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200611b슥1장12(속함과 포함)-이 근호 목사
안양20200611b슥1장12(속함과 포함)-이 근호 목사
둘째 시간하겠습니다. 빈자리에서 어떤 움직임이 있고 그 움직임이 이 지상에 내려오게 되면 사건이 되고, 그 사건을 통해서 이 땅의 사정이 실정이 동기가 되는 방식을 사용하는 겁니다. 빈자리는 없음이지요. 없는 자리. 이 땅에 없던 자리에서 뭔가 일이 시작되게 되면, 이 지상에서 번쩍! 하고 사건이 일어나게 되고 이 사건은 인간의 시간과 공간에서 예상 못한 사건이 일어나게 되지요.
사건이 일어나게 되면 이 세상의 실적, 상황, 사정, 형편이 얼마나 악하냐, 파멸이냐를 보여주는 일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게 스가랴 같은 경우에는 무슨 사건이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는 사건을 두고 이야기합니다. 스가랴에서 추방된 사건. 어디서 했느냐 하면 약속의 땅에서 추방된 사건. 이 추방된 사건에서 천사가 개입을 해가지고 그 다음에 격려합니다.
다시 되돌아가라. 다시 되돌아가서 그냥 되돌아가면 안 되지요. 되돌아가서 성전을 다시 지어라. 요 사건에 천사가 개입하는 겁니다. 천사가. 그러면 추방됐다는 이 사실이 몇 년 전이냐 하면 70년 전이거든요. 70년 전. 70년 전이니까 추방될 때 사람들 어떻게 됐습니까. 다 돌아가셨지요. 문제는 성전 짓는 것은 그 당시 사람들보고 닦달 내는 게 아니고 그 후손들에게 그 책임을 그대로 인수인계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세계는 출산과 번식이기 때문에. 처음에 이스라엘백성들이 약속의 땅에서 쫓겨날 때 그 하던 행세, 사고방식, 그것은 보이지 않는 악마 귀신에 의해서 그대로 유지가 되는 거예요. 스스로 반성해서 그게 고쳐지는 인간은 없다 이 말이지요. 스스로 반성할 것 같으면 악한 천사가 올 이유가 없지요.
악한 천사가 왔다는 말은 인간은 스스로 자기가 개과천선할 수 있는 여지는 전혀 없는 거예요. 왜? 지배자니까. 로마서5장에 보면 죄를 짓는 게 아니에요. 로마서5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은 죄를 짓는 게 아니고 죄가 인간을 통해서 죄답게 드러내는 매개체로 인간을 사용하는 겁니다. 인간은 뭐냐 하면 숙주에요. 뭐냐 하면 죄라는 바이러스가 번식하기 위해서 인간이라는 숙주를 사용하는 겁니다. 인간을 그냥 사용하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 실수, 자기 잘못, 너무 자기를 책망하지 마세요. 책망하지 마세요. 뭐 휴대폰 잊어버리고 책망하지 마세요. 지금은 하루에 한 번만 잊어버리지만 나중에 몇 년 지나면 하루에 세 번 잊어버릴 수 있어요. 지금은 휴대폰 잊어버리지만, 10년 후에는 자식을 잊어버려요. 아저씨, 누구세요? 제가 지금 악담을 하는 게 아닙니다. 저주하는 게 아니에요. 그러더라도 이게 내 잘못이라고 할 수 없다 말이지요.
내가 태어나는 것이 나의 선택이었습니까? 아니지요. 내가 마음먹고 태어났습니까? 태어나고 난 뒤에 마음이 발생된 거지. 내 마음 있기 전에 태어난 것부터 먼저 시작된 거예요. 인간은. 내 마음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뭐 회개한다고, 반성한다고, 가슴치고. 지 가슴만 아프지. 그게 무슨 소용 있어요. 성경말씀 제대로 보셔야 돼요. 이미 우리는 추방된 자에요. 추방된 자와 추방된 천사와 한 작품입니다. 한 통속된 거예요. 둘 다 추방된 상태기 때문에 죽이 잘 맞아요. 악마하고 우리하고 죽이 잘 맞아요.
그래서 이것이 그냥 있어버리면 우리는 그냥 최선의 노력을 할 뿐이지 우리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사건이 터져버리니까 여기서 무엇이 사건과 동시에 뭐가 주어지는가 하면, 하나님의 약속이 여기에 방문합니다. 약속이 들어와요. 약속대로 한다면 너희는 천국이다. 그런데 너희는 약속대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너희들 자체가 문제가 되어서 약속이 틀어졌다. 약속이 깨어진 거죠. 그 깨어진 지점을 천사가 와서 그걸 찾아주고 소개하는 겁니다. 천사가 와서. 어떤 자리? 심판의 자리.
그래서 여기에 빨강색, 자색, 백마가 있는데 이건 하나의 과정을 보여주는 겁니다. 무슨 과정? 빈자리가 이 존재가 있는 이 세상에 사건으로 출현해서 어떻게 이 세상에서 그 내려온 사건을 타고 천국의 사람으로 뽑아갈 수 있는 과정을 천사들이 보여주는 거예요.
에스겔10장1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룹들에게는 각기 네 면이 있는데 첫째 면은 그룹의 얼굴이요 둘째 면은 사람의 얼굴이요 셋째는 사자의 얼굴이요 넷째는 독수리의 얼굴이더라” 이 그룹들이라는 말은 천사를 가지고 그룹이라고 해요. 그런데 엔젤하고 달라요. 엔젤하고 그룹하고 달라요. 그룹은 엔젤보다 좀 높은 계급이라 보시면 돼요. 천사도 계급이 있어요. 어디에든 계급사회에요. 여기에 보면 그룹들이, 그룹들 할 때, 여러분 제일 유명한 이사야6장에 나오는 성전에서 찬양하는 그룹들이 있잖아요. 날개가 여섯 개 달린. 날개 두 개는 자기 얼굴을 가리고, 두 개는 자기 발을 가리고, 중간 날개는 활동하면서 펄럭이면서 노래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 그룹.
그 그룹들이 각각 네 면이 있는데 첫 면은 그룹의 얼굴이고, 둘째 면은 사람의 얼굴이고, 셋째는 사자의 얼굴이요, 넷째는 독수리의 얼굴이다. 사람, 독수리, 사자, 그룹. 천사가 천사의 자기 얼굴. 이것은 여기에 대해서 제가 설명을 하기 전에 먼저 이 땅에 있는 인간들의 입장에서 이 모습을 에스겔10장14절의 모습을 보면서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이렇게 생각하실 거예요.
인간은 내가 나 말고 남이 볼 때는 내 눈으로 그 사람을 보는데 볼 때, 기준이 뭐냐 하면 평소에 내가 거울을 보면서 내 자신을, 인간은 거울을 봐야 자기 모습이 보입니다. 거울을 보면서 내 자신을 보는 그러한 시선을 가지고 남을 보는 겁니다. 거울을 보는 거 가지고 남을 봐요. 내가 평소에 내가 거울을 보면서 거울을 비취면서 자기를 보는 것처럼 나도 보는 것처럼, 남을 볼 때도 똑같이 상대방을 그렇게 봐요.
그러면 내가 거울을 보니까 나는 귀가 조금 짧다. 짧다하는 것을 거울을 내가 보니까 알잖아요. 그런데 남을 보니까 뭔가 다른 거 같아요. 뭐가 다르지 자세히 보니까 그 사람은 나보다 귀가 좀 길다. 그러면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귀가 짧은 당사자에게는 그 사람의 특징은 뭐냐, 만약 그 사람이 만약에 내 돈을 사기해먹고 갔다면 경찰에 가서 “그 사람 특징이 뭐요?” “귀 볼이 길어요.” 대번 이야기한다 말이지요. 왜냐하면 자기가 그 사람을 처음 봤을 때 나와의 차이점이 뭐냐, 어떤 차이점 때문에 저 사람은 저 사람이고, 나는 나냐, 이렇게 되거든요.
그리고 사람을 볼 때는 제일 먼저 보는 게 ‘저 사람은 어디서 많이 닮았는데.’ 그 사람을 뭔가 닮은 것을 가지고 사람을 인식하게 되어있습니다. 주로 심리학에서 그걸 이야기해요. 심리학에서 사람을 볼 때는 뭐로 보느냐 하면 네모와 동그라미, 사각형, 오각형, 이런 거 가지고 사람을 분해해서 본다는 거예요. 심리학이. 왜 그러느냐 하면 인간에 있는 두뇌, 인간의 두뇌 피질, 피질에서 인간의 형체를 형상화시킬 때는 그냥 정확하지 못하고 네모, 세모, 이렇게 기하학적으로 분해해가지고 그걸 짜 맞춰서 한다는 거예요.
그걸 어디다 조립시키느냐 하면, 요새는 인공지능에다가 적용시켜가지고 인공지능이 그 일을 해요. 고양이와 개 차이를 인공지능은 알아 맞춰요. 왜? 다 분석하고 분해했기 때문에. 분해하고 그걸 조립하게 되면 인공지능이 심화학습이라 하거든요. 계속 심화해가지고 자기가 자기를 가르치는 거예요. 매긴다는 말이 있거든요. 매긴다. 결과를 가지고 다시 원인과 결합시킨다. 이리 보면 돼요. 이렇게 해서 인공지능의 원리가 그래요. 그런 식으로 자기를 보듯이.
이게 인간의 두뇌의 세포의 시냅스라는 두뇌 세포가 늘 그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이게 만약에 치매 걸려가지고 이렇게 작용을 못하게 되면 “어디서 봤기는 봤는데.” 못 알아보는 겁니다. 그래서 이리 보면 돼요. 인간은 남을 볼 때 절대로 남을 보지 않고 나를 찾는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인데.” 어떤 남자가 여자를 사랑했는데 그 여자가 아주 차갑게 끝내버렸어요. 그렇지만 그 남자는 그 여자를 사랑한 게 아니에요. 그 남자에서 자기가 맘에 드는 구석을 본인이 사랑한 거예요. 따라서 그 사람은 그 다음부터 그 여자를 떠나도 그 여자를 못 잊어서 비슷한 여자를 찾아가지고 말을 건네 보는 겁니다. 윤 도현 밴드에 나오는 끝부분에 그리 되어있어요. 너는 떠나지만 나 이제부터는 널 닮은 사람을 찾아갈 거야. 머리가 이렇게 길었다면 이제부터는 머리 긴 사람 보면 지가 좋았던 사람인줄 알고 다 찾아다니는 거예요.
이건 뭐냐 하면 내가 원하는 나의 조각에 같이 맞출 수 있는 조각을 타인으로부터 찾는 겁니다. 찾는 거예요. 또는 이런 CF있어요. 훅 지나갔는데 낯선 남자에게서 내 남자의 향수가 딱 떠오르지요. 김 선아가 나왔던 옛날에 12년 전에 CF에 그런 게 있어요. 낯선 남자에게서 내 남자의 향기가 난다. 평소에 얼마나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집착하고 메몰 돼 있으면 어떤 누굴 만나도 그것이 딱 기어 올라와요. 심지어 집에 있는 개를 만나도 “저 개는 내가 어릴 때 키우던 개하고 닮았다.” 전부 이렇게 되는 겁니다. 어떤 낯선 동네에 가도 저 집은 내가 어릴 때 컸던 내 집의 테라스하고 비슷하게 닮았다.
그러니까 인간은 인간의 자아는 자기 몸을 질질 끌고 다니면서 자기의 괜찮았던 역사를 자꾸 회상하라고 강요해요. 자꾸 내 몸을 가지고 닦달 내는 거예요. 회상하라고. 그래서 나이 많은 사람들은 사진을 안 찍잖아요. 분명히 사진 찍기 전에는 자기가 38, 25 이런데 사진 찍으면 귀신 나오거든요. 지가 깜짝 놀래요. 뭐 이런 귀신이 다 있노. 사진은 거울하고 달라요. 사진기라는 그 중간 매체 때문에 아우라가 다 날아가 버려요. 그런데 거울은 자기가 자기를 속일 수 있어요. 거울 보면서. 그런데 사진은 속일 수가 없어요. 이거 화내는 것도 아니고 이거 누구야?
천사는 인간의 역사를 재현해줍니다. 우리가 천사를 보게 되면 천사 모습은 자꾸 스크린을 이미지를 그리지요. 네 면이 있는데 하나는 천사, 하나는 사자, 독수리, 사람, 그리고 에스겔1장에 보면, 네 면이 또 달라요. 처음에 1장에 보면 소로 되어있어요. 소, 사람으로 되어 있는데. 사람들은 그 모습을 이제 상상했잖아요. 해 놓고 꿈속에, 꿈을 꾸게 되면 에스겔 천사의 모습이 궁금해가지고 나중에 집중해서 생각하다보면 꿈에 진짜 천사가 나타나요. 천사의 대가리가 휙 돌아가면 사자고, 휙 돌아가면 독수리고, 휙 돌아가면 천사의 얼굴이고, 천사 봤다고 은혜 받았다고 좋다고 할렐루야! 이러고 있다 말이죠.
지가 상상한 것을 지가 그냥 되돌리는 지가 꾸며낸 짓에 불과한데 그럼 어떻게 하느냐, 이 천사의 모든 모양은 이 땅에서 인간들이 모양으로 자기 모양새를 찾는 자기 정체성을 찾는 식으로 인간은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 닮은 사람 없을까, 내가 찾고 싶은 이미지는 어디 없을까, 그래서 한 눈에 뽕 갔다는 말이 그런 말이에요. 결혼할 때 뿅 갔다는 말은. 내가 찾고 싶은 사람을 찾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여자를 볼 때 자기 엄마를 닮은 여자를 찾고, 딸은 자기 아빠를 닮은 남자를 찾아요. 단, 조건이 있어요. 아빠, 엄마가 평소에 잘해줄 때 그래요. 만약에 못해준다면 기겁을 하지요. 아빠하고 닮아서 싫어. 엄마하고 닮아서 싫어. 이리 돼요.
그래서 악마에 의해서 인간은 이미 자기가 우상화되고 내가 좋아. 교회를 나오던, 기도를 하던, 목적은 뭐냐, 내가 좋다는 것을 내가 확인하고 싶어. 내가 이 세상에서 나보다 더 좋은 존재는 없어. 내가 전부야. 예수보다도 하나님보다도 삼위일체보다도 나는 내가 좋아서 하나님 믿을 거야. 그 본성 외에는 인간은 빠져나갈 수 없어요.
그래서 이건 누가 그게 바로 땅이 몽땅 악마와 더불어서 심판받아야 된다고 누가 외부에서 알려줄 필요가 있어요. 그 기능을 누가 하느냐 천사가 하되, 그 기능성을 모습으로 인간의 형상위주니까, 보는 걸 통해서 자기 자신을 구축하니까, 이미지를 구축하니까, 고 기능을 보이는 형상화시켜서 천사의 얼굴로 나타난 거예요. 천사는 이 땅에서 사자 같은 역할을 하고, 천사 같은 역할하고, 소 같은 역할하고, 그리고 인간 같은 역할을 한다. 그 기능은 에스겔에서 하나님의 보좌에서 그렇게 기능적으로 하게 되는 겁니다.
홍색과 백색과 자색이 있는데 이게 아까 공부한 것을 복습하겠어요. 천사는 하나가 아니고 여럿이지요. 왜냐하면 기능이 각자 지시받은 기능이기 때문에 한 분은 따로 계시다는 것을 천사의 기능을 통해서 묘사하고 있는 거예요. 천사는 내 보고 절하지 말라. 이건 요한계시록 마지막에 사도요한에게 하는 말이에요. 왜 나보고 절해? 나는 기능인인데. 아니 택배 준 주인한테 이야기해야지. 택배기사보고 절하는 게 어디 있어. 이리 되는 거예요.
나는 아니요, 내 보고 하지 마세요. 은혜 받더라도 주님의 은혜 받았지 나한테 하지 마세요. 그런 것은 사도바울이 사도행전에 나오지요. 사도바울이 병을 고치니까 그 당시 사람들이 진짜 신이 인간이 되었다 해가지고 사도바울을 일행을 신으로 섬겼습니다. 기겁을 하고 도망쳤어요. 야~ 인간들이 수준이 이것밖에 안되나.
그래서 홍색, 자색, 백색이라 하는 것은 일단은 이게 나눔이에요. 이게 숫자가 3이지요. 3은 뭐가 아니다. 하나가 아니니까. 숫자 1은 1이 아니에요. 3으로 흩어져있어요. 그럼 홍, 자, 백은 요 하는 기능은 어떤 기능을 하느냐, 일단은 이게 홍, 자, 백 구분하는 것은 천사의 기능은 각기 구분되어 있다는 겁니다.
스가랴1장20절을 다 같이 봅시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공장 네 명을 내게 보이시기로 내가 말하되 그들이 무엇하러 왔나이까 하니 대답하여 이르시되 그 뿔들이 유다를 흩뜨려서 사람들이 능히 머리를 들지 못하게 하니 이 공장들이 와서 그것들을 두렵게 하고 이전의 뿔들을 들어 유다 땅을 흩뜨린 여러 나라의 뿔들을 떨어뜨리려 하느니라 하시더라” 이리 되어있지요. 공장이란 말은 이게 굴뚝에서 연기 나는 공장 말고 장인. 네 명의 장인을 천사들을 보내신 거예요. 그럼 천사를 보내서 이렇게 한다는 말은 인간은 인간 이스라엘 백성은 스스로의 힘으로 다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룰 수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이지요.
아까 했지요. 예수님은 누굴 닮았다고? 기능이. 천사를 닮았지요. 그럼 천사가 왔다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가 알아서 자기가 정신 차려서 하나님의 약속된 그것을 이룰 수 있다? 없다는 말입니까? 없지요. 그럼 예수님이 오셨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딱 해답 나오잖아요. 예수님 오셨다는 말은 일을 누가 혼자 한다? 예수님 홀로 하시는 거예요.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이 없다는 말은 예수님의 이름이 하시고 그 다음에 예수님의 이름이 어디서 작용하느냐, 예수님의 이름이 세상에 예외 없이 다 작용하는 거예요. 제가 지금 강의를 어렵게 하고 싶은데, 좀 참을게요. 좀 이따 할게요.
예수님이 다 하실 때, 자, 우리가 택한 백성이 여기 있다 합시다. 그럼 주님께서 봐주는 것도 아니에요. 다른 것은 전부 다 시커멓게 보고 우리는 하얗게 보고. 하실 때 다 같이 일을 하시는 거예요. 다 같이 일을 하실 때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는 하지를 못하고 내 혼자 일을 해야 하나님의 언약의 나라 천국 간다.” 이 말아닙니까. 그러면 우리가 그 사실을 안다 할지라도 주님이 우리를 그냥 두겠어요? 가만두겠어요? 아니면 조치를 취하겠습니까? 조치를 취하겠지요.
그 조치가 뭐냐 하면 크게 쓸게요. “나의 것을 더 이상 요구해서는 아니 된다.”는 말이에요. 성령이 오고 십자가를 알게 되면 “주님, 그럼 제거는 어디 있습니까?” 말을 하지 말아라는 말이지요. 내가 나에 대해서 어떤 기대나 어떤 희망 같은 것은 이제부터 완전히 종결되어야 된다 말이지요. 그게 조치에요. “주님, 저 착하지요. 다른 사람들 다 조지세요.” 이러면 안 되고 너도 가만 안 둘 거야. 우리도 포함시켜서 하는 겁니다. 제가 말을 자꾸 주저하는 이유가 있어요. 이 말이 들어가야 이해가 되는 설명이 되는데.
설명하면서도 이 말이 어려워요. 하나는 뭐냐 하면 속함과 포함이 말이 차이가 돼요. 영어로 하면, 속함은 belonging, 포함은 inclusion, 포함이라는 것은 포함하는 거예요. 우리 여기 성도가 있고, 여기 비성도가 있다면, 이를 다 포함시켜버립니다. 그리고 여기 예수님 계시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 계시고 성도 있고 불신자 있다면 하나님께서 이것을 버릴까요? 안 버릴까요? 예수님 있어도 “아버지,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다 버려요. 포함돼요. 버리는데 예수님이나 성도는 버려놓고 거기에 belong 속하지 않기 때문에 성령을 보내가지고 여기서 따로 건져내시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렇게 유명한 구원이라는 말입니다.
구원이 되려면 belong이 아니고 inclusion된 상태에서 자기 백성과 다른 백성을 구분지어서 따로 뽑아내는 그 작업이 구원이고 그 작업을 지금 천사들을 동원해가지고 미리 보여주는 거예요. 천사를 통해서. 그런데 이 포함이라는 생각을 해야 될 텐데 우리 몸의 본성은 포함이 아니고 belong이에요. 어디에 속했다. 예속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예속된 상태에요.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미련이 많아요. 이 세상에 대해서. 아까와요. 아까 했잖아요.
지금 평생을 살아온 공들였던 이것을 한꺼번에 과거를 토한다는 것은 내가 싫어. 내가 너무 아까워서. 그동안 애쓰고 노력한 것이 너무 헛발질했다는 자체가 너무 부끄러워서 뭔가 성과내고 싶어. 이런 예는 전에 많이 들었는데 또 한 번 예를 들면 헌집을 놔두고 새집으로 갔는데 이 헌집에 애들 키 측정한다고 여기다가 애 클 때마다 숫자로 표시를 해 놨다 말이지요. 그래서 엄마, 아빠가 떠나려고 하는데 애가 하는 말이 “엄마, 아저씨한테 부탁해가지고 요 부분만 뜯어내면 안 돼” 왜냐하면 키 잴 때마다 자기 역사 아닙니까. 자기의 역사, 과거, 시. 공간. 자기의 시. 공간을 여기서 찾을 수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럼 그걸 왜 갖고 오느냐, 그거 없이는 지금 내가 아닌 거 같아. 나 아닌 거 같아.
그럼 내가 아니면 사는 게 붕 떠버립니다. 애들이 이사 때 제일 반항하는 게 뭐냐 하면 전학하는 거예요. 멀리 이사가 버리면 그동안 친구하고 다투던 좋든 간에 친구들하고 얼마나 많이 사귀었습니까. 그 친구들하고 다 떠나고 또 새 친구 사귀려고 하면 기가 차지요. 그래서 막 달려들지요. 왜 엄마, 아빠만 생각하고 왜 내 의견은 묻지 않느냐고 하는데.
애들한테는 부모의 교육방침에 첫 번째는 뭐냐, 절대로 애한테 선택권을 줘서는 안돼요. 니 이거 할래? 저거 할래? 짬뽕 먹을래? 짜장면 먹을래? 물으면 안돼요. 무조건 주는 대로 먹여야 돼요. 그래야 애들이 부모에 대해서 안정감을 느껴요. 만약에 부모가 자꾸 자기에게 물어버리면 자식들은 부모한테 안정감을 찾지 못해가지고 친구 찾기 바쁘지 부모한테는 학교 갔다 와서 말도 안 꺼내고 싶어요. 왜? 해봐야 또 귀찮게 물으니까. 저녁 때 뭐해줄까? 볶음밥 해줄까. 떡 볶기 해줄까. 주는 대로 쳐 먹어야 돼요. 왜 애들한테 자꾸 기세에 눌립니까. 왜 기에 눌립니까.
애한테 줄 것은 엄마의 안정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주지 마세요. 엄마는 봐라. 돈 다 떼어도 안정되잖아. 그것만 줘라 이 말이지요. 벌벌 떨지 말고. “엄마, 아빠 이제 큰 집에 사는 거 너무 지루했지. 우리 작은 집으로 모여 살자. 방 한 개에서. 얼마나 즐겁겠어.” 엄마의 그 안정감. 돈 다 떼어가지고 졸지에 쫓기면서 안정감하나는 자식 앞에서는 끄떡없어야 돼요. 심지어 인생은 아름다워야 돼요. 에 영화를 보면 아버지는 가스실에 가면서 아들 보고 있으니 갑자기 씩씩하게 걷습니다. 유명한 영화지요. 아카데미상 받은 거. 인생은 아름다워라, 이태리 영화라.
그냥 풀 죽어서 가스실에 가는 게 아니라 애가 보기에 씩씩하게 보이는 거예요. 너도 나처럼 씩씩하게 살아라. 주님보다 씩씩한 분 어디 있습니까. 주님은 정말 씩씩해요. 제자들은 벌벌 떨고 있는데. 문을 닫아 놓고 로마 군병이 잔병이 체포하러 올까봐 벌벌 떨고 있을 때 주님께서 문 열지도 않고 쓱 들어와 가지고 “잘 있었지? 나 이 정도야. 이런 존재야. 성령 받아라.” 이처럼 너희들도 나처럼 이렇게 될 것이다. 나처럼 그렇게 될 것이다.
이 세상에 시. 공간에 구애받지 않아야 될 것은 belong 거기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 예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그냥 포함돼 있는 거죠. 그냥 포함돼 있는 거예요. 하다보니까 주위를 보니까 전부 다 불신자에요. 교회 다니면서 벌벌 떨고 있는 거예요. 벌벌 떨면서 교회 다녀요. 목사는 좋다고 협박 공갈하고요. 당신 그렇게 하면 저주 받는다고 협박공갈하고 지옥 간다고 하고.
구원이라 하는 것은 일체 내 쪽에서 할 수가 없습니다. 이건 스가랴에 천사가 와서 알려준 것은 현재 이스라엘 백성들이 쫓겨나가지고 그동안 70년 동안 포로 잡혀와 가지고 겨우 본국으로 돌아왔거든요. 돌아왔는데 여전히 성전을 짓지를 않고 있어요. 왜냐? 그동안 살아왔던 그 몸이 기억한 것이 있기 때문에. 이것 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제목 또 바꿔야 되겠네요. 속함에서 포함으로.
애굽나라 라는 것은 그냥 역사 속에 있던 거예요. 잘 들으세요. 애굽 나라는 그냥 역사 속에 있는 나라입니다. 공백의 지배자와 관계가 없어요. 하나님께서는 애굽나라에 누굴 보내느냐 하면 애굽나라에 요셉을 보내버리지요. 애굽나라에 요셉을 보내버리면 이건 뭐냐 하면 역사는 아니고 사건이 되어버립니다. 이만큼 설명했으니까 이것보고 어렵다고 이야기하지 마세요.
애굽나라의 요셉이 가야하는 것은 이건 요셉이 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요셉이 언약대로 가는 겁니다. 언약대로 간다는 증거가 뭐냐 하면 꿈에 어릴 때부터 요셉의 꿈에 뭔가 희한한 꿈을 꿨어요. 보리짚단이 절하고 해와 달이 자기한테 절하는 그런 꿈을 꿨다 이 말이지요. 꿈을 꿨을 때 이 꿈이 요셉을 이끌게 돼요. 꿈이 요셉을 이끌게 됩니다. 이걸 가지고 시편105편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말씀에 응할 때까지’ 말씀 다른 말로 계시지요. 계시가 응할 때까지 요셉은 그 계시 밖으로 못 벗어납니다.
그런데 계시라 하는 것은 이 세상에 없는 거예요. 공백, 빈자리인 거예요. 빈자리에 있는 말씀이 누굴 만나느냐, 요셉이라는 눈에 보이는 형상화된 인간, 인간 어린 애를 덮친 거예요. 그러니까 말씀이라는 것은 말씀, 사건은 눈에 안 보이지만, 뭔가 요셉이 움직여요. 형한테 팔려 가가지고 애굽의 보디발의 집으로 가지요. 거기서 꿈을 해몽하고 하는 이상한 현상들을 보여준다고요. 이 현상들이 보여준다면 이 애굽나라는 졸지에 뭐냐 하면 어디에 휘말렸느냐 하면 하나님의 이 역사, 인간의 눈에 보이는 세계, 이 세계에 속하지 않는 다른 세계의 뜻을 펼치는 곳에 애굽이 이게 말려들어버렸어요.
제가 여기서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인간은 눈에 보이는 대로 그 현실이 전부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겁니다. 인간이 눈에 보이고 눈에 띠이고 하는 그 외에는 그런 나라는 없어요. 여러분, 안 믿는 가족들이 예수 안 믿겠다는 것에 충분히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왜냐, 그 사람들은 보이는 세계가 전부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세계라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보고 있는 세계, 살아있는 인간, 그 세계만이 전부이고, 죽은 세상이 어떻고 그런 것은 생각도 안하는 겁니다. 그건 애굽도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문제는 사건에 휘말려 들어갔다 이 말이죠. 어떤 4식구가 있는데 본인만 복음을 알고 나머지는 교회를 안 다닌다. 절에 가던지 복음을 안 믿는다 할 때, 새로운 여기서 성령을 받아가지고 그 중에 한 식구가 복음을 알아버리면 이 가족은 졸지에 애굽처럼 사건에 휘말려 버렸어요. 휘말려 들어간 거예요.
전도는 누가 합니까? 주님이 하지 인간은 전도할 수가 없어요. 인간은 순교나 전도를 할 수가 없습니다. 선교사들이 외국에 나가서 선교를 한다고 하는데 참 답답해요. 이 국내에 선교할 때가 많은데 왜 하필이면 국내 놔두고 외국에 왜 나갑니까. 그건 100% 대장질하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지가 당회장, 부교역자 때문에 가만히 보니 지가 취직할 때가 별로 없거든요. 그래서 하는 거예요. 그리고 아 교육보다 영어배우고 싶어서 그래요. 미국으로 영국으로 가는 거예요.
아무리 봐도 국내 교회가 복음을 모르잖아요. 그러면 이 땅에서 순교해야지요. 이 땅에서 욕 얻어먹어야지요. 욕 안 얻어먹고 어디가 대우받으려고 자꾸 미개척지에 간다. 주의 뜻이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러 간다. 자꾸 되지도 않는 핑계를 대는데 모든 복음은 전도는 주님이 하시는 거예요. 주님이 하시지 사실 인간은 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복음 아는 순간 그 사람은 좋든 싫든 그 사람은 선교사에요. 그 가정에 전도자입니다. 전도자 선교사의 특징은 뭐냐, 절대로 복음을 전하지 마세요. 복음을 전해버리면 내가 아는 것을 전하기 때문에 이건 계시를 전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믿는 역사를 전해버려요. “나는 이렇게 교회 가서 신앙생활 잘했습니다.” 그걸 간증이라 치고 그걸 가지고 전도하면 전도가 되지를 않아요.
그건 눈에 보이는 것은 남들이 그걸 그대로 흉내내버려요. 암에 걸렸는데 기도한 가운데 드디어 암4기가 났어요. 이래버리면 암 걸린 사람이 그걸 보고 자기도 암 낫는 그러한 미래, 시간이죠. 그런 미래를 자꾸 탐을 내어 가지고 나도 예수 믿고 암 나아볼래. 이렇게 되어버린다 말이죠. 그건 belong이죠. 예속된 거예요. 시간과 공간에 예속된 거예요.
전도라 하는 것은 내가 안하고 싶은데 주께서 어떤 결과를 낳을 때 전도가 됐다. 전도를 하게 되면 저 사람이 구원을 받았는데 내가 해 준건 아무것도 없었다. 두 요소가 다 만족해야 그게 전도에요. “내가 니를 위해서 얼마나 중보기도 했는지 아느냐. 너 때문에 교회 가라고 얼마나 보태줬냐.” 이래 버리면 그건 전도가 아니고 나를 닮은 사람을 같이 교회 다니면 얼마나 내가 행복하겠느냐. 하는 자기의 살아왔던 그것을 또 재탕하는 거예요.
그래서 전도를 방해하시는 분은 누구냐 주님이 전도를 방해해요. 주님이. 니 전도 하지 말라. 니 전도 안 해도 택한 백성은 다 건진다. 왜 니가 용쓰고 그러느냐. 애굽나라로 하여금 요셉으로 인하여 애굽나라가 약속에 말려들었어요. 그래서 요셉을 건드리게 되면 애굽나라가 망하게 되어있습니다. 이건 애굽나라가 원했던 게 아니에요. 본의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요셉을 통해서 와서 그 다음에 요셉을 알지 못하는 바로왕이 등장해서 요셉의 후손들 히브리인들을 힘들게 하니까 애굽나라에서 열 가지 재앙이 터져버린 거예요. 이게 천사의 기능이거든요.
자,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천사는 배후에 한 분이 계시다. 천사는 기능자다. 기능자인데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의 언약, 계약 다른 말로 약속, 약속대로 수행자다. 수행자인데 이 세상 자체가 이미 악한 천사의 지혜를 받았기 때문에 수행할 때 심판이다. 그러면 심판을 하기 위해서는 심판을 구분해요. 예속된 거, 소속된 거, 노예지요. 노예와 아니면 그냥 같이 섞여 사는 것. 섞이지도 않고 그냥 함께 사는 것. 포함된 자를 구분하는 심판기능을 이 천사들이 하게 됩니다.
그러면 빨간 천사, 자주색 천사, 하얀 천사, 이 천사는 연합해서 합동해서 이 심판 기능을 수행을 해요. 할 때, 스가랴1장21절 봤지요. 심판을 보는데, 여러분들이 지금 잘 이해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해나가겠습니다. 천사는 영이기 때문에 이 세상을 볼 때에 뭐냐 하면 심판 받을 그러한 영의 지배하에 있습니다. 인간을 보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여기에 뿔이라는 게 있습니다. 뿔나왔지요. 21절에 보면, “내가 말하되 그들이 무엇하러 왔나이까 하니 대답하여 이르시되 그 뿔들이 유다를 해치니” 뿔. 뿔이니까 이것은 짐승이라고 하면 돼요. 짐승.
그러니까 이것은 악마는 보이지 않지만, 악마가 시. 공간에 흐르고 있는 이 땅의 역사 속에 올 때는 악마를 표현할 때는 뭐로 하느냐 하면 뿔로 표현하는 거예요. 아까 원리와 마찬가지입니다. 뿔로 교만과 건방짐의 묘사지요. 그래서 짐승이 인간을 지배하는 천사 자체가 시건방지고 까불락 까불락 거리고 교만하기 때문에 덩달아 인간들도 그 성깔 그대로 다 닮아가지고 이건 뭐 전부 다 교만과 자기 사랑, 이런 걸로 있다 말이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거 포함돼있고, 예속돼있는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자력으로 못 빠져나오니까 뭘 치느냐 하면 보이지 않는 악한 영을 쳐버리는 거예요. 예수님은 누굴 닮았습니까? 천사를 닮았지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할 때는 귀신을 내보내는 거예요. 귀신을. “귀신아, 나가라!” 대화를 해도 귀신하고 대화를 해요.
그리고 귀신 나가고 난 뒤에 belong 예속이 아니고, include 포함된 사람은 그냥 멍청하니 되어버렸지요. 뭐지? 귀신들린 청년이 귀신이 나가고 난 뒤니까 멍청하니 되어버렸어요. “내가 무덤에 왜 와있지?” 다른 사람이 “제정신이 돌아옵니까?” “이 정신이 원래 내 정신이야.” 이러고 있다 말이죠. 뭔가 다녀갔는데 딴 사람이 됐는데 본인은 그 딴사람인줄 몰라요. 그동안 평소에 귀신 들렸기 때문에.
불신자들 성령이 오지 않은 사람은 전부 다 귀신 들린 사람들이에요. 참, 좋은 사람들 많아요. 안 믿는 사람 가운데서도 아낌없이 자기 거 가지고 어려운 사람들한테 동정하는 사람들 많고 자기거 보다 남을 더 챙기는 사람들 많아요. 얼마나 착한지요. 그 일본 위안부 했다고 그걸 다 30년 동안 거두어준 그런 사람도 있잖아요. 지금 비비꼬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윤미향 같은 그런 사람 있잖아요. 그 밑에 밥 빌어먹는 사람들 많잖아요. 얼마나 착해요. 위안부 한다고. 위안부 역사는 이거 뭐가 돼요? 뭐지요? 역사지요. 역사는 뭐다? 정체성. 아이덴티티. 쉽게 하면 민족의 자존심이에요.
결국 인간이 하는 짓거리는 뭐냐, 인간의 존엄성, 인간의 자존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 일치단결해서 힘을 합한 것이 인류의 지혜, 인류의 문명의 힘이라고 학교에서 그렇게 다 가르치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인류애가 중요하지만 일본보다는 우리나라는 대한민국은 우리 편이다. 이렇게 될 때 그걸 뭘로 보느냐 한 자로 ‘뿔’이에요. 뿔. 왜 한국 사람은 일본 사람 편을 들지 않고 왜 한국사람 편을 듭니까. 축구할 때 일본 이겨라! 하지 않고 왜 한국 이겨라! 하는 이유가 뭐냐, 물으면 답변이 뭐겠어요?
“제가 교만해서 그렇습니다.” 이럽니까. 아, 대한 사람 대한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대한민국에 살아야지요. 그게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그 이유가 없지요. 오늘 진짜 어렵다. 이유가 없지요. 인간은 없음에 예속되어있습니다. 없음에. 계속 묻고, 묻고 해도 이유가 없어요. 이유가 없어요. “당신은 어떻게 해서 십자가복음을 알게 되어서 당신의 과거가 다 헛발질이라는 것을 토해냈습니까?” 이유는 없어요. 이유가 없어요.
그냥 사랑 받은 거고, 그냥 미움 받은 거예요. 그냥 주께서 성령이 찾아오신 거예요. 성령이. 언제 몇 월 몇 시에 온다하는 것은 구원파 주장이고, 우리는 변화된 것만 하면 되거든요. 변화된 것. 구약에서는 구체적으로 천사가 스가랴에게 천사가 구체적으로 사람이라는 모습으로 찾아왔거든요. 스가랴1장10절에 보면,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땅에 두루 다니라고 보내신 자들이니라” 화석류 나무라 하는 것은 팔레스타인 저도 가봤는데 그냥 그 동네 나는 잡풀 같은 거예요. 선자가 가로되 땅에 두루 다니는 이 사람은 누구냐, 1장9절에 보면, 이 사람은 누굽니까? 라고 할 때 누구라는 말 대신에 “여호와가 보낸 사자다.” 이렇게 하지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누구라고 하는 “내가 누굽니다.” 라는 말을 하지를 않지요. 왜냐하면 내가 누구라고 되어버리면 이건 하나의 개성이 되어버려요. 이건 이 땅에서 인간들이 서로 “나는 누굽니까?” “나는 누굽니다.” “아이고~ 나는 김 서방입니다. 이 서방입니다.” 자기들 인사할 때 하는 것이지 천사라 하는 것은 기능을 시키는 대로 하기 때문에 여러 기능으로 족해야지 내가 누굽니까? 말을 할 필요가 없어요.
그래서 천사는 어떤 일이라도 천사 이름은 뭐냐, 바로 주의 이름이에요. 왜? 천사한테 일을 시켜보니 우리 주님이기 때문에 그래요. 여호와에요. 여호와 하나님이에요. 얍복강가에서 야곱을 만났던 분이 누굽니까? 천사인 동시에 하나님인 동시에 주님이지요. 주님. 그 이스라엘 이름은 누구 이름입니까? 주님 자신의 이름이지요.
오늘 강의 내내 제가 말씀드린 것은 절대로 땅에 이 인간끼리 소통되고, 통용되는 그 언어가지고 그 언어만 있는 게 아니고 언어에 생각하는 구조가 있거든요. 사후에 체계에 구조가지고 절대로 천사를 소유하려고 하지 말고 도리어 천사가 그걸 이용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큰 덩치가 왔는데 천사가 우리 집에 와서 하는 말이 “아, 목욕 좀 할까.” 보니까 천사 키가 한 4미터 넘어요. 몸무게는 200키로 넘는다고 칩시다. 그럼 욕조를 보니까 욕조는 작아요. 그런데 천사가 놀랍게도 자기 몸을 쪼그리더니만 욕조 안에 딱 맞추어서 누워있다 말이죠. 누워서 목욕하고 있는 거예요. 분명히 덩치는 큰데. 막상 욕조 안에 들어가니까 욕조에 맞도록 자기가 조절했어요. 그런데 만약에 친구가 와가지고 “너희 집에 손님이 있는데 손님 키 크다면서.” “그래, 키 커” “얼마나 큰가 보자.” 문열어보니까 “에이, 1m75Cm밖에 안되네.” 욕조에 맞췄으니까.
그리고 모든 것을 다 조절이 가능해요. 천사들이. 인간들의 시. 공간. 인간들이 아는 형식으로 오기 때문에 그래요. 그게 일종의 낮아짐. 낮춤이지요. 낮춤. 빌립보서2장에 보면 주께서는 어디까지 낮췄느냐 하면 십자가 죽기까지 낮아졌지요. 제자들이나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만하게 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야기하니까 큰소리치는 줄 알았어요. 인자와 함께 천사와 함께 올 것이다. 내가 구름타고 올 것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얼마나 고통이 아팠으면 저렇게 객기와 허풍으로 때워야 약간이라도 위로가 되겠느냐. 이런 식으로 예수님을 곡해한 거예요.
얼마나 답답했으면 과대망상증이라도 지금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려고 저렇게 용을 쓰느냐. 그런 식으로 생각했지요. 그러나 이미 구약 때부터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맞춰있는 인간들의 눈으로 남을 보듯이 그렇게 눈에 보이는 식으로 자기를 맞춰나갔던 겁니다.
그러면 여기 스가랴1장에서 천사들이 왜 왔느냐 여기 15절에 보면 나옵니다. “안일한 열국을 심히 진노하나니 나는 조금 노하였거늘 그들은 힘을 내어 고난을 더하였음이라” 안일한 열국을 심히 진노하나니, 진노는 심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악마의 세계를 완전히 싹쓸이 다 쓸어버리고 멸망시키는 거예요. 멸망시켜버리면 이건 belong 예속된 것은 그냥 멸망하면 되는데, 문제는 그냥 다 밀어버리면 inclusion 포함된 것이 다치잖아요.
의인 열 명이 있으면 안 된다는 말이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그렇게 기도할 때 멸망하는 건 좋습니다만, 같이 멸망당하면 하나님의 정당성에 흠집이 되지 않습니까. 이건 자기 백성 의로운 자를 같이 멸하는 것은 있을 수 없지 않습니까. 라고 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서 하되, 자기 백성을 건지는 거예요. 건질 때, 자기 백성이냐 아니냐를 어떻게 아는가, 성전 지으면 자기 백성, 성전 안 지으면 남의 백성 되는 거예요. 이게 천사가 와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여기16절에 봅시다. “그러므로 여호와가 이처럼 말하노라 내가 불쌍히 여기므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 내 집이 그 가운데에 건축되리니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쳐지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이 포함된 inclusion이죠. 이 포함된 사람. 각자 가는 길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일시적으로 한시적으로 이 세상에 같이 살아가는 사람은 뭐가 다르냐 하면, 인생이 살아가는 방향이 달라요. 벡타가 달라요. 방향이 달라요. 방향이. 방향이 다른데, 이 성도는 이 스가랴에서는 뭘 해야 하느냐 하면, 성전을 건축을 해야 돼요. 성전 건축을.
자, 오늘 강의를 얼마나 여러분이 잘 들었는지 복습하겠습니다. 성도의 방향은 이 땅에 성전을 건축하는 것이다. 여기 분명히 나와 있으니까. 스가랴에 분명히 예언되어 있으니까. 성전건축 누가 합니까? 이게 제 질문입니다. 성전 건축 누가 하지요? 아까 분명히 했잖아요. 예수님이 합니다. 예수님이 하는데 유대인들은 이 스가랴보고 누가 한다 했습니까? 유대인 본인이 성전 건축하겠다고 나선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한테 죽었느냐 하면, 돌아가셨느냐 하면, 성전 건축하려는 유대인한테 죽었어요.
이것은 무엇을 의도하느냐 하면 성전 건축을 할 때 주님께서는 이건 사건으로 오시는 거예요. 성전 건축도 사건으로 이루어지는 겁니다. 전도도 사건인데, 이 인간들은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교회나 유대인들은 뭐냐 하면 뭐를 의지하느냐, 찬란한 역사에 의지해서 성전을 건축하려고 하는 거예요.
우리 예배당 건축하는데 10년 걸렸습니다. 이건 성전 아니에요. 성전 건축은 성령만 순간적으로 성령만 오면 성전 건축 끝났어요. 깔끔하게 끝나버렸어요. 성령이 있는 곳이 성전이거든요. 주님께서 성전 건축을 하시는데 요한복음2장에 보게 되면 내가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성전을 건축 하겠다 했습니다.
이건 예수님이 벽돌로 쌓는 게 아니고 죽고 난 뒤에 죽어버리면 뭐가 되지요? 죽게 되게 되면 이 세상의 시. 공간에서 없어져버리지요. 그러면 이건 뭐냐 하면 없음의 세계지요. 없음의 세계에서 현재 이 있음의 세계에 영적으로 새로운 성전을 사건을 통해서 나타나게 하시는 겁니다. 사건을 통해서. 강의를 그냥 끝내고 싶은데요, 요 사건을 했을 때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거 묻고 싶지요. “목사님, 저 성도 맞아요?” 이거 묻고 싶지요.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본인이 하루, 하루 사는 것이 역사가 아니고 사건으로 다시 말해서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입니다. 이걸 어떻게 아느냐, 수요일도 그런 설교했는데요.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이 심각하게 이상한 현상이어야 돼요. 내가 여기 산다는 것.
내가 1900 몇 년도에서 몇 년도 사는데 이 사는 것이 나는 옛날에는 복음을 모를 때는 당연히 사는 걸로 여겼는데 무심코 살았는데 지금 복음을 알고 보니까 내가 이 땅에 없어야 될 것이 태어났고 이만큼 살아온 것도 하나님의 힘과 도움 없이는 내가 하루라도 살 수 없었음을 지금 알 때 그건 지금 나는 하나의 주님과 교제되어있는 include되어있는 사건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천사, 사실은 천사보다 더 대단한 사람인데, 일단 천사로 봅시다. 우리들이 하나의 천사에요. 기능이 있어요. 나는 무엇을 얼마나 재산이 많으냐, 부동산을 얼마나 갖고 있느냐가 아니라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 사람이냐,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예수님은 지금 살아계시다, 를 전하는 그 사건만 보여준다면, 보여주고 있다면 여러분의 힘이 아니고 성령의 능력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영의 사람은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결단코 하나님 나라를 볼 수가 없다는 의미가 이제 무슨 의미인지를 천사를 통해서 알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천사 아님에도 불구하고 더러운 육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천사의 기능을 하게끔 날마다 사건화 시켜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