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은 기도하는 집 2004년 12월 26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21:12-17
Re..마 21:12-17 (기도하는 집)
이름 : 이근호(IP:)
내 집은 기도하는 집
2004년 12월 26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21:12-17
21:1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21:13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21:14 소경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
21:15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
21:16 예수께 말하되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21:17 그들을 떠나 성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하나님보고 구원해 달라고 하는 자들이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찾아오신 자만이 구원되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의 방식입니다. 즉 "왜 하나님은 저를 버리시지 않으시는 겁니까?"라는 물음을 물어야 합니다.
실제로 창세기 28장의 야곱의 경우처럼, 야곱은 그냥 잠만 자고 있었는데 밤에 하나님께서 사다리가 내려와서 천사들이 번잡스럽게 오르락내리락 했습니다. 이것은 야곱이 의도했고 기대했던 상황이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하나님 쪽에서 실시해버린 상황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데리고 다니시면서 야곱의 개인적인 뜻은 게워내게 하시고, 오로지 하늘의 뜻만이 그의 마음에 담아버리십니다. 그 뜻은 바로 이것입니다. "인간이 잘나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된다"는 사항입니다.
그리고 그 장소를 '하나님의 집'이라고 불러버렸습니다. 즉 하나님은 야곱을 재료로 삼아 하나님의 뜻이 실시되는 중심거점으로 삼으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물론 야곱의 의사를 전혀 물어보지도 않고 말입니다.
나중에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 위에 축복을 하면서 장차와 차자의 위상을 뒤바꿔버립니다. 이는 큰 자가 하늘나라에서도 결코 큰 자가 아님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차자에게 장자가 받을 축복을 제공해 버립니다. 즉 하나님의 뜻이란 인간의 뜻과 의견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사기 6-7장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거기에 바로 기드온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뻔질나게 하나님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자신은 그럴 만한 위인이 못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기어이 그 기드온을 데리고서 하나님의 일을 시키려고 하십니다. 끈질기고 집요하게 기드온을 다루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방식입니다.
기드온이 평소에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어 평소에 소원이었던 사람이 아닙니다. 기드온이 구원되고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그는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하나님의 지시를 피해보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그 어떤 경우에서도 기드온을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다루십니다. 바로 구원이란 이런 겁니다.
따라서 정말 구원된 자라면 즉 "왜 하나님은 저를 떠나지 않는 겁니까? 정말 짜증나네"라는 고백이 성립됩니다. 즉 주님과의, 실제적인 교류가 발생된 자만이 구원될 자입니다. 구약 선지자인 요나의 경우도 예외가 아닙니다.
요나는 자칭 선지자로 행세합니다. 멀리 이방나라 니느웨 성의 심판을 증거하라는 지시를 받고서도 자신과는 무관한 일을 여겨서 그 일을 외면해 버리고 엉뚱한 쪽으로 발길을 돌렸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강하게 요나의 앞 길을 막고 나섭니다. 요나를 그냥 두지 않고 깊은 물 속에 던져버립니다. 그 곳은 '죽음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되살아나올 확률은 0입니다. 그 어떤 인간의 몸부림도 살 수 없는 환경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요나로 하여금 죽음의 자리를 맛보게 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요나를 떠나지 않고 다루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요나가 물고기 뱃속이라는 죽음의 자리에서 아직 의식이 남아 있는 한 그가 할 수 있었던 일은 성전 있는 쪽을 향하여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더니만 생존의 확률이 0일 수 밖에 없는 그런 상황 속에서 요나는 그 물고기의 도움으로 해변가까지 인도함을 받고 구출되었습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요나를 죽일 마음이 있다는 왜 죽이지 않았을까요? 또 정말 살리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왜 죽음의 자리까지 내려가게 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성전이 지니고 있는 '죄 용서의 효능'이 공간이라는 장애마저 극복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함입니다. 멸망당하기로 되어 있는 니느웨 성이 이스라엘 성전에서 뿜어나오는 죄 용서의 혜택을 입을 수 있는 놀라운 구원의 원칙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열왕기상 8:38-39에 보면 "한 사람이나 혹 주의 온 백성 이스라엘이 다 각각 자기의 마음에 재앙을 깨닫고 이 전을 향하여 손을 펴고 무슨 기도나 무슨 간구를 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사유하시며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 그 모든 행위대로 행하사 갚으시옵소서 주만 홀로 인생의 마음을 다 아심이니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의 성전이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죄를 용서하시는 '용서 시스템'입니다. 이용서 시스텤은 죽음의 정황 속에서도 공간을 뛰어넘어 어김없이 적용이 되는 겁니다. 이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하나님은 요나를 놓치지 않고 사용하기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기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 표적을 구하라 내가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고 하십니다.
요나의 표적이란 예수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요나처럼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셨다가 나오는 표적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음부, 즉 죽음의 세계에 들어가셨다가 사흘만이 돌파해서 도로 부활하신 표적을 말합니다.
이로서 죄를 용서하는 시스템이 제대로 가동되려면, 참으로 죽음을 극복한 그 당사자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새로운 사실을 예수님은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당시 종교전문직종에 종사하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용서 시스템을 포기할 의사가 없었습니다.
성전에 유지되려면 성전 관리인이 있어야 하고 늘 제물이 제공되는 상태에서 제사가 계속 되어야 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제물 공여에 필요한 각종 편이를 위하여 온갖 종류의 상인들이 성전 안에 들끓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과격한 행동을 감행하므로서 인간들이 사수하려는 공간에서 성전은 이미 그 의미를 상실했음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진정한 성전은 하늘에 있는 성전, 즉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말합니다.
우리 성도들의 기도는 그 분이 허락하신 용서해주심과 거기에 뒤따라오는 하늘의 사랑과 풍성한 광채와 영광스러움에 대해서 눈을 더 뜨고 볼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겁니다. 언제 기도해야 할까요? 바로 성도가 자기 자신의 행동에 집착할 때 그 때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용서를 가로막는 자신의 교만이나 죄로 인한 좌절이 발생될 때, 다시금 주님의 공로와 용서하심을 잊지 말자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의 몸이나 신상을 위해서 기도하지 말고 주님의 용서하심을 크게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