불 때 참 이거 웃어야 될지 울어야 될지 모르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뭐냐 하면 부산에 어떤 60대가 태풍 부는데 유리창 깨진다고 뭐 덧대다가 깨진 유리창에 다쳐가지고 피 많이 흘려 죽었어요. 참 위험한 일이죠. 그러면 그 할아버지 가족은 누구보고 고소해야 됩니까? 하나님보고 고소해야지. 태풍을 보내준 분보고 고소하죠. 그런데 하나님보고 고소안하죠. 그만큼 믿음이 없는 거예요.
끝부분에서 아까 첫째시간 것 다시 이야기하는데 그만큼 믿음이 없는 거예요. 자꾸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고 인간 대 인간의 관계. 좀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면 인간 대 재물의 관계. 그러면 그 할아버지 가족은 누구한테 고소하느냐. 그 아파트 관리사무소에다가 하는 거예요. 뭐하려고? 교도소 보내려고? 아니에요. 뭐하러 관리소장을 교도소 보내요. 뭐하란 말입니까. 유리창 물어달라. 그리고 우리에게 적절한 위로금 달라. 물론 자기가 일부러 얇은 유리창 한 건 아닌지 알기 때문에 장례식에 와서 위로금 주고 유리창 좀 바꿔줘. 그래야 이 아파트 역시 훌륭한 관리사무소라 해가지고 집값 오를 게 아니냐. 결국은 집값 오르는 거예요. 결국 돈 문제에요, 돈 문제. 세상만사 모든 게 돈 문제에요.
사랑이라는 것은 가만 있어도 깊숙하게 십자가가 찾아와요. 왜? 가장 깊숙한 곳에 하나님이 제일 아끼는 것을 우리에게 심어주는 거예요. 그러면 그 십자가로 인하여 우리는 가장 깊숙한 나의 죄 중의 죄, 죄인 중의 괴수, 사도바울이 고백하는 것처럼 그걸 즐거운 마음으로 누구한테 고백합니까? 남한테 고백하지 마세요, 또. 사람 믿지 마라니까. 주님 앞에서.
주여, 누가 내 성질 건드린다고 또 화냈습니다. 아, 이런 괴물. 참 이런 괴물을 내가 그동안 강아지 키우듯이 키웠습니다. 잘 키웠습니다. 밥 주면서 키웠습니다. 그걸 노출시켜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주여, 나는 이미 죽은 자니까 주님의 몸이니까 시간과 공간만 있고 내 생각은 안 나게 하옵소서.
안 나게 할 수 있습니까. 또 하나님께서 사태를 주게 되면 분명히 너는 모든 게 은혜라 했는데 그 뭐 30분 가지도 않죠. 왜냐하면 주님께서 계속해서 내 안에 악마 들었다는 것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계속해서 사랑으로 오거든요. 이게 복 받은 자에요.
여러분, 다른 사람하고 비교해보세요. 성령 안 받은 사람은 그런 사람 없습니다. 자기 관리에 바빠요. 남에게 보여주는 자아와 감춰놓은 자아가 있어요. 제가 수요일에 기도하는데 기도제목을 제가 하거든요. 기도제목이 이거였어요. ‘탐심이 있으니까 질투가 생긴다’ 질투라는 것은 비교다. 지 혼자 있으면, 강아지하고 혼자 있으면 질투 안 나타나요.
그런데 여기 누가 오게 되면 갑자기 질투 생기죠, 비교하고. 왜 나는 저 사람처럼 되지 못하나. 탐심이 생기는 거예요. 갑자기 시간과 공간 속에서 주님의 은혜와 은혜의 결과물, 결산물로 자기를 봐야 되는데, 인간이 나타나니까 갑자기 자기도 같이 맞상대하기 위해서 인간이 돼요. 너만 인간이냐, 나도 인간이다. 그러면 인간 대 인간 관계 된다고요. 그 다음에 치고 가게 되면 누가 부자인가 한번 보자. 한답시고 이거가지고 따진다고요, 돈하고.
그런 일이 없다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그런 일이 일상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게 일상이 될 때 누가 그렇게 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고난 받는 걸 네가 복 인줄 알아라, 복 인줄 알아라. 네가 성령 받았으니까 네 주제파악이 되고 주제파악이 되니까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공격하고 있다는 것이 눈이 활짝 열려서 볼 수 있게 되는 거예요. 왜? 본인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니까. 내가 그렇다하면 남들도 마찬가지인 거예요.
인생 뭐 있어요? 뭐가 인생입니까? 인생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최종 관리자가 되가지고 자기 가치, 자기 건사하는 거 그게 인생이지, 인생 뭐 복잡해요? 내 인생 내가 관리하고 내가 간직해서 보란 듯이 남한테 밑지지 않는 인생 만들겠다, 끝! 끝이거든요. 그게 바로 죄라는 것을, 성령 받은 사람은 뭐로 봅니까? 사랑이 오니까 보는 거예요.
방금 나 잘났다 이게 사랑입니까? 대상이 없는데 무슨 사랑이 있겠어요. 그러나 주님은 이 인간 같지도 않은 열두 제자들을 사랑하듯이 제자들 못지않게 남한테 지기 싫어하고 하늘나라에서 누가 높은지 그것만 생각하는 우리에게, 제자들에게 주신 성령을 그대로 우리에게 주시는 거예요. 그러면 제자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누구의 이야기 됩니까? 야, 이거 고맙다, 제자들아.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습을 시범조교로서 제자들이 주님과의 관계에서 그대로 보여줬잖아요. 그럼 주님과 제자의 관계. 그들은 성령 없으면 구원 못 받잖아요.
마찬가지로 제자들 못지 않게 자기만 생각하는 우리 관계에서 성령이 오니까 주님께서 사랑의 의도적인 조성한 환경 속에 우리가 놓여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게 되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뭐라고 했습니까, 베드로전서 4장에, 그게 바로 ‘영광의 영’이죠. 14절 다시 읽어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자, 성령 받았다. 참 성령 받았다는 말 많이 하죠. 어떤 사람이 성령 받은 사람일까요? 십자가를 보여주면 성령 받은 거예요, 십자가를. 그럼 십자가를 그냥 보여주면 안되겠죠? 그게 조를 이루어야 돼요. 십자가 앞에서 나는 어떤 수모를 당해도 감사해야 될 죄인 중의 괴수라는 것과 조를 짜서, 그게 한 조를 이루어서, 장갑의 오른쪽, 왼쪽처럼 한 조가 되어서 십자가를 증거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런 건 어떻습니까? “여보, 밥 먹으세요.”, “주여, 십자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이야기 할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니, 십자가 첨가해서 이야기한다고 모든 게 다...짜증 나 정말. 십자가를 너무 관용어처럼 남발해도 이거 또 수상해. “여보, 밥 먹으세요.”, “오늘 참 맛있네.” 이러면 돼요.
그 말이 뭡니까? 나의 죄인 된 분수에 맞춰서는 너무 밥이 맛있는 것 같아. 이거. 아 참 이런 이야기, 뭐 어떻게 목사님 하실 건가요? 내 주제에 이 죄인의 입장에서 오늘 밥은, 반찬은 너무 잘된 거 같아. 고맙소. 이 나이 먹도록 내가 아내를 몰랐나봐.
그게 뭐냐 하면 자기가 죄인이니까 모든 게 과분한 거예요. 강아지 있다가 죽었다. 그래, 그동안 잘 살아줘서 고맙다. 하고 쓰레기통에 갖다 버리면 되죠. 모든 게 우리 보기에는 나한테 손해라 하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과분한 거예요. 왜? 이미 생명을 얻은, 성령 받아서 천국 백성으로 파견근무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신앙생활 애초부터 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오로지 사랑관계, 그것 뿐인 것을 이제는 우리가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너무나 큰 사랑받았기에 세상에서 욕을 먹는 것도 도리어 감사하고 기뻐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