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200626a 마가복음15장 16절(과거공유)
광주강의20200626a 마가복음15장 16절(과거공유)-이 근호 목사
마가복음 15장 16절입니다.
16절, 군병들이 예수를 끌고 브라이도라온이라는 뜰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모으고
17절,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 면류관을 엮어 씌우고
18절, 예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 할지어다 하고
19절,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20절, 희롱을 다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그렇게 되어 있죠.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 이런 복음서에서 이렇게 예수님의 교훈이나 또는 그러한 진리이야기를 하게 되면 그냥 부담 없이 현재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듣지만, 이렇게 뭐 지명이 나오고 그때에 있는 사실을 이야기해버리면 우리는 갑자기 현재에서, 말씀의 현재성이 뚝 떨어져버리죠. 말씀의 현재성이. ‘아, 이거는 옛날이야기구나. 우리하고 해당이 되지 않는구나.’ 그렇게 돼버립니다. 이스라엘에 가 본 사람들은 주로 다니는 곳이 예루살렘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가 본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이 가신 흔적 같은 것을 기본적으로 다 돕니다.
돌면서, 만약에 한국에 있던 사람이 이스라엘에 갔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있었던 일을 비로소 봐야 한국과 역사를 뛰어넘어서 그때 그 당시의 예수님의 행적에 대해서 또 잠시 느끼게 되겠죠. 또 다시 한국에 오면 그만이겠지만. 지역은 이렇게 예루살렘이 언덕이 되어 있고요. 약간의 골짜기가 있고 또 약간의 높은 언덕이 있어요. 언덕이 있는데 기드론 골짜기라고 되어 있어요. 기드론 골짜기입니다. 기드론 골짜기 이런 것은 제가 사진으로 다 올려놨으니까 보시고요. 여기 성전산이 있어요. 천문대 비슷하게 동그란 황금돔처럼, 천문대처럼 이렇게 되어 있고. 여기 감람산이라고 있는데 감람산 꼭대기에는 예수님이 승천하신 곳이 있어요. 스가랴에 보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감람산에서 재림한다고 되어 있거든요. 감람산에 다시 재림한다고 되어 있어요.
스가랴에서는 그때 재림한다고 되어 있는데, 메시야가 그때 온다고 되어 있는데 예수님은 여기서 승천하는 곳이 되고 맙니다. 메시아가 오는 그곳이 예수님은 승천하는 곳이 되죠. 그러면 구약에서의 계시의 한계라는 것은 뭐냐 하면 메시야가 이 땅에 오심까지만 되고 그 구체적인 내용, 스케줄은 예수님이 오시고 난 뒤에 보다 상세하게 스케줄이 펼쳐지게 되는 거예요. 스가랴에서 감람산에 오신다. 감람산에 오신다는 이 말은 이미 예수님께서 이 동네에 오신다로 완성이 돼버린 겁니다. 십자가로 완성이 되는 거죠. 그래서 승천하고, 겟세마네에서의 유명한 기도하시는, 올리브나무들이 쭉 있어요. 이천년이 됐다는데. 있고, 올라가면 여기 성전이 있고 그 다음에 밑에는 전부 다 집들이 있어요.
지명은 이렇게 되어 있고요. 이걸 평면으로 하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겟세마네 이 동네에서 기도하시고 여기서 체포가 돼요. 체포되는 순서를 1번이라고 합시다. 1번. 아까 골짜기 건넌다 했죠. 기드론 골짜기라고 해서 이 골짜기는 어떤 골짜기냐 하면은 다윗과 압살롬하고 싸웠던 골짜기에요. 겟세마네기도 건너서, 아까 봤던, 평면이니까 성전이 있어요. 성전은 동쪽으로 이렇게 되어 있고요. 성전 제단이 있고 동쪽으로 성전 문이 되어 있어요. 문이 되어 있고, 성전 이쪽에 보면 첫 번째 구역은 이스라엘 남자들 구역, 두 번째 구역은 여성구역 이렇게 되어 있어요. 헤롯 성전은 이것을 다시 이렇게 큰 규격으로 정비를 해놨어요. 크게 대지를 잡아서 이쪽에 남쪽으로 되어 있고 북쪽에 요새가 있어요.
제가 너무 크게 그렸으니까 이걸 작게 그려보겠습니다. 기드론 골짜기 지나서 성으로 되어 있고 성 안에 성전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성전에 남쪽, 북쪽, 동쪽 요새가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당해서 어디로 가느냐 하면은 여기 안나스 제사장의, 그냥 제사장이 아니고 전직 제사장 안나스에게 가요. 이게 두 번째 체포되어 있습니다. 이게 요한복음 18장 12절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겟세마네에서 체포되어 이리로 가는 것, 안나스에게 가는 것을 첫 번째로 봅시다. 가야바가 현직 제사장입니다. 그런데 늙은 전직 안나스 제사장의 사위입니다. 여기에, 가야바에게 가요. 이게 요한복음 18장 24절의 말씀입니다. 이게 두 번째입니다.
또 어디에 가느냐 하면은, 아까 읽은 16절에 브라이도라온, 이걸 요한복음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관정이라고 해요. 옛날 우리나라에서는 관가라고 하고. 헤롯 관정이라고 하는데, 이게 세 번째입니다. 그런데 가야바에 갔을 때는 산헤드리온, 요새 말로 하면 70명의 국회의원들, 이걸 공회라고 하는데, 공회에 와서 예수님의 체포에 대해서 사람들이 동의를 다 했어요. 이거 뭐 다수당이 차지하고 있었으니까 그냥 통과하는 겁니다. 여기서 심문받는 대목이 요한복음에 잘 나와 있습니다. 관정에 가요. 관정에 가고, 본디오 빌라도가 총독의 역할을 하는 그 지역에 관정이 있어요. 있고, 여기서 다시 어디로 가느냐 하면은 여기 중간에 보면 총독 말고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왕이 있어요. 헤롯왕 또는 헤롯 안디바, 또는 안디바스 궁전이 여기에 있어요. 이게 네 번째에 가요. 여기에 갔던 것이 누가복음 23장 7절에 보면 나와 있어요. 갔다가 다시 본디오 빌라도가 있는 관정으로 와요. 이게 다섯 번째입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되어서 전직 안디바 제사장, 흥선 대원군과 같은 거예요. 가야바는 고종. 흥선대원군이나 고종쯤 되고. 일제 앞잡이 이완용으로 보고 본디오 빌라도는 일본 총독으로 보시면 됩니다. 자기끼리 다 해먹어요. 쭉 갔다가 다시 본디오 빌라도가 있는 곳, 관정으로 옵니다. 여기서 우리가 지난번에 봤던 바라바를 풀어줄까, 말까? 그런 이야기를 하다가 대제사장들이 바라바를 풀어주면 당신 고소하겠다고 하니까 겁먹어서 바라바를 안 풀어주고 예수님을 체포해서, 이게 성이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성 안이에요. 근데 이제 성 밖으로 가요. 채석장이었던 곳, 채석을 그만둔 곳, 여섯 번째가 뭐냐 하면 십자가에요. 십자가. 지금은 전부 다 이슬람족속의 하나의 시장으로 되어 있어요. 시장으로 덮여있어요. 이쪽 겟세마네 동산 빼놓고 저쪽은 전부 다 시장으로 되어 있어요. 여기 힌놈 골짜기, 여기는 기드론 골짜기 이래 되어 있어요. 여기 성전이 있고 다윗성은 이쪽에 있고.
자, 이렇게 하면서 우리가 그 당시에 예수님이 체포가 one, two, three, four, five, six라는 절차를 거쳐서 이렇게 해서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는데, 여기에서 했던 모든 절차에 관여된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냐 하면은 나름대로 전부 다 전문직업인들이었습니다. 전문직업인. 전문직업인들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은 인간의 가치라고 하는 것은 전문직업인이 되면은 사람이 돋보이게 되어 있어요. 백수가 돋보입니까? 직장 가진 사람이 돋보입니까? 당신 뭐해요? 라고 하면 자신만만하게 나는 어디서 뭐합니다, 라고 하죠.
그게 왜 그러냐 하면은, 돋보인다는 말은 자아성은 자기가 하는 일과 결부가 되어 있어요. 조금 더 설명하게 되면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은, 내가 누구냐를 물어주는 타인을 전제로 해서 내가 형성이 되는 겁니다. 내가 누구냐?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어린애가 태어나서 아주머니가 있으면 “아주머니 누구세요?”라고 묻는 애는 없죠. 그냥 엄마! 라고 하죠. 애들이 엄마의 의미를 물으면 애들은 의미가 없이 그냥 엄마에요. 엄마. 다시 말해서 엄마라는 자체에 엄마라는 개념, 그 개념은 의미가 없고 어떤 실체가, 누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누가 있음으로서, 그쪽이 나보다 먼저 있음으로서 그 다음에 내가 있는 겁니다. 엄마가 있으면 내가 있잖아요. 애들은 그걸 몸속으로 안다고요. 나다운 것은, 나다움을 위해 계시는 그분에 의해서 그 다음에 내가 생기는 거예요. 그걸 엄마관계 또는 아빠관계, 가족관계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에게 내가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나만 있다는 뜻이 아니고 나를 늘 응시하고, 늘 지켜보는 자들 속에서 나라는 것이 의미 있게 형성되는 겁니다. 돈 많겠다, 아무것도 안 하겠다, 그러면 인간은 뭐 자기가 돋보일 것도 없겠죠. 그냥 돈 쓰고 살면 되는데. 만약에 누가 와서 “야! 요즘 너 뭐해? 요새 너 뭐하고 지내는 거야?” 이렇게 물으면 뭔가 답변해야 될 게 있어야 하거든요. 처음부터 어렵게 해서 미안합니다만 할 수 없어요. 여러분들은 다 수준들이 있으니까. 내가 질문을 해댈 수 있는 자가 바로 뭐가 되느냐, 이웃이 되는 겁니다. 이웃. 옆집에 산다고 해서 이웃이 아니에요. 내가 물을 수 있는 어떤 대상자가 이웃이 되고 그게 바로 타자가 돼요.
다시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123456순서로 체포해서 돌아가게 하셨다 이 말입니다. 지금 성경 마가복음을 하고 있거든요. 이게 마가복음에 이게 쭉 나온다 이 말이죠. 나올 때에, 이 이야기가 지금 우리 이야기가 되려면,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체포하고 죽이고 살해한 거죠. 그것도 이구동성으로 다 의견을 모아서 죽였던 그 사람들이 뭐하는 사람들이냐 하는 거예요. 그걸 조사해봐야 해요. 그 사람들이 전문직업인들이에요. 전문직. 그럼 전문직업인들이 체포하는 사람 따로 있고, 각자 그 당시의 고위 지도층이잖아요. 지도층. 검찰청에 있는 사람 있고 판사 있고 그 다음에 국회의원들, 산헤드린 공회원들한테 예수님을 죽일까요, 말까요? 했거든요.
이 사람들이 다 전문직에 있다는 말은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은 그만큼 자부심이 생기는 거예요. 돋보인다는 말 아시죠? 돋보인다? 전문적인 직업이 있는, 자기가 지금 현직에 있으면서 그 직장에서 나올 때에 자기는 돋보이지, 얼마 전에 퇴직해서 한 구석에 있는 사람이 걱정해봐야 그거는 한물 간 사람이라서 말빨이 안 섭니다. “아이고, 뭐 집에 계시지, 집에서 돼지나 키우지 여기에 왜 나오셨습니까?” 이래 된다고요. 그래서 보통 미국 영화에 이런 게 있어요. 이미 퇴직해서 한 물 간 군인이라든지, 특수요원이라든지, 보안관이나 경찰, 경찰인데 현직 경찰들이 하도 비리가 심해가지고 이거는 도저히 손댈 수 없을 때에 몰래 특수경찰이나 군인들한테 맡기면, 그건 람보가 잘해요. 웃통 벗고. 총 쏴서 문제해결 하거든요. 아무 거리낄 게 없기 때문에. 돼지 키우다가 보안관하고 경찰하고 이러거든요.
전문직에 있다는 것이 자부심을 준다는 말은, 왜 이게 자부심을 주느냐 하면은, 나라는 것은 반드시 나를 쳐다보고 있는 타자들 속에 나에요. 타자들 속에. 남이 없으면 나도 없다고요. 왜? 태어날 때부터 그랬으니까. 그 남이 뭐냐, 거기까지 이야기를 했어요. 그 남이라는 것이 뭐냐, 내가 질문을 해댈 수 있는 자, 내가 묻고 싶을 때 물을 수 있는 자, 그게 뭐냐 나에게 타자가 돼요. 옆에 누가 있다고 해서 나의 타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나의 자아와 연관되어 있는 남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질문을 할 때에요. 질문을 한다는 말은 아쉽다 이 말이죠. “돈 좀 있어요?” 이런 거죠. 뭔가 질문을 한다는 것이, 있음 속에서 질문을 할 수 있다는 말은 그 사람이 나를 쳐다보는 평소의 시선과 응시와 관심을 내가 감당하고 용납하겠다는 겁니다. 내가 감당하고 용납하겠다.
그래서 좋은 일을 하게 되면 먼저 그 사람한테 전화하죠. “어이, 친구 나 이빨 뽑았다.” 이게 뭐냐 하면, 왜 그 사람한테 하는가 하면은 그 사람이 늘 나를 평소에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나다웠기 때문에. 나는 나답기 때문에 그래요. 아까 법률상담 하는 프로가 있었어요. 법률상담. 법률상담 하는데, 신혼 초에 남자가 바람을 피웠어요. 바람피운 것을 들켜가지고 여자한테 미안하다고 했는데, 그래서 끝난 줄 알았는데 여자는 그 상처 때문에 무려 3개월 동안 불면증에 걸려서 정신과 의사한테 치료받는 상담 프로에요. 남자 입장에서 잘못했다고 했잖아요. 미안하다고 했다 이 말이죠. 그리고 3개월 동안 내가 용서 빌 것은 다 빌었으니까 더 이상 안 빌겠다는 거예요. 그리고 여자도 오케이 했는데 그런데 왜 잠이 안 오죠? 잠이 왜 안 오는 거예요? 잠이. 다른 남자, 미국 사람이 바람 피웠으면 이 여자 잠이 잘 와요.
그런데 남편이 바람 피워서 3개월 동안 잠이 안 와서 우울증에 빠져있는 이유가 뭐냐 이 말이죠. 왜 그래요? 그거는 여자가 본인이 누군지를, 그동안 내가 누군지를 본인이 정립을 할 때 누구와 관련해서 정립을 했습니까? 나는 나라고 생각했죠. 나는 나가 아닙니다. 누구하고 관련되어 있느냐 하면은 남편과 관련해서 나를 정립한 거예요. 지금 그 이야기한 거예요. 긴긴 시간동안. 긴 시간동안 그 이야기한 거예요.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왕 어렵게 간 거 어렵게 갑시다. 이걸 가지고 의미의 체계, 의미의 시스템, 앞에 뭘 붙이면 (나), ‘나의 의미의 시스템’입니다. 나의 의미의 시스템. 의미의 시스템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세상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세상 또는 현실세계.
현실세계는 반드시 뭐가 있느냐, 의미의 체계가 있어요. 의미의 체계. 의미의 체계인데, 그 의미의 전체 체계 속에 나라는 것은 그 전체를 구성하는 하나의 부분이 되는 겁니다. 부분이 되는 거죠. 가정이라는 것은 남편과 아내로 가정이 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평소에 집에 가면 가정이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가정이. 집에 가면 보여요? 안 보여요? 안 보이죠. 집에 가면 가정이라고 써놨습니까? 없잖아요. 집에 가면 가정이 없고 내 몸뚱아리에요. 집에 가면 애들 있고 남편 있고 자기 몸뚱아리 있는 거예요. 따로 각자 논다 이 말이죠. 그런데 왜 잠을 못 자요? 남편이 집에 안 들어온다? 본인은 주무시면 되잖아요. 남편 몸은 따로고 내 몸은 따로인데, 집구석에 들어오던 말든 자기는 주무시면 되잖아요. 왜 잠을 못자요? 이건 정말 신기한 이야기에요.
그만큼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아는 게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전혀 아는 게 없어요. 전혀 몰라요. 모른다는 말은 그냥 휩싸여서 같이 돌아간다는 겁니다. 이 의미의 세계, 현실 세계에 같이 돌아간다 이 말이죠. 자, 이 의미의 세계가 이렇게 돌아간다. 내 몸이 있으면, 육신이 있고 육체가 있으면 이거는 나다.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의미 닫힘이라고 해요. 의미는 전부 다 완료된 채로 닫힘이라고 되어 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남편이 바람을 피웠어요. 치고 들어오죠. 이게 사과라면 사과에 뭐가 들어왔습니까? 사과에 쑥 들어온 게 있죠. 사과 한 입 베어 먹은 거 있잖아요. 이거 무슨 로고입니까? 무슨 회사죠? 애플 아닙니까? 애플.
이게 선악과에서 나온 겁니다. 선악에 대해서 우리 회사가 꽉 쥐고 있다는 뜻이에요. 모든 지식 체계는 우리가 다 선도하고 있다는 게 애플 회사의 모토입니다. 컴퓨터하고 여러 가지 전자기기 만들었으니까. 쑥 들어온 거예요. 이걸 가지고 뭐냐 하면은, 내가 몸이 있어서 여기 있다고 여겼는데 이게 팍 들어오니까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나는 푹 들어온 그걸로 인하여 내 의미 체계가 흔들려 버렸죠. 그러면 주도권이 어디에 있습니까? 나한테 있다고 여겼던 것에 여기 뭔가 집안에 사건이 터져버리니까 이쪽에 주도권이 있었던 거예요. 그렇다면 나의 주도권은, 평소에는 내 주도권은 나한테 있다고 생각했는데, 뭔가 훅 들어오니까, 사건이죠. 훅 들어오는 이것 때문에 내가 잠을 3개월 동안 불면증에 걸려서 잠을 못 잔다는 이 말은 내가 종속되어 있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의미 체계가 닫혔다고 생각했는데 닫힌 게 아니고 이것이 허술하기 짝이 없었던 거예요. 허술하기가. 허술하기 짝이 없는 거예요. 전부 다 엮여져 있었는데 엮여진 게 눈에 보이지를 않으니까, 나는 나 혼자, 너는 너고 나는 나야. 나는 맛있는 거 사먹겠다. 예를 들어서 친구하고 같이 밥 시켜 먹으려고 하는데, 뭐 떡볶이에다가 피자하고 해서 먹었다 이 말이죠. 해가지고 서로 서로 먼저 누가 먹느냐 해서 싸우더라 이 말이죠. 그때 싸울 때는 뭐냐 나는 다음에 맛있는 거 피자 나 혼자 먹어야지, 라고 하잖아요. 근데 그 친구가 죽고 난 뒤에, 또 그 친구가 나중에 어디에 가서 혼자 있을 때에 피자 한 판 사보세요. 그게 맛이 있는가? 맛이 없죠.
다시 말해서 타인이라고 하는 것은 나 되기 위해서 반드시 주위 배경에 뭐가 깔려야 해요? 나와 관련된 남이라는 것이 주위에 배치가 돼줄 때 비로소 내가 나 되는 거예요. 내가 나. 내가 나 된다 이 말이죠. 그 이야기하고 오늘 성경 말씀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라고 할 때에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일 때에 이구동성으로 다 동의했죠. 그러니까 이 의미체계에서 예수님을 뭐라고 보느냐 하면은 예수님을 죽여야 되는, 죽여도 그만 안 죽여도 그만이 아니에요. 반드시 죽여야 할 대상이에요. 죽여야 할 대상이라 이 말이죠. 그래야 자기들의 의미 체계가 완전히 봉합되는 거예요. 봉합. 완성이 되는 거예요. 완성된다 이 말이죠. 사모님 직장에 예수님이 없으면 학교가 안 돌아가고 이렇습니까? “교장선생님 오늘 하루 학교 쉽시다. 제가 새벽기도에 빠져서 못하겠습니다.” 뭐 이런 게 있어요? 없죠.
학교는 뭘 빼도 관계가 없어요? 예수님 빼고도 아무 상관없이 돌아가죠. 그 자체가 의미체계로 봉합이 되어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학교에 바바리 맨이 들어왔다. 이러면 깨지는 겁니다. 학교 선생님들끼리는 봉합체계가 되어 있는 거예요. 또 학교에 깡패가 와가지고 선생님 패면 난리가 나지만. 어쨌든 간에 이게 봉합체제가 되어 있습니다. 자기 조직 내에서 자기가 한패가 되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마가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을 죽일 때에 아까 1번부터 6번까지 몰고 다니잖아요. 소 몰듯이 몰고 갔죠. 그게 무슨 뜻이에요? 그들의 의미체계에서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죽이지 않아야 된다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더라. 심지어 이방인인 본디오 빌라도 마저, 이름도 어려워. 브라이도라온 관가. 본디오 빌라도가 재판하는 재판장에서조차도 자기가 발을 빼려고 했잖아요. 꿈자리가 사납다고. 빼려고 했는데, 유대인들이 뭐라고 합니까? 당신이 빼버리면 우리의 의미체계에서 당신은 배신당할 수 있다. 우리가 로마황제한테 당신을 고발할 수가 있다고 하니까, 겁먹어서 당신들 좋을 대로 뭐하라고 합니까? 그래, 예수 죽여라. 나는 책임 없다고 해서 세숫대야에 손을 씻었죠.
예수님께서 체포되는 이 과정, 절차 하나가 전부 다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은 이 세상은 예수님이 계실만한 의미가 없다. 절대로 받아주지 않는다. 거부한다. 거절한다. 그 세계가 인간들의 의미의 체계, 의미의 시스템.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현실 또는 이 세상.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그 세상입니다. 그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수 없어도, 오히려 예수 없는 것이 속편한 세계. 그 세계에 있는 겁니다. 근데 그 세계 의미 체계가 그렇게 돌아가는 이유는, 아까 이야기한대로 각자 뭐다? 전문직업인들이에요. 전문직업은 자기를 뭐라고 한다고 했습니까? 돋보이죠. 돋보이게 만들어요. 이 사람들이 할 때에 그냥 한 게 아니고, 이 분야에, 재판하는 것, 경찰에 체포하는 것, 안나스에 가는 것은 전부 다 전문분야에요. 전직제사장 그리고 현직 제사장 가야바,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볼 때 뭐로 보느냐 하면은 그냥 예수님이 옳고 그름이 아니고 내가 지금 현재 돋보이게 하는 직업이 뭐예요? 재판하는 거죠. 평가하는 거죠. 거기에 참여한 국회의원 70인들. 자기들이 판결하는 거죠. 판결하는 일을 통해서 자긍심이 어떻게 돼요? 높아지겠죠. 이 때를 위해서. 자긍심이.
우리 한국의 질병본부장을 하시는 분을 코로나19 이전에는 그분이 누군지를 모르죠? 그러나 코로나19 터지니까 커트머리해가지고 일을 열심히 하는 여자 분이 나타났죠. 알게 되었죠. 어떤 사건이 터지게 되면, 그분이 서울의대 나왔답니다. 그분이 그 일을 하면서 자기 존재의 그 의미 체계에서의 나의 의미는 뭐냐를 부각시킬 수 있는 그러한 기회를 맞이한 거예요. 위에서 나오는 옳고 그름이라는 것은 뭐가 옳고 그른가가 중요한 게 아니고 내가 내 직업인으로서, 전문직업인으로서 과연 어느 정도 이 의미세계에서 강력한 의미를 호소하고 그걸 드러낼 수 있는가가, 그게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걸 오늘날 적용시켜보면, 목사 선배들이 뭐라고 합니까? 목사는 뭐해야 된다? 목사는 목사다워야 한다. 이게 뭐냐 하면은 너의 전문직업이 너의 존재를 돋보이게 할 것이다. 그렇게 세상 전체가 의미체계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님께서는 죽으셨죠. 죽으셨다 이 말이죠. 인간의 전문직업 의식, 이거는 자긍심이죠. 자긍심 또는 자의식. 자의식에서 예수님께서는 추방된 거죠. 의미체계에서 바깥에 추방된 겁니다. 근데 자의식에서 추방하면서 여기에 추방하는 의미가 새롭게 생성되었어요. 이게 뭐냐 하면은 예수님을 왜 죽였는가? 죽일만한 죄인이 된다. 그래서 예수님을 추방시켰죠. 이쪽은 예수님이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냥 죽어있으면, 예수님이 죽어계시면 이쪽은 아무 문제가 없어요. 문제는 그럴 리가 없겠지만 죽었던 예수님이 만약에 사흘 만에 되살아난다면 이제는 이쪽 인간세상은 죽었어요. 그럴 리가 없다는 말은 제가 한 말이 아니고 누가 이야기한 거예요? 재판할 때 그걸 감안했어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어떤 사람이 고소하기를 예수님은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난다는 것이 재판할 때, 그때 나왔다 이 말이죠. 뭐 성전도 짓고. 당신이 누구냐? 나 구름타고 온다. 구름타고 온다는 말은 죽었다가 살아나야 가능하지 죽은 사람이 구름타고 오겠어요? 예수님께서 언질을 줬거든요. 너희가 죽여도 너희가 밟아도 나는 다시 산다. 언질을 했는데, 그들은 “아, 내가 아는 전문직에서는 그걸 몰랐네. 아이고, 잘못했습니다. 이럴 줄 알았지?” 이래 나온 거예요. 따라서 예수님께서 어떤 조언을 해도 자기가 아는 자기 자긍심, 인간의 전문직이 이게 전부라면, 개인 같으면 개인의 자기 의미가 있잖아요. 자기 의미를 깨는, 그것을 인간은 용납하겠어요? 튕길까요? 튕기죠. 이게 뭐냐 하면은 면역체계가 아닙니까? 면역체계.
나의 나다운 것에 뭔가 이질적인 것이 들어오면, 그걸 용납하면 이게 무너진다고요. 구겨진다고요. 공에 구멍을 뚫으면 쭈그러지잖아요. 자기 침몰인데, 자기가 스스로 침몰되려고 할 이유가 있어요, 없어요? 없죠. 자기 침몰은, 내가 침몰하고 싶어도, 내가 자살하고 싶어도 왜 자살을 못하는가? 이 의미체계에서 나보다 누가 먼저 있었다? 나를 지켜보는 타인이 나의 나다움을 계속 요청하는 이상은 내가 내 목숨도 내 마음대로 못 죽는다 이 말이죠. 내 목숨도. 아까 강의를 다시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지나가면 다 잊어버린다는 소리를 많이 하기 때문에 다시 할게요. 몸뚱아리 있으면 내 몸인데 왜 남편이 바깥에서 자고 나오면 왜 내가 잠을 못 자느냐 이 말이죠? 왜? 니는 니 몸이고 나는 내 몸이고, 몸이 따로인데. 그리고 두 몸 세워봐야 연결된 것이 눈에 보이지도 않아요. 에너지도 안 보이고 엑스레이 찍어봐야 연결된 것도 없어요. 따로 논다고요. 따로 노는데 왜 그 인간이 집에 안 들어오면 내가 잠을 못 자느냐 이 말이죠.
도대체 평소에 육체하고 자아하고 따로 있기 때문에 그래요. 육체는 몸뚱아리에서 그 의미가 종결되지만, 자아는 남이 나에게 계속해서 구성해온 겁니다. 타인이. 구성되어 온 것이고 그 구성된 타인에게 걸핏하면 전화 걸고 좋은 것이 있으면 자랑질하고 또 도움요청하고 그런 식으로 보이지 않는 교류가 있었던 거예요. 그렇게 되면 내 몸은 내 몸으로서 굳혀졌지만 자아의 영역은 내 의미가 미치는, 내 의미가 확장되는 그 범위까지, 그게 세력권인데요. 세력장을 형성하는 거예요. 나라는 세력장. 자식이 애 먹이면 어떡해합니까? “니가 그렇게 할 거면 니 호적에서 뺀다. 니 내 자식 아니다.” 자식들은 알죠? 그거 부모가 그냥 헛소리한다는 것을. 헛소리한다는 것을 다 알아요. 백날 해봐야 그게 일주일도 안 간다는 것을 알아요.
세상은 거울에 비춰지는 내 몸이 그게 현실이 다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제가 말씀드리는 겁니다. 나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목욕할 때, 사우나 할 때 나의 벗은 몸, 그게 내가 아니에요. 자아 또는 다른 말로 하면 나, 더 포괄적으로 말하면 주체, 주체라는 말은 나를 지켜보는 사람을 스물 네 시간 우리는 의식하면서 형성되는 것이 나에요. 스물 네 시간. 뭐 말로는 나를 잊어라, 나는 너와 상관없다고 백날 큰소리 쳐도 큰소리에 지나지 않죠. 이러한 의미체계에서 이들이 예수님을 쫓아냈습니다. 살아있을 때 예수가 뭔가 허풍을 떨더라. 내가 죽어도 다시 산다고 하더라. 여러분, 이 예수의 말을 믿는 사람이 있으면 손들어보세요. 아무도 없잖아요. 허풍이잖아. 당신 말이 안 먹히잖아. 이 의미 체계에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해도 아 먹혀. 나가 죽어! 하고서 추방되었다 이 말이죠. 추방되었거든요.
그러면 여기 추방된 죄라는 다리를 건너서, 저주라는 다리를 건너서 주님께서 죽었습니다. 그러면 만약에 예수님께서 안 죽고, 죽은 데서 살아났다면 이 다리가 있는 한 어느 쪽이 죄가 되겠어요? 이쪽에서 보면 예수님은 죄인이지만 예수님이 살아났다면 그래서 하나님 보시기에 죽여서는 안 될 자를 죽였다는 것이 판정이 났다면, 확정이 났다면, 이제는 예수님 쪽에서 볼 때 이 건너편은, 다리 건너 건너편에 있는 살아있다고 하는 이 모든 것은 곧 바로 죽음의 세계, 지옥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걸 노렸죠. 나를 죽여라! 그래서 너희들이 생각하는 이 현실이라는 이 자체가 모두 다 한통속으로 저주받아야 될, 지옥 같은 세계에서 너희들은 못 빠져나온다는 것을 내 눈으로 봐야 비로소 보이는 것이다. 내 눈으로 봐야.
그렇다면 여기에 누가 있느냐 하면은 베드로도 있거든요. 열두 제자 다 있다고요. 가룟 유다는 벌써 자살해버렸고 나머지기 열한 제자가 벌벌 떨면서 있는 거예요.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세 번이나 찾아오셨고, 또 예수님께서는 오순절 날 성령을 보내줬거든요. 성령을 보내줘 버리면 그 다음에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은, 이 관계, 사람들에게 밀려서 돌아가신 이 죽음의 세계, 이 죽음의 세계는, 근데 인간들이 생각하는 죽음의 세계는 여기 따로 있죠. 예수님의 죽음의 세계는 죽었다가 부활한 세계기 때문에 부활의 첫 열매가 되면서 이거는 천국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천국에 가셨지, 물론 음부에도 가셨지만, 예수님이 생각하는 죽음은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님이 계신 곳이 천국이에요.
이것을 이렇게 이야기할게요. 모든 의미는 예수님의 움직임으로 새로 채워진다. 인간의 모든 의미는 예수님의 움직임으로 새로 채워지는 거예요. 그러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재판받는 이것이 예수님의 개인적인 과거죠. 과거잖아요. 과거인데, 이 과거가 성도에게 새로운 의미가 되어 버리면 우리는 결국 뭐냐, 성령이 오게 되면 예수님의 이 과거가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공유하게 됩니다. 오늘 제목이 과거공유에요. 과거를 다시 공유하게 되는 겁니다. 처음부터 새로 다시해요. 새로 다시.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의미라고 하는 것은 내가 있기 전에 엄마가 먼저 있죠. 이걸 바꿔버리는 거예요. 엄마가 있기 전에, 엄마 엄마의, 엄마의 엄마가 있기 전에, 아빠의 아빠, 아빠의 아빠가 있기 전에 누가 먼저 계셨다? 예수님이 먼저 계셨다는 의미체계로 바꿔버린다 이 말이죠. 바꿔버리죠.
근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남기신 것이 뭐냐, 피를 남겼잖아요. 피를 남겼으면 그 다음에 이 과거공유에 첫 번째 계시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물에 빠진 사람은 알죠. 분명히 얕은 줄 알았는데 들어가 보니까, 자기는 발을 디딜 줄 알았죠. 근데 발이 안 디뎌지죠. 그때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두렵고. 이게 땅인데 발은 여기까지고 허공을 허우적대죠. 허우적. 그러면 성령 받은 성도는 발을 어디다 꽂느냐 하면은 여기다가, 예수님의 피에다 꽂아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의 피의 삼투압작용에 의해서 피가 부르르 올라오죠. 삼투압 작용을 알아요? 줄기 같은 것을 꽂아버리면 물이 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것처럼. 빨대같은 것도 그렇고. 또 술 먹는 사람은 술 먹고 나면 얼굴이 벌겋게 올라오고. 삼투압작용에 의해 티가 나요.
예수님의 피가 우리 존재를 통해서 벌겋게 올라오면 예수님의 과거가 우리에게 공유가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성령이 하시는 일이에요. 그러면 세상 사람들은 뭡니까? 성령께서 기초를, 그라운드를 피에서 새롭게 주거든요. 이게 뭐냐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말씀, 내 피와 내 살을 먹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뭐가 없다? 생명이, 삼투압작용이 올라오지를 않는 거예요. 영생이 올라오지를 않는 거예요. 영생이. 영생이 없다고 했으니까요. 그러는 뭐냐, 우리의 두 발을 예수님의 피에다가 담그는 거예요. 갈대를 빨간 잉크에 담으면 갈대에 빨간 잉크가 올라오고 파란 잉크에 담기면 파란 잉크가 올라오겠죠. 갈대를 통해서 올라오듯이 성도는 어디에 꽂혔다 이 말입니까? 성령에 의해서 예수의 피에 담긴 거예요. 그러면 일반사람들,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자아의 뿌리가 예수님이 아니고 뭐냐 하면은 타인이에요. 자기가 알던 친구, 친척. 우리 다 보석 같은 친구 아니가. 이런 거예요.
전부 다 이러는데, 이 모습이, 이게 진정 뿌리가 될 수 있을까요? 그냥 두려운 거예요. 세상사는 것이 두려운 거예요. 친구 하나 배반하면 다른 친구하고. 친구 배반하면 뒤늦게 아버지 찾아가서 이번 한번만 도와달라고 하고. 뭐 이렇게 물속에 빠져서 허우적대죠. 그러면 이게 뭐냐 하면은 이게 바로 허공, 조용필의 허공이라는 노래라고 하지는 않겠지마는. 허공. 그냥 허공을 헤매는 거예요. 평생 동안 허공을 헤매는. 여기에 해당되는 이재룡이, 전두환이, 모든 인간, 국회의원 전부 다 헛방인생을 사는 거예요. 헛방인생. 조국, 윤석열, 전부 다 헛방을, 허우적대고 있는 거예요. 여기에 뭐가 없어요? 그라운드가 없어요. 그라운드가. 그러면서 큰소리친다고요. 평소에. 니는 니고 나는 나다. 이래 봐도 내가 어! 같이 사우나가고. 벌써 큰소리쳤다고요. 큰소리쳤는데 막상 남편이 집에 안 들어오고 난 뒤부터는 잠이 안 오는 거예요. 그동안 나는 나가 아니었던 거예요. 나의 나다움은 누가 나는 이렇다고 이야기해준 그들을 위해 포위되어 살았던 거예요. 그들의 눈치를 본 거예요.
요즘 참 신기한 게 있죠. 한화이글스.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어요? 한화이글스. 재벌독수리. 이게 뭡니까? 대전을 근거지로 한 프로야구팀이죠. 관중들 하나도 없어요. 없으니까 이건 연습게임처럼 18연패로 기록을 갈아치웠어요. 한국 타이기록 18번을 연방으로 졌어요. 뭐 욕하는 사람 없어요. 아무도 없으니까. 관중이 하나도 없으니까. 그런데 전문적인 NC나 이런 데 보면 관중이 없어도 날리고 치고 살고, 이건 난리도 아니죠.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우리 팬들이 있고 프로야구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거 코로나19 끝나면 다시 모인다. 그걸 생각해가지고 어떻게 하겠어요? 그들과 과거를 공유하는 거예요. 옛날에 우리 응원했잖아. 옛날에. 옛날 우리 팬 했고 막 프로야구 할 때 관중들 수만 명 왔잖아. 오징어 구워서 먹어가면서 응원했잖아. 그때를 잊지를 못하는 거예요. 그때를.
아니, 내가 술 먹고 싶어서 술 먹었다. 그래서 운전대 잡고 운전하고 싶어서 운전했다. 내가 술 먹고 싶어서 술 먹었고 운전하고 싶어서 운전했는데 뭐가 잘못이냐? 음전운전해서 걸렸거든요. 또 걸려서 두 번 걸렸어요. 세 번 걸렸어요. 미국에서. 누가? 강정호가. 그러면 세 번 걸린 그 생각으로 네 번 해먹고 다섯 번 해먹어야 하는데, 왜 울면서 기자회견하면서 살려 주이소! 제발 살려달라고. 나는 4년 동안 술을 끊겠대요. 이 말이 거짓말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강정호 선수가. 우리나라 유명한 미국에서 메이저리그 선수가 왜 기자회견하면서 살려달라고 합니까? 누구한테 합니까? 누구한테 하죠? 타인하게 합니다. 왜? 남이 나의 주도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팬들이 없으면 나는 프로야구 어느 구단에서도 안 받아주고 나는 그럼 굶어죽기 때문에. 이 강정호 선수, 이 구단 전체가 무슨 체계에요? 의미체계. 이걸 두자로 지옥, 이게 바로 지옥이에요.
자기 발이 디뎌집니까? 안 디뎌지죠. 그라운드가 없어요. 바탕이 없어요. 뿌리가 없어요. 뿌리가. 인간의 뿌리가 없어요. 없고, 주변에 눈에 보이는 것들만 있다고요. 눈에 보이는 것들만. 어떤 건설회사에서 집을 똑같이 서구식 북유럽식 전원주택을 쫙 지었다고 칩시다. 쫙 지었는데, 여기 입주할 수 있는 100호를 지었다 칩시다. 100호 다 찼어요. 딱 한 집이 자기 밑을 파봤어요. 이건 예를 든 겁니다. 모래가 나와요. 이걸 반석으로 딱 바꿔놨어요. 반석으로. 근데 홍수가 났다. 어떻게 됩니까? 옆집 abcd.. 서로가 서로를 보면서 멋있다, 잘났다, 우리는 멋진 동네에 산다, 정말 행복하다고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다가, 마태복음 7장에 보면 홍수가 나면 모래위에 지은 집은 다 무너지되 반석위에 지은 집은 이 백 집에서 한 집만 나온다 이 말이 아닙니까? 이 반석이 누구죠? 예수님이라고 하지 말고 예수님의 피, 사건이죠. 사건.
왜 예수님이 안 되느냐 하면은 우리가 상관해서 그래요. 자아가 자꾸 하나님마냥 예수를 자꾸 상관을 해요. 실제적인 사건은 십자가사건인데, 십자가사건하고 과거가 성령에 의해서 공유가 안 돼버리면 지금 내가 생각하는 예수는 자기가 그리는 거예요. 몽타주를 그려요. 인물은 이렇게 잘생겼을 것이다. 수염은 났을 것이다. 키는 한 180이 넘었을 것이다. 자기의 이상형이 있을 거잖아요. 어떤 모델을 생각해서. 그래놓고 거기다가 비는 거예요. 자기가 타자에게 있던 괜찮은 이미지를, 성스럽고 경건한 이미지를 자기가 스스로 조합해서, 자기가 수사반장도 아닌데 몽타주를 만들어서 해놓고, 내가 구상한 나의 예수를 하니까, 그 예수가 어디서 나온 거예요? 뿌리가 없는, 나에서 나온 또 하나의 타자가 돼버린 겁니다.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돼버린 거예요. 맥도날드 할아버지 있잖아요. 금복주 할아버지 비슷하게. 그런 인자한 모습을 그려놓고, 내가 만든 거예요. 내가. 그걸 가지고 우상이라고 하거든요. 근데 실제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과거공유에요. 피를 흘렸다 이 말이죠. 예수는 내가 만든 존재가 아니라 실제적인 피를 흘렸다는 그 죽음에다가 기초를 하고 주께서는, 성령께서는 일을 하시는 거예요. 어떻게 하시는지는 10분 쉬고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