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존강의20200611a 베드로전서4장 7절(복음의 해석)-이 근호 목사
서울의존강의20200611a 베드로전서4장 7절(복음의 해석)-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4장 5절-7절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여기 나와 있는 이 스케줄 있잖아요. 사람하고 하나님이 뭐 사전에 의논한 거 없죠? 일방적으로 그냥 추진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일을 일방적으로 추진할 때에 인간적 입장에서는 모든 의견을 하나님께 드리면 되는 겁니다. 열차가 달릴 때 승객 입장에서 그냥 타고 있으면 되지, 기차 기관사한테 찾아가서 일부러 운전 똑바로 하라고 간섭질 하면 안 되죠. 저 뒤 객차 18호석 앉아가지고 잠자든지 책보든지 하면 되지 나설 이유는 없다 이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이 스케줄은 모든 인간을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는 말씀을 통해서, 모든 하나님의 스케줄의 열차는 어디를 향하여 달리고 있느냐 하면 ‘모든 것을 심판’을 향하여 달리고 있습니다. “이미 죽은 자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이렇게 되어 있어요.
복음이라는 것이 이처럼 마지막 신약 때에, 복음을 위하여 창세기부터 구약을 거쳐서 신약까지 줄기차게 하나님께서는 멈추지 않고 질주해 온 겁니다. 심판 앞에서의 인간의 처신은 맡기는 것. 맡기는 거죠. 간단하죠? 그냥 맡기면 되잖아요. 맡긴다는 것은 모든 권한과 모든 권리가 자기한테 있겠어요, 없겠어요? 자기한테 없죠. 모든 걸 맡겼으니까. 모든 것을 맡긴 자의 자유함. 그것이 심판을 대하는 인간의 자세죠.
모든 것을 맡기게 되게 되면 본인이 걱정할 것은 남아있겠어요, 안 남아있겠어요? 모든 걸 맡겼으니까 본인이 걱정할 것은 남아있지 않죠. 없다 이 말이죠. 모든 권한을 주님께 맡겼기 때문에. 그런데 세상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게 되면 걱정이 있고 근심을 늘어지게 하고 있죠. 걱정, 근심한다는 것은 주님의 스케줄, 주님의 이 심판 스케줄을 못 믿겠다는 겁니다. 안 믿겠다는 거죠. 맡길 마음이 없다는 겁니다, 믿음직스럽지 못해서.
그러니까 내 인생은 맡기지 않고 내가 관리하겠다 이거에요. ‘아, 야간되면 좋던데 주간되면 좋던데.’ 이게 뭡니까? 맡기지 않는 거예요. 주간되면 하늘에 별 따겠다는 거예요, 야간하면 다 따겠다는 겁니까? 왜 계산하냐 이 말이죠. 주간이 되든 야간이 되든 그것마저 하나님의 심판의 스케줄 안에 포함이 되어 있다 이 말이죠.
주께서 원하는 것은. 나한테 모든 것을 맡겼느냐 아니면 따로 네 것 챙겼느냐 지금 그걸 보시거든요. “주님께서 심판하겠다” 이 말은 무장해제하고 그냥 내 앞에서 살아. 그러니까 네가 계획하는 것이 KTX가 아니고 네가 계획하는 것이 무궁화 열차도 아니고 그건 아무것도 아니고, 세상 현실을 끌고 가는 것은 하나님의 일관적인, 창세기부터 구약을 거쳐서 신약까지 오게 되는 하나님의 계획인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 계획대로 다 맡겼는데 내 뜻대로 안 해주면 실망스러워서 어떻게 합니까?” 라고 걱정을 하죠. 주춤하겠죠, 주춤. 맡기고 싶은데 “아 이거 맡겨 놨더니만 영 실망스러울 때는 어떻게 합니까?” 라고 했을 때에, 여기 6절에 보면 죽은 자에게도 복음이 전파된다 이 말이죠, 죽은 자에게.
그러니 복음이라 하는 것은 앞에 모든 인간을 무슨 자로 보느냐 하면 이미 죽은 자로 봐요. 주님께서 음부에 가셔서 죽은 자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말은 그 죽은 자에게 전한 복음이나 지금 죽으려고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전하는 복음이나 교과서와 같아요. 똑같은 복음이에요, 똑같은 복음. “내가 좀 여유 있을 때 복음 믿겠습니다.” 하지 마세요. 여유 있을 때도 그 복음이고 여유 없을 때도 그 복음이고. 형편이 나아질 때도 복음이고 형편이 궁핍할 때도 복음이에요.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서 못 맡기는 것은 본인이 갖고 있는 그 소유와 자기가 안다는 그 재주가 이제는 얼추 본인의 인생을 본인이 꾸려나갈 것 같은 어떤 자신감 또는 거기에 대한 어떤 시도, 나름대로 자기가 갖고 있는 은밀한 계획, 그런 것들이 문제가 되는 거예요. 좀 어려운 말로 해서 8절에 봅시다.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심판 앞에서 우리가 살아갈 때 왜 사랑을 거론했느냐 하면 내 것을 따로 감추면 그것은 뭐가 되느냐하면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간음이 되고 이게 음란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간음과 음란은 내 것 때문에 발생하는 거예요, 내 것. 여기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했죠? 사랑이라 하는 것은, 하도 세상에서 사랑이란, 사랑이란 말을 많이 해가지고 사랑에 대해서 막 혼선이 일어나는데...사랑이란 ‘내 것으로 도로 가져올 게 없는 관계, 없는 상태’가 사랑입니다. 내 것으로 도로 가져올 게 없어요.
사랑한다고 결혼해놓고 나중에 남편이 하는 말이 또는 시갓집에서 하는 말이 “너 집에 올 때 혼수 얼마나 해왔다고 큰소리 치냐?” 이렇게 나올 때 “어머니, 결혼할 때 저한테 뭐라고 했습니까? 그냥 빈 몸으로 오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빈 몸으로 왔어요.”, “얘야, 빈 몸으로 오란다고 빈 몸으로 오나? 그래도 숟가락 하나는 가지고 와야지.”, “아니 빈 몸으로 오라고 해서 빈 몸으로 왔는데요?”, “야야, 네가 염치가 있어야지, 그래. 너 결혼한다고 네 시아버지가 집 사줬다.”
요새 아들 결혼하는데 아버지가 집 안 사주면 아들 쪽에서 의절하기 때문에, 아들 쪽에서 아예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겠습니다.” 뭐 이렇게 나오기 때문에, 관계 끊겠다고 협박, 공갈로 나오기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아버지가 아들 장가보낼 때 집 사줘야 돼요. 그런데 집을 사주면 좀 큰소리해야 될 거 아닙니까? 그쵸? 집 사주고 고맙다 소리 못 듣는 거예요. 아들 낳은 죄가 그래요. 집 사주고 좋은 소리 못 듣고 어느 날 집에 가면 장모가 차지하고 있고. 장모가 다 차지해가지고 집 구조부터 해서 스타일까지 전부다 장모 쪽으로 다 바뀌어져 있어요. 물론 장모도 할 말이 있죠. 아이 키워줬는데 좋은 소리 못 듣고 차비까지 썼는데 용돈 하나 제대로 못 받고 아이 교육 잘못했다고 맨날 딸하고 싸우고. 장모가 그런 소리 듣죠. 그래서 안볼 때마다 초콜렛 막 먹이고 설탕 덩어리 젤리 막 입에 넣고 아이는 좋다고 먹으면서 “할머니가 좋아요.” 그러는데 할머니가 좋은 게 아니고 젤리가 좋겠지.
사랑이라는 것은 사랑이 끝나고 난 뒤에 다시 내 것을 가질 게 없을 때 그건 사랑했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내가 이만큼 해줬는데 너는 나한테 뭐해줬는데?” 이렇게 되면 그것은 사랑한 게 아니죠. 상대에게서 내가 원한 것을 빼먹으려고 어떤 연기를 벌인 거죠. 이건 속임수죠, 속임수. 사랑한 게 아니고 속임수죠. 상대의 마음이 완강할 때 그 상대의 마음을 열기 위해서 상대가 내 마음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고 마음 활짝 열어줄 때를 늘 은밀하게 노렸죠. 노리다가 자기 마음을 열면 훅 들어가는 거죠. 완전히 코로나바이러스가 우리 세포 속에 들어오는 거랑 똑같죠. 와서 기생해서 자기 원하는 걸 다 빼먹겠다는 거잖아요. 그건 사랑이 아니고 도둑이죠, 도둑.
따라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복음이라는 것, 사랑이라는 것은요. 이것은 왜 인간의 힘으로 안 되느냐? 이게 맡겨야 될 문제거든요. 이걸 맡겨야 될 문제이지, 내가 내 인생을 어떻게 해보겠다고, 사랑해보겠다고 나서면 안돼요. 그러면 “맡기게 되면 우리가 뭐가 됩니까?” 라고 물을 때, 그건 6절에 나오죠.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을 전한다. 죽어서 죽은 자 되지 마시고 일찌감치 죽은 자가 되세요. 백부장처럼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그게 뭐 산 사람이겠어요? 주님 앞에서 완전히 죽은 자이죠.
주님 앞에 미리 죽은 자가 될 때에 그걸 ‘맡겼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맡기게 될 때, 그러면 죽은 자 되려면 어떻게 죽은 자가 될 수 있는가? 그것은 이 세상을 복음적 입장에서 볼 때에, 지금부터 조금씩 어렵습니다, 복음적 입장은 뭐냐 하면 이 세상은 이미 물 건너 간 거죠, 이 세상은 심판대상이에요, 심판대상.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복음만 받지 이 세상에 있는 인간의 의는 안 받거든요, 받지를 않아요. 인간의 의라는 것은 받지 않습니다.
복음만 받는다는 것은 복음에 비해서 인간들이 하는 이 세상은 저질이고 하나님이 받을 가치가 전혀 없음을 복음을 통해 이미 확정 났어요. 확정이 난 겁니다. ‘확정’ 한 번 쓸까요? 이거 중요한 말인데, 오늘 제목 같다. 이미 복음으로 구원하기로 확정이 되었습니다. 확정이 되었으면 꾸물떡 꾸물떡 이 세상에서 자기 괜찮은 것, 자기 의로움, 자기의 양심, 선행, 이것을 주물떡거리고 자기가 갖고 있을 이유가 없어요. 어디 진흙놀이 하는 것도 아니고. 아유, 내가 이렇게 하면 더 착할까? 이렇게 하면 내가 더 이쁘게 보일까? 그렇게 혼자서 소꿉놀이하지 말란 말이죠. 주께서는 복음을 받지, 내가 주물떡거리는 내 착함, 그런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미 거부했어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복음 앞에서 이 세상은 이미 질적으로 심판받기로 확정이 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나옴으로써 복음이 성사됐거든요. 예수님은 홀로 오셨고 예수님은 홀로 나가심으로써 예수그리스도가 복음이라고 이미 정해져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 복음을 복음 되게 하는데 세상은 예수님한테 뭐 보태준 거 있어요? 뭘 보태줬습니까? 보태주기는커녕 훼방질만 했죠.
예수님의 복음을 가지고 이걸 사랑이라고 한다면 세상은 뭐라고 했습니까? 사랑의 반대말이 뭐라고 했죠? 간음과 음란. 간음과 음란의 특징은 어떤 게 있다? 뭘 항상 놓지 않는다? ‘내 것’을 놓지 않는 것. 내 것, 나 됨을 놓지 않는 것. 맡기지 않고 내 것을 꼭 챙기는 거예요. 간음과 음란이라는 것은. 이 세상의 결혼식치고 간음과 음란 아닌 결혼식이 없어요. 전부다 사랑한다고 결혼해놓고 전부다 자기 것 챙기고 있다 이 말이죠. 가전제품 놓고 이건 누가 사온 거고 이건 누가 벌어서 산 거고.
처음에는 부부가 그렇지는 않았겠죠. 요새는 여보라 안하고 전부 오빠라 하대요, 남편보고. 처음에 신혼여행가서 “오빠, 나 사랑해?”, “사랑해.”, “사랑하게 되면, 오빠 그럼 한 달에 얼마 버는데?” 그러면 남자가 어이쿠, 훅 들어왔나 싶어서 방어 나서죠. “그런 것은 네가 몰라도 돼. 내가 생활비 줄 테니까 그런 것은 내 비밀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내가 얼마 버는지까지는 하지 마. 너도 네가 번 건 네가 하고 내가 번 건 내가 하자.” 그러면 부인이 있다가 훌쩍거리고 흑흑흑 울면서, “오빠는 날 사랑하지 않나 봐. 부부사이에는 믿음이 있어야 되는데 감추고 이게 무슨 부부가? 나 그럼 신혼여행 갔다 와서 이혼할까?” 뭐 이런 식으로. “말로만 사랑하잖아. 말로만 하지 말고 실천을 보여야지.”, “그래. 통장 니가 관리해라.” 하면서 아내 줘버리죠. 일단 경제권은 접수했어요. “니가 해라.”, “비자금 챙기면 안돼.” 또 들은 구석은 있어가지고. 단디 한다고 단도리 또 이렇게 하죠.
그러면 다음에는 한 달 지나고 남편 쪽에서 역공이 들어오죠. “가계부 한번 보자.”, “뭐 가계부 그거 쓰기도 귀찮은데.” 이러죠. “가계부 한번 보자. 내가 다 맡겼는데 제대로 하나 한번 보자.” 이렇게 나온다 이 말이죠. 그러면 여자는 또 훌쩍거리면서 “오빠는 나 사랑하지 않아?” 뭐 엉뚱한 소리하고 앉았고. 가계부 보자고 했는데 사랑이 왜 튀어나오냐?
전부다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은 나만 사랑해요. 하나님께서 복음을 주신 이유가 인간의 실상, 인간의 본성, 인간은 전혀 자기 외에 사랑하는 대상은 일체 없음. 아무리 세상에서 사랑을 남발하고 뭐 어떻게 하든 간에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음. 인간은 자기밖에 몰라. 이것을 충분히 보는 겁니다. 충분히 그걸 지적하는 거예요.
그러면 미리 하나님의 복음 속에서, 이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받지 않는다는 것. 인간이 얼마나 추잡하고 더러운데 받겠어요. 인간의 간음, 행함, 이런 것, 사랑, 믿음, 소망 이런 거 받겠어요? 받지도 않아요. 자기 사랑하면서 “주여, 사랑합니다.” 그런 거짓말을 받겠어요? 택도(어림) 없는 소리죠. 안 받죠.
그러면 이미 이 땅에서 이 세상은 내가 해도 안 되고 내가 안한다고 될 일도 아니고 오직 복음으로 구원받는다면 그 사람은 어떤 안목을 입느냐면, 이제부터 중요해요, 주님께서 십자가를 가지고 세상을 심판하는 그 동일한 안목을 가지고, 성령을 받았으니까, 복음을 받았으니까, 동일한 안목이 성령을 통해 자기 안에 장착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세상을 볼 때 세상을 그냥 보지 않고 어떻게 보느냐 하면 7절에 나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이거 누구 안목이냐 하면 이거 뭐 사람들 길거리에서 인터뷰해서 얻어낸 결론이 아니에요. 주님의 안목, 성령의 안목으로 봤을 때는 이 세상 만물은 뭐냐? 이미 마지막 때가 된 거예요. 마지막 때라 하는 것은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질적인 성숙이나 이런 것은 이제는 있을 수 없다는 거예요. 아무리 요란 떨어도 맨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말이죠. 달라질 것 없어요. 예수님을 십자가 못박아 죽이려고 했을 때는 이미 끝난 거예요. 그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외침, 그 주장, 그 의도, 그것은 평소에 본인이 본인 인생을 챙기면서 내가 내 식대로 살겠다는 그 본성을, 예수님을 가학하고 예수님을 때리고 예수님을 십자가 못박아 죽이고 밀치고 믿지 않음으로써 자기 본색은 다 드러난 겁니다.
그 사실을 이미 성령 온 사람은 알죠. 그러니까 마지막 때라는 것을 예수님과 동일한 안목을 가지고 보면서,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그러므로 너희는” 그 다음에 뭡니까? “정신을 차리고”되어 있죠. 정신을 차리고. 보다 제목을 라고 할까? 정신을 차린다.
이 세상에 어떤 힘이 있는데 그 힘은 하나님 앞에 심판받을 수밖에 없는 그러한 더러운 힘이 작용하고 있어요. 제가 더럽다고 하는 것은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더럽다는 말은 자기 것, 자기 소유에 미쳐있다 이 말이죠. 어떤 경우라도 내 것은 마지막까지 쥐고 예수나 하나님이 아니라 우하나님이 와도 절대로 내주지 않는 나만의 것을 꼭 쥐고 있는 거예요. 마지막 패, 나만의 것. 하나님께 주면서도 마지막 것을 쥐었다 놨다 쥐었다 놨다 하면서 하나님께 약을 올리는 식으로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내놓아라 할 때 “주여, 모든 걸 줬는데도 천국 안보내주면 나 이거 못 놓겠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종이 같은 거라든지 카드 같은 거, 마지막 자기 현찰 같은 게 있어서 이걸 딱 내놓으면 주님이 가져갈까봐 “잠깐만요!” 이렇게 되죠. “Just a moment! 잠깐만요. 이거 가지고가고 나 지옥 보내면 안 되는 거 알죠? 그러니까 확답 주시고 가져가세요.” 이런 식이라. 이거 정신 못 차렸어요, 정신 못 차린 거예요.
정신을 차리라는 말은 세상에서 내 것이라고 따로 어떤 자리를 마련할 수 있는 적절한 자리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전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어느 구석에 가도 심판이 떨어지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 보셔도 안 들키겠지? 하는 소박한 자기만의 공간, 자기만의 쉼터, 자기만의 밀실, 자기만의 벙커, 이거 전혀 없습니다. 나만의 공간은 주님께서 절대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꾸 도피하려고 하거든요. 여차하면 나만의 숨 쉴 공간으로 자꾸 도망을 쳐요. 마음속에, 이 안에서는 내가 왕이 되고 이 안에서는 내가 주도권을 쥐는, 최후의 보루같은 그런 거, 딱 이렇게 쥐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어디를 찾아오느냐 하면, 성령께서 찾아올 때 바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걸 보는 게 아니고 인간이 마지막까지 안 빼앗기려고 꼭 쥐고 있는 그 지점에 성령께서 직접 찾아오죠. 가장 고귀한 것. 정말 이거 없으면 나는 이제 남는 것은 자살밖에 없다. 마포대교에 가서 뛰어내리는 것밖에 없다. 마지막 자살하는 심정으로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누가 홀라당 뺏어가게 되면 더 이상 나라는 것은 존재할 수가 없죠.
성경에 나오는 쉬운 예를 들면, 전에도 이야기했듯이 모자간에 먹고 죽으려고 최후의 식사를 하고 있는데 마침 마지막 식사, 이거 떨어지면 이제 없어요, 양식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하필 엘리야가 찾아와가지고 그 모자간에 마지막 먹고 죽으려고 하는 그 양식을 엘리야가 뺏아서 자기가 먹고 말았어요, 홀라당 뺏어가지고. 단팥빵 하나밖에 없는데 “단팥빵 아이고 맛있겠다.” 하고 본인이 가져가버렸어요. 마지막 죽는 것까지 엘리야는 사렙다 과부댁을 그냥 가만 두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 이 말은 뭐냐?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것은 건성건성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가지고 약속을 이루는 게 아니고, 진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이라는 것은 기어이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는 내가 나다운 가장 고귀한 것과 바꿔치기에 나서는 겁니다.
뭐 돈 십일조 받고 돈 몇 푼 받고 십자가 줄게. 이런 거 없어요. 십자가를 줄 때는, ‘정말 이거 없으면 난 그냥 죽겠다.’ 하는 그 정도로 나에게 소중한 것, 그 소중한 것과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과 한번 비교해봐라. 어느 것이 더 중요하냐.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 잃으면 그게 인생 헛장사했죠, 헛장사한 거예요. 복음은 끝이 없지만 우리의 목숨은 이게 한도가 있어요. 심지어 휴대폰 밧데리도 한도가 있잖아요. 밧데리도 한도가 있듯이 인간의 모든 것은 끝이 있단 말이죠. 그런데 아주 어리석게도 아직 끝이 안됐다고 해서 중간이라 해가지고 마치 끝이 없는 것처럼 모든 인간들의 세상 보는 눈이 그 정도로 허접해요. 아주 어설퍼요.
끝이 있는데 끝이 없는 것처럼 여긴다고요. 특히 남자들 화장품 사게 되면 남자는 깨작깨작 이렇게 쓰잖아요. 그러니 화장품 사면 끝이 없을 것 같아. 그래서 한 3년 뒤에 보면 끝이 나요. 촛불도 그렇고 연필심도 그렇고 볼펜 알도 그렇고 뭐 여유 있는 것 같지만 어느새 세월 지나버리면 벌써 한도가 다 끝나는 겁니다. 심지어 인간의 몸이 그래요, 인간의 몸. 젊을 때 아이돌이지 지금 머리 깎는다고 아이돌 되는 거 아니거든요. 이제 한도가 40넘어가고 50넘어가거든 트롯트로 데뷔하든지 44살 먹고 트롯트 데뷔해가지고 하든지 하여튼 모든 것은 제한되어 있어요.
사렙다 과부처럼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양식, 그리고 기름과 밀가루는 이게 한도가 있어가지고 퍼내면 나중에 바닥을 치는 겁니다. 그 바닥에다가 엘리야는 하나님의 약속을 깔아버리죠. 분명히 바닥인 줄 알았는데 계속해서 밀가루와 기름이 계속 나오는 거예요. 마치 예수님의 오병이어와 같이.
주님의 사랑, 주님의 복음의 한도는 어디까지냐 하면 바로 택한 백성, 그리스도의 어린 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그것이 한도입니다. 이 사람, 마지막 백성 데려가면 그 다음부터는 게임오버, 끝나버립니다. 이제는 더 이상 세상을 유지할 이유가 없죠. 그 마지막 한 사람을 본인이라고 여겨라. 그게 정신 차리는 거예요. 정신 차린다는 말은 내가 정신 차린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스케줄을 다 아는 거예요, 하나님의 스케줄을. 복음 앞에서 세상은 이미 어떤 것도 내세울 게 없음을 안다면 그 사람이 최후의 증인이죠. 복음에 대한 최후의 증인. 항상 우리는 최후의 증인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 우리 이름을 이나 최나 박이나 성이 뭐더라도 이름은 뭐냐? ‘마지막’으로 해야 돼요. 이 마지막, 박 마지막, 최 마지막. 이것이 7절에 나오죠. 만물의 뭐가 가까웠으니?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니 성도의 세상보기, 성도가 세상을 마주하는 것은 세상자체에 대해서 느긋한 마음을 가져야 돼요. 그냥 나와 관련되어 있으면 매사가 걱정, 근심으로 다가오는데 끝 지점, 마지막 그 끝 지점에 서서 뒤돌아보면서 마지막 세상 전체가 어떻게 되었다는 것을 바로 보는 입장이라면 세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던 간에 그것은 그다지 중차대한 문제는 아니에요.
요나가 니느웨성에서 외치고 난 뒤에 산위에서 어떻게 망하는지 보는 것처럼 요나입장에서는 그 니느웨성은 그냥 끝난 거죠. 그래서 여기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고 기도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스케줄대로 되어가는 그 현실에 자기가 몸을 담고 있다, 자기가 그것에 그런 식으로 살아온 적이 있음을 뒤돌아보면서 파악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어려운 게 뭐냐 하면 그럼 성도 안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성령께서 성도 안에 들어온다.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여기서는 복음이니까 ‘복음이 성도 안으로 들어왔다’는 이 말씀은 결국 무슨 뜻이냐 하면 ‘복음에 대한 해석도 같이 들어왔다’가 돼요. 복음에 대한 해석. 복음에 대한 해석이 곧 실제 현실이에요, 실제 현실. 그렇다면 성도 본인이 복음에 대한 해석이겠습니까, 아니겠습니까, 성도 본인이? 해석이죠. 왜냐하면 본인이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니니까.
복음이라 하는 것은 모든 인간들이 예수님을 미워했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예수님을 미워한다’가 기본 사양이에요, 기본적인 요소에요. 그런데 복음을 사랑한다? 이것은 기존에서 온 게 아니고 새롭게 주어진 하나님의 새로운 관여이고 개입인데 저는 이 시간에 그걸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해석’이라고 하는 거예요, 복음에 대한 해석.
그러니 복음은 주님이 하셨고 복음에 대한 해석은 성도의 몫으로 주어진다 이 말입니다. 성도가 복음을 해석하는 것도 본인의 능력이나 지식이 아니에요. 완료된 복음의 해석이기 때문에 이 해석도 완료가 되는 겁니다, 완료가. ‘완료다’ 라고 이야기했는데 “그러면 완료된 해석이 아닌 해석은 어떤 해석이 있습니까?” 라고 반대되는 것과 비교해보면 이해하기가 쉽겠죠?
완료된 해석이 아닌 해석. 여러 가지 있지만 그중에 하나 예를 들면 고고학이라고 보는 겁니다, 고고학. 어떤 둔턱, 언덕이 있다. 옛날 문헌에 보면 분명히 이 동네가 옛날 마을의 중심부였는데 지금은 마을은 없고 그냥 언덕이 있다. 그걸 텔(tel)이라고 해요, 언덕. 옛날에는 집 지을 때 기초 닦기 싫어서 기존에 집 지은 데 위에 그 다음에 집짓고 그 다음에 집짓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고고학자들은 수직으로 그걸 파들어 갑니다. 파들어 가보면 기원전시대, 그다음에 기원후시대, 그다음에 백년시대 이런 게 다 있어요. 로마 유적 같으면 어떤 언덕이 있으면 여기 언덕 위에 집이 지어져 있어서 여길 파들어 가면 옛날 여기 집터가 이 안에 쭉 있는 거예요. 층층이 쌓여 있는 거예요, 쌓여 있다고. 다 파들어 가면 여기 단층이 나오겠죠. 단층을 보면서 여기 토기가 나오고 여러 가지가 나오는 거예요. 토기도 나오고 돌도끼도 나오고.
그래서 고고학은 이 지점, 지구상에 A라는 지점과 B라는 지점이 있으면 A라는 지점에서 나오는 어떤 유물, 이쪽에 나오는 어떤 물품, 이런 걸 볼 때에 때려서 도구로 사용했다, 타제석기. 타제석기, 돌처럼 생겼는데 중간에 탁탁 끊어서 사용하는, 날카롭게 만들어서 칼로써 사용하는 게 있어요, A라는 지점에서 타제석기가 나오고 B라는 지점에서 동일한 타제석기가 나온다면, 거리가 5000km라면 이것은 같은 시대, 이것은 같은 시대, 구석기 시대의 산물이다. 이렇게 평가되는 겁니다. 그다음 그 시대 끝나게 되면 때리지 않고 앞의 두뇌피질이 더 복잡하게 구성되게 되면 인간은 이제 생각을 해서 갈아요. 그걸 마제석기라고 하는데 구석기 후반 또는 신석기 초반 시대가 돼요. 그러면 그 시대 촌락 같은 것을 조사를 하면서 거기서 데이터를 정돈 시켜요.
그다음 신석기 되면 토기를 만들어요. 토기는 흐르는 액체를 보관하는 거예요. 토기를 만들어서 흐르는 액체를 보관해줘야 거기서 나중에 뭐가 나오냐? 발효가 돼요, 자동적으로. 발효라 하는 것은 화학적 작용이거든요. 그 발효에서 뭐가 나오겠어요? 술을 빚게 될 것이고 또 화학적 작용에 의해서 염색기술이 또 발달될 거예요. 그런 가설에. 나중에 신석기 후반으로 들어가면 금속들이 발견돼요. 메탈, 금속이 메탈이거든요. 메탈(metal)뜻은 그리스어로 찾아냈다, 그만큼 귀하다는 뜻이에요.
메탈 되면 그다음 나오는 것은 청동기시대. 그다음 철이 만들어지면서 철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 되면서 촌락은 수렵채집시대에서 드디어 금속이 발견되면 도시의 발달. 도시가 발달되면 계급이 생기고 그 계급에 따라서 엘리트는 언어가 나오고 그 언어는 무역하는 사람들이 저쪽 촌락과 이쪽 촌락이 무역하기 위해서 기호를 사용하면서 숫자를 세게 되고 그 숫자나 언어를 해독하는 자가 그 시대에 높은 계급을 차지해요, 엘리트가 된다 이 말이에요. 메탈, 금속, 무역에 좋은 상품, 금부터 먼저 발견됐어요. 금이나 은이나 구리 같은 게 발견되니까 이걸 다른 나라 물품과 교환하기 위해서 무역이 발달되죠.
광산업도 발달되지만 무역이 발달되면 여기에 또 뭐가 필요하냐 하면 노예가 필요한 거예요. 노예를 얻기 위해서 뭘 하냐? 전쟁을 벌이죠. 전쟁을 벌일 때 필요한 건 뭐냐? 국가, 다른 나라의 백성들을 우리가 가져와야 되기 때문에 이것은 메탈, 금속으로 된 무기를 가지고 또는 수레가 있는 마차를 가지고 수메르, 지금으로부터 기원전 약 6세기나 8세기, 6000년~ 8000년 그 정도, 6000년 메소포타미아 그 시대에요. 그렇게 해서 그들에게 수레 가진 자가 승자가 되는 소위 고대국가가 형성되는 겁니다. 그러다가 청동기시대가 되면 BC2000년경에 아브라함이 애굽에서 나오는 그 시대가 되는 거예요.
이게 바로 고고학이에요, 고고학. 문명이 확산되는 겁니다. 언어 그리고 광산을 파려고 하면 더욱더 깊이 있게 파야 되겠죠. 나중에 광산을 깊이 있게 해서, 석탄을 캐기 위해서 18세기에 들어가면 영국에서 최초로 산업혁명이 일어나죠. 증기기관 만들고 증기기관에 의해서 기차를 만드니까 세계의 모든 시간은 기차의 시간표대로 통일되어야 되고 자오선 만들어서 시간단위로 끊어버리죠. 기차가지고 빠르게 연결하고 또 기차시간 가지고 서로 연락하다 보니까 무선이 발명되는 겁니다. 무선이 발달하면서 인터넷. 세계는 어떻게 되는가. 세계는 단일 세계가 되어 버렸어요, 단일 세계. 단일 세계 되면서 모든 문명이 발달하면서 인구는 폭발적이고 인구만 폭발적인 게 아니고 인간들이 도시에 집중화되어야 더 힘이 생긴다는 걸 발견했어요, 도시화. 이제는 전 세계가 도시화가 되어버렸어요. 그렇게 하니까 이걸 먹여 살리기 위해서 밀림까지 개발하죠. 밀림에 가서 박쥐들이 살고 있는데 그놈의 박쥐 다 쫓아내버리고 자기가 하니까 박쥐에게 주어진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가 인간을 숙주로 해서 이제는 인간이 도시화되었으니까 바이러스가 파급되는 속도가 비행기 속도와 동일하게 된 거예요. 왜? 비행기타고 가니까.
방금 제가 쭉 이야기한 것, 결국 이 이야기한 것은 해석이죠. 해석인데 사랑이 빠진 해석이죠. 자, 아까부터 얘기했는데 사랑의 반대말은 뭐라고 했습니까? 간음과 음란인데 성경적으로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간음과 음란인데 왜냐하면 이것은 이스라엘에게서 나오거든요. 이스라엘에서 신명기에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했잖아요. 이 사랑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이걸 뭐로 바꾸느냐 하면 인간은 우상으로 바꾼다고요. 하나님을 섬겨야 될 인간들이.
하나님은 어떻게 섬기느냐? 언약대로 섬겨야 되요. 그러나 언약을 거부해버리면 이 하나님은 뭐가 되느냐 하면 우상이 된다고요. 우상을 섬길 때 그 우상 앞에 꼭 붙는 게 있어요. ‘나를 위하여’. 하나님을 포기하면 포기했지 나를 포기 못하겠다 죽어도. 하나님이 뭔데 내가 포기되어야 돼? 예수가 뭐길래 나를 포기해야 돼? 십자가 그게 뭐가 도움 된다고 왜 십자가 앞에서 나를 포기해야 돼? 그렇게 나오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십자가 앞에서 포기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십자가 앞에서 너는 죽었다고 얘기하는 거예요. 포기한다고 구원되는 게 아니고 죽어야 돼요. 십자가는 너는 죽었다는 사실을 통과하는 게 십자가에서 나온 능력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천당 가기 위해서 십자가를 자기 걸로 가져와요. 이거는 사랑이 아닙니다, 소유지. 소유지 사랑이 아니에요.
그러면 뭐를 가져온다는 것, 내 소유를 한다는 것. 그것을 성경에서는 우상숭배, 간음, 음란,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미워하는 거라고 아무리 해도 사람들은 이것을 뭐로 그것을 확 덮어버리느냐 하면, 방금 이야기 길게 했듯이 자기를 위해 사는 걸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고고학입니다, 고고학. 문명의 발달 이걸로 덮어버린 거예요, 전부다. 주님의 뜻을 인간의 지식의 집합으로 집결해서 그냥 덮어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정신 차리라 이 말입니다, 베드로의 입장에서는. 너희들이 너 자신을 알기는 알아? 이런 뜻이에요. 네가 세상을 알아? 세상은 지금 마지막이야. 끝났어. 예수님의 복음으로 인하여 이미 심판받아야 돼. 안 믿겨지지? 왜? 너희들은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만 멀쩡하면 되니까. 자기만 멀쩡하면 돼요, 자기 행복하고 편하면 그만이다 이 말이죠. 뭐가 없기 때문에?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언약이 없기 때문에.
그러면 복음은 그 언약의 완성으로 마지막 때에 주어집니다. 마지막 때에 주어진 거예요. 그 마지막 때에 복음이 완성되게 되면 자동적으로 세상은 어떤 때입니까? 마지막 때에요. 십자가 때문에 마지막 때에요. 뭐 마지막 때라고 해가지고 마지막 때의 증거를 찾자, 신종코로나로 서로 미워하고 666이 어떻니 저떻니 그거 찾지 말고 그냥 십자가 꽂혔으면 마지막 때에요, 그냥. 십자가 꽂혔으면.
하나님께서 받는 것은 예수그리스도 피 외에는 일체 가져오지 마라 이 말이죠. 천국 갈 때는 어린양의 피를 바르고 가거든요. 믿습니까? 천국 갈 때, 유월절 할 때 뭐 발랐어요? 문설주에다가. 어린 양 피 발랐죠? 그러면 지금 천국 가는 것은 뭐만 바르면 돼요? 우리 마음에. 피 바르면 되죠. 그런데 아까 제가 이야기했던가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가장 고귀한 것을 그냥 방치하지 않고 교환하죠, 교체해버립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할 때 주님의 목숨이 우리 목숨과 바꿔치기 하는 거예요.
또 예수 믿고 십자가 목걸이하고 반포대교에 검푸른 강물에 뛰어들려고 하지 말고 이미 십자가 들어왔으면 우리가 교체 안 해도 이미 교체된 양상으로 주께서 친히 우리의 인생을 다루십니다. 어떻게 살까를 생각하지 말고 어떻게 죽을까를 생각하라. 그게 ‘정신 차려라’. 내 것이 없으니까 사랑은 절로 되는 거예요, 절로. 또 절에 가서 사랑한다 하지 말고. 내 것이 없으니까, 내 생각 안하니까, 도로 내 것 찾을 생각 안하니까 그게 사랑이 아니고 뭡니까?
“아 목사님, 우리 성도는 그럼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성도 자체가 해석이라니까요, 복음의 해석! 복음은 예수님 십자가가 복음이고 그 해석을 위하여 주님께서는 증인 또는 증거자 또는 전도자로 쓰기 위해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신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누구냐면 복음의 해석자입니다. 마치 누구와 같이? 오늘 본문에 나온 베드로같이. 베드로가 이 이야기해가지고 몇 푼 받았습니까? 이렇게 복음 전하면 베드로가 월급 받고 그런 거 있습니까? 없죠. 정신 차리라고 했다고, 서로 사랑하라고 이야기했다고 돈 내놔라 뭐 그런 거 없죠? 왜냐하면 이런 외침조차도 자기 아이디어가 아니기 때문에. 자기가 의도해서 그렇게 한 게 아니에요.
그래서 첫째시간 끝을 맺으면서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어요. 나에게는 어떤 권한도, 어떤 권리도 없다. 긴급생계자금인가 받았어요? 그것은 아내 이름으로 안주고 가장(세대주) 이름으로 주거든요. 하나님께서 그거 왜 주신 줄 알아요? 죽으라고 주신 거예요. 그 돈쓰고 죽으라고 하는 거예요. 사람들은 뭐로 이해하느냐 하면 살라고 주는 줄 알아요. 살라고 준다는 건 나라에서 그렇게 하는 거고 주님께서 그걸 허락하신 것은 그거 써가면서 죽으라고 한 거예요, 죽으라고. 그래서 이번에 돈 떨어지기까지 아직까지 안 죽었잖아요. 그럼 또 죽으려면 또 돈 받아야 되겠죠.
생각하는 게 정신 차리고 생각해보면 세상 살아가는 모든 것이 죽으려고 이 땅에서 살아가는 거예요. 살려고 살아가는 게 아닙니다. 죽으라고 살아가기 때문에 따로 내가 챙길 내 권한이나 권리 같은 게 없어요. 사람이 어떤 자기 권한이나 권리가 없어버리면 시험들 이유도 없죠. 아니 죽겠다는데 뭐 “너 이러면 잘될 수 있어.”, “잘되고 뭐고 난 잘되는 것도 짜증나. 나 그냥 죽을래.” 아니 죽겠다는 사람에게 뭐 이렇게 하면 네가 잘될 것이고 그런 이야기가 소용없죠. 우리는 아니지만 세상 사람들이 사기를 왜 당합니까? 죽으려고 하는데 사기 당합니까, 아니면 살려고 할 때 사기 당합니까? 살려고 하니까 사기 당하는 거예요, 살려고 하니까.
그러면 살려고 하는 게 인간의 타고난 본성인데 어떻게 복음 앞에서 죽으려고 하느냐? 정답은 주님한테 목숨을 빼앗기면 되죠. 누가 와서 내 목숨을 가져가면 되요. 이제 네 목숨은 내가 간직할게, 하늘에. 네가 관리하지 마. 네가 뭐 경제권 쥐고 이러지마. 하늘에서 내가 네 목숨 관리할게. 주님은 그거 가지고 뭐하려고? 나의 복음의 해석이 되기 위해서. 이제는 어디서 뭘 하든지 어떻게 하든지 복음, 세상은 이미 끝났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어느 시간이든 어느 공간이든 내가 너를 굴릴게, 사용할게. 그게 바로 사랑의 의미, 사랑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구약에서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고 얼마나 힘들어요, 이게. 얼마나 힘든 윤리고 도덕처럼 느껴지지요. 힘든 이유가 있었어요. 내 것이 따로 있기 때문에 사랑을 해도 조건부 사랑이 되기 때문에 이게 힘든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 와서 성령이 내 목숨을 가져가 버리면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살아버리면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내 것이 없기 때문에 사랑이 되는 겁니다, 사랑이.
10분 쉬고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