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2장 49절 (노선변경) 200616a-이근호 목사
강남-누가복음 2장 49절 (노선변경) 200616a-이근호 목사
오늘은 누가복음 2장 40절에서 52절까지 하겠습니다.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 점점 자라난다. 그 다음 구절은 12살 됐을 때의 일입니다. 절기를 맞아서 예루살렘에 부모와 같이 가게 됐는데 절기를 다 끝나고 난 뒤에 부모는 집으로 돌아왔지요. 하룻길을 걸어서 왔는데 한참 오다보니까 뭔가 빠진 분이 계시죠.
12살 먹은 예수님께서 빠져있었습니다. 화들짝 놀란 부모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명절날 유월절날 모였겠습니까. 무려 사흘 동안 허비하면서 찾았습니다. 사흘 동안 찾았는데 드디어 찾기는 찾았어요.
어디서 찾았느냐 하면 성전에 계시는 예수님을 찾았고 그 열두 살 먹은 아들 예수님을 만나고 부모들은 상당히 반가워했는데 반면에 예수님은 그 부모가 놀라는 것을 보고 도리어 의아해했지요. 그래서 대화 자체가 의미가 동일하지 않는 대화를 주고받습니다.
어떻게 너는 여기 있느냐? 라고 부모가 이야기했고 예수님 답변하기를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는 것이 당연하지 그걸 어떻게 이상하게 여기십니까?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대화가 핀트가 안 맞는 거에요. 그러고 난 뒤에 같이 집에 내려와서 나사렛 동네에 다시 왔었습니다. 오고 난 뒤에 그 뒤에 52절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예루살렘이라는 동네가 여기 지중해가 있고 여기 갈릴리 호수가 있고 갈릴리 호수에 흐르는 물이 요단강 물이고 그 다음에 여기 사해가 있습니다. 사해는 갈릴리라는 호수보다 무려 10배나 더 큽니다. 10배 더 커요. 사해에서 갈릴리까지 100km쯤 되고 사해 여기 끝부분에 산으로 올라가는데 산이 있는데요 산 끝부분에 여기에 예루살렘이 있습니다. 여기 예루살렘이 있어요.
여기가 갈릴리고 갈릴리 이쪽 동네를 가지고 나사렛이라고 이렇게 합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나사렛 여기에 살았거든요. 태어나기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지만 여기 예루살렘의 남쪽의 8km 지점에 베들레헴이 있어요. 꼭 제가 가본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제가 가봤습니다.
나사렛 동네에서 유월절 맞아서 무수한 사람들이 왔다가 다시 돌아가면서 예루살렘에서의 이 일이 12살쯤 되었던 그 때 일입니다. 이 본문에서 특정 지을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이 부모의 혈연관계의 한계에서 벗어났다는 겁니다. 여기 40절에 보면 “예수님이 자라고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이렇게 시작했거든요.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지혜가 충족하다는 말은 부모하고 혈연관계가 이제는 결별수준에 들어가게 되었다. 지혜가 충족하다는 말은 혈연관계 쪽에 속하느냐 아니면 하나님 쪽에 속하느냐에 대해서 하나님 쪽에 속하는 인물로 뚜렷해졌다 분명해졌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첫 번째는 뭐냐 하면은 지혜의 충족, 지혜가 점점 더 커가는 것. 지혜가 충족된다는 말은 혈연관계의 한계점을 보여준다. 혈연관계의 한계점을 보여주는 겁니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은 두 번째는 예수님이 부모를 찾지 않았다는 점이에요. 부모가 예수님을 찾았다. 부모가 먼저 예수님을 찾았고 예수님이 부모 잃어버렸다고 호들갑을 떨지 않았던 거에요.
예수님이 부모 없다고 서러워 찔찔 울거나 파출소에 연락하거나 그런 것 없었다는 겁니다. 부모 찾기 위해서 그렇게 아등바등 애를 쓰지 않았던 거에요. 이것은 바로 지혜가 자라나면서 예수님의 세계가 부모의 세계보다 더 우열하다, 더 크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세계가 부모의 세계보다 더 큰 거에요. 결코 예수님이 이런건 아니다 이 말이죠. 부모의 세계 안에 예수님이 종속되거나 속해 있지 않다 이런 뜻이에요.
쉽게 말해서 부모의 세계의 단위가 이 단위가 있다면 예수님의 세계의 단위는 더 큰 단위, 이것은 상대적으로 부모의 세계는 작은 단위, 예수님은 큰 단위를 생각하는 거에요. 지혜가 자라나면서 예수님의 세계는 부모세계를 벗어나고 있습니다. 더 증가하고 있어요.
특히 부모가 3일 동안 부모가 예수님과 떨어져있었거든요. 떨어져있는 사이에서 이 예수님한테는 부모는 없어요. 부모는 없는 존재에요. 그런데 3일 동안 떨어진 사이에서 부모한테는 아기예수가 12살 먹은 예수님이 계속해서 결핍된 자리를 메꿔야 된다고 생각한 그 세계를 부모는 고수하고 있습니다.
왜 내 세계에 너 하나 빠져서 나로 하여금 결핍을 느끼게 하느냐 이 말입니다. 네가 있어야 충족되는 이 세계에 네가 내 눈에 안보여서 빠져버리면 나는 결핍을 느낀다는 거에요. 그런데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 전혀 결핍을 느끼지 않는다는 겁니다.
부모를 부모로 생각도 안하고 있어요 예수님은. 우리 보기는 좀 되바라졌다고 이렇게 생각하는데 성경에서는 되바라진게 아니고 지혜가 충족됐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갈수록 지혜가 커졌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단위 또는 차원, 레벨. 인간 단위에서 주님이 그냥 신체적인 키만 몇 센치 더 큰 게 아니에요. 줄자 해가지고 애들 키 잴 때 이것만 하는게 아니고 우뚝 솟아버린 거에요.
인간들이 따라올 수 없는 인간세계에서 그냥 지붕에 빵구난 거에요. 그냥 뚫고 하늘까지 쭉 솟아올라간 거에요. 예수님이 갖고 있는 지혜가. 다시 한번 적을게요. 예수님에게 누가 없다? 부모는 없습니다. 없습니다. 몇일 동안? 3일 동안. 예수님에게 부모는 없는 거에요.
그러면 부모는 없다고 할 때에 이 부모는 어떤 관계냐 하면은 예수님을 어떻게 봤느냐 하면은 혈연관계로 봤지요. 핏줄관계로 봤다. 그냥 육의 관계 핏줄관계로 봤지요. 그러면 예수님의 지혜 앞에서 부모는 없다는 말은 이건 뭐냐 하면은 내가 없다에요. ‘내가 없다’. 앞에 뭐 하게 되면 나에게 내가 없다는 쪽으로 주님의 지혜가 가동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 주님 저 여기 있습니다 할 때 주님은 너라고 하는 너는 너에게 없는 걸로 간주해요. 왜냐하면 나로 시작하는 그 어떤 것도 점점 내가 사라지기 때문에. 내가 없는 것은. 내가 없어져야 되는 것은 결국 끝에가서는 나의 끝지점에서는 나라고 여겼던 그저 꾸준히 나라고 여겼던 그 세월. 70이면 70, 80, 90, 100세.
결국은 내가 끝지점에 가면 내가 있어요? 없어요? 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내가 없지요. 그래서 이걸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어차피 없다. 누가? 내가 없다. 나는 어차피 없는 거에요. 내가 아무리 시작해도 나라고 하는 것은 소실점을 갖는다. 또는 없음에 수렴된다. 사라진다 이 말이에요. 없어요.
서로가 남들 보기에 서로가 서로를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바라볼 수 있는 세월이 몇 년 되겠어요. 이웃집에 누가 산다. 나는 그 이웃집에 내가 있다. 둘이 바라보는 것이 40년 됐다. 그런데 어느날 보니까 이웃집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리고 한 15년 뒤에 나도 죽었다. 결국은 다른 장소에 제3자가 65년쯤 후에 가보니까 서로 이웃집 마주보던 그 두 사람 다 어디 갔습니까? 없지요.
서로 마주보면서 친하게 지내고 떡도 나누고 뭐 이렇게 사이좋게 지내는 두 사람 다 제3자가 보기에는 둘 다 그 현장에서는 65년 이후에 다 없어지는 거에요. 제3자도 그런데 주님 보시기에 내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고집부리는 것은 주님은 정말 참 웃기네 하시는 겁니다. 네가 있다니. 네가 어디 있지? 너는 없는 존재야.
보통 성경에서 내가 없다를 내가 없다고 표현하지 않고 네 이름은 없다 이렇게 합니다. 이 세상에 계속 가는 이름은 누구 이름밖에 없느냐 하면 주의 이름 밖에 없어요. 주의 이름만 있지 우리 이름은 없습니다. 내 이름을 걸고 이런 거 없어요. 이름이 있다는 것은 그 이름과 상응되는 이름과 연결되는 어떤 몸체가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이름이 있다는 것은.
초등학교 1학년 들어오면 이름표를 달지요. 그런 노래도 있잖아요. 사랑하는 사람이 이름표를 붙여 내 가슴에. 이름표를 붙여봐. 그런 노래도 있잖아요. 네 가슴에 내 이름 들어가게 해라 이런 뜻이거든요. 확실한 사랑의 가사를 계속 이야기할 필요는 없지만.
이 세상의 모든 이름은 그게 사라질 이름인 것을 알리기 위해서 영원한 이름이 따로 이렇게 찾아온 거에요. 그래서 뭐 이름이 있어야 내 이름으로 구원받지요. 이 세상에 그리스도 이름 외에는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길이 없다. 부처? 없는데요. 공자? 없어요. 소크라테스? 없어요.
인간이 회상할 뿐이지 그 이름과 상응되는 존재는 어디 지금 가리봉동에 삽니까? 소크라테스가? 없잖아요. 없어질 이름은 없는 거에요. 그냥. 이순신 장군도 마찬가지고 윤동주도 마찬가지고 소위 뭐 김구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주님을 아는 사람은 본인이 없는 존재, 죽은 존재가 되는 거에요. 없는 존재가 되는 거에요. 어차피. 오늘 제목을 ‘어차피’ 할까?
어차피 없는 존재, 어차피 없어질 존재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약간 앞당겨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내가 없는 존재라고 나 자신을 없다고 여긴다면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있다고 보겠습니까? 없다고 보겠습니까? 없다고 보는 거에요. 다른 사람에 대해서. 그냥 뭐 귀신으로 보는 거에요.
왜냐하면 내가 나 자신을 뭉게구름 같은 귀신으로 본다면 인간은 내가 나를 보는 관점으로 내가 타인을 보게 되어 있어요. 내게 내가 없다면 너도 없는 거죠. 너도 없는 거에요. 어떤 남편이 막 술 먹고 와가지고 땡깡부리고 자기 아내한테 횡포질하면서 이렇게 할 때에 복음을 아는 아내의 적절한 조치와 태도는 너는 없어. 너는 없는 거야.
문 열어달라고 하면 실례지만 누구세요? 이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없는 존재기 때문에. 누구세요? 그러면 너무 없다고 한다면 그러면 여기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 혼자 유월절 갔고 혼자 그 성전에서 성경도사들과 이야기했고 혼자 집에 돌아왔다 이렇게 돼야 되는데 여기에 왜 부모가 등장하느냐?
그것은 이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실과 판단의 차이입니다. 사실과 판단의 차이라고 하는 것은 쉽게 말해서 지식과 이해의 차이에요. 지식과 이해의 차이인데 지금 그 예수님이 부모를 보는 것, 예수님이 우리 자신을 보는 그 이해와 판단 그것은 우리가 모르죠. 모르는데 여기에 우리를 대표해서 누가 등장하느냐? 이 판단 자리에. 예수님의 부모가 등장해요.
부모가 등장해서 부모가 12살 먹은 자기 아들 예수님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판단을 할 게 아닙니까?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아느냐. 내가 너 찾기 위해서 사흘 동안 헤맸다. 난 여태까지 네가 따라온 줄 알았더니만 하루 길 지나서보니까 안 따라와 가지고 다시 빠꾸해가지고 back 해가지고 예루살렘에 다시 왔다. 이 많은 사람들 중에 찾는다고 애먹었다라는 구구절절 이야기를 할 때 그거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은 부모가 갖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이해와 판단에서 나오는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 인간의 이해와 판단보다도 어디 있느냐 하면은 사실, 진리. 무엇이 실제냐에 관심이 있어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내가 아버지 집에 함께 있을 줄 몰랐습니까?” 라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이것이 예수님의 자신이 하는 행위가 사실이 사실대로 진리가 진리대로 마땅히 할 일을 내가 했을 뿐입니다 이렇게 나오는 거에요.
그런데 이 부모의 판단과 그리고 예수님의 사실과의 딱 이 무대에서 만나고 보니까 이 성경 대목을 보는 모든 인간들은 누구를 이해하고 싶어요? 누구 편에 서고 싶습니까? 예수님의 말이 쌩뚱 맞고 너무나 낯설고 예수님의 저 발언을 어떻게 이해해야하지? understand해야 하지? 오히려 예수님께서 정말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는 거 같아요.
적어도 나이가 12살 먹고 지혜가 시근나고 경상도 말로 시근나고 철이나게 되면 어머님 아버님 죄송해요. 제가 잘못되었어요. 제가 제 생각만 했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했는데 부모님 생각을 했더라면 걱정 끼쳐 드리는걸 미처 생각못했습니다 하면서 생각의 의자에 앉아가지고 아버님 어머님 잘못했어요. 절 때려주세요.
뭐 이렇게 해줘야 부모가 하는 생각의 편에 서 있는 우리 입장에서는 그게 진짜 지혜가 자라는 거고 철이 나는 거고 나이가 12살이나 먹었으니까 시근있다고 생각하는데 12살 먹을수록 갈수록 이상하게 완전히 다른 길로 가는 거에요. 사춘기인가요? 어긋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말이죠. 거기에 대해서 제가 이미 답을 드렸어요.
뭐냐 하면은 바로 예수님한테는 인간은 없는 존재, 없음이에요. 부모가 결핍을 느껴서 있어야 되는데 있을게 없고 없는 것을 내가 전에 있었던 갈 때는 분명히 부모와 3명 올라갔는데 올 때, 일가친척 같이 갔겠지요. 오는데 보니까 뭔가 허전하더라 이 말이죠. 있음이 제대로 충족되지 못해서 그 있음을 마저 채우기 위해서 거꾸로 다시 예루살렘으로 찾으러 갔지만 예수님은 홀로 아버지 집에 있음으로 이미 충족된 거에요.
이게 뭐냐 하면은 예수님의 부모들은 자기 이해에 근거해서 실제와 현실과 사실을 지식을 사실을 일방적으로 이렇게 결정짓고 있다는 거에요. 주님 생각은 전혀 주님 생각으로 건너가지를 못하고 있어요. 못 건너가고 있어요. 기존의 혈연관계에 있어서 줄곧 전통적으로 내려왔던 생각, 많은 사람이 같이 동의하는 생각 그게 옳고 진리인줄 알고 있었단 말이죠. 부모가.
그리고 그 진리 속에 예수님도 같이 동의가 되는 줄 알았죠. 왜? 내 자식이니까. 내가 키웠으니까. 아직 어린애니까. 동의 될 줄 알았죠. 예수님의 지혜가 총기가 더 자란다는 말은 그 생각이 무슨 의미인줄 몰랐던 겁니다. 전에보다 부모한테 더 효도하는 줄 알았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부모한테 효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누가복음 2장 이 본문 어떻게 설명할거에요? 효자같은 소리하고 있네. 두 번 효자했으면 이제는 아버지 팔아먹겠다. 이게 무슨 효자에요? 아버지 걱정도 안하는데. 무슨 효자. 아버지를 없는 존재로 자기만 있으면 그만인데 이게 무슨 효자에요.
48절에 보겠습니다.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곧 때찌라도 할 태세에요. 맴매할거 같애요.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부모가 근심하는거 알 그 정도 철이 들 나이는 되었잖아. 지금 마리아가 예수님보고 나무라고 있는 중이에요.
예수님이 이야기합니다. 엄마 아빠 집이 내 집입니까? 아니면 성전이 내 집입니까? 이렇게 나오는 거에요. 과격하게 나옵니다. 내가 내 집에 와 있는데 지금 엄마 아빠 생각하는 집하고 내 집하고 달라요. 어머님. 마리아 같으면 아이야 네가 미쳤나? 갑자기 멀쩡하게 네 집 놔두고 여기 와서 네 집이라고 하느냐? 이렇게 되겠지요.
어차피 내가 태어난 것은 아버지 집에 거하는건데 내가 태어난 것은. 아들이 아버지 집에 가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데 아버지 집에 가지마라 이런 식이에요. 참 이해가 안 될 예수님하고 아버지의 이 대화. 이 대화를 통해서 다시 40절에서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이 의미가 흔히 세상 살면서 자기 앞가림 자기가 한다 알아서 철났다 부모한테 효도한다 그런 윤리 도덕적 관점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이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러한 태도를 통해서 결국은 우리는 뭐를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느냐 하면은 누가복음 2장에 28절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전에도 이야기했습니다만 시므온은 현재 누구와 함께 있어요? 성령이 함께 있지요. 아 나 걱정했네. 누구와 함께 있어요 할 때 혼자 있잖아요 이렇게 나올까봐. 성령은 지금 성령 안 보인다고 빼고 이런 거 없기. 성령 안 보인다고. 성령은 어르신입니다. 이 어르신 화나게 하지 마세요. 성령이 함께 감동해 있다 이 말이죠.
자,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이렇게 되어 있단 말이죠.
여기서 시므온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뭐냐 하면은 사람이 성령의 목표가 말씀에 이끌려서 살아간다는 것. 말씀에 이끌려서. 지금 시므온이 보고 있는게 뭐냐? 아기예수에요. 아기예수가 되면서 말씀에 이끌린다는 말은 그러면 잘 이해가 안 되고요. 이렇게 해야 이해하기가 쉬워요.
시므온과 뒤에 나오는 안나. 둘 다 공통점이 뭐냐 하면 노선변경. 제목을 이걸로 해야겠다. ‘노선변경’. 노선변경이 일어나는 겁니다. 노선변경. 노선변경. 아까 제가 이야기한 것처럼 부모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부모가 존재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존재했으면 예수님 쪽에서 찾아야 돼요. 어?! 아버지 어디 가셨지? 내가 너무 모른척 했구나. 아버지! 아버지! 찾아야 되는데 지금 누가 찾느냐 하면은 예수님은 찾을 생각도 없어요. 없고 부모가 예수님을 찾아가도록 그렇게 현실이 그렇게 되어있어요. 그러면 이거는 예수님한테 부모는 있다? 없다? 없는 존재지요.
그러면 아기예수 앞에 시므온은 있다? 없다? 없는 존재에요. 내가 없어도 내 대신 누가 있으면 되는 노선, 그러한 인생, 그러한 노선이니까 way, 길이죠. ‘길’. 성령께서 가져다주는 뭐가 되느냐 하면 가져다주는 자리. ‘자리’. 자리가 중요해요 자리가. 지금 제가 의도적으로 뭐하고 뭘 구분하느냐 하면은 내 신체하고 내 몸하고 이 자리를 구분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여러분들이 계시지만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여러분들의 자리에요. 그 자리가 아담으로부터 내려오는 육의 열차 자리 또는 객차, 육의 기관차, ktx, 육의 ktx에서 한 좌석들을 차지하고 있다면 그 노선은 옛날 죽었던 조상들과 동일한 방향으로 가는 동일한 영역 안에 있어요.
그런데 시므온같은 사람은 선지자거든요. 구약의 선지자의 특징은 성신이 함께 있습니다. 성신이 구약의 선지지는 시므온과 함께 있을 때는 무엇과 무엇을 보게 하느냐 하면 기존의 현실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는 인간들의 신체 또는 이 세상 이것만 보이는 그 세계에서 그걸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자리죠.
눈에 보이는 이 자리. 이 자리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자리, 다른 말로 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노선으로 옮겨타기를 선지자는 성신을 통해서 그걸 보여준 거에요. 옮겨타기를. 그 당시의 모세도 마찬가지고 예레미야도 마찬가지고 옮겨타게 되면 얼굴 신체로 보게 되면 신체 몸이죠. 제가 강조하는 것은 신체가 아니고 뭐라고 했습니까? 자리죠.
몸이 자리를 깔고 앉은 거에요. 자리는 안보여요. 몸이 자리를 깔고 앉은 거에요. 자리는 안보이고 몸만 보이는 겁니다. 몸만 보이는 거에요. 결혼할 때 몸과 몸이 만나서 결혼하잖아요. 둘이 사랑한다고 만져봐야 그거는 자리를 만드는게 아니고 몸을 만지는 거에요. 몸을 만지는 것. 그런데 제가 강의할 때 이 두 몸은 나중에 어떻게 된다? 사라지지요.
주님께서는 인간들을 보고 너희들은 몇 년을 살든 100년을 살던 100년 살다 없어지는 그 몸은 주께서 신경도 안 써요. 왜냐하면 없어지고 난 뒤에 그 자리가 있을 거 아닙니까? 그 자리는 아담으로부터 내려오는 영원한 죄의 저주의 자리, 멸망의 자리에요. 지옥으로 통하는 자리다 이 말이죠. 자리를 보는 거에요. 육의 자리.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육으로 난 것은 육입니다. 1,2,3,4,5,6에서 6이 아니고. 육에서 난 것은 육이고 그 육은 육이고. 또 하나 더 붙일까요? 그 육은 육이고. 계속 육, 육, 육 같은 기관차에 1호실 2호실 8호 객차라도 앞에 다 달려 있잖아요. 그 육은 육이고 뒤돌아 이민 가봐야 육이고 어디 가도 육이고 독일가도 육이고 미국가도 육이고 전부다 육이에요. 북한가도 육이고. 북한에서 남한에 탈북해봐야 육이고 풍선 날려봐야 육이고.
성신께서 또는 신약의 성령께서 선지자를 보내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자리가 육의 자리가 전부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몸은 전혀 달라지지를 않았어요. 달라지지 않는데 뭐가 바뀌었어요? 성령을 통해서 자리가 바뀌었죠. 자리가. 그 자리가 바뀌었죠. 지금 아기예수가 딱 왔을 때 시므온이 뭘 봤느냐 하면 자기 자리를 본거에요 아기 예수한테. 이 자리 말고 저 자리.
왜냐하면 성령이 아니면 그걸 알 길이 없어요. 그냥 저 자리가 탐난다가 아니라 내 자리 아니라는 것부터 이야기해야 돼요. 이 자리는 아냐. 내 자리는 죽을 자리에요. 나를 파탄시킬 자리고 나는 지옥 갈 자리에요. 저는 지옥만 생각하면 그런 생각 드는데 우리가 어떤 분이 저한테 다음 주 예배하는데 기도 순서라고 참고적으로 기도문 한번 써달라고 해가지고 써줬어요. 누구라고 말은 안하겠습니다. 안하는데 다 알지요.
첫마디가 그거였어요. 난데없이 잘난 사람하고 못난 사람하고 관계없이 왜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벌을 주십니까? 그게 첫 문장이에요. 신종코로나 이야기입니다. 잘난 사람 못난 사람 교회 가고 안가고 왜 단체로 벌을 주십니까 주님. 단체로 왜 벌을 주십니까?
그러니까 시므온도 마찬가지에요. 시므온이 오늘날 살아도 신종코로나 때문에 마스크해야 된다 이 말이죠. 이것은 개인적으로 얼마나 잘났느냐 훌륭했느냐 착실했느냐 경건했느냐 따지지를 않습니다. 제가 지옥 생각하면 그런 거에요. 뭐냐 하면은 이 땅에 인간으로 태어난 이유 때문에 매를 맞아요. 매를 맞는다고요.
어떤 분은 하루 아프고, 죽으라고 아프고 또 하루는 깨끗해요. 그 다음날은 또 아파요. 이게 예외도 없이 그래요. 그 하루씩 건너뛰어서 하루는 죽으라고 아프고 하루는 또 걸어다녀요. 또 하루는 못 걸어 다녀 너무 아파가지고. 그런데 제가 그분한테 이런 이야기했어요. 하루쯤은 쉼을 주잖아.
하루쯤은 쉬는데 지옥가게 되면은요 사람이 매를 맞아도 60대 같으면 언제 위로되느냐 하면은 58대 맞을 때 위로가 돼요. 2대만 더 참으면 되잖아요. 아무리 매를 맞고 아무리 욥처럼 몸이 아파도 언제 끝날 때가 있어요 끝날 때. 그러니까 성도의 좋은 점은 뭐냐 하면은 죽음이 해방의 날이라는 거에요.
죽음이 무시무시한 날이 아니고 죽는 날이 군대생활 끝나는 개구리복 벗는 날. 제대하는 날이에요. 목사님 군대 갔다왔지요? 방위 아닌가? 군대 갔다왔지요? 군에서 제대할래요? 아니면 개인 독방에다가 냉방병 있다고 해가지고 개인적으로 우대 받을래요? 목사님 아버지가 신용 대기업 부회장 되가지고 아들이 공군부대 들어갔다고 합시다.
혼자서 특별대우받고 혼자서 군에서 특별대우받을래요? 안 그러면 제대할래요? 묻는 내가 나쁘지요. 군에 간 남자들의 소원이 있다면 맛있는 밥을 먹는다. 아닙니다. 잠을 푹 잔다. 아니에요. 뭐냐 하면은 빨리 제대하고 싶다가 희망이고 꿈입니다. 빨리 제대하고 싶다. 그런데 불신자들은 제대할 자리가 없어요. 안에서 해결해야 돼. 안에서.
착해야 되고 경건하고 거룩하고 아주 난리도 아니라 난리도 아니에요. 나라에서 교회 오지 말라고 하니까 기어이 와가지고 할렐루야 하다가 다 걸리고 목사님부터 다 걸리고. 기어이 내 쪽에서 하지 아니하면 구원 없다. 내 쪽에서 하지 아니하면 구원 없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천국가도 자기 방석을 어떻게 합니까? 갖고 가요.
어느 바보가 식당가면서 집에 자기 깔고 있던 방석 들고 식당에 가는 사람 어디 있어요? 식당가면 식당 자리 따로 있잖아요. 자기 방석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은 바보 아니야? 진짜 오늘날 교회들이 바보같애. 버리고 가야하는데 이 땅에서 헌금한 것, 기도한 것, 선교한 것 전부다 다 버려야 돼요.
왜? 그 짓이 찬양한 것부터 다 버려야 되는데 왜 버려야 되는가? 사람이 그걸 하게 되면 자기가 한 것이 기억돼요. 기억이 어디에 들어가느냐 하면은 내 이름 창고에다 이게 누적되어요. 내가 한 멋있는 것 쌓이게 되는 거에요. 그러니까 자기 이름을 다른 이름으로 못 바꿔요. 내 이름을 버리고 주의 이름을 못 찾아요.
주의 이름 찾으려면 주의 이름은 뭐만 소복히 들어있느냐 하면 피만 들어 있어요. 피만. 피만 들어 있어요. 참 이빨 두 개 뽑는데요 병원에서 두 시간만 꽉 물고 있으면 됩니다. 두 시간 믿었지요. 오후 1시에 가가지고 피가 멈춘 것이 밤 10시에 멈췄어요. 9시간 동안 계속 났어요. 엄청나게 나왔어요. 그래서 가가지고 피 계속 나오더라 하니까 염증이 많은 사람 피가 많이 나온다는 거에요. 그럼 진작에 이야기해주지.
예수 이름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키가 몇 센치고 몸무게가 얼마고 꿈에 예수님이 멀쩡한 인물로 수염 덥수룩하고 도포 입고 나왔다. 이게 예수가 아니라 그냥 피에요 ‘피’. 피와 물과 성령이 예수님이 나타났다는 증거입니다. 요한1서 5장이라고 제가 오늘 십자가 마을에 답변해놨지요. 질문 답변에. 예수 인물 훤하데~ 이런게 예수가 아니에요.
사람이 예수님을 신체로 보는 것은 내가 나를 평소에 나를 신체로 보고 그것이 있음, 예수님은 부모가 없음이 되는데 자기는 계속해서 있음을 고집하고 있는 거에요. 이 있음에다가 MSG 인가? 자꾸 종교적인 조미료를 치는 거에요. 있음을 멋있는 있음으로 만들기 위해서 계속 감미료를 계속 치는 거에요.
양념을 하고 요리를 하고 내가 보기에도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계속 자기가 하는 거에요. 자기 역사가 이정도로 괜찮은 역사라는 것을 티내기 위해서 계속 해 온 겁니다. 그러나 계속 해봤자 그 안에 자기 이름을 버릴까요? 못 버릴까요? 자기 부인됩니까? 안되지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피 흘린 십자가라면 너도 나처럼 십자가 지고 피 흘리라 이 말이죠.
우리 인생을 압축기에 집어넣고 눌러버리면 나오는게 달랑 피에요. 피란 말이죠. 내 안에 해보니까 피가 나와요. 그게 내 이름이에요. 피가 내 이름이에요. 나중에 죽게 되면 나중에 화장터에 뭐가 남습니까? 가루가 남지요. 흙이죠. 그게 내 이름이에요. 또 흙에서 내 이름 찾는다고 찾아보세요. 내 이름 없어요. 그게 나에요. 나는 없음입니다. 나는 없음이에요.
괜히 마귀가 자꾸 있음으로 바꾸니까 기존의 있음에 대해서 미련이 남는 겁니다. 애착이 가는 거에요. 다른 있음하고 내 있음하고 자꾸 대조가 되고 비교가 되고 저 있음은 왜 저렇게 행복하고 잘 사는지. 애 낳고 해가지고 밤 되면 하하호호 뭐 재미난 일이 있는지 웃고. 그걸 창문으로 보면서 나는 둘이 앉아가지고 나는 뭐하는지.
남은 더 행복해 보이고 더 이상적으로 보이는 그런 것들이 보일 때 우리는 갑자기 자기 인생이 서글퍼지지요. 그러나 제대가 있잖아요. 제대. 제대 날짜가 다가오지 않습니까? 이 땅에 살면서 앞으로 어떤 매가 올지 몰라요. 매가 치고 한숨 넘어간다고 또 매가 안오는게 아니에요.
이 땅에서 때린 매도 매지만 죽고 난 뒤에는 그 다음에는 본격적으로 타작에 들어갑니다. 오죽했으면 타작마당이겠습니까? 오죽했으면 타작마당. 한번 상상해보세요. 앉아있는데 옆에 천사 있는데 천사 이름이 망나니라. 막걸리 한잔 먹고 와가지고 칼에다가 푸우~~~~.
칼에다 막걸리 뿌려놓고 혼자서 춤을 추는데 칼은 무거워가지고 춤을 추는데 그 망나니가 단칼에 베면 나는 속이 시원한데 이 망나니가 초짜가 되가지고 이게 아프기만 아프고 안 죽네. 아 이거 미치지요. 미치는 겁니다. 그 마당이 무슨 마당? 타작마당인데 타작마당에 대해서 그 요한계시록에 보면 이렇게 망나니 나타나는게 아니고 위에서 밟는 걸로 되어있어요. 밟는 걸로.
지금 요근래 설교 강의에서 밟는 거 이야기 몇 번 하는지 모른다. 백인경찰이 흑인 그 전과 7범이거든요. 마약소지자고 도둑놈이고 경찰의 체포에 도망간 놈이고 성질나겠어요? 안 나겠어요? 뻔히 알잖아요. 그런데 밟은 거에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요한계시록 17장인가 나오는 그게 뭐냐? 밟는데 어디까지 밟느냐? 피가 나올 때까지 터질 때까지 밟아버려요.
그걸 가지고 포도주를 생산하기 위해서 포도를 포도주 틀에다가 위에서 짓밟아버리는 겁니다. 아야~아프네 살살하세요 소용없어요. 그냥 피가 나올 때까지 밟아버립니다. 죽으라고 밟아요 죽으라고 밟아버리죠. 신종 코로나같은 이것은 마스크 쓰면 좀 낫지 이건 그것도 아니에요. 그냥 밟아버려요. 지옥에 가장 지옥다운 것은 뭐냐 하면 더 이상 제대가 없다는 거에요.
요한계시록 14장이에요. 천사가 낫을 망나니 천사가 낫을 가지고 막걸리 하나 푸우~~뿌려놓고 땅에 휘둘러서 땅에 포도원을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성 밖에서도 이 틀을 밟으니.
자, 왜 이렇게 하나님께서 횡포를 그 가녀린 인간을 상대로 이렇게 횡포를 부리십니까? 왜 그렇게 하는 거에요? 그것은 인간은 원래 살다가 없어져야 할 존재인데 그 배후의 인간 배후의 악마가 자꾸 인간을 가지고 자꾸 깔짝깔짝 대들라고 인간을 앞장세워가지고 예수님 십자가 복음을 모욕했거든요. 귀싸대기 때렸지요 옷 벗겼지요.
그럴 때 그 로마 군병이나 그 바리새인들이 자기를 뭐로 보겠습니까? 나 여기 있음으로 보겠지요. 그런데 오늘 누가복음 2장에서 시므온과 안나는 어떻게 자기를 어떻게 봅니까? 나에 대한 생각은 없어요. 내가 이만큼 신앙생활 했습니다. 그런 거 없어요. 그냥 뭐만 보입니까? 아기예수 보는 순간 자신의 근본적인 뿌리요 자리가 되는 거에요.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놓는 것을 성령께서 하게 해주시니 이제 내 종의 마음을 편안히가 아니고 이게 좀 길어야 돼요. 편안~~~~~~~~히. ‘안’ 하고 ‘히’ 하고 좀 많이 떨어져야 돼요. 이제 종을 편안~~~~~~~히 놓아주는군요. 이제는 내 이름으로 살지 않고 누구 이름으로 산다? 주의 이름으로 아기예수 이름으로 오는 거에요.
아기예수는 아직 아기이기 때문에 12살도 안됐고 33살도 안됐잖아요. 하지만 안됐어도 이미 시므온은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 완료된 상태를 보는 거에요. 완료된 다 이루었다를 볼 수 있는 거에요. 시므온이. 만약에 시므온이 예수님을 몰랐다면 자기 쪽에서 있음이잖아요. 자기가 있지요. 신체가 있지요.
자기는 모르고 자기는 누군지 모르고. 내가 여기 있다. 내 몸뚱아리가 있다. 손, 발이 있다. 이 손, 발 가지고 뭐하겠어요? 기도도 할 것이고 전도할 것이고 예배할 것이고 헌금할 것이고 뭐 하겠지요. 선한 일을 하겠지요. 사지가 멀쩡하니까. 그런데 그렇게 해가지고 이 자리에서 저 자리로 옮겨갈 수 있습니까?
아기예수가 딱 등장하니까 히브리서 10장의 말씀처럼 모든 율법을 이루는 것은 누가 전문가다? 누구 몫이다? 책에 기록된 대로 이루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두 분 보냈습니까? 세 분 보냈습니까? 네 분 보냈어요? 누굴 보냈어요? 단 한명을 보냈어요. 단 한명을 보냈어요.
단 한분으로 충분해요. 만번의 제사, 천번의 대제사장의 제사보다도 양의 제사보다도 오직 한분으로 충분하다 이 말이죠. 이걸 성령을 통해서 시므온과 안나는 알았던 거에요. 안나같은 경우에 과부된 지 84년 그 세월이 하나도 아깝지 않아요. 어차피 그 세월이야 내 있음을 보여주는 세월이기 때문에 항상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고 걱정할 수밖에 없는 거에요.
그러나 아기예수를 딱 보는 순간 내가 어떤 존재고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 상관없이 그냥 이미 주님의 자리로 건너간 겁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시므온이 그것으로 끝나는게 아니에요. 한가지 더 있어요. 지금까지 시므온이 이 성전에서 여기에 보면 26절에 보면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그리스도를 볼 때까지 계속 왔던 그 모든 작업은 자기 작업이 아니고 아기예수 그 자리에서 스케줄, 그 자리에서 시행된 인생으로 살아온 겁니다. 아기예수를 만나고 성령을 만나고 아기예수를 만나보니까 소급해서 지난날의 모든 것이 내 일이 아니고 누구 일이 됩니까? 주의 일이 되는 거에요.
주의 일이 된다는 것은 주를 증거하기 위한 일을 주의 일이라고 해요. 나를 증거하는 일은 무슨 일이죠? 너무 쉬운 질문인가. 나를 증거, 나 이 정도야를 증거 하는 것이 나의 일이고 찬양하든 뭐든 마찬가지에요.
나를 증거하면 나의 일이고 주님 증거하면 주의 일인데 주님 앞에서 나는 나를 보고 편안히 놓아주는게 아니고 주님을 바라보는 순간 더 이상 나 같은 것은 결국은 내가 사라져야 된다는 것이 제대를 해야 된다는 것이 이게 주의 계획 잡힌 일이라는 사실을 하게 되는 거에요. 아 내가 그런 행동하는게 아닌데 그 짓을 내가 하다니 그 추잡하고 더러운 짓을. 이런 생각은 아직까지 자기 자리를 자기가 붙들려고 하니까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에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한평생 살아가면서 제일 힘든 것이 뭐냐? 내 몸 아픈 것도 힘든 것이지만 그것보다 더 힘든 것이 있어요. 뭐냐 하면은 남을 대하는 일이 제일 힘들어요. 남을 대하는 일. 집에 누구 손님 온다고 해보세요. 갑자기 스트레스 받지요. 스트레스 받는다고요. 남을 대하는게 제일 힘들어요.
지금 오늘 본문에서도 부모가 12살 먹은 아이 예수님을 편하게 생각했는데 막상 예수님이 키가 크고 성전에서 말도 안하고 혼자서 행동할 때 부모가 얼마나 힘들겠어요. 타인이 내 속에 들어오는 것이 정말 이게 힘든 일이에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이건 뭐냐 하면은 뭐를 전제로 하느냐 하면은 나의 파괴를 전제로 하는 일이기 때문에. 나의 파괴를.
탤런트에 김일우라는 탤런트가 있어요. 1963년생 58. 만으로 57인데 이 사람이 결혼을 하겠다 하는 나이가 언제냐 하면은 서른 몇 살 때부터 결혼한다고 했어요. 아직 총각이거든요. 이 사람 얼굴을 내가 너무나 잘 기억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내가 옛날에 박사교회에 있을 때 거기 하양에 목사 얼굴하고 똑같이 생겨가지고 내가 기억하는데.
그 사람이 58인데도 아직 결혼하고 싶다는 거에요. 그러면 결혼하고 싶은데 왜 결혼을 못했느냐? 결혼을 안 한게 아니고 늘 보지요. 저 사람은 이래서 안돼. 혼자 생각하는 거에요. 누구랑 선보는게 아니고. 저 사람은 아 저 사람은 저래서 안돼. 저 여자는 저래서 안돼. 계속해서 뭐가 안된다 안된다 하는 거에요.
그런데 뭐가 안된다 안된다 하는 순간 본인이 뭘 알아야 되느냐 하면은 내가 어떤 인간인 것을 알아가는 순간이기도 한 것을 본인이 알아들어요. 본인이 얼마나 까다로운 인간인지를 타인을 만나면서 아는 거에요. 아 나 저 인간 안돼. 아 저 사람은 여자가 너무 방송에 나오는데 교만해서 안돼. 이런 것.
저 사람은 몸이 너무 튼튼해서 안돼. 저 사람은 몸이 약해서 안돼. 저 사람은 친정에 식구가 많아서 안돼. 저 여자는 너무 돈 너무 밝혀가지고 자칫하면 김구라처럼 돈 다 날릴 수가 있어. 저 여자는 또 사업을 너무 크게 해가지고 송대관처럼 마누라 500억 날라갈 수가 있어.
그러니까 도대체 내가 어떤 여자를 원하냐는 것은 곧 내가 누구냐를 아는 거에요. 그러면 평생을 살아가면서 뭐냐? 인간은 자기를 발견하는 시간이 인간입니다. 아직 결혼 안했어요.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