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존강의20200709b 베드로전서4장 11절(끝장)-이 근호 목사
서울의존강의20200709b 베드로전서4장 11절(끝장)-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나를 없애버리고 잃어버리는 것이 관건이 되겠죠. 모든 주범은 나한테 있으니까. 나한테 있거든요. 이것은 제 말이 아니고 예수님도 마찬가지에요. 예수님이 자기 백성에게 네가 죄와 함께 태어났다는 사실을 분명히 지적합니다. 그리고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거든요.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죄를 지적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나를 어떻게 잃어버리는가? 이것만 하면 간단해요. 나를 잃어버리는 방법, 알려드려요? 간단합니다. 현실을 뭐로 보느냐 하면 ‘환상’으로 보는 거예요. 현재 내가 알고 있는 현실이 환상인 거예요, 환상. 환상, 꿈. 꿈에서 깨어나면 되죠. 꿈속에 있으면 안 되고. 꿈에서 깨어나는 거예요.
요한복음 9장에서 소경을 데려왔죠. 제자들이나 그 당시 바리새인들은 소경이 소경이라고 여겼어요. 아까 첫째시간에 한 것 응용해 봅시다. 남을 평가한다는 것은 아직도 내가 살아있다는 거죠. 나는 소경 아닌데 저 사람은 소경이라고 평가하는 거죠. 그 평가는 이구동성으로 전부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게 현실이죠. 자기만 주장하는 거면 환상이라 하겠는데 남들이 다 이야기하니까 ‘이건 현실이 맞는 모양이다’ 이렇게 생각했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소경을 그냥 소경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고 데려와서 눈을 뜨게 해버렸어요. 그러면 ‘우리가 눈 뜬 것처럼 소경도 눈떴다’ 이렇게 되는 게 아니에요. 소경은 뭔가 경유를 했다 이 말이죠. 처음에 여기 전부다 눈 뜬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얗게 그리고 소경은 소경이니까 새까맣게 한 번 그려봅시다. 사람들은 평을 하는 거예요. 자기가 살아있다는 실존은 환상이 아니고 현실이라고 우기기 때문에 현실에서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 눈 뜬 채로 살아있다는 이것은 정답이라고 여기고 누구를 평합니까? 소경을 보고 뭐라고 합니까? ‘소경’이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소경을 눈을 뜨게 했어요. 눈을 뜨게 하니까 사람들은 ‘우리가 눈 뜬 것처럼 소경도 전에는 소경이었지만 이제는 같이 눈뜬 사람 속에 하나 들어왔네.’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것은 뭐냐? 이 현실이라고 우기는 환상이 안 깨지는 게 되는 거예요. 안 깨져버려요.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다가 무슨 말씀을 하느냐 하면 “네가 본다고 하니까 소경이고 소경되었다가 눈 뜬 자만이 본다.”고 이야기해버리니까 그들이 알고 있던 모든 현실은 뭐가 되어 버립니까? 졸지에 뭐로 바뀌어요? 바로 환상이 되어버린 겁니다. 꿈이 되어버린 거예요.
인간은 꿈에서 못 벗어나는 거예요. 주께서 건드리지 않으면 꿈에서 못 벗어나요. 그리고 실제로 시편에도 그런 게 나와요 (시편 90편 등). 사람은 한평생 다 살아봤자 되돌아보면 한낱 꿈이었다. 꿈이었다. 참 백 년 동안 살려고 온갖 사기, 음모, 술수, 가족들 밥 먹여 주려고 온갖 더러운 짓을 다 했는데 그렇게 해서 힘 빠져가지고 마지막 순간에 성령 받았다면, “애들아”, “아버지, 집은 우리 중 누구한테? 죽기 전에 말씀해 주셔야 됩니다. 지금 서류에 싸인해야 됩니다.” 할 때, “애들아, 다 한낱 꿈이었느니라. 내가 네 아버지로 보이느냐? 사실은 아버지가 아니고 꿈이야. 너희들 꿈꾸고 있어. 이 세상에서는 죽는 것도 죽음이 아니야. 꿈속에서 죽는 거야. 인간은 안 죽어.” 요한복음 5장 말씀 (요한복음 5장 28-29절,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인간은 죽지 않습니다. 이게 화근이에요, 이게. 차라리 속상하다고 자살해서 죽으면 그만인데 죽어도 부활해요. 선한 자는 선한 부활로 악한 자는 악한 부활로 심판받기 위해서. 죽으면 하나님 빠이빠이하고 갈라서는 게 아니에요. 결국 다 불러 모읍니다. 주의 심판대 앞에 다 불러 모아요.
고린도후서 5장 6절,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방금 한 말들이 나오잖아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뭐로 행하지 아니한다? 보이는 것으로 하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전부다 현실을 구성하는 요소거든요. 눈에 보이는 게 현실이 아니야. 믿음의 세계가 현실이지, 보이는 세계는 믿음의 세계에 비하면 꿈이고 환상이야. 이렇게 되는 거예요. 8절,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10절,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드러날 때 우리가 성도라고 드러날 거예요. 아닌 사람은 불신자로. 그게 심판이에요, 고린도후서에서는.
요한복음 5장에서는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되어 있지만 (요한복음 5장 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고린도후서에서는 우리의 본질, 성령 받은 사람의 본질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주 앞에 다 나오게 되어 있어요.
마태복음에서도 주님이 심판대에 앉아서 오른쪽은 양, 왼쪽은 염소. 그리고 오른쪽 양보고 뭐라고 합니까? 너희를 위해서 예비된 나라에 들어가라. 그러면 양 쪽에 있는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죽기 전에 예수 믿어서 그런 게 아니죠. 살아있으면서 자기가 어떤 보통 사람에게 했는데 그에 대해서 예수님이 뭐라고 평가하느냐 하면 “저 소자에게,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물을 준 것, 옷을 입힌 것, 다 나한테 한 것이다.
주님부터 시작해서 주님으로 마감되는 일에 네가 동원되었느니라. 네가 거기에 대해서 나한테 다루어졌느니라. 이렇게 되려면 우리 자신은 어떻게 되어야 돼요? 아까 첫째 시간에도 얘기했지만, 우리 자신을 날마다 잃어버리고 주님에 의해서 붙잡힌 바 되어야죠. 이 말은 주님이 살아있으려면 우리는 필히 그 앞에서 산 자가 되면 안 되고 죽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성령으로 꽁꽁 묶어놓고 우리를 이 세상에 죽은 자로 이 양천구에다가 떠밀어버리는 겁니다. 한번 떠밀려봐라. 네가 왜 죽어 마땅한가를 삶의 현장에서 알게 될 것이다. 코로나 무섭다고 참석도 안하는 거 봐라. 이게 바로, 코로나가 환상이거든요. 자, 코로나 걸리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물어봅시다. 코로나 걸렸다. 나이 많다. 기저질환이 있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죽죠? 그런데 그 죽음이 죽음이 아니라니까요. 죽는다는 것은 환상에 불과한 거예요. 왜? 인간은 안죽기 때문에. 자꾸 마귀가 와서 겁박을 하고 협박을 한 거예요. 안 죽는데. 안 죽어요.
여러분, 라는 만화가 있죠? 그 제리가 죽던가요? 트럭에 깔려도 죽어요? 만화 보는 애는 걱정도 안 해요. 납작하게 되도 다시 원상복귀됩니다, 완전 터미네이터처럼. 다시 살아나요. 안 죽는데 악마가 평생토록,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교육을 통해서, 국민교육을 통해서 기어이 그렇게 닦달내는 거예요. 죽는다. 죽으면 안되잖아. 따라서 죽는다 해도 모이면, 소규모 모이면 300만원 벌금! 이제부터. 대예배는 모여도 되지만 소그룹은 모이지 마라. 모이면 300만원 벌금 낸다. 그러면 의존교회는 이게 소그룹인지 대그룹인지 분간도 안돼요. 그게 그건데 뭐. 맨날 300만원 준비해야 돼. 안내면 되지 뭐, 벌금. 안내면 어떻게 되나? 안내면 죽겠지, 뭐. 그러면 죽으면 어떻게 되나? 죽으면 꿈에서 깨어나겠죠.
베드로와 열두 사도들이 그 당시에 로마에서 또는 그 시대에서 그들이 어떻게 살았습니까? 죽기를 무서워하면서 살았습니까? 사도바울은, “나는 이미 죽었다” 했지요? 이미 나는 죽고. 쉽게 말해서 “너희들 눈에는 내가 지금 산 걸로 보이느냐? 꿈 깨라. 나는 죽었어.” 그러면 사람들이 “어? 살았네.”, “내가 산 게 아니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아있는 거야.” 그러면 저쪽 사람이 뭐라고 해요? “저 인간, 도대체 뭐라고 하는 거야? 도대체 알아듣는 소리를 해야지.” 사도바울이 말합니다. “꿈속에 있는 인간들에게 왜 알아듣는 소리를 해야 돼?” 꿈속에 있는 사람은 꿈속에 있는 이야기만 알아듣고 진짜 현실 속에 있는 이야기는 못 알아들어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는 못한다고요. 아까 제가 코로나 이야기했죠? 아, 이거 무심코 이야기했네. 진짜 아무 생각 없이 무심코 이야기했어요. 주의 뜻인가 보오.
내가 나를 그냥 쥐고 있으면 안됩니다. 내가 나를 놔버려야 돼요, 날마다. 그러니까 빈자리가, 나에게 허한 자리가 있어야 돼요. 내 것이 들어오지 않는 자리가 있어야 됩니다. 그 빈자리가 마저 채워지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나는 꿈일지도 몰라. 자꾸 노래 가사가 생각나는데...이게 꿈일 수도 있어. 이거는 현실이 아니라 꿈일 수도 있어. 왜냐하면 내가 누군지를 매일 살아도 나는 매일 다르니까. 도대체 어느 게 진짜 나인지 알 수 없어요. 성질내는 나, 인자한 나, 찹쌀모찌 사주는 나, 도대체 뭐가 진짜인지 알 수가 없어요.
진도 나가겠습니다. 자, 그렇다면 현실이 곧 환상이다. 환상을 환상대로 볼 수 있어야 되고 현실을 현실대로 볼 수 있어야 된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같은 말인데 1번, 무엇이 환상이냐? 2번, 무엇이 현실이냐? 이 두 개를 구분해야 되겠죠. 베드로전서 4장 해봅시다. 10절에,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이렇게 되어 있죠. 여기서 아주 쉽게 말씀드리면 진짜 현실에서는요, 더불어 있어요. 그러니까 내가 있고 남이 있는 게 아니고 나와 남의 구분이 의미가 없어요, 진짜 현실세계에서는.
그러나 현실이라고 우기는 이 환상의 세계에서는 남이 있는 게 아니고 나만 있어요. 나만 있다고요.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있더라도 내가 그 사람을 필요로 할 때, 나한테 의미가 있고 도움이 될 경우에는 남이 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남이라고 해서 그냥 스쳐지나가는 사람이 남이 아닙니다. ‘아, 저 사람은 남인데?’ 라는 것은 어떤 계기가 있어야 돼요. 뭐 부딪침이 있든지 내 발을 밟든지 뭐가 있어야 “왜 남이 내 발을 밟습니까?” 이렇게 할 때 남이 생기는 거예요. 아무나 남이 아니에요.
인간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내게 의미가 있을 때 남이 발생되는 겁니다. 제가 강남강의에서도 그런 이야기했지만 그냥 꽃이 꽂혀있을 때는 아무 생각 없었는데 저 꽃이 아름답다, 저 꽃이 어떻다고 내가 저 꽃에 대해서 내가 이름을 부를 때 “아이고, 이쁘다. 이름 뭐지?”라고 부를 때 그는 내게 와서 하나의 의미가 되는 겁니다. 결국 이 의미라 하는 것은 순전히 누구 중심의 의미입니까? 모든 의미는 내 중심의 의미체계에요, 내 중심의 의미체계.
그래서 다른 사람하고 이야기할 때 각자 자기 이야기만 하는 이유가 그렇습니다. 단어를 쓰더라도 그 단어가 똑같은 의미가 아니에요. 내 중심의 의미가 거기 다 담겨서 단어를 쓰기 마련이에요. 인간은 각자 자기 팔 흔들고 살아가는 겁니다. 남도 없어요. 이웃 사랑이 성립 안됩니다. 왜? 나밖에 없는데 무슨 이웃사랑이 되겠어요? 이웃을 도와주는 것은 내게 이익이 된다는 조건하에 도와주게 되죠.
부부도 마찬가지고 가족도 마찬가지에요. 그러니까 자식 걱정 너무하지 마세요. 자식들은요, 아주 자기 살 재주는 타고났어요. 뭐 그렇다고 해서 밥 잘 먹고 산다는 건 아니지만 살아보려는 의지 하나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타고난 거예요. 부모라 하는 것은 자기 이용대상일 뿐이지 자식한테 아무것도 기대하지 마세요. 요리 붙었다가 조리 붙었다가. 간사하기 짝이 없어요. 누구 자식인데 안 그럴까.
결국 그 자식을 보면서 네가 너를 버리지 못한 그것이 바로 환상의 세계다. 현실은 모르고 꿈의 세계에서 너는 너밖에 모르는구나. 네가 꿈꾸는 세계. 네 의미체계를 사람들은 현실이라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 이야기 듣게 되면, 복음 이야기 듣게 되면 그걸 어디다가 집어넣습니까? 내 의미의 관계망 속에 일방적으로 복음의 의미를 교정해가지고 이걸 바꾸어서 집어넣어버려요.
그래서 '내가 환상을 만들어내는 주범이다.' 환상은 남이 나한테 강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만들어내요, 내가. 우리가 남을 평하는 것은 그냥 남을 평하고 싶어서 평하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함으로써 내가 얼추 훌륭하게 산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고 싶어서 평하는 겁니다.
“세상에, 음주운전해서 새벽에 마라톤 하는 세 사람을 죽이다니. 이 음주운전 한 인간은 죽어야 돼.” 이 말하는 순간 본인은 음주운전을 하지 않을 마음을 가진 괜찮은 존재라고 그 사건의 의미를 자기 잘남으로써 전환시켜서 내가 기억하고 있는 거예요. “그 뭐 새벽에 또 마라톤 하노. 마라톤 협회 그거 문제 있어. 새벽에 마라톤을 왜 해. 마라톤 하는 사람도 문제지, 시커먼데 안보이니까 차가 치었지.” 하면 나는 결코 새벽에 마라톤 할 생각이 없음을 의미하는 겁니다. 그리고 내가 새벽에 마라톤하지 않는 그것이 나를 추가적으로 더 의로운 인간으로 만들어낼 거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바로 환상 속에서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이에요.
자기 잘난 맛에. 자기 우수한 맛에. 내가 인생을 조심스럽게 살았기 때문에 아직도 살아남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코로나가 있을 수 있는 소규모 모임에 절대로 참석안한 덕으로 난 또 내일 살아남을 거라는 괜찮은 결과를 도출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백날 해도 자기 자신을 못 놓는 거죠.
이것은 바로 내 기세에 내가 눌려 사는 겁니다. 내 기에 내가 눌려 사는 거예요. 누가 나를 괴롭히는가? 내가 나를 괴롭혀요. 더 똘똘하지 못하고 더 완벽하지 못하고 더 철저하지 못한다고 내가 나를 닦달내고 질책하죠. 그렇다면 성경에 나오는 성도들은 어느 기세에 눌렸는가?
누가 예레미야 36장 2절-4절 찾아 읽어보세요. “너는 두루마리 책을 가져다가 내가 네게 말하던 날 곧 요시야의 날부터 오늘까지 이스라엘과 유다와 모든 나라에 대하여 내가 네게 일러 준 모든 말을 거기에 기록하라” 되어있죠. 기록하라. “유다 가문이 내가 그들에게 내리려 한 모든 재난을 듣고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리니 그리하면 내가 그 악과 죄를 용서하리라 하시니라” 예레미야가 하는 말이 모두 성경책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세상의 모든 앞으로의 미래의 운영은 책에 의해서 결정되어 버려요, 책에 의해서. 책은 사람 아니죠? 환상뿐인 세상에 성령으로 기록된 책이 쑥 들어와요. 훅 들어온다고요. 들어오면 유일하게 환상의 기세에 눌리지 않고 현실을 현실답게 아주 어떤 저항도 없이 방해도 받지 않고 제대로 줄기차게 현실대로 눈치코치 받지 않고 드러내는 것은 바로 이 성경책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책을 이렇게 이야기합시다. ‘눈치없는 너’.
성경책을 예레미야 시대 때 유다의 마지막 왕인 여호야김이 말하는 족족 전부다 불태워버렸어요. 이것은 마치 뭐와 같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물질화 된거 거든요.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물질화되는 경우가 있었죠? 그게 에덴동산에 있는 나무, 선악과 나무였습니다. 물질화되었어요. 그것을 따먹기만 하면 선악을 아는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다시 말해서 네가 신이 된다고 그렇게 악마가 부추긴 겁니다. 주께서도 따먹지 말라고 이야기했고요.
그러면 오늘날 과학 같으면 성분분석에 들어갑니다. 그렇죠? 도대체 그 과실의 어떤 요소가 선악을 알게 하느냐 조사에 들어갈 거예요. 그러나 조사에 들어가도 소용없겠죠. 과학이 그래서 망상인 거예요. 과학은 그래서 환상인 겁니다. 아무리 과학적으로 따지고 분석하고 쪼개고 쪼개고 원자, 분자, 뭐 다 쪼개도 거기에는 어떤 진리가 들어있지를 않아요. 왜냐하면 환상세계에서는 어떤 진리가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선악과가 물질 같으면 하나님은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했잖아요. 그런데 악마는 물질로 본 거예요. 따먹지 말라 한 것을 따먹을 경우에는 뭐도 같이 날라가 버리느냐 하면, ‘죽으리라’ 하는 그러한 요소도 선악과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걸 따먹는 날에는 같이 날라가 버리니까 논리상 ‘죽인다, 죽인다’ 하는 것도 사라져버리는 거예요.
예를 들면 책상에 모기가 한 마리, 없는데 있다 칩시다. 모기가 하는 말이 뭐냐 하면 “날 잡으면 당신 죽어요.” 라고 모기가 모기만한 소리로 나한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게 어디 건방지게 감히 모기가 나한테...하고 탁! 때려잡았단 말이죠. 피가 탁 튀면서 때려잡으면 뭐도 같이 사라졌어요? ‘나 잡으면 너도 죽는다’ 는 그 말 자체도 때려죽이는 그 탁!하는 소리와 함께 날라가 버렸죠? 없죠?
그게 바로 세상을 눈에 보이는 사물의 집합체로 봤을 때 왜 보이는 것이 보이는 것이 아니고, 실질이 아니고 환상이냐 하는 이유가 되는 겁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여기니까 그런 보이는 것을 보이게 하는 배후에 보이지 않는 원리원칙을 놓치게 되는 거예요. 거기에 대한 지식이 닫혀 버리는 겁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과실을 따먹었다는 그 사실로 인하여 그 다음부터 인간과 악마는 하나님의 죽음에 시달리게 되어 있어요. 땅의 저주도 그 일부고 목숨 잃는 것도 그 일부에요. 전부가 아니라 일부에요. 결국 마지막은 악마가 영원한 지옥 불에 들어가는 그것이 바로 ‘죽으리라’의 모든 것을 총괄한 겁니다. 총 내용이 다 들어간 겁니다.
그러나 현대인에게 지옥은 안보이잖아요. 안보이니까 없는 거예요. 인간은 선악과 열매처럼 눈에 보이는 걸 원하는 거예요. 아까 여호야김이 예레미야가 하는 말씀을 보는 족족 난로불 피워놓고 다 집어넣었죠? (예레미야 36장 1절, “유다의 요시야 왕의 아들 여호야김 제사년에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이르시되”, 23절, “여후디가 서너 쪽을 낭독하면 왕이 면도칼로 그것을 연하여 베어 화로 불에 던져서 두루마리를 모두 태웠더라”, 28절, “너는 다시 다른 두루마리를 가지고 유다의 여호야김 왕이 불사른 첫 두루마리의 모든 말을 기록하고”)
제가 예수 믿을 때 예수 안 믿는 우리 형이, 지금도 안 믿지만, 그 형이 나 교회 간다고 열내서 성경책을 그만 찢어버렸어요. 성경책을 찢을 때, 저는 그런 생각 안했는데 혹시 이렇게 할 수 있어요. ‘감히 성경책을 찢다니. 이제 너는 저주받았다.’ 하는데 그게 마귀의 생각이라고요. 눈에 보이는 성경책 찢는다고 해서 저주받는 게 아니에요.
북한에 있는 군관동무들이 예수 믿는 사람을 색출할 때 예수님 사진 쭉 펴놓고 여기에서 밟고 지나가면 진짜 신자 아닌 줄 알고 살려주고, 밟지 않겠다 하면 신자인 줄 알고 죽이겠다. 그게 얼마나 유치찬란한 악마적 방식입니까? 눈에 보이는 것이 환상인데. 환상을 환상적 방법으로 환상이냐 현실이냐를 가려내겠다는 이 기준 자체가 환상이에요. 진짜 환상적이다, 정말. 진짜 환상적이죠.
신자라면 그 예수님의 그림을 안 밟습니다, 제가 만약 신자라면 밟지 않아요. 군관동지! 제가 화상을 안 밟겠습니다. 안 밟고 대신 그 그림을 저한테 주세요. 해가지고 화롯불에 집어넣어 버려요. 용광로 속에 집어던져버려요. 그러면 군관동지가, 밟는 것보다 어느 것이 더 화끈하냐. 예수님 얼굴 밟힌 것보다 예수님 전체를 통째로 화형시키는 게 더 화끈하겠죠. 바로 내가 살아가는 그 방식이 마귀에 물들어가지고 전부다 환상적이고 망상 속에 있어요, 망상 속에.
선악에서부터 출발해서 결국 선악으로 그냥 결과가 나온다고 하는 그 자체가 망상입니다. 왜냐하면 선으로 시작해서 선으로 하고 악은 악으로 한다 해봐도 이게 무엇이 취소가 안 되느냐 하면 ‘정녕 죽으리라’가 취소가 안돼요. 다시 말해서 우리 인생이라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가련해요. 왜? 결코 취소될 수 없는 그 원리원칙에 갇혀 사는 그 자체가 가련한 인생입니다. 아무리 해도 취소가 안 되는 그러한 법칙 안에 갇혀서 놀아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교도소가서 모범수로 착실하게 산다. 모범수로 착실하게 교도소생활 50년 할랍니까, 아니면 1년 살고 나올랍니까? 어느 쪽이 나아요? 1년 살고 나오는 게 낫지. 칭찬받는데 50년 더 살래? 필요 없잖아요. 코로나 걸리고 1년 살다 죽을래요, 안 그러면 여기서 안 걸리고 50년 더 살래요, 망상 속에서? 코로나 자체가 망상이에요, 이게. 왜? 코로나가 노리는 것은 뭐냐 하면 죽음이다 이 말이죠. 코로나는 인간을 숙주로 하잖아요. 코로나는 나 죽고 너 살자 가 아니라 나 살고 너 죽자는 겁니다. 마스크 안하는 것은 나 살고 너 죽자. 둘 다 똑같애. 바이러스나 인간이나. 둘 다 사는 게 똑같애. 둘 다 망상이야, 망상.
그러나 무엇이 망상이 아니라고 했습니까? 성경말씀. 세상 인간의 모든 인생은 풀의 꽃 같으나 모든 꽃의 아름다움은 사라져도 영원한 것은 오직 말씀만 영원할 것이다. 이사야 40장 6절에 보면, 외쳐라. 어떻게 외칠까요?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꽃이 아름답죠. 파릇파릇 합니다. 그러나 그게 끝입니까? 끝은 뭐에요? 꽃이 언제 있었나 싶죠. 또 언제 여기 풀이 있었나 싶죠? 그게 아까 이야기한 끝이에요. 제목을 할 게 많아서. . 끝장이 되면 지난날에 얼마나 화려했느냐, 지난날에 얼마나 내가 영광스럽냐 그건 다 소용없는 겁니다. 끝이, 시듦이 현실이고 그 중간에 있었던 모든 영광은 환상이 되거든요. (이사야 40장 6-8절,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어떤 야구선수가 홈런 쳤다. 지금은 관중이 없지만 만약에 “우와~” 하고 동료들이 대단하다고 하는데 그거 홈런치고 집에 가다가 죽어버렸다. 그 홈런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홈런치고 좋아할 때 뭐를 생각해야 돼요? ‘내가 홈런 쳐도 지금 당장 죽을 수 있다’ 를 겸해서 생각해야 되죠. 환상이 환상되는 것은 현실에 두 발 딛고 서있기 때문에 현실이 현실로 파악이 되는 겁니다.
눈을 떴기 때문에, 눈 뜬 사람이 소경으로 보이는 거예요. 예수님만이 눈 뜬 사람이잖아요, 요한복음 9장에서.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소경으로 보이는 거예요. 바리새인이 소경되기 위해서 소경된 사람을 눈 뜨게 하고 이 모든 일에 누가 개입한 거예요? 예수님이 개입했다. 현실이 개입하니까 환상은 환상이 되고 꿈은 꿈이 되고 망상은 망상이 되고 예수님만이 유일하게 진리가 되고 길이 되고 생명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만이.
따라서 우리에게는 뭐가 필요합니까? 환상이 필요한 거예요. 꿈이 필요한 거예요. 꿈이라고 무시하지 마세요. 다만 꿈을 꿈이라고 말하고 환상을 환상이라고 말해서 거기에 대해서 주눅 들지 마세요. 이 망상에 기죽지 말고 쫄지 말고 주눅 들지 마세요. 망상의 끝은 기껏해야 죽는 것 밖에 없어요.
그러나 성경에 보면 인간은 죽지 않습니다.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거예요, 주께서. 심지어 마지막도 아니죠.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 같은 경우에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그 말씀이 우리 속에 개입되게 되면 우리가 사는 것은 그냥 목숨 연장이지 이것은 생명이라고 할 게 못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일단 지금까지 한 결론은 뭐냐 하면 현실은 무엇과 결부되어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느냐 하면 ‘현실은 하나님의 말씀과 결부되어 있다.’ 라고 결론 내릴 수 있겠죠. 말씀만이 현실을 품고 있으니까, 그렇죠?
여호야김 왕이 화롯불에 그걸 찢을 때에 선악과 따먹었다고 선악과의 벌칙이 사라지는 게 아닌 것처럼 말씀이라는 이 물체를 불에 넣고 이걸 태운다고 해서 이 세상 자체가 말씀대로 움직이지 않고 혼돈에 잠기는 게 아니다 이 말이죠. 성경책을 찢든 어떤 사람이 성경책을 안보든 어떤 사람이 복음을 안 듣고 귀 막고 어어어~이렇게 한다 할지라도 지가 귀 막고 흔드는 것도 성경에 다 나와 있어요.
모든 것이, 좋든 싫든 이것은 우리가 변경시킬 사항이 아닙니다. 주께서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일에 우리가 변경이 안 돼요. 착하다고 해서 더 성경적이 아니에요. 착하든 뭐든 관계없이 매일같이 우리는 망상에 주눅 들지 마라. 망상을 망상이라고 이해하는 그것이 바로 현실이 너와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에요. 그게 바로 성도로 산다는 증거가 되는 겁니다. 망상을 망상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삶에 대해서 무게 느끼지 않고 가볍게 사는 거예요.
가볍게 사는 방법, 알려 드려요? 남 평가하지 말고 내 평가 안하고. 그러면 가벼워요. 남 평가 안하고 내 평가안하고. 평가 안하면 자기가 의인될 일이 없어요. 사람이 힘든 것은 본인을 자꾸 의인이고 잘난 사람으로 생각하니까 힘든 거예요.
자, 그렇게 보시고 이제 11절 보시면 이해됩니다. 베드로전서 4장 11절,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보세요. 이게 망상의 현실에 있는 내가 말해버리면 이게 ‘나는 역시 잘났어’의 의미로 돌아와요, 이 망상세계에서는. 내가 있다는 것도 하나의 망상이거든요.
그런데 주의 말씀대로 돌아가려면 나를 이 망상세계에서 주님 보시기에 잃어버린 자로 인정해야 돼요. 내가 잃어버린 자로 인정한다는 것은 내 안에 주님이 살아계시고 주님이 살아있다는 말은 주의 말씀이 살아있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은 내 뜻대로가 아니라 ‘주의 뜻대로’가 되는 겁니다.
주의 뜻대로 하게 하시는 분. 그 분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도행전 4장 12절에서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기 때문에 그 분이 바로 ‘주의 이름’이 되는 겁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주의 이름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내 하는 모든 게 말씀이 되는 거예요. 내 하는 모든 것이 말씀대로 되는 겁니다.
말씀대로 되는 걸 처음부터 안다는 것이 아니고 처음에는 망상인데도 불구하고 현실로 우기다가 주의 말씀이 개입해버리면 이것이 내 뜻이 아니고 주의 뜻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그 주의 뜻은 무엇이냐고 물으면 주의 뜻은 나의 십자가로, 나를 부인하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일을 하셨다. ‘주의 증인이 되는 것’이 주의 뜻이죠. 주의 증인되는 것.
여러분 중국집 가면 중국집 들어갈 때부터 앉아있을 때부터 고민되는 게 뭐냐? 짬뽕 먹을까, 짜장 먹을까 고민이 돼요. 심지어는 다 짬뽕 먹고 나서도 마찬가지라. 짜장 먹을 걸. 짜장 먹으면 짬뽕 먹을 걸. 둘이 갔을 때는 둘 다 곱빼기를 시키세요. 짬뽕 먹는 사람에게 짜장 곱빼기 남은 분량을 주고 서로 윈윈하는 그 방법 쓰면 되겠죠. 이게 뭐냐 하면 선택을, 본인이 선택하죠. 둘 다 짬뽕 먹고 짜장 따로 먹고 나오면서 느껴야 되는 것은 뭐냐 하면 ‘또 내가 주의 뜻에 의해서 내 뜻대로 안되었구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항상 주의 뜻은 예상 못한, 예상 밖이에요. 내가 생각했다. 어떤 것을 해도 주께서는 그것을 그대로 안하고 예상 밖으로 되는 일을 준비해 놨어요. 예상 밖의 일을 준비해놨어요. 그렇다면 말씀만 그런가. 봉사할 때도 마찬가지에요. 봉사할 때도 주의 말씀에 의하면 내가 죽었다고 생각해라. 다시 말해서 나의 봉사로 하나님께서 영광 받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되려면 봉사도 내가 봉사합니까, 아니면 내 안의 그리스도가 봉사하게 하시는 겁니까? 내 안의 그리스도가 봉사하게 하시는 거예요.
그 조건이 뭐냐? 내가 하는 봉사는 망상에 불과하고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실질적인 일은, 망상을 망상되게 하시는 일은 주의 일이다. 청소하는 게 주의 일이 아니고 내가 현실과 망상을 구분하게 하는 지금 이순간이 주의 일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하루 일과 마치고 잠을 자죠. 잠을 자게 되면 잠자는 거, 이거 내 뜻 아니에요. 왜냐하면 사람은 잠을 잔다고 하는 순간 잠을 안자고 있는 중이에요. 지금 잠을 깨고 있는 중이에요. 나는 지금 잠을 잘 자고 있다. 이게 무슨 잠자는 모습입니까? 진짜 잠이 들면 뭘 몰라요? 잠자는 주체를 잊어버리잖아요, 잃어버리죠. 잠만 있을 뿐이지 누가 잠자고 있는지를 내가 의식하지 못한다니까요. 그러니까 잠자는 것은 일종의 죽음이에요. ‘내가 죽었다’가 성립 안되는 죽음 있잖아요. 잠자는 것은 죽는 일이다, 잠자는 것은 죽는 일이다, 한 백번 해보세요. 내가 죽는 게 아니고 그냥 잠자고 있어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게 하루다. 이게 창조의 원리입니다. 주께서는 우리 인간을 창조의 원리에다가 감아 넣어서 가동하게 만들었죠.
창조의 원리가 그렇다면 언약의 원리도 우리를 죽게 만드는 것이 언약의 원리입니다. ‘어제 살았으니까 오늘도 살겠지’ 가 아니라 매일 죽고 매일 ‘언약’으로 인하여 살게 하는 것이 새 언약의 기능입니다. 그래서 제가 강남강의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날마다 ‘재편성’한다고 했죠. 어제 써먹은 나의 인생관, 믿음관 오늘 못써먹습니다. 어제는 어제 치로 시효 끝났어요. 오늘의 새로운 원칙은 또 주께서 새롭게 마련해 주는 겁니다.
똑같은 단어라도 느낌이 달라요. 느낌 알죠, 여러분? 똑같은 단어라도. ‘십자가로 구원받는다’ 가 어제의 느낌 다르고 오늘 또 십자가로 구원받는다면 오늘 느낌 또 달라요. 주께서 주의 약속대로 맞닥뜨리게 하는 상황이 어제의 상황은 어제로 끝나버리고 오늘 상황은 따로 있기 때문에 그래요. 오늘 같은 빵 줄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몰랐죠. 간식의 느낌이 다르잖아요. 다음 9월달에 또 뭔지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교회 청소한다, 똑같은 봉사를 해도 그때그때마다 달라요, 봉사의 질이. ‘봉사를 통해서 인간 만든다’ 이렇게 보시면 돼요. 봉사를 통해서 무엇이 환상이며 무엇이 현실인가를 또 보게 하는 거예요. 내가 하면 망상이고 주께서 이 일을 시키셨다고 보면 그건 현실이죠. 그러면 주께서 일을 시켰다는 것이 정답이라면 그건 어제까지의 정답이지 똑같은 정답이 오늘까지 이어지지 않습니다. 오늘 되면 주께서 시켰다는 것이 또 색다른 느낌으로 주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 내가 주인공 안 되게 만들죠.
12절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이게 시험하러 오는 불시험이죠. 망상의 세계, 환상의 세계에서는 이걸 뭐라고 보느냐 하면 ‘고난’으로 봐요. 물론 베드로전서에도 이걸 고난으로 얘기하고 있어요. 그러나 ‘고난’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뭐냐 하면 ‘고생 되게 한다’가 되죠.
집에 돈이 많아서 정기적으로 골프 치는 것을 고난으로 누가 생각하겠습니까? 고난으로 생각하지 않죠. 로또 당첨되고 던져놓은 땅이 갑자기 재개발한다고 해가지고 백배가 오른 이걸 누가 고난 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어요? 돈이 갑자기 10억 더 생겼을 때에 어느 사람이 주여, 어떻게 이런 고난을 주십니까? 뭐 이렇게 고민하는 사람 있습니까? 고민할 거 뭐 있어요, 그럼 남 주든지 말든지 하지. 좋아서 입이 벌어지겠죠. 평소에 뭘 원했다는 겁니까? 평소에 원한 것이. 따로 돈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는 그 마음이 안 죽었다는 거예요. 이게 계속 살아있다는 겁니다, 우리 안에.
그렇다면 이걸 누가 관리하느냐? 서비스하는 악마가 주님이 시키는 시킴에 따라서 성도에게 이게 찾아오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세상적으로 망한 것만 시험이라고 보지 마세요. 만사형통한 것도 시험입니다. 의도적으로 칭찬받고 남한테 경외심을 받고 존경받는 것도 큰 불시험이에요, 이게. 갑자기 나 아니면 일이 안 될거 같고 내가 지금 당장 죽으면 안될 것 같이 앞으로 기여할 게 많은 것처럼 착각하는 것. 신종코로나 바이러스가 남한테는 다 가되 절대로 나한테는 오면 안되는 것처럼 본인이 그런 식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그것이 바로 내가 늘 망상이라는 자리에서, 말씀만이 현실인데 내가 현실이라고 자꾸 우기는 그런 망상, 그건 아주 못된 망상이죠. 남들은 망상이라도 나는 현실이라고 우기는 그런 망상. 약도 없어요.
내 안에서 유일하게 말씀이 자꾸 드러나야 그게 현실과 결부된 나가 되겠죠. 말씀을 내가 지켰다든지 내가 말씀대로 사니까 이런 복을 받는구나 이건 망상입니다. 나중에 그거 날라가 버리면 주님 앞에 대들어요. 13절에 보면 그걸 가지고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고 즐거워하라 했어요.
이 점에 대해서 마태복음 5장에서 아주 잘 나와 있습니다. 5장 10절-12절,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할 때 이 일이 우리한테 일어납니까, 안 일어납니까? 필히 일어나죠. 왜? 이게 현실이기 때문에.
현실을 마다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뭐 믿음 좋은 사람한테 가세요. 이러면 안돼요. 진짜 현실에 속한 성도라면 우리는 이런 말씀이 와줘야 기존에 내가 망상인데도 불구하고 망상 아닌 줄 안 그것이 말씀에 의해서 사정없이 다 깨져버리고 다 그 본색이 드러나죠. 노출되는 겁니다.
결국 우리가 오늘 한 것은 무슨 이야기냐 하면 모든 일은 주님께서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거예요. 심지어 성도한테 불 시험 오는 것도 말씀대로 스케쥴대로, 방송국에 편성표 다 짜인대로 시간에 맞추어서 그게 온 거예요. 따라서 그 시간변경, 현실변경을 하려고 시도하지 마세요. 그건 다 헛된 짓입니다.
끝으로 망상의 세계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그거 말씀드리고 끝내겠습니다. 망상의 세계에서는 악마를 나에게서 쫓아내기 위해 악마에게 요청하는 겁니다. 재수 없는 악마를 쫓아내기 위해서 우리 인간이 쓰는 방법은 기껏 아는 게 악마의 권역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악마가 제시한 방법을 우리는 사용해서 재수 없는 악마를 추방하려고 시도합니다. 점쟁이들 이야기만 하는 게 아니에요, 지금. 교인들 이야기하는 거예요. 물론 점쟁이도 포함하고 불교도 마찬가지고 종교 없는 모든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분투노력하고 있습니다. 재수 없는 것, 찝찝한 것, 제발 나에게서 떨어져라. 떨어지는 방법은 뭐냐 하면, 착하면 떨어지겠지.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괜찮으면 떨어지겠지. 자, 윤리적, 도덕적이 왜 문제냐? 평가를 한다는 거예요. 평가를 내려서 이것은 선이고 악이고 나한테 평가를 한다는 거예요. 평가한다는 자체가 이게 망상이거든요. 평가를 하려면 평가하는 내 기준은 엄연히, 살아있어도 괜찮게 살아있어야 돼요. 왜? 내가 똑똑해야 내가 사니까.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지고 내가 알아서 하니까. 남은 죽어도 나는 살아남아야 돼요, 신종코로나 속에서도. 그래야 남을 평가할 수 있으니까. 남을 평가한다는 건 나도 그런 식으로 나를 평가하고 싶으니까. 내가 나를 평가하고 나는 나를 절대로 나쁘다 하지 말아야겠다.
이거 누구 뜻이에요? 주님 뜻이에요, 악마 뜻입니까? 누구 뜻입니까? 이게 바리새인의 자기 의 아닙니까? 악마 뜻이잖아요.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요. 그 방법을, 전통도 유구한 전통을 따라서 그대로 교인이든 교인이 아니든 모든 종교에 이게 다 파급이 되어 있어요. 종교가 없는, 길에 가는 사람 아무나 붙들고 해보세요. 재수 없을 때는 뭐하면 되지? 이런 식으로. 점 한 번 볼까? 궁합 볼까? 이게 뭡니까? 악마에 의해서 악마가 제시한 방법 중에서 골라가지고 악마를 퇴치하는 식으로 나만 현실로 살아남겠다는 그 작당을 하는 거예요.
다시 얘기합니다만 우리 자신을 망실(忘失)하세요, 잃어버리세요. 하루치 살고 잊어버리고 다음에 또 내일 주시면 주께서 주신 하루라고 생각하시고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시고 오늘 어떻게 차타고 가느냐 그거는 그때 가서 염려하고. 늘 범사에 감사하는 저희들 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시작도 끝도 모르면서 우리는 순전히 내 위주로 살아왔습니다. 내게 의미되는 일로 살아왔습니다. 이제는 잃어버린 자로 주에 의해서 살아났기에 주님이 살아있고 나는 그 안에서 주께서 움직이는 대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