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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200713b 부산강의 : [시편]30(19편)-침묵의 소리자유게시판시편

20200713b 부산강의 : [시편]30(19편)-침묵의 소리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19편을 1절부터 본 사람은 그 다음 구절에 갑자기, 갑자기가 아니죠. 율법이 나온다는 사실을 유념하는 게 좋아요. 들리지 않는 소리, 자연들은 알고 있고 인간들은 몰랐던 그 보이지 않는 소리가 구체화되는 거예요. 자연세계에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물질화 돌 판이란 걸 통해서, 율법을 통해서 구체화될 때 여기에 이런 세계로 관여한 사람이 구약에서 선지자라고 하는 겁니다.

선지자가 이 세상에 어떤 위치에 있느냐는 것은 구약보다도 신약을 찾아보면 최종성을 볼 수 있어요. 누가복음 20장 6절에 보면, 세례요한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여러분 아시는 이야기지만 읽어보겠습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고 있으니까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우르르 몰려왔지요. 뭐라고 하느냐? 당신은 누구 권위로 이렇게 했느냐, 라고 했어요. 지금은 선지자가 뭐냐를 설명하는 거예요.

첫째 시간에 선지자는 이원구조에서, 이원구조는 인간들이 만들어낸 구조지요. 이원구조에서 일원구조로 바꾸는데 등장한 것이 선지자다. 그렇다면 누가복음 20장에서 뭐냐 하면, 누구 권위, 누구 권세로 이 말을 전하느냐, 라고 했을 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느냐 하면, 세례요한을 언급했어요. 그러면 너희한테 묻는다. 세례요한은 누구 권세로 선지자 노릇을 했느냐고 물었어요. 이제 질문한 사람이 답변할 처지가 됐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서로 의논했어요. 5절에 보면,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 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에게로 서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저희가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고 돼있어요. 그러니까 대제사장이나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도 군중들은 무서운 모양이죠.

군중들은 그동안 뭘 믿고 있었느냐 하면, 이원구조에서 하늘에 어떤 권세가 있을 것이고 그 권세에 의해서 확실하게 우리 눈앞에 들리지 않는 소리가 들리는 소리로 등장했다고 믿고 싶은 사람이 등장했으니 세례요한이란 말이죠.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만약에 바리새인과 대제사장이 세례요한은 하늘에서 온 것이 아니다. 그냥 사이비다. 우리와 같은 보통 인간이라고 했다면 민중들이 들고일어나서 그런 소리하는 바리새인이나 대제사장을 돌로 쳐서 제거해버리죠.

제거대상이 돼버리는 겁니다. 왜 제거대상이냐? 그래야 세례요한은 하늘의 권세와 우리 사이에 눈에 보이는 인물로 등장했다는 것을 믿는 안도감, 안정감을 유지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딴 건 욕해도 우리교회 목사 욕은 하지 말라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그 목사 욕해버리면 자기는 눈에 보이는 사람을 믿고 싶은데 그게 안 보이면, 안 보이는데 어떻게 예수를 믿어? 그들로서는 자기 믿음이 중간에 끊어졌다고 생각하는 거죠.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세례요한을 끄집어낸 이유가, 세례요한에 두 가지 기능이 있어요. 하나는 눈에 보이는 식이다. 이건 구약식이에요. 구약의 선지자 식이에요. 눈에 보이는 식. 구약사람들은 시간성을 믿거든요. 언젠가 선지자는 온다. 언젠가는 엘리야가 올 것이다. 왔다면 그들은 세상의 모든 근심걱정은 잊을 것이다. 왜? 실제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의 증거를 눈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상당히 반가운 거죠. 사실은 그들이 다 자기를 위해서 그런 일 하지만.

두 번째는 세례요한이 도중에 끊어졌다는 것, 나중에 죽게 된다는 거예요. 이게 난감하지요. 왜냐하면 마지막 선지자 같으면 끊어지면 안 돼요. 끊어질 경우는 있어요. 언제냐? 선지자가 바턴을 누구한테 넘기느냐 하면, 진짜 선지자 시대를 끝내고 마지막 최종 식이 뭐냐? 선지자가 아니고 메시아 시대가 오게 되면 더 이상 선지자가 필요가 없지요. 그냥 소개만하다가 마지막 진짜 본래의 분이 등장한다면 하나님이 오신다면 더 이상 선지자는 불필요하다 이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선 눈에 보이는 구약의 시대다. 두 번째는 예수님 본인이 바로 메시아란 사실을 세례요한이 끊어짐으로써 자기는 바턴을 예수님에게 이어졌다는 것을 알리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알려봤자 그들이 믿습니까? 안 믿지요. 그래서 누가복음 20장 9절부터 비유를 할 때 어떤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한테 세를 줬다는 비유가 나오는 거예요. 선지자를 보내고 죽이고 선지자를 보내고 죽이고. 마지막엔 선지자를 더 이상 안 보내고 아들을 보내니까 사람들의 아들마저 죽여 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너희들이 선지자를 죽였다는 거예요. 선지자를 죽여도 하나님께선 꾸준하게 죽여도 또 보내고 죽여도 또 보냈다. 그건 무슨 의미냐 하면, 인간의 세계에서 눈에 보이는 대로 믿는 인간들 또는 자기를 위해서 사는 인간들은 결단코 메시아를 알아 볼 수 없기에 오는 선지자를 전부 다 죽여 버린 거예요. 내가 내 식대로 해서 천국 간다는 것이 성립되지 않다는 것, 나를 위해서가 유지되는 한 하나님 나라에 받아주지 않는다는 것을 예수님을 통해서 분명히 언급해주시는 겁니다.

그렇게 아시고 다시 시편 19편 돌아가 봅시다. 첫째 시간에 한 것을 잠간 언급해보면, 언어가 있다. 언어 이전에 소리가 있지요. 들리는 소리. 소리와 언어는 창세기 11장에 의하면 이것이 결집을 낳습니다. 정신 통일이죠. 군에서 조교나 지휘관들이 이야기할 때 소리 없이 언어 없이 하면 군대로 하나로 돌아갑니까? 아니죠. 자꾸 고함지르죠. 명령하잖아요. “똑바로 해!” 이런 식으로 하지요.

소릴 외치고 소리가 안 되면 또 문자를 보내서 상병, 이병 작대기, 그게 다 언어거든요. 언어를 붙이고 계급장에 유니폼 입히고 정신 통일하는 거예요. 정신 통일하면서 인간을 위해서 모은 걸 법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법의 그물망으로 짜여있습니다. 좀 더 이야기해볼까요.

나는 무엇이냐? 법으로만 설명이 돼요. 나는 본이 어디고, 출신이 어디고. 그게 전부 다 법이에요. 족보, 법. 나는 어느 학교 출신이고, 전부 다 나라는 것은 법으로만 설명이 돼있어요. 나는 천사 출신이고. 이러면 안 돼요. 법은 인간의 소리와 언어로 설명이 돼야 돼요. 모든 게. 법은 쪼개면 언어가 되고 언어는 다른 언어로 끊임없이 교환됩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게 뭔 뜻인데?” “좋아한다는 뜻이야.” “좋아하는 게 뭔데?” “나, 너 없이는 못 산다는 뜻이야.” “그게 무슨 뜻인데?” 나중에 말 재료 끝나면, “그냥 사랑한다는 말이야.” “그게 뭔데, 그래?” 계속 설화하고 반복하고 평생을 이렇게 사는 거예요. 계속 자기 자신을 표현할 때는 언어와 법으로만 표현된다 이 말이죠.

그래서 인간세계는 법으로만 하기 때문에 국가의 엘리트들은 뭘 전공한 사람들입니까? 법 전공자지요. 사법고시 출신. 뭘 알아야지요. 조훈현이 같은 바둑 두던 사람은 국회의원 못하지요. 그리고 이주일, 국회의원 못합니다. 국회에서 하는 일은 법을 입안하는 거예요. 국민들의 뜻을 법으로 만들어서 입안해서 다음 세대도 계속 법으로 유지하는 그 일을 하는 게 국회의 일이란 말이죠.

행정부는 법을 만들 자격이 없고 만들어진 법을 시행하는 그 권한이 행정부고, 국회는 없는 법을 새로 만드는 거예요. 민식이 법인가 그런 것 있잖아요. 있는데 기존의 법을 알아야 될 것 아닙니까. 인간세계가 이런 세계란 말이죠. 정신을 통일, 이게 중요하죠. 이렇게 법으로 하게 되면 정신이 통일되고 정신을 통일하는데 이바지하기 위한 바로 이 땅에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난 겁니다.

인간의 생각은 기존의 조직체에 이바지하는 것. 저는 오늘 제목을 이렇게 하겠습니다. ‘규모체’ 이런 단어가 없는데 제가 만들었어요. 인간은 규모를 전제로 해서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겁니다. 규모로 만들어낸 어떤 체, 눈에 보이는 형식. 이게 말이 안 되면 제목 안 할게요. 자꾸 규모를 생각하는 거예요. 인간은 어디로 도망가느냐 하면, 규모 있는 자기만의 아지트 쪽으로 신속하게 도망을 쳐버려요. 이것만큼은 내가 무너지면 안 된다, 훼손되면 안 된다. 그래서 규모체 안에서는 철저하게 나를 위해서만 통용되는 거예요.

어제 낮 설교에 방주이야기 들었습니까? 제가 뭐라 했느냐 하면, 방주에서는 이렇게 사시는 겁니다. 방주에서는 어떻게 산다고요. 흠 없는 제물의 죽음에 동참됐다는 그 자세로 사시는 것이 바로 방주 안의 세계, 신약에 보면 예수 안의 세계입니다. 홀로가 아니죠. 내 규모체가 아니죠. 나를 위함이 아니고 나를 위해서 죽었다가 사신 자를 위해서 살 게 함이라. 고린도후서 5장 15절. 주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 그 규모란 말이죠.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은 자기 규모로 세상을 살면서 이 세상에 있으면서 나를 나답게 만드는 그걸 꼭 쥐고 있어요. 마치 재래시장에 할머니들이 잔돈 바꾸려면 옛날 바지에 보면 안 주머니 있잖아요. 속주머니에서 온갖 지폐들 다 끄집어내듯이 자기 안 쪽에 깊숙이 감춘 뭐가 있어요. 예수고 하나님이고 이것만큼은 빼앗기면 진짜 자실한다는 정도로 뭐가 있어요. 그게 나의 규모체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시편 19편에서 어떤 소리입니까? 소리가 아니고 들리지 않는 소리지요. 소리와 언어에서 이 세계로 들어오려면 정신통일, 결집이 풀어 해체돼야 돼요. 그러나 이것은 애굽 같아서 해체될 여지를 보이질 않습니다. 오히려 핍박을 하게 되면 바로 왕은 더 강력하게 자기 노예들, 히브리인들은 더 압박을 하게 돼있어요.

그래서 현재 우리가 이 세계, 국가라는 규모의 일원으로 사는 삶에서 들리지 않는 소리까지 나온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불가능한데 아까 믿음, 행함 말고 반대편에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함께 있음이죠. 정말 중요한 건데 믿음 생각하지 말고 함께 있음을 생각하면 되는 거예요. 믿음을 생각하다 나중에 치매 걸리면 본인이 본인 발등 찍어요. “그래 나 지옥 가. 이게 믿음도 없어.”

믿음이라 하는 것은 행함이냐, 믿음이냐 할 때 믿음이고 진짜 본질은 뭐냐? 함께 있는 거예요. 죽어도 주께서 죽이시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애굽을 나올 때 믿음으로 나온 게 아닙니다.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함께 있음을 언급하는 거예요.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을 뭐라 했습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 했잖아요. 거의 미친 거죠.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

여기서 길게 하면 논리가 복잡하니까 간단하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여러분들이 은 나팔 어디서 부는지 아실 거예요. 여리고 성 무너질 때 빰빠밤빠 불었지요. 그리고 기드온이 전쟁할 나팔 불었지요. 자, 나팔은 뭐냐 하면, 이미 빠져나왔다는 상황, 이원구조에서 함께 있으니까 이 안에서 일원구조가 돼요. 이 나팔을 승리의 나팔이라 해요. 승리할 것을 기대한 나팔이 아니고 승리했음을 모든 것이 끝났음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땅땅땅, 합격 종이에요.

가둬놓고 지들끼리 격투기하는 것 있잖아요. 격투기하다 얻어맞고 케이오 되고도 씩씩거리면서 달려드는 사람 있어요. 그때는 심판 쪽에서 빨리 땡땡땡 쳐요. 끝났어, 끝났어. 달려들지 마. 그렇게 은 나팔은 이미 끝난 거예요. 여리고 성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은 나팔을 불어버린 거예요.

그러면 이 세상은 나팔 부는 의미대로 실행될 수밖에 없어요. 다 이루었다. 끝났다. 게임오버. 이 은 나팔이 바로 들리지 않는 소리에요. 들리는 소리 보이는 언어에서는 감히 들리지 않는 소리가 은 나팔 승리의 소리에요. 이게 최종성입니다. 그것을 바로 구약 때부터 누가 보여주는가? 바로 선지자들이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면 오늘 본문을 다윗의 시라 했는데 다윗은 왕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왕은 표현이고 뒤에는 선지자 노릇을 하고 있는 겁니다. 다윗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어요. 다윗이 승리의 소리를 어디서 끄집어내느냐? 대자연에서 끄집어내는 겁니다. 왜 끄집어내느냐 하면, 대자연은 이원구조가 아니고 일원구조기 때문에. 코스모스나 사슴이나 이 대자연은, 마태복음 6장에 나오듯이 참새나 들풀이나 있는 그대로에요. 있는 그대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참새나 들풀은 하나님의 장갑이라고 볼 수 있어요. 아까 장갑이라고 했잖아요. 있는 그대로, 살려주면 살려주는 그대로 먹이시면 먹이시는 그대로에요. 그 이야기를 하면서 너희들은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고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내일까지 어떻게 살까, 그것도 염려할 것 없다. 마치 뭐와 같아라? 내일 베이는 들풀과 같아야 되고 그 다음에 창고도 없이 아무 대책도 없이(같은 말이에요) 하루치 양식 먹는 참새와도 같아라. 주님 말씀입니다. 이것은 물론 예수님도 그 식대로 살아가게 되지요.

은 나팔 나왔으니까 계속 이어보겠습니다. 은 나팔은 승리의 나팔이라 했어요. 이미 승리했다는 거예요. (오늘 제목을 ‘은 나팔’로 할까) 승리의 나팔이란 어떤 상황이냐 하면, 이게 전쟁할 때에요. 사도 바울이 말하는 대로 이미 성도는 영적 전쟁 속에 있다. 아까 베드로도 이야기했지요. 내가 하나님 말씀 듣는 것과 사람의 말을 듣는 것과 어느 것이 옳은가를 분간하라.

그러면 그냥 하나님 말씀 듣는다고 하면 아무 문제없는데 갑자기 여기서 승리의 하나님 되려면 반드시 패배하는 쪽이 짝을 이뤄야 되지요. 사람의 생각=패배자로 보는 겁니다. 그럼 사람의 세계에서 가만있겠습니까? 베드로 죽이려고 잡아넣었잖아요. 그랬는데 천사가 또 열어주네. 그런다고 베드로가 이 땅에 오래 사는 건 아니고요. 살려줄 때까지만 사는 거예요.

성경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은 어떤 인간도 자력으로 주의 나라에 간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인간에겐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떤 인간도 구원받을 없다, 라는 것을 강조하는 이유가 뭡니까? 그 다음 구절이 나와요. 율법의 기능 때문에. 7절에, 여호와 율법은 ( )다. 여기서 인간이 지킬 만하다. 인간이 지키면 천국 갈 수 있다. 이런 내용이 나오는 게 아니고 율법이 갖고 있는 양보가 안 되는 속성을 언급해요.

7절에 양보가 안 되는 속성이 뭐라고 돼있습니까?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결국 이 말은 뭐냐 하면, 소성한다는 것은 이미 죽어있다는 것이고, 눈을 밝게 한다는 것은 눈이 어둡다는 이야기고, 지혜롭다는 것은 어리석다는 이야기거든요. 시편에 나오는 대로 전부다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전쟁이 성사돼야 되고 전쟁에서는 승리가 돼야 되고 승리의 나팔을 불어야 되는 그 내용이 어디 안에 있다는 말입니까? 율법 안에 있다는 거예요. 율법이 최종성이라 한다면, 최종성에서 거꾸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최종성에서 과정성이 나오지요. 최종성에 이를 때까지 어떤 과정을 밟느냐 하는 겁니다.

그럼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서 자연은 뭘 알고 있다? 자연이 뭘 아는 것보다도 율법이 그 완성을 향하여 가는데 보조역할 아주 자연은 아무 고민거리 없이 완벽하게 지금 참여되고 있다는 겁니다. 이게 자연세계가 갖고 있는 여유로움, 편안함, 고민 없음, 염려 없음,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할 정도로 아무 걱정 없음이에요. 왜? 주께서 말씀대로 이루는 그 일에 그들은 말려 들어가면 되니까요. 코로나가 오든 뭐가 오든 그냥 말려 들어가면 돼요.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율법의 완성은 어디서 어디까지 과정이냐 하면, 죽어야 되는데, 지옥이죠. 죽음에서 생명을 얻는 거죠. 아까 문명화된 세계에서는 문명화 때문에 생명이 없지요. 이 땅에서는 생명이 없는 거예요. 살다가 구십 넘어 죽는 것은 그건 목숨이에요. 그건 목숨이지 생명이 아니에요. 인간 목숨이지 주님의 목숨이 아니란 말이죠.

인간 목숨과 무슨 목숨을 바꾸려고 주님께서 시도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과 인간 목숨을 바꾸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내 피와 내 살을 언급하신 거예요. 네 살, 네 피는 더러워서 안 받는 거예요. 천국에서 안 받아요. 안 받는 걸 굳이 이어본들 인생 참, 진짜 아무리 살아도 소용없는 헛짓하고 살은 거예요. 아까 말씀드린 대로 꿈속에 살은 겁니다.

들리지 않는 소리가 기존에 있는 인간세계, 언어와 법으로 된 세계로부터 주께서는 끊어내서 탈출을 시키겠다는 거예요. 가정에서의 탈출, 국가에서의 탈출, 어떠한 형편에서의 탈출, 어떤 교회 형편에서의 탈출. 이것이 바로 다 이루었다는 율법의 완성으로 끄집어내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승리했음을 좋아하지 말고 그 과정에 참여되고 있음을 감사히 여겨야지요.

그러면 이제부터는 쉬운 겁니다. 여러분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율법에서 사랑으로 그 과정이 어떤 과정이냐? 요한일서에 나오는 사도 요한이 이야기한 걸 적습니다. 사랑에는 정죄함이 없나니, 또는 로마서에 있잖아요.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뭐가 없나니? 정죄함이 없나니. 이건 무엇을 주목하라는 거예요? 정죄함이 어디서부터 주어지는가, 누가 정죄함으로 누가 함부로 최종적으로 우리를 지적할 수 있는가? 우리는 정죄함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러한 인간의 몸으로 태어난 거예요.

어제 낮 설교처럼 우리가 태어난 목숨은 어디 가는 목숨이다? 지옥 가기 위한 목숨이죠. 먹고 마시고 뭘 하든 방향성이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는 목숨이에요. 이 목숨을 우리 힘으로 목숨 자체로 방향을 돌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누가 오느냐 하면, 사랑이 오거든요. 이 사랑에 대해서 로마서 13장의 말씀처럼, 사랑은 모든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율법을 이룰 때 하나님의 의가 주어지는 겁니다. 의롭지 않은 우리를 주께서, 말 잘해야 돼요. 의롭지 않은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의롭지 않은 우리를 예수님의 의를 드러내가 위해서 주의 일에 참여시킨 겁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 하나님의 의는 예수님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를 하나님의 의 되게 하는 거예요. 안 되고 싶어도 우리가 고사하고 사양해도 안 돼요.

예수 그리스도가 찾아오는 자기 목적을 우리가 거부한다고 해서 중간에 실망해서 그냥 가는 법이 없어요. 주님은 자기 목적을 기어이 우리 평생을 통해서 이뤄지게 합니다. 방법은 뭐냐 하면, 우리로 하여금 죄 짓게 하는 방법이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죄인 되게 하는 방법이에요. 이런 말도 참 가려서 해야 되니 어려워요. 예수 믿으니까 죄 짓자는 게 아니라 죄 아닌 것도 죄로 드러나게 하신다니까요. 우리로 하여금.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간음 안 해도 마음속으로 간음하면 이미 무슨 죄다? 간음할 뻔한 죄가 아니고 간음자에요. 그냥 간음자라고요. 살인 안 해도, 박원순이 죽어 버려라, 이미 이것은, 분명히 합시다. 박원순이 죽어 버려라. 여러분, 자살한 겁니까, 자살 당한 겁니까? 이게 중요한 거예요. ➀자살했다. ➁자살 당했다. 이 ➁번이 모순된다고. 자살에서 스스로 자(自)에요. 스스로 죽는데 당한다는 말은 뭐냐 하면, 누가 떠밀 때 당한다는 거예요.

자살 당했다는 말은 고소한 여자, 나와. 죽여 버린다고 할 때 이렇게 되는 거예요. 박원순을 고소한 사람을 내 손으로 조지겠다고 할 때는 ➁번이 되는 거예요. 박원순이 자살하고 싶은 게 아니고 고소당해서 자살했기 때문에 사실은 자살한 것이 아니고 자살 당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죄를 당한 거예요.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자꾸 나를 위해서라는 최종성을 가져가는 그러한 품성을 지니고 태어났어요. 이 땅에. 예수를 믿던 하나님을 믿던 결국은 뭐냐? 나를 위해서, 에요. 그래서 내가 나를 포기를 못해요. 나를 위해서 하나님 믿는 것을 구약에서 두 자로 ‘우상’이라 하거든요. 예수도 우상 되고 여호와도 우상 돼버리고 뭘 시작해도 전부 우상 돼버렸어요.

이게 그냥 사상적으로만 꿍하고 있는 게 아니고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나의 규모체, 내 아지트는 부서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나를 위해서가 모든 행동과 몸짓과 생각과 발걸음과 모든 자리에서 대화 가운데서 그게 여지없이 다 노출돼요. 속 시원하게 말씀드릴까요? 이겁니다. 이리저리 따져보면 이거에요.

사는 게 죄에요. 아이고, 인간아. 왜 태어났나. 그냥 사는 게 죄에요. 살아 있는 아버지가 죄고, 살아 있는 어머니가 죄고, 나도 마찬가지고, 살아 있는 자식이 죄고, 그냥 살아 있는 게 죄가 돼요. 그런데 이것 알 때까지 주께서 얼마나 우리를 위해서 애썼습니까. 우리가 이 고백을 할 때까지 누가 이걸 알리요. 사는 게 죄고 내가 죄인입니다. 이걸 누가 알겠습니까? 아무도 몰라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주님과 함께 있는 거예요. (오늘 제목이다. 이게 제일 낫다. 벌써 세 번째^^) 주님과 함께 있는 이런 세계, 하나의 세계, 둘의 세계가 아니고 죽어서 천당 가는 게 아니고 이미 천국이에요. 우리는 이미 천국의 맛을 보여줘야 된다고요.

우리 집에 손님 왔는데 둘 다 사람이라고 여겼는데 만약에 갈치가 갈치를 요리해서 갈치를 낸다면 이게 말이 안 되죠. 사람이 갈치를 요리해서 사람이 먹어야 되지 않습니까. 레위기에 보면 성도는 하나님의 양식입니다. 맞지요. 내가 흠향한다고 했으니까. 양식을 갈치 요리로 바꿉시다. 갈치가 갈치를 요리해서 갈치를 내오면 되겠습니까? 아니죠.

갈치 자리에 하나님이 들어가야 되지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요리해서 스스로 만족스럽게 먹을 수 있는 양식을 본인 손에서 만드시는 거예요. 이 이야기가 되게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에요. 레위기에서 제사에 나오는 양식들이 누가 잡수시려는 거예요? 먼저 하나님부터 잡숫고 만족하다는 한도 내에서 떡과 포도주를 나눠주는 거예요. 이걸 화목제물이라 하는 거예요. 내 기분 좋음에 같이 나눠먹어라. 그래서 유월절 어린양 때 주께서 떡을 나눠주고 살을 나눠주고 이게 새 언약, 마지막 계약이에요.

주님과 함께 있을 때 우리가 죄인 되었다 하는데 여러분, 그것에 대해서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주님은 우리보다 더 큰 죄인 되었어요. 물론 주님의 죄인 된 그 재료는 어디서 가져왔습니까? 우리가 죄인인 걸 미처 몰랐을 때 내 죄를 미리 가져가서 우리와 동행을 하시는 거예요. 이게 과정인데요.

십자가가 사랑이죠. 율법에서 다 이루었다가 되잖아요. 온전하고. 그럼 율법에서 뭐가 나온다? 과정이 나오지요. 그러면 신약 때는 십자가에서 뭐가 나와요? 십자가만이 영생이 될 수밖에 없는 과정이 나오겠지요. 이 과정이 하나님이 성령 주셔서 우릴 구원하려 온 게 아니고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란 걸 알려주기 위해서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과정 속에 우리를 자기 백성으로 참여하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구약적으로 보면 왕이잖아요. 우리는 뭐가 되느냐? 그 왕의 백성이 되지요. 그러면 구약에 있는 이스라엘 원리가 딱 맞는 거예요. 왕이 왕 됨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왕의 백성으로 기꺼이 감수하면 되는 거예요. 이 논리에 따르면 우리가 죄인 된 것은 기꺼이 감수 정도가 아니고 감사해야 될 찬양해야 될 일이 되는 겁니다. 죄인으로 드러난 것을.

그러면 죄 지어야 죄인으로 드러나지 않습니까, 하는데 가만있어 보세요. 코로나 옵니다. 가만있어 보면 호텔에서 하겠다, 못하겠다, 오고 하여튼 간에 가만있으면 교회 물새고요. 왜 세상이 내 뜻대로 안 되느냐, 라고 광야에서 백성들이 한 역할이 뭐였습니까? 하나님께서 광야를 지나가도록 한 역할이 뭡니까? 원망하라는 거예요.

왜 원망하느냐 하면, 하나님을 이용해서 애굽에서 살던 식대로 짜장면도 먹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광야에는 중국집이 없어요. 애굽에 살던 그 본성 그대로 광야를 통과케 하는 겁니다. 그게 하나의 과정이에요. 통과하면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그러니까 너는 네 힘으로 함께 있음이 아니고 네 힘으로 뚜벅뚜벅 계단 밟아서 천국 못 간다. 약속의 땅에 못 간다. 갈 수 없다는 겁니다.

계단 말로 엘리베이터, 계단 말고 함께 이 광야를 지날 때 이 세상이 힘들고 지옥 같지만 주님이 함께 의도적으로 하게 하신 삶의 환경입니다. 여기서 함께함이 아니고 단독으로 내가 한다는 일체 성립되지 않습니다. 좀 더 나가보겠습니다.

율법 나왔으니까 이제부터 별로 어려운 것 없어요. 율법이 나왔다. 율법을 지키는 방법, 하나는 인간이 지킨다. 이거는 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서기관들, 그 당시 유대인들이 다 보여준 거죠. 두 번째는 반대지요. 인간이 못 지킨다. 그러면 율법을 다른 말로 바꾸겠습니다. 율법이 언약이지요. 모세언약. 언약을 인간이 지킨다가 되면 반대, 공격하는 반(反)-언약이 되죠. 두 번째는 우리가 못한다. 이것은 언약 그대로지요. 친-언약, 언약 친화적이죠. 이 둘이 있어줘야 과정이 성립돼요.

그럼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저쪽은 자기 정당성을 주장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고 교회 안 다녀도 마찬가지고. 시장도 마찬가지고 해운대 아파트도 마찬가지로 자기 정당성을 주장하겠지요. 그런데 친-언약을 내가 못하지요. 왜 못하느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합니까? 율법에 의하면 죄인이기 때문에. 나 죄인이라서 아무리 해도 율법 못 지켜. 율법은 완전해, 온전해, 완벽해. 그러나 이건 우리 힘으로 할 수 없어.

함께 있음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나는 못합니다, 라고 할 수밖에 없어요. 못합니다, 플러스 다 누가 하셨습니다? 주께서 하셨습니다. 나는 못합니다. 주께서 하셨습니다. 자기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 지고. 자기 부인하게 되면 우리는 주저앉아야 돼요. 천당 못 간다고 주저앉아야 되는데 주께서 주의 과정에 참여된 사람은 주저앉지 말고 자기 십자가 지고 그 다음에 누굴 따라오라? 나를 주님을 따라오란 말이죠.

그전까지는 주님이 함께 없으면 우리는 못하나 잘하나 누구만 쳐다보고 살아야 돼요? 나만 쳐다보고 잘 되면 기고만장해서 헌금도 하고 그러다 좀 못 되면 주저앉아서 교회 안 나가고 그래요. 자기기분에 죽고 자기기분에 사는 겁니다. 특히 이 죄인 됨을 아는 사람들에 있어서 이 세상의 이원구조는 몽땅 다 뭐냐? 시시하기 짝이 없는 고민거리 대상도 안 되는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아무것도.

내가 교도소 갔다. 이게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심지어 바울과 실라는 교도소 가서 그동안 못 잔 잠을 다 잔다고 쿨쿨 자버렸어요. 얼마나 잠을 잤으면 그만 자라고 깨웠어요. 진짜 바울과 실라인지 베드로인지 구분 안 되는데 대충 사도행전 16장인데 이제는 나도 죄인 되어 하나도 모르겠어요. 사도행전 12장 6절에 베드로가 안 깨웠으면 그냥 잘 뻔했어요. 옆구리를 쳐서 베드로여 일어나라고 했어요.

이 말은 베드로는 집에 자나 교도소 가나 자기는 집에서 자는 것도 시시하지만 차이가 없다는 뜻이에요. 얼마나 자기를 생각 안 했으면 내가 지금 어느 공간에 어느 시간에 수명은 몇 년 남았는지 그런 것조차 생각 안 한다니까요. 지금 이 순간 주께서 하신 일에 과정으로 참여한 거예요. 나는 옥에 갇혔으면 옥에 갇힐만해서 갇힌 거예요. 왜? 그동안 집에 있는 것도 잘나서 집에 있는 게 아니고 주께서 봐줘서 집에 있었던 거니까.

교도소에 있으나 사도 바울처럼 폭풍 속에 있으나 거기서 풀려나나 그것마저도 폭풍 속에서도 주께서 구원을 하시니까 사용하시니까 하나의 들풀, 하나의 참새로 그렇게 자기 자신을 간주하시면 전혀 어려울 게 없지요. 다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 대해서 휘둘리지 말라는 거예요. 이 세상의 변화에 대해서. 우리는 예상 못한 거예요. 코로나 오라고 기도한 적도 없어요. 세상은 이미 다 이룬 거예요.

예수님의 피가 왜 생명인지, 예수님께서 왜 이 땅을 다녀갔는지 그거는 과학적인 세상 사람들은 모르는 일이에요. 하지만 우리는 이미 성령 받았기 때문에 꿈속에서 깨어났기 때문에 이야기할 수 있는 거예요. 성령 받아서 꿈속에서 깨어난 사람이 할 수 있는 걸 바로 예언이라 합니다.

꿈속에서 깨어났다. 율법의 완성, 사랑이죠. 사랑을 이렇게 봅시다. 최종성. 이미 최종적으로 다 이루었기 때문에 이 땅에서 우리가 죽어도 되지만 살려둔 이유는 성령이 오게 되면 예수님 십자가 증인하라고 계속해서 우리 뜻이 아니고 주의 뜻대로 하루하루 살려내는 것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내일 불쏘시개로 넘어가는 들풀도 오늘은 들풀을 살려내시는 것처럼.

참새가 수명이 천년만년이 아니잖아요. 굶어죽더라도 굶어죽을 때까지 주께서 친히 입히시고 먹이시거늘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다시 말해서 우리 속에 뭐가 있다? 주의 언약 완성이 들어있다, 라는 자들만 이 소리를 이 성경말씀을 들으라, 이 말입니다. 주께서. 왜냐? 보통 사람은 안 들리니까. 보통 사람은 시편 19편은 들리지 않는 소리니까.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지요. 들리지 않는 소리가 인물화 됐다 했지요. 예수님 제자들도 처음에는 예수님을 상상한 거예요. 자기가 생각한 것, 들리는 소리와 들리는 언어에서 파악된 그 메시아인 줄 알고 오해를 한 거예요. 그래서 베드로가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렇게 가시면 우리는 섭섭하지요, 이렇게 나온 거예요. 주께서 하는 말이, 사탄아 물러가라, 했잖아요.

그러니 이 세상은 미련 둘 이유 없어요. 끝으로 미련 둘 이유 없는데 왜 미련 두느냐? 반-언약과 언약을 나누어서 제가 설명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미련 두는 이유는, 지금 참 언약 말고 가짜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인간은 자아를 어떻게 구성하느냐 하면, 남과의 대조와 비교를 통해서 자아를 형성합니다. 비교와 대조를 통해서 자아를 구성하거든요.

내가 행복을 느낀다, 내가 불행을 느낀다 할 때는 그냥 행복과 불행을 느끼는 게 아니에요. 티비에 나오거나 주변의 친구를 만날 때 그쪽이 이혼하고 망하고 빌어먹을 때 우리는 잠시 행복감이 밀려옵니다. 술 먹는 남편이지만 같이 사는 것도 저쪽을 보니까 괜찮네. 그냥 봐주자. 갑자기 위로가 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부도나서 집 한 채 없고 집도 물새는 기생충에 나오는 지하실에 산다 하면 그래도 우리는 2층 빌라에 살잖아. 왜 이렇게 행복해. 갑자기 행복해지는 거예요. 어떤 목사는 목회한지 15년 넘었는데 목사가 바람났다는 소리 듣고 교인들 한 명도 없다. 우리교회 부흥됐네. 갑자기 기분이 확 좋지요. 이 땅에 사는 것은 전부 대조와 비교가 되는 거예요. 이걸 좀 더 설명하게 되면, 어제 오후 설교에서 설명했습니다.

두 개의 ktx가 서로 스쳐지나갈 때 내가 보는 저쪽의 창가에 앉은 그 사람 눈 속에 내가 그 사람을 보고 있는 눈동자를 내가 다시 볼 때 우리는 섬뜩함을 느껴요. 그게 뭔 뜻이냐 하면, 인간은 내 모습이 절대로 외부에 안 비추는 것으로 우리는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한 거예요. 나는 너를 봐도 너는 나에 대해서 봐도 나에 대해서 모를 거야. 신난다. 이게 우리의 본심이거든요. 니가 나에 대해서 얼마나 알아.

그런데 그 사람 속에 내 모습이 박혀있다면 이건 이야기가 다릅니다. 누구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게 아니에요. 그 사람 속에 있는 내 모습이 박혀있을 때 그 사람을 포기를 못합니다. 내가 준 정성, 내가 그 사람을 위해서 했던 모든 귀한 금목걸이부터 해서 그 사람 하나 건지는 것보다 내가 그 사람에 대해서 애달아하고 그리워하고 그 사람 때문에 잠 못 잤던 모든 보상이 그 사람이 나를 떠나지 않고 곁에 있음으로서 내가 위로받고 보상받는다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아니라는 눈을 하지 마세요. 진짜입니다.

자식의 육체와 내 육체가 다르지요. 그런데 왜 나 아픈 것은 참아도 내 자식 아픈 것은 못 참습니까? 나 아프면 기도 안 해요. 그런데 갑자기 누가 아프면? 자식 아프면 하지 말라는 기도를, 말리지 마. 차라리 내가 쟤 대신 죽을게. 왜 그런 짓합니까? 나의 진짜 내 모습은 내가 좋아하는 그 모습이 내 모습이기 때문에 그래요. 나는 나를 버려도 내가 좋아하는 내 모습은 버릴 수 없어요.

왜? 자식은 나보다 더 아끼고 싶은 대상이니까. 이게 인간입니다.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탐스러운 걸 따먹었잖아요. 그때부터 인간은 자기가 탐스럽기 짝이 없고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거예요. 마귀가 떨어져있는 선악과를 한데 엎어버린 거예요. 너는 때려죽어도 그 사람한테 못 벗어난다. 이게 마귀가 그렇게 만든 겁니다.

주님께서는 어떻게 오셨습니까? 십자가로 왔지요. 비참하지요. 십자가라 너무 추상적입니까? 그럼 세리와 창기, 강도를 보세요. 마찬가지에요. 내가 절대로 되기 싫은 그런 모습으로 왔단 말이죠. 허무할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내 요소가 없단 말이죠.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는 주님 자신의 것이 내 안에 있어요. 나를 버릴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무슨 시선의 싸움이냐? 내가 나를 지키는 시선과 주님이 나를 포기 못하겠다는 그 시선과 늘 우리 안에 싸우고 있습니다. 그게 뭐냐? 반-언약, 나는 내 식대로 살렵니다. 아니야. 너는 이미 다 이루었어. 너는 내가 내 사랑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 땅에서 네 마음대로 죽을 수 없어. 내가 살라고 할 때까지 살아.

설마 네가 비참하게 되더라도 네가 그걸 시시하게 봐라. 왜? 내가 널 사랑한다는 게 중요한 문제지 네가 가진 재산 다 날이고 몸 아프다는 것은 내가 보기에 몸 아파도 괜찮아. 재산 없어도 괜찮아. 천당 합격이야. 거지 나사로 봐. 내가 왜 그 이야기했겠는가, 탕자이야기 왜 했겠는가, 불의한 청지기 왜 했겠는가. 그들도 넉넉하게 구원받는다면 네가 네 처지에 대해서 비관하지 마. 그건 네가 보는 네 시선이고 가짜 우상을 인형을 그동안 너라고 착각한 거야. 이렇게 되는 겁니다.

내가 나를 보는 시선, 이것 늙어가면서 미련두지 마시고 남과 대조하지 마세요. 세상은 다 시시한 일이에요. 다 시시합니다. 마음 둘 가치도 없는 거예요. 진지한 것은 뭐냐? 시시한 걸 발라내고 그 안에 십자가 피 주신 예수님과 함께 있음, 이게 중요한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말씀 전할 수 있도록 시편을 통해서 모일 수 있도록 해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 주께서 하신 이야기가 얼마나 우리와 차이 나는지를 깨닫는 가운데 도리어 없던 기쁨과 감사가 계속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오늘뿐만 아니고 매일같이 새로운 것에 대한 감사가 이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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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