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존강의20200910a 베드로전서4장 14절(자아 표준모델)-이 근호 목사
서울의존강의20200910a 베드로전서4장 14절(자아 표준모델)-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4장 12절-14절
12절,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절,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절,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여기 공격하는 쪽이 등장합니다. 공격하는 쪽이나 공격받는 쪽이나 다같이 어디에 속했느냐 하면 ‘시간’에 속했죠. 이 ‘시간’은 ‘빈 시간’이 아니다. 이 세상은 고요하게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빈 시간이라 하는 것은 시간이 비어있다고 보는 거죠. 빈 시간은 고요함이죠. (빈 시간이 아닌) 시간은 분주함. 성경에서 말하는 시간은 분주함이고 굉장히 바쁘게 돌아가요. 빈 시간은 고요함입니다.
자, 사람이 이렇게 있는데 사람의 하루 일과에 자기 계획이나 스케줄이 있겠죠. 9시, 12시, 2시, 3시, 쭉 하는데 사람이 늘 설칩니까, 어떻습니까? 9시에 하다가 한 2시간 일하고 10분 쉬는 시간 있죠. 10분 쉰다고 보면 이 쉬는 시간에는 뭘로 채웁니까? 그야말로 쉬는 시간이죠, 비어있는 시간. 아무것도 안하고 그냥 있는 시간. 학교 수업도 그렇고 모든 것이 빈 시간이 있어요.
인간의 시간은 바짝 일하는 시간 있고 그 다음에 비어 있는 시간이 있어요. 제 말은 인간의 시간에서는 고요함이 가끔씩 허락된다 이 말입니다. 마련돼요. ‘인간의 시간은 꽉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밖에 나가 농사를 지어도 만약에 자기 몸이 피곤하다 하면 계획은 오후까지 밭을 다 간다 했지만 오전 하고나서 몸이 피곤하면 오후에는 집에 가서 그냥 자죠. 잘 때 그 밭을 천사가 와서 갈아줍니까? 아니잖아요. 내가 밭 갈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밭 갈지 않는다. 그 밭은 내 밭이고 내가 관리해야 될 밭이기 때문에.
이 시간이라는 것을 채우냐, 안 채우냐는 누가 결정한다는 말입니까? 내가 채우냐, 안 채우냐에 따라서 결정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평소 인간들의 세계이고 인간들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그럼 이 시간은 누가 주관하고 있습니까? 내가 주관하는 내 시간이죠. 그렇잖아요. 누굴 만나면 만나는 거고 내가 안 만난다 하면 안 만나지고. 하루 스케줄도 전부 내가 결정하는 거예요, 내가.
그런데 내가 결정하다 보니까 시간은 늘 빈 시간들이 있고 만약에 아침 9시 되서 일 끝나고 자고 나면 밤 10시부터 새벽 5시까지 내 시간은 누가 채웁니까? 채울 필요 없죠. 그냥 비어있죠. 나는 잠자기 때문에. 그러면 그 시간에 하늘의 천사가 곤히 잠드십니까, 내가 논다고? 내가 논다고 해서 하늘의 천사님도 그냥 주무시는 거예요? 그렇지 않죠.
애들 잠재울 때 동요에 보면 그런 게 있어요. 애들아, 밤 9시다. 이제는 잘 때 되었다. 왜 잘 때 되었나? 저 서산 밑에 넘어간 해님도 곤히 잠들고 있잖아. 그런 노래가 있어요. 에서 파티 열 때 트랩대령이 애들을 잠재우러 가는 유명한 노래가 있잖아요 (‘So long, Farewell’). 집에 가서 한번 들어보세요. 계단 올라가면서 마지막에는 제일 큰 애가 잠자는 꼬마 들고 가는 그 장면이 있어요. 그 가사에 보면 해님도 잘 시간이니까 너도 잠자라 (The sun has gone, to bed and so must I)하는데 그러면 나 잠잘 때 해님이 주무십니까, 실제로는? 다른 지방에 보면 지금 해님이 팍 떠있어요. 여긴 밤이지만 유럽에 가면 낮이거든요.
평소에 사는 것은 내 중심으로 살면서 내 중심의 시간을 가지고 성경해석을 할 때 이게 뭔가 잘못된 해석이 아닌가를 돌아봐야 돼요. 평소에 하는 모든 행동과 마음가짐이 일방적으로 내 중심으로 하면서 성경도 ‘우리가 뭐 순종하면 성경 지켜주고 실천 안하면 성경은 소용없지 뭐’ 이러한 투로 성경을 볼 가능성이 있어요.
우리가 세상을 보고 약간은 화들짝 놀라고 겁내야 하는 이유는 내가 노는 시간에도 시간은 꽉꽉 채워진다는 거예요. 내가 아무것도 안하는 이 시간에도. 시간은 나의 결심과 별개의 내용으로 채워지는 거예요. 우리의 시간 채우기는 이것이 나에게 이익인가, 손해인가 그 계산하겠죠, 이익인가 손해인가. 그러나 실제로 이 세상을 채우는 그 모든 일들은 내가 이익인가, 손해인가 지금 자기 손익 계산할 때 그것과 전혀 관계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상관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바쁘다 해도 주님은 안 바쁘시고요. 우리가 한가하다 해도 주님께선 한가하지 않아요. 따로 논다 이 말입니다, 따로 논다. 이 세상의 움직임과 내가 움직이는 것이 따로 논다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언제든지 이 세상에 대해서 잘못된 해석을 내릴 소지가 다분히 우리한테 있는 겁니다. 우리는 평소에 너무나도 내 위주로 살기 때문에.
따라서 자기에게 뭔가 문제가 생기면 말씀으로 해결하려고 여깁니다. 나한테 문제 있다, 말씀으로 해결해야지. 하는데 내 문제 해결하려고 말씀이 있는 게 아니거든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우리한테 아무 문제 없으면 굳이 말씀을 볼 이유가 없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 논리가. 하나님이야 바쁘든 말든 난 상관없고 내가 바쁘면 바쁜 거고 내가 한가한 거면 한가한 거야. 우리는 일방적으로 자기 위주로 버티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평소 우리의 잘못된 생활 태도로 보게 되면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로 여기지 말라.” 이렇게 되어 있지만 우리는 이걸 보고 ‘언제요? 언제 나한테 이 불시험 왔습니까? 불시험 안온 지가 벌써 20년 넘은 것 같은데.’ 이렇게 생각한다고요. 오늘 이 12절 말씀은 지금도 쉬지 않고 벌어지는 사건인데 우리는 영 세상 보는 감이 떨어져서 내 하는 일에 정신을 팔다 보니까 ‘뭐 세상에 대해서 내가 굳이 알아야 되나’ 태도 자체가 그런 태도에요. 세상에 대해 내가 굳이 알아야 돼?
세상은 성경 말씀대로 움직이는데 우리는 나하고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면 세상을 잘못 해석하게 되고 세상을 잘못 읽게 되고 세상을 잘못 보게 되면 우리는 말씀보다 내가 더 중요하다는 정신으로 무장된 채 숨을 끊을 수가 있어요. ‘나는 말씀보다 내가 더 중요해.’ 라는 그러한 돈독한 자기를 향한 자기신앙으로 세상 끝까지 그런 자세로 달려갈 수가 있습니다. 완전히 노선이 별개지요.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할 때 ‘너희’라는 것을 일단 괄호에 넣고, “( )를 시련하려고, 괴롭히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에 해당되는 “너희”는 누구일까요? ①번, ②번, ③번, ④번 이렇게 문제 낼 수 있어요. “불시험이 오는 것을 감지하고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할 때 ‘너희’를 아예 처음부터 그냥 이어버리면 나는 당연히 ‘너희’에 포함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당연히 포함된다고 여기기 때문에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하면 내가 불시험을 몇 년도에 받았더라? 그 때 한번 호되게 몸 아픈 적 있는데 그게 불시험인가? 그때 5년 전에 몸 아프고 그 뒤로 조용하지. 고요하게 지금 아주 평화롭게 인생을 살아가는데. 없네. 에이 또 오겠지 뭐. 이런 식이에요. 자기를 ‘너희’의 기정사실로 여기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너희’라고 하는 것은 쉬지 않고 오는 불시험을 늘 당하면서 그걸 당연한 걸로, ‘왜 이런 게 나한테 오지?’ 하고 당연하지 않게 여기지 않는 그런 부류가 따로 존재하는 거예요. 이 ‘너희’는 어떤 사람이냐 하면 ‘자기 시간이 없는 사람’. 자기 위주의 시간이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나만 편하면 그만이지’라는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 “주여, 오늘은 어떤 말씀을 저한테 적용시키겠습니까?” 라고 그걸 물을 수 있는 사람. 그게 ‘너희’에요. 왜? 인간은 놀아도 주께서는 놀지 않는다는 너무나 상식적이고 너무나 당연한 이 공식, 당연한 기본적인 원리원칙에 충실한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거든요.
나 쉬고 싶으면 쉬는 거고 나 바쁘면 바쁜 거지, 뭐. 나만 챙기면 되지 뭐. 그런 사람한테는 여기에 ‘시련’이라든지 ‘불시험’이라든지 ‘이상한 일’이라는 그런 단어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이게 해당되지 않으면 13절에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 이게 뭐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도 없어요. 이게 없다는 말은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표준모델과 상관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경에서 얘기하는 성도의 표준모델이 있잖아요, 성도의 표준모델에 부합되어야 되는데 인간들은 하나님이 제시하는 표준모델은 생각 안하고 내가 따로, ‘나의 나됨은 이러이러해’ 라고 내가 구성해놓은 나의 표준모델, 이것을 갈수록 공고히, 굳게 수립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가지고 남하고 들이대기 시작하고 투쟁하고 비교하기 시작합니다. ‘나는 이럴 때 나답다’ 라는 이런 표준모델을 본인이 그냥 고수하고 있는 겁니다.
이 표준모델을 고수할 때 이건 다니엘에 나오는 금신상이라고 보면 돼요, 다니엘의 금신상 (다니엘 3장). 느부갓네살이 자기 자신을 경외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찬미시키기 위해서 자기를 대리한 금신상을 만들어놓고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여기에 절하게 만들었죠. 누가요? 느부갓네살 왕이. 만약에 여러분들이 느부갓네살 왕만큼의 힘과 지위가 있다면 여러분들은 이 금신상 만들겠습니까, 안 만들겠습니까? 만들죠. 왕 되면 크게 만들지만 왕 되기 전까지는 작게 만들죠, 꿈속에서라도. 꿈속에서 작게 만들어요.
누구나 인간은 어릴 때부터 동화를 봤기 때문에, 여자애 같으면 동화를 보면서 자기가 예쁘게 레이스 달린 원피스 입고 있으면 못생긴 왕자는 저리 가고 잘생긴 왕자가, 흑마 말고 백마 타고, 우연한 기회에 백마 타고 자기한테 청혼하러 올 줄 알고 있어요. 자기는 레이스달린 볼록소매 원피스 입고 얼굴은 표백제처럼 하얗게 이렇게 있으면.
공주가 자기한테는 표준모델이 돼요. 표준모델이 되어서 어릴 때는 잘만 하면 막 날거 같아. 저 산에서 이 산으로 어떤 도움 없이 활짝 팔만 펴면 겨드랑이에 날개가 생길 것 같아요. 표준모델이 2살, 3살, 4살 가면서 수정에 들어갑니다. 아, 날개 있으면 안되겠구나. 난 날개는 없구나. 뭐 그럼 다른 표준모델 하지.
그러니까 인간이 평생 산다는 것이 뭐하며 사느냐 하면 자신의 이상적인 모델을 구축하기 위해서 평생의 시간을 다 소모합니다. 모든 시간은 나의 이상 모델 잡기, 확립하기. 자기 이상적인 모델, 표준모델.
세례요한은 도끼 들고 와가지고 작살을 내죠. 아작을 내버립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도끼 한방에 때려 쳐버리죠, 그 표준모델을. 때리게 되면 인간의 표준모델 안에 뭐가 들어있겠습니까? ‘자기 의’가 들어있죠.
그러니까 ‘자기 의’가 방어무기가 되는 겁니다. 외부에서 너 주제파악을 해라. 넌 아무것도 아니야. 라고 한다면 거기에 대해서 방어체제가 드디어 가동됩니다. 사드 배치가 되어있어 가지고. 내가 뭐 어때서? 우리 집안이 어때서? 나는 공부 못해도 우리 언니 법무부 장관이다! 이런 거. 뭐 추씨 집안인 모양이죠. 우리 오빠는 서울 의대 나왔다. 이게 뭐에요, 지금? 이게 뭡니까? 내 동생은 서울 법대 출신이다. 이게 다 뭐에요?
늘 이렇게 딱 건드리면 팍 튀어나오도록 만발의 미사일 준비가 다 되어 있어요. 우리 집에서 나만 농땡이지 우리 형들, 오빠, 동생 전부다 공부 되게 잘한다. 너는? 난 그때 드럼 친다고 좀 놀아서 지금 공부 못해서 안 그래도 후회하지만 그래도 우리 집안은 빵빵해. 그 이야기를 왜 해야 됩니까? 나의 표준모델에 대해서 함부로 침 뱉지 마라 이 말이죠. 안 그래도 신종코로나 걸리는데 침 뱉으면 그거 곤란하죠.
아무리 성장과정이 어렵고 아무리 힘들게 살아도 자기 나름대로의 자존심이라는 것을 뒷받침해줄 나름대로의, 남한테는 우사스럽지만 혼자만 간직하고 있는 표준모델이 있습니다. 그 표준모델에 대해서 인간은 항상 긴장을 늦추지 않고 누가 내 표준모델에 대해서 공격할까봐 늘 사방에 대해서 깨어 기도하는 게 아니고 깨어 경성하면서 살핍니다. 누가 날 욕하지 않는가? 가끔은 뒤로 확 돌아봅니다. 나 욕했지? 뒷담화 했지?
비록 작으나마, 변변히 가진 것도 없고 성장과정도 가난하게 살아도, 아무리 가난하게 살아도 ‘내가 사는 이유는 바로 여기 있어.’라고 할만한 그런 인형 같은 것이 마음속에 어릴 때부터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걸 쪼개면 뭐가 나온다고 했습니까? ‘자기 의로움’. 자기 의로움을 풀이하면 이거에요. ‘나는 정당하다.’ 누가 뭐라고 하면 핑계를 100가지 터지듯이 내놔요, 100가지를.
어젯밤에 왜 잠을 설쳐가지고 화장실 왔다갔다 해서 왜 남까지 못 자게 하느냐? 딱 한마디 하게 되면 어제 커피를 3잔 먹은 이유, 내력부터 해가지고 이야기하는데 2시간 반 걸려요. 내 그럴 줄 알았어, 그렇게 공격할 줄 알았어. 내가 뭐가 잘못됐는데, 내가?! 내가 뭐가 잘못됐는데?
모든 해석이 자기의 표준모델에서 미사일 쏘듯이 상대방을 공격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그 해석 자체가 베드로전서 4장에 나오는 말씀하고 아무 상관도 없는 거예요. 이건 그리스도의 고난이 아니고 자기 고난이라, 자기 고난.
제가 오후예배에서도 그런 예를 들었는데요. 노래하나 제가 언급했잖아요. 들국화가 불렀는지 코스모스가 불렀는지. ‘그대여 힘든 일이 많았죠’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이 가사 딱 듣는 순간에 눈물이 팍 쏟아진다니까요. 이게 남의 일이 아니라. 자기 표준모델을 지킨다고 평생 얼마나 힘든 일을 겪었습니까? 왜 세상은 요만한 나만의 기쁨마저도 그냥 두지 않고 흔들어 대냐 이 말이죠. 그걸 나는 죽어라고 지키고. 그게 얼마나 스트레스 받고 힘든 일입니까?
‘그대여 힘든 일이 많았죠 새로움을 잃어 버렸죠’ 노래 부르지 말라고 했는데...새로움을 잃어 버렸죠. 아, 나는 꿈도 많고 할 것도 많은데 왜 사회는 나를 이렇게 괴롭히느냐. 어떤 노래처럼, 나는 세상에게 진심을 다했건만 세상은 나에게 상처를 주네. 이 나이 먹도록 내가 세상을 몰랐나봐. 9월 10일 군에 갔는데. 이 나이 먹도록 세상을 몰랐나봐, 나는 진심을 다했는데 상대방은 나에게 뭘 줍니까? 상처를 준 거죠.
그러니까 그 진심을 다했다는 게 진심입니까, 뭐에요? 거래였죠. 내가 진심을 다하면 네가 내 진심 알아봐가지고 너도 내가 진심 다한만큼 호응해줘야 된다. 라고 기대하고 진심을 다했건만 상대방은 뭐했다고요? 상처를 줬죠. 상처받는 사람이 나쁜 사람이에요. 참내. 지 뜻대로 안되니까 상처받았대. 이건 오늘 베드로전서 4장의 말, 그리스도 고난하고 아무 상관없습니다. 이건 누구 고난이냐 하면 본인이 자처한 고난이에요. 본인이 자처한 고난. 원인은 어디에 있느냐?
성경에서 말한 ‘너희’는 죽은 자를 말합니다. 자기 표준모델하고 까불다가 주님의 십자가에 얻어맞아 죽은 사람이에요. 제가 울산강의에서 그런 얘기했잖아요. 어느 기도원에서 사람 병 고친다고 때렸는데 십자가 가지고 때려서 사람 진짜 죽었다고 했죠. 진짜 십자가로 때려가지고. 아니 뾰족한 걸로 때리면 사람 죽죠. 성령으로 때리지 않고 십자가라는 물체로 때려서 사람 죽었습니다.
그 기도원 원장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한 거예요? 나무 막대기 십자가로 때리면 십자가의 능력이 거기서 나올 줄 알았죠. 병 고칠 줄 알았죠. 그리고 그 기도원에 가서 병 고침 받겠다는 그 사람도 나빠요. 그 사람의 표준모델에 ‘나는 병들어서는 안된다’는 요소가 포함되어 있는 거예요. 내 표준모델에는 ‘나는 병들면 안된다’가 있는데 병들었거든요. 그러니 빨리 뭐로 지금 복귀하려고 해요? 전처럼 병 안든 나로 복귀하려고, 그걸 해결하겠다고 어디를 갔다? 믿음 좋다는 기도원에 가서 십자가로 얻어맞아 죽은 거예요.
여러분, 죽은 자에게 병이라는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미 죽은 시체는 더 이상 병이라는 말을 할 자격이 못돼요. 그러면 이미 우리는 죽은 자인데 왜 산 자로 여기는가? 그것은 바로 무엇과 무엇이 분리되기 때문이냐 하면, ‘육’과 ‘영’이 분리되어서 그래요.
육과 영이 분리된 것을 가지고 ‘음란’, ‘간음’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육체는 욕망의 대상이거든요. 영혼이 하나가 되지 못한 상태에서 육체에게 뭔가를 한다는 것은 나는 네 영혼 모르겠고 네 육체는 나의 욕망, 탐욕의 대상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상대방을 볼 때 육과 영을 분리해서 보는 거예요. 사랑으로 보지 않고 자기 욕망의 대상으로 보고 육체를 탐하는 거예요. 이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고린도전서 6장 17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오늘 본문하고 아주 직결되는 말씀이에요.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얼마나 어려운지 한번 보세요. 주와 합한 자는 ‘한’ 영이지요. 두 영이 아니고 세 영이 아니고 따로 노는 영이 아니고 같은 영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영은, 육으로 보는 게 아니라, 영은 영끼리 통한다는 얘기를 하고 있어요, ‘영은 영끼리 통한다’가 되는 거예요. 이 말이 왜 어려우냐 하면 세상에서 인간이 자기 표준모델 중심, 쉽게 말해서 자기 중심이 되게 되면 그 안에 자기 영이 있을 거 아닙니까. 이 영은 어떤 경우에도 타인의 영과 하나가 될 수 없어요. 모든 인간을 자기 욕망의 대상으로 봐서 간음이라니까요. 모든 것을 자기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한 대상으로 보기 때문에 그 사람의 육과 영을 잘라서 보는 거예요.
나는 당신이 좋은 게 아니라 당신의 돈이 좋다든지, 나는 당신의 마음이 좋은 게 아니고 당신의 아름다운 미모가 좋다든지. 모든 것이 육과 영을 끊어서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영은 함께 하는 영이 아니고 뭘 고집하느냐 하면 내 영의 지배적인 위치만 고집하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어떤 경우라도 내 표준모델을 나는 고수하겠다는 그런 탐욕이기 때문에 그래요. 내 표준모델을 고수하겠다.
구약의 에스겔, 예레미야, 아모스 보면 이걸 가지고 음란이라고 하는 겁니다. 음란은 이방민족이 신을 섬길 때 신을 섬기는 이유가 자기를 위해서 하거든요. 자기를 위해서 할 때, 자기 자신에게 손해 본다, 안 본다? 어림도 없죠. 손해를 안보죠. 하나님 믿고 왜 자기가 손해를 봐요? 둘 주고 셋을 얻지. 셋 주고 열을 얻고. 내가 남한테 손해 볼 짓을 한다는 것은 바보짓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내 육체는 내 영혼이 지배하고 있고 내 영혼은 내 육체와 함께 있기 때문에, 그것이 나의 표준모델을 형성하기 때문에 하나님이든 타인이든 가족이든 부부든 자식이 되든 누구든지 이 정당한 나의 표준모델을 건드릴 권한은 없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베드로전서 4장 11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오죠.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뭐로 해라? ‘힘’으로 하라.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그러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이 있으려면 자기의 자체적인 힘이 있어야 되요, 없어야 되요? 전혀 없어야 되죠. 평소에 내 힘 가지고 내가 산다는 의식 자체가 있어버리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이 들어올 수가 없어요.
내가 죽은 자가 되어야 된다니까요. 죽은 자가 만약에 말을 하고 일을 한다면 이것은 누가 공급하시는 힘입니까? 주님이 공급하시는 힘이죠. 그러면 아까 고린도전서 6장 17절의 말씀처럼 주와 우리가 뭐가 된다? 한 영, 하나가 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영과 육이 하나가 되는 거예요. 이 몸이 내 몸이 아니고 주의 쓰시는 몸이 된다는 말이죠, 이 육이. 영도 하나가 되는 거예요. 그래야 매일같이 주님이 주시는 그 힘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 이 말이죠. 그럴 때 그 사람은 자기의 증인이 아니고 누구 증인? 공급하시는 주님의 증인으로 살 수 있는 겁니다.
사도행전 1장 8절 유명한 말씀 아닙니까.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이제부터는 땅끝까지 나의 증인이 되리라. 주의 약속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자기 시간이 없기 때문에 쉬는 것도 일하는 것도 전부다 꽉꽉 채워주시는 주의 일이 되어버려요.
내가 쉬는 것도, 잠자는 것도, 내가 꿈꾸는 것조차도 어느 시간도 틈이 없이 꽉꽉 채워주시는, 새벽 2시 41분, 42분, 43분 어느 시간도 주님의 활동력으로 꽉꽉 채워서 우리는 그 시간 지난 것도 모르고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 잠 잘 잤다’이러죠. 주께서 어젯밤에 시체로 만들었어요. 아무 생각안하고 푹 잠자도록 주님은 주무시지 않고 우리가 잠자도록 주께서 하신 거예요. 그래서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시죠. 물론 설교시간에 잠을 자서 이게 또 문제가 됩니다마는.
우리 평소의 태도는 나의 표준모델을 우상으로 여기지 않고 고집스럽게 그걸 쥐다 보니까 자기 스케줄을 자기가 짜버려요. 그러니까 시간이 펑펑 비는 거예요. 노는 시간, 빈 시간. 첫째 시간 놀기, 둘째 시간은 아무 것도 안하기, 세 번째는 휴식하기, 네 번째는 체육시간. 이런 거. 애들보고 학교 일과표 짜라고 하면 전부다 1교시 축구, 2교시 농구. 남자애들보고 짜라고 하면 3교시는 공놀이. 여학생보고 하라면 첫째시간 줄넘기, 두 번째 시간 만화책보기, 세 번째 인형놀이, 뭐 이런 거. 그러면 수학, 영어는? 그런 거 없어요.
어린애들은 그래도 스케줄을 누가 짜줍니까? 문교부에서 짜주잖아요. 그러면 여러분 스케줄은 누가 짜요? 아직도 문교부 스케줄보고 짭니까? 성경에서는 바로 ‘너희’가 불심판이 오든 뭐가 오든 스케줄을 주님이 쉬지 않고 짜주시는 대로 움직이는 사람일 때 그때 ‘너희’라는 말이 너희에게 해당되는 거예요.
지금 신종코로나 이 스케줄 누가 짰습니까? 누가 짰죠? 제가 수요설교에서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사람이 사람을 때리면 누가 고소하잖아요. 저 사람을 고소하잖아요. 그러면 신종코로나 바이러스가 사람을 죽이는데 우리는 누구한테 고소합니까? 왜 그건 고소안하죠? 내 일가친척이 걸려서 죽었는데 왜 그건 고소안합니까? 고소한다고 또 우리나라 질병본부보고 고소할 일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왜 하나님보고 고소를 안 하냐 이 말이죠. 하나님보고 고소한다면 믿음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그렇잖아요. 하나님보고 고소한다는 건 뭔 뜻이에요? 신종코로나19, 이건 누가 주셨다? 하나님이 의도해서 주신 거 맞죠, 의도해서. ‘의도’를 집어넣어야 해요. 하나님이 의도해서 주신 것 맞죠? 이거 노리고 우리 잡아 죽이려고 한 것 맞죠? 이 정도 믿음 같으면 보통 믿음 아니에요. 만약에 그 정도 믿음 같으면요, 평소에 나는 놀아도 주님은 안 논다는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이에요.
사람들은 마스크 써서 숨 막히고 힘들다면 누구한테 고소해야 됩니까? 하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라고 고소해야 되죠. 사람들은 고소는 안하고 아부를 할 생각하는 거예요. 어떻게? 하나님이여, 회개합니다.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이건 아부에요. 무슨 뜻이냐 하면 아, 우리가 뭔가 잘못한 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벌 내리는구나. 그러면 무조건 잘못했다고 치자. 이러고 지금 회개하고 잘못되었습니다. 회개합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부부 사이에 그런 대화가 많잖아요. 남편이 퇴근하고 보니까 아내가 화가 많이 나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남편이 “당신은 뭐 때문에 화가 났는데? 나도 들어와서 피곤한데 좀 화 풀지. 왜 화가 났느냐?” 그러면 아내가 하는 말이, “당신 몰라서 묻나?”, “모르니까 내가 묻잖아.”, “그러니까 당신은 나한테 관심 하나도 없다는 이야기야.”, “그럼 뭐가 잘못됐는지 이야기를 해라.”, “아니, 꼭 이야기를 해야 알아! 꼭 이야기를 해야 되나. 어떻게 남편이 되어가지고 아내가 뭐 때문에 힘든지를 왜 몰라?”, “그래그래. 내가 잘못됐다.”, “거 봐라. 이봐. 잘못한 것도 모르고 건성으로 때우려고 하잖아. 당신이 그게 문제야.”
아깐 또 문제가 이유를 모르는 게 문제라며 왜 또 문제가 하나 더 추가가 됐는지. “그러면 어떻게 하면 당신의 마음을 풀 수가 있어?”, “자~알 생각해봐라.”, “아 그래그래그래. 잘 생각할게.”, “잘 생각하는 게 그 자센가? 당신은 자세가 잘못되었어. 그러면 안되.”
지금 도대체 태극기 흔들고 하는 자세가 그 자세에요. 하나님께 무조건 잘못했다고 회개한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뭐가 잘못되었는데?” 그렇게 나오면 안돼요. 하나님께 따져야죠. 따져야지. 이거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신종코로나 이거 난 두 달 갈 줄 알았죠. 이게 뭡니까, 지금 경제 다 버려놓고. 월세 200만원 내는데 나라에서 10만원 보태준답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다 이거 하나님 잘못 아닙니까?’ 하고 하나님보고 따질 때 그게 믿음이라니까요. 회개할 생각하지 말고. 회개하는 건 불순해. 잘못된 거예요, 그 태도가. 따져야죠. 쉽게 말해서, 우리의 운명은 내 손에 달린 게 아니고 주님 손에 달렸습니다. 그걸 제가 인정합니다.
자꾸 요령을 부리려고 해요, 요령을. 믿음 없으면서 있는 척하려고 요령을 부리는 거예요. 우리 다같이 회개합시다. 그건 요령 부리기에요. 잘못도 모르면서 무조건 잘못됐대. 그 사태만 그냥 넘기려고.
베드로전서 4장 13절,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런 말씀을 딱 줄 때는 너희들은 다른 즐거울 거리를 너희가 따로 만들고 있다는 것을 지금 율법적인 차원에서 고발하고 있는 거예요, 율법적 차원에서. 그러니까 뭐냐 하면 ‘힘들다’를 우리는 용납 못해요. 우리는 자기 자신이 ‘나는 정당하기 때문에’ 힘든 것과 정당함이 매치가 안된다고요.
꼭 욥 같아. 나는 아무리 봐도 이렇게 정당한데 왜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힘든 것을 정당한 내가 정당을 유지하기 위해 방어하다 보니 내 성품이 점점 악해집니다. 그 책임을 하나님께서 지셔야겠습니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자기 성질 더러운 것도 또 하나님 책임이라.
가만 놔두면 참 점잖은 양반인데 괜히 하나님이 날 잘못 건드려가지고 요근래 코로나이후에 내 성질 다 버렸어. 전부다 핑계를 누구 핑계 댑니까? 하나님 탓, 세상 탓. 나는 착하게 살아보려고 얼마나 애를 쓰는데 내 성질 이렇게 더럽게 만든 것은 다 내 탓이 아니고 주님 탓이라는 거예요.
그렇죠? 그게 바로 해답이 나온 거예요. 그런 생각에 우리가 들어가야 되요. 그게 왜 해답이냐 하면 그리스도의 고난이란 그리스도가 어떤 고난을 받았는가를 체험케 하는 고난이에요. 바로 너 같은 그런 사고방식, 네 위주로 하는 사고방식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고난을 받았다는 거예요.
은혜 줄 거 다 주고 햇빛과 공기 줘가지고 그렇게 하나님 쪽에서 할 도리 다했지만 그 은혜를 받은 인간 작자들이 창조자에게 하는 행세가 자기밖에 모르기 때문에 그 모든 탓을 예수그리스도 탓으로, 하나님 탓으로 돌리는 그 아픔. 그 아픔에 참여하는 자가 바로 하나님의 힘으로 살아가는 성도다. 이 이야기를 베드로전서에서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머리좋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세요. 우리는, 나는 한성깔 하고 나는 나밖에 모른다. 나밖에 모르는데 하나님께서는 불시험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로 전환시키는 이 분주하고 쉬지 않는 일을 시간에 꽉 채워서 우리에게 주시는 거예요. 하나님의 일이 이 일이에요.
첫 번째 공식을 한번 만들어 봅시다. ‘시간은 말씀으로 꽉 채워져 있다, 빈틈없이.’ 시간은 말씀으로 채워져 있는 거예요. 빈틈이 없이 채워져 있어요. 그 말씀 중에 뭡니까? 오는 불시험이 여기 포함되어 있는 거예요. 쉬지 않고 불시험을 줌으로써 성도로 하여금 쉬지 않고 그리스도의 아픔을 체험케 하는 그러한 작품을 만드는 일에 주님은 조금도 쉬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쭙잖게 회개할 생각하지 마세요. 고집을 부리세요. 고집을 부리면서 우리는 말씀이 나를 때리는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공격하는 그 불시험을 우리가 받는다고 했는데 사실 받는 자가 아니라 우리가 주님에 대해서 불시험을 감행할 수밖에 없는 그런 자질이 농후한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우리를 발각시키는 일을 하시는 거예요, 주님께서.
그러니까 고난에 참여한다는 말은 고난에 참여하는 그 영광스러움, 직분에 감히 우리가 낄 수 없죠. 이렇게 못난, 나밖에 모르는, 못돼먹은 내가 감히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도록 말씀에 의해서 독려 받을 때 그것이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그 영광스러운 영을 14절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영광의 영’이라고 하는 거예요, 영광의 영. 여기 보면 14절에,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뭐가 있다? “복 있는 자로다” 그 다음에 뭡니까?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못 지킵니다. 우리는 시작점이 지킬 수 있는 게 시작점이 아니에요. 다만 우리가 감사한 것은 세상 사람과 우리가 다를 바 없이 똑같습니다. 내 표준모델 지키려고 평생을 살아온 인간들이에요. 이래야 난 나답다는 거예요. 왜? 난 정당하기 때문에. 그런데 동일하게, 지옥 가는 사람도 똑같아요, 천국 가는 우리도 똑같아요. 똑같은데 주의 말씀이 우리를 겨냥해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게 만들 때 이게 얼마나 놀라운 기적이에요. 이게 복이거든요, 복.
복은 내가 노린 게 아니에요. 복은 찾아오는 거죠, 그냥. 예상도 못했는데 찾아오는 거예요. 돈 버는 게 복이 아니고 남한테 인기 얻는 게 복이 아니라 주제파악을 하는 게 복이거든요. 내가 남을 욕할 입장이 못돼요. 남을 욕할 입장이 못 된다고요. 나는 내 가치 지킨다고 하다보니까 누굴 공격하는 셈이 됐어요? 이게 그리스도를 공격하는 셈이 됐다는 인식 자체가 복이에요.
아, 이거는 내 솜씨가 아니고 쉬지 않는 말씀의 솜씨다. 내가 말씀에 속했구나. 그럼 내가 하루하루 먹고 사는 것도 주님이 주시는 힘, 다시 말해서 ‘말씀대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라는 취지로 주시는 그 힘에 의해서 나는 이렇게 하나님께 봉사 안하고 싶어도 봉사해야만 하는 귀한 복의 자리에 놓여 있구나.’를 아는 겁니다. 그걸 13절에 보면 어떻게 하라? “즐거워하라” 내가 예상 못한 것이기 때문에 즐거워하라.
첫째시간 마치면서 덧붙입니다. 지옥 가는 사람을 더 이상 부러워할 필요 없어요. 지옥 가는 사람보다 우리가 낫다는 것이 아니고 똑같아요. 막상막하 그 나물에 그 밥이라. 지도 지밖에 모르고 나도 마찬가지인데 말씀의 역동성이 말씀대로 우리에게 적용을 시켰다는 점.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게 하신다는 점. 그리고 지금 불심판이 쉬지 않고 오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개안, 영안이 열려서 그걸 바라볼 수 있는 영적 사람이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나는 너보다 낫다’가 아니라 ‘나는 너보다 복 받았어’가 되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이것은 행운이에요, 행운. 행운이 찾아온 거예요. 우리 신앙생활 제대로 해야 됩니다. 신앙생활 내가 하는 게 아니에요, 주께서 하게 하셔요. 그 점을 알아야 돼요. 내가 하는 신앙생활 없습니다. 말씀대로 신앙인은 신앙생활 하도록 그렇게 주께서 이끄시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평소에 뭡니까? 내 자존심과 내 표준모델을 고집하다 보니까 저 사람은 신앙생활도 제대로 못하고 복음도 모르고 난 복음 아는데 이렇게 되게 되면 이것은 자기 방어죠, 주님 방어가 아닙니다. 이것은 자기가 주님을 공격하는 바가 돼요. 그것을 우리는 계속해서 되풀이하는 거예요.
두 번째 시간에 제가 하고 싶은 주제는 이겁니다. 왜 세상 문제를 말씀으로 해결하지 않고 왜 세상적으로 해결하느냐, 우리가. 뭐 믿음 좋다, 말씀 좋다 해놓고 막상 자기에게 어떤 난관이 들이닥치니까 아이고, 말씀이 무슨 소용있나. 이렇게 된다고요. 실컷 해놓고. 말씀은 소용없고 이것은 우리가 알아서 해결해야 된다고. 두 번째 시간에 그걸 다시 길게 이야기하겠습니다만 첫째시간 마치면서 다시 한번 봅시다.
육과 영이 분리된 이것이 바로 이 세상을 사는 간음한 자라. 간음이라는 것은 상대를 볼 때 육과 영을 끊어서 보는 거예요. 난 네 돈을 탐해. 난 네 영혼은 하나도 안 탐해. 이게 바로 상대를 간음하는 걸로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부부사이도 늘 간음이죠. 내가 너한테 시집왔으니 넌 호강한 줄 알아라. 이게 전부다 뭡니까? 상대를 그냥 밥이나 해주고 빨래나 해주는, 육과 영을 분리해서 보고 내 영을 위해서 기쁨조로 너는 시집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내가 하는 말이 “너는 나한테 해주는 게 뭐가 있는데?” 둘 다 뭐냐 하면 자기 표준모델을 지금 고집하고 싸움하고 있는 거예요. 검투사 둘이 만난 거예요. 완전 검투사에요, 검투사.
애들은 그 싸우는 모습을 보고 뭘 생각합니까? 내가 어느 편에 서야 용돈 많이 타겠는가. 애들은 그것만 발달해요. 애들은 아무 생각 없어요. 어느 편에 서야 나한테 이익이 있을까. 집안에 아이 4명 있으면 검투사가 4명이라. 글레디에이터 4명이 있어요. 그 중에 좀 순진한 게 뭐냐 하면 강아지. 그런데 강아지도 한 2년 키우면 이것도 검투사 다 돼요. 그것도 눈치 빨라가지고. 인간을 닮았거든요. 꼭 그 더러운 인간을 닮아서 인간처럼 아주 얍삽하게 돼요. 안락사 시켜버려야지.
육과 영은, 주님의 육과 영을 그대로 우리에게 다 준 거예요. 그만큼 우리는 주님을 평소에 힘들게 했다는 그런 육과 영인데 내가 말씀으로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체험케 함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아, 이 세상은 그리스도를 노리는 그 세력이 지금 작렬하고 있다는 것이, 눈이 활짝 열려서 보게 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