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04b 울산강의-레위기 26장 : 율법의 결백
20200904b 울산강의-레위기 26장 : 율법의 결백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그 새로움이라는 것, 율법 자체가 스스로 율법을 꾸려나가요. 이렇게 보면 율법은 하나의 기계인데 어떤 기계냐 하면 죽여서 살리는 기계. 죽이는 것으로 벌벌 떨고 원망하지 마시고 죽이면서 살리는 기계. 그걸 압축해볼까요? 죽이는 자체가 사는 길, 율법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그 자체가 살아 있는 모양새.
그러니까 미국의 넓은 영토에 트랙터 있잖아요. 뒤에 구멍으로 벼를 자르고 앞에서는 이미 탈곡되어 알곡이 막 나오잖아요. 인풋, 아웃풋이 돼야 된단 말이죠. 율법은 하나의 기계지요. 유월절 어린양이 그거잖아요. 어린양 죽이고 어린양 살리고. 그런데 그 어린양이라는 기호적 의미가 인물화 되게 되면 그게 이스라엘 백성이 되는 거예요. 내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 할 때 어린양은 누구십니까? 첫째 시간에 보면 누군가죠. 예수님이죠. 그 예수님이 뭐냐 하면, 바로 교회가 되는 거예요. 어린양의 몸이 교회 된다고요.
코로나 사태 때문에 교회가 뭔지 사람들이 놓치고 있어요. 교회라 하는 것은 그리스도 몸입니다. 제 말이 틀리지 않았지요. 그리스도 몸이죠. 그리스도 몸은 이미 죽음을 이긴 몸이에요. 이 말도 맞지요. 그리스도 몸은 이미 죽음을 이긴 몸이잖아요. 그러나 코로나 오게 되면 그리스도 몸, 교회가 보일 모양새는 뭡니까? 죽음을 이겼음을 죽이는 코로나를 통해서 확인하면 되는 거예요. 이게 교회의 할 일이란 말이죠.
레위기 26장 17절 봅시다. “내가 너희를 치리니 너희가 너희 대적에게 패할 것이요” 여기 대적이 나오지요. 적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죽이기 위해서 적을 보내죠. 자, 교회의 적이 뭐예요? 교회의 적이라는 것은 곧 그리스도 몸의 적이죠. 그리스도 몸은 어떤 몸이라 했습니까? 이미 죽음을 이겨서 등장한 몸이 그리스도 몸이잖아요.
그러면 그리스도 몸의 적은 뭐냐? 아직 죽음을 이기지 못한 모든 사고방식, 죽음을 겁내는 모든 사고방식, 이게 바로 그리스도 몸의 적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코로나19를 보낸 이유는 교회의 적이 뭐냐를 알려주라고 보내신 거예요. 그리스도 몸의 적이 뭐냐? 불교신자, 천주교? 불신자? 아니, 아니, 너야. 교회 다니는 네가 그리스도 몸의 적이 되는. 왜? 코로나19를 무서워하니까. 죽는 게 무서워하니까. 그리스도의 적을 적으로 노출시키는 작업을 하시는 거예요, 지금.
그렇다면 제가 만약에 이런 이야기하면 미쳤다고 하겠지요. “당신은 미친 사람이오.” 이렇게 이야기하겠지요. 예배당 건물 짓고 간판 걸어야 그걸 교회라고 아는 사람한테는 미친 짓이라고 생각이 든단 말이죠. 그런데 출애굽기 7장 끝에 22절 누가 읽어보세요. “애굽 술객들도 자기 술법으로 그와 같이 행하므로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여 그들을 듣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지요. 결국 적이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율법이 하는 일에 하나님의 계획이, 하나님이 누구신가, 예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미쳤나, 돌았나, 어디서 구라야,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할 때 그게 뭡니까? 강퍅이 되겠지요. 자, 강퍅한 나라가 무슨 나라입니까? 애굽이죠, 애굽. 이스라엘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이 강퍅한 나라에서 죽음을 통과해서 나온 나라가 이스라엘이죠. 요즘은 그리스도의 몸이란 말이죠.
십자가란 것은 강퍅한 인간들 속에서 나오신 분이 지신 십자가잖아요. 주님께서 우리 보고 이 십자가의 능력,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그러면 율법으로 모든 인간은 입을 막고 저주 아래 있기 때문에 율법은 우리를 죽이는 동시에 율법에 죽임을 당한 우리가 뭐가 돼요? 부활의 백성이 되는 거죠. 고마운 줄 알아야 됩니다. 레위기 27장 감사해야 돼요.
진리가 나를 죽이고, 나를 죽여야 진리에요. 나를 격파하고 박살내야 내가 나를 폭파시켜야 진리에요. 그러면 진리의 새로움은 내가 폭파돼야 되거든요. 그 진리의 새로움은 어디서 나오느냐? 갈라진 심연, 깊은 곳. 여러분들이 그런 것 생각해보세요. 밝게 빛나던 별이 마지막 최후를 맞이할 때 과학 잡지나 영화에 보면 이미지가 나와 있어요.
별이 자기 중력을 못 이겨서 압축하게 되면 별은 최후를 맞이하는데 지구만한 별이 깨지면 그게 블랙홀이 된데요. 천문학자의 주장에. 그게 깨지면서 밝게 빛나던 표면은 연탄재처럼 시커멓게 변하고, 전체가 연탄재처럼 시커먼데 그게 갈라지면서 잠시 잠간 뭐가 보이느냐 하면 뜨거운 불빛이 보이지요. 여러분 상상할 수 있습니까? 그러면서 폭발하는 거예요. 그 안에 있던 에너지 바깥으로 쏟아져 다 튀어나오지요.
그게 바로 새로움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안다고 새로움이 아니고 순간순간 또 다시 말씀이 살아 있어서 역동성이 있어서 나로 하여금 그 입 다물라, 하고 터져 나오는 그 무엇, 그게 새로움이에요. “우리 애가 또 성적이 내려갔어요.” 그 입 다물라, 터져 나오는 거예요. 나의 위신과 체면과 나의 행복과 나의 건강이 저 인간 때문에 방해받는다고 할 때 그 입 다물라 할 때 터져 나오는 것.
너는 너를 위한 네가 아님을 새삼스럽게 막 박하사탕 깨무는 것처럼 확 속이 시원할 정도로 아, 내가 나를 위한 인생으로 태어난 게 아니잖아. 누군가를 위한 인생으로 태어났잖아. 왜 이래. 요새 내가 정신이 없어. 왜 자꾸 또 내가 희미한 안개 속을 헤매고 있지? 왜 나는 다른 사람을 부러워했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말씀이 늘 살아서 우리로 하여금 늘 우리를 뭉개버려야 돼요. 눌러버려야 된다고요. 우리의 모양새, 어떤 형태를 박살내버립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으면 아까 시간에 한 것 다시 이야기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시장에 내놓는 하나의 기호로서 사용됩니다. 기호라 했는데 경제학에선 이걸 상품이라 합니다. 이 상품이 시장에서 어떻게 활동하는지 알려면 상품으로 이동한다, 이것보다도 하나의 기호로서 움직인다고 하는 것이 설명하는데 더 함축적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기호는 뭐가 실려 있다고 했습니까? 여기 의미가 실려 있다고 했지요. 인간의 이미, 기호는 의미가 있는 거예요. 기호는 의미 안의 내용과 플러스 형식, 이게 기호란 말이죠. ‘칼’ 같으면 (ㅋ, ㅏ, ㄹ) 이렇게 있잖아요. 내용은 뭐냐? 뭔가 써는 것, 찌르는 것을 칼이라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돼있는 거예요, 인간은. 인간은 나의 의미는 기호화할 때 분명해지는 거예요.
그런데 나의 의미가 ‘기호=상품’이라 한다면 인간은 상품을 어디에 내놓는다고 했습니까? 시장에 마켓에 내놓지요. 왜? 남이 나를 필요로 하기를 원하면서. 이혼했는데 애가 둘이다. 함부로 똥배 튀어나오고 하면 안 됩니다. 관리를 잘해야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우연히 재벌 3세와 재혼할 수 있어요. 애 둘이면 어때요. 나와 삽시다. 이렇게 팔자 고칠 수 있으니까 항상 자기 몸 가꾼단 말이죠. 왜냐하면 상품화되니까.
그런데 왜 상품이 의미냐 하면 여기에 뭐가 담기느냐 하면 인간은 욕구가 담겨있어요. 누구의 욕구냐 하면 이게 허구의 욕구입니다. 이게 참 어려워요. 인간은 나라는 것을 허구적인 나를 상상해요. 인간에게 있는 것은 물질화된 몸 밖에 없어요. 그 몸을 내가 거울 앞에 비춰보면서 뭘 가미시키느냐 하면 여기에 욕구가 가미된다고. 이렇게 이해가 잘 안 될 거예요.
어떤 여자가 자기를 거울에 비춰보면서, “역시 참 황신혜는 잘 생겼지.” 자기가 황신혜래. 물론 자기 이름이 있지만 자기를 뭐로 보느냐 하면 자기가 좋아하는 자기가 이상으로 삼는 어떤 이상적인 모델이 있잖아요. 모델과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이 근사치를 갖고 있다고 그렇게 자부하고 싶은 겁니다. 왜요? 그게 나의 욕구기 때문에 나의 욕망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해가 잘 되는 것 같이 하고 있는데.
여러분들이 갑자기 병원에 이틀간 누워있다고 한다면 식구들의 와서, “아이고, 아프지. 고생했지. 너 원하는 것 사줄게. 뭐 먹고 싶어?” 이럴 때 그때가 만약에 12월이라고 봅시다. “엄마, 나 수박 먹고 싶어.” 12월에 무슨 수박이 있습니까. 뭘 구할 수 있느냐고 물은 게 아니고 딸의 욕구를 물은 거예요. 네가 지금 뭘 먹고 싶으냐. 수박이 먹고 싶다. 엄마가 질문을 잘못한 거죠. 지금 이 계절에 구할 수 있는 것 중에서, 하면 말이 너무 길어지잖아요. 그래서 뭐 먹고 싶으냐고 했는데 수박 먹고 싶다고 이야기한 거예요.
그러면 아픈 애한테 따집니다. 네가 왜 이 계절에 수박 먹고 싶다고 하느냐 할 때 애가 하는 말이 뭐냐 하면, 이게 언어로 설명이 안 돼요. 먹고 싶은 걸 먹고 싶다고 하는데 왜 먹고 싶은 걸 말도 못하느냐, 이렇게 나온다 이 말입니다. 네가 어딜 봐서 황신혜를 닮았느냐? 그건 그렇게 따지는 게 아니에요. 내가 닮았다고 하면 닮은 거지 왜 말이 많아.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것은 인간의 자아라 하는 것은 허구고 실제로 있는 것은 자아가 아니고 제가 뭐라고 이야기하는 겁니까? 자아가 아니고 욕망이 기호화된 거예요. 인간의 욕구가. 여러분들의 모든 생각을 보게 되면 남이 나를 보는 것과 내가 나를 보는 게 달라요. 하나님이 나를 뭐로 보는지 보라는 거예요. 이 성경은. 네가 너를 어떻게 보느냐는 때려치우고 지금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너를 어떻게 보느냐를 보라는 거예요.
그게 바로 있는 그대로 사실 그대로 우리의 착각이 아니고 우리의 관념이 아니고 허구가 아니고 있는 그대로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되는가를 보라는 거예요. 나이 팔십 넘은 할머니를 자기 자신을 아가씨로 느낄 때가, 내가 그 나이 안 돼서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경우가 많데요. 팔십은 넘었지만 아가씨를 흉내 내는 그런 버릇과 모양새를 그대로 살아 있다는 거예요. 팔십 넘어도 젊은 임영웅이라든지 영탁이 좋아하고 있단 말이죠. 왜, 좋아하면 안 돼요? 그걸 욕구라 해요.
제가 말한 것은 인간의 자아보다 뭐가 앞선단 말이에요? 인간의 욕구가 앞서요. 그건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원리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께서 인간아, 너는 이렇게 살라고 이야기한 적 없어요. 그건 선악과 따먹기 전에 이야기고, 선악과 따먹은 후에는 이렇게 하라는 게 아니고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흙에서 왔으니 어디로 간다? 흙으로 갈 수밖에 없다. 너는 저주받은 고통스러운 인생 살아야 돼. 끝. 그걸로 끝났지, 뭐. 뭘 새삼스럽게 명령을 해요.
주님께서 율법으로 명령하는 것은 명령대로 살 수 있다는 게 아닙니다. 나중에 명령대로 못 살면 그때 벌칙내릴 게. 이게 아니고 벌칙은 율법 줄 때 같이 주어진다는 게 뭔 뜻이에요? 어느 인간도 현 상태로서는 율법을 못 지킨다는 것에 내가 손에 장을 지질 게. 그런 뜻이에요.
기어이 레위기 26장 말씀 그대로 너희들은 이방나라한테 쫓겨서 남의 나라 포로생활 할 것이고 약속의 땅에서 추방될 것이다. 내 말이 맞나, 안 맞나 나중에 레위기 다시 보란 말이죠. 너희들 이스라엘 운명은 딱이지, 뭐. 딱 그대로 되는 거예요. 죽이는 거예요, 율법이. 우리는 내 운명을 어떻게 내 마음대로 좌지우지 할 수 없습니다.
아까 물질이란 말을 했는데 이걸 과학적으로 규정하면 물질의 운명에 대해서 과학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물질의 운명에 관해서 과학이 내세우는 법칙은 무엇이냐? ‘엔트로피’라 하는 거예요. 엔트로피란 법칙은 모든 물질은 쇠퇴한다. 간단하지요. 모든 물질은 시간이 흘러가면 시간 요소가 가미되면 가미될수록 이게 쇠퇴한다. 인간이 됐든 숟가락이 됐든 젓가락이 됐든 머리카락이 됐든 의자가 됐든 어떤 것도 전부 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바닷물도 강물도 다 이렇게 쇠퇴하는 거예요. 다시 돌이킬 수는 없다. 이게 과학이 설명하는 물질의 운명입니다.
그런데 과학에서 신기해하는 게 있어요. 모든 물질은 다 혼란스럽고 갈수록 쇠퇴해야 되는데 자식은 어떻게 해서 자식이 태어나고 왜 닭은 병아리라는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가? 이것은 바로 엔트로피 법칙에 저항하는 법칙이 이 안에 스며드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생명 출몰이에요. 출몰해봐야 또 시간 따라 마찬가지로 살겠지만 어쨌든 간에 군데군데 출몰한다 이 말이에요.
이걸 성경에다 적용시키면 모든 세상은 율법에 의해서 멸망하지요. 그런데 율법에 의해서 멸망하는 군데군데에 빵에 건포도 군데군데 있는 것처럼 군데군데에 뭐가 솟아나오느냐 하면 새 생명이 거기서 나오게 돼있어요. 그게 바로 새로움이에요. 만약에 우리가 자아라는 걸 그냥 그대로 고수해서 나의 인생 체면과 명예와 위신과 나의 행복을 쥐고 있으면 율법의 법칙에서 이것은 우상이 돼버립니다. 이건 저주거리가 돼요. 우리가 쥐고 있다는 이것 때문에 점점 더 우리로 하여금 우리는 물질화되고 우상화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 사람, 성령 받지 못한 사람들의 하루하루는 그게 뭐냐? 자살행위의 반복입니다. 자살의 반복이에요. 왜냐하면 자기라는 육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본인이 모르면서 죽어가는 그걸 기어이 자기 자신을 못 놓고 있어요. 왜냐하면 어떤 것이 와서 자기를 깨트리는 게 없기 때문에 그래요. 뭐 십 년 전에 잘 믿었다, 이십 년 전에 교회 다녔다. 이것 소용없거든요. 엔트로피 법칙에 의해서 전부 다 쇠퇴하고 이미 자기 자신이 우상화됐다는 고백 밖에 안 돼요.
그런데 이것을 모든 인간은 스스로 엔트로피 법칙을 극복할 수 없어요. 인간은 살고 싶어 하지 죽고 싶어 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여기에 누가 오느냐? 바로 레위기 26장 17절, “너희의 대적이 그것을 먹을 것임이며 내가 너희를 치리니 너희가 너희 대적에게 패할 것이요” 이걸 설명해야 되겠지요.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생각하기를 인간의 자아성, 복습 들어갑니다.
자아성보다 먼저 뭐가 있다 했습니까? 욕구, 욕심이 먼저 있지요. 욕구가 자아성을 통해서 뭘 만든다? 물질성을 만드는데 이스라엘 같은 경우에 이스라엘 나라 자체가 이스라엘에게 하나의 물질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이 물질을 위해서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주옵소서.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지켜줄 것을 간곡히 기다려요. 누가? 욕구가. 왜냐하면 살고 싶어서.
이스라엘 체면이 있잖아요, 위신이 있잖아요, 명예가 있잖아요. 그리고 나의 행복이 있잖아요. 이걸 어떻게 내가 포기해? 포기 못하거든요. 왜? 이미 욕구에 의해서 내가 정립된 이상은 욕구에 의해서 정립된 나기 때문에 이건 내가 나를 없애고 싶어도 욕구가 나를 가만 두지 않아요. 물질화시키죠.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 법칙은 뭡니까? 이 물질화시킨 이스라엘에 누가 온다 해요? 적들이 오지요. 아까 대적이 온다 했잖아요. 적들이 올 때 하나님께서 나를 지킨다고 할 때 그 하나님이 나를 지키는 좋은 하나님인 줄 알았는데 적들이 오니까 하나님을 어떻게 봅니까? 악한 하나님으로 이해되겠지요.
사실은 여호와 하나님이 악한 분이 아닌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원망해온 거예요. 자, 악한 하나님이 대적을 몰고 올 때에 그들이 그동안 믿었던 여호와는 여호와 아니었고 이건 본인이 선택한 여호와지요. 여호와 위한 본인이 아니고 나를 위한 여호와로 쓰겠다는 이 낭패가 그냥 노출되는 겁니다. 율법에 의하면 엔트로피가 가야 되는데 역 엔트로피를 그들이 원했던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적들을 보내서 어떻게 하나. 아까 원칙대로 한다면 이 적들을 보내서 이스라엘을 달래기 위해서 오는 게 아니잖아요. 이스라엘은 어떻게 됩니까? 깨지요. 제가 아까 했잖아요. 별이 마지막에 최후 될 때 갑자기 밝은 별이 시커먼 연탄재로 변하면서 안의 빛이 순간적으로 미친 듯이 깨져버리는 겁니다.
저는 이걸 이렇게 표현하겠습니다. 광기의 초상화.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날마다 광기의 초상화 같은 모습을 해야 돼요. 예수님 자신이 한국 땅에 나타나면 미친 분이죠. 광기에 휘몰린 분입니다. 그럴 수 없어요. 아버지께서 내게 보내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이 이야기를 모든 교회한테 해보세요. 교회가 그 사람을 가만 두겠어요?
그동안 예배드린 것, 헌금 드린 것, 예배당 세운 게 있는데 그 모든 것이 아무짝도 소용없는 게 되잖아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아버지께서 보내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는 말, 아버지께서 보냈다는 그 말을 잘라버리면 결국 뭐가 남습니까? 아무도 예수님께서 올 수 없다.
다시 말해서 나를 분석하고 나를 탐구해서 내게 오는 사람은 일체 천국에 못 간다. 이 말이에요. 신학박사 돼서 주님을 연구하고 분석해서 나 이제 예수 믿을래, 하는 사람은 안 받아준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손잡고 보내줘야 예수를 알지 그렇지 않으면 가짜 예수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누구 이름으로 합니까? 예수 이름으로 하지요. 그러니까 그 당시 종교적 사회에서 예수님은 광기적 존재지요. 귀신들렸구나, 이런 표현을 받지요. 예수님은 곧 광기의 초상화된 거예요. 사람들 앞에 미친 사람이라면 저게 미친 사람이 아니고 뭐냐를 보여주는 모나리자 같은 초상화로 등장하신 분이 예수님이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대적이 이렇게 올 때에 적들을 보낼 때 하나님께서 준비한 게 뭐냐 하면, 율법은 율법에 의해서 이것이 한 걸음, 두 걸음 개선되게 돼있어요. 그걸 보통 신학에서 갱신이라 하는데 갱신하니까 갱국이 생각나고. 주께서 부수는 작업이 바로 율법 안에 있는 율법대로 택한 백성을 살리는 작업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잘 들어보세요. 어떤 인간도 자기가 깨지길 원하는 사람 없지요. 강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꿈이라 하는 것은, 주체가 부재한 가운데 꿈이 덮친다 했잖아요. 그런데 율법이 이미 주어져버리면 이스라엘은 없는 존재가 아니고 있기는 있는데 어떻게 있느냐 하면, 율법에 반대되는 성향, 허구적인 욕구가 가득 차있는 매 맞아도 싼 그러한 주체가 있지요.
그러한 주체는 꿈의 세계에서 온 율법이 그것을 부셔버리는 거예요. 부셔버리면 숨겨진 심연이 등장하는 겁니다. 갈라진 심연, 이걸 제목으로 할까. 중심부가 갈라져요. 갈라지게 되면 거기서 새로움이 나온다 했습니다. 그 새로운 백성이 되는 재료가 돼요. 왜? 이미 심판 받은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맞기는 맞았는데 새로운 백성이 되는 재료로써 얻어맞은 겁니다.
이 원리가 분명히 예수님은 아버지한테 버림받았지요. 버림받은 아들이 구원되는 아들의 재료가 된다는 겁니다. 바탕이 되고 유일한 근거가 돼요. 그래서 주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망가진 내 조각을 들고 완전히 박살난 나의 조각들 들고, 버리지 말고 그걸 그대로 주님한테 내놓으면 주님이 그것을 주님의 사랑으로 예속시키는 부활시키는, 내 몸은 없어요. 영원히 없어요. 그리스도 몸으로 조립시키는 일을 주님의 부활의 영, 성령을 통해서 하게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전에 내가 생각했던 그 세계와 다른 세계기 때문에 그 세계가 무슨 세계냐? 꿈의 세계에요. 요셉을 선택했던 그 꿈의 세계, 어린 요셉이 요구하지 않은 내가 요구하지 않은 세계, 내가 예상 못한 세계에 일원이 되는 겁니다. 그게 새로움으로 우리를 통해서 율법을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나오는 거죠.
그렇다면 오늘날 나밖에 모르는 우리는 율법의 현장화, 율법이 살아 있는 현장화시키죠. 우리는 우리 자신을 다듬어 나가기 때문에 항상 합리적입니다. 그리고 이성적이죠. 합리와 이성이 만나게 되면 이게 지성이 되고, 지성이 우리의 감정을 통제하게 되면 여기서 윤리가 나오고 도덕이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이에요. 누가 뭐래도 우리는 나름대로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고 양심적으로 살려고 애를 쓰는 겁니다.
이 윤리적, 도덕적인 것을 성경에서 뭐라고 하느냐? 이게 누구 것이냐? 내 것이거든요. 그래서 이걸 자기 의라고 하는 거예요. 그 순서를 다시 볼까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율법을 기호로써 활용해요. 하나의 정보, 지식으로 활용하기 때문에 율법을 통해서 우린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를 하게 돼있습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을 지성이다.
“사람이 지성적으로 살아야지. 술만 먹으면 개야.” 이게 무슨 뜻입니까? 술 안 먹으면 지성적으로 산다는. 지성적인 것이 우리의 끓어오르는 감정들, 동물적인 감정 있잖아요. “정신 차려야 돼. 이러면 안 돼. 남한테 피해주면 안 돼.” 이런 식으로 감정을 컨트롤, 통제하게 돼있어요. 통제하는 그걸 윤리라 하는 겁니다.
윤리란 남한테 대하기 전에 자기가 자기 자신부터 다독거리는 걸 윤리라 해요. 그걸 개인적으론 도덕이라 하고 남과 관계에선 윤리라 합니다. “사람이 사람다워야지. 짐승도 아니고 말이야.” 이런 이야기하지요. 그런데 여러분, 아까 제가 바로 강퍅은 어디서 나왔다고 했습니까? 애굽의 왕이면 얼마나 합리적이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겠어요. 타의 모범이 돼야 되니까.
그런데 바로 왕이 강퍅하다는 것은 누가 앞에서 그런 거죠? 예상 못한 다른 인물이 등장했지요. 누가 등장했지요? 지팡이 들고 모세가 등장했지요. 모세 누가 보냈습니까? 하나님의 율법이 보낸 거죠. 나중에 모세가 율법과 만나니까. 하나님의 율법이 보낸 거예요. 율법을 보내니까 바로 왕이 강퍅했지요. 강퍅했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뭐냐? 모세, 네가 미쳤구나.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아까 무슨 초상화라 했습니까? 광기의 초상화란 우리가 예상 못했다. 합리적인 내가, 윤리적인 내가, 도덕적인 내가 예상 못한 내 모습을 발견했다, 이 말입니다. 뭐가 깨지면서? 윤리, 도덕, 합리, 지성 다 깨지면서.
이게 깨졌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나는 모든 합리와 이성과 지성과 감정, 윤리, 도덕이 다 어디에 소모되는 거예요? 내가 지금 더 오래 살고 싶어 하는 것과 관련돼있지요. 그렇잖아요. 살아도 그냥 살면 안 되고 짐승처럼 살면 안 되고, 참 괜찮은 인간이다, 그 소리 듣고 싶은 거예요. 그게 나의 체면이고 나의 위신이고 명예다, 이 말입니다. 나의 훌륭함이고 나의 침착함이고 관리 잘했고 최종 관리자는 나고.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십자가 영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딴 게 무슨 소용 있어요. 그게 성령을 방해하는데 십자가 영을 방해하지요. 내가 원하는 나 아니에요. 누군가를 보여주는 나가 되기 위해서는 그 누군가라는 그분이 마치 요셉의 꿈처럼 우리에게 뭔가 주어지는 겁니다. 네가 기껏 아는 세계 말고 다른 세계. 우리는 그 세계를 성경에서 들었어요. 그 세계를 뭐라고 합니까? 그 세계를 두 자로 ‘천국’이죠. 천국의 백성이라 하죠.
그럼 그 천국을 아는 순간 우리의 육신이란 물질성을 나를 위한 육신이 아니고 천국을 위한 육신이 되겠지요. 그런데 육신 내부에 아직 우리 육신이 죽기 전까지 살아 있잖아요. 육신 내부에 하나님의 대적, 그러니까 하나님 말씀이 대적이 육신 안에 살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처음에 깨어질 때는 우리는 육신임에도 불구하는 하나님의 종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시간이 흘러가면 엔트로피 작용되지요. 엔트로피는 점점 더 혼란스럽고 엉망이 된다는 말입니다.
육신이 천국의 종이 돼야 되는데 갑자기 뭐가 됐어요? 자기가 어느새 주인공이 돼버린 거예요. 나는 천국 백성이다. 나는 구원받았다. 이래 된 거예요. 그러면 처음에 은혜 받았던 이틀 전 사고방식은 그 기쁨은 어디 있습니까? 감사와 기쁨은 고마움의 어디 있어요? 다 날아가 버린 거죠.
이제는 천국을 내가 소유하려고 그 다음에 뭐가 등장합니까?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지성적이고 윤리, 도덕으로 버티는 거예요. 내게 찾아온 천국을 지키기 위해서 내게 찾아온 성령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겠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 중심이기 때문에 다시 우리로 하여금 우리와 똑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대적을 우리한테 보내지요.
보내면 성령을 통해서 바로 아, 저 인간이 그리고 나란 인간이 주님 십자가의 원수라는 사실을 화들짝 놀라는 순간이 다시 찾아옵니다. 이게 육신이 있는 한 계속 평생 반복되지요. 우리가 광기 있는 사람으로 살아야 될 텐데 광기에 의해서 은혜 받으면 갑자기 개뿔도 아무것도 없었고 월급도 별로 없는데 갑자기 주여, 감사합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거는 합리적 논리에선 있을 수 없는 거예요. 돈이 좀 있고 건강해야 감사가 되는데 몸 아파고 돈도 더 들고 사기 당했는데 주여, 이런 은혜를 주시다니. 이건 미친 거예요. 아니겠어요? 이것 미친 거잖아요. 감사할 이유도 없는데 감사하잖아요. 그러니까 성령이 오게 되면 내가 터무니없이 살았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며칠 가지 않고 다시 미쳐야 될 우리가 갑자기 사람이 돼버렸어. 다시 제 정신 돌아오는 거예요. 제 정신 돌아와서 “난 이틀 전부터 구원받았지, 참. 앞으로 바르게 살아야지.” 이렇게 나온다고요. 내가 내 관리에 들어가요. 또 갈라져야 돼. 그 감사와 기쁨은 벌써 며칠 전에 것이고 지금은 그런 게 없어져버렸어요.
자, 이럴 때 어떻게 하느냐? 이렇게 생각하시면 쉽습니다. 레위기 26장에서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하나님께서 율법 주시면서 벌칙도 같이 줬지요. 물론 상도 축복도 줬지만 축복은 상관없어요. 왜? 벌칙이 많다는 말은 우리는 받을 상과는 전혀 상관없고 벌칙에 해당된다는 것을 이미 익히 알아야 돼요. 그러면 이건 이미 확정적이죠. 고정적입니다. 벌칙은 고정적이에요.
우리는 지상에서 시간을 따라 살아갑니다. 이 벌칙이 한꺼번에 오는 게 아니고 군데군데 오거든요. 군데군데 계속 주어지는 것,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가 율법을 위반할 때마다 주어지는 거예요. 주어질 때 이 주어지는 모습을 제가 이렇게 표현해보겠습니다. 아까 우리 몸이 하나의 상품, 기호됐다는 것을 다시 생각해봅시다.
우리 몸이지만 남한테 나설 때 상품화한다. 시장에 내놓을 때에 나는 적어도 아파트 한 채 안 사주면 너한테 시집 안 간다. 이렇게 혼인시장에 내놨다 칩시다. 그런데 어떤 남자와 선을 봤는데 첫눈에 보자마자 둘 다 너무 호감이 가요. 너무 호감이 가서 누가 커피 값을 냈는지 기억도 안 나. 그리고 그 사람의 직업, 옷차림, 키 하나도 안 보였어. 다만 그 사람의 얼굴만 바라보고 표정만 보고 눈만 봤을 뿐이에요.
둘 다 끌렸어요. 그래서 일어설 때 둘 다 엎어지고 자빠져도 부끄럽지 않아요. 왜? 너무 감사하니까. 당신이 학교 어느 정도까지 나오고 현재 수입이 얼만지 묻고 싶지도 않아. 딱 저 사람이 내 남자다. 저 여자가 내 여자다, 라고 왜 말을 못하냐는 것처럼 둘이 뿅 갔다고 칩시다. 아무것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그냥 간 거죠.
그게 바로 시장에서는 사용가치라는 겁니다. 나는 저 사람의 아내가 된다면 아무것도 안 해줘도 저 사람한테 시집갈래, 라고 사용가치, 저 사람은 나한테 필요한 남자라고 해서 갔는데 가까운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는 도중에서 옆 테이블에 더 멋진 남자를 만났어요. 그때 정신이 드는 거예요. 내가 지금 이 남자의 이름도 직업도 아무것도 모르는데 내가 미쳐서 따라 왔구나.
그런데 옆 테이블의 더 멋있는 남자가 자기보다 못 생긴 여자와 선보고 있을 때 화가 나는 거예요. 그럴 때 이 남자 버리고 다른 남자에 갈 때 그걸 교환가치라고 합니다. 뿅 갔던 사용가치가 상대적으로 다른 멋있는 남자 봤을 때에 교환가치가 되는 거예요. 그걸 욕구라 해요. 인간의 욕구는 본인이 걷잡을 수 없어요. 내가 천국, 예수님만으로도 족해요. 더 이상 바랄 게 없습니다. 이건 본인을 몰라도 너~~~~~너너너 너무 모르는 이야기에요. 본인을 몰라도 너무 몰라요. 그때 그 순간이었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 후에 택한 백성을 어떻게 하느냐? 아버지께서 계속 예수님께 보낼 때 어떻게 하느냐?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거미는 눈도 없고 귀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하지만 거미줄에 어떤 먹잇감이 있으면 온 몸으로 느끼는 진동으로 감각 잡아서 줄 위를 걸어서 그 먹이를 낚아채게 돼있어요. 미세한 진동, 떨림이에요, 떨림.
사도행전 9장 봅시다. 거기 36절에 여자 이름 나오는데 뭐죠? 다비다죠. 여러분 다비다가 어떤 사람인 줄 아시죠. 다비다가 베드로 만나서 어떻게 됐습니까? 다비다가 죽었는데 살려낸 여자 이름이 다비다고, 다른 이름이 도르가에요. 자, 물어봅시다. 다비다가 베드로에 의해서 다시 살림을 당하고 그 다음에 영원토록 살았습니까, 아니면 죽었습니까? 이 땅에서 또 죽었지요.
그러면 여기서 봅시다. 베드로는 사람 만나면 다 살렸습니까? 공동묘지 가서 사람 살리는 게 취미였습니까? 아니지요. 베드로가 장례식장 돌아다니면서 죽은 사람 다 살렸습니까? 아니지요. 베드로는 뭘 보고 다비다를 살렸습니까? 와 이것 보통 어려운 질문 아니지요. 감이 왔다?
히브리서 12장 16절, 17절 보면 하늘과 땅이 진동한다고 돼있어요. 떨린다고 돼있거든요. 떨린다는 어떤 인간이 이건 내 자리라고 허락되지 못한다는 뜻이에요. 어떤 이 세상도. 성도에게 성령이 오게 되면 주님께서는 그 성도를 어떻게 해서든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게 하고야 맙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보면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은 가만있지 않고 그 사람을 뭐로 만드느냐 하면, 예수의 증인되게 해요.
예수의 증인이란 말은 나의 증인은 아니에요. 나의 이성과 합리성의 증인, 나의 윤리, 도덕의 증인은 성령께서 용납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걸핏하면 누구의 증인됩니까? 내 증인되지요. 그럼 주님께서 이걸 떨게 만들어요. 예상 밖에 떨게 만들어요.
만약에 여러분이 베드로다. 다비다가 죽어있다. 내가 사도인줄 알고 죽은 사람 낫게 해달라고 할 때 이것 참 합리적 이성적 사고를 유지하고 있다면 이건 정말 기가 찰 겁니다. 무슨 재주가 있어요. 베드로는 앉은뱅이를 낫게 한 재주도 없고요, 죽은 자를 살려낼 재주는 아예 베드로에게는 없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에게 성령이 임합니다. 스데반은 성령에 의해서 죽었고 베드로는 성령이 임해서 옥에 갇혔고 물론 거기서 잠을 잤지만. 베드로는 또 고넬료를 천사가 임해서 만났고.
또 베드로는 사도행전 9장에서 누굴 만났어요? 다비다를 만난 거예요. 그러면 다비다 거기 있고 베드로 여기 있다면 너는 거기 있고 나는 여기 있다면 그 둘 사이의 관계에 누가 개입했겠어요? 성령의 떨림. 베드로가 정신 바짝 차려서 살렸습니까, 아니면 그냥 살렸어요? 베드로는 다비다를 그냥 살린 게 아니고 주께서 살린 거예요. 베드로는 목격자일 뿐입니다.
베드로가 정신 바짝 차리자, 정신 차리자. 내가 딴 생각하면 못 산다. 이게 아니에요. 그냥 살게 된 인간을 베드로가 목격했을 뿐입니다. 목격해봐야 다비다는 또 죽었어요. 몇 년 더 살았는지 그건 모르겠어요. 베드로가 아는 것은 다비다 산다가 아니라 이 땅 자체가 우리가 사는 땅이 죽은 자도 살리는 작업을 주께선 지금 하고 있다는 그 사실을 베드로가 알게 된 거예요.
다비다를 살게 된 것을 알게 된 게 아니고 베드로가 알게 된 것은 주께서 살리고자 하면 언제든지 살릴 수 있는 그분이 지금 우리와 함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는 누굴 위한 삶입니까? 누군가를 위한 자기에요. 자기를 위한 삶이 아니었어요. 자기가 맞닥트리고 만나고 자기가 헤어지고 하는 모든 일들은 베드로로 하여금, 마지막으로 이걸 쓰겠어요.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이 본인만 있어서는 절대로 여기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찾아오게 되면, 내일 되면 딴 생각할지 그건 내일 문제고 내일은 또 주께서 일할 게 따로 있기 때문에 우리가 걱정할 것 없고. 우리가 순간 하나님의 말씀, 십자가의 말씀 받을 때 도대체 세상은 뭐냐? 이 사실 내가 여기 있다는 건 뭐냐?
네가 아무것도 아님을 통해서 주님께서 살아 계심을 증거하는 용도로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게 하신 하루하루가 지금 베풀어주시는 주님의 기적입니다. 지금 부활된 거예요, 우리가. 매일 살면 매일 부활된 거예요. 어제 죽어도 우리는 할 말 없어요. 그런데 오늘 살았다는 것은 다비다처럼 부활된 겁니다. 이 부활이 언제까지 갈지 우리는 생각하지 말아야 돼요. 내 소관 아니니까.
우리가 죽는다 할지라도 주님은 살아 있는 거예요. 바로 그 땅,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있는 게 아니고 그 땅, 요셉이 꿈꾸던 그 땅, 율법이 우리보다 먼저 작용하는 그 땅, 율법이 부활을 제공하고 생명을 제공하는 그 모든 원리가 율법이 있기에 너희들은 너희 힘으로 율법을 못 지키기 때문에 내가 율법대로 너희를 죽여줄게. 율법에 죽은 가운데서 십자가로 널 죽여줄게. 나는 죽어야 마땅하고 하지만 죽이시는 그분이 바로 살아 있다는 걸 인정한다면 그 사람이 오늘날 이스라엘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에 눈을 뜨게 하옵소서. 그저 보이는 대로 전부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분이 보이는 것을 다스리고 있음을 저희들이 발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