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존강의20200709a 베드로전서4장 11절(끝장)-이 근호 목사
서울의존강의20200709a 베드로전서4장 11절(끝장)-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4장 7절-11절
7절,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8절,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9절,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10절,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11절,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베드로전서 4장 7절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마지막이 가까이 왔다. 끝장 보자는 이야기이죠. 세상 사람들은 이 마지막을 생각 안하고 있습니다. 끝이 없다고 여기고 부지런히 엑셀을 밟는 거죠. 차를 달리는 겁니다. 갈 때까지 가자.
만약 100m 앞에 끝장이 있다고 한다면 끝장 오기 전에 그 인간은 혼란에 빠집니다. 혼란스럽습니다, 끝이 있다면. ‘끝이 있는데 내가 지금 애써서 뭐할 거냐’ 이렇게 되겠죠. 만약에 끝이 있다면 인간은 현재 자기가 알고 있던 모든 사람들과 본인과 전부다 이별하게 되어 있습니다. 헤어지게 되어 있죠.
내가 끝으로 날라간다면 나하고 친하게 지냈던 사람, 내가 정 주었던 사람 또는 정을 받았던 모든 사람과의 안녕입니다. 그런 식으로 끝장을 이해하는 거예요. ‘내가 끝났다. 그러면 나와 관련된 모든 사람과 빠이빠이다. 뭐 속 시원하게 그래, 나 혼자 갈 데를 가지.’ 이렇게 쿨하게 마음을 잡을 수도 있을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하고도 이별하면 어떻게 될까요? 평소에 ‘예수님을 믿는다. 잘 믿는다. 예수님의 복음을 내가 믿었어요. 나는 그걸 귀하게 여겼습니다.’ 했는데 다른 사람하고 헤어지는 것처럼 주님하고도 안 헤어진다는 보장이 있을까요? 이 끝장에서.
지금은 끝장이 아니니까 마음 굳게 결심해서 ‘주님을 믿습니다’ 라고 이렇게 주장하거든요.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기 안정화 작업입니다. 내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어떤 분을 내가 의지하고 맡기고 믿는다. 그 든든한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자기 안정을 도모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자기 안정 도모해서 뭐 어디 써먹으려고? 그것은 내가 안정화되게 되면 ‘나’라는 것을 건실하게 지켜줄 수가 있고 건실하게 지킬 수 있는 이것을 영원한 세계, 천국과 연결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갖죠.
그런데 끝장이 온다면? 내가 100m 앞에서 없어진다면? 또는 1시간 48분 후에 없어진다면? 그때는 아까 말씀드렸듯이 세상 사람들한테는 정리할 것 정리하고, “혹시 내가 죽거든 닭 한 마리 빌린 것 사촌한테 대신 갚아주라고 이야기할게. 걱정하지 마. 나 닭 빌린 것 안 떼먹는다. 내 사촌한테 얘기해서 닭 한 마리 줄게.” 뭐 그런 식으로 할 수 있는 거예요. 소크라테스가 죽을 때 그런 유언을 했답니다. 닭 한 마리 걱정하면서 죽었답니다.
사람하고는 이렇게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는데, 살아있을 때는 예수님을 믿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만약에 예수님께서 나를 끝장내신다면 그때 우리가 “주님 저 알잖아요.” 분명 우리는 주님 앞에 선뜻 나서서 “주님 저 몰라요, 알아요? 복음 전하고 믿고 했습니다.” 할 때 “도무지 너 모르겠다.” 이렇게 주님께 이별 통보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진짜 끝장이죠, 진짜 끝장.
끝장이라도 예수 믿었으면 이렇게 다시 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런 걸 한번 생각해보세요. 이라는 영화가 있었어요. 이라는 영화가 무슨 영화냐 하면 샌프란시스코 근방에 지진이 일어나서 온 도시가 다 흙 속에 묻힐 때 주인공들이 지진에서 가족애를 살리면서 살아났다 뭐 그런 이야기예요. 영화 잘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영화가 늘 아슬아슬해요.
지진이 일어나고 하늘에서 유황불 떨어지고 해서 그 지역을 탈출하기 위해 비행장에서 온가족이 경비행기를 탔는데 비행기가 활주로 가는 도중에 지진이 나서 비행기 끝이 무너지고 있어요. 그런데 비행기는 뜨려고 하면 어느 정도 거리가 있어야 되는데 거리를 다 못 채우고 비행장이 무너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 관객들은 지금 조마조마한 거예요. 물론 거기서 영화가 끝나고 주인공이 죽는다고 생각은 안하지만 그래도 그 장면을 보면서 ‘야, 이거 비행장 다 갉아먹기 전에 비행기 떠야 되는데’ 하는데 과연 끝부분에 와서 비행기가 확 사라져요, 화면에서. 사라져가지고 ‘주인공이 여기서 끝나는구나. 영화 30분밖에 안됐는데 여기서 끝나나.’ 이런 생각하는데. 사라졌는데 비행기가 여기서 양력을 받아서 다시 떠오를 때 관객들은 전부다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야, 드디어 살았구나.’ 뭐 이렇게 좋아하는 거예요.
그 끝장에 주님께서 이 드라마처럼 내 인생도 ‘세상 모든 것은 끝장이다’ 했는데 주께서 “너만은 천국오너라” 해서 비행기가 양력 얻어서 다시 떠오르는 것처럼 떠오른다면, 아, 아슬아슬하긴 하지만 구원되기는 되었잖아요. 어쨌든 저쨌든 위기를 거치든 말든 구원은 되었잖아요. 그건 우리 생각이고, 우리 드라마이고.
세상 사람들과 이별할 때는 이별이 무슨 뜻인지 알아요. 나는 이제 간다. 너희는 남아 있거라. 마지막 임종 때 연세 많은 어른들 돌아가실 때 비록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가운데에서도 이별이 뭔지 알아요. 나 죽거든 큰 아들은 집하고. 뭐 이런 거 나오잖아요. 그게 제정신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거예요. 받아 적나, 지금? 반드시 내 주민등록번호 받아 적어야 된다, 안 그러면 법적인 효력 없어. 이 세세한 것까지 당부하면서. 큰 아들은 집 가져가라. 둘째 아들은 땅 사놓은 거 해라. 셋째 아들은 그저 내 빚이나 들고 가라. 이런 식으로 유언할 때 이별이라는 것을 본인은 아는 거예요.
너희들 세계와 나는 이제 끝난다. 세상은 아직까지 해 뜨고 해 지고 달 뜨고 지지만 본인의 죽음은 본인에게 무엇으로 다가옵니까? 세상이 끝장나지 않더라도 자기는 일찍 세상과 이별, 결별을 했죠. 이별했습니다. 과연 그 이별할 때 옆에서 또 목사님 결정적 순간에 심방와가지고 “집사님, 정신 있습니까? 정신 차리시고. 예수 믿습니까? 예수 믿어야 돼요. 주기도문 외워보려고요? 이렇게 한번 외워 보실랍니까?” 뭐 이렇게 하지만 “믿습니까?” 하는데 뭐 안 믿는다고 할 수도 없고 마지막 가는데 또 남을 위로해줘야죠. “예. 목사님 걱정 마세요. 믿습니다.”
하지만 ‘믿습니다’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끝장이 나지 않을 때 그때 내 기분이었고 지금 내가 끝장나는 그 지경에 와서도 내가 예수 믿는다는 것이 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무슨 효과가 있을까요? 소용없는 거 아니겠어요? 살아있을 때나 예수님을 상상해서 믿는다고 이게 가능한데 까짓 거 내가 없어지는 마당에 예.수.믿.습.니.다. 라는 6글자가 나를 살려 줄까요?
따라서 신앙이 있다 하는 이 모든 것이 끝장이 아닐 때는 의미 있는 것처럼 위로가 되고 마지막 때에 내가 죽어서도 내 구원을 보장할 것 같지만 막상 실존적으로 나에게 나의 끝이 왔을 때 다시 한 번 예수 믿는다는 것이 실효성 있는지를 의심할 수밖에 없어요.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존적으로 말하면 뭐냐. 죽는 나를 대신 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 그걸 실존적이라고 합니다. 머리가 길었는데 대신 이발할 사람이 없고 내가 목욕탕 가야되는데 나 대신 목욕탕 갔다 왔는데 내 몸이 깨끗하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들은 더불어 살고 화해롭게 하하거리면서 얼싸안고 우리는 가족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각 개인마다 전부다 실존적입니다.
자기가 한 단위가 돼요. 나는 숫자 1로 되지 어떤 경우라도 2가 될 수 없어요. 나는 나로서 1로 마감이 되어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한번 적어 볼게요. ‘나는 늘 나로 최종 마감된다.’ 친구도 많고 아는 사람 많고 가족도 많더라도 따지고 보면 나는 늘 나로 최종마감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강의하면서 계속 강조하는 것은 나로 마감이 되는데 ‘예수님을 믿는다, 예수님을 가까이 한다, 나는 예수님을 의지한다’ 하는 이 ‘예수님’이라는 실존도 내가 죽을 때 다른 가족들이 헤어지는 것처럼 그 헤어져야 될 가족 중에 예수님이 하나의 나의 대상으로서 있다면 나 죽는데 대해서 예수님도 따라온다는 무슨 보장이 있습니까? 아무런 보장이 없죠. 왜? 나는 나로 최종 마감되기 때문에. 예수님은 다른 내 사촌하고 차이가 없잖아요. 내 사촌이나 내 부모나 가족이나 이런 사람들하고 차이 없죠. 그들과도 헤어지는 마당에 예수님과 안 헤어진다는 보장 없잖아요.
진짜 죽는 마당에 예를 들어 “아버지, 이제 숨 끊어지는데 마지막 소원을 얘기해주세요.” 하는데 아버지 하는 말이 “예수를 불러다오.” 없는 예수를 어디서 찾습니까? “예수를 불러다오.” 예수님이 왔다고 칩시다. “김집사, 내가 예수네. 그래 뭐뭐?” 그러면 김집사 하는 말이 “아, 그렇게 예수님하고 친하게 지내도 나 죽는 마당에는 나 홀로 죽는구나. 예수님마저도 결별이구나.” 그렇게 안된다는 보장 있습니까?
신앙조차도 다 허구라는 사실을 우리가 감안해야 된다 이 말이죠. 지금 끝장나지 않는 상태에서는 상관없어요. 나는 계속 살아가기 때문에 오늘 안 믿으면 내일 믿으면 되고 내일 안 믿으면 모레 믿으면 되니까. 그런데 지금이 그 끝장난, 내가 모든 사람과 헤어지는 순간이며 그 순간에 나는 나와는 헤어질 수 없죠, 나니까. 죽을 때 나하고 같이 죽으니까 헤어질 수가 없죠.
그러나 예수님이 과연 죽을 때도 나와 같이 할 수 있는 예수님이냐 하는 것에 대해서는 확실한 증거도 없고. 예수님이 와가지고 “나 예수다. 같이 누워 죽어줄까?” 이럴 분도 아니고. 그냥 나한테 지금까지 했던 기억은 그냥 ‘예수 믿습니다’ 라는 그런 고백뿐이거든요, 고백. 고백이 무슨 그게 효과가 있겠는가 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 말이죠.
하나의 예를 들어봅시다. 이와 같은 경우가 있을 때 여러분들이 어떻게 처신할랍니까? 사람이 죽어도 다시 산다는 그런 이야기를 교회에서 들었다 칩시다. 그러면 이 사람이 만약에 시험을 해본단 말이죠. 내가 여기 있고 예수란 분이 여기 옆에 있다 치고 내가 밧줄로 예수님과 묶어요. 밧줄로 꽁꽁~밧줄로 꽁꽁 묶어요. 나는 죽었다가 부활 못되지만 예수님은 죽었다가 부활 되잖아요. 그럼 낭떠러지에 가요. 가서 내가 예수님을 떠밀어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밧줄이 아니고 고무줄 비슷한 밧줄이에요. 그럼 예수님 먼저 낭떠러지에 떨어져서 으악! 하고 내가 떠밀어서 죽게 되겠지요.
그러면 나는 도박을 한 거예요. 만약에 예수님이 죽었는데 다시 산다면 밧줄로 꽁꽁 묶었기 때문에 나도 따라서 부활하게 될 것이고 내가 떠밀었는데 아무 소식이 없어. 그러면 떠밀면 밧줄로 연결되어 있으니까 나도 같이 무의미한 추락, 죽음만 있을 뿐이에요. 떠밀어서 죽은 그 분에게 아무 능력이 없어. 그 분은 그냥 구라였어.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난 게 거짓말 되어가지고 그 거짓말에 홀딱 넘어가서. 진짜 죽었다가 부활 된다면 밧줄로 묶여있기 때문에 떠민 나도 같이 딸려 올라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 소식이 없네. 괜히 헛짓했어. 친구 따라 같이 죽을 뻔 했어.
그러니까 친구를 떠민 게, 밧줄로 묶었기 때문에 내가 나를 떠밀어서 나를 낭떠러지에 넘어뜨린 격이 되어 버렸죠. 그동안 그 친구한테 얼마나 많은 복음 이야기 듣고 교리며 삼위일체부터 온갖 괜찮은 이론 다 들었어요. 이야기 다 들었다 이 말이죠. 그 다음에 그 이야기를 내가 “믿씁니다” 하고 쌍시옷을 해가면서 얼마나 다짐에 다짐에. 친구야, 믿는다. 나는 너의 주장을 믿는다 하면서 우리 슬슬 낭떠러지에 같이 가자, 믿는다. 나는 못하지만 너는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날 걸 믿는다, 믿는다. 잠시 눈 감고 있을래? 예수님을 밀어버렸다 이 말이죠. 우리가 같이 살까요?
야, 이거는 대단한 모험입니다. 이렇게 모험을 하겠다고 나선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참 희한한 사람이죠. 왜냐하면 다른 사람은 복음은 듣고 성경말씀 보지만 그렇게 극단적인 모험까지는 안가요. 으응, 그런 이론이 있구먼. 그런 교리가 있구먼. 나중에 죽을 때나 “믿습니다” 하면 내 음성을 하나님이 들을 테니까 하나님께서 “오, 니가 예수를 믿는구나. 내가 살려줄게.” 아마 그러한 조치에 대해서 은근히 기대하면서, 그냥 내가 믿는다고 하는 그걸로 다 된 거 아닌가? 믿는데 추가해서 할 게 더 뭐가 있겠어? 이렇게 해가지고 믿으니까 천당 가는 것은 이제 됐고 살아있을 때는 나 즐거운 일, 나 행복한 일만 하면 된다. 보통 사람은 그렇게 할 거예요. 그게 요령을 부리는 거예요. 든든한 보험하나 해놨겠다. 이제 나는 내 일만 하면 된다.
그런데 아까 그 자기 친구 되는 예수님을 실제로 낭떠러지에 가서 말이 맞는지 안 맞는지 떠미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에요. 진짜 그 사람이 믿는 사람이죠. 믿는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믿는다는 흉내를 내는 사람은 뭐 죽었다가 부활할 수도 있겠지. 하고 나는 내 볼일 볼란다. 이렇게 되는데 진짜 죽었다가 부활하는 것을 내 인생과 바꿀 수 있는 그 정도의 대단한 일이라고 느낀다면 그게 진짜 진실이라면 대충 믿을 수는 없다는 거예요. 대충 믿는 척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확실히 가자는 거예요, 확실히. 확실한 방법은 우리가 예수님을 죽이는 수밖에 없죠. 실제로 부활했는지 죽일 수밖에 없어요.
자 그래서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정리하게 되면 예수님을 죽이세요, 매일같이. 예수님을 떠미세요, 낭떠러지에. 그 말은 뭐냐 하면 긴가민가하고 안절부절 못하는 나를 내가 낭떠러지에 떠미는 일이에요. 왜? ‘믿어볼까, 안 믿을까’ 이거는 믿는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닌 자가, 믿으려고 애쓰는 나 같은 인간은 살아도 소용없는 인간이에요. 그야말로 쓰레기 같은 인간이죠.
그러니까 제 말은 뭐냐? 믿으려면 예수님을 밧줄로 꽁꽁 묶어서 떠밀든지 아니면 이건 안 믿는 거라고 인정하든지 둘 중에 하나가 되어야 되요. 믿으려고 애쓰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이 말이죠. 그렇죠? 믿으려고 애쓰는 게 뭡니까? 한번 찔러나 보는 것이지 그게 무슨 믿음이에요? 한번 맛이나 볼까? 맛봐서 뭐 할 건데?
이 세상에 끝장이 없다면 예수님을 내 편 만들려고 사람들이 시도를 합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그렇게 하고 있고. 그러나 끝장이 있다면, 다시 말해서 끝장은 주님의 끝장이 아니고 진짜 당사자, 실존적 나의 끝장이잖아요, 나의 끝장이 왔을 때 과연 그동안 30년, 40년 예수 믿은 것이 무슨 효과가 있느냐를 끝장 가서 생각하지 말고 지금이 끝장이라고 생각하고 예수님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이 말입니다, 제 말은.
왜냐면 성경말씀이 바로 그 이야기에요. 성경에 이런 내용 있습니다. 받아들이겠습니까? 받아들이죠. 그 좋은 걸 왜 안 받아들여요. 이건 믿음이 아니라니까요. 왜? 그거 받아들이고 지는 자기 할 일 여유만만하게 할 사람이기 때문에 전혀 진지하지가 않아요. 예수님은 진지하게 십자가 졌는데 인간들은 전혀 진지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끝장, 세상 마지막 때가 되었다는 말은 이렇게 정리하시면 알기 쉬워요. ‘어떤 사람을 평가할 기준을 나는 잃어버렸다.’ 내 주위에 있는 사람, 또 어떤 사람, 제3자를 평가할 기준을 나는 잃어버렸다. 왜냐하면 ‘내가 나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나는 끝장이다. 내 자신이 움직이는 끝장이에요, 매일같이. 7월 7일, 7월 6일, 7월 5일. 매일같이 나는 그 날을 통해서 끝장이다, 끝장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럼 매일같이 나는 끝장이죠. 오늘은 오늘로써 끝장입니다. 그러면 내일 아침에 만약에, 그럴 일이 없을 수도 있는데, 만약에 눈을 뜬다면 이건 새로 시작한 거예요. 그게 부활이에요. 그게 부활이죠. 어제 분명히 끝장인데 오늘 왜 또 눈떴지? 아, 이게 내 인생이 아니고 주께서 새 날을 주셨구나. 이렇게 되는 겁니다. 주께서 새 날을 주신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시고 누가 베드로전서 4장 10절을 한번 읽어보세요.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됐습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우리는 어제 부로 끝장났기 때문에. 오늘은 부활의 날이기 때문에. 내가 남을 지적질 하거나 평가할 기준은 내가 잃어버렸어요.
사람이 살면서 피곤한 이유가 뭐냐? 남 지적질 한다고 피곤해요. 남 간섭한다고 피곤하다고요. 보통 남편이 아내한테 그러죠. “당신은 나 만나면 잔소리하는데 내가 힘들지 않겠나.”하면 아내가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당신은 당신 듣는 게 힘드나? 잔소리하는 나는 더 힘들어. 잔소리 들을 만한 짓을 안 하면 될 거 아니야.” 이렇게 나온다고요. 그럼 남편이 있다가 “네가 잔소리 안하면 될 거 아니야?”, 아내가 “눈에 보이는데?”
그러니 두 부부의 상황극은 둘 다 뭐를 안 느낍니까? 끝장이라는 것을 지금 빼먹었어요. 끝장을 삭제해버렸어요. 끝장을 생각 안합니다. 마치 내일도 같이 산다고 일방적으로 지금 우기고 있는 거예요, 일방적으로. 사모님, 목사님, 내일 사십니까? 내일 사시면 오늘 잔소리하세요. 그러나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잘해주세요. 왜? 내일이 없기 때문에. 내일되면 헤어지기 때문에. 실존적으로 헤어지기 때문에.
부부 이야기도 되지만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는 말은 뭐냐? 감사함으로 하라 이 말이죠, 감사함으로. 고맙게, 김호중처럼 고맙소, 고맙다. 하면서 살아가시라 이 말입니다. 뭐 주님의 은혜로 산다는 말만 하지 마시고 진심으로 진정성 있게, 진지하게 “고맙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은 끝장이라는 이 상황을 멀리 두지 마시고 바로 지금 이 순간, 내가 끝장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세요.
우리가 끝장이 아니고 내일이 만약 있다고 한다면 내일은 우리에게 고민거리를 안겨줍니다. 내일 뭐하지? 내일 아침은 뭐 해먹지? 맨날 주부들 생각하는 게 내일 아침 뭐해먹지? 콩나물국 끓이려고 하니까 벌써 두 달째 콩나물국이고 참, 안 먹으면 어떡하지? 볶음밥 해 먹을까? 또 텁텁하다고 할 건데. 아침에 간단히 빵 먹을까? 그 양반 또 빵 안 좋아해. 뭐 이런 거. 꼭 국 한 그릇에다가 반찬 3가지 다 내야 돼. 내일이 있으니까 계속해서 고민이 되는 거예요. 고민이 되니까 내일 아침 되서 밥해주면서 고맙다는 생각보다도 으이구, 참. 진저리나 진저리나. 일찍 안 죽나? 이런 식으로. 지긋하다 진짜. 질린다, 질려, 정말. 귀신 뭐하노, 안 잡아가고. 이런 거.
남 이별할 생각 말고 본인부터 본인과 매일같이 이별하라는 말이에요. 본인이 매일 이별이에요. 나와 이별하라고 하시는 말씀이에요, 이 말씀이. 남 따지지 말고 남 손가락질 하지 말고 니는 매일같이 너하고 이별해. 너 오늘이 마지막 주는 혜택이야, 이 밤이. 투나잇! 이 밤이 너의 마지막 밤이야. 내일? 부활된다? 죽고 난 뒤에? 누구 마음대로 부활돼?
그렇다면 아까 이별 문제를 해결해야 되는데 진짜 주님께서 구원 안 해주면 어떻게 되느냐? 진짜 어려운 문제죠. 이게 참 어려운 문제에요. 믿음이란 두 종류가 있어요. 첫째는 내가 믿는 믿음이 있어요. 내가 믿는 믿음은 마지막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믿음이에요. 가짜죠, 가짜. 믿음도 아니면서 흉내 내는 거예요. 현재 내가 죽을 때를 대비하고 심판 날을 대비해서 미리 대비할 때의 믿음이에요. 그 믿음은 누가 만들어 내냐? 내가 만들죠. 그러니까 이런 믿음은 사람들 앞에서는 그럴싸해 보이지만 막상 이게 예수님한테도 통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주님, 구원할 줄로 믿습니다. 해도 과연 믿습니다 하는 그 고백을 진정한 고백으로 받아줄지 안받아줄지. 뭐 안받아주죠. 받아줄 리가 있어요? 내가 나 단도리한다고 걱정이 돼서 한 이야기를 주님이 들어줄 이유가 없습니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소급해서 주시는 믿음이에요, 소급해서. 우리는 오늘을 사는데 먼저 내일이 되시는 분이 거꾸로 시간을 거슬러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믿음이 있어요. 그런 믿음이 있다고요. 이거는 성령이 와서 주신 믿음이죠. 그러면 성령이 주시는 믿음이냐, 아니냐. 이 믿음조차도 내가 조작한 건지 어떻게 아느냐.
첫째 내가 믿는 믿음, 어제로부터 주어진 이 내 믿음을 어설프다고 실효성 없다고 이것을 공격하고 부정하는 힘이 돼요. “너는 믿는다는 것이 그냥 너 스스로 설득하는 것 밖에 안 돼.” 라고 공격하는 느낌. 다시 말해서 내가 믿는다는 건 아무리 봐도 이건 그냥 몸부림치는 것이라고 느껴질 때 이게 바로 어떤 분으로부터 공격받는 셈이 되거든요. 그 공격을 받는다는 것은 내일을 미리 가계신 분으로부터 아무 실효성 없는 믿음이라고 제거 대상으로 들어올 때 그 덩치 자체가 뭐냐 하면 이게 바로 ‘믿음’이고 다른 말로 하면 이게 ‘관계성’이라고 하는 겁니다. 주님과의 관계성.
이렇게 설명하면 너무 복잡하니까 쉽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비 온다는 소리 듣고 비 올거 같아서 우산을 준비하는 것. 어떻습니까? 이건 내가 대비하는 거죠. 그런데 비 온다는 소식이 없는데, 비가 안 오는 것이 분명한데 우산이 나한테 택배로 전달되었을 때. 그 때 우리는 이 우산이 아무짝도 쓸모없다는 걸 느껴요. 비가 온다는 소식도 없었으니까 우산은 천덕꾸러기가 되고 귀찮은 거고 이거는 쓸모없는 거고 집어던져도 될 것 같고 그런 생각이 들겠죠. 창세기 6장,7장, 8장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가 그런 겁니다, 노아의 방주.
그리고 어제 수요일도 이야기했지만 베드로에게 뭐라고 했느냐 하면 천국의 key, 천국의 열쇠를 준다고 했죠. 베드로의 관심사는 고기 잡는 거예요. 고기 잡아서 소득 얻는 겁니다. 자기의 소득을 챙기는 거예요. 그런데 천국의 열쇠라는 것은 베드로가 주님에게 요청한 게 아닙니다. 베드로 이름이 뭐였습니까? 시몬이죠. 시몬을 ‘반석’이라고 ‘베드로’라고 이름 지은 사람은 본인이 아니잖아요.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이름을 그렇게 바꿨다 이 말이죠. 네가 교회의 반석이 될 것이라 해서 반석이라는 이름을 지어 준거예요, 주님께서.
그러니까 신앙이라는 것은 내가 원치도 않는데 주님 쪽에서 준 게 있어야 신앙이다 이 말이죠. 그걸 오늘날 성령이라 하고 예수님의 영 또는 십자가라고 하는 거예요. 1번, 내가 믿는 십자가는 십자가가 아닙니다. 그 십자가는 내가 죽고 난 뒤에 천당 가려고 대비하는 십자가에요. 보험하나 들어놓는 것 하고 똑같은 거예요, 그거는. 그런데 이미 부활하신 분이 나에게 주는 십자가는 나로 하여금 지금 내가 끝장이라는 인상을 느낀다는 것을 나한테 확신시켜주는 겁니다, 주께서.
너 내일까지 걱정하지 마, 그거 욕심이야. 오늘 사는 것도 과분한 줄 알아라. 그리고 너 가족, 아내, 자식들? 죽을 때 이별한다고? 벌써 어제 이별했어. 어제 이별했다 이 말이죠. 벌써 이별했는데 아침에 눈뜨니까 옆에 자고 있고 애가 있다 이 말이죠. 이건 주께서 부활하게 하신 거지 뭐에요. 주께서 연장시켜 준거죠 뭐.
그러니 이게 뭐냐 하면 내 소유가 아니다 이 말이죠. 누가? 내가. 나부터 내 소유가 아니니까 자식이고 가족이고 전부다 그들을 내 소유라고 할 수 없죠. 내 소유가 아니면 내가 그들을 평할 수 있는 권한이 없는 거예요. 나도 나를 잃어버렸는데 뭐 남까지 오지랖 넓게 간섭할 필요 없잖아요. 내가 남을 평가할 기준을 내가 잃어버린 거예요.
그래서 믿음이 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믿음을 ‘상실’하는 거예요. 이게 믿음이 온 증거입니다. 심형래가 한 유명한 말이 뭐죠? ‘영구 없다’죠. “영구 없~다” 하잖아요. 심형래도 다 복음을 위해 태어났어요. 우리는 믿음 없다는 거예요. 물론 사랑도 없고 소망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왜냐하면 없어야 될 자가 나이기 때문에. 이미 끝장을 통해서 나는 모든 이들과 빠이빠이 한 걸로 주께서는 그렇게 보시고 믿음 주셔서 주위에 있는 가족들 모든 것이 새로 만난 새사람이고 날마다 새로 시작한다 이 말이에요. 오늘 제목은 이에요. 날마다 새로 시작하는 거예요.
여러분한테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시절이 여러분한테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몰랐던 시절,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몰랐던 그 시절. 있죠. 여러분들이 갓 난 아기였을 때. 갓 난 애일 때 여러분들이 부모한테 뭐 달라고 했습니까? 여러분들이 6개월 되어서 이제 겨우 기어 다녔던 그 때 어머니, 아바마마, 젖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했던가요? 그러면 어머니가 말로 하지 말고 서류 결재 올려서 통과하면 내가 젖 줄게. 이런 게 있었어요?
천국에는 누가 갑니까? 누가 간다고 하지 말고 어떤 사람이 못갑니까? 예수님이 누가 간다고 하지 않고 못 간다고 했어요. 어떤 사람이 못 갑니까? 천국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못 가요.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못가요. 성인이 되어서, 어른이 되어서 나라는 것은 어떻게 구축이 되느냐 하면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찾아서 내 안에 비축을 하면서 나라는 것이 점차 점차 형성이 돼요. 소위 성인들, 무엇이 필요하며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내가 가져야 되는가를 요구한다는 것은 나를 따로 설정한다는 거예요. 나는 내가 구성하고 따로 설정한다는 거예요, 내가.
나는 죽어서 하늘나라 높은 자리에 가고 싶다. 이게 누구 토론이냐 하면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 제자들의 토론이었어요. 하늘나라에서 누가 더 높으냐. 그럴 때 하늘나라 개념 자체가 구성이 안 되어 있으니까, 정립이 안 되어 있으니까 주님께서는 어린 아이하나를 딱 데려와요. 데려와서는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못 들어간다. 천국에 갈 수 없다. 일단 천국을 가야 누가 천국에서 높은 자리인지 하는데 애초에 가지도 못하는 거예요.
그럼 천국 갈 때는 뭐냐? 누가 높으냐 누가 낮으냐 하는 남을 평가하고, 남을 평가하면서 그 기준으로 자기를 평가하는 그 모든 자아성이 끝장을 봐야 되겠죠? 그걸 잃어버려야 되겠죠? 누가 높으냐 낮으냐 하는 것은 일단 상대를 평가하면서 발생되는 현상 아닙니까? 따라서 이미 성인이 된 입장에서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가는 방법은 뭐냐?
아까 그 낭떠러지에서 밧줄로 꽁꽁을 다시 해봅시다. 내가 여기 있고 예수님이 여기 계시면 문제는 뭐냐 하면 ‘내가’ 밧줄로 예수님을 묶었다는 거예요. 왜? 예수님이 나한테 필요할 것 같아서.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예수를 소유하고 믿으려고 하는 거예요. 이게 내가 낳은 믿음이에요. 주님은 정말 나한테 필요하다고 믿는 거예요. 그래서 밧줄로 주님을 내가 묶었다.
그런데 구원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고 ‘주님’이 우리를 밧줄로 묶어버립니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로 하여금 낭떠러지에 밀어버려요. 그러면 우리는 으악~! 하겠죠. 오늘 설교제목을 으로 할까. 우리를 이 세상에, 신곡시장 근처 이 동네에 양천구, 주께서 여기다가 떠밀어버렸어요. 우리는 사는 게 ‘으악’입니다. ‘으악’이라고요. 말은 쉽죠. 아이고 뭐. 양식 떨어지면 굶어죽지. 한번 떨어져 보세요. 너 죽이고 나 살죠. 남 떠밀고 지는 살겠다는 거지.
그러니까 양식 떨어지면 내가 죽는 게 아니고 남 죽이고 그 돈을 뺏는 것처럼 그런 본성을 가진 인간이 “내가 주를 위해서 죽겠나이다.” 하는 자기의 큰 소리, 그걸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주님은 베드로의 말을 안 믿었어요. 다른 사람은 다 버릴지언정 제가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베드로는 큰소리쳤죠. 자기 딴에는 그 순간에 진심이었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네가 닭 울기 전에 세 번씩이나 나를 부인할 것이다, 닭 울기 전에.
주님께서 알람장치를 만들어놨어요. 꼬끼오~라고 울 때 벌써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있는 겁니다. 닭이 울었다는 말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것이라는 걸, 네가 어느 수준이고 네 본성이 어떻다는 것을 익히 예수님이 알고 계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베드로의 큰 소리를 듣고 내가 너를 위해서 기도했기 때문에 네가 마귀한테 네 모든 것이 안 빼앗겼다. 내가 기도 안 했으면 너는 벌써 마귀한테 빼앗겼어.
그럼 예수님의 기도가 드러나려면 베드로가 자기의 오기, 자기의 결심, 거기서 출발한 자기의 멋진 기도, 이것은 뭡니까? 다 실없는 소리가 됨을 본인이 인정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주님이 왔다, 성령이 왔다는 말은 내가 하는 무슨 짓도 다 ‘부질없는 것’. 에 나오는 가사에요. 다 부질없는 것. 내가 하는 모든 것이 부질없는 거예요. 나 이제 교회 안 나갈래. 교회 안 나가도 부질없는 거예요. 교회 나와도 부질없는 것. 나 이제 양식 떨어지면 굶어 죽을래. 안 죽어요. 죽을 위인들이 아닙니다, 인간들이. 본인을 몰라도 너무 몰라. 남이 나를 죽이면 죽지. 코로나 와서 죽이면 죽었지, 본인이 스스로 안 죽어요. 죽겠다는 그것도 부질없는 것, 안 죽겠다는 것도 부질없는 것. 주님은 익히 우리 인간을 아십니다. 우리가 어떤 인간인지 압니다.
자, 주께서 우리를 묶어놓고 죽여 버리죠. 죽여 버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묶었던 이 밧줄, 이게 아까 ‘관계’라 했죠. 이게 주님 주신 믿음입니다. 믿음은 선물로 오는 거니까. 선물로 온 믿음이 선물 아닌 믿음을 내 안에서 추방시켜버립니다. 이게 어디서 또 구라떨고 있네. 그 말에 내가 감동받을 줄 알아? 아이고 쓸데없는 짓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남을 평가 못하듯이 나도 나를 평가하지 마세요. 왜? 나는 지금 마지막 날을 보내고 있기 때문에. 나를 평가해봤자 이거 아무 소용없어요. 평가해도 마지막 날이고 평가 안 해도 마지막 날이에요. 끝장이라니까 매일같이. 끝장이에요. 마지막에 먹는 그 저녁 식사는 맛있어요. 이거 먹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또 맛있는 걸 못 먹기 때문에. 그러니까 반찬투정하지 마세요. 마지막 식사입니다. 매일 저녁이 마지막 식사에요. 물론 야식타임이 있으면 그건 약간 미루겠죠. 밤 11시에 치킨 시켜가지고 피자 시켜서 먹으면 그게 또 마지막 야식이 돼요. 물론 이왕 죽는 거 이 야식 먹고 자면 그 다음날은 똥배 나온 뚱뚱보로 부활되어 가지고 보통 고역이 아니죠. 그거 뺀다고 또 애를 쓰죠.
주께서 떠미는 것은 무엇의 반복이냐 하면 그 죽음에서 살아나는 게 아니고 죽음 자체가 살아나는 거예요, 죽음 자체가. 그러니까 ‘나는 죽었다’를 기쁘게 발산하는 매일 매일이 남아 있어요. ‘나는 이미 죽었다’라는 사실을 계속 살리는 거예요. 죽은 것은 무효로 지나간 거고 ‘이제 살았다’가 아니라 ‘죽음’ 자체를 계속 살리니까. 이게 얼마나 신나는 일이에요.
이렇게 말을 어렵게 했지만 사실은 요한복음 3장 6절에 보면 간단하게 되어 있죠.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너가 내게 거듭나야 한다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주님이 하는 일이 거듭남이 빠져버린 일은 주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거듭남 없이, 지금 내가 괜찮은 고백하면 그냥 그대로 천국으로 직행하기를 바라는 거예요. 괜찮은 고백을 했으니까, 괜찮은 선한 일을 했으니까. 다른 사람도 안속아 넘어가는 걸 주님이 속아 넘어갈 리가 있어요? 우리 고백에 주님이 왜 안속아 넘어가느냐 하면 항상 내가 살아있을 때에는 살아있는 내 가치와 의미를 놓치지 않으려고 해요. 이걸 살려내려고 하는 거예요.
우리는 나 살아있음을 살려내려 하는데 주님께서 원하는 것은 ‘나 죽었음을, 나 잃어버렸음을, 내 것이 상실했음’을 계속 살려내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야 모든 일이 주께 범사에 감사함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이게 내 일이 아니고 주의 일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래서 “마지막 때가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라, 근신하라” 이 말 아닙니까? 이것은 네가 정신차리고 살라는 말이 아니고 주께서 어떻게 하는 그것이 너에게 드러나야지, 네가 어떻게 정신차렸다 가 드러나서는 안 되는 겁니다.
우리는 이로써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의 시작점이 아니고, 주님의 일의 시작점으로 다루어지는 거예요. 매일이 물론 나의 시작점이지만 그게 우선이 아니고 주님이 시작한 일에 나도 같이 새롭게 일상이, 하루가, 부활의 일상생활이 또 하루의 시작점이 되는 겁니다. 매일이 새롭죠.
그러면 지금까지 한 것이 이 한 문장으로 정리될 수 있어요. 어떻게 죽어서도 주와 함께 이별이 안 되고 같이 갈 수 있습니까? ‘살아있을 때 나의 빈자리가 마련되어야 됩니다’ 나의 빈자리. 보통 사람들은 내 것으로 꽉 차있어요. 전부다 내 것으로, 이빨부터 해서 머리카락, 모든 내가 갖고 있는 돈은 물론이고 옷부터 과거추억까지. 나의 추억이에요, 남의 추억이 아니고 나의 추억. 나의 기억이에요, 남의 기억이 아니고. 내 걸로 다 되어 있다고요. 그런데 주님께서 성령이 오게 되면 그걸 단절시켜요. 그 흐름을 끊어버려요.
끊어지게 되면 마치 요단강 위에서 물 내려오다가 요단강 건너가는 그 지점에서는 물이 어떻게 돼요? 끊어지죠. 홍해도 마찬가지고. 홍해 바닷물이 이렇게 흐르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건너갈 때 홍해물이 중간에 끊어졌으니까 길이 났을 거 아닙니까? 한쪽 물은 대기 상태. 저쪽도 흘러가지 않고 그냥 대기상태에 있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시간이 순간 고정되어 버린 거예요, 시간이. 시간 따라 이쪽 물 닫았으면 저쪽 물 없어야 되는데 바다가 되니까 쉽게 안되는 모양이죠. 그러니까 중간에 길이 있다 이 말이죠. 중간에 끊어지죠. 끊어지게 되면 중간에 생기는 그 자리가 뭡니까? 빈자리에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에 처음 섰을 때는 아무리 홍해 푸른 바다를 봐도 거기에 빈자리가 보이지 않았죠. 무슨 바다에 빈자리가 있습니까? 이건 말도 안되는 거죠. 바다에 빈자리가 없듯이 우리도 내 인생에 빈자리를 내가 찾을 수가 없어요. 빈자리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노래에는 있죠. 여기 둥지를 틀어 봐. 있지만, 실제로서는 빈자리가 없습니다. 그 빈자리를 친히 마련하시고 그 빈자리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주 앞에 쓰여지게 하는 거죠.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