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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강의20200717b 마가복음15장 21-23절(공분을 넘어서)-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마가복음

광주강의20200717b 마가복음15장 21-23절(공분을 넘어서)-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셔가지고 하나님 우편에 계시고 세상에서는 예수님이 없으니까 인간 대 인물, 인간들이 있는데 예수님이 한 때 여기에 점선으로 계셨죠. 여기 계셨는데 돌아가셨으니까 예수님이 안 계십니다. 안 계시니까 결국은 인간들 속에는 예수님이 없죠. 예수님이 없습니다. 없음이 돼요. 없음이 되는데, 그럼 예수님은 이 땅에는 없지만 하나님의 우편에 계시죠. 이걸 저는 온탕이라고 표현할게요. 온탕. 온탕하면 온천 온탕 있죠. 하도 온천에 가면 서로 온탕이라고 해서 어느 게 진짜 온탕인지 모르겠지만. 부곡온천에 보면 온탕. 이 온탕에서 복음이 흘러넘치는 거예요. 복음이 흘러넘치면 여기서 공분이 일어나는, 아까 이야기한 공분을 일으켰던 그 관계가 이 땅에 주어지는 겁니다. 성령을 통해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거죠.

주어지게 되면 여기서 예수님이 없을 때, 없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항상 언어는 짝을 이룬다고 했죠. 없음은 무엇의 짝을 이룹니까? 있음이죠. 있었던 분이 없음이 되는 거예요. 그냥 처음부터 없으면 없음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이걸 소쉬르가 확인한 거예요. 처음에 있었던 것이 없을 때 없음이 되는 거예요. 아무것도 없으면 없음이라는 말조차도 필요치 않는 겁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것이 한때 있었는데 없다. 이순신 장군이 한때 있었는데 지금 이 상황에 없다. 이래 되잖아요.

사람들은 그러고 싶어요. 왜 그러고 싶은가 하면은 지금 이순신 장군이 있어버리면 지금 2020년도가 아니라 1592년도이어야 해요. 안 되거든요. 이순신 장군은 1592년도라고 우기고 우리는 2020년이라고 우기고 서로 싸울 판이라 이 말이죠. 서로 속해 있는 노선이 다르니까. 1592년은 임진왜란 때가 아닙니까? 이순신 장군은 양보 안 하죠. 고집 센 분이 양보 합니까? 까불면 긴 칼 옆에 차고 이렇게 덤빌 건데? 지금이 1592년이라고 우길 거라 이 말이죠. 1592년이라고. 근데 우리는 2020년이라고 우기고. 그러니까 이순신 장군은 없음이라고 할 때는 한때 있었다 이 말이죠. 한때 있었고, 한때 예수님이 있었던 시절에 있었고 하지만 지금은 그 시대가 아니야. 지금은 우리들이 있는 우리 있음의 시대야. 그렇게 되겠죠.

그렇다면 이 하늘나라 온탕에서 이들에게 예수님이 십자가 지셨다는 것을 어떻게 알릴 것인가 하는 그 문제가 남아있습니다. 그 문제가 남아있는데,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성경 구약에서 나오는 두 가지의 경우를 제가 한번 찾아볼게요. 하나는 뭐냐 하면은 십계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출애굽기 20장이거든요. 내가 왜 1492년이라고 했을까? 아, 그거는 콜럼버스이야기네. 출애굽기 20장 보게 되면 십계명 중에 이런 계명이 있어요. 17절에,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이래 되어 있죠. 이렇게 계명에 있습니다.

탐내지 말라는 말씀을 하나님께서 주셨다 이 말이죠. 지금 제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복음이 이미 완성했는데 완성된 복음이 지상에 없는데 어떻게 있게 하느냐, 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 방법을 옛날에 모세에게 십계명을 내리는 방식대로 하는 거예요. 십계명에 보면 마지막 계명에 탐내지 말라는 내용이 주어져요. 그럼 그 탐내지 말라는 계명이 주어지게 되면, 모세를 통해서 주어지게 되면, 인간에게 모세를 통해서 탐내지 말라, 라고 주어지게 되면 인간 속에 이 탐내지 말라는 말에 대해서 인간 속에서 마중을 나가는 것이 있어요. 마중.

이 말씀이 오기 전까지는 탐심이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도 안 하고 있었는데, 탐내지 말라고 잔소리를 하는 순간 여기서 마중을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은, 그럼 뭘 탐내지 말라고 했지? 내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 그럼 그때부터는 인간 속에서 뭐냐 하면은 이웃에 대한 탐심이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발생하기 시작해요. 그러니까 이거는 없는데, 없는데 율법이, 계명이 주어지니까 없는 데서 보조를 맞춰가지고, 율법의 보조를 맞춰가지고 없는 것이 새로 발생되는 거예요. 로마서 7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탐내지 말라고 하는 순간, 너희들은 그 내부에 있는 어떤 요소가 자극받는다. 그걸 어떤 요소라고 제가 말했지만 로마서 7장에서는 그걸 가지고 악이라고 해요.

우리 속에 있는 악이 십계명으로 말미암아 드디어 내부의 악이 바깥으로 구체화되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내가 여기 있음이라는 것은, 사실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허수아비에요. 허수아비에요. 여러분 볼펜을 길에서 주웠다. 이뻐요. 그런데 써보니까 안 나와요. 왜냐하면 안에 볼펜심이 없기 때문에 그렇죠. 그러면 볼펜을 나오게 하려면 아무리 외형이 아름다운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심만 있으면 나오게 되어 있어요. 볼펜 껍데기 다 버리고 가느다란 심만 쥐고 벌벌 떨면서 써도 나오게 되어 있다 이 말이죠. 그렇죠. 인간들을 완전히 하나님께서 우습게 보는 겁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있다, 없다? 전혀 없는 거예요. 하나님이 주목하는 것은 “내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아무리 큰소리 쳐도 “비켜!” 우리 안에 하나님에 대해서 공격성향을 가진 괴물이 살고 있는 거예요. 우리 안에.

근데 하나님이 그 말씀을 주기 전에, 인간들끼리 있을 때는 서로 잘난 체 한 거예요. 서로 자기 관리 잘하고 있다고 서로 으스대다가 하나님께서 탐내지 말라고 하니까 그 다음부터는 손가락을 서로를 향하여 “니 탐냈잖아?” “니가 냈잖아?” 난 쪼끔 냈다, 너는 많이 냈다, 서로가 손가락질하면서 내부적으로 탐심에 관한 그러한 내용이 자기 본성에 각인되기 시작하는 겁니다. 인간이 자극받는 거예요. 외부로부터 자극받는 겁니다. 그게 바로 율법이고 언약적기능이죠. 그러면 이거는 뭘 이야기하느냐, 이렇게 이해하면 됩니다. 탐심에 대해서 인간들은, 자기 탐심에 대해서 이 말씀대로 탐내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인간들은 뭘 하느냐 하면은 우회로를 개설해요.

우회로라는 것은 물이 자꾸 차면 삽 들고 와서 파가지고 물이 다른 쪽으로 빠지도록, 골목에 안 차도록 한쪽을 개설하는 거죠. 그걸 길 트임이라고 하는 그런 단어를 쓰는 사람도 있어요. 이리저리 물을 한 곳으로 길 트임 하죠. 인간이 그때부터는 이 탐내지 말라는 그것에 대해서 내부를 자기가 조절하는 거예요. “탐심을 내되 아주 심하게 내지 않았어요.”라고, 자기 스스로 자기 우회로를 마련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너희들은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고 했는데 이걸 어떻게 우회로로 하느냐 하면은, 이렇게 우회합니다. “펀드에 투자하는 것은 괜찮죠?” 펀드에 투자하는 것은 괜찮죠? 라는 식으로 우회를 해버려요.

자본의 생산이라고 하는 것은 노동자가 노동한 그 임금에다가 추가적인 것을 자기 것으로 일방적으로 노동자에게 줄 것을 가져가는 것. 이것을 마르크스는 착취라고 하는데. 이걸 가져가서 자본이, 이자만 받아야 될 자본가가 이자+알파가 들어가요. 왜 알파가 들어가느냐, 알파가 들어가야 자본에 뭐가 일어나느냐 하면은 재생산이 일어나요. 자본은. 자본은 그날 먹고 그날 먹는 것이 자본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을 투자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추가적으로 돈을 더 보태고, 보태고, 보태야 되는 겁니다. 그렇잖아요. 모든 게.

예들 들어서 교회 개척 교회하는데 교인이 자기 가족 빼놓고 두 사람이 왔다. 그럼 교회의 기도 제목이 “그저 두 사람만 계속 마지막 끝 날까지 가게 해주세요.” 이런 기도를 하는 교회가 아니죠. 두 사람만 오기에 이 예배당이 너무 크니까. 50평짜리 예배당은 두 사람만 들어오기에는 너무 넓어요. 자기 집에서 모이면 몰라도. 그래서 이거는 뭐냐 하면은 계속 재생산하는 그 가운데서 인간의 뭐가 정당화되느냐 하면은 자신의 탐심이 자꾸 정당화되는 거예요. 탐심이. 그래서 자기 탐심을 우회시켜놓고 여기에 뭘 하느냐 하면은 그럴싸한 이름을 붙입니다. 오늘 여러분 참 귀한 것을 배우는 거예요. 귀한 것. 이름 붙이기. 이름 붙이기를 명명이라고 하는데, 이름 붙이기는 요소를 끌어당겨 놓고 그 요소 전체에 대해서 이름을 붙입니다. 그 요소 전체에 대해서.

예를 들면 여러분들이 이래 있다면, 이름 붙이기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여기 남자들만 따로!” 이렇게 하면 ‘남자들만’이라는 요소를 따로 붙여서 남자들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거예요. 여기는 “여자들만 따로!”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두 개의 요소, 두 개의 집합이 생겼죠. 근데 여기서 “서울사람은 따로!” 이래 돼버리면, 이름이라는 것은 이런 요소를 그대로 끄집어내서 또 이름을 붙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름 붙인다는 것은 지금 요소에다가 더 윗선에서 붙이는 것이 이름이에요. 윗선. 남자, 여자, 경상도, 전라도 말고, ‘한국사람’이라고 전체에 이름 붙이기. 그러면 이 이름은 뭐냐 하면 한국 사람으로 이름 붙이기가 되는 거예요. 남자 이름을 취소시키고. 한국 사람이라고 붙이는 것에는 남자여자 다 들어가 있죠.

그런데 ‘동양인’이라고 하면 한국 사람보다 더 범위가 넓죠. 그 모든 이름의 끝은 뭐냐, ‘주님’이에요. 주님이름이 돼버려요. 하나님이름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이게 뭐냐 하면 존재의 사슬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은 우리 작은 것보다 약간 더 넓은 것. 그 넓은 것보다 약간 더 넓은 것. 그 넓은 것 할 때마다 이름을 계속 짓는 거예요. 교회, 교회 이름을 지으면 교회부흥, 교회부흥 다음에 선교활동 잘하는 교회. 이렇게 이름을 붙여나가는 거예요. 근데 이름을 붙일 때마다 결국 뭐냐 하면은, 그들이 어디까지 도달하느냐 하면은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이름이 되는 거예요. “자, 이름 가운데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 여기, 여기 모여 보세요!”라고 하면 전부 다 기어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마태복음 7장에서 주님이 하신 말씀이 뭐냐 하면은 내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치 아니했습니까? 라고 할 때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뭐라고 했습니까? 나, 도무지... 무슨 소리고? 나는 도무지 너희를 모른다. 너희한테는 내 이름을 줄 수 없다. 내 이름에 속한 내 요소가 아니야. 내 이름에 집합적인 요소가 될 수 없어요. 천국의 이름은 우리가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천국의 이름은 천국의 주인이신 주님의 이름이 자기 요소를 새삼스럽게 만들어내야 해요. 주의 이름이.

그런데 우리가 찾아가면 주의 이름이라고 하지만 이거는 뭐냐, 우리가 생각하는 주의 이름은 내가 여기 멀쩡하게 있고 나를 긍정하면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걸 가지고 탐욕이라고 하는 거예요. 탐욕. 나의 확장이 되죠. 나의 요소를 나의 임의대로 천국의 요소로, 천국의 백성으로 들어가고 싶은 겁니다. 이걸 누가 했습니까? 바로 십자가 에 예수님을 못 박아 죽였던 바리새인들이 이 일을 했던 거예요. 이름으로. 여호와 이름으로 그들은 유대나라를 만들었잖아요.

그러면 바리새인, 서기관들, 유대인들, 그들이 통분을 느껴서, 화가 너무 많이 나서 예수님을 살해했다면, 예수님을 실제로 살해했고요. 죽였다면, 그러면 십자가는 뭡니까? 십자가라는 말은 어느 누구도 자기의 이름을 건재 시키면서 하나님과 합세하려는 모든 사람은 십자가의 원수가 되는 거죠. 십자가의 원수. 십자가 자체가 단절이고, 절단이고, 서로 통분히 여겼고, 공분을 샀던 그 사건이기 때문에.

따라서 복음이 이 땅에 십자가의 형상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주님께서는 율법으로 뭘 양산시킵니까? 탐욕을 양산시킵니다. 탐욕을. 탐욕을 양산시키면 인간들은 요령부리기에 나섭니다. 꼼수, 요령부리기, 조작, 모방, 하나님 앞에 착한 모방, 이런 것을 해가지고 계속해서 아까 물꼬 트는 거. 계속 물꼬를 트는 거예요. 나쁜 것은 전부 다 빼내고 착한 것만 따로 챙기는 거예요. 사실 이거는 내일 모레 주일 낮 설교 배설물에서 할 때 할 건데, 특별히 하는 겁니다. 이 말을 하면 또 예배에 빠지니까 이 말을 안 하려고 하는데. 내가 빼고 싶은 것은 뭐냐 하면 율법에서 죄라고, 하지 말라고 지적한 것은 전부 다 빼는 거예요. 그걸 배설물로 빼는 겁니다.

근데 사도바울은 반대에요.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준비한 것은 다 배설물로 빼버립니다. 달라도 얼마나 달라요.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했던 모든 것. 선교, 전도, 기도, 헌금, 찬양, 성경공부, 예배, 이 모든 것을 다 빼요. 배설물로 다 빼버리죠. 왜냐하면 의미라고 하는 것은 누가 결정합니까? 이게 의미다, 의미 아니다, 라는 것을 누가 결정해요? 이거는 내가 의미 결정하죠. 왜? 의미시스템 안에 내가 있음으로서 나는 죽었다가 아니라 나는 계속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내가 살아있어 버리면 예수님은 어떻게 돼요? 예수님의 살아있음은, 내가 살아있는 것과 예수님의 살아있음이 같이, 둘이 동시에 살아있을 수가 없어요. 왜? 내가 주님에 대해서 화를 내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해서 화를 낸다고 안 하죠. 다만 내가 화를 내고 싶은 사람이 궁극적으로 예수님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한번 예를 들어봅시다. 어떤 사람이 사기를 당해서 부도가 나가지고, 부도가 나서 사업이 망했는데, 아버지가 사기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이 너무 분해서 약을 먹고 자살했어요. 그런 집안도 있어요. 있을 때에, 그분이 교인이라면 제가 가서 심방을 합니다. 두 가지를 가지고 제가 심방을 한다고 봅시다.

첫째는 뭐냐 하면은 창세기 22장, 둘째는 디모데전서 6장. 첫째, 아브라함도 자기 아들을 죽였습니다. 아브라함도 자기 아들 죽였어요. 그러니까 아들 죽었다고 그리 신경 쓰지 마세요. 두 번째는 뭐냐,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고 만약에 먹는 것 떨어지거든 그냥 죽으세요. 이 이야기를 했을 때에 그 사람이 감사히 받겠습니까? 아니면 공분하겠습니까? 공분하죠. 내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이야기를 제가 한 셈이 되니까. 가장 듣기 싫은 거죠. 바로 이게 뭐냐 하면은, 왜 이렇게 분을 내느냐, 이걸 성경에서는 니가 빼돌린 그 욕심 자체를 율법으로 들통 냈기 때문에, 지적했기 때문에. 율법으로.

주님께서는 이겁니다. 인간의 탐심의 끝은 뭐냐, 돈을 탐하는 것이다? 아니에요. 그러면 명예를 탐하는 것이다? 아닙니다. 탐심의 끝은 바로 예수님을 죽이는 힘이죠. 예수님을 죽이는 힘.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는 거죠. 예수님이 죽기까지 인간의 탐심은 주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전략은 이거에요. 예수님과 그 다음에 뭐가 분리된다고 했습니까? 예수님과 십자가가 분리되는 것이 아니고 연결되면서 나타나는 것은, 십자가가 나타나는 이유가 예수님이 먼저 죄를 자기에게 연결시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께서 죄를 예수님이 자기에게 씌우고, 두 번째는 자기에게 있는 이 죄 때문에 자기가 죽고 없어지고, 세 번째는 죽고 없어진 그것을 십자가로서 드러내는 이 세 가지.

우리의 죄를 가져오고 그 다음에 예수님이 죄 때문에 죽으시고 그 다음에 자기가 죽었던 사건을 우리에게 십자가세력으로, 십자가 힘으로 그냥 덤터기 씌우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는 뭐냐 하면은 하나의 우리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구원에 우리가 놀아나는 거죠. 하나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뭐가 주인공이 돼요? 십자가가 주인공이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십자가의 의미시스템은 본래 인물이 하늘에 가 계시니까. 하늘에 계신 예수님께서 지상에 의미시스템을 십자가의 반복으로서 우리에게 나타냈습니다.

구약에 또 그런 의미가 있는데요. 그거는 여러분들이 한번 찾아봅시다. 사사기입니다. 사사기 7장 6절에 보게 되면 여기 이만 이천 명이 오거든요. 이만 이천 명이 와서 이만 천 칠백 명이 돌아가고 몇 명만 남았는가 하면, 7절에 보면 삼백 명 남았죠.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지금 예수님과 십자가의 관계를 응용하면 모든 성경의 해석이 다 됩니다. 여러분, 다시 한 번 할게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 땅에 드러내는 것은 먼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일방적으로 자기 죄로 가져오는 그것을 십자가로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예요. 우리의 죄를 예수님께서 가져올 때 이거는 탐심이 되는 겁니다. 탐심이 되고 그 죄는 바로 분노가 되고. 분노로 인하여 모든 인간은 이미 죄인으로 드러났고, 그 죄 있는 상태에서 예수님이 자기 십자가를 이렇게 주는 겁니다.

우리는 죄인이고 우리는 분노하기 때문에 우리가 알아서 십자가를 받을 수가 없어요. 그 이유는 우리라는 것은 아까 배운 것처럼 우리 나름대로의 무슨 시스템? 의미시스템을 장착하고 이걸 유지하고 있습니다. 내가 긍정되는 시스템. 내 나쁜 것은 전부 다 빼고 내 잘난 것만 남기는 의미시스템 있잖아요. 의미시스템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이 자체가 죄라는 것을 알려주는 주님의 의미시스템이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죽음이라는 것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내 의미시스템 안에서 내가 없어지는 게 죽음이죠. 내 의미시스템이 완전히 박살나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꽝! 미사일 십자가가 터져버린 거예요. 예수님은 안 보이는데 나의 모든 의미시스템은 욕심에 의해서 십자가에서 꽝하고 터져버린 겁니다.

그게 사사기에서, 사사기 7장에 보면 사사가 등장하는데, 사사 이름이 뭡니까? 기드온이죠. 나는 기드온이라는 사사가 등장할 때마다 자꾸 쪽복음, 작은 성경책이 생각나요. 옛날 호텔에 가면 전부 다 기드온 출판사에서 자금내서 만든 성경책 있잖아요. 파란색 표지로 한 성경. 글자가 너무 작아서 잘 안 보여. 기드온 출판사에서 나온 성경책 있잖아요. 그런데 기드온은 뭐냐 하면 이거에요. 본인이 마치 시몬처럼 십자가를 지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냥 일방적으로 주님께서 그냥 찍었어요. 해라! 하라! 기드온에게 오니까 기드온은 처음에 의심했죠. 뭐냐 하면 이게 하나님의 일인지, 아니면 내가 지금 착각을 하고 있는지. 하나님의 일인지, 내가 지금 판단이 흐려서인지. 그걸 분간하기 위해서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새벽에 솜을 해가지고 솜에만 이슬이 맺히고 솜 바깥에 있는 땅에는 아주 바짝 마르게 해달라고 그렇게 하니까 하나님께서는 진짜 솜에만 이슬이 맺히게 하고 바깥은 바짝 말랐거든요.

근데 여기서 기드온이 생각을 해봤던 거예요. 아마 솜이니까 습기를 확 빨아들일 그게 있기 때문에, 하나님 미안합니다. 제가 다시 한 번 하겠습니다. 솜에만 바짝 마르고 땅은 축축하게 해달라고. 그러면 믿겠습니다. 이래 했거든요. 자, 여기서 믿음이란 나의 상식을 뒤집는 것, 이게 믿음이에요. 나의 상식을 뒤집는 것. 지금까지 살아왔던 나의 의미시스템을 내가 뒤엎어버리는 겁니다. 이거는 뭐냐 하면은 내가 나에게 전도하는 것. 이게 바로 믿음입니다. 날마다 내가 나에게 전도하는 거예요. 믿음 없다고 내가 나를 추궁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추궁하나 안 하나 우리는 계속해서 뭐가 일어납니까? 끊임없이 의심이 나거든요. 10년 믿어도 의심. 10년 전에 성경 봐놓고도 내내 매일같이, 매일같이 뭐냐, ‘성령 받은 게 아니고 내가 지금 오기로 믿는 게 아니냐?’ 그걸 매일매일, 매일 그렇고 오후 세시 타임, 네시 타임, 매일 끊어도, 끊을 때마다 계속 생각나는 것이 뭐냐 하면은 ‘내가 이게 믿는 게 아니야. 믿는 게 아니고 믿는다고 내가 착각하고 내가 스스로 설득하고 있는 거야.’ 이런 식으로 계속 자기 자신을 생각하는 거예요. 그렇게 하는 이유가 뭐냐, 갖고 싶은 거예요. 내가 내 의미시스템에 납득이 되는 그 믿음을 내가 소지하고 싶은 겁니다. 움켜쥐고 싶은 거예요.

그러나 기드온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부탁하고 싶은 것은 뭐냐 하면 내가 있고, 내가 있으면 짝패니까, 내가 있으면 누가 없어요? 너는 없다. 여기서 나온 게 그 유명한 영구 없다가 나와요. 영구 없다~ 너는 없는 거예요. 그럼 반대로 내가 있으면 누가 없는 거예요? 주님이 없는 거예요. 내가 있으면 주님이 없잖아요. 주님이 없기 때문에, 주님을 내가 내 의미시스템을 가동해서 만들려고 하는 겁니다. 전에 주님께서 은혜 주셨잖아요. 전에 주님께서 내가 배고프다고 하니까 어디서 갑자기 강원도 쌀 포대를 보내주셨잖아요. 이런 거. 자꾸 내가 납득이 되고 설득이 되는, 역시 나는 믿음이 있다고 자꾸 만들어내는. 그건 뭐냐 하면은 내가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러나 주님께서 갑자기 와버리면 우리는 내가 없어지는 것에 대해서 공분을 느끼면서, 내가없으면 어떻게 되지? 그럼 내가 없으면 내가 없는 거잖아요. 진짜 말 쉽게 하고 있는 겁니다. 제가 진짜 쉽게 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없으면 내가 없는 거예요. 내가 없으면 내가 걱정하거나 고민할 것도 염려할 것도 없는 겁니다. 내가 없다는 것은 센 분에게 지금 얻어터지고 있는 순간입니다. 나보다 더 센 분에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시몬이 진 십자가가 시몬의 십자가입니까? 아니면 주님의 십자가에요? 누가 졌던 겁니까? 요새 같으면 강원도에서 올라와가지고 지가 십자가 딱 짊어져가지고, 예수님 흉내 내려고, 예수님이 십자가 지는 것이 양심상 너무 안 됐어. 나도 예수님 따라할래. 예수님이 지금 쓰러지면 나도 쓰러질래. 예수님이 고생하는 것을 폼 잡아서 자기도 같이 고난 받는 거예요. 예수님이 사십일 금식했다고 하면 자기는 겸손하게 39일 금식하는 거, 이런 것 있잖아요. 자꾸 모방하는 거예요. 왜? 내가 여기 있으니까.

그런데 내게 없는 것을 주께서 뒤집어씌우는 거예요. 내게 없는 것을. 내게 없는 것. 자, 사모님한테 묻습니다. 본인에게 없는 것이 뭡니까? 결혼하기 전에 없는 것? 아들 단이죠. 남편이죠. 그러면 사모님 두 살 때 없던 것? 그럼 욥처럼 태어나기 전에 없던 것? 이 세상 모든 것은, 내가 없다는 것은 나의 죽음을 앞당겨서 내가 경험하는 거예요. 이게 아까 이야기한 의미시스템에서 무너지게 되어서, 꽝하고 폭발하게 되어서 내가 없어질 때, 비로소 처음부터 있었던 주님이 나타나게 되는 겁니다. 주님이 내게 주신 게 뭐냐, 남편이고 아들이고 다 그렇죠. 주님의 십자가. 모든 소유권은 나한테 있는 것이 아니고 누구한테 있습니까? 주님한테 있으니까 범사에 감사하는 거예요.

아까 이야기했던, 부도나고 아들 죽었다고 공분을 느꼈다고 할 때, 제가 아브라함도 아들 바쳤잖아요?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고 할 때, 이게 농담이 아닙니다. 아들 죽고 부도남으로서 비로소 내가 탐심으로 가득 찼다는 것을 그제야 이게 다 드러나는 겁니다. 그러면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뭐냐, 없는 거예요. 없는 건데 성도한테만 십자가가 있고 그 다음에 누구는 빠지고? 누구는 없고? ‘나’가 없는 거예요. 십자가가 날마다 십자가가 있게 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나를 없는 자로 만들어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300명 이야기해봅시다. 자, 기드온과 300명이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럼 처음에 몇 명이 왔느냐 하면은 22,000명이 왔죠. 처음에 올 때. 이 22,000명이 뭐냐, 기드온의 군대죠. 기드온의 군대를 모집하니까 22,000명이 왔어요. 주님께서는 여기서 21,700명을 가라고 했습니다. 나머지기 300명만 남았죠. 그럼 300명의 의미가 뭐냐, 기드온 군대는 아예 없다가 돼요. 아예 없는, 군대가 없는 거예요. 근데 300명 남았잖아? 라고 고집부리지 마세요.

이 300명 정도는 22000명에 비하면 이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거예요. 없는 거라 이 말이죠. 실제로 표현할 때 그런 표현도 있어요. 내가 전에 어떤 모임에 갔는데 너무 조용해. 어느 정도로 조용한가 하면 바늘을 떨어뜨렸는데 바늘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하다. 이 말은 바늘을 왜 떨어뜨려보는 겁니까? 바늘을 떨어뜨려볼 만큼, 실제로는 시끄러운데 왜 바늘을 떨어뜨린 거예요? 그만큼 조용하고 적막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바늘 떨어진 소리를 언급하잖아요.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300명을 둔 이유가 뭐냐, 아예 22,000명 군대가 없는 거예요. 한명도 없는 거예요. 그리고 누구도 없다? 기드온도 없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 보기에는 누가 보입니까? 기드온이 있고 300명이 있고. 횃불이 있고 단지가 있고. 있지요. 그들이 보기에는 있어 보이는 이것이 당사자에게는 뭐냐 하면 무려 미디안 군사 135,000명에 비해서 기드온까지 합쳐서 301명은 이게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없는 거죠. 따라서 주님이 일하실 때는, 있을 때는 이 땅에 십자가라는 형식으로 없이 일하신다는 겁니다. 십자가 없이. 그래서 십자가를 믿는 사람들은 있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을 믿는 사람이 십자가 믿는 사람이에요.

여기서 제가 약간 걱정이 돼서 한 번 더 묻는 건데, 아까 천주교이야기 나왔죠. 예수님 있고 마리아 있고 마리아가 예수님을 안고 있다. 마리아는 모성애를 발휘한다. 사람들은 자기가 있게 되게 되면 어느 쪽을 선호하겠어요? “내가 평소에 이웃사랑 하듯이 마리아와 예수님 사랑을 본받아서 나도 이웃사랑하고 하나님도 사랑하면 되잖아. 이게 율법이잖아.”라고 생각하죠.

근데 본인이 있다고 여기는 것 자체가 탐심인데요? 예수님은 십자가라 말이죠. 그럼 사람들은 말하죠. 예수 믿는 사람들은 보여도 십자가는 안 보이잖아? 없잖아? 없는 게 정답이에요. 너희들은 있는 것을 믿지만 나는 없는 것을 믿는다. 없음이 나 있음보다 주도권을 쥐고 있는 사람. 없음이. 없음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사람. 나 있음에 대해서 일생을 그렇게 하고 있는 겁니다. 결국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생각하는 것은 뭐냐, 날 찾아봐라! 이 말입니다. 날 한번 찾아봐라! 못 찾죠. 찾을 수가 없죠.

한번 정리하겠습니다. 인간이 생각한다는 것은 자기가 닫혀있지 않고 열려있다는 뜻이죠. 열려있다는 것은 나처럼 여기 있는 사람을 찾지요. 그게 뭐라고 했어요? 너라고 했죠. 너. 자기를 대상화하는 거예요. 대상화하는 것은 그 사람을 사랑하기 위함입니까? 아니면 내가 누구냐를 확인하기 위해서 그 사람을 너라고 부르는 거예요? 나 자신을 구축하기 위해서, 나 자신을 정립하기 위해서 타인을 찾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이 만약에 나를 배신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온갖 저주를 다 퍼붓게 되는 겁니다. 보세요. 얼마나 이거는 이기주의입니까? 날 버리고 니가 다른 여자를 찾아가. 진달래꽃 시에 나오는 것처럼. 가시는 길에 내가 붉은 것을 뿌리오리다. 가다가 발목 다쳐서 10년도 못살고 죽어버려라.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은 전에 서로 알던 사이고 서로 흥정했던 사이라는 것을 그걸로 이야기해주는 거예요. 알던 사이. 생전 처음 본 사람 같으면 그런 저주를 안 품었죠. 악담을 안 퍼부었죠. 기대를 했다 이 말입니다. 기대를 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자식이 애 먹이면 뭐라고 합니까? 나가라! 나는 너 같은 자식을 둘 수 없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니는 어디가도 내 자식이라는 뜻이에요. 그게. 여러분 약을 먹을 때 ‘어! 약 먹을 시간 넘어갔네.’ 이거는 무슨 뜻이에요? 이거는 여전히 내가 약 먹을 마음이 있다는 뜻이에요. ‘내가 약 먹을 타이밍을 놓쳤네.’ 이 말은 뭐냐, 이미 시간이 지나갔음을 후회한다는 것은 나는 계속 약 먹을 용의가 되어 있다는 뜻이에요.

주님께서 끊임없이 성경을 가지고 니는 죄인이다. 십자가 졌다는 그 이야기가 우리에게 계속 새록새록 생각이 난다는 것은 우리가 주님의 보약 같은 친구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의 보약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니는 이정도로 니밖에 몰라, 라고 자꾸 우리가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은 주님이 우리를 건드렸다는 뜻이에요. 주님 앞에 우리가 뭐냐 너가 되는 거예요. 너. 주님, 나를 위한 너에요. 나를 위한 주님이 아니에요. 주님을 위한 너가 되게 하는 거예요. 내가 너에게 십자가를 뒤집어씌우고, 내가 너라는 기드온에게 찾아온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나가 없는데, 없는 체로 내가 여기 있음을 미디안 군사들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기드온 너를 해가지고 기드온에게 있는 것을 다 파먹는 거예요.

기드온이 언제 전쟁하고 싶어 했고 기드온이 언제 사람 모아서 대장질하고 싶어 했습니까? 기드온이 애쓰고 선전해서 무려 22,000명을 모았잖아요. 22,000명을 모았다 이 말이죠. 자기 딴에는 많이 모은 거예요. 수련회 한다고 여러 가지 코로나 가운데서도 한 30명오면 많이 온 거거든요. 근데 그쪽에서 미안하다 하고 취소하면 어떻게 하느냐, 어떻게 하기는요, 안 하면 되죠. 양식이 떨어졌다. 무슨 뜻입니까? 안 살면 돼요. 왜? 계신 분이 그만 살라는 뜻으로 알고 안 살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주님이여, 이럴 수 있습니까? 저를 살려 주옵소서, 라고 하는 것은 뭐냐, 이게 바로 숨어있던 뭐였다? 탐심의 우회로에 내가 의미를 두었다 이 말입니다.

22,000명 이거 했는데, 이거는 기드온의 든든한 후원자들이에요. 기드온의 분신들이죠. 다 날아가 버렸어요. 그러면 뭐도 날아가요? 기드온도 날아가요. 없는 거예요. 누가 싸웁니까? 주님이 홀로 싸우는 겁니다. 자, 여기서 우리 에베소서 6장을 한번 봅시다. 이거는 누가 한번 읽어봐야 해요. 에베소서 6장 10절에서 좀 긴데요. 긴 것을 읽으려니 제가 다 걱정이 돼요. 첫 번째 것이 나중에 끝에 가서 다 잊어버릴까봐. 그래서 10절에서 13절까지는 제가 읽고 13절부터는 다른 분이 한번 읽어보세요.

10절, 종말로 형제들아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절,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12절,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13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절,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15절, 평안의 복음이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됐습니다. 거기까지만. 이 말씀은 뭐냐 하면은 내가 지금 싸우고 있느냐를 묻는 겁니다. 이거 싸우고 있어? 미사일이 이미 터졌어요. 미사일이 터졌으니까 미사일은 없어요. 십자가가 없습니다. 십자가는 없는데 꽝은 있어요. 꽝! 꽝의 여운이 계속 세상 끝 날까지 갑니다. 꽝했다는 것을 누가 아느냐, 마귀는 알고 있어요. 사람은 몰라요. 악마는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의 싸움은 개코도 모르는 인간을 붙잡고 싸우지 말고 누구하고 싸워라? 보이지 않는 악한 영들, 어둠의 세상주관자들. 그러니까 악마 따로 인간 따로가 아니라 악마가 인간을, 이 세상을 주관하고 있으니까 이 세상의 모든 사고방식은 악마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고 있을 뿐이에요.

그러면 성도라는 것은 자기 개인적으로, 사적으로 자기 구원받기 위해서 성도가 된 게 아니고 싸우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 싸움이 뭐냐 하면은 진리는 이미 온 천지에 다 퍼져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 퍼져있기 때문에 따로 내가 준비할 것은 전혀 없어요. 전혀 없습니다. 한 살 좀 된 애보고 엄마가 막 화를 내면서, 한 살 좀 더 되겠다. “오줌 함부로 싸지 말고 화장실에 가라고 했잖아. 니 오줌 어디에 쌌어?” 이러면 애들이 아무 소리 안하고 뭐합니까? 손가락 가지고 가리키죠. 우리가 할 일이 이거에요. 다 이루었잖아. 이 싸움. 악마는 우리에게 똑바로 살아야지, 믿음대로 살아야지, 바르게 살아야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면 되겠어, 이게 악마가 하는 이야기에요. 악마가. 말씀을 보면 폼으로 보나? 말씀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라고 했잖아. 이렇게 닦달내면 우리는 뭐라고 해야 합니까? 손가락으로 가리키죠. 주께서 다 이루었다. 그 싸움을 가지고 니가 방패로 삼아라. 무기로 삼아라. 이 싸움을 하라는 거예요.

만약에 성령이 오지 않고 십자가가 없는 사람은 성경대로 이래 하라고 하면 주섬주섬 뭐합니까? 내 싸움하기 위해서 내가 갖출 것을 갖춘다고 이렇게 해버리면, 그거는 뭡니까? 갑자기 기드온이 300명에서 숫자 모자라서 돌아간 22,000명을 도로 부르는 거예요. “애들아! 부대복귀. 다시 와! 우리 힘이 있어야 싸우지. 힘이 없어서 못 싸워. 다시 와서 싸우자!” 이 짓하고 있는 거예요. 전도는 남한테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이미 죽었던 나보고 하는 거예요. 확인하는 거예요. “너 이미 죽었잖아. 너의 의미시스템 이거 무너졌잖아.” 십자가 꽝 할 때 이 의미시스템이 없는 거예요. 그럼 이게 없어지면 뭐가 나타납니까? 주님의 의미시스템이 우리를 이미 꽉 장악하고 있는 겁니다.

이게 바로 뭡니까?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는 것이고, 평안의 복음이 신을 예비한 것이고, 믿음의 방패, 모든 것이 뭐냐, 내가 한 것은 하나도 없고 주께서 이 땅에서 다 하신 것 속에 우리가 거기에 지배받고 있습니다. 다루어지고 있는 거예요. 오늘 제목을 뭐로 할까 고민 중인데. 후보감은 의미시스템, 이걸로 할 가능성이 많아요. 꽝, 이거는 장난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해서 안 되고. 하면서 생각해봅시다.

오늘 본문을 한번 봅시다. 22절,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다시 말해서 아무도 스스로 갈라고 할 마음도 없고 그리고 여기에서 자기 미래를, 미리 여기서 자기 자신의 본실을 찾으려는 사람도 아무도 없는 곳이 십자가죠. 그렇다면 이 해골의 곳, 그곳이 시몬한테는 그냥 덤터기로 씌워지는 거죠. 시몬이 구원받았다는 뜻이 아니에요. 주님께서 일을 하실 때에 주님 자신의 의미시스템, 의미체계를 활용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길가는 시몬에게 십자가를 짊어지도록 주께서 다 배치를 하신 거예요. 오늘날 우리에게 배치하듯이.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로 사라져도 누구는 남아있어요? 십자가 진 사람은 남아있겠죠. 똑같은 구조를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성령께서 예수님은 하늘에 계시고 예수님의 영이 난데없이 된 통으로 십자가 영을 받은 사람을 출현시켜서 예수님이 이 땅에 사시면서 얼마나 사람들에게 수모를 당했는지 몸속으로 경험케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이겁니다. 성도가 이렇게 예수님과의 관계, 예수님과 십자가의 관계 속에 있는 이유는 우리가 생각하는 탐심, 탐욕, 죄라는 것이 도대체 내 육신과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살아가면서 점점 더 이걸 깊숙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주께서 아직도 살게 하신 거예요. 이 탐욕이라는 것, 탐심, 변명, 꼼수, 죄, 나는 무조건 살고 싶다는 것, 다른 사람은 다 코로나 걸려도 나는 안 걸리고 싶다는 이런 모든 것.

내가 있고, 내가 있음이 있고 난 뒤에 그 다음에 하나님이고 예수고 있는 것이지, 내 있음이 우선이라는 그것을 남은 경험 못해도 성도이기 때문에 충분하게 그것을 파악할 수 있는 대상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 앞에서 뭐가 됩니까? 죄 많은 너가 되는 거예요. 죄 많은 너가 되면서 우리는, 왜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이 공분이라는 것을 뚫고, 우리는 주님의 모든 것이 싫어요. 이 싫음을 뚫고 쳐들어온 이유가 뭐냐, 쳐들어올 만한 정도로 우리는 주님 앞에 이런 분통과 화를 낼만한 존재인 것을 우리에게 확인시켜주는 것. 그게 바로 주님이 우리를 통해서 전도하는 것이고 그 전도가 대외적으로 전도가 되는 겁니다.

이거는 결코 내 의도로, 내가 의식해서 예수님을 믿는 게 아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우리는 매일같이 의심해요. 내가 착각한 게 아니냐? 그거는 내가 아직 화를 안 낼 경우에만 착각한 것이겠지만, 정말 내가 자기 인생이 불평스럽고, 내가 이래 사느냐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어떻게 6대0으로 이기고 있다가 어떻게 그게 7대6으로 뒤집힙니까? 야구 좋아하는 사람은 그래요. 어떻게 손흥민이가 두골 넣어서 그 팀이 이겼는데, 손흥민이 토트넘이죠. 토트넘이 이기고 있는데 후반전에 바보같이 수비해서 세골을 집어넣어서 프리미어리그에서 7등이 못되고 8등으로 내려갔느냐? 젊은 애들은 그것 때문에 죽고 싶어요. 젊은 20대는 그것 때문에 죽고 싶어 하죠. 그럼 30대 결혼한 사람은 무엇 때문에 죽고 싶어 합니까? 30대가 없으니까 뭐. 그럼 40대는? 40대가 없으니까. 아, 40대 있네. 40대는 왜 그래요? 인생 살면서 뭣 때문에 분통이 느껴집니까? 애는 왜 그렇게 공부를 안 하는지. 그럼 50대는? 왜 갑자기 갱년기가 찾아오고. 얼굴은 왜 그렇게 붉어지고.

이 모든 게 뭐냐 하면은 충분하게 하나님이 있으면, 예수님이 진짜 있으면 내가 화낼만한 요소를 내가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앎으로서 전도가 되는 거예요. 앎으로서. 아, 진짜 주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전도할 때 인간성이 좋아서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듯이, 지금은 그 대상이 우리 자신이 되었습니다. 우리 자신이 날마다 주님 앞에 전도 받으면서 또한 우리를 통해서 세상적으로 예수님만 증거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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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