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3장 7절 (구원 시스템) 200707a-이근호 목사
강남-누가복음 3장 7절 (구원 시스템) 200707a-이근호 목사
오늘은 누가복음 3장 1절부터 하겠습니다.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그렇게 되어있지요. 성경에서 이렇게 지명 나오고 또 사람 이름 나오면 살짝 골치아플려고 하지요. 왜냐하면 우리가 현재 사는 동네가 아니고 그 당시 시절이고 지금의 정치적인 시스템도 아니고 고대 봉건사회에 있었던 정치구조이기 때문에 이걸 굳이 알아야 되는가? 이것 모르면 안 되는가 하는 부담을 느끼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왜 이렇게 지명이 나오고 이름이 나오느냐 하면 보통 하늘나라가 하늘에 있잖아요. 저 멀리 있다고 본거에요. 사람들은 하늘나라 가면 이렇게 전부 다 목을 이렇게 해서 쳐다보는 거에요. 위로 쳐다보는 식이라고요. 제가 어릴 때 버스에 보면 사고 나지말라고 옥색치마 원피스입은 아가씨가 손 모으고 이렇게 기도하는 사진 있어요. 소녀의 기도. 옥색이에요.
전부 다 쳐다보는 겁니다. 하늘에 있다고. 그러나 성경에서는 하늘나라가 하늘에 있는게 아니고 지명이 있고 인물이 등장한다는 것은 이 지상의 하늘나라가 여기에서 증거를 징후를 보이고 있다는 겁니다. 멀리서 찾지 말고 지금 네가 사는 이 현장이 그 지점에서 하나님 나라와 접선되어야 된다. 지금 여기서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면 죽어서도 하늘나라는 상관없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늘나라를 누가 만드는가? 하나님께서 지상을 상대로 만들지요. 만들 때 서양 장기 보면 말을 이렇게 옮기잖아요. 옮기듯이 하나님께서 디베료 가이사가 위에 앉았을 때 너는 배치를 이렇게 하고 있은지 15년해 A.D. 26년이거든요 이렇게 쭈욱. 그 다음에 본디오 빌라도 총독은 여기 배치, 여기 지점 유대의 총독으로 갈릴리 분봉 왕으로.
갈릴리라고 하는 것은 갈릴리 바다에 있는 헤롯 안디바라는 아들 헤롯이 죽고 난 뒤에 아들 세 명이 있었어요. 그중에 안디바라는 아들이 거기에 갈릴리 지방에 지역 왕으로 있는 겁니다. 지중해가 있고 여기 갈릴리 바다가 있는데 여기 사해 바다가 있어요. 10배 크다 했지요. 여기 중간에 요단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 동네를 갈릴리 동네.
갈릴리 동네에 이 땅의 지역 왕으로서 로마에 의해서 지명 받은 사람이 헤롯 안디바라는 사람이에요. 여기에는 그냥 헤롯이라고 되어있는데 헤롯 안디바. 갈릴리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 동생 있지요. 이 동생 빌립이 이쪽에 있어요. 이쪽의 빌립이 이 쪽 땅을 또 차지하고 있어요. 그 다음에 여기 유다 이쪽 지역은 안 나왔는데 아켈라오라고 있어요. 아켈라오라고 있는데 그건 안 나와있고 그 다음에 마지막에 저 북쪽에 시리아, 그 당시는 아람이죠.
시리아의 루사니아라는 사람에게 분봉 왕을 주었고 그 다음에 왕은 그렇고 그 다음에 안나스와 가야바, 안나스는 가야바의 장인어른입니다. 안나스는 전임 제사장이고 후임이 가야바고 예수님 당시에 돌아가실 때 가야바한테 심문받고 돌아가셨습니다. 재판받고 돌아가셨습니다.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빈 들이라고 하는 것은 이쪽을 말해요. 사막이거든요 광야거든요. 이렇게 사람들을 배치해놨다는 말은 분명히 하늘나라는 수직적으로 아는 건데 수직적이 아니고 뭐냐 수평적이라는 겁니다. ‘수평적’. 하나님은 어떻게 생겼는가? 궁금하다. 궁금하지만 옆에 있어. 바로 옆에 하나님이 있는거야. 바로 옆에.
만약에 하나님 나라가 하늘에 있다면 BBQ 미국에 프랜차이즈 치킨집 할아버지처럼 또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처럼 인자하게 생겨서 또는 대구 지방에 있는 소주 금복주 그러한 영감처럼 사람들은 이 지상에서 쳐다보면서 하나님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거에요. 그런 그림들 많잖아요 아주. 여러분 하나님 그림 그리면서 인상 드럽게 그린 거 봤어요? 아니지요? 예수님 치고 다 미남이에요. 그거는 인간이 자기가 되고 싶은 이상향을 그려서 이미지화시킨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의 상상력을 동원해서 계신 것이 아니고 바로 옆에 온 거에요. 그냥 옆에 와서 뿅! 하고 등장한게 아니고 사람들의 득살에 사람들의 여러 가지의 일가친척 그들의 군인들 아까 가야바 왕 정치구조 이 안에서 같이 움직이고 같이 당하고 휩쓸리고 정치적인 상황 속에 같이 놀아나서 그들과 함께 삶을 한다 이 말이죠. 인간들의 군중들 속에.
군중들 속에 주님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섞여버린 거에요. 그래서 찾아봐라. 네가 나 찾아봐라. 그중에 누가 하나님인지 찾아봐라. 이랬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찾아봐라가 되지만 세례 요한은 여기 빈 들에 나오는 광야죠. 2절에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세례 요한에게는 이것이 무대가 따로 나와있어요.
여기는 사람 사는 동네고 이 광야는 사막은 사람이 안 사는 동네에요. 요단강변에 있고 이쪽에 세례 요한이 있어서 하는 말이 뭐냐 하면은 세례 요한은 자기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나는 무엇이다가 아니라 나는 소리다. 나는 외침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주체가 없습니다. 주체는 내 뒤에 계시고 나는 그분의 마이크. 그분의 마이크로서 있을 뿐입니다. 그분이 내 안에서 이야기합니다. 그분이 내 안에.
옛날에 박신양 나오는 드라마 있지요? 그 박신양이 하는 말이 “애기야 가자! 내 안에 너 있다”. 내 안에 너 있다 하잖아요. 내 안에 너 있다. 무슨 뜻이에요? 나는 너를 따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너는 내 안에 있어. 상대방 여자 그 이름이 뭐였지? 김정은. 김정은이 주춤하고 여자배우가 주춤하니까 박신양이 그러잖아요. “왜 내 남자라고 왜 말을 못해?” 그런 대사가 나오지요.
그럴 때 우리는 그 드라마를 보면서 뭘 느낍니까? 이걸 느끼는 거에요. 사랑이라는 것이 저런 관계라는 것을 알지요. 사랑이라는 관계를 느끼지요. ‘사랑’. 사랑의 특징은 뭐냐 하면은 자기의 주체를 타인에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넘겨버리는 거에요. 내가 여기 있는 것이 아니고 나는 저 분 안에 내가 있다는 겁니다. 저 분 안에 내가 있다.
그러니까 내가 어찌되든 나는 내가 내 인생을 따로 챙길 맘이 없다. 그 분만 잘되면 되지 내가 내 인생 따로 챙길 그런 생각은 없다. 그런 피곤한 생각을 왜 하느냐. 그분이 알아서 다 하는데. 사랑을 언급하면서 성경 전체가 예수님을 성도의 남자, 또는 남편으로 보고요. 성도는 뭡니까? 자동적으로 여자가 되지요.
여자가 된다는 말은 여자는 원래 처음부터 그냥 여자가 아니고 사람이에요. 일반 사람입니다. 사람인데 누구를 만날 때? 남자를 만날 때 사람이 여자가 되는 거에요. 이게 바로 이번에 수련회할 때 룻기에서 할 거에요. 룻기에서. 그래서 여자는 없는 거에요. 왜냐하면 남자 안에 여자가 있으니까 남자가 그 여자를 대표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그걸 보고 기분 나쁘게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기분 나쁘게 생각하는게 아니고 고맙게 생각해야 되지요. 왜냐하면 내가 나를 따로 안 챙겨도 되니까.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이처럼 나를 잊어버리는 거에요. 나를 잊어버린다는 말은 뭘 잊어버리느냐. 목사님 저는 어떻게 구원받아요? 지금 이런 소리하면 안돼요. ‘나’가 없는데 무슨 구원이 있어요.
내가 내 구원을 생각 안 해도 되도록 주님께서는 군중 속에 오셨던 거에요. 내가 내 구원에 대해서 신경쓰지 않도록. 옛날 팝송에 보면 ‘THE ROSE’ 라는 노래가 있어요. 장미라는 노래에 보면 이런 가사가 있어요. 사랑에서 상처를 두려워한다면 함께 춤출 수가 없습니다. 그런 가사가 나와요. 상처를 두려워한다면 춤출 수가 없어요.
그리고 사람이 죽는걸 무서워한다면 사람 사는 법도 배우지 못할 겁니다. 집에 가면 ‘THE ROSE’ 라고 한번 쳐보세요. 사랑은 강가에 있는 부드러운 갈대 같아서 날마다 강물이 와서 늘 쓰다듬어 준다는 거에요. 강물이 쉴 새 없이. 그리고 갈대는 이 쓰다듬어 주는 강물이 너무 좋아서 항상 만족스럽게 고개를 숙이죠. 강물이 와서 쓰다듬어 주니까. 아주 표현이 좋아요.
강물에 있는 갈대가 강물로서 대만족하는 것처럼 자기가 개별자로서 단독으로 인생 내가 이겨내리라 이럴 필요가 없다는 거에요. 사랑이 오게 되면 나는 그 강물로써 족하다 이 말입니다. 가사에 그렇게 되어있는데 ‘THE ROSE’ 입니다. 잘 적어놓으세요. 그 다음의 가사가 뭐냐? 사랑은 또 양면성이 있어서 사랑은 면도칼 같아서 찔러버린다는 거에요.
그러나 사랑하고 난 뒤에 옛날로 못 돌아가요. 옛날에 너무 좋았던 기억이 있어가지고 아이고 뭐 사람 하나 안 만난 것으로 하지. 그럴 수가 없어요. 모든 것을 그분한테 다 빼앗겼기 때문에 그 상처가 깊은 거에요. 그래서 그 상처에 대한 그 상처를 이겨낼려면 날 버린 남자 죽어야 돼요. 날 버린 남자가 죽어야 돼.
그야말로 오리도 안 가가지고 김소월의 시처럼 그냥 찔레꽃 진달래꽃 즈려밟고 가소서. 나를 죽이고 가라 이 말이죠. 이처럼 주님께서 오신 것은 사랑을 주러 왔기 때문에 우리가 한 일에 대해서 사랑이 오게 되면 내가 한 일에 대해서 일체 우리가 책임질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한평생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해서 일체 주님 앞에 책임지지 않습니다. 책임진다면 심판의 대상이 되지요. 사랑은 심판을 이겨야 사랑이라고 이야기하거든요. 사랑은 온다고 해서 사랑이 아니고 뭔가 가지고와요. 너에 대해서 책임을 일체 묻지 않겠다는 것. 일체 어떤 것도 너에게 일체 책임지지 않겠다는 것. 그것과 더불어서 사랑의 선물로서 그게 주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어디까지 했느냐 하면은 3장 2절까지 지금 3장 2절까지 하고 있거든요.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치고 있는 그 소리. 그 소리가 어떤 소리냐 그걸 이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네 시간에서 벗어나라. 또 다른 말로 하면 시간 시공간 할 수 있는데요. 네 시간에서 벗어나라.
이 말은 시간이 사람을 주눅들게 만들고 괴롭게 만들고 피곤하게 만들어요. 가정주부들이 늘 신경쓰는게 뭐냐 하면은 오늘 저녁에 반찬 뭐 할까? 저녁 먹고 난 다음에는 내일 아침에 밥은 뭐 해먹지? 가정주부들. 혼자 살면 식빵사서 먹으면 되는데 가정주부들. 큰 애들 있지않습니까.
어떤 여자분은 남편이 미역국 좋아한다 해가지고 6개월 동안 미역국만 먹였는데. 6개월 동안 미역국 먹였어요. 편하거든요. 제가 요령 하나 알려드릴께요. 홈쇼핑에 가면은 국부터 해서 반찬부터 해가지고 전부다 다 주문하면 다 됩니다. 반찬 걱정할 필요 없어요. 여러가지 해가지고 육개장하고 냉면도 있어요. 북한에서 넘어온 거 있어요.
그 냉면부터 해가지고 바꿔치기하면 돼요. 바꾸면 돼요. 지금 재첩국도 있는데 재첩국은 벌써 끝났어요. 하동의 재첩국 진짜 맛있어요. 벌써 끝났어. 시간이 왜 자꾸 힘들어하느냐 하면은 미래의 내가 뭐 될 것인가가 지금 나를 주눅들게 만들어버립니다. 미래의 내가.
내일 뭐 할거냐? 모레 뭐 할거냐? 그것도 늘리면 한 달 뒤에 일 년 뒤에 십 년 뒤에 나는 뭐가 되어있지? 십 년 뒤에. 주식을 할 때 매도해야 뭐 되는가 이런 거. 투자할 때 펀드를 어디에 뭘 들지? 이게 왜 그러느냐 하면 시간이 나를 그렇게 힘들게 만들어요.
그런데 세례 요한은 네 시간에서 벗어나라. 이것은 뭐냐 하면은 하늘의 시공간, 시공간이니까 천국이죠. 하늘의 시공간이 인간의 시간, 시공간 이것을 완전 뭉개버리기 위해서 오신 분이 계시다 이 말이죠. 시공간 그러니까 내일 뭐할까 모레 뭐할까 이러다가 내가 나중에 늙어서 노후대책 되겠나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이 사람들이 힘들어하신다는걸 알아요.
그래서 인간으로 하여금 기존의 자기 시간에서 벗어나서 오시는 예수님의 시간으로 편입시키고 집어넣는 작업을 지금 세례 요한을 앞장세워서 보여주는 겁니다. 세례 요한을 앞장세워서 보여주는 거에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시간 밖으로 끄집어낼 때는 기존 시간에서 주님의 시간으로 넘어갈 때 넘어가는 그 연결 고리에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바로 죽음 현상이 일어나요. ‘십자가 죽음’. 죽음이라는 것은 이것은 특수한 죽음이거든요. ‘특수한 죽음’. 참 이게 굉장히 특수한 죽음이에요. 특수한 죽음이 어떤 죽음이냐 하는 것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그 사람에 대한 재판, 심사, 최후의 심사, 평가 이거 이미 종결한 걸로 보는 것이 특수한 죽음이에요.
네가 몇 살 되서 몇 살에 죽던 간에 너에 대해서는 패스가 되는 거에요. 이미. 심사나 평가나 이런 것이 생략이 되는 거에요. 그것을 그 사람한테는 치루지 않아요. 무시험 패스에요. 무시험 패스가 가능하게 하는 겁니다. 여기까지 여러분 쉽게 아시겠지요?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시험 내용이 뭔데 그냥 통과시키느냐. 시험 내용이 뭐냐 하면 이게 바로 의미라는 거에요. ‘의미’. 인간은 있으면 인간은 항상 뭐를 묻느냐 하면은 의미를 찾게 되어있어요. 내가 왜 살까? 이걸 하는 것이 옳을까 그를까? 전부다 의미입니다. 전부다 하나의 의미에요. 인간은 그냥 보지를 않아요. 전부다 의미를 가지고 보는 겁니다. 하나의 의미를 띄고 보는 거에요. 의미를 띄고 볼 때는 나와 관련성을 지으면서 의미가 생기지만 나와 관련성이 없는 것은 의미가 없는 거에요.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어느 출판사의 직원이 그냥 일하고 있는데 앞에 꽃이 있다 이 말이죠. 그냥 꽃인데 어느 날 가만히 보니까 그 꽃이 갑자기 자기한테 부각이 되는 거에요. 그래서 시를 지었어요. 네가 그냥 꽃병에 꽂혀있는 꽃이었는데 내가 꽃이라고 이름을 부를 때 비로소 너는 내게 와서 하나의 의미가 되었다. 경북대학교 교수 김춘수라는 사람 그 사람이 지은 시가 꽃의 의미라는 그거죠.
사람은 눈에 띄게 되면 이거는 내게 필요한 것 필요없는 것 구분해가지고 필요한 것은 전부다 의미를 부여해요. 의미를 부여하면서 자기가 거기에다가 기대를 걸지요. 기대를 거는데 그 기대가 마음대로 안되면 속상한 겁니다. 속이 상한 거에요. 의미를 주면서 내 소유가 되고 내 소유가 내 뜻대로 안되면 내가 망가지는 부분이 망가지는데 내 전체가 다 망가지는 겁니다.
일부가 망가지더라도 내 전체가 다 속이 상하는 거에요. 그 환경이 뭐냐 하면은 시간이라는 환경입니다. 시간이라는 환경 또는 그걸 시간을 범주라고 이야기하는데 ‘범주’. 범주라는 말을 누가 했느냐 하면은 유명한 철학자 칸트가 이야기했지요.
칸트는 세상을 볼 때에 인간이 속한 모든 세상을 볼 때에 오성이 먼저 들어가고 이성이 아니고 오성이 먼저 들어와서 그냥 본 것을 편집을 하는데 뭘로 편집하느냐 하면 이성으로 편집해가지고 그것을 사물로 인식한다. 하나의 의미로 인식을 한다. 따라서 있는 그대로를 어떤 인간도 제대로 볼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자기가 타고난 자기의 과거의 의식가지고 모든 것을 자기에게 의미를 주는 것이지 똑같은 꽃이라도 사람마다 의미가 다 다르고 다 달라요. 이것은 뭐냐? 개별 자신이 개별 안에서 자폐적으로 자기밖에 모르는 쪽으로 사는 거에요. 의미가 있다는 말은 의미를 자꾸 갖춘다는 말은 쉽게 말해서 뭐냐? 한번 적어볼께요.
나는 어떤 경우라도 안 망가져야 한다. 독한 마음을 더욱 더 갖게 돼요. 나는 어떤 경우라도 안 망가져야 된다. 그런데 이런 인간에게 주님께서 심사를 해버려요. 마지막에 심판, 심사를 해버리면 망가질 수밖에 없는 거에요. 왜냐하면 본인을 위해서 한평생 살아왔기 때문에 전체 우주가 요구하는 것, 전체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과 영 맞지를 않아요.
나한테는 되게 좋고 나한테는 행복했는데 너만 행복해야 되겠어? 왜 너만 행복해? 네가 창조주야? 네가 하나님이야? 너 편하고 너만 행복하고 너만 팔자 편하면 그럼 너는 천국 가? 천국은 너 좋아라고 있는 곳이 아니거든요. 하나님 보시기에 좋아야 되는데 하나님 보시기에는 뭐다? 모든게 좋아야 되는데 인간은 태어나면서 자기 의만 챙기면서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요구에 미흡한 거에요. 충족될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왜 오셨는가? 왜 군중 속에 오셨는가? 주님께서 오신 이유는 망가지라고 온 거에요. “너는 망가져”. 충분히 망가져 버리란 말이죠. 주저앉아라 이 말이죠. 네가 남한테 안 질려고 애를 쓰지말고 그냥 무너져버려라. 무너져버려라. 왜? 너는 오늘 제목을 이걸 할까 싶은데 너는 뭐냐 하면은 ‘비정상’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정상이 아니에요.
정상이 아닌 인간이 계획을 세운다? 어떤 이벤트를 한다? 어떻게 뭐 남한테 잘해보인다 그런게 전부 다 목적이 원래 인간이 비정상 같으면 목적도 정상이 아닙니다. 비정상이에요. 제가 지난 낮 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지요. 사람들이 자꾸 정신 차리라고 하는데 그러지 마시고 정신 차리지 마시고 아예 미쳐야 된다고 했지요.
정신을 차리면 차리는 족족 피곤이 밀려옵니다. 지켜야 돼. 버텨야 돼. 버텨야지. 여기서 무너지면 안돼. 쓰러지면 안돼. 본인이 정상입니까? 마치 그것은 이런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은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은 정신병 환자가 의사 선생님 앞에서 의사 선생님 저 버텨야됩니다. 정신 차려야 됩니다.
의사 선생님 뭐라고 하겠습니까? “아이고 많이 미쳤구나. 얘가. 아이고 병세가 심하네.” “의사 선생님 빨리 고쳐가지고 정상으로 돌아오게 해주세요.” 정신분석학에 그런 이야기하지요. 의사 선생님한테 정상으로 돌아오게 해달라는건 그건 이미 그게 정상이라고요. 환자가 그런 소리 안해요. 나 이미 정상입니다 우기는게 문제지.
“나 문제 있는데요 나 죄인인데 고쳐주세요” 이런 것은 환자 아닙니다. 그건 정상인데요 하는거고. 진짜 미친 인간은요 “아 나는 모르겠어 나는 멀쩡한데 식구들이 자꾸 가보라고 해서 왔습니다” 이러는 거에요. 가보라고. 인간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정상이 아닙니다. 정상도 아니기 때문에 정상도 아닌 비정상적인 의미를 자꾸 뽑아내요.
그런데 자기도 약간 알아요. 이 세상이 내 맘대로 안되는걸 알거든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내일로 미뤄. 그래 오늘 내가 참는다. 한 달 뒤에는 내 뜻대로 될거야. 한 달 되도 안되면, 그래 2년 뒤에는 내가 보란 듯이 성공하고 말리라. 2년 뒤에 안되면 10년 뒤에 한번 봐. 나보고 뭐라 한 인간들 내가 성공해서 당당히 보여줄게. 그런 식으로 살아가요. 시간이 우리를 힘들게 만들어요. 시간이. 시간을 자꾸 미루고 지연시키는 거에요. 자꾸.
사람이 사기당하는 이유가 뭔지 알아요? 안 망할려고 하니까 사기 당하는 거에요. 안 망할려고. 보이스피싱도 마찬가지고. 술 친구, 담배 친구가 와가지고 사기를 치는 거에요. 당신 이렇게 하면 앞으로 당신 월급보다 훨씬 낫다고 자꾸 그런 소리하는 이유가 우리가 평소에 안 망할려고 지금보다 오늘은 내일보다 모레는 지금보다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서 애쓰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런 사기가 자꾸 들어오는 겁니다.
사람들이 이단에 빠지는 이유도 안 망할려고 하기 때문에 이단에 빠지는 거에요. 그래서 결국 인간은 시간 속에서 안 망할려고 하는데 안 망한다고 하는 만큼 그 만큼 망할까봐 두렵다는 거에요. 두려우니까 이 두려움 자체가 이미 사람 비정상이에요. 무슨 일이 안 나도 벌벌 떨고 쫄고 늘 쪼는 거에요. 벌벌 떨면서.
그래서 세상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은 이 세상을 이렇게 봅니다. 비틀거리는 세상. ‘비틀거리는 세상’. 전부다 모든 가정 모든 사람 전부 다 비틀거리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 문제 하나 낼게요. 모든 인간이 비틀거리면서 술 취하듯이 비틀거리면서 방향도 없이 사는데 그러면 신종 코로나, 하나님께서 신종 코로나 19의 바이러스를 준 이유가 뭡니까?
답변을 요구한 내가 나쁘지요. 이겁니다. 오늘 본문과 관련되어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은 신종 코로나 19죠. 이걸 왜 주느냐 하면은 세상은 어떻게 살아도 무효다. 이 세상 어떻게 살아도 무효다. 네가 어떻게 살든 세상이 어떻게 살든 이 세상은 다 부질없는 짓거리를 하고 있는 거에요. 소용없는 세월을 보내고 있는 겁니다.
만약에 신종 코로나가 눈에 보이는 나노 크기의 바이러스가 아니고 신종 코로나가 어떤 괴물처럼 생긴 멧돼지같은 멧돼지라면 사람은 그 멧돼지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온 힘을 다하여 활을 쏘고 총을 쏴가지고 잡아버리겠지요. 그러면 잡기 전에는 내가 멧돼지한테 당했지만 잡고 난 뒤에는 내가 기어이 이겼잖아요.
그러면 나한테 나는 안 망해도 되고 내가 저 멧돼지를 잡는게 의미있는 행동이 돼요. 왜? 내가 안 망해도 되는 의미있는 행동을 우리는 힘을 단결해서 그 못된 병을 옮기는 멧돼지를 잡을 수 있지만 혹시 여러분 신종 코로나 체포한 사람 봤습니까? 바이러스를? 그 작은 나노 크기를 어떻게 체포해요.
그리고 온 모든 72억의 모든 인구가 아무리 지혜를 짜내고 일년 내에 백신이고 치료제 없어요 지금. 기대하지 마세요. 치료제 없습니다. 백신 없어요. 일 년 뒤에 보자 자꾸 미루는 거에요. 그 말은 뭐냐? 이미 졌어요. 졌다 이 말이죠. 신종 코로나 이전과 이후가 신종 코로나 이전까지는 인간이 못 할 일이 없어요.
인간은 생각하고 힘 단결하면 뭐든지 해낼 수 있는 거에요. 왜? 적들이 만만하니까. 뱀 같으면 잡으면 되니까. 만만하니까. 그런데 신종 코로나는 미국이고 이태리고 영국이고 간에 중국이고 간에 어떤 것도 신종 코로나를 이길 수가 없어요. 심지어 원자력 핵폭탄 개발하고 우주선 날리면 인간은 못할 것 없다고 자부한 인간이 그 코로나 우한에서 번진 그 코로나한테는 이게 너무 작아서 그런지 이길 수가 없어요. 해결책이 없어요.
그리고 이게 또 변종을 하네. 변신을 잘해요. 이길 수가 없습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게임오버, 게임 끝난 거에요. 어떻게 끝났어요? 인생 어떻게 살아도 이거는 부질없는 것. 부질없는 것. 아무 소용없는 것. 내년은? 내년이 의미가 없어요. 신종 코로나가 없어지지 않는데 무슨 내년이라는 시간 자체가 의미가 없다니까요.
그래서 신종 코로나는 뭐냐 하면 인간으로 하여금 시간을 절단내버렸어요. 미래를 절단, 미래가 짤려나간 거에요. 인간에게 미래가 없는 거에요. 과거에 얼마나 인간이 대단했다. 원자력까지 원자폭탄 만들었다. 그 과거도 다 소용없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뭐냐? 지금 이 순간.
지금 이 순간 인간은 신종 코로나와 같이 사는데 기죽어 산다. 심지어 복음 안다고 우기는 저도 여기 마스크 있어요. 중국산이라 떨어졌어요. 마스크 있어요. 이게 뭡니까? 진 거에요 제가. 이게 뭐냐 하면은 져버리라 이 말이죠. 지면 이기는 거에요. 지면 이기는 거에요. 그리고 신종 코로나 특징은 얼마나 착하냐? 얼마나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일체 고려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바르게 살았느냐? 악하게 살았느냐? 교도소에 있느냐? 아니면 청와대에 있느냐 일체 묻지 않고 코로나는 진짜 천사와 같아가지고 사람이 어떻게 행했느냐는 것을 일체 계산에 넣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들은 신종 코로나 옮기는 숙주며 그 다음부터는 거리 띄우기 아니고 마음 띄우기로 갑니다. 마음들이 침 튀지마세요 가까이 오지마세요.
전부다 인간 대 인간의 협동이라든지 협조 가족 다 부질없는 것. 다 인간의 사랑, 우애, 의리, 책임감 신종 코로나 앞에 아무짝 소용없는 거에요. 소용없어요. 그동안 잘해줬잖아. 소용없어요. 잘해줬잖아 하면서 오게 되면 “오지마라 너! 너 숙주다”. 이렇게.
이 누가복음에 나오는 이 세례 요한의 시작이 주님의 시작입니다. 주님을 신종 코로나 이렇게 생각하시면 오늘 본문은 아주 어려운게 없어요. 주님 자체가 바이러스에요. 주님 자체가 바이러스. 마지막 심판 오기 전에 미리 무너져라. 미리 망해버려라. 그래서 누가복음에 나오는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나오는 이 내용은 해답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은 사도 바울의 편지에서 나옵니다. 성경에 그렇게 구성되어 있지요.
잠깐 귀찮지만 신종 코로나에 죽을 때 죽더라도 성경 한번 찾아봅시다. 에베소서 2장 한번 봅시다. 2장 보시고 제가 한번 슬쩍 읽어볼테니까 누가 한번 설명해보세요. 이게 무슨 뜻인지를. 에베소서 2장 5절 찾아 보셨습니까?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이거 과거, 현재 완료입니다. 이미된 거에요.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렇게 되어 있지요. 이게 무슨 뜻이에요? 방금 여러분 강의 들으면 알겠지요.
예수님이 오신 것은 우리를 어디 안에서 어디 밖으로 끄집어낸다? 시간 안에서 뭐로? 시간 밖으로 끄집어내지요. 여기 보면 함께, 누구와 함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이미 앉혔다는 거에요. 현재완료에요. 이미 끝났어요 이게. 앞으로 그렇게 될거야가 아닙니다. 죽으면 천당 간다는 뜻이 아니에요. 지금 이 순간.
구원에는 시간이 없어요. 시간이 미래라는게 필요 없어요. 구원에는 없어요. 지금 이 순간입니다. 내가 말하는 지금이라는 것은 우리가 아는 지금이랑 달라요. 우리가 하는 현재 지금이라고 하는 것은 과거와 미래 사이의 지금이지만 제가 말하는 지금은 뭐냐? 과거 현재 미래 그 현재를 넘어서는 현재.
주님에 속한, 주님과 함께 있다는 그러한 상황을 저는 현재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제가 이야기하는게 아니고 에베소서 2장 5절에서 5절 6절에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에요. 이미 하늘에 앉혔다는 거에요. 이미 구원되었다는 거에요. 구원될 것이 아니고 구원된 거에요. 앉힌 거에요. 이게 바로 사도 바울 편지 안에 있습니다. 이게 해답 정답이거든요.
문제는 어디서 찾는가? 바로 마태 누가 요한 마가에서 제안하죠. 오늘 우리가 마가를 보고 있는 거에요. 마가를 보면서 우리는 뭘 끄집어내는가? 이미 정답은 어떻게 됐습니까? 정답은 알았죠. 정답을 알고 정답은 도대체 우리가 어떠한 자리에 있었기에 정답이라는 것이 그런 식으로만 제시되야 되는가?
열심히 해라 바르게 살아 왜 이런 정답이 아니고 이미 너는 이미 살았다는 거에요. 너는 이미 살고 너의 생명은 주님과 함께 생명을 공유하고 있다. 공유란 말 알지요? 같은 영생이 있는 생명나무, 영생이 있는 곳에 함께 살고 있다. 네가 목숨 끊어진다고 해서 영생이 취소되는 게 아니다. 끊어지든 네 목숨이 100살까지 살든 관계 없이 영생은 지금 14살 아이라도 영생이다.
영생이 그대로 작용하고 있다라는 것을 사도 바울은 결론을 제시하는 거에요. 그 결론을 좋다고 할 것이 아니라 도대체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는 것이 뭐가 문제인데 왜 결론은 우리하고 단절되어 있어. 우리가 사는 의식하고 단절된 채 엉뚱하게 저렇게 주어지는지 알아야 되겠지요. 그래서 누가복음 공부가 그래서 의미가 있는 겁니다.
이왕 성경 찾은거 한 구절 더 찾아봅시다. 요한복음 8장 7절 이건 누가 한번 읽어 보세요. 요한복음 8장 7절. 보시고 평생토록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본문 말씀을.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 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인간은 다른 인간을 평가할 수 없다. 이 말은 더 나아가서 내가 나를 평가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내가 나를 평가하지 말라는 거에요. 인간이 한 평생이 고생길이다 지옥이다 이유를 모르겠다. 이유를 알려줄까요? 본인이 본인을 평가해서 그래요. 본인이. 본인의 실력과 본인 스스로 자책하고 너무 들뜨게 만들고 또 자책하고 좌절시키고 또 이렇게 격려하고 본인 노름에 본인이 놀아났어요.
몸은 늙어가면서도 자꾸 자기는 젊었다 젊었다 하면서 본인을 격려하고요. 그러니까 이렇게 하니까 사람들은 본인에 대해서 선호하고 이걸 지킬려고 하겠지요. 그럼 지킬려면 이왕 지키는 것은 저주받기 위해서 지킬 필요 없잖아요. 복 받기 위해서 지키겠지요.
그러니까 자연적으로 본인이 뭐가 됩니까? 죄 없다고 자꾸 억지를 부리는 거에요. 본인한테 죄 없다. 신종 코로나 나한테 오면 안돼. 나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렇게 착한 사람한테 코로나 때찌! 저리 가. 하나님이 설마 나한테 아프게 안 할거야. 본인이 그렇게 아프게 안 할거야 본인이 생각한다는 자체가 그만큼 올까봐 지금 무서워 떨고 있는 거에요. 그런 생각한다는 자체가.
강의 처음부터 새로 할까요? 박신양이 뭐라고 했습니까? “내 속에 너 있다.” 했지요. 손 잡고 뭐라고 합니까? “애기야 가자!” 하지요. 애기야 가자. 김정은은 혼자 있다고 생각하는데 박신양이 말합니다. 네가 혼자 있는게 아니야. 내가 피아노 앞에서 노래 한번 불러줄까? 너는 혼자 있는게 아니야. “이 사람이 내 사람이다 왜 말을 못해?” 혼자 있는게 아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자꾸 본인은 혼자 있었기 때문에 내 인생은 내가 아니면 해결자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그걸 가지고 오늘 제목입니다. ‘비정상’. 쉽게 말해서 미친놈. 비틀거림. 다들 그렇게 살아요 다들. 목사님 무슨 해답이 있습니까? 하는데 해답이 있습니까? 묻는 그 자체가 왜 그런 질문을 합니까? 안 미칠려고 하는 거에요. 정상인 될려고 버티는 거에요 지금. 망해도 되는데 자꾸만 버틸려고 하는 거에요.
그러면 누가복음에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사도 바울 편지까지 이어지는가. 이게 뭐냐 하면은 시스템 재편성하는 거에요.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 사람들이 그대로 이 세상 시간 그냥 갑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인간 시간에 들어왔기 때문에. 예수님도 인간 시간에 적용받고 인간도 인간 시간으로 그냥 갑니다.
그냥 가는데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한테는 예수님이 제자들 통해서 예수님 뭘 보여주느냐 하면은 이 시간이라는 시스템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되면 그 일 또는 사건을 통해서 전에 알았던 그 의미 체계가 그 일을 통해서 재편성돼요.
재편성이라는 말은 기존에 내가 알고 있었던 인생관 그거는 어제까지 써먹었던 인생관인데 오늘 일이 터져버리면 ‘아 내가 세상에 대해서 잘못 봤구나. 이렇게 조성돼야 이게 아구가 맞아’ 하고 사건 터지면 그 사건을 집어넣어서 전체를 다 바꿔버려요. ‘아 인생은 이렇게 살아야 돼. 이렇게 살아야 돼’ 이렇게 되거든요.
예를 들면 어떤 친구가 있는데 선입견이 인상이 좀 더럽고 성격도 더러워가지고 저 친구를 만나면 분명히 나한테 폭력적이고 나쁘게 할 것이다. 인상도 험악해가지고 이렇게 있으니까.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그 사람한테 우연히 도움을 받고 혜택도 받고 심지어 예상도 못한 친절과 그렇게 도움을 받게 되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그 사람을 볼 때 어떻게 됩니까?
아 사람을 인상을 보고 사람을 함부로 평가해서는 안되겠구나 라고 그 사건 이전까지와 이후까지의 자기 의식이 어떻게 돼요? 재편성되게 되겠지요. 그 재편성을 말합니다. 재편성을 하는 방법은 재료가 있어야 돼요. 재료가 뭐냐 하면은 인간의 육이 재료가 됩니다. 인간의 육이 재료가 되어서 재편성에 들어가게 돼요.
육이 있어야 되는 이유는 인간은 육은 아까도 말했지만 자기 의미, 자기 체제, 자기 단독적인 나만의 인생, 나만 편하고 나만 행복하면 그만이니까 육 중심으로 자기 편의 위주로 이익 위주로 살게 되어있어요. 육과 육이 만날 때 내가 이렇게 해주면 뭐 해줄렵니까? 내가 이렇게 양보할 때 당신은 나한테 뭐 해줄건데? 왜 그런 말을 하느냐 하면은 내 위주거든요.
그런 생각을 왜 하느냐? 지금껏 살아온 내 인생관이 그런 식으로 편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과거에 사기를 한 서너번 당한 사람은 두 번 다시 그런 제안 한 사람한테 사기를 내가 옛날에 당해봤어. 안 속아 이러거든요.
그런데 그 사람이 진짜 진정으로 해준다는 것을 자기 본의 아니게 강제적으로 혜택을 입었다면 아 내가 저 인간이라고 다 사기꾼이 아니구나. 내가 이거 감안해야겠네. 그렇다면 그걸 감안해서 재편성하겠지요. 이걸 가지고 경상도 말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시근났다. 또는 보통 말로 철이났다. 철났다 이렇게 하지요.
인간은 인생을 살면서 시간을 가면 갈수록 점점 철이 나는 거에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김종환이 그런 말을 했지요. 인생은 늙어가는 것이 아니고 익어가는 것이다. 임영웅이 불렀어요. 임영웅이. 익어가는 것이다. 뭐냐? 성숙해 간다는 거죠.
그걸 교회에서 그거 따오지요. 교회는 뭡니까? 여러분 예수 믿는다고 천국 못갑니다. 뭐해야 됩니까? 익어가야 됩니다. 숙성해야 됩니다. 숙성하다 폭발하는 수가 있습니다. 메탄가스 나와 폭발하는 수가 있는데.
성경은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익어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과 멀어지는 거에요. 익어가는게 아니고 점점 더 멀어지는 거에요. 하나님과 함께 있지 않고 점점 더 빠이빠이하는 거에요. 이 과정이.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이. 주님께서 아까 요한복음 8장 7절 뭡니까?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이 말은 네 죄가 살면 살수록 너는 무너졌고 너는 비틀거리고 너는 비정상이고를 네 속에 있는 네 죄가 너를 증명할 것이다. 그걸 바로 마태 마가 누가복음이 예수님과 사건을 유발시켜서 그것을 우리한테 통보해주죠. 순간순간.
그러면 성도가 세상살이 한다는 것은 이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의하면 어떻습니까? 갈수록 자기가 죄덩어리인 것을 알지요. 나는 침착하면서도 내가 할 것 안 할 것 가려가면서 철이 나가지고 실수를 줄이고 점점 누가 보기에 인격이 인품이 우아해지고 고상해지고 완전에 다할 정도로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성경 말씀대로 다 순종해 실천에 옮겨서 천사같이 안됐지만 천사같이 될려고 주의 형상을 본받기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라고 하겠지요.
그게 바로 누가 했느냐 하면은 바리새인중에 바리새인. 흠이 없다고 우겼던 사울이 바로 그 짓한 거에요. 사울이. 율법을 가지고 자기를 숙성되게 만들었다고 자부했습니다. 그거 가지고 모잘라가지고 이왕이면 더 충성하기 위해서 예수 믿는 사람을 체포하기 위해서 나섰잖아요. 사도 바울이.
바로 여기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군중 속에 있지요. 군중 속에 있는 거에요. 많은 군중이 따라갔습니다. 따라다녔습니다. 여러분 돼지갈비나 돼지갈비 이야기하니까 요새 한참 돼지갈비 먹고 있는데 누가 주셨는데. 돼지갈비 뜯을 때 뼈를 닭도 마찬가지고 뼈를 뜯어내는걸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발라낸다 하지요. 발라낸다.
많은 군중들 있잖아요. 12제자 포함해서 70인 군중부터 해서 많은 군중들이 있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이쪽에 누가 있느냐 하면은 바리새인, 사두개인 권력자 있어요. 권력자가 예수님한테 들러붙어가지고 나 예수님하고 한패 천당갈거야 하는 사람들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전부다 발라내요.
예수님은 뼈거든요. 예수님은 뼈에요. 뼈에서 뼈에 붙지도 못할 인간들을 자기 딴에 예수님 좋다고 온 거에요. 우르르. 제자 삼아달라고 또는 제자라고 우기면서 온 거에요. 주께서 어떻게 합니까? 다 발라내지요. 베드로는 어느 쪽으로 갔습니까? 누구 편에 붙었어요? 결국 권세가 무서워서 다 했지요. 남는 건 뭐냐? 남는 건 피만 남았지요. 피만 남은 거에요.
이 피가 보이면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내가 있던 관계가 주님과 나하고 친하게 지내고 뭐 사랑의 관계인줄 아는데 사랑의 관계가 아니고 피흘려야 될 관계에요. 우리가 원수에요. 주님을 죽게 한 피흘리게 만든 원수로써 우리는 모르고 우리는 정상인줄 알고 인간관계에서 좋게 지내는 것처럼 예수님하고도 좋게 지내면 되는 줄 알고 그냥 들러붙었는데 주께서는 보여준 것은 뭐냐?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에게 영생이 없다.” 사람들 다 가버렸어요.
“왜 너희들도 가지?” 하니까 안 갔잖아요. 말씀이 계시는데 누가 가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붙여주니까 안 간 거에요. 예수님이 뼈라면 뼈에 달라붙어있는 것은 전부다 가짜입니다. 진짜는 뭐냐? 피에 의해서 붙어야 진짜에요. 피에 붙을려면 우리는 뭐가 돼요? 잘난 사람 되야 돼요? 죄인 되야 됩니까?
피흘림이 필요한 요소가 우리가 한 평생 살아가면서 그 부분이 발각되야 되고 발견되야 돼요. 우리 안에서. 아 이것 때문에 피흘렸구나. 저것 때문에 피흘렸구나. 바로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왔다가 죽기 위해서 오신 거에요. 우리는 살기 위해서 예수님 붙들었고.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피를 보여주면서 피흘림 없이는 역사함이 없다고 이야기했고 요한일서 같은 경우에는 너희 중에 죄가 없다 하면 네가 너한테 사기친 거다. 피를 보면서도 죄 없다 하면 말이 돼? 피 보고 죄 있구나 생각하라. 이게 요한일서 일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사도의 편지죠.
일단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