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04a 울산강의-레위기 26장 : 율법의 결백
20200904a 울산강의-레위기 26장 : 율법의 결백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레위기 26장 17절, “내가 너희를 치리니 너희가 너희 대적에게 패할 것이요 너희를 미워하는 자가 너희를 다스릴 것이며 너희는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리라” 그렇게 돼있지요. 그 조건이, “네가 모든 명령(법도)을 준행하지 아니하면” 이 명령을 내리시는 장소가 약속의 땅입니다. 약속의 땅을 몇 가지 알아야 하지만 이것부터 먼저 알아야 해요.
약속의 땅은 막힌 땅이다. 약속의 땅은 사방이 막힌 땅이에요. 그 증거가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을 나올 때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애굽 사람과 차단시켜놨습니다. 약속의 땅에 누구도 들어올 수 없고 들어왔던 사람이 나갈 수도 없어요. 그래서 약속의 땅은 인간이 생각도 못한 상상도 못한 땅입니다.
보통 땅은 출입이 자유롭잖아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약속의 땅을 함부로 나갔다가는 큰 화가 일어나지요. 약속의 땅이 막혀있는 땅이라면 거기에 사는 백성은 약속의 백성이 되겠지요. 약속의 백성은 막혀있는 인간들이 되는 겁니다. 땅만 막혀있는 땅이 아니고 백성들도 특수한 백성들이에요.
집에서 생닭을 마트에서 사는 것과 비비큐에서 닭 살 때 모양새가 다르지요. 비비큐는 생닭에다 무슨 짓을 했어. 뭘 입혔어요. 조건이 붙어있어요. 비비큐 치킨 집만의 노하우에 닭 위에 덮여있단 말이죠. 생닭이 아니고 집에서 아무리해도 그 맛이 나질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다른 민족과 달라서 주님께서 무슨 짓을 하셔서 손을 댔어요. 유월절 어린양부터 해서 언약으로 요단 강 건너올 때부터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오기까지 하나님께서 꾸준히 뿌려준 게 있어요. 그 뿌려준 조건으로 인하여 이 백성은 율법에 의해서 율법을 드러내야 될 책무가 있는 겁니다. 자기 위주가 아니고 율법 위주에요. 본인이 살아 있다는 위주가 아니고 율법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오게 된 거예요.
그래서 약속의 백성이 막혀있는데 이 막혀있다는 것을 초반부터 제가 어렵게 가면 이렇습니다. 막혀있다는 인간은, 스스로 본인의 체면이나 위신이나 명예라든지 그런 것 때문에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 이스라엘 백성, 약속의 백성은 있는 그대로가 무엇인가? 이 세상에 있다는 것, 이 세상에 있을 때 진짜 있다는 게 어떤 식으로 있는지를 유일하게 세상에 드러내는 사명을 가진 사람들의 이스라엘이에요.
보통은 개인적인 명예나 체면, 잘 먹고 잘 사는 행복 위주잖아요.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도대체 이 세상은 무엇이냐, 이 세상 자체가 무엇이냐, 어떻게 있느냐? 그걸 신약에서는 진리라 하는데 진리를 위해서 있는 사람들이에요. 요즘 인간들이야 자기가 잘 먹고 잘 사는 걸 진리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에요.
진리는 따로 있고 그 진리를 진리 되게 드러내야 될 인간이지만 인간들은 자기 개인적인 사적인 행복과 자기 위신과 체면에 몰두하다 보니까 자기 자신만 붙들고 있을 뿐이지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도통 관심이 없어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진리를 알려드릴 테니까 모이시겠습니까?” “아니요.” 이러지요. “좋은 투자처 있는데 투자하게 되면 은행이자 열 배인데 오시겠습니까?” “예.” 이러고 있단 말이죠. 자기 자신에 대해서 관심이 있지요.
그래서 이걸 좀 더 난해하게 이야기하게 되면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기존에 이스라엘 백성의 특수성, 비비큐 치킨 집 이야기했듯이 특수한 조건이 여기에 붙습니다. 그 조건이 뭐냐 하면, 이건 다른 색깔로 쓰겠어요. 꿈에서 시작된 백성, 창세기 37장. 창세기 37장에 보면 거기 누가 나오느냐 하면 요셉이 나오지요. 그것도 어른 요셉이 아니고 어린 요셉이에요.
어린 요셉이 꿈을 꿉니다. 자, 요셉의 꿈이 무엇과 차이 나느냐 하면, 보통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해야 될 것을 본인이 선택해요. 본인이 결정해요. 그런데 여러분들의 꿈에 나타난 이미지, 그림들, 그리고 그 세계를 여러분들의 선택했습니까, 아니면 꿈꿈대로 꿀 수밖에 없는 겁니까? 어느 쪽이에요? 꿈꿀 수밖에 없지요. 그걸 주체가 부재, 주체가 없는 상태에서 등장하는 세계, 결정해야 될 내가 없는 상태에서 그냥 부여되는 것, 주어지는 세계. 이게 꿈의 특징이에요.
그래서 꿈에 의해서 요셉이 선택당합니다. 어린애가 뭘 알겠어요. 지가 꿈을 이런 식으로 꿀래요? 이런 것 없지요. 꿈에 의해서 선택 당했기 때문에 요셉의 나머지 인생도 꿈대로 갈 수밖에 없어요. 바로 그 꿈에 의해서 조성된 가족이 야곱의 가정이에요. 그 야곱의 가족을 야곱약속대로, 또는 야곱언약의 결과로 생겨난 가족이 야곱언약입니다.
야곱언약으로 생겨진 야곱가족은 꿈에 의해서 조성된 가족이에요. 본인이 선택한 가족이 아닙니다. 그 야곱의 가족에 아들이 열두 명이 있었고, 그 열두 명이 새끼를 까서 그러니까 자식을 낳는데 그 열두 지파가 애굽 나라를 가득 채웠다면, 애굽 나라에서 번성했다면 그것은 애굽 나라 따로 있고 꿈의 나라가 따로 있어서 같이 섞여 있는 상황이 되는 거예요.
한쪽은 본인이 선택하는 그러니까 내가 선택하는 삶이죠. 그게 애굽 사람들이에요. 사람들의 자기 일을 뭘 할지 어떻게 할지 본인이 선택하고 결정한다면 이거는 진리에는 관심이 없고 내 위신과 체면과 내 행복과 나의 건강과 수명연장, 그리고 내 가족, 그런 걸 생각하겠지요. 꿈에 의해서 조성되지 않는 보통 사람이라면 내 위신 같은 체면, 명예, 이것이 우선된단 말이죠.
그런데 꿈에 의해서 선택당한 민족은 주도권이 어디 있느냐 하면 꿈에 있거든요. 꿈이 내부적으로 바라보는 그 목적에 준해서 야곱의 가족과 그 후손들은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상당히 특이하죠. 다시 복습합시다. 자, 꿈의 가족의 특징이 꿈이 없는 사람들과의 차이점은 뭐라고 했습니까? 본인이 주체적으로 선택 안 하고 선택당한다고 했지요. 주체가 부재, 없는 상태에서 선택당하는 거죠.
본인이 선택당하지 않고 꿈에 의해서 선택당한다면 거기서 조성된 그 세계라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꿈꾸는 세계에요. 그 꿈꾸는 세계에서 애초부터 꿈에 의해서 선택 당했기 때문에 자신의 주체적인 결정, 의사결정 같은 것은 빠지겠지요. 꿈의 세계에서 빠져버리는 거예요. 그걸 쉽게 말해서 이렇게 됩니다. 파란 걸로 쓸게요. 누군가를 위한 나.
‘누군가를 위한 나’ 이 말은 같은 말로 나를 위한 인생 아님. 나를 위한 인생은 소용없음, 또는 하나님께서 용납 안 해주심. 이렇게 되는 거예요. 누군가를 위한 나. 그래서 오늘 본문 레위기 26장에서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 율법을 주신 것은 이런 뜻이에요. 너희가 나를 찾아봐라. 내가 진리이니까.
우리가 이 땅에 사는 것은 나를 위한 인생은 소용없어요. 그거는 내가 선택하기 때문에 인생 없습니다. 내가 부재해야 되는데 내가 존재하지 않아야 되는데 꿈 때문에 내가 존재한다면 고로 나의 인생이라 하는 것은 나를 있게 한 그 꿈의 세계의 주인공, 그걸 저는 뭐라고 했느냐 하면, 누군가에요. 그 누군가를 위한 인생이 돼야 하는 거예요, 우리가.
그러니까 우리는 나의 명예, 나의 체면, 나의 위신, 나의 행복, 이런 것은 우리에게 용납이 됩니까? 용납이 되질 않는 거예요. 그러한 누군가를 위한 사람을 집결시켜놓고 땅을 봉쇄시켜버린 겁니다. 막혀있는 땅이 되는 거예요, 약속의 땅은. 빼도 박도 못해요. 아무나 올 수 없고 아무나 빠져나갈 수 없어요. 토관처럼 갇혀있는 거예요. 봉쇄된 거예요. 막혀있는 땅이에요, 이 약속의 땅이.
어디에 막혀있냐고 여러분 물으신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이렇게 돼있어요. 어디에 막혀있냐 하면 바로 율법에 막혀있어요. 사방팔방 율법에 막혀있는 그러한 땅, 약속의 땅입니다. 율법에 막혀있는 땅을 설명하려면 율법이라는 여러분이 늘 쓰는 단어 대신 다른 단어를 집어넣으면 좋겠지요. 율법이라는 이름의 기호에 막혀있는 땅, 그런 세계가 바로 약속의 땅이에요.
왜 율법이라고 하지 않고 기호라는 말을 제가 쓰는 이유가 뭐냐 하면, 본인들이 선택하는 모든 선택을 물질화시켜요. 자기 자신을 물질화시킨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우상화시킨다는 말도 되고요. 인간은 나 자신을 뭐로 보느냐 하면 하나의 추상적인 절대기호처럼 사용해요. 기호라는 말은 뭐냐 하면, 남에게 나타낼 때 나 이런 사람이라고 이걸 아주 함축해서 응축해서 보여주는 게 기호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왜 제가 기호란 말을 쓰냐 하면 기호란 그 안에 의미가 담겨있기 때문에 그래요.
지난 수요일에 제가 그런 설교했습니다. 다메섹, 아람나라의 수도 다메섹 이야기하면서 인간의 죄는 무의미한 것이 의미를 부여하는 그것이 죄라고 했어요. 의미가 없는데 의미를 부여하는 거예요. 인간이 물질화시킨다는 것은 자기 가족, 자기 아파트, 차나 이런 것, 뭔가 사물을 끌어 모으고 소유화시키는 작업을 한다는 겁니다.
인간은 왜 그걸 의미 있게 보고 그게 왜 죄인 줄 모르느냐 하면 이 세상의 모든 물질은 인간 본인이 존재하고 본인과 의미 있게 연관돼있는 게 아니에요. 뭐냐 하면 하나님의 율법이란 기호와 관련돼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를 들게 되면 여기 레위기 26장 16절 봅시다. “내가 이같이 너희에게 행하리니 곧 내가 너희에게 놀라운 재앙을 내려 폐병과 열병으로 눈이 어둡고 생명이 쇠약하게 할 것이요” 찾았습니까, 16절. 여러분 보셨지요. 여기에 ‘눈’이라는 것은 물질이죠. 열병, 재앙, 폐병. 다 물질과 관련돼있지요. 이 물질이 누구 말 듣습니까? 우리 말 듣습니까, 율법에 준해서 폐병이나 열병, 코로나가 오는 거예요? 누구 말 들어요? 일단 우리 인간의 말 안 듣지요. 폐병 달라고 누가 기도하겠어요? 우리 말 안 듣지요.
나라는 것이 폐병 없기를 바라는 상태, 건강한 몸이니까 제 표현대로 하면 그건 물체와 물질이죠. 우리는 건강한 육신, 육체란 물질을 원하는데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위반했다는 이유 때문에 뭐로 바꿉니까? 폐병으로 바꾸죠. 눈이 어두워지는 거예요. 눈이 어둠침침하고. 눈이 침침하고 어두워진다. 우리는 아니 되옵니다. 그래선 안 돼요. 내가 사는 데 불편하다 하잖아요. 그게 꿈의 세계에 속하지 않은 자들이 그런 거예요.
자, 이야기 다시 합니다. 꿈의 세계의 특징은 내 존재하지 않는 내가 부재 상태에서 꿈이 먼저 나타나서 나를 선택했을 때, 선택하게 되면 나를 위한 인생은 없고 뭘 위한 인생이다? 누군가를 위한 몸이어야 되고 인생을 살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뭐라고 시작했느냐 하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에 집어넣은 것은 너희들이 나를 한 번 찾아보라는 거예요.
이 세상의 주인 되시는 분을 찾아보라는 겁니다. 너희들이. 뭘 통해서? 율법을 통해서. 달리 말해서 율법과 연관된 물질을 통해서 찾아보란 거예요.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괭이나 호미로 뭘 하겠어요? 땅에다 손질해서 거기다 농사라는 걸 짓겠지요. 농사라는 걸 짓는 그 행위가 뭐냐 하면, 진정 폐쇄된 이 땅에 누군가가 계시다는 것을 찾는 작업이 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분이 우리에게 율법을 줬고 율법대로 살게 되면 농사를 지어도 칠 배나 30배, 백배나 농사가 잘 되게 된다는 이건 무슨 세계냐 하면 이 세계가 율법의 세계, 율법이란 기호의 세계, 기호는 의미를 낳으니까 율법이 의미 있게 작동하고 작용하는 작열하는 그런 세계, 그것이 요셉에게 준 꿈의 세계, 약속의 세계, 그 세계에 우리가 들어왔고 우리는 그 꿈의 세계를 증거하고 드러내는 백성이 된다 이 말입니다. 그 이야기지요.
그런데 여기 17절에 보니까 “내가 너희를 치리니 너희가 너희 대적에게 패할 것이요 너희를 미워하는 자가 너희를 다스릴 것이며 너희는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리라” 그 다음에 19절, 20절을 보게 되면, 재앙을 내리고, “내가 들짐승을 너희 중에 보내리니 그것들이 너희 자녀를 움키고 너희 육축을 멸하며 너희 수효를 감소케 할찌라 너희 도로가 황폐하리라”
그 다음에 25절에 보면, “내가 칼을 너희에게로 가져다가 너희의 배약한 원수를 갚을 것이며 너희가 성읍에 모일찌라도 너희 중에 염병을 보내고 너희를 대적의 손에 붙일 것이며 내가 너희 의뢰하는 양식을 끊을 때에 열 여인이 한 화덕에서 너희 떡을 구워 저울에 달아 주리니 너희가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리라”라는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는데 아까 조건이 뭐라 했습니까? 그것은 14절에 보면 어떤 경우에 그렇습니까? 너희가 내 말을 명령을 준행치 아니하는 조건 하에 이런 파탄 나는 일이 일어난다는 거죠.
그러면 이것은 갇혀있는 세계, 폐쇄된 세계, 닫혀있는 이 세계에서 그들은 빼도 박도 못하는 거예요. 힘들면 도망치면 되는데 도망칠 수 없다 했지요. 왜 들어올 때부터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인간이 재현할 수 있습니까? 못하지요.
그렇다면 성경에서 특히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침입해 들어오는 애굽 군대와 구별시켰다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라는 신체에 대해서 몸에 대해서 얼마나 심각하게 중요한 몸이라는 것을 자각했어야 돼요. 그들이 하는 일이 보통 일이 아닌 걸 그들이 알아야 돼요. 보통 밥 먹고 살고 자기 위신이나 찾는 그 일에 종사하는 게 아니에요.
기존에 약속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런 세계는 없는 거야. 어딜 구라를 쳐. 그런 세계는 없어. 그런 세계는 없다고 하는 그 세계를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을 통해서 있음을 증명하는 중차대한 그 일에 종사하고 있는 겁니다. 얻어터져 가면서, 굶어 가면서, 쫓겨 가면서, 염병 들어가면서, 농사졌는데 소출이 없어가면서, 자식 열 명 낳았는데 다섯 명 죽어가는 그런 경우를 통해서 뭘 증거 한다고요? 이 땅에 누군가가 계심을 증명하는 거예요.
이건 뭐 내 위신이나 체면을 살리려고 사는 게 아니에요.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해서 자기 위신, 체면 누가 안 차리겠어요. 다 챙기겠지요. 하지만 강제성 있는 폭력을 겪을 때 우리는 진실을 찾아 나서게 돼있어요. 17절부터 나오는 이 이야기가 강제성 있는 폭력입니다. 강제성 있는 폭력을 통해서 하나님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냐 하면 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율법이란 객관적 결백이다. 율법은 아무 죄가 없다. 결백하다. 객관적으로. 율법에 의해서 그들이 농사가 안 되고, 율법에 의해서 그들에 전염병이 오고 코로나 오고, 율법에 의해서 그 가족들이 죽고 개인적으로 행복과 체면과 위신을 차리기 위해서 몸부림치지만 주께선 전혀 들어주지 아니하시고 그걸 아주 묵사발 격파해버리고 파기시키고 하신 말씀이, 율법은 객관적으로 결백하다. 아무 죄가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야 될 일은 뭡니까? 율법의 객관적 결백성을 자기 인생을 통해서 몸을 통해서 증명하죠. 드러내는 겁니다. 결국 17절부터 끝까지 읽어보면 여기 28절에 보면, “내가 진노로 너희에게 대항하되 너희 죄를 인하여 칠 배나 더 징책하리니 너희가 아들의 고기를 먹을 것이요 딸의 고기를 먹을 것이며 내가 너희의 산당을 헐며 너희의 태양 주상을 찍어 넘기며“ 이렇게 돼있지요.
여러분들이 산당과 태양, 산당에서 빌고 태양의 주상을 섬기는 게 뭐가 그렇게 나쁜 일입니까? 강의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꿈의 민족, 꿈의 백성이라 했지요. 꿈의 특징은 내가 꿈을 꾼다고 해서 꾸어지는 게 아니고 꿈은 일방적으로 꿈 세계를 우리에게 줘버려요. 밤중에. 그러면 우리는 꿈의 세계에 대해서 선택당한 겁니다. 이거는 내가 주체적으로 행동할 수 없는 세계를 우리에게 부여하신 거예요.
그러면 꿈의 세계가 유지되려면 우리는 어떻게 돼요? 존재하지 말고 뭐 해야 돼요? 부재해야 돼요. 우리는 존재하지 않을 때 꿈은 꿈대로 고상하게 남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서 처벌을 통해서, 아까 처벌을 뭐라 했습니까? 강제적 폭력이라 했지요. 폭력을 행사해서 우리의 사적인 공간, 사적인 생각을 완전히 격파하고 박살내가 작살낼 때 결국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남기고자 하는 겁니까?
아까 강의대로 하면 우리가 이렇게 공격을 당하는데 하나님의 율법의 공격은 무엇을 공격하느냐 하면 바로 우리가 선택한 우리의 물질성을 공격하는 거예요. 이 물질성 안에는 뭐가 들어있냐 하면 우리가 이 땅에 사적으로 있어야 될 그 의미, 그리고 그 가치, 내가 이 땅에 있어야 될 나름대로 내가 생각한 나의 정당함, 나의 이유가 들어있어요.
그런데 내가 여기 있음에 이런 인생 살겠다는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이것이 바로 부당한 전제가 되는 겁니다. 정당하지 않은 전제, 우리가 삶의 전제, 내가 여기서 살아 있다는 것이 부당한 전제가 되는 거예요. 주님께서 너 살라고 약속의 땅에 보내준 적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놓쳤다는 것은 뭘 놓쳤다는 거예요? 시작을 나로부터 시작하면 안 된다는 그 점을 놓친 거예요. 세상에 내가 살아가면서 나는 나를 위한 인생이어야 한다는 그것은 어느 나라에서 용납이 안 되는 겁니까? 꿈의 세계에선 용납이 안 되는 거예요. 약속의 세계에선 용납이 안 되는 거예요, 이게.
주님께선 우릴 없애려고 하는 거예요. 내가 없으면 나의 것도 없어지잖아요. 그걸 원하는 거예요. 나의 것이라는 것은 내가 공들여서 만들어낸 물질들, 피아노고 의자고 모든 내 육신도 건강한 육신. 필라테스 해서 근육 만든 것 있잖아요. 필라테스 대회도 있지요. 포즈 취하고 폼 잡고 사진 찍은 것 있잖아요. 모든 근육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고 굶어야 되고 심지어 대회 앞두고는 물 한 방울도 마시지 말아야 근육에 탄력성이 광이 빛이 나는 거예요. 그게 물질성이에요.
그 물질성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나의 존재하는 의미와 직결되는 겁니다. 나 저것 때문에 살았어. 내 인생 사는 보람은 저거였어. 저런 결과를 낳기 위해서 살아왔어야 했었어. 이게 주님이 생각한 꿈의 세계입니까? 그건 애굽이죠. 그건 애굽의 세계에요. 이런 인간의 물질성은, 무엇 때문에 인간이 물질성을 추구하느냐, 라고 제가 강의 초반에 이야기했는데……
왜 인간은 물질성을 추구한다 했습니까? 물질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방금 이야기했어요. 내가 존재하는 의미가 들어있어요. 나의 성과, 평생 고생한 성과에요. 세상에 나온 모든 노래를 보세요. 고생 뒤에 낙이 온다는 그런 희망을 주는 노래들 아닙니까, 모든 노래가. 그런 노래도 마찬가지에요. 우리 함께 노래합시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모든 물질은 무엇과 관련돼있다고 했습니까? 자꾸 복습하는데 할 수 없어요. 자꾸 잊어버리니까. 무엇과 관련돼있다고 했습니까? 세상의 모든 것은 율법에 의해서 됐다 했지요. 염병이고 폐병이고 건강이고 우리의 몸이고 신체고 머리카락 하나 우리의 발톱 모든 물질은 무엇과 연관돼있어요? 율법과 관련돼있어요.
율법을 기호라 한다면 기호 안에 의미가 담겨있는 거예요. 그러면 이 세상의 모든 물질은 율법이 품고 있는 그 의미와 연결돼있는데 세상 사람들, 인간들은 그 율법의 의미를 뭐로 막았습니까? 나 여기 존재한다는 것으로 막아서버린 거예요. 애들은 내 자식이라는 거예요.
어떤 서른일곱 살 아주머니는 애가 여섯 명이에요. 그런데 이혼했어요. 아이들 자기가 다 키우겠다는 거예요. 왜 그렇게 많이 낳았습니까? 낳을 때마다 예쁘다는 거예요. 이제는 남편과 이혼했기 때문에 낳고 싶어도 못 낳아요. 몰라, 새 시집가면 또 낳을 수도 있을 거예요. 여섯인데 일곱 명, 여덟 명. 특히 그 여성이 필라테스 강산데 그 사람 어깨에 문신이 있어요. 여섯 아이 이름을 문신으로 다 적어놨어요. 이건 대제사장 같아. 여섯 명 내가 책임진다는 거예요. 그게 kbs 에 나왔던 거예요.
그걸 보고 여러분 이상한 생각 안 들어요? 이상한 생각이 안 들지요. 왜? 나도 그렇게 살아가니까. 내 주변에 끌어 모은 모든 물질, 아파트부터 해서 차, 모든 물질은 내가 이 땅에 살아가는 이유를 증명하기 위해서 내가 끌어 모은 거예요. 다시 묻겠습니다. 내가 산당을 섬기든 내가 태양주상을 섬기든 내가 섬기겠다는 그게 뭐가 문제냐는 거죠.
내가 선택했다는 게 문제에요. 나는 부재해야 되는데 나는 없어야 되는데 내가 아침에 눈떠서 꾸미고 낮이고 밤이고 스물네 시간 나를 잊지 못하고 살아가는 게 문제에요. 나를 잊지 못해요. 이게 문제인 거예요. 왜냐하면 약속의 땅은 부활한 사람만 모여 살게 돼있어요. 일단 죽고 다시 산 사람만 모인 곳이 바로 약속의 땅입니다. 왜? 유월절 어린양이 그거니까.
주님의 율법의 기호적으로 연결된 물질, 모든 산에 있는 나무나 들이나 모든 것이 주님의 율법이 살아 있음을, 네가 살아 있는 게 아니고 율법이 살아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님의 모든 게 주어졌는데 인간은 거기서 헤헤거리며 새치기해서 나도 살아 있지롱, 하면서 지가 살아 있는 채로 가로막은 거예요. 중간에 새치기를 한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레위기 26장 17절부터 쭉 보게 되면 우리가 30절까지 봤지요. 무슨 내용이냐 하면 죽여 버리겠다는 거예요. 있음을 없음으로 바꾸겠다는 죽여 버리겠다는 거예요. 고마운 줄 알아야 돼요. 죽이는 것에 대해서 그것도 뭐로 죽이느냐에 따라서 고마운 줄 알아야 돼요. 율법으로 약속으로 죽는 자만 약속으로 사는 사람이에요. 고마운 줄 알아야 됩니다.
오늘 뉴스 보니까 어느 기도원에서 사람 병 고친다고 때렸는데 뭐로 때렸느냐 하면 십자가로 때려서 사람 죽여 버렸어요. 뾰족한 십자가로 패버렸어요. 이건 십자가를 위한 기적이 아니고 그 환자가, 나는 안 아파야 됩니다. 제발 낫게 해주세요, 하는 그 목적으로 한 십자가가 수단으로 동원된 게 문제가 된 거예요. “나는 하나님 덕분으로 건강을 회복하고 싶습니다.” 그건 십자가로 안 죽어도 늙어죽게 돼있어요. 맞아 죽든지. 미리 앞당겨서 죽은 거죠.
“나는 죽으면 안 돼. 나는 필히 살아 있어야 돼. 그게 나다운 거야.” 그게 바로 율법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겁니다. 왜냐하면 내가 살아 있으면 날마다 우리는 나를 위한 선택만 나오기 때문에. 나의 의미와 나의 가치, 이것만 나와요. 그러면 나는 뭐가 되느냐? 나는 이 땅에 하나의 기호가 됩니다.
기호란 말을 제가 계속 사용하고 있는데요. 율법이 기호지요. 말로 언어로 돼있으니까 기호 맞지요. 그렇다면 율법과 상대가 되려면 우리 몸도 기호가 돼야 돼요. 우리 몸이 응축하게 되면 하나의 기호가 되게 되면 이 기호는 어디에 내다 파느냐 하면 시장에 나갑니다. 내가 나를 시장에 상품으로 내놓는다 이 말입니다.
애들 교육시킬 때 그런 식으로 하지 않습니까? 네가 그런 식으로 공부해선 아무도 널 안 찾는다. 그러잖아요. 여자 애가 조신해야지. 여자 애가 함부로 나대면 누가 널 시집오라 하겠느냐? 이 말이 뭔 뜻입니까? 신부감 시장에 네가 상품가치가 제대로 됐는지 스스로 파악해보라고 엄마가 딸에게 그렇게 충고하는 그 이야기 아닙니까, 그죠?
우리가 천국 가겠다고 할 때 남 천국 가는 게 그렇게 관심 있어요. 나 천국 가는데 관심 있어요? 나 천국 가죠. 그럼 천국 가려면 나를 뭐로 시켜야 돼요? 이 나라는 기호를 천국시장에 주께서 팔릴 만큼 괜찮은 상품으로 만들어내야 되잖아요, 그렇지요.
그런데 수요일 설교에서 제가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요한복음 6장 65절, 아버지께서 내게 보내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구원 없다 이 말입니다. 인간이 생각한 구원, 없습니다. 인간이 선택한 구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안 받습니다. 오늘 본문 레위기와 통해요. 출애굽과 통하고 요셉의 꿈의 세계와 같은 맥락이에요. 네가 구원을 선택했기 때문에 그런 선택은 하나님께선 우상숭배로 여겨서 받지를 않아요.
주님께서는 내 몸에서 기호되는 이것을 율법에서 기호에 수단으로 사용되기 위해서는 이 몸을 죽여 버려야 됩니다. 이 땅에서. 율법으로 죽이고 율법으로 살려내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우리는 죽을 때는 내 몸이 죽지만 살려냄을 당할 때는 누구의 몸이 되느냐 하면 그 누군가의 몸이 되는 거예요. 약속의 땅의 주인님과 관련돼있어요.
레위기 25장 볼까요. 55절, “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품꾼이 됨이라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나의 품꾼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여호와의 품꾼의 입장에서 약속의 땅에 살게 됩니다. 그러면 그 땅에 사는 한 본인이 품꾼이 주인공 됩니까, 안 됩니까? 주인 될 일은 없습니다. 주인이 아니에요.
언제 제가 춘천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는가? 하나님께서 우릴 진멸하시고 그 다음에 우리를 예속시킨다. 예속이란 말은 독단적으로 따로 내 것을 챙기는 법은 이젠 없다. 예속되었다, 종이 되었다, 누구에게 소속되었다, 속했다. 그분이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그것뿐이다. 주도권은 내게 전혀 없다. 그런 뜻이에요.
내가 주인공 노릇한 나를 죽여 버리고 다시 살릴 때는 예전처럼 내가 주인공 식으로 살려내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코로나 후유증입니다. 완치됐다 했는데 후유증이 있어서 머리카락 빠지고 냄새도 못 맡고 속이 쓰리고 기억력 감퇴되고. 바이러스가 없다는데 그게 계속 남아있다는 말은 바이러스한테 예속된 거예요. 어떻게?
바이러스는 없는데 뭐가 남아 있느냐 하면 징후, 징조, 또는 징조보다도 다른 말로 하면 증상, 나에게 코로나19가 다녀갔습니다, 라고 증거하는 증인, 코로나 증인된 거예요. 평생토록.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이가 둘 다 서른 쯤 됐어요. 생전 찾아오지 않던 친구가 갑자기 찾아와서 반갑다고 인사할 겨를도 없이 주먹이 날아와서 죽으라고 막 패는 거예요. 맞는 친구가, 동창생아 맞더라도 때리는 이유나 알고 맞자, 이렇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실컷 때려놓고 하는 말이, “내가 초등학교 때 공부 일등 했잖아, 너 알지?” “알지. 공부 잘했지.” “그때 나 퇴학당한 것, 알지?” “알지.” “공부 잘해서 장차 의사 된다고 했던 내가 왜 퇴학당한 줄 아나?” 그제야 맞은 사람이, “미안해.” “공부 잘한 내가 과학실에 불 안 지른 걸 뻔히 알면서도 내가 불 질렀다고 네가 고자질해서 퇴학당했잖아. 그때부터 인생 끝나서 의사 될 수 있는 머리를 갖고 있으면서 지금은 깡패 됐다. 네가 내 인생 조져 놨다. 내 인생 책임져라.” 해서 팬 거예요.
그래서 때리면서 하는 말이, 그때 내가 과학실에 불 안 질렀는데 네가 왜 내가 과학실에 불 질렀다고 거짓말했느냐고 물어보니까, 얻어맞은 친구가 하는 말이, 그 순이 있잖아. 같은 반의 순이가 불 내놓고, 여기서 중요합니다. 코코낫 과자 여섯 개 주면서 내가 불 지른 건 입 다물고 공부 일등 하는 걔가 불 질렀다고 대신 이야기하라고 해서 어릴 때 철이 없어서 코코낫 과자 여섯 개 먹고 거짓말해서 네가 퇴학당하고 그 다음부터 너는 인생 종쳤다. 드디어 내막이 드러나기 시작한 겁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 듣고 처음에는 때린 사람이 폭력적이고 나쁜 사람이라고 했는데 가만 들어보니 인생 시작하는 초반기에 일이 잘 안 됐지요. 억울하잖아요. 때릴 만하고 맞을 만하지요. 그런데 그 이야기에서 생각해보세요. 나는 공부 일등 한다. 공부 이런 식으로 하면 장차 의사 된다고 생각했던 그것 누가 선택한 겁니까? 본인이 계속 기대했지요. 본인이 희망한 거잖아요.
그런데 코코낫 과자 여섯 개가 개입할 줄 상상했습니까? 몰랐지요. 그게 지금 와서 걔를 때릴 게 아니고 뭐냐 하면 인간 자체가 전 세계 인간 자체가 이미 율법에 의해서 선택당한 처지란 것을 알아야 돼요. 모든 인생이. 인생이 원인분석하고 내가 그때 그런 일만 안 했으면, 쓸데없는 그런 생각하지 말고 후회하지 말고 모든 인생의 갈 길은 내가 정하거나 내가 결정할 게 아니란 사실을 대표로 이스라엘을 통해서 우리가 알아야 되는 거예요.
강의 초반에 뭐라고 했습니까? 나의 체면과 나의 위신과 나의 행복, 나의 건강, 그것 다 허구에요. 중요한 것은 이 세상은 과연 어떻게 흘러가는가? 그 진리에 관심 있어야 돼요. 내 체면, 위신, 명예, 행복, 내가 얼마나 돈을 버느냐? 그런데 관심두면 안 돼요. 도대체 이 세상은 뭐냐? 뭐긴 뭡니까? 누군가가 계시죠.
그럼 내 인생은 뭡니까? 나를 위한 인생은 없고 누군가가 있음을 그걸 찾아봐야 될 그러한 업무가 주어진 인생. 참. 그분을 알아야 나를 알아요. 그분부터 먼저 알아야 나를 안다고요. 사람이 아무리 살고 싶어도 늙어죽잖아요. 결국 아무리 오래 살아도 죽는 순간 되게 되면 오래 살았으니까 넉넉하다? 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구십까지 살아보세요. 아까워 죽어요. 오늘 오후에 죽는다는 사실이 나는 절통하고 분통해. 내가 백 살까지 살 수 있는데, 이런 식으로. 오래 산다고 사람이 넉넉해질 줄 압니까?
약속의 땅에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위반함으로서 그들을 처단할 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딱 한 가지입니다. 네가 땅에서 사는 자체가 기적인 줄 알아라. 살 수 없는 땅에 너는 지금 살아오고 있다. 살 수 없는 땅이에요. 내가 누구를 만나는 것도 기적이에요. 만날 수 없는 인간을 만나고 경험할 수 없는 걸 경험하고 내가 숨 쉬고 있는 것도 기적이고. 나를 죽이는 율법 앞에서 죽이라고 말하는 것도 기적이에요. 아직 살아 있으니까 그런 말 할 것 아니냐.
우리는 물질입니다. 나라는 물질의 의미는 나한테 찾지 마세요. 율법에서 찾아야 됩니다. 율법에서 나를 죽이고 그 죽인 율법이 나를 살리는 겁니다. 그게 율법 자체가 하나의 기호로서 우리를 물질로 만든 거예요. 우리 자신이 물질의 작품이에요.
따라서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계속 살려낸다는 말은 우리 안에 율법이 작용한다는 뜻이고 율법이 작용하게 되면 율법은 우리에게 뭐를 날마다 주느냐 하면 새로움을 우리에게 계속해서 부여합니다. 그 새로움은 어디서 나오는가? 10분 쉬고 해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