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7강-YouTube강의(혈연관계 아가 6:9)20200616-이 근호 목사
317강-YouTube강의(혈연관계 아가 6:9)20200616-이 근호 목사
제317강, 제목은 ‘혈연관계’. 혈연관계는 모든 인간세상의 바탕입니다, 기본입니다. 가족이 중심이 되어서 시작이 된 인간세계는 나중에 커서는 이제 가족을 넘어서 사회를 구성하는데 이 가족에서 일어난 일이 번식이에요, 생식. 그래서 어미가 있으면 어미에게서 자식이 태어나서 사람이 발생되죠. 우리가 알고 있는 바탕, 근본, 바로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은 성경이 아니라도 세상에서 다들 오랫동안 언급되어 왔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은 ‘부모 없이는 네가 없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마태복음 12장 끝에 보면 예수님께서 설교하실 때 군중들 그 뒤에 예수님의 모친과 예수님의 배다른 형제들이 와있죠. 제자들이 특별손님 왔다고 예수님에게 알려줍니다. “예수님이여 어머니가 오셨고 형제들이 오셨습니다.” 라고 할 때 그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참 혈연관계에 속한 사람들이 들으면 섭섭하기 짝이 없는 말씀을 해요. “저분도 우리 어머니고 이 분도 형제지만 여러분도 우리의 가족입니다.” 이렇게 말을 좋게 하면 되는데 그렇게 좋게 안하셔요. “누가 내 모친이며 누가 내 형제냐”하고 반문하죠.
이 말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말씀 자체가 무엇을 바꾸겠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설교하는 중이니까 설교하는 그 설교의 바탕은 세상 사람들이 알다시피 혈연관계가 바탕이 아니고 그보다 더 우선되는 게 있어요. 예수님의 존재에서 나오는 그 말씀이 더 바탕이 되고 기본이 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거기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누가 내 모친이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내 모친과 형제들을 보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너희들이 곧 내 모친이고 내 형제니라.” 쉽게 말하면 “내 가족이다”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자 이 말씀에 대해서 이 말씀과 관련 있는 구약의 말씀을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구약 아가서 6장 4절부터 쭉 보게 되면 이런 말씀 나와요. “내 사랑아 너의 어여쁨이 디르사 같고 너의 고움이 예루살렘 같고 엄위함이 기치를 벌인 군대 같구나 네 눈이 나를 놀래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라 네 머리털은 길르앗 산기슭에 누운 염소 떼 같고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암양 떼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고 너울 (여인들이 얼굴 가리는 투명한 수건) 속의 너의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그만큼 싱싱하다 이 말이죠. 이빨이 시릴 정도로 싱싱한 거예요.
8절, “왕후가 육십이요 비빈이 팔십이요 시녀가 무수하되” 그러니까 내 주변에 여인들이 그렇게 많더라도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그 다음에 “그는 그 어미의 외딸이요 그 낳은 자의 귀중히 여기는 자로구나 여자들이 그를 보고 복된 자라 하고 왕후와 비빈들도 그를 칭찬하는구나” 이렇게 되어 있어요.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에게 반해서 아름다움을 묘사하거든요.
아름다움이 먼저일까요, 사랑이 먼저일까요? 아름답기 때문에 이렇게 사랑하는 겁니까, 아니면 사랑하니까 이렇게 매사가 아름답게 보이는 거예요? 그 질문이 의미가 있는 이유가 만약 아름답기 때문에 사랑해버리면 나중에 세월 지나서 할머니가 되게 되면 그렇게 사랑스럽지 않아요. 왜? 조건이 있었기 때문에. 아름답다는 조건 하에. 아무리 자기가 젊을 때 좋아했던 여자라 할지라도 그 여자가 젊을 때하고 나이가 들 때하고 차이가 나요, 아름다움에. 피부의 윤기부터 해서 모든 것에서 차이가 나거든요.
그러니까 만약에 순서를 바꿔서 사랑한다면, 익어가는 것도 사랑스러운 거예요. 늙어가는 게 아니고, 늙어가면 밉상인데 익어가는 것도 사랑스러워, 모든 게. 숙성되는 것이 사랑스럽겠죠.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할 때 사랑해서 아름답게 보십니까, 아름다워서 사랑하는 겁니까? 사랑스럽기 때문에 우리의 하는 모든 짓거리가, 행위가 아름다워요.
우리는 죄짓는다고 하는데 주께서는 죄짓는 모습조차도 사랑차원에서 거두어집니다. 왜냐하면 죄가 있는 곳에 의가 넘치기 때문에, 은혜가 넘치기 때문에.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모르는 이유가 있어요. 그건 뭐냐 하면 내 사랑에 너무 몰두해서. 그러면 내 사랑에 너무 몰두했다는 것은 혈연관계와 상대해서 우리는 가족, 혈연관계에, 그냥 육에서 나온 육에 매여 있어버리면 사랑을 의도적으로 얻으려는 시도를 해요. 이것이 육의 한계입니다.
육적인 존재의 특징은 뭐냐 하면 영의 관계에서 끊어졌기 때문에 내가 사랑받을 짓을 해야 사랑할 거라는 생각을 가져요. 그렇게 되면 이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이나 예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육적인 마인드, 육적인 사고방식을 자기한테 매사에 적용시켜버립니다. 하나님 이렇게 착한 짓 했으니까 저 사랑해주세요, 저 예뻐해주세요. 내가 요런 짓 했으니까 주께서 얼마나 미워하실까. 다음에는 착한 짓해서 이 미운 짓을 내가 변경시켜보겠습니다. 복 받게, 복이 오도록.
그렇게 자꾸 시도하는데 그것은 바로 육에서부터 육의 사고방식 가지고 억지로 영을 꿰뚫을려고, 이어보려고 시도하는 겁니다. 지금 여기 나오는 술람미 여인이 다른 왕궁의 시녀들, “여기 왕후가 육십이요 비빈이 팔십이라” 육십하고 팔십 합치면 백오십명 정도죠. 백오십명하고 자기하고 할 때 여기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 왕에게 사랑받기 위해서 자기가 뭐 어떻게 오디션 봤습니까? 미장원에서 머리 한번 다듬고 왔어요? 그냥 그대로에요.
꾸미지 마세요. 꾸민다고 주님께서 더 이뻐하는 게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 그대로 나오세요. 세리면 세리, 창기면 창기, 강도면 강도, 도둑이면 도둑, 살인자면 살인자. 주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왔다 이 말이죠.
뭐 죄를 그렇게 이뻐하겠습니까? 그러나 사랑하는 자, 사랑한다는 이유 때문에 받아주는 거예요. 사랑하는 자를 받아줄 때는 내가 주님한테 기대했던 그것보다도 더 넘어, 더 넘치는 예상 못한 것까지 다 주셔요. 내가 예상 못한 것까지.
탕자가 집에 돌아올 때 자기가 예상한 것은 ‘이제 아들은 끝났다. 그저 종이나 해서 월급만 주면 더는 소원 없다.’ 라는 것까지만 생각했는데 세상에 아들 쳐주는 정도가 아니에요. 그 비싼 한우 잡잖아요. 소 잡아서 심지어 형한테 주지도 않던 가락지까지 끼우고 새 옷 입히고 우리 아들 왔다고, 김상사 월남에서 돌아왔다고 하는 식으로, 우리 아들 돌아왔다고 온 동네방네 다 자랑질하는 거예요. 탕자가 재산 날리고 다 탕진하고 돌아온 게 뭐 그리 자랑스럽다고 하겠어요.
그러니까 구원받은 탕자도 감히 생각 못하고 거기까지 생각 못한 그 이상의 것을 주님께서는 사랑의 이름으로 이미 준비해 두었습니다. 이 생각을 누가 막느냐? 악마가 악착같이 막아요, 악마가. 똑바로 행동해야 사랑받는다고. 온 천지, 교회, 기독교, 종교에서 다 그렇게 가르치죠. 그 이상의 것을 넘보지 못하도록.
사랑을 보지 못하고 자기의 성실하고 충실한 행함만 쳐다보도록 오늘도 악마는 우리 흔들기에 나섭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악마의 흔들기보다 흔들기에 구애받지 않고 한결같이 우리를 사랑하는 그 시선 있잖아요. 응시, 바라보심, 그게 바로 성령의 은사로서의 사랑의 진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