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200709b슥2장5절(로드킬)-이 근호 목사
안양20200709b슥2장5절(로드킬)-이 근호 목사
인간은 자기 거주지가 곧 성전이라고 이야기하는데 두 가지 의미를 거기다가 담겨있어요. 뭐냐 하면 나의 절대자 됨을 나의 거주지에서 확인할 수 있어요. 나의 거주지에서. 내가 나의 제단이 되는 겁니다. 나를 섬기는 거예요. 인간은. 이것이 일상의 종교화. 일상은 뭔가 종교라는 말은 뭔가 하면 항상 믿음으로 움직인다는 거예요. 믿음으로 움직인다. 어린애부터 노인네까지 한시도 믿지 않고 움직이는 그게 없어요. 전부 다 믿어요. 뭘 믿느냐 하면, 나를 믿어요. 나를 믿으니까 믿음의 대상이 나가 되고 믿음의 주인공도 내가 되고.
내가 된 것을 잘 확연하게 보여주는 것이 나만의 거주지가 돼요. 또는 나만의 공간. 내 방. 그 방에 꾸며 놓은 것은 뭐냐, 나를 위한 제단 꾸미기가 되는 겁니다. 나의 지성소가 되지요. 나의 지성소. 바로 나의 지성소가 되기 때문에 여기서 상상되고 있는 모든 생각되는 것은 그것은 바로 우상이 됩니다. 우상이란 말은 언약이 없는 신을 우상이라 합니다. 언약이 없는 신. 언약이 없는 신이 우상이 되는 거예요. 언약이라 하는 것은 이건 특수한 자에게 특수하게 주어지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언약이 없는 상태가 되잖아요.
언약이 없어도 나는 하나님을 믿겠다. 그게 우상입니다. 그러면 ‘언약이 오게 되면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것에다가 더 추가하면 되겠네.’ 하고 생각했던 것이 그게 안일하게 생각한 자가 누구냐 하면 야곱이었어요. 야곱은 아버지로부터 하나님의 축복이 약속이 왔다 하니까 아버지의 약속을 아들이니까 형보다 내가 따내겠다고 생각한 거예요. 언약과의 만남에 자신의 열성과 행함과 속임수가 가미가 될 수 있다고 본 겁니다. 야곱이. 그게 야곱이에요.
그런데 야곱이 로드킬 당해야 이게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야곱이 죽어야 돼요. 죽기 전에 먼저 야곱부터 시작해야 돼요. 시작을 야곱부터 시작해야 돼요. 그것 때문에 이 스가랴가 언제 주어졌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스라엘이 나라가 없을 때 주어지는 거예요. 나라도 없고, 성전도 없고, 진작 개코도 하나님과 접촉되는 것이 완전히 차단된 것, 불가능이죠. 불연속성이지요. 하늘과 땅이 완전히 이스라엘에서 완전히 끊어졌을 때 그게 기회가 되는 거예요.
주의 언약이 어떻게 부지런 떨면서 일하시는가, 우리가 놀면 신앙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니까 신앙이 없는 거잖아요. 내가 아무것도 안하면 신앙이 안 된다고 하는 자체가 줄을 잘못서고 있는 거예요. 줄을 잘못 받고 있는 거예요. 헛것을 지금 잡고 있고, 거기에 우리가 사기를 당한 겁니다. 노력해야 뭐라도 건진다고 여기는 그 주장에 잘못 건드린 거예요. 없는 거예요. 죄를 버리고 선을 택하는 게. 이게 실수라는 생각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사도행전 10장에 먹어라. 주께서 나를 테스트하는구나! 나의 이 때가 나의 얼마나 율법대로 사는 걸 보여 줄 절호의 찬스다. “안 먹습니다. 주님!” “사양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놀고 있네. 니가 지금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네. 헌집 다오. 새집 줄게. 두껍아! 두껍아! 이 두껍이 같은 인간아! 헌집 줘. 새집 줄게.” 그놈의 헌집에다가 우리의 모든 일심 자존심을 다 갖다가 거기다가 투자를 했어요. 내 일생의 운명을 다 걸어놔 가지고 거기다 다 투자한 거예요. 그러니까 도박장에서 모든 코인을 거기다가 다 부은 거예요. 내 헌집에다가. 다 실어 넣었어요. 이거 깨지면 나 자살한다. 이거 까지.
그렇게 집어넣었잖아요. 주님께서 그걸 몽땅 달래요. 그게 바로 야곱이 갔던 과정 속에 보여주지요. “야곱아! 니는 나한테 다 깨어져야 돼!” 깨어지고 난 뒤에 주어진 것은 뭐냐 하면 내가 하나님께 대적이 된다. 적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적한테는 일만의 자비나 그런 거 없지요. 적한테는 하나님의 공격만 있을 뿐이지 적한테 어떠한 배려도 없음을 알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적을, 나를 적을 만드신 그것이 바로 야곱은 뭐로 이해했느냐 하면 바로 언약으로 이해한 거예요. 언약의 절차로 이해한 거예요.
주님께서 친하게 지내는 것이 절차가 아니고 친하게 지내는 척했지요. 사실은 흉내 내기었고 실제로는 하나님을 이용해먹겠다는 야심이 들어있었던 것을 주께서는 놀랍게도 그걸 들추어내게 하셨어요. 나보다 더 센 자를 내가 이김으로서 비로소 나의 육의 한계를 들추어낸 거예요. 일부러 하나님은 야곱한테 짐으로 말미암아 “기껏 니가 노렸던 것이 이거였지? 이게 너의 다였어. 그래 져줄게. 니 하나님 이겼다고 이름 붙여줄게.” 하나님을 이겼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적대적 관계에 나는 살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겁니다.
적이 아니면 이기고 지고 라는 게 없잖아요. 하나님을 이겼다는 자체가 나는 내가 있는 그 위치와 위상이 이미 생명이 없는 생명나무가 없는 곳에서 나는 거기서 아등바등 살아보려고 그만큼 애를 썼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이 세상에 저주받는 인간의 그 대표자로서 언약을 통해서 나는 대표자로서 거기서 들춰진 거죠. “너, 나와! 이 저주 받아야 될 인간 모습 그대로 니가 보이게 되어있어.” 그런 야곱에게 주님께서 그런 한 인간의 한계를 보여준 야곱에게 주께서는 야곱을 다시 살려주잖아요. 브니엘이잖아요. 나는 죽었는데 살았다. 고 지명이 브니엘이에요. 브니엘이 뭐냐 하면 죽었다가 살아난 거예요.
그러면 이 브니엘은 뭐가 되느냐 하면, 브니엘은 야곱의 제단이 되는 겁니다. 야곱의 거주지가 되는 거예요. 거주지 있고, 야곱이 사는 것이 아니고 야곱이 가는 곳에 야곱의 거주지가 같이 보조적으로 따라 가는 겁니다. 하늘나라 있고, 예수님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가는 곳이 하늘나라에요. 예수님의 몸에서 하늘나라가 새롭게 만들어지는 겁니다. 늘 숨어있는 모습으로.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해가지고 이스라엘 이름으로 자기한테 그걸 자기 영역으로 받아줘 버리지요.
그러면 이것은 뭐냐, 하나님은 바로 하나님의 사자 이름의 희생을 주께서 받아준다. 그런데 그 희생은 반드시 희생되어야 될 대상자가 있을 게 아닙니까. 그게 바로 하나님이 지정한 선택한 언약의 백성, 이름이 야곱이라고 하는 또는 다른 말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이름의 백성을 다시 동반시켜서 하나님께서는 받아주는 거예요.
야곱을 받아준다는 것은 이스라엘을 받아주는 것이고, 이스라엘을 받아준다는 것은 없는 이스라엘을 있게 하게 하신 하나님 자신의 피, 희생의 피를 하나님이 다시 도로 거둬들이는 거예요. 하나님으로 시작한 일을 하나님이 도로 거둬들이면서 거기서 딸려 들어온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언약을 심어놓은, 언약을 새겨놓을 대상자가 뽑혀 나왔는데 그것이 바로 하늘나라의 경비요원들. 하나님의 백성들이지요. 그걸 시온의 딸이라고 합니다.
스가랴2장 10절에 보게 되면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와서 네 가운데에 머물 것임이라”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라. 라고 되어있지요. 왜 시온의 아들이 아니고 딸이냐, 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논리는 좀 복잡해요. 복잡한데, 이렇게 생각하면 간단해요. 시온이라 하는 것은 시편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시온은 하늘나라로 보시면 됩니다. 이걸 왜 하늘나라로 보느냐 하면 다윗에게 주신 언약. 다윗언약에 결정체, 완성체로서 시온이 라는 것이 성립됩니다. 다윗언약이 성취되지 않으면 시온은 안돼요. 시온은 되지를 않습니다. 만약에 다윗언약을 다윗의 후손 혈통에 있는 이스라엘이 지키려고 한다면 이 시온은 어떤 시온이냐 하면 파괴될 수 있는 시온. 이 땅에서 파괴된다는 말은 이 땅에 있는 불신자나 시온이나 동일한 성질을 갖고 있다. 공동체를 갖고 있기 때문에 같이 섞어 넣어버린 거예요. 갈아서. 이쪽에 없게, 하늘나라에 없게, 땅에 그냥 같은 편이야! 하고 집어넣는 겁니다.
이 시온이 천장이 구멍 뚫릴 수 있겠어요? 없겠어요? 진짜 시온은 구멍 뚫릴 수 없잖아요. 그런데 인간들이 시온을 고대하고, 기대하고, 기획하고, 만든다면 이건 구멍 뚫리는 거예요. 시온이 구멍 뚫린 영화가 있는데 그게 무슨 영화냐 하면 에요. 3번째 시온이 구멍 뚫립니다. 매트릭스 영화 아십니까. 컴퓨터 정보가 실체가 되어서 인간세계를 지배하는 세계. 인공지능 자체가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가지고 인공지능을 만든 인간을 지배하는 영화 매트릭스에요. 매트릭스 평한 것만 해도 수천 개 나와 있어요. 그만큼 어려워요. 매트릭스 나온 영화는 삼위일체 용어들이 나와요. 주인공은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고. 삼위일체라는 이름도 있고. 성부, 성자, 성령의 활동을 이렇게 이야기한 겁니다.
야곱이 있다면 그 야곱을 천사가 와서 관통했다고 보면 돼요. 하나님께서 얍복강에 야곱이 있으면 그냥 쉬도록 놔두면 되는데 괜히 정체를 감추고 찾아온 거죠. 빛 조명을 저 뒤쪽으로 하고 어떤 사람이 걸어오는데 조명 시설이 그 사람 앞에 있는 게 아니고 뒤쪽에 있다면 그 등짝은 환하게 밝겠지요. 조명이 비춰서. 밝은 만큼 상대적으로 앞에 누군지가 정체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시커멓게 되어버려요. 드라마나 영화 촬영 기법이 그런 게 있지요.
뭔가 다가오는데 가까이와도 그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어. 분명히 움직이고 나한테 접근한다는 건 아는데 모르는 거예요. 그러니 하나님의 모습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오게 한 거예요. 접근하여 온 거예요. 그러니 이 말은 뭐냐 하면 어려운 말로 야곱은 본인이 본인에 대해서 안다고 생각했잖아요. 안다고 생각하는데 미지의 타자가 등장하면 타인이 등장하게 되면 자신의 됨을 그 타자에게 모든 걸 퍼붓게 되어있어요. 그러면 그 사람이 나한테 당한 그 모습은 나의 숨겨진 나의 내재적인 모습이 타인에게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계기가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주께서 이웃을 만나게 하는 거예요. 사람을 만나게 하는 거예요. 혼자 있을 때는 다 본인이 천사들이에요. 행동도 참 조심히 하는데. 그런데 우연히 길을 간다든지 또는 직장에서나 또는 거리에서나 모임에서나 누구하나 말 잘못했다. 그러면 막 그 사람한테 퍼붓지요. 막 퍼 부우면 그 사람이 당황하기도 하고 막 반박 일어나겠지요. 그러면 그 사람 등짝 뒤에 조명이 비치고 그 사람이 어떤 표정을 지을 때 그 표정을 유발한 주인공이 누굽니까? 나잖아요. 내가 퍼부우니까 그 사람은 얼굴이 일구러지면서 반항하고 반발했잖아요. 그 사람의 변화가 나로 인한 변화다 말이죠. 그러면 내 요소가 그 사람한테 결합되어서 등장하는 거예요.
장사하시는 분 잘 알잖아요. 아이구, 이쁘십니다. 하면 갑자기 얼굴이 환해져가지고 한 개 살 거 두 개 사잖아요. 그게 나로 인한 요소라니까요. 내가 유발자에요. 인간은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계기로서 계속해서 누구를 만나고 경우를 당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지금 아브라함 경우도 그렇고, 야곱도 그렇고요. 누구를 만나느냐, 천사를 만난다고요. 천사는 범주 외에요. 천사는 내가 다룰 수 있는 범주 밖이라 말이지요. 나의 영역에 내가 있다면 다른 사람 만나서 구축된 자아성이 이 영역 바깥에 어떤 인물, 조명만 뒤에서 비추지만 얼굴은 시커멓게 누군지 모릅니다. 나를 달려오지요.
이렇게 올 때, 만약에 이 분이 나에게 무슨 언급을 한다. 언급이란 말 알지요. 말을 어떻게 주는 것. 언급을 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나에요. 이것은 하나님이 보시는 나 모습입니다. 신약에서는 이 분이 뭘 앞장세우느냐 하면 십자가를 앞장세우고 오지요. 십자가를 앞장세워서.
십자가에서 앞장세우게 되면 여기에 십자가는 두 종류가 등장해요. 옆에 십자가 또 있어요. 어느 십자가인지 모르겠지만, 만약에 이쪽에 강도1, 강도2가 있다면 이쪽의 강도1은 예수님에 의해서 내가 알던 강도의 내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받기로 되어있는 주님을 증거 하기로 되어있는 주님의 낙원을 함께 공유해야 될 대상으로 본다는 사실을 본인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알아버렸습니다.
이것은 내가 평소에 내가 알고 있는 걸 믿는 믿음이 아니고 내가 아는 믿음을 박살내면서 차고 들어온 낯선 믿음이 나한테 꽂혀버린 거예요. 그래서 뻔뻔스럽게도 강도인 주제에 뭐라고 합니까? 주님 나라에 들어가게 해 달라. 아이~ 참, 뻔뻔스러움 100점. 옆에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여전히 믿음이 있는데 뭘 믿느냐 하면 내가 이 땅에서 천사 만나기 전에 다시 말해서 초월자 만나기 전에 내가 그렇고 그런 인간들을 만나면서 구축한 그 믿음의 소유자. 나름대로 신앙인이지요. 나를 믿는 신앙인으로서 강력합니다.
뭐라고 요구하느냐 하면 “당신이 정말 초월자라면 당장 나를 이 십자가에서 풀어주면 믿어줄게.” 이리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불신자의 강도의 특징은 뭐냐 하면 내가 믿는 내용과 내가 그리는 천국과 끊어지지 않고 연결되어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참, 이거 보면 오늘날 대부분의 교인들이 지금 지옥 간다는 것을 티를 팍팍 내고 있어요.
내가 스스로 부인하지 못하고 나는 잘난 존재로 여겼던 그 잘난 존재에 입각해서 연속적인 이미지가 뭐냐 하면 천국이지요. 내가 천국 안가면 누가 천국 가. 이리 되는 거예요. 계속 가능성, 가능성으로 유지되는 겁니다. 왜 그렇게 쓰느냐 하면 나도 살고 너도 살고가 아니고, 나도 살고 나도 또 살고. 말로는 나도 좋고 하나님도 좋잖아요. 이렇게 하잖아요. 자기를 안 좋게 여기지 않으려고 하는 거예요. 나도 좋고, 내가 예수님 믿으면 예수님도 좋고 나도 좋지요. 이런 식으로 교회 다니는 거예요. 좋은 나는 항상 좋아져야 된다고 지금 우기고 있는 겁니다. 그걸 믿는 거예요. 그게 바로 그 사람 거주지가 자기의 종교를 섬기는 제단이 되는 겁니다. 지성소가 되는 겁니다. 믿음이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이걸 불타게 만들었어요. 성전을 없애버렸습니다. 누가 없앴느냐, 바벨론이 없앤 게 아닙니다. 앗수르가 없앤 게 아니고 하나님이 자기 집을 방화한 거예요. 방화범이 본인의 집을 본인을 불살라버렸어요. 그리고 난 뒤에 불 탄 자국에서 나온 게 뭐냐, 시온입니다. 시온. 불타지 않으면 나오지 않는 것이 시온이고, 천사가 말하는 예루살렘이었어요. 그래서 불탔기 때문에 측량을 다시 한 거예요. 측량을.
에스겔에 보면 성전 측량 나오지요. 그걸 다시 한 이유가 성전이 없기 때문이에요. 없는 이유는 이스라엘 자기 백성이 언약을 위반했기 때문에 인간에 의해서 위반당할 언약은 더는 내가 제공하지 않는다. 내가 제공하는 것은 인간이 아무리 닦달내고 협박, 공갈치고, 무순다 할지라도 부서지지 않고 영원한 성전. 영원한 제단은 내가 장차올 메시아와 더불어서 새로 주어지는 거예요. 메시아와 더불어서.
그러니까 다윗언약은 다윗이 지켜야 되는데 못 지켰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망했고요. 새로 올 성전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는데 다윗의 자손인데, 다윗의 자손으로 와서 성전을 세울 때, 이 다윗의 혈통이나 노선은 이거 이야기할 때 항상 내가 철도선을 이야기해요. 철로가 죽 있는데, 사람들은 이 기차를 타고 가면서 앞이 막혔고 지옥으로 통한다는 사실을 봐도 안 보여요.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 하면 마태복음1장 족보에 보면 족보에서 다른 족보로 갈라지게 만듭니다. 족보에서 다른 족보로. 이게 마태복음1장의 족보거든요. 이방여인을 통해서, 이방여인을 통해서라는 것은 남편이 누구냐 하면 이방인이라는 뜻이에요. 남편이 이방인이에요. 이방여인의 남편인데. 남자있고, 여자 있는 순서가 아니고. 지금 시온의 딸 설명합니다.
이 지상에서는 여자로만 작용해요. 남편은 어디 있느냐, 하늘나라에 계셔요. 숨어있어요. 그래서 시온의 딸이에요. 시온이 생산한 딸. 오직 딸로만 이 세상에 등장하고 여자로만 등장하지 남자로서는 없다는 겁니다. 남자 되던 여자 되던 구원받은 사람은 여성. 여성화에요. 남편은 하늘에 있으니까. 그러니까 따라갈 때 이건 어디 가느냐, 아내가 어디 가야 되겠어요? 남편 따라 가야지요. 남편 있는 곳에 가야지요.
그러니까 남편이 먼저 하늘나라에 가있고, 하나님 우편에 가있고, 여자는 여보! 하면서 여보 하던지 아버지 하던지 간에 남편 있는 곳으로 가야지요. 이게 성령의 철로 깔려가지고 올라가는 겁니다. 올라가면서 이 땅의 것과 이 사이에 얼마나 격차가 많은가를 생생하게 증거 하는 거예요. 격차가 벌어졌다. 가능성과 불가능성은 절대로 이게 화합되지 않고 섞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 언약의 원칙은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지요. 아무리 이스마엘이 착하고 이쁘게 생겨도 주께서는 땡! 탈락!이에요. 혈에서 나왔다는 이유 때문에 그냥 땡! 탈락이에요. 어떤 사람이 이삭이라는 말은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이스마엘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스마엘 이라는 빵을 한 조각 있는 빵을 두 조각 내 가지고 이삭이 하늘 약속이 없어도 여기에 집어넣어서 샌드위치 만드는 거예요. 이 속 알맹이가 주도권을 쥐고요.
그래서 성도라 하는 것은 죽어서 천당 가는 게 아니에요. 이미 천국에 오지 아니하면 천국 못갑니다. 이미 천국의 요소가 나와야 돼요. 갈라디아서 이거 여러분들이 아시지만, 요거는 중요하기 때문에 잊지 말라고 한 번 찾아봅시다. 6장8절,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지요. 요 본문을 가지고 백종원의 골목식당을 찾아가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부지런 떨면서 장사하는 그냥 평범한 장사하는 사람들, 특이한 것도 없고 그냥 평범해요. 이 말씀 딱 던져보세요. 한 번 비교해보라는 말이지요. “장사 왜 하십니까?” “살기위해서 했습니다.” “본인이 썪어질 것을 반복한다는 생각을 못 듭니까?” “다들 이렇게 살아가는데요. 다들.” 다들 그렇게 살아가거든요. 육을 위해서 계속 육과 자기 가족과 자식을 위해서 그렇게 살잖아요. 뭘 더 원합니까? 이렇게 평범하게 사는 게 전부지. 이게 전부라는 거예요. 이게.
그런데 그게 야곱에 의하면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 믿고 장사하지 말까요. 아니요. 장사를 하시되 조미료 팍팍 치시고 하세요. 하시는데 겹치는 부분이 있어야 돼요. 천국의 요소 또는 영적 요소. 천국과 지옥은 어떤 기준에 있는가를 그것이 겹치는 요소가 일어나야 되는 겁니다.
그게 어떻게 일어나느냐 하면 오늘 스가랴 2장 본문을 하게 되면 예루살렘을 이제 건립을 하는 겁니다. 천사가 건립을 하는 거죠. 그 당시는 구약이기 때문에 토지를 벗어나지 않아요. 모든 용어가 개념이 땅은 안 벗어나고 땅 중심으로 이렇게 해요. 땅에다가 예루살렘을 짓고 성전을 짓습니다. 어떤 요소가 나오느냐 하면 이 예루살렘이 그냥 예루살렘이 되어버리면 이건 아무 영적인 요소가 나오지가 않아요. 그런데 여기에 뭐가 등장합니까? 이방나라한테 포위당하게 만듭니다. 이방나라한테.
오늘날 성도의 삶이 딱 그겁니다. 그러면 졸지에 예루살렘은 이질적인 것이 돼요. 상당히 낯설지요. 그리고 예루살렘 본인이 본인에 대해서 낯설어요. “주님, 내 인생 전에처럼 물어주세요.” 돌아갈 수 없어요. “전에처럼 살게 해주세요. 예수 몰랐던 시절. 교회 안다녔던 시절. 남들처럼 식당해가지고 그냥 칼국수나 해초 맛 전혀 나지 않는 해물 맛 전혀 나지 않는 칠천 원이나 받아먹는 그런 식당이나 해가지고 그냥 하루, 하루 그냥 남들 사는 것처럼 그렇게 살게 해주세요.” 라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예수님하고 같이 친하게 지냈던 마리아가 시집가려고 모아났던 평생의 향수를 옛날에는 향수가 재산이었거든요. 아가씨에게는 재산이었어요. 그거 팔아서 시집 지참금으로 삼고 결혼 준비금으로 삼고 그걸 한꺼번에 예수님 발 앞에 다 던져버려요. 요한복음12장에 나와요. 예수님의 죽음이 내 삶보다 바꿀만한 가치가 있다는 거예요. 이 말을 달리하면 내 안에 어떤 귀한 것도 예수님의 생명나무 보다는 덜 가치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향수는 그동안 내가 가치 있다는 것을 부지런히 모았는데 이 향수는 내가 가치 있는 게 아니고 주님이 더 가치 있음에 쓰이라고 그걸 갔다 소모한 거죠. 이것은 곧 향수를 소모한 것이 아니고 본인을 소모한 거예요. 주님 앞에. “주님이여, 주님의 향수가 되어서 주님 말씀할 때마다 그저 거기서 나오는 비말이 되게 하옵소서.” 재채기 나오는 침 튀김이 되게 하옵소서. 요새 비말도 새로운 용어 나오지요. 비말(날아 흩어지거나 튀어 오르는 물방울)맞지요. 주께서 할 때마다 하나의 작은 물방울로 족하게 하옵소서. 그런 태도로 가지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걸 알고 내가 이 마리아를 앞으로 니가 복음 전하면 제2, 제3, 제4, 제5의 무수한 n의 마리아가 계속해서 나오도록 나는 일할 거야. 왜냐하면 예수님의 장례식에서 나온 성령이기 때문에. 주님이 죽으셔야 나올 성령을 받는 사람들. 죽으셨다는 것. 죽으심의 의미를 품고 그 죽으심을 같이 중첩해서 포개지는 인간들을 주께서는 바이러스처럼 비말로 전부다 퍼트려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표현을 이렇게 했어요. 이 여인이 하는 것이 앞으로 복음 전하는 모든 일에 이 여인의 요소가 다 가미되어 있을 것이다. 그 여자는 나와 더불어 같이 죽었다. 내 장례식에 향수병으로 참여한 여자가 바로 마리아라는 여자에요. 이것은 흉내 낼 수가 없어요. 흉내 내서는 안 되고 그럴 필요도 없어요. 그러면 이 작업을 주께서 필히 성도인 우리에게도 하는데 그럼 주께서는 우리한테 어떻게 작용하는가, 너희 집에 향수병 있나? 샤넬 뭐 있나? 이리 찾지 않아요. 천사 요원 둘이 와가지고 잠시 검문 있겠습니다. 향수병 찾고, 발 앞에 던지고 이런 거 안 해요.
뭐하느냐 자신의 위상과 자리를 우리 안에 마련해 주십니다. 우리 안에. 우리 안에 마련해 주는데 요 우리 안이 뭐냐 하면 내가 가장 나다움을 붙잡게 되는 그 현장에다가 성령을 통해서 고 해필 그 자리를 찾아서 주님의 새로운 위상과 자리를 거기다가 심어 넣는 거예요. 요걸 네 자로 뭐라고 하느냐, 임플란트라고 하는 겁니다. 임플란트.
기존의 이빨 뿌리까지 뽑아버리고 거기다가 다른 뼈를 이식해가지고 굳어놓고 거기다가 가짜 이빨을 탁 꽂아서 얹어놓으면 되거든요. 얹어서 조이면 되잖아요. 자리를 내 자리가 아닙니다. 주님이 거할 자리를 우리 안에 박아 넣은 거예요. 박아 넣고 미국가든지 소련가든지 러시아가든지 북한가든지 관계없이 그 임플란트는 계속 그 자리에 갖고 있는 거예요. 이게 예수님의 시.공간이다 말이죠. 함께 있는 거예요. 내 안에 주님 있는 거예요.
그걸 제가 강남강의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박신양의 사랑이지요. “내 안에 니 있다!” 이 말은 니 안에 너 없다는 뜻이겠지요. 니 내 안에 너 있다. 니가 하는 일이 아니고 니가 부지런히 식당일 해도 너의 부지런함이 아니고 나의 부지런이에요. 식당 하라고 인도했고 부지런히 칼국수 팔라고 주께서 부추겨서 그 일을 하게 하신 거예요. 노는 것도 주의 일입니다. 아픈 것도 주의 일이고. 어쨌든 간에 더 이상 나다움을 끄집어낼 최종의 그 자리가 강탈당했어요. 빼앗겨버렸어요. 전에는 내 자리였었는데. 전에는.
주님 자리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면 이걸 한 번 보세요. 아까 예루살렘 바깥에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이방나라 있다고 했지요. 요걸 개인화시켜봅시다. 내 자리가 있었는데 내가 내 제단이 있었는데 내 영광의 내 제단의 자리를 주께서 침노해가지고 그걸 점령을 했고 그것을 성소 예루살렘으로 만들어버렸지요. 그러면 이 예루살렘이 내 속에 있는 예루살렘 작은 나의 예루살렘이 기능을 하려면 바깥에 있는 나의 성질은 뭐가 있느냐, 이방 나라 성질을 그대로 발휘해야 되지요.
말로만 주님 앞에 원망하고 닦달내고, 원망하는 방법은 기도지요. 기도하는 척하면서 원망하는 거예요. “주여, 이럴 수는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짜증내고, 울고불고 또 한탄하고, 벌벌 떨고 무서워하고. 이방 나라를 또 이방나라를 포위해가지고 본인이 견딜 수 없고 어떻게 해결할 길이 없어요. 그러면 닦달 내는 것은 뭐냐 하면 주님 앞에 원망하지요. 원망할 수밖에 없어요.
“주님은 너무 내 기도를 들어주지 않습니다. 나는 혼자 바쁜데 주님은 그냥 노십니다.” 하는데 주님은 안 놀았어요. 주님의 주님 됨을 불가능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래야 천국과 지옥이 기준이 되니까요. 이 사람처럼 되지 않으면 지옥가기 때문에. 지옥과 천국의 기준 노릇한다고 우리로 하여금 늘 어제 수요 예배에서 이야기했지만, 늘 실패의 자체를 목표로 삼는 거예요. 따지고 보면 그쯤은 배짱 편한 일이 없어요.
사람이 사는 게 불편하고 힘든 이유는 성공이라는 신화의 거기에 그 미신에 빠져서 그래요. 성공할 이유가 없는데 성공하는 이유는 내 안에 내가 있기 때문에 내 안이 나를 자꾸 조종해요. 그 안에 내 안에 옛날에 누가 있었느냐 악마가 그냥 나 혼자 있었던 장소가 아니고 마귀가 “니는 절대자 되어야 돼!” 자꾸 나를 격려하면서 나를 나의 지성소를 마귀가 만들었어요. 이게 같이 살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어떤 경우라도 자기 오기만 챙기고 살았던 겁니다. 그런데 그 악마의 자리를 주님께서 차지해서 침투해가지고 그걸 점령을 해버린 겁니다. 야곱이 이스라엘된 것처럼. 임플란트가 된 거죠. 임플란트 했는데 갑자기 뿌리부터 아프기 시작하네. 임플란트 했는데 아파. 뭘 놓쳤느냐 하면, 주님의 희생을 노치고 주님의 용서와 주님의 거저주시는 사랑을 다 까먹어버렸어요. 희생과 용서와 사랑을.
그래서 주님께서 이걸 회생하는 방법은 바로 이방 민족과 잘 통하는, 세상과 잘 통하는 나의 본성을 그대로 내둠으로 말미암아 그들로 하여금 이방 나라한테 처절하게 실망스러운 실망당하고 정말 진짜 사기당하는 일을 벌이게 만들어요. 옛날처럼 내 자존심 챙기다가 사기 당하거든요. 내 자존심 때문에 사기 당하거든요. 돈 뺏기고, 남한테 욕 얻어먹고, 그런 나의 의 챙기다가 그렇게 혼나게 만들어요. 이 세상에서. 이 세상은 꼭 있어야 돼요. 내가 혼나야 다시 임플란트 쪽을 보게 되기 때문에, 기회가 되기 때문에 세상에 있다는 것을 너무 서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2장 4절 봅시다. “예루살렘에 사람이 거하리니 그 가운데 사람과 육축이 많으므로 성곽 없는 촌락과 같을 것이라.” 성곽 없는 촌락이라는 말은 뭐냐 하면 사람이 너무 많아서 이제 성 넘어 까지 민가가 퍼졌다는 겁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주께서 충분하게 만족시켜 준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불이 성체가 되어가지고 불성곽이니까 불이 지켜주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지켜주니까 그 에덴동산의 동쪽처럼 접근을 못하고 지켜주는 거예요. 6절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를 하늘 사방에 바람 같이 흩어지게 하였거니와” 자, 이게 아까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언약을 지키는데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인간적인 방법으로 언약을 지키니까 주께서는 성전을 불태워버리고 거기에 약속의 땅에 있는 사람들 전부 다 쫓아내버렸어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약속의 땅이라는 것은 아까 이야기한 자리이고, 위상입니다. 약속이 위상이에요. 자리 위상. 여기에는 누가 계셔야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 주님의 이름이 계시는 곳이 약속의 땅이에요. 그렇다면 주의 이름과 공통점을 유지하지 않으면 이 땅에 살수가 없어요.
이방민족들이 열 족속이 쫓겨난 이유는 이 약속의 여호와 하나님과 공통점이 없기 때문에 추방했거든요. 그러면 약속의 땅이 이스라엘이 있고, 갈리리 사해바다가 있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요단강 건너가서 살게 되면 항상 이건 뭐냐, 주님과의 공통점을 드러낼 책임이 있어야 됩니다. 이거 안 드러내면 주변에 누가 있느냐 하면 이방 나라들이 있어요. 제일 위에서부터 보면 에돔, 암몬, 모압, 아람, 블레셋, 이 전체가 이쪽은 이방 해양민족. 이 전체가 딱 세파트가 공격 채비를 차리고 달려들 준비를 하는 거예요.
이 세파트 개들이 울부짖는 개들이 결국은 뭐냐, 아까 이야기한 우리 임플란트 하고 있는 주님의 계시는 그곳을 하고 있는 우리의 육적인 모습을 그대로 지리적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면 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대해서 고맙게 여기면, 고맙게 여긴다는 말은 희생에 대해서 희생답게 이해한다고 있다는 거예요.
희생이 뭡니까? 나는 못났는데 희생 덕분에 누린다. 이게 희생이잖아요. 이게 천국이고. 그래서 성도는 미리 천국에 와있어야 돼요. 죽어서 가면 안 되고 미리 천국이 중첩돼 와있어야 돼요. 고마움이 있어야 돼요. 고마움이. 고마움이라는 것은 그 앞에서 나의 의, 나의 잘남은 용납된다? 안 된다? 일체 허용이 안돼요. 아~ 잘났는데 뭘 고마워요? 잘났으면 나한테 고마워야지. 내 열심에 고마워해야지요. 자기가 못났기 때문에 고맙소. 가 되잖아요. 못났기 때문에. 잘났는데 무슨 고맙소. 고맙소. 안되잖아요. 고맙소가. 김우중이가 그런다 말이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갑자기 이들이 하나님과 공통적으로 가져야 될 것이 이 사람들이 이방민족과 공통적으로 가져야 될 것이 그 사람들이 이방민족과 공통성을 다루는 순간 이방민족이 “야! 저기 우리 거다.” 이게 공통점이 뭐냐 하면 이방민족들은 힘과 말과 전차와 칼과 이런 것들로 자기를 지키는 그런 공통점이에요. 숫자 이런 걸로. 와락 달려들어서 접수하게 만들었지요.
접수하게 만들었는데, 그러면 목사님! 하나님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은 선지자 안에 있지요. 하나님의 성신으로. 모든 것을 접수했는데 갑자기 미친 사람 기드온 같은 사람이 나타나 가지고 삼백명 가지고 몇 명을 이겼느냐 하면 13만5천명인가 그럴 거예요. 사사기 8장 10절에 보면, “이 때에 세바와 살문나가 갈골에 있는데 동방 사람의 모든 군대 중에 칼 든 자 십이만 명이 죽었고 그 남은 만 오천 명 가량은 그들을 따라와서 거기에 있더라” 13만5천명을 몇 명이 이겼어요? 이만이천도 많다 해서 보내버리고요, 달랑 최고 숫자 삼백명 딱 했어요. 삼백명이 무기가 뭐였습니까? 세상적인 무기는 없어요. 사사기7장에 보면 횃불하고 나팔을 불었잖아요. 삼백명이 나팔을 불 때 무기 어디 있습니까? 무기는 적군들이 자기들 무기가 있었지요.
적군을 죽이는데 적군들이 서로 갖고 있는 칼로서 서로 찔러 죽인 거예요. 그걸 가지고 자멸이라 해요. 자멸. 자멸하는 거예요. 이 세상 나라 모든 이 세상 나라는 자멸하는 과정에 있도록 지금도 주께서는 부지런히 그들에게 칼을 쥐어주는 서비스를 해주고 있어요. 니 죽으라고. 니가 니 죽이라고 카을 하나 다 주는 거예요. 왜? 세상은 힘을 의지하기 때문에. 펀드 의지하고, 은행 금융의지하고, 부동산 의지하고, 강남에 땅 집 사놓은 거 의지하고, 땅 막 집값 오르게 만드는 거예요.
극히 평범해 보이고 아, 사람 사는 게 그렇지 뭐, 별거 있어. 라고 만드는 거. 그거 배후에 주님의 부지런함이 있었다는 사실을 그들은 몰라요. 망하라고 주는 거예요. 망하라고. 물론 신자라도 있지요. 말은 안하지만 강남에 집 두 채는 갖고 있을 거예요. 지금. 한 채 빨리 요지 제일 똘똘한 거 한 채 파세요. 강남에 집 있을 거예요. 있더라도 중첩되거든요. 내 것이 아니고 주의 것이다. 주의 것이라도 있으면 좋겠어.
이게 내 것이 아니고 이게 바로 이방나라와 통하는 요소를 내가 갖고 있어줘야 주의 임플란트가 사는 거예요. 왜 용서가 되어야 되는지, 왜 내가 죄인인지, 왜 내가 주님의 희생보다도 세상에 끌리는 몸으로 태어났는지, 죄인의 몸으로 오셔서 천국은 딴 데 있는 게 아니고 죄인의 몸 안에 있는 거예요. 죄인이면서도 죄인을 안다는 게 성도입니다.
다른 사람은 그걸 모르는데, 그게 천사를 만난 이질적 요소에요. 이질적인 요소. 아들인데 내가 남자인데, 내가 딸이래. 시온의 딸이래. 이건 뭐냐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중앙에 있고 나를 포함해서 세상 모든 것이 그 안에 이방적인 요소, 주님을 핍박하는 요소로서 활동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천국과 지옥을 갈음하는 기준이 돼요.
왜 그렇게 설명할 수 있느냐, 스가랴에 나오는 말씀 그대로 예수님에게 다 적용되기 때문에. 예수님의 공생애에 다 여기 결합이 되어있어요. 예수님은 이 코스대로 가요. 그래서 성전을 헐어버리라고 하는 겁니다. 물론 헐어버리란다고, “예, 헐겠습니다.” 하고 도끼 들고 망치 들고 부수지 않아요. 헐어버려라 하는 순간에 그들은 뭘 의지하느냐 어떤 특정지점에 있는 예루살렘에 있는 헤롯성전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그게 모든 희망을 거기다가 걸었음을 그 본 모습을 주님 앞에 그대로 노출하지요.
이게 있으면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증겁니다. 이 예수야! 니나 건저라. 본 모습 드러낸 거예요. 그런 모습을 드러낼 때 그게 죄가 되고 죄가 드러내면서 예수님이 죽는 이유는 인간의 죄 때문이다. 이리 되는 거예요. 인간이 하나의 공통점으로 단결해서 살려고 하는 게 그게 죄라는 거예요. 이미 너희는 죽어있는데 이 세상에 자기가 죽어있다는 걸 누가 알리요. 이런 식으로 예수님은 홀로 가신 겁니다.
제가 강남강의에서 뼈 발라내는 이야기했지요. 우리도 덕지 덕지 세상 것으로 가득 있는데 주께서는 뭐냐 우리 안에 피 있음을, 살과 피가 있어야 영생을 얻기 때문에, 살과 피가 이미 있기에 그것도 그냥 살이 아니고 피가 아니고 부지런을 떠시는 피와 살이 있기에 우리는 우리가 세상과의 공통점 자체가 주님을 죽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겁니다.
그 기능을 스가랴에서는 예수님이 스가랴가 예수님이 하는 게 아니고 스가랴와 천사들이 합세해서 하는 겁니다. 8절에 봅시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를 노략할 열국으로 영광을 위하여” 이 말은 너희를 노략할, 노략 당하게 만들었어요. 하나님께서 일부러 유대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이 망하게 만들어 놓고 너희에게 침노해서 너희를 뺏은 그 민족 있지. 나는 그 민족의 침략행위로 내가 이 하나님의 영광 받겠다. 이리 나온 거예요. 작전이에요. 그런 작전이에요. 하나님한테 다 계획이 있었어요.
이스라엘은 그 가운데 큰 괴로움을 겪지만. 옛날에는 이게 땅이었어요. 요새도 마찬가지지만, 땅이 없으면요, 사람은 노예에요. 땅 없는 사람은 무조건 노예입니다. 땅이 없으면 땅을 내가 노동의 대가로 그 사람의 노동을 지불해야 그 사람이 나에게 잠 잘 수 있는 거처라도 제공하게 되어있어요.
이걸 약간 어려운 말인데요, 노동력을 파는 것. 이건 산업혁명 이후입니다. 노동력을 파는 것이 아니고 노동자를 팔지요. 나를 팔아요. 산업이후에 노동력을 판다고 되어있어요. 노동력을. 노동력을 상품으로 내세운다고 하는데 이게 자본가에게 노동력을 상품으로 파는 거예요. 시장에 내어놓는 거예요. 자기 영혼을 파는 게 아니고 나는 무슨 이런 재주가 있습니다. 살 사람은 사세요. 아침에 인력시장에 보면 나와 있지요. 나는 대패 잘합니다. 나는 목수 잘합니다. 이거 파는 거예요.
이것이 생각하는 그런 정상적인 경제활동이다. 라고 그 당시에 절대군주나 국가에서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자본이 늘어지니까 이 상품화된 이 상품이 노동력 시장에서 상품이 단가가 떨어지기 시작한 거예요. 떨어지면서 노동력과 가치가 떨어지게 되면 결국은 옛날하고 다를 바 없이 뭐냐 하면 이건 노동자 자체가 팔려나가는 겁니다.
8시간을 하고 나머지 시간은 같이 단란하게 뭐 가족끼리 카드놀이 한다. 이런 게 아니고 단가가 떨어지게 되면 식구들하고 같이 단란하게 저녁식사나 카드놀이나 TV시청할 시간조차 없는 거예요. 그 시간 찾다가는 당신 말고 나 다른 사람 쓸래. 야근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당신 나오지 마세요. 그 사람 쓸래. 이리되면 끝나는 거예요.
그러니 가정에서 이걸 여자들이 주로 할 수 있지만, 주로 결혼한 사람은 누가 하느냐, 남자들이 해요. 남자들이 해가지고 영혼 다 혼났어요. 다 뺏겼어요. 스트레스 막 받는 거예요. 그래서 집에 와가지고 스트레스 좀 풀려고 잘난 체 하면 이건 또 마누라가 바가지를 긁으니까 남자는 이 현대의 남자는 완전히 양쪽으로 납작하게 됐어요. 어디 숨 쉴 곳이 없어요. 숨 쉴 곳이.
내 가정은 노래 부르면서 편히 쉬려고 왔는데 쉬는 곳이 아니고 노동력을 또 팔아야 돼. 니만 일하냐 나도 일했다. 이런 식으로 나오니까. 애 좀 건드려가지고 자기 스트레스 풀려고 하니까 애는 문 잠가 버리고 들어가 버렸어. 자기 지성소 만들어버리고.
도대체 이 가정이 이 자본 때문에 망해져 버렸어. 자본 때문에 망했어요. 그래서 이익 남는 거 좀 나눠주자. 이게 사회주의 아닙니까. 이게 사회주의거든요. 국가는 소용없어요. 돈 가진 게 최고입니다. 그게 바로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그렇게 만들었어요. 모든 게 다 상품이에요. 영혼까지 안 팔린 게 없어요. 요한계시록17장에 보면.
그게 단일체계에요. 단일체계. 다시 말해서 인간세계는 어떤 것도 못 빠져나온다. 그런데 이미 성도는 스가랴 같은 성도는 벌써 빠져나왔는데. 빠져나왔다고 하니까 주위에서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께서 그걸 끊어버리고 기름 부은 자 메시아와 끊어보자. 하려고 설치는데 이런 부지런함을 하나님께서 악마한테 부여해서 악마가 부지런히 이 천국과 지옥에 기준 되는 성도에게 공격하는 쪽으로 모든 것을 움직이지요.
모든 사람이 여기 동원하는데 니는 뭐냐, 이리 나오는 거죠. 그럼 우리는 뭡니까? “나는 예수 믿기 때문에 그런 소리하지 마세요. 나도 몰라.” 끝나는 거예요. “나도 몰라. 나도 너희들이 협박과 공갈에 이상하게 그게 겁이 안 나는 이유를 나는 몰라.” 베드로처럼 빌라고 하자. 비는 것도 없어. 그냥 죽여. 이리 나오는 거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심어놓은 새로운 예루살렘, 시온의 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는지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는 일로 통해서 그대로 우리에게 반복해서 심어놓고 반복하는 그러한 부지런 때문인 것을 저희는 알게 되었습니다. 나의 부지런함 가지고 짜증내지 말고 주께서 더 부지런함으로 우리로 하여금 천국의 증인되게 했다는 것을 감사히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