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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200703b 울산강의-레위기 26장 : 텅 빈 형상자유게시판레위기

20200703b 울산강의-레위기 26장 : 텅 빈 형상
(강의:이근호 목사)

첫 번째 시간에 인간의 육에서 이념이 나온다는 말이 절대적인 신인데 그건 언약이 아닙니다. 내가 율법을 지켰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율법은 나를 율법이 돼버립니다. 내가 뭘 지켰으니까 이제부터 잘 될 거야,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내가 잘 되기 위함이란 목적을 가지고 율법을 지켰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이 어떤 법을 지키고 어떤 시험을 할 때는 내가 잘 되기 위한 목적을 빼놓을 수가 없어요. 그걸 생각 안 할 수 없다고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율법을 지키라, 언약을 지키라 한다면 이스라엘 자체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스라엘 자체에서 율법이 정치적 이념이 되는 겁니다. 모든 백성들 마음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이념, 더 쉬운 말로 명분, 우리가 적들과 싸울 수 있다는 명분이 있는 거예요. 대의명분, 하나의 큰 뜻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힘을 합쳐야 된다는 대의명분용으로 율법이란 게 있지요. 생기게 돼있어요.

그러면 대의명분이 설정이 돼있으면 여기서 어떤 문제가 생기느냐 하면, 율법의 위반이 뭐로 바뀌느냐 하면 정치적 이념에 대한 반발로 해석이 되는 겁니다. 율법을 위반했다는 말은 너, 나 다 지키는 율법을 너는 왜 어기느냐? 이렇게 되면 정치적 이념에 대한 반발, 배신으로 이해되지요. 정치적이란 집단화시키기 위해서 결속하는 이념이란 말이죠.

우리는 이 뜻 때문에 모였다는 결속시키는 이념이 있잖아요. 어느 단체든. 콜센터 같으면 콜센터의 목적은 놀려는 목적이 있습니까? 전화 걸어서 고객 확보한 목적이 있잖아요. 학교의 목적은 아이들 교육시키는 거고요. 야구팀의 목적은 이기는 데 있고, 항공사의 목적은 비행기 띄워서 회사 이익을 창출하는 거고. 전부 다 그런 목적이 있단 말이죠.

그러면 이스라엘에게 율법이 정치적 이념으로 바뀌었다는 말은 이건 율법이 중요한 게 아니고 율법을 지킨 우리들이 중요해요. 감시하겠지요. “너 왜 율법 어겨? 네가 율법 어기니까 우리가 힘들잖아.”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나란히 가야 되는데 너 하나 삐딱하면 그 피해는 네 죄까지 감당해야 되니까 우리가 힘들어 안 된다. 정신 바짝 차리고 뜻과 마음을 하나로 결속해야 된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복을 준다.” 이렇게 된다 이 말이죠.

흔히 집안에서 그런 이야기하잖아요.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너 같은 게 태어나서 다른 사람 속을 썩이느냐. 나가 죽든지 해라.” 그런데 율법이 이렇게 이념화되게 되면 나중에 그 율법을 지키다 사람이 지쳐버립니다. 율법이 이념화되면 우리가 하나로 되기 때문에 에고, 자기밖에 모르는 에고 요새로 전락하고 맙니다. 나를 지키는 요새로 전락해요. 모든 회사면 회사, 가정이면 가정, 교회면 교회, 병원이면 병원, 군대면 군대, 국가면 국가. 나를 지키는 폐쇄적 요새로 다 바뀌어버려요.

그리고 그 안에서 살기 위해서는 율법을 따라야 되는데 종교적 요구에 대해서 사람이 나중에 지쳐버려요. 종교적으로 지키기 위해서 썼던 에너지가 다 소진돼버립니다. 처음에 그 교회에 등록할 때 그 사람들 보세요. 남자는 말쑥한 양복 입고 와요. 구두 신고. 여자는 단정한 옷차림으로 오지요. 2개월도 안 지나서 집에서 입던 옷 입고. 처음에 열시 반에 와요. 열한 시 예배인데. 한 달도 안 가서 열한 시 5분 전에 옵니다. 한 2달 지나면 열한 시 5분 후에 오고.

왜? 법을 지킨다는 것, 내가 세운 내 법을 지키는 에너지가 지쳐버렸어요. 본인에 의해서 에너지가 소진돼버렸어요. 나도 할 만큼 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은 무엇이 옳으냐가 아니라 무엇이 편한 짓인가를 따라가요. 아이들 처음에 엄마 지켜본다고 동영상 시청할 때 바로 앉아 있지요. 엄마가 잠시 자리를 비우면 턱 되다가 나중엔 엎드리죠. 그러다 한 바퀴만 돌면 누워버리고. 뭐가 편한 것인가? 내가 편한 것이 진리다.

이건 율법에 있는 게 아니고 내 몸이 율법보다 더 세게 말해요. 율법이고 하나님이고 네 몸이 최고 중요한 거라고 내 몸이 나한테 그러게 설득한다니까요. 몸에 인 박혔다 하지요. 인 박혔어요. 그럴싸하게 대세를 따라 간다 하지만 조금만 한 눈 팔면 다시 본래의 자기 모습으로 되돌아옵니다. 탄력성이 그만큼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떻게 하느냐? 이스라엘 백성이 집단적인 명분으로 했잖아요. 이것을 이렇게 이야기하면 너무 어려워하기 때문에 이걸 개인으로 적용시켜봅시다. 어떤 사람이 있는데 교회 와서 성경을 봤습니다. 은혜 받은 몇 구절, 다섯 개 정도 뽑아서 이것을 내 인생, 나를 천국 보내겠다고 나름대로 법칙화한 거예요. 율법이죠. 율법을 만들어놓고 나는 이것만 지키면 된다, 라고 생각해요.

이게 뭐냐? 예를 들어서 2019년 12월 18일 날 지킨다 말이죠. 그런데 이미 이게 이 사람한테 뭐가 되느냐 하면, 자기 자신이 잘났다는 걸 보여주는 명분이 돼버리고 이 법칙이 이념이 돼버린 거예요. 예를 들어서 나는 시간을 어기는 사람과는 상대 안 한다. 10분 늦는 사람과 상대 안 한다. 이런 게 있다면 자기는 그걸 지킴으로써 나다움을, 정체성이라 하는데, 나다움을 그렇게 유지하려고 한단 말이죠.

이게 뭐냐? 나에 대한 나의 철칙이에요. 나의 나다움은 철칙이라서 이 철칙을 위반하면 바로 나한테 징계를 하고 나는 나답지 않다고 내가 나한테 자책을 할 정도로 철두철미하게 철저히 지키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하지요. 12월 18일에. 그런데 12월 19일에 선을 봤는데 아가씨가 30분 늦게 왔어요. 그러면 어제까지 있었던 자기의 삶의 대원칙에 의하면 그 여자와는 상종을 하지 말아야 하거든요.

그런데 그 여자가 너무 예뻐. 너무 예쁘지만 자존심이 있어서, “아가씨, 처음 보는 자리인데 30분씩이나 늦게 오니까 기분 나쁜 건 아닌데 좀 거시기 하네요.” 그럼 여자 쪽에서, “그래서 제가 싫다는 거예요. 그럼 갈까요?” “아니. 그게 아니고. 내 쪽에 바꾸면 되지. 30분이고 20분이고 그게 뭐 중요하다고.” 갑자기 12월 18일 다짐을 다 뒤엎어버려요.

또 어떤 할아버지가 2018년도 7월 6일에 나는 손녀 있다고 해서 사진 보여주고 그것만 자랑하는 것 꼴도 보기 싫다. 이 할아버지가 7월 7일에 손자가 태어나고 손녀가 태어나면 지가 세운 원칙을 지가 뒤엎어버려요. 명분 같은 소리하고 있네. 명분 없어요. 이 말은, 내가 율법을 지키기에는 우리가 너무나 우리 자신에 대해서 몰라요. 내가 율법을 지키기에는 율법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거든요. 그런데 율법을 지켰다고 안식일 지켰다고 십일조 했다고 너무 쉽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율법은 어딜 지향하느냐 하면, 이게 오늘 제목입니다. 텅 빈 형상. 율법, 십계명에 보면 나 외에 다른 형상을 섬기지 말라 했잖아요. 자, 그러면 다른 형상을 섬기지 말라. 제가 객관식 문제를 낼게요. 하나님 외에 다른 형상을 섬기지 말라 했는데 다음 중 하나님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말씀에 위배된 것은 뭐냐?

①여호와는 소의 형상이다.
②여호와는 마귀의 형상이다.
③아무런 형상 없이 그냥 백지다. 혹은 말씀만 적었다.
④내 생각에 구멍 났다.

몇 번입니까? ①②는 아니지요. 이건 하나님 형상 아닌 것. 마귀라 했지만 점잖은 인간의 형상, 이것도 하나님 형상 아닌 것, 이거는 잠깐만 생각해도 알지요. 그러면 아무리 형상을 안 만들고 말씀만 적는다. 이건 이슬람이었어요. 이슬람은 모든 성전에 보면 형상은 없고 성경 말씀이나 무작위로 어떤 연쇄적인 도안이나 이미지로 돼있어요. 그런 이미지도 없어요.

④는 뭡니까? 아무런 형상 없이 안 그리는 것이 형상 섬기지 말라는 것의 완성이 아니고 내 생각에 구멍이 나버린 거예요. 인간의 두뇌가 이렇게 생겼다면 윗부분이 날아가 버렸어요. 분화구처럼. 나의 생각의 알맹이가 중앙이 함몰되어 뻥 뚫렸어요. 날아가 버렸어요. 이게 텅 빈 형상이에요.

뭔 뜻이냐 하면, 나 외에 어떤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그 말씀에 대해서 예예 안 만들게요.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 형상을 안 만들겠습니다, 라고 해서 지키는 게 아니고 그 말씀을 누가 지키느냐 하면, 그 말씀을 주신 율법을 주신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다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을 우리를 대상으로 우리를 도화지로 여겨서 자신의 작품을 거기에 남겨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두뇌를 뻥 뚫게 하는 것은 인간의 두뇌가 마저 채워서 있는 이상은 항상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말씀에 대해서 위반 요소가 터져 나온다는 거예요. 인간은 육이기 때문에. 인간은 아무리 시켜도 그 시키는 것과 반대되는 것을 내뿜게 돼있어요. 하는 짓이 말씀보다 나 위주기 때문에 항상 나 좋은 대로 살아요, 그냥. 그러니까 율법은 우리에게 지키라는 것이 아니고 율법은 지키는 분이 따로 있고 그 율법의 결과물로 자기 백성을 사용하겠다는 것입니다.

자, 그 다음이 어렵습니다. 구멍 났다는 것이 ④입니다. 그렇다면 아까 제가 이야기한 논리에 의하면, 나는 머리에 구멍 났다고 2020년 7월 3일에 이렇게 생각했다 합시다. 그러면 내일 7월 4일 되면 이걸 그대로 가져가겠어요, 안 가져가겠어요? 나는 이렇게 구멍 났다는 생각을 가져가겠지요. 왜냐하면 인간은 기억하는 존재니까. 과거 없는 현재는 없으니까.

너, 누구야? 나, 주님한테 구멍 났어. 그게 나야, 라고 그대로 내일 가져가겠지요. 내일 소용없습니다. 이것 자체가 하나의 나의 나됨의 명분과 이념화됐기 때문에. 하루만 지나도 이미 이념화됐어요. 나, 이 정도야, 라고 자기 자신을 어제 구축한 것을 또 가져오지요. 그러면 주께서는 구멍 난 것에 구멍을 더 내는 거예요. 7월 4일에 더 내지요.

이게 뭐냐 하면, 율법에 의한 재편성입니다. 어떻게? 에브리바디 날마다. 날마다 내 삶의 기준은 내가 정하지 않아요. 우리는 자꾸 어제 괜찮았다. 괜찮은 것을 그대로 자기 자신에게 적용시키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겁니다. 나는 교회 오면 앞자리에 앉는다. 앞자리에 앉는 것이 은혜가 되더라. 고집을 계속 부리는 거예요. 새로운 사람(열시 반에 온)이 모르고 앞자리에 앉았단 말이죠.

내 자리라고 교양 없는 분은 없고. 왜냐하면 나의 이념 속에 뭐가 있다? 나는 교양 있다. 이게 자기의 이념이거든요. 이념이고 명분이기 때문에 그런 말은 못하고 속으로, 남의 자리에 앉아서. 물어보고 앉지. 그러니까 겉 다르고 속 다른 거예요. 왜 그런 생각을 합니까? 나는 교양 있기 때문에. 뭘 봐서? 무조건이에요.

그래서 주께서 일할 때는 어떻게 하느냐? 우리에게 딜레마를 통해서 통합시켜요. 우리의 난처함을 통해서. 전에 써먹었던 원칙이 오늘은 먹혀들지 않게 만들어요. 한 때 그런 것 있잖아요. 아버지가 자식을 훈계하면서, “회초리 가져 와.” “아버지 다신 안 그럴게요.” 아버지가 스스로 자기의 바지를 걷고, “네가 나를 때려라. 내가 자식을 잘못 키운 죄로 내가 맞아야 돼.” “아버지 이러시면 안 됩니다.” “아니야. 내가 잘못 키웠다.”

그걸 3년 6개월 전에 써먹었다 합시다. 그런데 지금 또 써먹으면 자식이 아버질 때릴 수가 있습니다. 옛날에 써먹었기 때문에. 한 번 써먹어서 효과 본 것이 자기 정당성, 자기 잘남을 자기 교양 있는 사람이라고 보여주는 내용으로 이미 삽입돼있어요. 자기 명분이고 이념이에요. 죽어도 이것을 하겠다고 우기고 싶어요. 그래야 내가 나다우니까. 머리에 구멍 안 났어. 구멍이 메워졌어. 이게 인간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해도 도로 나로 돌아와요. 잘난 나, 가치 있는 나, 복음 아는 나, 복음 전했던 나, 텅 빈 형상을 텅 비게 남겨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인도하면 그것조차도 묵사발 내버리지요. 묵사발 내면서 내게 있던 교양 자체도 아무짝도 소용없게 만들면서 여기서 새로운 동기, 삶의 이유와 삶의 동기가 부여됩니다. 새로운 삶의 동기에요. 사람이 사는 게 지루하고 짜증나는 이유는 새로움이 없어서 그래요.

교사 처음 할 때 “나는 드디어 밥 먹고 산다. 월급도 왜 이렇게 많이 주는 거야. 신난다. 아이들아 고맙다. 너희들 때문에 내가 밥 벌어먹고 사니 네가 나를 먹여 살리는구나.” 하니까 아이들이 귀엽지요. 1년만 해보세요. 남자 교사는, “이것 말고 다른 거 할 것 없나. 사표 낼까. 그 말썽꾸러기 지겨워서 못 보겠다. 내가 할 게 없어서 이것 하지 미치겠다, 정말. 아이들 꼴도 보기 싫어. 질문 하지 마. 니가 알아서 해.” 물론 교양 있는 명분상 속은 불이 나지만 참는다고.

이것은 교사뿐만 아니고 모든 직장이 다 그래요. 모든 직장이 처음 할 때는 신선하고 새롭게 의욕이 나고 동기 부여되지요. 반복이란 것은 사람을 질리게 만듭니다. 산다는 게 결국 “나란 인간이 평생 이것 하려고 사나? 이것 말고 때려치우면 할 게 없는 줄 아느냐?” 이런 객기 같은 걸 부리지요. 이스라엘이 바로 그런 식이에요.

이스라엘 역사가 계속해서 율법이 추가됩니다. 이스라엘은 추가적인 율법이 주어짐으로 기존의 율법이 아무짝도 없게 만들어요. 어떤 능력이 되지 못하게 만듭니다. 지난 법에 무슨 능력이 있었는데. 아니에요. 항상 내가, 그러니까 지난번에 내가 소유한 명분과 원칙으로 오늘까지 그 식으로 못 살게 만들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매일의 하나님이니까. 어제의 하나님이고 오늘의 하나님이니까.

우리는 어제의 하나님으로 오늘 살려고 해요. 그리고 내일 되면 오늘의 하나님으로 내일까지 더 혜택을 얻으려고 합니다. 주께선 매일 장을 지평을 바꿔요. 매일같이 새 판을 짜요. 주님은 매일 새로워요. 왜? 살아 계시니까. 우리는 기존의 것을 굳히는 경향이 있어요. 이 조시로 쭉 가면 된다는 식으로. 안일에 빠지려고 하거든요. 그러나 주님은 그걸 그 판을 뒤엎어버립니다. 계속해서.

그러면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추가적인 율법으로 해서 기존의 율법은 뭐가 되느냐? 죄가 드러나지요. 죄라는 것은 뭐냐 하면, 죄란 새로움을 모르기 때문에 기존의 것을 고수하기 때문에 죄가 되지요. 이게 육이 되지요. 육은 항상 깨어져야 돼요. 자, 육이 깨어지게 되면 뭐가 될까요? 영이 되는 게 아니고 육이 돼요. 그러면 영은 어디 있느냐? 이 깨어짐에 있어요. 이 육에 대해선 감사가 돼버려요. 깨어지고 난 뒤에 감사가 와요.

그러나 인간이 기존에 자기가 실력을 발휘하게 되면 자기가 애썼다, 노력했다, 열심히 했다. 자기자찬, 자화자찬만 있지 누구한테 대한 고마움이란 없는 거예요. 성도의 특징은 고마운 거예요. 성도는 감사하고 고마운 것이지 본인이 본인 스스로 격려하고 노력하는 것은 성도가 아닙니다. 홀로 사는 게 아니에요. 누가 상대가 있어야, 고맙게 하신 어떤 분이 있어야 관계란 게 성립됩니다.

그러면 고마운 분이 새로운 게 오기 전에 만약에 오늘 것으로 내일까지 온다면 그때 이스라엘은 장애자가 되지요. 딜레마로 인하여 늘 장애자가 됩니다. 장애란 것은, 새로운 것은 그들만 느끼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언어로 표현 못해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말해야 되는 이스라엘, 이것이 다른 사람들 보기에는 장애자가 돼요.

“말을 해라, 말을.” “이건 말을 할 수가 없어. 말을 할 수가 없으면서 자기 할 말 다하면서 네가 이 말 듣는다고 해서 믿을 네가 아니지. 이건 주께서 정말 나를 박살냈기 때문에 내가 느낀 거야.” 그럼 듣는 사람이, “그게 뭔데?” “아니, 말을 할 수 없다니까, 그걸.” 자기변호나 자기옹호를 할 수 없단 말입니다. 나, 이렇게 잘났어, 라고 할 수 없어요. 왜? 나를 박살내는 나를 텅 빈 형상으로 만드는 그분이 매일같이 새롭게 나를 다루기 때문에 그래요. 다뤄졌다고 인간 되는 건 아니고 육에서 나온 건 육이에요.

하지만 감사한 건 뭐냐? 내가 깨뜨릴 수 없는 걸 깨뜨렸다는 거예요. 내 고집을 잘난 나를 쓸모없는 인간으로 만들었다는 그 점이 고귀하고 감사한 거예요. 정말 감사한 거예요. 사람이 언제 감사하느냐? 더 준다고 돈 주고 복 준다고 감사하지 않습니다. 진짜 감사한 건 뭐냐 하면, 내가 죄인인 걸 알 때 너무나 감사해요. 모든 것이 과분한 은혜인 것을 하나님의 선물인 것을 한꺼번에 밀려오지요. 언제? 오늘. 그런데 내일까지 써먹지 마세요. 어제 분명히 죄인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내일 되면 내일치의 새로움이 또 있어요. 내일 되면 깨질 일이 또 있다니까요. 깨어진다는 말은 이 세상에 내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누가 살아 있다, 내 곁에 누가 살아 있다? 부활하신 주님이 살아 있다는 거죠. 보이지 않지요. 보이지 않으니까 남한테 이야기하면 병신 소리 듣는다니까요. “니 이야기해. 왜 안 보이는 이야길 왜 해.” “너는 그래도 나한테는 느껴져.” 그래서는 친구 사이에 대화가 될 리가 없지요.

그 다음 진도 나갑니다. 그럼 새로움이 뭐냐? 새롭다는 것은 깨어진다는 말인데 새로움이란 의미의 추가입니다. 내일 되어서 새롭다는데 기다려봐다 하나도 안 새로워요. 그렇게 하루가 지나다보니까 이미 갖고 있는 가운데 내가 놓친 감사거리를 찾게 해주시는 겁니다. 분명히 주실 때 건성으로 받았는데 따져보니까 그게 얼마나 고귀한 것을 주셨는지를 깨닫게 되는 거예요. 우리의 목숨부터 해서 햇빛과 공기……

유월에 한참 더울 땐데 서늘한 것, 여러분들은 예상했습니까? 얼마나 감사해요. 쾌적하잖아요. 환경이. 비 온 뒤의 서늘함. 감사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에어컨 틀고 선풍기 틀고 했지만 이런 쾌적함은 없어요. 그냥 아무것도 안 했는데도 쾌적함이 일괄적으로 주어질 때 감사하지요.

그리고 네가 이런 짓을 하다니 너는 죽어 마땅해, 라고 했는데 그 죽어 마땅한 인간으로 인하여 내가 몰랐던 내가 얼마나 혜택을 입고 있는지 나한테 죽어 마땅한 그 인간으로 인하여 내가 혜택을 입고 있다는 사실, 욕 얻어먹는 사람이 희생해서 욕 덜 먹으려고 꼼수 부리는 우리가 혜택을 입었을 때 그 사람한테 굉장히 미안한 일들이 문득 생각납니다. 오늘 생각나지 않던 사람이 문득 생각날 때 그것은 바로 추가된 의미를, 새로운 물건이 들어와 추가된 게 아니라 현재 있는 모든 것이 녹녹치 않은 감사거리가 가득 들어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죠.

그래서 이 이야기를 이렇게 하면, 개별적 의미는 전체 의미와 함께 일어난다. 뭐냐 하면, 공사하면서 이것만 파라했는데 곡괭이로 팠는데 시멘트가 옆에 있는 것까지 한꺼번에 다 드러난 것 있지요. 자식한테 칭찬하면서 네가 이번에 수학을 잘했구나, 라고 하는 순간 “엄마. 내가 수학 잘하기 위해서 일찍 세수를 한다. 엄마는 그것 몰랐잖아.”

그러니까 수학 잘하는 것과 일찍 일어나 세수부터 먼저 하는 새로운 의미가 같이 드러났지요. 일찍 일어나기 위해서 내가 시간 맞춰 잠을 잤거든. 모든 게 연계, 연계, 연결됐다는 거죠. 한꺼번에 다 등장하는 거예요. 어떤 특정한 것만 잘했다는 게 아니라 다 잘한 것으로 등장하듯이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할 때 예수 믿는 것만 받는 게 아니고 살아온 모든 죄 지은 것, 우리가 성질부린 것, 교회 농땡이 부린 것까지 주님의 죄 용서와 유관하고 관련돼있다는 사실이 다 드러나게 되지요.

전에 그런 것으로 스스로 가슴을 치면서 아이고, 인간아. 내가 등신이다. 왜 그런 짓을 했을까, 했는데 구원받고 보니까 등신짓 없었으면 구원 못 받을 뻔했어. 끊어진 게 없어요. 모든 게 다 그랬어야 하는 일들만 일어나요. 천국 가기 위해서 일어날 일들만 일어났어요. 손가락을 깍지 끼게 되면 한 손가락을 못 떼요. 같이 일어나니까.

난 너 같은 친구 없었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없어져야 친구 때문에 오늘날 내가 된 거예요. 모든 것이 주께서 다 엮이고 엮이게 하신 거예요. 저 자식은 죽어야 돼, 하지만 내가 구원받은 걸 생각해보세요. 그 엮인 범위를 더 알아가는 게 새로움이에요.

26장 13절은 애굽 땅에서 인도했다는 건 아까 했고 14절을 봅시다. “그러나 너희가 내게 청종치 아니하여 이 모든 명령을 준행치 아니하며 나의 규례를 멸시하며 마음에 나의 법도를 싫어하여 나의 모든 계명을 준행치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배반할진대 내가 이같이 너희에게 행하리니 곧 내가 너희에게 놀라운 재앙을 내려 폐병과 열병으로 눈이 어둡고 생명이 쇠약하게 할 것이요 너희의 파종은 헛되리니 너희의 대적이 그것을 먹을 것임이며“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아닐까요? 필히 일어나지요. 왜? 하나님의 율법을 위반했을 때와 지킬 때가 같이 엮여졌기 때문에 그래요. 전에 설교시간에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선과 악을 뗄 수 없게 돼있어요. 선이 있는 곳에 악이 있고 악이 있는 곳에 선이 있어요. 인간은 선악 때문에 자기 내부로 아주 미쳐버리지요.

왜냐하면 우리는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하잖아요. 그런데 이게 분화가 돼요. 분화가 되면 선한 쪽에서 또 선이 있고 악이 나와요. 그래서 우리는 순결한 선, 순수한 선, 백 퍼센트 선을 위해서 악을 버리잖아요. 이 선을 택한 순간부터 예상 못한 악이 또 나오지요. 여러분, 이런 경우는 일상입니다.

전기 든다면 전기청소기 안 쓰고 빗자루로 청소했다. 나름대로 자기는 그 결정을 선이라고 하겠지요. 빗자루로 청소할 때 빗자루에서 빠지는 것이 먼지보다 더 많은데요? 그건 빗자루 살 때 몰랐지요. 왜 그걸 몰라, 하지만 우리가 하는 일은 우리가 결정하는 안에 어떤 부정이 있는지는 그 누구도 몰라요. 주께서는 그걸 선택하게 해서 내가 선택한 속에 내가 싫어하는 원치 않는 악도 같이 딸려 들어왔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새로움으로 주는 거예요. “봐라. 네가 하는 일이 제대로 되는 일이 있더냐? 짜증나지.”

대표적으로 흔한 예가 뭐냐 하면, “여보. 코로나 19 때문에 신경도 쓰이는데, 요새 코로나블루라 하지 않습니까. 이번 토요일에 간절곶 놀러 가자. 김밥 싸고.” 이런 선택이 있을 때는 어떤 악이 기다릴 줄 상상도 못했지요. 김밥 먹고 가족끼리 룰루랄라 다정히 올 줄 알았지요. 남편이 막상 김밥 보더니, “김밥 꼬라지하고는. 김밥 옆구리는 왜 터졌느냐.” 가기 전에 했던 부부싸움을 모래사장에서 하는 거예요. 이건 예상 못한 악이에요.

대충 화해하고 오는데, 그만하자. 당신 먼저 그만 하면 가만있겠다. 그래서 김밥에 대해선 일체 문제 삼지 않기로 했는데 오다가 남편이 성질나게 되면 화풀이를 운전으로 풀거든요. 운전하면서 부부싸움 제2라운드가 시작되는 거예요. 당신 어지러워서 멀미난다. 운전대 못 맡기겠다. 이게 뭐냐 하면, 매사가 어떤 선택을 했을 때 어떤 악이 낄지 우리가 모르는 겁니다. 알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선을 선택할 때는 내가 행복하기 위한 명분이나 이념에 맞추어서 양보할 건 양보했거든요. 이 정도 양보하고 이 정도면 가정에 평화가 왔겠지. 그건 어제의 명분이에요. 어제의 내 삶의 기준으로 적용했는데 오늘 주께서 새로운 기준을 매길 줄이야, 생각도 못했지요. 앞으론 김밥 옆구리 터져야 된다. 새로운 명분이 등장한 거예요. 그러면 다음에 놀러 갈 때 김밥 안 터지면 됩니까? 다른 게 터지는데.

그러니까 사람이 언제 감사하느냐 하면, 예상 못한 일이 왔을 때 우리가 예상하게 되면 항상 짜증나요. 뭔가 무서워요. 그러나 예상 안 했는데 낯선 사건이 터져버리면 그게 기쁨이 돼요. 놀라 갔는데 예상보다 더 재밌고 날씨 좋았고 갈 때부터 올 때까지 화기애애했어요. 이건 예상 못했어요. 예상 못했다는 말은, 내가 선이라는 그 선을 넘어서 선이에요. 내가 이 정도하면 선이라고 행복이라고 봐주는데 그 선을 넘어서 행복이 온 거예요.

그래서 그 가족들은 앞으로 이 자리에 다음 토요일에 또 오자고 하거든요. 이미 넘어선 행복이 지금 나의 예상 안으로 들어와 버렸어요. 우리 다 같이 가는 거야, 했는데 다음 토요일에 역시 날씨 좋았고 음식 김밥 옆구리 터지지 않고 정말 다 좋았는데 큰 애가 하는 말이, “나 놀러 가기 싫어. 친구와 놀러 갈 거야.” 세상에 예상 밖에 삐딱 선이 등장했네요.

그래서 이건 인간은 항상 자기 자신의 선하기 위해서 내 결정이 옳았음을 위해서 이게 자기 행동의 동기부여가 되는 거예요. 평소에 인간의 삶이. 그걸 제가 처음에 그게 육이라고 한 거예요. 그래서 왜 육에서 나온 게 썩어진 것 밖에 안 나오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인간은 백날 최선을 다해봐야 육에서 육이에요.

깨뜨려주는 것, 예상 밖 깨뜨려주는 그것이 하나님의 인간이 생각 못한 예상 밖의 인위적이지 않고 작위적이지 않고 비인위적인 것, 그걸 보통 우연 또는 우연한 사건. 주님이 선물을 줘요. 우리가 이렇게 있으면 주님께서 텅 빈 형상, 어떤 율법을 지켜도 인간은 텅 비게 돼있어요. 형상에 이르지 못해요. 텅 빈 형상 속에 주님이 나타나서 우리에게 오게 되면 우리가 알고 있던 모든 선입관들 예상 밖의 기대를 없애고 깨죠.

깨고 주님에 대한 감사와 고마움으로 채우게 되는 겁니다. 밑에는 육이죠. 위에는 영이 오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이 만약에 7월 2일이라면 7월 3일도 그렇게 하고, 7월 4일도 그렇게 하고 항상 고맙고 감사한 것은 내가 예상 것 말고 다른 요소를 여러분들의 일상 가운데 있어요. 성도라면 있어요. 그걸 찾아보세요. 내 계획대로 말고 계획대로 안 됐는데 주께서 내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을 때 그건 주도권이 나한테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 내게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신호 같은 겁니다. 시그널 같은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은 종교적 어떤 요구나 종교적 에너지가 소진될 이유가 없지요. 필요가 없지요. 예를 들어서 이런 겁니다. 26장 16절에 보면, “폐병과 열병으로 눈이 어둡고 생명이 쇠약” 할 때 내 몸을 보면서 내가 죄를 지어서 폐병과 열병으로 눈이 어둡게 되었구나. 이건 잘못된 선악구조에 의한 해석입니다.

인간에겐 선악구조가 있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면 선이고 율법을 어기면 뭐로 본다? 악이다. 그래서 나한테 폐병이 왔다. 이거는 내가 율법을 어겼기 때문이라고 보잖아요. 이렇게 되면 자기가 텅 빈 형상이 아니에요. 머리가 텅 비지 않았어요. 자기결정을 또 하는 거예요. 그게 아니고 폐병과 열병이 온 것은 네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언약이 언약대로 주어지기 위해서 온 거예요. 언약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일체 못 지키기 때문에 폐병 드는 것은 마땅해요.

지금도 우리는 마땅히 폐병 돼야 되고 마땅히 코로나 19 돼야 돼요. 그런데 열이 36.6도거든요. 아까 재봤어요. 식당에서. 아직까진 그것 아니잖아요. 왜 아닌 거예요? 왜 아닙니까? 이것 모르면 오늘 강의 헛수고인데. 왜 내가 지금 코로나 안 걸린 거예요? 침 튀겨도 괜찮아요. 확진자 아니기 때문에.

그러면 왜 안 걸린 거예요? 이게 해답인데. 의외지요, 의외. 내가 잘나서 안 걸린 게 아니고 예상 밖이죠. 성도는 이렇게 사는 거예요. 여기서 벌칙이 주어질 때 내가 무슨 나쁜 짓했으니까 그것 고치겠다. 이렇게 나오지 마세요. 고치겠다는 그것도 선악에 매여 있는 거예요. 자기의 미래를 자기가 결정하겠다는 그것은 아직도 그 자체가 육이고 나는 멀쩡하다고 우기는 겁니다. 나는 내 식대로 살겠다. 일종의 지난날의 명분과 이념을 고집하는 거예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예상 밖을 찾아야 돼요. 아까 운전을 했다. 내가 운전을 좋아서가 아니에요. 주께서 천사가 와서 지켜준 거예요. 천사가 지켜주는데 어느 날 앞 차를 박았다. 차 한 대만 박았잖아요. 천사가 지켜줘서. 두 대 안 박았잖아요. 사랑하는 자식들이나 아내나 남편이나 우리는 다 내 덕이고 내가 조심했고 내가 착실한 덕이라고 하지 마세요. 그거는 자기를 선한 자로 보는 거예요.

그러나 아까 혼인잔치에 선한 자나 악한 자나 다 데리고 와. 다 무효에요. 하나님의 피 묻은 예복 없이는 천국 못 갑니다. 혼인잔치 참석 못해요. 선이나 악, 그것 다 헛짓이에요. 남을 욕하는 환경에 우리가 들어가 보세요. 우리도 그 짓하기 마련입니다. 여러분 법무부 장관 시켜줘 보세요. 성과는 내야 되겠지, 누구 하나 잡아야 되지. 큰 걸 잡아야 역시 대단한 장관이란 소릴 듣지요.

인간은 어떤 자리에서나 위치에서나 자기를 잊지 못합니다. 자기 잘남을 포기 못해요. 이게 육이에요. 이게 썩어질 거예요. 썩어지면서도 아직 건장한 걸 보면 이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겁니다. 나 잘남보다 더 우선되는 것은 언약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은 피거든요. 어린양의 피.

그 언약을 언약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마땅히 저주받아야 되고 마땅히 못난 존재고 마땅히 지 고집 밖에 모르고 마땅히 지가 나쁜 짓하면 변명으로 일관하는 아주 자기 자신은 무조건 잘 돼야 한다고 우기는 세상은 다 내 중심으로 돼야 된다는 말도 안 되는 그러한 의식 되돌아보면 그러한 죄마저도 주께 감사거리가 돼야 됩니다. 못났는데 이 못난 걸 구원해주시다니요. 주님의 언약 찾아오심을 감사합니다.

이스라엘은 바로 이처럼 남한테 이야기할 수 없는 일종의 우리가 주님 앞에 장애자 같아요. 뻔한 데 인간의 힘으로 설명할 수 없어요. 하지만 은혜는 은혜대로 받고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언약이 우리에게 주어졌고 그 언약의 마지막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야기하신 거예요.

끝으로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육을 심는 것은 썩어진 것을 거두고 영을 심는 것은 영생을 거둔다 할 때에 우리가 심을 게 아무것도 없어요. 하지만 그 사실, 그러한 언약, 성령을 심은 자는 영생을 거둔다는 그 언약을 우리가 인정을 하고 수긍이 된다는 사실은 이미 그 사람은 영적인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한데 주도권이 없고 인간들에게 주도권이 없는데도 우리는 그동안 눈에 보이는 사람만 상대했고 겸사겸사 내 잘난 척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주여, 하나님은 언약에 주안점을 두는데 우리는 나에게 주안점을 두었습니다. 이제는 바뀌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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