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200713a 부산강의 : [시편]30(19편)-침묵의 소리자유게시판시편

20200713a 부산강의 : [시편]30(19편)-침묵의 소리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19편 해봅시다. 1절에서 4절까지 보게 되면,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이게 상당히 신비로운 이야기를 하면서 유대인이나 이스라엘이나 오늘날 성도한테 뭘 요구하느냐 하면, 언어의 원천, 소리의 원천까지 파악이 돼야 된다는 겁니다. 지금 다윗의 신앙과 동질의 신앙을 갖고 있다면 언어나 소리, 그것이 어디서부터 출발했는지까지 간파하고 팍악하고 있어야 하나님의 영광을 접했다고 할 수 있다고 되는 겁니다.

이 대목만 보면 원어연구나 히브리어, 헬라어 연구해서 주의 나라에 도달할 수 없지요. 왜? 언어 이전까지 들어가야 되니까. 그 언어 이전을 오늘 시편 19편에선 뭐로 보느냐 하면, 언어 이전에 소리라 했고 소리 이전에 들리지 않는 소리, 그러니까 사운드, 소리란 우리 귀에 뭔가 감각적으로 박혀 음파가 임해야 이걸 소리라고 시작이 되거든요.

소리는 말이죠. 말이 있고 그 다음에 언어가 되는데 소리, 언어까지는 인간들이 간파가 되는 세계에요. 간파가 되면 연구하고 분석하겠지요. 그게 아니고 이게 더 나갑니다. 소리는 소린데 들리지 않는 소리, 이것까지 파악하고 있어야 된다. 다윗이 쓴 글이거든요. 그래야 다윗의 신앙에 합치된다, 일치된다, 부합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여러분이 알았으니까 그 다음에 쉬운 게 뭐냐 하면, 들리는 소리와 언어가 있으면 여기서 이게 작용해요. 내가 한다=내가 할 수 있다, 같은 말입니다. 내가 안 할 수 있다. 이 둘(‘내가 할 수 있다’와 ‘내가 안 할 수 있다’)을 합쳐버리면, 내가 하는 것은 내가 하고 내가 안 하는 것은 안 한다고 내가 결정할 수 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예수 믿는 것 내가 한다. 부처를 안 믿는 것 내가 안 할 수 있다. 예수 믿고 안 믿고는 어디서 결정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속해버리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신앙입니까? 교회에서 목사가 설교하면서 하세요, 하세요, 순종하세요, 행하세요, 행함이거든요. 행함은 어디까지 호소하고 있는 겁니까? 눈에 보이는 언어와 소리로 마감이 되지요.

이게 바리새인들이 한 거예요. 사두개인들, 서기관들이 이것까지 한 거예요. 하나님이 있고 하나님께서 율법을 줬다. 율법을 준 것을 우리는 모세로부터 전수받았다. 그러면 율법은 뭐냐 하면, 내가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하고, 내가 하지 않겠다는 것 또는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내가 안 하면, 안 해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접합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있다.

이게 바리새인들의 주장인데 시편 19편에 의하면 하나님의 영광은 소리로서 시작되는 게 아니고 그전부터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했다는 거예요. 궁창이 그 하는 일을 드러냈다는 거예요. 온 세상에, 이걸 보통 과학에서는 (대)자연이라고 하는데, 자연이란 말은 옛날 고대철학에서 나온 말이에요. 옛날 철학은 과학과 동일했습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도 마찬가지로 그들의 과학이 철학이었어요. 그들이 세상을 보는 관점은……

적어볼게요. 과학이란 뭐냐 하면, 세상에 있는 변화에서 질서를 뽑아내는 것을 과학이라 합니다. 제가 들은 이야기가 있어서 그래요. 어떤 사람이 남편에게 교회 가자 하니까 하는 말이, “이 과학시대에 아직도 성경 믿나?” 그렇게 나왔답니다. 남편이 아니고 자기 아버지. 자기 아버지가 이 과학시대에 아직도 성경 믿나. 성경은 비과학적인데, 이렇게 했어요.

그분이 이걸 알아야 돼요. 그분이 앞에 있다면 진짜 설명해드리겠는데요. 과학이란 이게 철학이에요. 옛날 고대철학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 과학이 들어온 것이 19세기에 들어왔지요. 1800년대. 그전까지는 드문드문 들어왔지요. 청나라나 유학 갔다 온 사람들이 들여온 것이 성리학과 안 맞는다고 얼마나 핍박을 많이 받았습니까.

과학이란 변화에서 질서를 끄집어내는 겁니다. 제가 질문하겠습니다. 모든 변화를 끄집어낸 질서 속에 다 담아낼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지요. 남겨두는 게 있어요. 남겨두는 게 더 많지요. 남겨두면서 이것은 필요하다해서 질서를 만들자. 그 필요한 것이 누구를 위한 필요함일까요? 인간을 위해서 필요하죠. 그래서 철학과 과학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인간을 위해서, 오직 인간을 위해서. 이걸 좀 자세히 하면, 인간의 생존을 위하여.

모든 세상의 바이러스를 연구하는 게 인간의 목표가 아니죠. 그런데 코로나 바이러스 나오니까 어떻습니까? 뭘 위해서 연구합니까? 백신이나 치료제 이런 것, 뭘 위해서 연구합니까? 인간을 위해서지요. 인간의 인간을 위한 인간에 의한 세계, 그 세계가 바로 과학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과학은 종교에요. 과학은 믿음을 요구하는 겁니다. 무슨 믿음? 우리는 인간은 인간이 알아서 살지 않으면 인간은 못 산다. 이게 과학종교의 교리입니다.

그럼 과학종교에서 뭐가 빠지느냐 하면, 인간은 죽고 난 뒤에 어떻게 되고 인간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 우주는 왜 태어났는지에 대해서 과학종교에서는 내용에 포함이 안 되는 겁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죽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이 사람은 지금 지옥 간다는 거예요. 거기 제단에 성경책 없지요. 지옥 간 거예요. 이 세상이 무슨 종교라 했습니까? 과학종교에서는 이걸 차단시키는 거예요.

사람이 죽어서 지옥 가고 천국 간다는 것은 어디서 이야기합니까? 이것은 오직 교회에서만 이야기해요. 천주교는 거의 불교니까. 천주교는 불교라고 보면 돼요. 불교니까 이야기할 것 없고. 죽어서 확실히 천국 가고 확실히 지옥 간다는 것은 교회에서만 이야기하는 겁니다(교회를 좋게 보고 이야기할 때). 그럼 지는 죽지도 않고 지는 뭐 만들지도 않았는데 무슨 근거에 의해서, 인간의 과학종교에서는 죽고 난 뒤에는 몰라요. 모르는 것이 전부 다 마땅하다고 된 거예요.

그러나 교회는 뭘 근거로 해서 안다고 하면서 죽으면 지옥 가고 예수 믿는 사람은 천국 간다고 우기느냐? 이게 바로 시편 19편 들리지 않는 소리가 인물로 등장했다면, 보이는 인간들로만 구성된 이 소리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소리가 여기에 섞여 들어온 바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 예수님 계시고 사람들 있다면 바리새인, 사두개인들 있다면 예수님이 어떤 분이냐 하는 것을 열두 제자나 다른 사람들이 알아들었게요, 못 알아들었게요? 분명히 인간의 소리로, 그 당시 아람어로 분명히 예수님은 발언을 했어요. 발언을 했는데 열두 제자부터해서 그 사람들이 알아먹지를 못하는 거예요.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 다 아시는 내용인데요. 마태복음 5장 29절에 보면,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그 다음에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라고 돼있다고요. 이게 왼쪽이 아니고 오른쪽인지를 이해하려면 창세기 32장에서 야곱이 하나님 만나고 씨름했다는 것을 아시죠.

그리고 하나님과 무슨 일이 있고 난 뒤에 헤어졌습니다. 천사는 가고 야곱은 야곱대로 갔을 때에 야곱에게 남은 게 뭘까요? 뭔가 남은 데 있는데? 헤어지고 난 뒤에 야곱의 몸에 뭔가 변화가 생겼어요. 야곱이 절었지요. 왜 절었느냐 하면, 분명히 이겼는데 자기는 환도뼈를 다쳤어요. 이건 뭐냐 하면, 남성의 힘, 인간이 스스로 생존할 수 있는 힘의 근원이 작살난 겁니다. 여기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왜 오른 눈, 오른손이냐 하면, 오른손이란 힘이 나오는 인간이 스스로 설 수 있는 출처가 되는 곳이 오른쪽이에요.

출애굽기 15장에도 있지요. 하나님께서 오른손의 능력으로. 오른손의 능력, 그 점을 설명하겠습니다. 오른손의 능력이란 하나님과 인간, 그러니까 선과 악이 서로가 서로에게 복사판이 돼요. 성경을 보게 되면 이게 참 희한한 이야기에요. 복사판이란 분명히 똑같은데 의미가 다른 것, 선과 악이 복사판이란 것은 선 속에 악이 있고 악에서 선이 나오는 것. 항상 하나님께서 지상에서 일을 할 때는 인간이 만들어놓은 그것은 그대로 자기 것으로 가져오고 그것으로 하나님 자신의 뜻을 설명해나갑니다.

인간은 하늘을 향하여 신을 향하여 올라가지요. 또는 하나님을 향하여. 그런데 우리가 아는 하나님은 반대방향입니다.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하고 야곱도 마찬가지고, 아브라함도 마찬가지로 세 명의 천사가 찾아왔지요. 하나님 쪽에서 가만있지 않고 인간세계에 찾아와요. 찾아와서 아브라함에게 떡을 얻어먹고 마실 걸 얻어먹어요.

인간이 귀하다가 아니라 인간 것으로 하나님 것을 표현하는 겁니다. 표현, 표현. 여러분 다 아는 이야기지만 물어봅시다. 작곡자와 가수 가운데 어느 쪽 표현자입니까? 가수지요. 작곡자는 자기가 작곡해놓고 가수에게 불러보라 해놓고 마음에 안 드는 거예요. 이 대목에서는 피치를 올려야 돼, 라고 자꾸 독촉하지요. 표현을 제대로 해야 된다고.

이것을 쉽게 예를 들면, 성도는 주님의 마스크가 아니고 장갑이에요. 손가락 다 끼는 거예요. 안에서 움직이면 같이 움직이는 겁니다. 이걸 제대로 안 해주면 주께서는 실망스럽지요. 마스크는 벗으면 그만이지만 장갑은 끼면 벗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사도들이 본인이 띠 띠고 원치 않는 길로 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내 인생이 있는데 누가 다룬다? 주님이 내 인생이라는 표현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표현에 나선 거예요. 사도를 통해서.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 사도 바울은 시시해요. 그냥 보통 인간이에요. 어떤 사람은 안질이 생겼다 하는데 사탄이 집어넣어준 병이 있어서 몸도 골골거리고 그래요. 이건 다른 사람 보기에 죽기 살기로 미친 듯이 복음 전합니다. 하지만 그건 껍질이고 껍데기거든요. 장갑 껍데기 벗으면 사도 바울 안에 누가 있습니까?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거예요. 이걸 인간이 아는 소리와 인간이 아는 들리는 언어로 설명할 때 인간들은 자기 위주기 때문에 이걸 제대로 설명 못하지요.

여기서 성령이 임해야 된다는 거예요. 여기서 열두 사도나 주님의 성도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성령이 임했기 때문에 더 이상 나를 위한 종교는 나한테 있어서는 안 된다. 나를 위한 어떤 것도 있어서는 안 된다. 어제 낮 설교처럼 내게 유익되는 것은 다 주님 앞에 해가 된다.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내가 유익되는 것은 주님에게 큰 증오를 유발하는 거예요. 증오의 집합이 지옥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내게 유익된다는 말은 나를 위해서. 이것을 누가 충족하려 하느냐? 바로 오늘날 과학이 충족케 주겠다는 겁니다.

오른손의 능력이라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자기 뜻을 펼칠 때 인간들이 힘 쓴 대목이 왼손보다 오른손에서 주로 한다는 것을 감안하셔서 이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신 거예요. 능력이 있는 것. 그렇다면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오른손을 잘라라, 오른 눈을 빼버리라는 것은 예수님의 요구에 대해서 우리 자신이 스스로 생존하고 스스로 살려고 하는 모든 것은 예수님의 율법을 이룰 수 없다는 그런 뜻입니다.

다시 소리에서 언어가 됐습니다. 소리는 말이죠. 말 그 다음에 언어, 이것까지가 인간이 할 수 있는 겁니다. 인간이 할 수 있다는 것부터 말씀드릴게요.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할 때는 인간이 할 수 있다는 요소가 계속 여기서 스며들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진짜 영광이 아니고 이게 조작된 영광이죠. 인간의 자기 부인이 자기 부정이 담겨있지 않는 조작된 신의 영광이 돼버리면 그 다음부터 자기가 부정되지 않은 상태기 때문에 나를 위한 하나님이라는 우상 공식이 여기서 계속 유지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이라 하는 것은, 지금까지 한 걸 요약하면, 내가 한다가 성립되지 않아요. 내가 손자 키운다, 이런 것은 성립되지 않아요. 내가 하는 게 아니에요. 맡겨 준 것이지. 항상 어떤 일을 하던 내가 하는 아니라는 것을 계속해서 주어진 일을, 그 주어진 일의 목적이 뭐냐? 나를 부정하고 부인하는 그러한 기능을 하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하는 거예요. 내가 하는 게 아니다.

그래서 내가 한다고 하면 될 것 아니냐. 내가 하게 되면 결국 아까 이야기한 철학이고 과학이 되거든요. 그래서 이 세계는 소리와 언어만 있는 세계, 들리지 않는 소리가 빠져버린 이 세계에서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문명화된 세계로 인하여 생명이 없다. 생명을 잃었다 또는 생명이 없는 거예요. 이 세상이 너무 문명화됐어요. 합리적이고 과학적이고. 문명이란 것이 현대문명도 되겠지만 예수님 당시도 마찬가지고 여기 다윗시대도 마찬가지고. 문명화된다는 것이 인간에게는 필요하지만 무엇을 잃어버립니까? 생명을 잃어버리는 거예요.

누가복음 19장 40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인간의 말을 사용하면서 주께서 하신 말씀이,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여기 소리 나오지요. 돌이 평소에 소리 지릅니까? 돌은 소리 지를 줄 모른다. 돌은 소리 지를 구강구조가 안 돼있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인간들의 과학적 인식이에요.

언어와 소리 이 범주 내에서 들리는 소리가 아니고 우리가 아는 소리 범주 내에서는 문명이 이뤄질 것이고 그 문명이 내린 결론은 돌은 절대로 소리 지를지 않을 것이란 거예요. 그러니까 돌이 아브라함 자손 될 리는 없다는 겁니다. 그것은 우리의 상식과 합리적 이치에 어긋난다는 거예요.

그것은 더 나가면 이 세상은 불로써 멸망될 리 없다. 사람은 죽어도 지옥 안 간다. 여러 가지 파생된 결론들의 마구마구 쏟아져 나올 거예요. 그 모든 이야기가 뭐냐 하면,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 그러니까 제발 말씀 들고 내 일에 간섭 좀 하지 마라. 난 간섭하면 짜증난다. 그런 거죠.

지금까지 쉬운 거고 이제부터 어려운 것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어려운 것 하겠습니다. 인간세계는 어떻게 구성되느냐 하면, 이원세계에요. 원리가 둘로 갈라졌다. 땅과 하늘, 선과 악, 모두 이원세계에요. 이원세계니까 인간들이 사는 이걸 땅, 지상이라 하고 저 위에 있는 것을 천상이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선 이원세계를 이용하시는 거예요.

이용하시면서 하나님께선 이원세계를 뭐로 바꾸느냐 하면, 이런 세계로 통합시켜버립니다. (2)을 1로 바꿔버려요. 둘로 갈라진 것을 하나의 세계로 통합시켜버리는 겁니다. 들리는 소리와 보이는 언어로만 구성된 이원세계, 사람들은 들리는 소리+보이는 언어, 이 세계 말고 다른 세계 천국의 세계를 상상하거든요. 유대인들도 마찬가지고 그 당시 다윗도 마찬가지고 바리새인도 마찬가지에요.

우리 지상에는 인간이 살고 하늘에는 하나님이 산다. 이게 굉장히 옳아 보이지요. 그런데 이게 벌써 무슨 세계입니까? 이원세계라니까요. 지상은 더럽고 하늘은 깨끗하고, 이런 세계. 인간으로선 들리는 소리 없어도 얼른 착안하고 이렇게 구성할 수 있어요. 죽어서 천국 가고 하늘로 올라간다. 이런 것. 그런데 요한복음 12장 보면 예수님도 인간의 그런 구조를 이용했어요. 내가 하늘로 올라간다. 이런 게 있단 말이죠.

그런데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여기에 들리지 않는 소리를 포함시켜버리면 이원세계가 이 간격이 없어지고 모두가 일원세계로 통합이 돼버려요. 하나의 세계로. 그 방법은 뭐냐? 들리지 않는 소리로 오신 분 중심으로 모든 것을 재편성하면 되니까, 구성하면 되니까.

이원세계를 일원세계로 바꾸는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런 것도 있나 하는데 신약에 오면 성령 안에서 성도는 어디 가있느냐 하면, 성도는 이미 일원세계가 되고 말았어요. 내가 주 안에 주가 내 안에. 이런 세계, 아버지 안에 하나가 돼버린 거예요. 하나 밖에 없는 1, 일원세계의 특징은 더 이상 고민할 건더기가 없다는 거예요.

이원세계에 살던 나를 죽여서 주님께서 성령으로 일원세계로 집어넣었기 때문에 하나로 통합된 세계에서는 죽는 것조차도 이미 과거완료가 돼버려요. 이미 죽었고, 가 됐기 때문에 새삼 내가 겪을 일이 아닌 거예요. 숨을 끊어지겠지만 죽음은 아닌 거예요. 생명이니까.

그러나 아까 이야기했지만 문명의 세계에서는 뭐가 없다 했습니까? 생명이 없지요. 생명이 없다는 것은 곧 죽음의 세계에요. 문명의 세계는 그것이 곧 죽음이라는 사실을 일원세계에 계셨던 예수님이 인간세계에 대해서 그렇게 통보를 해주셨던 겁니다. 너희는 이미 죽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 죽었어. 죽었다는 소리, 죽었다는 그것을 받아들이면 되는데 기어이 살려고 하거든요.

로마서 10장 18절 누가 읽어보세요.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ㅇ)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보세요. 우리가 봤던 시편 19편과 똑같지요. 시편 19편의 보이지 않는 소리가 결국은 유일한 현실이 된다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소리를 기초로 한 그 결과물이 마지막에 우리에게 덮친다는 겁니다.

이원세계 속에 일원세계가 복음이란 이름으로 온 땅에 퍼져버리면 이원세계는 일원세계로 통합이 돼버리는 겁니다. 그 복음 안의 내용은 주인공이 있어요. 어떤 인물이죠. 누굽니까? 예수님이 죽었다고 부활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셨다는 것은 그냥 해보는 소리가 아니고 곧 새로운 현실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 요건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입장에서 해야 될 것은 주님이 주신 그 십자가 부활의 요건으로 현재 내가 갖고 있는 문명화된 이 세계에서 나의 속 내용을 바꿔치기, 교체를 해야 되지요. 이것보다 중요한 이야기가 없습니다. 이원세계에 살고 있는, 2 이원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로 하여금 1이 되려면 우리 안에 있는 내용을, 2의 세계에 살던 방식을 1의 세계의 삶의 방식으로 바꿔줘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강의한 걸 정리하게 되면, 이원세계에서 인간은 뭘 사용하느냐 하면, 들리는 소리 그리고 보이는 언어를 통해서 질서잡기에 나섰고, 이 질서잡기 오늘날 문명화됐다 했지요. 질서를 잡을 때 여기에 개입되는 작용, 동기부여는 뭐냐 하면, ‘나를 위하여’에요. 나의 목숨을 위하여, 나의 자존심을 위하여, 나의 명예를 위하여. 나를 위해서 변화 속에서 질서를 잡았지요.

그러면 예를 들어서 예수님께서 천국 있고 지옥이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 졌다 할 때에 이게 들리는 소리와 보이는 성경문자니까 언어로 왔을 때 내가 여기에 마중을 나가요. 천국이 있으니까 예수 믿어야 되겠고 예수의 피로 용서받아야 되겠고 그러면 나는 천국 간다, 라고 했을 때 이게 일원세계일까요, 이원세계일까요? 1일까요, 2일까요? 여전히 2가 되는 겁니다.

도중에 뭐가 바뀌어야 되느냐 하면, 나를 위해서가 바뀌어야 되거든요. 그럼 내가 살아 있는 한 절대로 나를 위해서가 포기를 못하게 되죠. 내가 살아 있는 한. 내가 살아 있는 게 맞잖아. 거울을 보자. 내가 살아 있잖아. 그러면 거울 안 보고 내가 살아 있는지 아는 방법은 뭡니까? 그거는 꼬집어보면 알지. 이것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철학자들이었어요.

내가 꼬집어서 아픈 것이 실제로 아픈 것인지 꿈속에서 아픈 것인지 그걸 분간할 수 있는 기준이 없다는 거예요. 장자가 그랬지요. 꿈속에서 나비가 되었을 때 꿈속의 나비인가, 실제로 나비인가, 아니면 꿈의 꿈속에서 실은 내가 나비가 아니고 인간이라고 그렇게 우긴 건지 그걸 판정할 수 있는 기준이 없다는 거예요. 어떤 누구도 결정적 판정이 없다. 왜냐하면 어떤 누구도 영원한 꿈속에서 벗어난 사람이 없기 때문에.

예를 들어서 나인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낮에 내가 내 팔뚝 꼬집으니까, 아야, 아픈 걸 보니까 내가 살아 있구나, 라고 했는데 팔뚝을 꼬집은 경험으로 인하여 밤에 똑같은 꿈을 꿨다면 그 꿈은 실제일까요, 꿈일까요? 그러니까 꿈이냐 아니냐는 것은 영원한 꿈에서 벗어나는 경우에만 국한돼요. 지난 꿈은 마지막 꿈이다. 지난 꿈은 종강이다. 끝났어, 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무도 없지요. 꿈속에서도 마지막 꿈이라는 소리를 천 번이나 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철학이, 철학이나 과학이나 같은 겁니다. 자연 속에서 나를 위해서 질서 잡는 것. 계속해서 이원세계니까 천국이 있는 거예요. 천국이 있으니까 지상에서 천국까지 사다리나 계단을 놓는 거예요. 조금씩 접근해가면 손에 닿지 않겠는가. 이게 바벨탑의식입니다. 제가 이 글을 적어볼게요.

조금 먼 것과 크게 먼 것과 다릅니까, 안 다릅니까? 이게 다를 바가 없어요. 왜? 그 대상이 지금은 여기 없다는 점은 마찬가지니까. 거의 손에 잡힌다. 마찬가지에요. 여전히 내 영역에 없기는 마찬가지인 거예요. 그래서 주일에 이야기했지만 어떤 사람이 노래 부르기를, 계단 말고 엘리베이터. 엘리베이터가 내려와서 예수 안에서 타고 올라갈 때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조금 먼 것도 아니고 크게 먼 것도 아니고 아주 먼 것도 아니고 지금 어떻게 돼요? 지금 더불어 함께가 되지요.

사도 바울에서 이 둘을 구분하는 게 중요해요. 주와 함께 있음과 믿음을 구분해야 돼요. 믿음은 혼자 나오는 게 아닙니다. 반드시 행함과 대비해요. 믿음이라 할 때는 행함을 전제로 해서 하는 겁니다. 하늘과 땅이 둘로 나눠졌다는 이원세계에서 하늘나라 가려면 그 당시 사람들은 행함으로 그것도 하나님 주신 율법을 행함으로 간다, 라고 이야기하거든요.

그래서 행함은 뭐냐? 조금씩, 조금씩 행해서 접근해 간다. 물론 천사처럼은 못하겠지만 최선의 노력을 하면 거의 손에 닿을 만큼 갈 수 있다고 보는 것이 그 당시 유대인들이 인간들 본성이란 말이죠. 그런데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하는 말이 행함이 아니고 뭡니까? 믿음이다. ‘믿음+행함’이 아니고 믿음에서 어디로? 믿음에서 계속 믿음으로. 믿음에서 행함으로 마감되는 게 아니고 믿음에서 믿음으로, 에요.

이 경우는 뭐냐 하면, 지상에서 이원세계에서 천국 가려면 어떻게 하느냐, 그 논의에선 믿음이 나오지만 사도 바울이 정작 싶은 것은, 일원세계에서는 주님과 어떻게 함께 있는가? 나 믿습니다, 란 말 하지 말라는 거예요. 뭘 하느냐? 함께 있는 거예요. 함께 있으면 믿습니다가 오히려 어색해.

여러분, 갑자가 집사님 부인에게, “나는 널 믿습니다.” 하면 “생뚱맞기는. 안 하던 짓을 하네.” 이렇게 되지요. “무슨 나쁜 짓했나.” “나는 널 믿습니다. 당신을 믿어요.” “좀 수상한데? 뭔 일 있었어? 갑자기 안 하던 짓을 과도하게 하냐.” 이렇게 되지요.

함께 있을 때는 믿는다는 말이 필요 없다기보다는 그게 수상해요. 믿는다는 말은 또 다시 계단 밟는 거예요. 믿어야 되는데 간접적 우회적 표현이에요. 안 믿어지는데 믿어야 천당 간다하나 믿어지진 않고 용을 써볼까, 이럴 때 믿씁니다, 하는 거예요. 이게 본인이 스스로 자기 언어로 자신이 믿음 없음을 티를 내버린 거예요.

함께 있어서 코로나 걸리나, 함께 있어서 죽거나, 함께 있어서 어떤 일이 나거나 그것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니죠. 벌써 강의 초반에 한 걸 또 하려하니 뭐 하다 만은, 강의 초반에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은 절대로 인간이 행한다는 것은 어디서 행한다? 인간에게 들리는 소리와 보이는 언어가 있을 때 뭐가 작용한다? 내가 행한다가 되지요. 그런데 시편 19편에서 보이지 않는 소리 세계에서는 내가 행했습니다가 부정당하는 거예요.

그럼 여기서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한 마디로 총 정리하면 뭐냐? 이렇게 돼요. 이제 이 말을 이해할 수 있어요. 나의 자연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꽃들과 나무들과 이미 인간에게는 들리지 않는 자기들끼리의 소리를 계속 외치고 있었던 거예요. 인간만 따로 놀고 있었던 겁니다. 잘난 척하면서. 인간은 거기에 끼어들지 못했어요. 그래놓고 욕할 때는 개를 보고 욕한다고. 오죽했으면 시편에서는 인간이 벌레보다 못하다고 합니까.

인간이 벌레보다 못하고 구더기 같은 인간이라고 하는 이유는, 인간이 여전히 꿈속에 갇혀있기 때문에. 이 꿈은 악마 집어넣은 세상의 한계를 꿈으로 꿈속에 집어넣는 거예요. 같은 꿈을 꿔도 요셉의 꿈은 어떻습니까? 바로 꿈속에서 벗어난 꿈이잖아요. 요셉이 꿈을 꾸므로 요셉의 꿈은 현실이 되었지요.

이 말은 뭐냐? 꿈꾸지 않은 열한 형제와 꿈꾸지 않은 아버지, 어머니와 바로 왕은 나름대로의 꿈속에 있는 거예요. 꿈과 꿈이에요. 하나는 실현되는 꿈과 하나는 실현되지 않는 개꿈의 차이를 요셉의 꿈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 박원순은 평생을 꿈속에 살았어요. 이제 죽었으니 알겠지요. 이게 지옥이라는 것.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세상을 훑을 때 꿈속의 인간들 예수님 말을 알아먹지를 못했어요. 그게 꿈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모든 것을 요셉의 꿈이라 봐요. 그러면 요셉 빼놓고 예수님 빼놓고 나머진 뭐냐? 현실이라 우겼지만 예수님 보기에는 가짜 꿈속에 있는 겁니다.

사도행전 2장 다른 분이 읽어보세요. 17절부터 몇 절 길게 읽어보세요.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보세요. 이 세상 용어로 주님께서 설명한다 했지요.

이 세상에서는 주님의 복음의 세계가 그들에게는 뭐로 이해될 것이다? 꿈으로 이해되는 거예요. 환상으로. 그러니까 성령 받은 사람을 정상으로 보지 않고 비정상으로 보는 거예요. 그런데 이 말은 성령 받은 입장에서는 뭡니까? 그들이 비정상인 것을 모르고 있는 거예요. 마치 꿈처럼. 어느 쪽이 환상이고 어느 쪽이 꿈이고, 꿈, 환상, 예언이란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면서 그 단어를 바라보는 것이 서로 다른 자기 입장에서 볼 수 있는 그러한 시대가 오는 겁니다.

이러한 인간세계의 다툼에 대해서 대자연은 뭐라고 하겠어요? 싱긋이 웃겠지요. 우리는 일찍부터 이미 시편 19편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있었어요. 인간에겐 들리지 않지만, 다윗에겐 들리지 않지만 그들 나름대로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했지요. 그러니까 자연은 무엇의 전달자에요. 보이지 않는 소리, 하나님의 뜻 전달자가 자연이었던 겁니다. 전달자에요.

그러면 인간이 자연화 된다는 말은 우리가 자연의 일부로 섞여 들어간다는 말은, 우리는 무엇의 전달자? 주님의 복음의 전달자. 그걸 사도행전 2장에서는 환상, 예언, 꿈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마치 우리를 요셉이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요셉도 꿈꿔놓고 딴 게 아니에요. 요셉도 난감했어요. 왜 갈수록 일이 꼬이냐 말이죠.

그걸 시편 105편에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요셉을 팬다, 또는 연단시킨다, 단단하게 한다. 요셉아 울어라. 울어야지. 그래야 나를 위해서가 깨어지겠지. 자기 자신을 위해서 내 인생이 있다는 것을 깨기 위해서는 요셉으로 하여금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지요. 내 팔자 왜 이러냐, 그렇게 되겠지요.

사도행전 4장 19절도 마찬가지인데 이건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베드로가 속한 처지가 이렇습니다.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18절) 요즘 상황과 어찌 똑같은지. 예수 이름으로. 다시 말해서 세상은 교회가 필요하다, 안 필요하다? 세상은 전혀 교회가 필요하지 않아요. 이 점을 이번 일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확인해줘야 돼요.

세상은 교회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문명화된 세계를 원해요. 인간의 인간을 위한 인간에 의한 세계만 그들에게 필요하다고 이구동성으로 이미 합의가 끝난 상태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있더라도 친목단체로 끝내라. 낚시회, 등산모임, 댄스클럽 그리고 맛 집으로 끝내란 말이죠. 전혀 필요 없다는 게 아니고 필요하지요. 댄스 해야 되지 않습니까, 살 빼려면. 하지만 교회는 고 정도에요.

과학이란 종교 안에서 교회는 이미 미신화 했지만 미신도 때로는 마음 약할 때 필요하다고 봐줄게. 봐주고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교인과 교회가 그걸 동조하고 있다는 문제가 돼요. 동조한 거예요. 예수님과 하나님은 누굴 위해서 있다? 나를 위해서 있다. 나를 위해서 있음을 포기 못하니까 나를 위해서 모든 게 있다는 그 생각이나 교회 문 닫으라는 그 생각이나 다를 바가 없네. 똑같아요. 사고방식이. 교회고 절이고 나를 위해서 있다. 이걸 유지하고 있는 한 그들의 조치에 대해서 반박할 수 없지요.

그러면 남자가 남자, 여자가 여자를 사랑한다. 이것 누굴 위해서예요? 본인을 위해서 하는 거죠. 죽은 서울시장 입장은 이렇습니다. 너 인형 갖고 놀래, 축구하고 놀래? 넌 남자인데 인형 갖고 노느냐? 이것은 옛날 세대에 있었던 하나의 이념이라면 지금은 남자애라도 인형 갖고 놀 수 있고 여자애라도 축구공 갖고 놀 수 있다. 여자가 축구로 축제하고 남자가 인형 갖고 축제하는데 퀴어축제, 동성애축제 아닙니까. 그걸 왜 같은 인간인데 같은 인간이 만들었다는 국가가 본인 취미가 그렇다는데 그 축제를 막을 명분이 없다. 축제 열어라.

그 뜻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교회는 입 다물라는 뜻이에요. 왜 필요 없는 것들이 말을 하느냐. 다시 말해서 박원순 입장에서는 내가 교회를 아는데 교회는 놀러가는 거고 너희들 마음 위로 달래는 것인데 교회 다니나마나 마찬가지로 나를 위해서 천당 가겠다는데, 그거나 교회 안 가서 나를 위해서 하겠다는 것과 차이점이 없잖아. 없는 이상은 그냥 친목단체 아니냐.

그런데 사도행전에 보면 이렇게 돼있어요. 19절에,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베드로가 참 겁도 없어.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 말 듣는 것과 사람 말 듣는 것과 어느 것이 옳은지 물은 거예요. 어느 것이 옳아요?

이 말을 잘 들어야 돼요. 나를 위해서 살 것이냐, 나를 포기하며 살 것이냐, 어느 것이 옳으냐? 똑같은 거예요. 왜냐하면 베드로와 요한의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고 누구기 때문에?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누구에게 이야기합니까? 그 당시 여호와 믿는 유대인에게 유대인 지도자에게 이야기하거든요.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이 땅에 오셔서 사람에게 죽임을 당했어요. 불신자에게 죽임을 당하고 박원순한테 죽임을 당한 것과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주님께서 죽임을 당했는데 성령이 있는 사람은, 예수님만 부활한 게 아니에요. 성령 있는 사람은 세상이 그를 입 다물라고 죽였는데 성령은 무슨 영입니까? 부활의 영이죠. 부활의 영이 어떤 사람에게 임해버리면 밟아도 하는 말이 하는 사람 말 안 듣고 하나님 말 들을래, 라는 말을 계속해서 쏟아내고 있다는 그걸 보여주는 거예요.

이게 안 밟히면 몰라요. 그런데 밟았는데 이게 안 죽네. 왜? 속에 성령이 있어서. 대표적인 사람이 스데반 집사 아닙니까. 스데반 집사 이야기,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스데반 집사에게 돌 던질 때 유대인들이 이를 갈았다고 했어요. 스데반 집사가 분노유발자에요. 예수님의 상황이 예수님으로 종결된 게 아니고 성령을 통해서 그 불똥이 계속 번지는 거예요. 정월대보름에 들판에서 불놀이하다가 잘못하게 되면 불똥이 잔디밭에 여기 퍼지다가 저기 퍼지죠.

성령께서 우리가 아니고 우리는 그렇게 행할 줄 모르고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임해버려요. 그러면 사도 생각과 똑같은 동일한 고백을 계속 반복시키는데 뭐냐 하면, 우리가 사람 말 듣는 것보다 하나님 말씀 듣는 게 옳다는 말을 계속 내뱉게 돼있어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첫째 시간은 이것하고 마치겠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듣는 것이 옳다. 이것만 있는 게 아니에요. 이것만 있으면 아무 이의 없지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으로 인하여 필연적인 결과가 뭐냐? 누구의 말을 안 듣는다? 시체의 말, 죽어 지옥 가는 인간의 말을 나는 듣지 않음을 겸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사람 말 안 듣는 것 떼고 이야기하면 아무 핍박 없지요. 공손하게 조용하게 살 수 있어요. 그러나 여기에 무슨 이야기가 반드시 들어갑니까? 나는 사람의 말, 나를 위해서 예수 믿고, 나를 위해서 하나님 믿는다는 그 말을 일체 듣지 않는다. 사도가 이렇게 하니까 사도가 그 시대에서 분란의 중심이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또다시 사도를 통해서 불이 자꾸 퍼지듯이 계속 퍼져나가고 오늘날 이 세대도 마찬가지입니다.

10분 쉽시다.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124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18,067 자유게시판 광주강의20200717b 마가복음15장 21-23절(공분을 넘어서)-이 근호 목사 마가복음 최고관리자 20-07-19
18,066 자유게시판 광주강의20200717a 마가복음15장 21-23절(공분을 넘어서)-이 근호 목사 마가복음 최고관리자 20-07-19
18,065 자유게시판 40강-욥기 12장 1~6절(친구의 한계)20200719 이근호 목사 욥기 최고관리자 20-07-19
18,064 자유게시판 22강-빌 3장 8-9절(배설물)200719-이 근호 목사 빌립보서 최고관리자 20-07-19
18,063 자유게시판 주일학교 설교 / 십자가의 능력 / 200719 - 최고관리자 20-07-19
18,062 묻고답하기 죽으심을 본받아 빌립보서 최고관리자 20-07-19
18,061 묻고답하기 꿈 속에서 -송민선 성도님의 글 - 최고관리자 20-07-17
18,060 묻고답하기 “But” 그러나 - 최고관리자 20-07-17
18,059 자유게시판 꿈속에서 - 최고관리자 20-07-17
18,058 자유게시판 50강-호 13장 9-11절(왕을 주신 이유)200715-이 근호목사 호세아 최고관리자 20-07-16
18,057 자유게시판 20200713b 부산강의 : [시편]30(19편)-침묵의 소리 시편 최고관리자 20-07-15
열람 ➜ 자유게시판 20200713a 부산강의 : [시편]30(19편)-침묵의 소리 시편 최고관리자 20-07-15
18,055 자유게시판 강남-누가복음 3장 7절 (구원 시스템) 200707b-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최고관리자 20-07-14
18,054 자유게시판 강남-누가복음 3장 7절 (구원 시스템) 200707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최고관리자 20-07-14
18,053 자유게시판 광주강의20200626a 마가복음15장 16절(과거공유) 마가복음 최고관리자 20-07-12
18,052 자유게시판 39강-욥기 11장 12~20절(세상 시스템)20200712 이근호 목사 욥기 최고관리자 20-07-12
18,051 자유게시판 21강-빌 3장 7절(그러나)200712-이 근호 목사 빌립보서 최고관리자 20-07-12
18,050 자유게시판 주일학교 설교 / 십자가 / 200712 - 최고관리자 20-07-12
18,049 묻고답하기 배설물과 의 빌립보서 최고관리자 20-07-12
18,048 자유게시판 서울의존강의20200709b 베드로전서4장 11절(끝장)-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최고관리자 20-07-12
18,047 자유게시판 서울의존강의20200709a 베드로전서4장 11절(끝장)-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최고관리자 20-07-12
18,046 자유게시판 광주강의20200626b 마가복음15장 16절(과거공유) 마가복음 최고관리자 20-07-11
18,045 자유게시판 대전-122강 마태복음27장5절-10절(피밭)20200630-이 근호 목사 마태복음 최고관리자 20-07-10
18,044 자유게시판 대전-60강 사무엘상18장17-절(끝과 중심)20200630-이 근호 목사 사무엘상 최고관리자 20-07-10
18,043 묻고답하기 The Coffin of The Law 율법의 관 - 최고관리자 20-07-10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