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강의20200717a 마가복음15장 21-23절(공분을 넘어서)-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마가복음

광주강의20200717a 마가복음15장 21-23절(공분을 넘어서)-이 근호 목사

자, 시작합시다. 마가복음 15장 21절,

21절,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22절,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23절,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그래 되어 있죠. 십자가가 예수님 홀로 단독적으로 지시는 십자가이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십자가에 협조한다든지 도와주게 되면, 예수님이 하신 공로 속에 인간의 공로가 들어오기 때문에, 이거는 레위기에 나오는 제물의 원칙에 위반이 돼요. 제물은 흠 없는 제물 그 자체로서 드려야지, 제물 말고 다른 것을 추가해서 곁들여서 제물을 드리면 안 됩니다. 제물은 지정한 제물 그것만 그대로, 소를 바치라고 했으면 소를 바쳐야지, 뭐 덤으로 거기에다가 염소를 바치고 그러면 안 돼요. 딱 하나만 돼요. 구약 레위기 율법에 보면. 이 제사라는 것은 철저하게 외부적인 요소를 차단합니다. 들어오는 것을 전부 다 차단해요. 차단해서 하나님이 지정하신 제사를 이렇게 통과하게 했어요. 다른 게 섞이지 않도록.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약속은 순수하게 하늘의 것이 되어야 한다. 땅의 것이 되면 안 돼요. 왜냐, 땅의 것이 되면, 이미 인간들은 에덴동산에 살지 못하고 추방되고 쫓겨났잖아요. 쫓겨났기 때문에 쫓겨난 것을 만약에 받아줘 버리면, 이것은 추방한 하나님의 추방조치를 스스로 하나님이 위반한 것이 되기 때문에, 추방은 철저하게 추방으로 강조되기 위해서 안 받아주는 것으로 표현하는 겁니다. 나는 너희 것을 더러워서 안 받는다, 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돼요. 인간의 것은 더럽다고 되어 있죠. 더럽다가 되려면 반드시 여기에 뭐가 되어야 하느냐 하면은 거룩한 것이 앞에 같이 등장해야 돼요.

이런 말이 있죠. 짝패라는 것. 짝패. 이 짝패를 공식적으로 이렇게 연구하고 발표한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냐 하면은 소쉬르라는 사람이에요. 소쉬르라는 사람은 20세 초반에 최초로 언어학을 연구한 사람이에요. 언어학을 연구해서 무엇이 다 무너지느냐 하면은 성경에 나오는 히브리어, 헬라어가 원어라는 사실이 다 무너집니다. 원어는 없어요. 성경에 원어라는 것이 없습니다. 언어학에 있어서, 소쉬르의 언어학의 특징은 언어와 사물은 일치한다, 라고 하는 이러한 그동안의 주장이 깨어집니다. 언어와 사물은 일치한다. 이게 지우개라면 이 지우개라는 물건과 일치한다는 것이 전통적인 언어학이거든요. 그것이 깨어져버려요.

왜 이것을 깨어야 하느냐 하면은 언어와 사물은 어디서 왔느냐, 전통적으로 기독교 신학에서는 신으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거예요. 모든 사물은. 해와 달 별. 그럼 언어는 어디서 주어졌는가, 언어는 성경에 보면 바벨탑 언어 나오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언어를 줬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이 언어와 사물이 일치되어야 될 그동안의 이유가 사물을 주신 하나님과 언어를 주신 하나님이 같은 원천에서 나왔다는 것을, 이것이 하나의 전통적인 신학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 지상에 있는 것은 하늘의 반영이라고, 이렇게 그동안 쭉 가르쳤던 거예요. 지상에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일이니까 신앙생활 똑바로 하자! 제대로 하자! 그걸 이야기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소쉬르가 이렇게 보니까 사물이 계속 뭐가 되느냐 하면은 분화가 되는 거예요. 분화가. 분화라는 말을 알죠. 계속 갈라지고 새끼를 까고 새끼를 까는, 계속 이렇게 퍼지는 겁니다. 그런데 언어라는 것도 거기에 덩달아서 같이 보조 맞춰서 분화가 되다보니까, 이 대형이라는 것이 점점 더 거리가 멀어지는 거예요. 점점 모호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언어를 연구해보니까 모든 언어는 어디서 나왔는가, 차이에서 나왔다는 것을 그 사람이 규정하게 된 거예요. 차이.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고 또는 사물을 볼 때, 사물을 규정하고 언어를 사용할 때 인간은 구분 짓기 위해서 사는 것이다. 이것이 뭐냐 하면 식별,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식별이다. 식별하기 위해서 언어를 사용했다. 식별하기 위해서.

누가 식별하느냐, 내가 식별하고 싶은 거예요. 내가. 내가 식별하고 싶은 거예요. 그런 예는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쌍둥이를 낳았을 때 하나는 야곱이고 하나는 에서죠. 야곱의 의미가 뭐냐, 에서의 의미가 뭐냐, 이것은 성경에서 에서는 붉다, 야곱은 사기꾼이다, 잡았다, 뭐 이래 이야기하는데, 그게 아니고 이게 쌍둥이기 때문에 에서가 아닌 것은 야곱이고 야곱이 아닌 것은 에서로 보면 되는 거예요. 거기에 어떤 명칭을 붙이던 간에. 에서라고 하는 그 말은 그냥 붉은 것이 아니에요. 그냥 붉다고 하면 이게 의미가 없다고요. 그럼 동생은 덜 붉음, 불그스레함, 이래 된다니까요. 그냥 붉다, 그 말 하나만 해버리면, 이 붉다는 것과 대응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해요. 그럼 야곱의 이름이 사기꾼이라고 하면 안 되고 푸르다 이래 나와 줘야 돼요.

그런데 야곱 이름은 붉은 것하고 아무 관계가 없어요. 색깔로 따지는 것이 아니잖아요. 에서는 털이 많고 갖옷 같아서 붉다. 갖옷 같다. 그런 뜻이잖아요. 이 야곱은 딴 노선으로 사기꾼이다. 이래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야곱과 에서는 짝패다 이 말이죠. 서로가 노선이 다르다는 것을 묘사한 거예요. 노선이 달라요. 붉다, 푸르다 하면 같은 색깔의 노선이잖아요. 그러지 말고 에서는 색깔로 봤지만 야곱은 속성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야곱은 나중에 남을 속여야 먹고 사는 속성. 그럼 에서는 뭐냐, 그냥 그런 속성도 별 의미가 없고, 보니까 붉구나! 피부가 붉어. 그걸로 끝나는 거예요. 의미가 있는 것과 의미가 없는 것에 대한, 딱 붙여놓고 짝패를 이루게 하는 겁니다.

식별이죠. 물론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식별이지만. 인간들도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식별하기 위해서 있기 때문에, 언어라고 하는 것은 원래 그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래 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문에 들어갔는데 치마 입은 그림이 있다. 한쪽은 신사복을 입었다. 이 표시가 뭡니까? 이건 여자화장실이고 이건 남자화장실이잖아요. 이건 식별하기 위함이죠. 여자화장실그림을 보고서는 이건 뭐 여자들만 사는 동네인가? 뭐 이럴 수도 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짝을 불러 일으켜요. 짝을. 짝을 불러일으키는데, 그걸로 설명이 가능한 이유가 계속 분화가 되니까 인간 속에서 식별이라는 것이 작용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차이성을 낳는 거예요. 끊임없이 차이성을 낳아요.

이거는 소설 문학뿐만이 아니고 모든 실존주의적 과학, 생물학, 물리학, 모든 용어가 다 그래요. 양자물리학에서 쿼크라는 그 용어도 마찬가지고. 입자들 이름을 지을 때 보세요. 스트레인지(strange), 업up다운down, 칼라, 전부 다 이게 식별이에요. 분화하면서 분화되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는 이것과 이것은 이런 점에서 다른, 다른 이름을 붙임으로서 달리 보는 겁니다.

자,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왔어요. 제가 언어이야기를 했습니다. 여기 21절을 쭉 봤듯이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이 계신데, 21절에서 뭘 뽑아내느냐 하면은 여기에서 십자가를 뽑아내요. 예수님이란 분은 인물이죠. 인물이라는 것은 인물이고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이건 물체입니다. 사물입니다. 사물이죠.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반복할 수 없어요. 예수님은 한분이기 때문에 반복이 안 되죠. 그런데 뭐는 반복이 되느냐 하면은 이 십자가는 반복용이에요. 반복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게 사물이기 때문에. 이게 사물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예수님이 옛날에 억울하게 돌아가셨다. 그러면 그건 그분, 인물에 관한 문제죠. 그런데 그분이 뭘 남겼다. 뭘 남겼는가? 십자가라는 사물을 남겼다.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남기려면 사건이 있어야 되고, 그 사건은 예수님은 십자가와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 것을 알려주는 사건이어야 하는 겁니다. 예수님과 십자가가 떨어지지 않는 사건. 예를 들면 천주교 같은 경우에는 십자가 위주가 아니라 예수님 인물 위주에요. 천주교에 예수님이 이래 있으면 여기에 누가 있느냐 하면은 마리아가 이래 있죠.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이 마리아하고 예수님과 사이에는 이게 무슨 관계냐 하면은 모성애가 있어요. 엄마가 자식에게 하는 모성애가 있죠.

그러면 천주교에서는 이 마리아를 부각시키는 이유가 뭘 반복할 수 있느냐 하면은 엄마가 아기를 키울 때 그 사랑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이라는 것으로 반복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겨버려요. 반복할 수 있는 여지. 같은 노선으로 분화가 가능한 거예요. 마리아의 사랑 또는 성경에서 마리아에게 일어났던 어떤 경우들. 그러면 천주교에서 신부들이 설교를 할 때 교인들에게 납득이 되고 설득이 되려면 마리아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이 마리아를 사랑했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마리아를 사랑했다는 것으로 성경에 보면 그걸 언급해요. 뭐냐 하면은 자기가 십자가를 지시면서 자기 어머니를 사도요한에게 부탁했다는 것. “봐, 예수님은 끝까지 효자잖아.” 끝까지 효자라고 이렇게 부추기는 겁니다.

왜냐하면 천국에 가려면 예수님의 옛날이야기로 그치면 안 되고 지금 예수님의 자격이 있어야 되거든요. 지금 예수님과 지금 살고 있는 내가 같이 이렇게 연결고리를 이루어줘야 지금 낚여서 천국 갈 수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지금 예수님이 살아있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어머니의 사랑 또는 어머니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 그 고리를 우리가 형성하면 되겠죠. 형성하면. 인간 사랑을 자꾸 확장하는 겁니다. 인간 대 인간의 그 고상한 사랑을, 이제는 그 사랑을 하늘까지 확장시키면 이 사랑의 본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사랑의 본질과 다를 바 없다. 동일하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되느냐, 라고 할 때는 엄마가 자식을 사랑하듯이 또는 자식이 엄마를 사랑하듯이 사랑하시면 여러분들은 그 사랑이 곧, 그런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그런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그 자리에다가, 엄마와 아들의 자리에다가 뭘 교체하느냐 하면은 하나님 또는 예수님, 하나님과 우리하고 교체해서 박아 넣으면 그 관계는 계속 살아있으니까 그 관계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순수한 믿음이라고 그렇게 인정됩니다, 라고 했을 때 듣는 교인들에게는 아무런 부담감 같은 것이 없겠죠. 아무런 부담감이 없죠.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낙태를 못하게 합니다. 엄마가 자식을 사랑하는데 어떻게 낙태가 되겠어요? 안 되죠.

그래서 그 천주교의 논리를 쭉 이어나가면 이래 돼요. 낙태하는 여자는 지옥 간다. 또 지옥 간다고 하면 섭섭하게 생각할까봐 일단 하나의 출렁하는 기회를 주죠. 연옥 간다. 연옥 간다는 것은 패자부활전, 한번 기회를 더 주는 겁니다. 살아있을 때 밥 먹고 산다고 너무 주님한테 소홀했는데, 죽고 난 뒤에는 밥 먹고 살 일이 없잖아요. 그럼 어디에 매진하면 됩니까? 이제는 본격적으로 주님을 인정할 것이냐, 거부할 것이냐, 이제는 아무 거칠 것이 없는 가운데서, 죽었으니까 밥 먹고 살 일이 없잖아요. 그때는 이제 본격적으로 참고서 펴놓고 입시준비 하는 거죠. 천국에 갈 시험에 대비해서 매진하고. 그래도 아주 완악한 놈은 할 수 없이, “너는 한번 기회를 줬건만, 그래도 니가 아직까지 예수님을 거부하다니! 너는 지옥에 보낸다?” 보내면 되는데, “보낸다? 보낸다? 진짜 보낸다? 정말 너는 안 되겠구나!” 뭐 이런 식으로.

이게 천주교입니다. 그래서 천주교는 일종의 불교라고 보시면 돼요. 천주교의 이론은 어디에 어긋나는가 하면은 고린도전서 2장 4절에 어긋나죠. 내가 전한 내용은 사람의 지혜나 사람의 말과 능력으로 절대로 알 수 없고 오직 누가 나타나야 하느냐, 성령이 나타나지 않으면, 추가적인 하나님의 마음이 너희에게 도달되지 않는 한 너희들은 이 사실을 모른다. 이 말을 줄여버리면 모른다. 모른다가 돼요. 너희들이 평생 살면서 자식 키우고 아무리 순수하게 사랑을 나누었지만 그 어디에도 포함되지 않는 것을 전한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죠. 왜냐하면 성령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추방하고 난 뒤에 온 영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들이 예수님에게 빠이빠이 하고 난 뒤에요.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인간들에게 공분을 일으키는 사건이에요. 그 당시 인간에게,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분노를 일으킬만한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었습니다. 그 십자가 사건의 그 저의, 그 취지를 성령께서는 이걸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죠. 이거는 요한복음 16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나는 내 말을 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하는 일만 그대로 너희에게 되갚아준다. 이 성령께서 예수님의, 인간들이 공분을 일으킨다는 말은,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분노를 느낀다는 말은 그 뒤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도 십자가를 대하면 분노를 일으킨다, 안 일으킨다? 반드시 분노를 일으키게 되어 있어요. “내가 무슨 죄인이냐?” 이런 식으로. “내가 나쁜 짓 한 적도 없는데 나보고 죄인이라고 하고, 뭐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면서 지옥은 왜 만들어놨느냐?” 이런 식으로. “선악과는 본인이 심어놓고 그걸 따먹었다고 그 책임을 왜 우리 인간에게 덤터기 씌우나?” 이런 식으로.

모든 면에 있어서 십자가에서는 공분을 일으킬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교회에서 십자가를 전해야 되겠어요? 아니면 마리아의 사랑을 전해야 되겠어요? 어느 쪽을 해야 되겠어요? 인간이 할 수 있는 사랑을 전해야 교인들이 공분을 안 일으키고 현재 자기가 하는 행위만 살짝 하늘까지 확장되었다고 믿기만 한다면 구원되는 그 간편한 방법을 천주교에선 사용하는 거예요. 그래서 루터의 종교개혁은 십자가를 전하는 겁니다. 십자가 전했어요. 제가 볼 때는 루터가 십자가에 대해서 잘 아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어쨌든 루터는 십자가 지신 하나님이라고 했어요. 나중에 이것이 유럽의 계몽주의 이후에 낭만주의에 이 십자가마저 뭐가 되느냐 하면은 장미로 덮인 치장한 십자가가 돼버려요. 괴테가 그런 식으로 이야기했잖아요. 십자가를 이쁘게 포장하는 거예요. 자기 정성을 담아서.

지금도 유럽은, 프랑스 쪽이 천주교고요. 루터교 이쪽으로 제일 인구가 많은 곳이 핀란드에요. 핀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덴마크에 인구가 좀 많고요. 그 다음에 독일은 반반이고. 천주교 반 개신교 반. 제가 독일에 가서 개신교, 루터교에 예배 참석했어요. 차마 말을 못하겠어요. 이게 노는 곳인지. 엉망진창이에요. 엉망진창. 왜? 나라에서 월급 나오는 공무원이니까. 국민들 세금 받아서 목사들 월급 주니까. 목사들 뭐 편하죠. 제가 독일말만 되면 한 소리 하고 싶지만 내 나와바리가 아니라 남의 동네에 가서 말도 못하고.

십자가는 모든 인간에게 공분을 자아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십자가 전했는데 상대방이 어떤 공분을 일으키거든 제대로 잘 전했다 이래 보시면 되는 거예요. 인간의 힘으로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러면 아까 십자가가 사물이 되었다는 말을 했는데요. 그럼 예수님과 십자가 사이에서 이 관계, 공분을 일으키는, 유발된 사건은 없어지지 않고 같이 살아있어야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인물 중심이 아니고요. 예수님이 얼마나 잘 생겼는가, 그런 중심이 아니고 십자가 중심, 십자가를 반복함으로서 예수님 자신을 전달한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지금 여기까지 생각하면 돼요.

그럼 십자가를 증거 한다는 이게 무슨 말이냐, 이걸 본격적으로 합니다. 제가 두 가지의 그림을, 어떤 사람은 그림을 못 그린다고 하는데, 그 못 그리는 그림을 또 그려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두 가지의 그림의 차이점을, 1번과 2번 그림의 차이점을 한번 보세요. 1번 그림은 이렇습니다. 알타리무우 아닙니다. 미사일입니다. 미사일이 땅에 꽂혔는데 땅에는 아파트도 있고 집도 있고 예배당도 있고 고층건물도 있고 절도 있고 뭐 여러 가지 사람들은 자기 할 일 다 하는데, 어느 거리에 십자가가 팍 꽂혔습니다. 북한미사일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그림. 두 번째 그림은 미사일이 그냥 꽂힌 것이 아니고 여기서 꽝! 하고 폭발해버렸습니다. 이 땅에서.

자, 두 가지의 그림의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는, 1번은 이 미사일이 십자가라라면, 십자가가 우리한테 꽂혀있는 경우, 이럴 때는 사람들이 관람하러 올 수도 있고 또는 해석하려고 하고, 멀리서 관측도 되고, 구경하려고도 오고, 안 그러면 자기일이 바쁘면 못 본 척하고 자기 볼 일 보러 가고, 자기 마음대로 활동할 수 있죠. 근데 2번 십자가는 폭발해버리면 여기에 교회고 예배당이고 건물이고 집이고 사람이고 뭐가 있든 간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자, 제가 묻습니다. 십자가가 현재 1번 상태입니까? 2번 상태입니까? 이게 질문입니다. 1번 상태입니까? 2번 상태입니까? 둘 중에 하나인데. 어느 게 현재입니까? 정답은 2번이에요. 2번입니다.

십자가가 진리잖아요. 진리가 이미 폭발해버렸어요. 이미 진리가 폭발했어요. 폭발했기 때문에 사람들 눈에는, 이게 꽝! 하고 폭발했으니까, 십자가가 있어요? 없어요? 십자가가 없습니다. 오늘 강의의 취지입니다. 십자가라는 것은 없습니다. 이런 건 있어요. 십자가 모형에다가, 여자들 십자가 목걸이에다가, 차에 달려있는 십자가 그건 있는데, 이게 십자가가 이미 폭발을 해버린 거예요. 폭발해버렸기 때문에, 만약에 어떤 사람이 성령과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어떻게 아느냐 하면은 이미 죽고 난 뒤에, 죽은 자의 눈에만 띄는, 이미 십자가 진리는 완료다. 이미 게임오버에요. 끝난 거예요. 이 땅에서. 이미 끝난 거예요.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아느냐 하면은 1차 죽음, 1차 죽은 자에게 십자가가 보이는 겁니다. 십자가가 느껴지는 거예요. 1차적인 죽음에. 자기가 죽었다는 이 말을 설명하려면 몇 시간이 걸리는데, 여기서 제가 간단하게 설명해드릴게요. 간단하게 한 10분 동안 설명해드릴게요. 인간이 죽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여러분들 어릴 때 어떤 것이 서러운가 하면은 물론 엄마가 없는 것도 서럽지만 약간 크면 어떤 것이 서러운가 하면 같이 놀아줄 사람이 없을 때 가장 서러워요. 같이 놀아줄 사람이 없을 때. 식구인데 아빠도 돈 벌러 나가고 엄마도 돈 벌러 나가고 아무도 없을 때, 할머니가 와서 맨날 초콜릿 먹이고 아이스크림 먹여서 살만 찌고.

같이 놀아줄 사람이 없을 때 애들은 서러워요. 애들은 누가 제일 좋은 사람인가 하면 자기하고 놀아준 사람이 제일 좋아요. 아빠엄마라서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애들한테는 계모냐 친엄마냐가 아무 의미가 없어요. 놀아줄 사람이 있으면 최고입니다. 같이 놀아줄 사람. 아빠엄마 둘이 이혼하든 관계없어요. 사춘기 때 나하고 놀아줄 사람만 있으면 뭐 이혼을 하던 세 번을 하든 관계없어요. 같이 있든 없든 관계없어요, 같이 놀아줄 사람만 원합니다. 그 이유가 있어요. 인간에게 단독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단독자, 단독이라는 것은 이게 상대성을 갖고 있어요. 상대성. 상대성 또는 대상성이라고 하는데. 단독을 단독으로 하면 혼자 있다고 해서 단독이 아니에요. 저 사람과 차이남을 통해서 나는 홀로이다, 아니다, 라는 것을 아는 겁니다.

아까 제가 분명히 같이 놀아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죠. 애가 기어나가든지 걸어서나가든지 세상에 사람이 있어요, 없어요? 많아요. 많지만 많은 것 때문에 외로운 거예요. 왜냐하면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나에게 아는 척하지 않고 나에게 관심두지 않고 나하고 놀아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비로소 자기는 뭘 느끼느냐 하면은, 뭘 느낍니까? 단독자를 느끼는 거예요. 사람이 아예 없으면 그걸 못 느끼는데 많은 사람들 가운데 놀아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자기는 외로움을 느끼는 거예요. 그러면 만약에 어떤 사람이 자기하고 놀아준다? 놀아주게 되면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은 나와 너라는 이 관계성이 성립이 돼요. 많은 사람이 있어서 너가 아니에요.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나하고 놀아줄 때 비로소 그 사람은 나에게 너가 되는 겁니다.

다른 사람은 너도 아니에요. 그냥 있으나 없으나 관계없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은 니가 있으매 비로소 내가 된다. 나를 구성할 수가 있습니다. 나라는 것을 구성할 수가 있어요. 내가 누군지를 알려면 나하고 놀아주는 사람이 있어줘야 그 사람이 나한테 뭐라고 하는지를, 그걸 주워 모아서 그것으로 나를 구축하는 거예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상대성 또는 대상화라고 하는 겁니다. 대상화. 그래서 인간의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를 닫아두지 않아요. 만약에 자기를 닫아둔 사람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자폐증환자라고 해요. 자폐증. 자폐증환자. 점점 이야기가 어려워지면 안 되는데. 이건 상식이니까. 자폐증이란 자신의 말과 대상을 일치시킵니다. 이게 자폐증입니다.

그런데 정상인은 나와 너 사이에, 그림으로 그리면(○○), 근데 자폐증은 나와 너 사이가 하나가 되는 것, 그림으로 하면(◎), 이게 자폐증이거든요. 정상인이라고 하는 것은 나와 너 사이에, 내가 생각하는 너 사이에 걸쳐있는 것(⚭), 남이 나에게 뭐라고 해도 그게 나의 전부가 아니고 인정을 하면서도 여분의 것이 좀 남아있어 줘야 해요. 그래야 니가 내가 아니고 내가 니가 아닌 게 돼요. 그 여분의 것이 남아있을 때 비로소 너가 온전히 내가 아니기 때문에 나는 너를 너라고 부르는 거예요. 나와 다르기 때문에 너라고 부르는 겁니다.

만약에 부부가 하나가 돼버리면 못 살죠. 만약에 남편이 직장 가는데 아내가 같이 화장하고 직장 직원도 아닌데 같이 따라나서면 못 삽니다. 니가 왜 여기서 나와? 니가 왜 회사에서 나와? 나는 당신 없이는 못 살아요. 이러면 정말 찐다. 귀신도 아니고. 니는 집에 있어. 나, 집에 있으니까 외로워서 못 살겠어. 이래 돼버리면 문제가 크죠. 니는 니 인생 살아. 니 인생. 우리 낮에는 각자 자기 인생 살고 저녁에만 잠시 모이자. 이래 돼야 숨이 트이는 겁니다. 여기 왔는데 니 어디 갔냐고 전화하면 이거 뭐 스토커도 아니고 왜 이래요? 어린애도 아니고. 다 같은 성인이.

부부라고 하는 것은 각자의 인생을 인정하는데서 살 수가 있어요. 한쪽이 한쪽을 잠식해버리면 그거는 뭐, 그게 부부입니까? 진짜 온종일 같이 있는 부부도 있어요. 왜냐하면 꽈배기 장사를 한다든지, 치킨 장사를 한다든지, 하루 온종일 같이 붙어있으면 정말 이거는 질리죠. 정말 이거는 질립니다. 특히 약사들, 남편은 약사고 아내가 도와줄 때는 스물 네 시간 붙어있어요. 그래가지고 마스크 때문에 싸울 때는 아내가 싸우고 남편은 몰래 도망치고. 뒤에 숨어있고. 마스크 왜 안 파냐고 할 때는.

인간의 목적은 나를 아는 건데, 그냥 아는 것이 아니고 내가 절대자라는 것을 타인에게 증명하고 싶어서 인간은 사는 거예요. 나라는 것이 절대적이다. 그걸 나만 하면 안 되고 누가 옆에서 호응을 해 도! 그런 호응을 요청하는 자들을 우리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너라고 의미를 부여하는 겁니다. 그래서 나라는 사물과 의미가 일치하지 않아요. 자,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봅시다. 의미란 반드시 대상화되는 것을 통해서 의미가 발생되는 겁니다. 대상화. 아까 같이 의미하고 사물하고 일치하지 않아요. 일치되지 않고 의미란 대상화되는데, 이 의미를 붙일 때 누가 붙이는가, 본인이죠. 본인이~ 이렇게 하죠. 전두환이가. 내가 이 의미를 붙이는 거예요. 그리고 내가 의미를 확장하기 위해서 대상화, 남이라는 것, 너라는 것을 이렇게 초청하죠. 초청하고 잘해주고 밥 사주고.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없이 나만 있으면 내가 규정되지 않아요.

그런데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십자가가 뭐냐, 십자가는 이미 예수님과 십자가가 연결되면서, 우리 생각에는 연결되면 십자가를 없애버리고 예수를 믿으라고 이렇게 하면 되는데, 왜 사도바울에게 복음이 예수님 믿으라가 복음입니까? 뭐가 복음입니까? 십자가죠. 이것은 예수님 자신의 의미가 연결되어 있는 십자가를 통해서 반복적으로 오고 오는 이 시대에 십자가를 남기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어버리면 어떻게 되느냐, 그럼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버리면 어떻게 되느냐, 지금까지 강의 설명했습니다. 예수 믿으면, 저분은 예수님이다. 나를 구원해준다고 할 때, 그 의미 규정을 누가 내립니까? 구원받고 싶은 내가 내리잖아요. 이거는 사기죠. 이거는 사기입니다. 이거는 엉터리에요. 예수님을 믿는데 마치 이웃집 아저씨 믿는 것하고 똑같이 믿는 거예요.

그리고 “저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어떻게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면, “내가 엄마인데 내 자식 사랑하듯이 사랑합니다.” 이러면 아까 말한 천주교처럼 돼버리죠. ‘내가 자식을 사랑하는 그 사랑을 확장시켜버리면 하나님도 내 순수한 사랑을 받아주겠지.’ 이러면 그 의미는 누가 내린 거예요? 평소에 우리가 만만한 사람 불러다가 내가 나를 규정하고 싶은 것을 우회해서 하거든요. 저 사람을 통해서.

영덕에 보면 대게가 있거든요. 대게. “나 영덕대게 좋아해.” 그러면 옆에 같이 있는 친구가 하는 말이 “나는 영덕대게 먹는 인간은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이러면 친구관계 끝나버려요. 그러면 안 되잖아요. 계속 친구로 남아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도 쪼금 좋아해.” 영덕대게라는 전체에서 이만큼 좋아하는데, 아직까지 친구를 유지하기 위해서 걸쳐놓는 거예요(⚭). “나는 쪼금 좋아해.” 그럼 이 둘 사이는 어떻게 됩니까? 친구가 되죠. 어떤 친구? 보약 같은 친구가 되는 거예요. 근데 이 친구가 나중에 젊은 남녀 같으면 부부가 되거든요. 부부가 되고 난 뒤에 싸울 수도 있잖아요. 싸울 수가 있다는 것이 좀 어폐가 있다만. 부부가 싸울 수 있다고요. 이거 한번 생각해보세요.

이 사람들이 처음에 연애할 때 한 6개월이고 1년이고 이야기했죠. 둘이 사귀었잖아요. 자, 사귐이 뭐냐 하면은요, 이제 배웠으니까 적용해보세요. 사귐이란 나의 의미를, 나의 나 됨, 나의 절대적이 되기 위해서 당신은 나한테 얼마나 기여하고 보탤 것인가를 카페에 앉아서 서로서로 정치적인 협상을 하는 거예요. “나는 당신 같은 남자의 이 점이 참 좋아. 당신은 너무 미남이야. 당신은 너무 잘생겼어. 나는 그 점이 좋아.” 그래서 남자가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당신에게 한눈에 반했어. 너무 이뻐.” 이러다가 둘이 결혼했다고 칩시다.

결혼을 한 매개체가 뭐예요? 너는 이쁨이 유지가 되어야 되고. 그게 요건이었으니까. 저쪽은 잘생김이 유지가 되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결혼하고 난 뒤에 3개월도 안 돼서 이쁨, 잘생김도, 착함도, 아무리 좋은 향수도 3개월만 쓰면 악취가 되는 것처럼. 한 3개월 지나고 난 뒤에 별로 예쁘지 않아요. 별로 이쁘지도 않고, 놀라운 사실은 그 옆 동에 더 이쁘고 젊은 사람이 턱하고 와버렸을 경우에는...., 아까 뭐라고 했어요? 모든 의미는 뭐였다? 차이. 모든 개념은 차이에서 티 나는데, 그냥 확 티가 나버리는 거예요.

그럴 때는 남편을 나무라는 것이 아니고 본인을 나무라야 돼요. ‘이 등신아, 등신아, 내 눈이 그거밖에 안 됐냐. 수준이 그거밖에 안 됐나. 아이고, 이 등신아.’ 결혼해놓고. 결혼했을 때는 분명히 공통점이 있어서 결혼해놓고, 싸울 때는 이 공통점이 전부 다 허위였다는 것. 망상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겁니다. 이럴 때는 애 하나 낳아야 해요. 애 하나 낳으면 둘 다 관심사가, “어찌 이렇게 예쁜 애가!” 서로 닮았다고 싸우겠지만. 그러니까 관심을 딴 데 돌려버리는 거예요. 관심을.

영화에 이런 영화가 있어요. 좀비가 나오는데 좀비는 밤중에 소리에만 민감하다. 근데 좀비가 나한테 달려든다. 그럴 때는 이 좀비를 피하지 말고 다른 사람이 여기서 소리를 내는 거예요. 특히 소리를 낼 때, 나이트클럽 광고 번쩍번쩍할 때 소리가 나잖아요. 나이트클럽 광고판 소리로 주인공한테 달려든 이 좀비를 빼돌리는 그 영화, ‘반도’ 그 영화에 그 대목이 나와요. 빼 돌려서 간다고요. 그러니까 이거는 하나의 도피죠. 도피고. 모든 상처를 계속해서 지연시킵니다. ‘다음에 한번 보자. 딸 애 결혼시키고 니 한번 보자. 더는 안 산다.’ 이런 거 있잖아요. 지연시키는 거예요. 이게.

그런데 예수님에 대해서, 예수님이 십자가 지셨다고 할 때, 액센트가 어디에 가 있느냐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졌다, 예수님에게 액센트가 가버리면 그 정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희생했고 우리를 사랑했다. 이 말은 뭐냐, 내 쪽에서 예수님에게 걸쳐버리면 예수님이라는 대상, 타인이 나에게 이 정도 사랑했으면 양심이라도 어떤 예의라도 있어야 될 게 아닙니까? 내 쪽에서 뭡니까? 주님이 뭘 했는가를 보는 거예요. 자기의 몸을 던져서 나를 사랑했기 때문에 우리도 주님을 어떻게 사랑한다? 자기 몸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죠. 이거 지옥 가죠. 이거 지옥 가는 겁니다. 왜? 주님만 사랑했으면 이게 구원이 성사가 안 되고, 무슨 요소가 들어가야 돼요? 내가 주님을 사랑한 요소가 첨부가 되어야 하나님께서 결재, 수락이 된다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믿고 하는 것이, 이게 자기 부인이 될까요, 안 될까요? 절대로 안 되죠. 내 사랑이 첨부가 되어야 되죠. 첨부파일 있죠. 첨부가 돼줘야 내가 구원받는데. 주님이 이만큼 사랑했으니까, 그러니까 이거는 믿음이 아니고 주님께서 우리한테 뭐하느냐, 감정에 호소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감정에 호소하는 거예요. 부흥사들 많이 하는 것 있잖아요. “주님이 여러분을 위해서 살과 피를 내줬는데, 여러분은 꼴랑 십일조를 강조한다고 그렇게 기를 씁니까? 돈이 그렇게 좋든가요?” 뭐 이런 식으로. “자기들 새끼한테는 학원비도 그렇게 아끼지 않으면서 땅 끝까지 복음 전한다고 예배당 짓는데 왜 돈을 안 냅니까?” 돈 내봐 뭐 코로나가 덤터기 씌워 들고 가겠죠. 그런 식으로 사람들에게 감정에 호소하는 거예요. “여러분! 양심이 있어요? 없어요?” 뭐 이런 식으로. 그럼 돈 안 내면 졸지에 뭐가 돼요? 양심도 없는 존재가 돼버렸죠. 졸지에 그만 양심도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어요.

이게 그래서 액센트가, 사도바울은 누굴 지우느냐, 예수 그리스도를 지워버립니다. 지워버리고 십자가를 딱 해버리죠. 그러면 이 십자가는 뭐냐 하면은 인간 입장에서는 억지로 뒤집어씌운 십자가가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 한번 봅시다. 21절에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그냥 지나갔어요. 지나갔는데, “저희가 그를”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부사. “억지로” 불러다가 “억지로”. 꼭 바이러스 같아.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지가 와서 달라붙는 바이러스. 코로나19처럼 그냥 달라붙었어요. 이게. 십자가가 그냥 달라붙었어요. 누구한테? 시몬한테. 이 관계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연구하고 십자가 논문 쓰고 십자가 설명 듣고 그래서 믿어지는 게 아니에요.

만약에 그렇게 자꾸 십자가를 찾아다니면 이것은 뭐냐 하면은 자기의 감성을 스스로 끄집어내는 거예요. 자기의 장점 있잖아요. 나는 공짜로 먹지 않는다는 것. 나는 염치가 있어가지고 뭐든지 공짜로 받지 않는다는 것. 나는 양심이 있다는 것. 이걸 계속 자기가 개발해내야 해요. 착한 요소를 끄집어내어서 그 착한 요소와 하나님이 원하는 십자가와 연결 지으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실 때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제목을 이걸로 할까요? 공분. 모든 사람으로부터 공통적으로 전부 다 예수님에 대해서 분노를 냈다는 이 사실이 빠져버리잖아요. 이거 빠져버린 십자가는 알맹이 없는 껍데기 십자가에요. 가짜 십자가에요. 그러면 이 시몬이라는 사람은 기뻐했다? 투덜댔다? 몇 번이에요? 투덜대야죠. “참, 재수도 없지. 재수도 없지.”

이걸 가지고 성경에서는, 사도바울 편지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죽음이라고 합니다. 나의 죽음. 나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까지 투덜댐이거든요. 투덜댐. 나의 모든 의미시스템. 의미체계가 무용지물이 되는 거예요. 내가 지금까지 나다움을 유지하기 위해서 갖추었던 모든 의미들. 저 훌륭한 분이 바로 나의 어머니고 저렇게 훌륭한 분이 나의 아버지다. 이렇게 공부 잘하는 젊은이는 내 동생이다. 전부 다 의미를 둔다는 말은 그것이 나에게 나의 나 됨을 위한 너의 너가 되는 거죠. 그냥 살아있다고 너가 되는 게 아니에요. 나한테 의미가 될 때, 내가 너라고 이야기할 때 비로소 너를 통해서 내가 된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너에게서 나한테 좋은 점, 나한테 유리한 점만 골라내겠죠. 그렇게 규정할 때 거기에 누구도 우리는 같이 시도한다? 예수님, 마리아, 천사, 하나님, 전부 다 내게 필요한 너가 되는 거예요. 내 구원에 필요한 너. 나를 구원해서 절대적인 존재, 천국 가는 사람 만들기 위한 너. 이거는 내가 의도적으로 찾아다니는 거죠.

그래서 그렇게 찾아다니는 자기 모습을 보고 자기가 얼마나 기특하겠어요? ‘아이고, 참 내가 오랜만에 옳은 일 한다.’ 이런 식으로. 자기를 위로하겠죠. 이거는 나의 죽음이 아닙니다. 그거는 내가 너무나 생생하게 살아있어요. 물론 성도도 살아있어요. 뭐가 살아 있느냐, 내 안에 내가 죽었다는 증거가 생생하게 살아있죠. 이게 바로 십자가니까. “주께서 저를 구원했잖아요.” 이래 되는 거예요.

아까 그림을 다시 봅시다. 처음에 그림, 미사일이 안 터지고 그냥 박혀 있으면 우리는 이게 좋은 물건인줄 알고 그걸 연구하고 분석하고 믿고자하고 만지고 울기도 하고. 미사일 붙들고 “주여, 이렇게 나를 위해 죽었다니! 나는 해준 것도 없이 죄송합니다.” 하고 울기도 하는데. 실제로는 이 십자가가 박힌 게 아니고 뭐였다? 꽝! 제목을 이걸 할까? 그냥 터져버렸어요. 터져버리니까 미사일이 있어요, 없어요? 이 땅에 십자가는 없습니다. 다만 십자가가 들어온 그 성도들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10분 쉽시다.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124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18,067 자유게시판 광주강의20200717b 마가복음15장 21-23절(공분을 넘어서)-이 근호 목사 마가복음 최고관리자 20-07-19
열람 ➜ 자유게시판 광주강의20200717a 마가복음15장 21-23절(공분을 넘어서)-이 근호 목사 마가복음 최고관리자 20-07-19
18,065 자유게시판 40강-욥기 12장 1~6절(친구의 한계)20200719 이근호 목사 욥기 최고관리자 20-07-19
18,064 자유게시판 22강-빌 3장 8-9절(배설물)200719-이 근호 목사 빌립보서 최고관리자 20-07-19
18,063 자유게시판 주일학교 설교 / 십자가의 능력 / 200719 - 최고관리자 20-07-19
18,062 묻고답하기 죽으심을 본받아 빌립보서 최고관리자 20-07-19
18,061 묻고답하기 꿈 속에서 -송민선 성도님의 글 - 최고관리자 20-07-17
18,060 묻고답하기 “But” 그러나 - 최고관리자 20-07-17
18,059 자유게시판 꿈속에서 - 최고관리자 20-07-17
18,058 자유게시판 50강-호 13장 9-11절(왕을 주신 이유)200715-이 근호목사 호세아 최고관리자 20-07-16
18,057 자유게시판 20200713b 부산강의 : [시편]30(19편)-침묵의 소리 시편 최고관리자 20-07-15
18,056 자유게시판 20200713a 부산강의 : [시편]30(19편)-침묵의 소리 시편 최고관리자 20-07-15
18,055 자유게시판 강남-누가복음 3장 7절 (구원 시스템) 200707b-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최고관리자 20-07-14
18,054 자유게시판 강남-누가복음 3장 7절 (구원 시스템) 200707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최고관리자 20-07-14
18,053 자유게시판 광주강의20200626a 마가복음15장 16절(과거공유) 마가복음 최고관리자 20-07-12
18,052 자유게시판 39강-욥기 11장 12~20절(세상 시스템)20200712 이근호 목사 욥기 최고관리자 20-07-12
18,051 자유게시판 21강-빌 3장 7절(그러나)200712-이 근호 목사 빌립보서 최고관리자 20-07-12
18,050 자유게시판 주일학교 설교 / 십자가 / 200712 - 최고관리자 20-07-12
18,049 묻고답하기 배설물과 의 빌립보서 최고관리자 20-07-12
18,048 자유게시판 서울의존강의20200709b 베드로전서4장 11절(끝장)-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최고관리자 20-07-12
18,047 자유게시판 서울의존강의20200709a 베드로전서4장 11절(끝장)-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최고관리자 20-07-12
18,046 자유게시판 광주강의20200626b 마가복음15장 16절(과거공유) 마가복음 최고관리자 20-07-11
18,045 자유게시판 대전-122강 마태복음27장5절-10절(피밭)20200630-이 근호 목사 마태복음 최고관리자 20-07-10
18,044 자유게시판 대전-60강 사무엘상18장17-절(끝과 중심)20200630-이 근호 목사 사무엘상 최고관리자 20-07-10
18,043 묻고답하기 The Coffin of The Law 율법의 관 - 최고관리자 20-07-10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