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08b 부산강의 : [시편]29(18편)-나와 남
20200608b 부산강의 : [시편]29(18편)-나와 남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내가 없어진다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기분이 즐겁지 않을 건데 따지고 보면 누구나 없어지게 돼있어요. 제가 지금은 이 자리에 앉아 있지만 한 오십 면 후에 이 자리에 없어요. 우리는 없어질 그 시점의 입장에서 거꾸로 되돌아보며 나를 볼 줄 알아야 돼요.
내가 있다, 있다, 있다는 것에서 나를 보지 마시고 있는 내가 없어지는 그 시점부터 나를 다시 바라보게 되면 그 다음에 어떤 생각이 드느냐 하면, 분명히 여기 귀한 내가 있는데 나는 왜 없어져야 되지? 그 이유를 새삼스럽게 들 겁니다. 내가 남한테 꼭 필요한 사람 같은데 그러면 안 없어져야 되는데 필요하고, 안 필요하고는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거든요. 우리는 내 생각보다 못하니까 주님 생각은 나를 없애는 거예요.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나를 없애는 겁니다. 없애는 걸 아까 청소라고 했지요.
없애버리는 방법은 첫째 시간에 한 걸 연속적으로 하게 되면, 어린양의 대신 죽음이 없애는 방법인데, 하나님 계시고 여기 인간이 있고 그 다음에 주님이 계시죠. 그러면 주님과 인간 이걸 A, 주님 하나님 관계를 B라고 한다면, A관계는 B관계가 원형이 되어서 원형을 그대로 적용하는 식입니다. 아버지와 아들 되시는 주님 사이의 관계가 이게 언약이 완료된 상태에요.
완료된 상태가 완성이고 원형이기 때문에 이 완성의 관계를 주님과 우리 사이에 집어넣게 되면 그 완성의 효과로써 우리가 구원되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여기 있어서 살아 있는 내 안에 주님의 완료가 들어오시면 되겠네, 라고 하는데 이건 안 돼요. 왜 그러냐 하면, 내가 그냥 살아 있다는 것은 내 안의 내용물이 추접하고 더럽단 말이죠. 좀 어려운 논리지만 해봅시다.
노아가 여기 있습니다. 노아가 뭘 구분할 줄 알아야 돼요?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이 있잖아요. 그럼 노아는 현재 부정에 해당되겠어요, 정결에 해당되겠어요? 부정에 해당되어야 정결과 부정으로 나눠질 것 아닙니까. 몽땅 다 정결이면 부정과 나눌 이유 없지요. 부정으로 새삼스럽게 나눈다는 말은 노아의 입장이 부정에서 시작해서 어디로 간다? 정결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방주 만들고 언약 주셨다는 겁니다.
그럼 언약관계의 원형은 어디서 왔는가? 방금 이야기했잖아요.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 관계가 원형이고, 그 원형이 언약이란 이름으로 노아에게 그냥 들이닥친 거예요. 언약으로. 그러면 부정한 관계, “난 더럽습니다. 주여 깨끗한 것이 오시옵소서.” 이렇게 하면 또 안 돼요. 왜 그러냐 하면, 제가 부정합니다, 라는 말 자체가 오인이고 왜곡이에요. 앞에 나가 있기 때문에.
하여튼 나에게서 나온 것은 좋은 것을 얻기 위해서 약간 고개 숙이고 겸손한 체하고 회개하는 척하는 그런 수작까지 내가 할 수 있어요. 주여, 이 정도 낮추면 되겠습니까? 이 정도 하면 진짜 순교하는 것 맞지요? 자꾸 뭔가 인간이 내뱉는 모든 의도와 의지는 결국 누구 좋으라고, 그게 출발점 되었던 나에게 내가 연속성을 유지하는데 유리하도록 수작에 불과해요. 이 수작이 이 땅에서 하나의 게임으로 등장하는데 게임이면 이겼다, 졌다는 게 있거든요. 하나의 수작이 되는 겁니다.
하나 예를 들면, 1998년에 박세리 선수가 연장전 승부에서 양발 벗고 물속에 들어가 칠 때 배경음악으로 양희은이 불렀던 끝내 이기기라였잖아요. 그런데 박세리가 상대방 태국 선수보다 먼저 홀컵에 들어가길 바랐지 어느 누가 박세리가 시집가기를 바랐겠어요? 없지요. 그러니까 주께서 조성한 시간 속에는 현재 나의 의지와 의도 그게 있을 때 시집가는 건 나중 문제고, 아직 시집갈 나이도 안 됐고, 지금 이 순간에 나에게 유리하도록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순간이란 어떤 순간이냐 하면, 지금 자기가 살아 있는 순간이라고 오인하고 있습니다. 숨 쉬고 움직이고 골프 치는데 이게 살아 있는 것 맞잖아요. 누가 와서 관찰해도 이건 살아 있는 거지 죽었단 생각 안 든단 말이죠. 그러나 성경에서는 뭐냐? 그랬던 박세리도 결국 죽는단 말이죠. 죽음의 힘이 살아 있다는 형체만 있을 뿐이지 그 안에는 아무리 살아 있어도 죽음이라는 힘은 삭제시킬 수 없어요. 설교해도 마찬가지에요.
죽음이 힘이 지금 이 순간도 계속해서 작용하고 있는 겁니다. 없어질 거예요. 죽는다는 말은 없어진다는 거거든요. 누가? 몸이 없어지는 건 기본이고 몸이 없어지면 누가 없어져요? 내가 없어지는 거예요. 내가 없어지는 게 주의 일의 목적입니다. 그 목적을 알아야 되는데 우리는 내가 없어지는 게 굉장히 아깝게 여길 때 그건 이미 나 자신이 나를 오인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진짜 주님이 생각한 내가 아니고, 주님이 생각한 나라면 기꺼이 없어지려 할 텐데 도대체 누가 중간에 장난질을 쳤는지 세상은 바이러스로 다 죽어도 나는 죽으면 안 돼, 라고 그동안 꾸준히 우리를 속여 온 가예요. 가만있는 박세리가 강의에 들어와서 욕 얻어먹네. 미안해요, 박세리.
둘째 시간에 한 걸 정리한다면, 없어질 것에 충성하고 있다. 우리가. 42절,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저희를 바람 앞에 티끌 같이 부서뜨리고 거리의 진흙 같이 쏟아 버렸나이다” 청소하는 모습이에요. 완전히 작살내는 거예요. 왜 작살내느냐? 원수니까. 왜 원수냐? 부정하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에서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을 나눈다는 자체는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사이에 언약을 할 때 많은 사람들이 또 오해해요. 하나님과 예수님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고 두 분 다 하늘나라 살기 때문에 성부와 성자기 때문에 두 분의 존재 자체로 언약이 완성될 것이라고 오해하는데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언약이 되려면 아들이 아버지한테 버림받아야 돼요. 왜? 부정의 짐을 지고 있기 때문에. 모든 더러운 짐을 지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아버지 뜻은 더러운 것은 심지어 아들이라도 버려버려요.
예수님은 어린양이 되어서 죽으셔야 되는데. 그런데 그냥 어린양이 아니고 흠 없는 어린양이기 때문에 흠 없음에 대해서 하나님은 정결할 걸로 쳐서 사랑을 해줘요. 그럼 죽은 예수님을 누가 건집니까? 아버지가 건지는데 조건이 뭐냐? 흠이 없는 주님이기 때문에 건짐을 받는 거예요. 의인은 죄인과 함께 음부에 둘 수 없다는 원칙이에요. 죄가 없는 자는 결코 죄 있는 자와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다. 그 원칙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건질 때는 흠 있는 자기 백성을 그냥 건지면 안 돼요. 의인과 죄인이 함께 할 수 없어요. 죄인은 하나님의 거룩한 면전에 나갈 수 없어요.
그러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죽이는 거예요. 그러나 그냥 죽이면 안 돼요. 살아생전에 무엇과 결합되어야 하느냐 하면, 흠 없는 요소와 더불어 장렬하게 죽어줘야 돼요. 그냥 자살하면 안 돼요. 흠 없는 요소와 결합된 채 죽어줘야 주님과 우리 사이의 원칙을 그대로 적용시키게 되면 우리는 흠 없는 의인의 자격으로 아버지 앞에 사랑으로 천국으로 갈 수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생각에 그 다음 문제는 뻔하네요. 그 다음 문제는 뭐냐? 어떻게 흠 없는 요소가 흠 있는 내 안에 들어올 수 있느냐, 그 문제겠지요. 지금 방법에 대해서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왜, 누가 그건 설명 안 했어요. 방법을 통해서 왜, 누가 저절로 발생돼 나오기 마련입니다.
흠 없는 요소가 흠 있는 나에게 어떻게 들어올 수 있느냐? 그냥 들어가면 되지요, 라고 하는데 그냥 들어올 수 없는 이유가, 흠이 있다는 말은 여기에 반발하는 세력이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오셔도 우리가 밀어내요. 그러니까 이걸 다시 하면, 나 자신은 어떤 나다 오인된 나 또는 왜곡된 나다. 왜곡된 나에게 남이 오게 되면 나 자신을 연속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밀어냅니다. 끊임없이 계속해서 밀어내요.
심지어 부부가 되도 밀어내요. 심지어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도 밀어내게 돼있어요. 부모는 누굴 사랑하느냐? 자식을 사랑하지요. “네가 호주에서 고생 많이 했지.”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요. 엄마가 날 사랑한다는 말이 자식은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요. 왜냐? 엄마 본인의 오인된 주장이기 때문에 아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인생이 따로 있어요. 그래서 일방적으로 해석을 해버려요. “아, 어려울 도와준다는 그 말이구나. 아플 때도 그런 뜻이구나.”
그런데 엄마를 대체하는 인물이 등장한다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갑자기 엄마가 사랑해주는 것보다 어떤 아가씨가 엄마 사랑은 저리 갈 정도로 너무 지극 정성 잘해준다면 엄마를 밀어내요. 그 엄마는 되게 섭섭하지요. “난 너 하나 보고 사는데…” 그럼 자식 하는 말이, “내가 하나 보고 사람 따로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노골적으로 이야기하진 않겠지만 행동으로 보여준다고요. 내가 바라볼 아가씨는 따로 있습니다.
그럼 아가씨에게, “저 남자가 너만 본다는데…” 아가씨가 하는 말이, “그 남자가 왜 그런 소리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날 위해 살아요.” 전부 다 각자 각자가 남에 대해서는 나처럼 생각하지 않아요. 이게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거든요. 그래서 예수님이 들어왔다, 예수님과 열두 제자가 만났다, 택했다, 이렇게 될 때 어떤 원칙이 작용하느냐 하면, 서로는 서로를 선택한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선택했잖아요. 그런데 열두 제자는 생각하기를 누가 누구를 선택했다고 봅니까? 예수님이 자기를 선택했다고 보지 않고 본인이 예수님을 선택한 걸로 여겨요. 그게 어디 등장하느냐 하면, 이 선택은 내가 예수님을 선택했기 때문에 예수님과 관계를 끊는 것도 나의 결심만 있으면 된다. 그게 베드로고 가룟 유다거든요. 열두 제자 다 그랬어요. 그 열두 제자의 모습이 오늘날 우리 모습이에요. 내가 예수 믿기로 작심했기 때문에 이제부터 예수 안 믿기로 누가 작심할 수 있다? 내가 작심할 수 있게 돼버려요.
그러니까 계속 나는 나로 남고, 남아있다는 말은 자동적으로 나 외에 모든 것은 뭐냐? 남이 되는 겁니다. 점 하나로 님이 됐던 남이 됐던 간에 서로가 서로를 선택할 권한이 있고 권리가 있는 이상 이 고집 부림은 갱신이 안 돼요. 부산지역이기 때문에 갱신이란 말을 마음대로 사용합니다. 갱신이 안 돼요. 이 말이 이 동네에선 왜 이렇게 자연스러운지 모르겠다.
인간은 갱신이 안 됩니다. 그러면 그 방법이 실패로 끝날 것인가? 여기에 대한 대책은 뭐냐? 주님의 대책은 우리와 상대 안 해요. 뭐와 상대하느냐? 우리 안에 어떤 영이 있어요. 물론 악한 영이죠, 악마지요. 주님께서 공생애 사시면서 병든 사람 붙들고 닦달 내던가요, 병든 사람 속의 귀신 보고 하던가요? 귀신 보고 하지요. 귀신이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의 마음, 우리의 영을 주께서는 관여해버립니다.
그러면 마태복음 12장이 성립이 돼요. 마태복음 12장 29절에 보면, 도둑이 들어와서 가재도구와 상대하지 않고 먼저 집주인부터 묶어놓지요. 묶어놓고 그 다음에 싫든 좋든 관계없이 가재도구 챙겨서 도둑이 가져가버리잖아요. 그래서 마태복음 12장에 이런 말씀 있어요. 이건 성령 받아야 알 수 있는 구절이 나와요.
31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어디 못하였고” 인간의 모든 죄는 용서가 되지만 어떤 죄는 용서가 안 되다?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용서가 안 된다. 왜냐하면 성령은 우리와 상대하는 게 아니에요. 십일조 하라, 헌금하라, 교회 나와라, 우리와 상대하는 게 아니에요. 해봐야 우리는 내가 착한 일했다고 또 오인하기 때문에 안 돼요.
그러니까 우리 안에 우리 마음을 장악하고 있는 자아를 쥐고 있는 보이지 않는 영과 상대해서 누가 이기느냐 하면, 성령이 주님이 우리 귀신을 이겨버립니다. 그 방법 외에는 없어요. 그 방법을 위해서 주님께서 마태복음 15장 18절을 그전부터 하신 말씀이에요. 지금 이 이야기와 시편 18편 나머지 이야기가 다 관련성이 있어요.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데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인간의 행위로 따지지 않는다. 그 사람의 의도, 그 사람의 마음의 방향성, “너 지금 어딜 쳐다보느냐?” 이런 것처럼, 네 마음이 어딜 쳐다보고 있느냐?
보통 성령 없는 사람은 어딜 쳐다보느냐 하면, 휑해요. 두리번거리면서 쳐다볼 것이 없어요. 그러나 성령 받으면 성령이 온 출처를 바라보게 돼있어요. 그게 뭐냐? 십자가에서 성령이 오기 때문에 십자가 쪽을 생각하게 돼있습니다. 복잡한 것보다 간단하게 이야기하는 게 낫겠지요.
누가 성령 받고 누가 성령 안 받았느냐, 누가 사랑받은 사람이고 누가 미움 받은 사람이냐, 누가 천국 갈 사람이고 누가 지옥 갈 사람이냐, 라고 할 때 원인과 결과를 놓고 내가 여기 있음이 어디까지나 결과일 따름이다. 그러면 원인은 어떻게 돼요? 주님의 십자가를 증거 하기 위해서, 이게 원인이에요. 십자가가 원인이고 그 다음에 내가 결과물로 여기 있는 겁니다. 이게 성도에요.
성도는 내가 원인이 아니다. 이걸 더 어렵게 말해서 내가 생각하는 나는 나가 아니다. 내가 나를 생각할 때 그 나는 진짜 나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다른 눈이 있고 다른 시선이 있어요. 그분이 오늘도 나를 살려내신 거예요. 그분이 나를 살려주신 겁니다. 성경공부 참석하려 하는데 아들과 며느리는 직장 가버리고 아이는 학교 가고 오고 숙제 체크해야 되고 동영상 같이 해야 되고, 그래서 못 갔다.
그러니까 오늘 내가 예배 참석해서 잘못됐다. 그건 잘못됐다는 것은 오인된 거예요. 누가 그렇게 했어요? 누가 손자 낳고, 신종코로나 누가 했습니까? 주께서 하게 하셨지요. 그게 바로 신자의 자세에요. 이건 남이 가르쳐준 게 아니고 본인이, 내게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나의 현상이 아니고 주님이 다 생각이 있어서 만들어낸 현상에 내가 따를 뿐이에요. 나는 그 결과에 불과하니까.
그러면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에겐 어떤 식으로 오느냐 하면, 이 사실을 어떻게 가르치느냐? 주님께서 이방인들로 유대인의 오인을 지적합니다. 마태복음 8장 같은 경우에. 어떤 백부장이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주께서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온다. 주께서 아프라고 하면 아프고 죽으라 하면 죽나이다. 그러니까 이 자체가 이 사람은 죽은 거예요. 죽기 전에 이미 죽어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나를 다루시는 겁니다. 예수님이 너무 반기면서 하는 말이, 세상이 이런 믿음이 다 있느냐? 천국 간다는 아브라함 자손들은 나가! 어디서 얼쩡거리고 있어, 꺼져. 이방인들이 여기에 들어간다고 돼있어요.
시편 18편 45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이방인들이 쇠미하며 그 견고한 곳에서 떨며 나오리로다” 그 앞에 보면 이방인들이 네게 복종하죠.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건짐에 있어서 이미 내 백성은 왜곡됐기 때문에 백성 아니에요. 백성 아닌데 나보다 더 세신 분, 나는 내가 세다고 생각하는데 주님 찾아오시니까 나보다 주님이 더 세요. 더 세신 분이 모든 것은 부서뜨리고 이 몸을 죽이는 권한도 그분이 갖고 있어요.
그분을 아는 이방인들이 순복함으로, 여기 44절 봅시다. “저희가 내 풍성을 들은 즉시로 내게 순복함이여 이방인들이 내게 복종하리로다” 이 말씀을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에게 시편 18편으로 집어넣은 겁니다. 집어넣으니까 유대인들이 주님에 대해서 동의했습니까, 예수님을 죽여 버립니까? 죽여 버린 거예요. 흠 없는 어린양을 죽였단 말이죠. 여기서 논리가 복잡하게 돼버렸어요. 이방인들도 자기를 오인하기는 마찬가지거든요.
①방법은 흠 없는 어린양 출격. 흠 없는 어린양의 죽음이 방법이에요. 두 번째, 왜 그래야 되는가? 벌써 나왔습니다. 반발하는 영이 인간의 영혼과 마음을 지배하고 있다. 반발입니다. 그냥 죄 짓는 게 아니고. 그냥 죄 지으면 반성하면 그만이에요. 그게 아니고 어떤 새로운 나타남에 대해서 강렬하게 반발하는 거예요. 세 번째가 누가? 이게 제일 어려워요. “아이고, 그게 뭐 어렵습니까, 예수님이죠.” 그 예수님을 우리가 오인한 예수면 어떻게 할 건데요? 안 되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내가 있는 이상 예수도 오인된 예수거든요. 누가? 이 누가를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아를 찾고 있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메시아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이미 오셨는데 메시아를 찾는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누가라고 묻는 자체가 나를 고집하고 있지요. 사도행전 9장에서 사울이란 사람이 다메섹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려고 할 때에 그 대목을 잠시 설명해보겠습니다.
사울이란 사람이 누굴 공격하느냐 하면, 예수 믿는 사람을 공격했지요. 그러니까 사울은 나지요. 내가 누굴 공격하느냐 하면, 남을 공격하는 거예요. 예수 믿는 사람이란 이름의 남을 공격하는 겁니다. 절대 사울이란 사람은 예수님을 공격한 적이 없어요. 예수님은 이미 죽어서 이 땅에서 사라졌기 때문에 공격대상이 안 되는 겁니다. 뭐 있어야 공격하지요. 활을 쏘든지 수갑 채워 체포하든지.
이 점이 왜 중요하냐 하면, 지금 우리가 예수 믿고 싶어도 예수님이 눈에 보여야 믿지요. 안 보이는 데요. 예수님이 저기 있다. 거기 가서 믿지요. 예수님이 구세주인데 뭘 아끼겠어요. 저기 있다 해도 믿지 말라 했거든요. 여기 있다 해도 믿지 마라. 도대체 뭘 봐야 믿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 하니까 더 희한한 말처럼 들려서 뭐 어쩌라고? 꿈속이라도 보여주고 믿으라 하라는 거예요.
이렇게 된 이유가 사울도 마찬가지에요. 예수님이 살아서 부활해 있다면 예수 믿는 사람은 안 죽였어요. 그러나 사울에게는 예수님은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이걸 무가 아니고 부재라 했지요. 예수님은 부재한 거예요. 부재란 말은 사울 본인은 뭐다? 부재의 반대, 자기는 여기 있다는 거예요. 지금 내가 여기 있는 것이 문제가 되는 거예요. 여기 있는 것이 예수 믿는 것을 공격하는 겁니다.
그런데 남 속에 누가 포함돼있다? 예수님이 포함됐다는 거예요. 이 말이 어려운 게 뭐냐 하면, 예수님이 단독으로 내가 여기 있다가 아니라 예수님이 무슨 무리와 함께 섞여서 나타난다? 예수님에 의해서 택함 받은 사람,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의 결과물들, 예수님에 의해서 부림을 당하고 백부장처럼 예수님께서 쥐락펴락하는 그 사람들과 전체로 남이라는 집단을 이루면서 계시는 거예요.
사울은 이 사람들을 공격했는데 예수님이 하는 말이, “왜 나를 핍박하느냐?” 그렇다면 여기서 누가가 되려면, 청소하는 분 누구세요, 할 때는 누구들 속에 계시는 누구십니까? 이렇게 돼야 돼요.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예수님이 보이는 게 아니고 누구들이 보여요. 예수님에 의해서 부름 받은 사람만 보여요.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이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누구한테 한 것이다? 내게 한 것이다. 이게 쉬운 말이 아닙니다. 차라리 예수님 꿈에 보여주고 믿으라 하면 그게 더 쉬워요. 만약에 내가 산 사람이라 한다면 우리는 골라내기 바빠요. 그런데 골라내는 작업도 오인된 작업이죠. 그게 실수투성이란 말이죠.
마태복음 10장 끝에 40절부터 보면 이런 말씀 있어요.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누구를 영접하라는 지시가 떨어졌어요. 그런데 제가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어요. 인간은 누구를 영접할 위인들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있는 영이 그걸 반대해요. 악령이 영접하는 걸 반대해요. 우리를 절대적 존재로 악마가 만들어놨기 때문에 나를 위해서 네가 있는 되지만 너를 위해서 내가 있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이건 도저히 우리한테는 갱신 안 돼요. 용납이 안 돼요.
그럼 뭐냐? 누구라는 걸 찾아내기 위해서 첫 번째, 다툼이 있다. 두 번째, 다툼이 종결 상황을 맞아야 됩니다. 이것 성도한테 평생 갑니다. 그래서 어제 낮 설교할 때 사울을 죽었지만 바울의 완성은 마지막 관철될 때까지 주께서 책임지고 가져간다고 했지요. 다툼을 계속 이어져가요. 종결 상황을. 자, 다툼이 있어줘야 돼요. 다툼이 있고 난 뒤에 다툼은 승자와 패자를 가름하는 겁니다. 계속하다 나중에 종결되게 되면 누가 승자 되느냐 하면, 끝내 이기리라, 예수님의 십자가가 승리가 되겠지요.
그러면 우리는 십자가를 유발시킨 죄인으로 드러나게 되면 우리는 패자 되는 겁니다. 이게 평생 간다고 했는데 시간상 평생 가는 것 맞아요. 그런데 이게 하나님의 성령이 오게 되면 시간의 끝이 종결이 아니라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이 순간순간이 종결이에요. 왜냐하면 은혜를 받으면 더 이상 내일에 대해서 내 소관이 아니에요. 내일은 내가 있을지 없을지 그걸 관여할 입장이 안 됩니다.
모든 걱정과 근심은 내가 그냥 죽으면 안 되고 흠 없는 주님과 다툼이 일어나고 그게 종결 상황이 돼버리면 더 이상 걱정 앞에 붙어있는 나, 근심 앞에 붙어있는 나, 염려 앞에 붙어있는 나가 이것들을 유발한 거예요. 내가 살아 있다는 이것 때문에 유발한 거예요. 이 사실을 우리가 안다는 것은 주님이 모든 상황을 종결시킬 때 이 순간 내가 나쁜 놈이란 사실을 깨달을 때 여기서 뭐가 오느냐 하면, 모든 완성의 기쁨이 쏟아져 오게 돼있어요. “죽을 때 기뻐하지.” 죽을 기뻐하지 말고 순간순간 기뻐해야 돼요.
쉽게 말해서 주님께서 못 일어나는 일은 우리에게 목을 조르는 일이에요. 목을 조르면 덜 실감나기 때문에 엎어놓고 무릎으로 목을 누른다고 봅시다. 이 자세 어디서 많이 봤지요. 그런 자세로 우리 목을 누르고 있는 거예요. 너, 나와 싸우자는 거예요. 주님이 가만두질 않아요. 매사가.
밥을 먹을 때도 싸우고 있고, 차를 탈 때도 싸우고 있어요. 내가 탈 버스, 오자마자 가버리네. “참, 주님 너무 하십니다.” 매 순간 되어진 일에 대해서 불평불만을 안 나타낼 때가 없어. 모든 순간에 불평불만이 쏟아지면서 귀신이 바깥으로 튀어나오는 거예요. 나를 장악하고 있던 주님께서 대든 귀신이 나오는 거예요.
마태복음 10장에서 누굴 고분고분 대접한다는 것은 다툰다는 과정 없이는 절대로 이러한 결과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모든 결과 모든 종결된 상황은 하나님의 계시가 계시대로 종결된 상황이에요. 내 뜻과 내가 살아 있기에 나름대로의 목적이 있고 의미가 있고 그리고 내 나름대로의 프로젝트가 있고 생각한 바가 있거든요. 계획이 다 있단 말이죠. 그 계획인데 주님께서 백인 경찰로 죽으라고 꽉 누르는 거예요. 7분 32초 동안 꽉 누르는 거예요. 데모하든 말든 주께선 눌러버려요.
만약에 집사님이 죽는다면 누구 생각나겠어요? 애들, 남편 생각나겠지요. 그게 전부다 한 패에요. 결국은 사울이 왜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느냐 하면, 자기 혼자 죽인 겁니까, 자기 패가 있어요, 없어요? 자기에게 체포하라고 권한을 준 자기 패가 있잖아요. 그 사람들 마음에 들 때 진짜 내 욕망에 충족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예수님을 혼자 죽이는 법은 없어요. 집단적으로 덤벼들어서 예수님을 죽여 버리죠. 비록 예수님은 나한테 달려들어도 우리가 주님에 달려드는 것은 그동안 내가 살아오며 경험했던 내 편이란 내 편은 다 모아서 함께 예수님을 죽여 버립니다. 예수님을 죽였는데 죽였다고 여긴 예수님을 살아나 버렸지요. 그게 승리 아닙니까. 우리는 죽으면 끝인데 주님은 죽어도 되살아나잖아요.
이 사실을 받아들일 때 받아들이게 될 때가 아니라 받아들이게 돼있어요. 받아들이게 되면 우리는 말씀에 의해서 말씀이 원인이 되어서 말씀이 결과물로 우리는 움직이는 하나의 시편 18편이 되어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겁니다.
누구라는 걸 다시 정리할게요. 누가 우리를 죽이는가? 누구는 나타나지 않는다. 누구들은 나타나지요. 예수님은 안 보여요. 누구들은 있어요. 예수님께서 택한 자들은 있어요. 예수님이 택한 자들과 우리 사이에 만남에서 그들은 모든 원인이 어디 있다 했습니까? 주님에게 있지요. 이 사람들과 다투게 되면 나는 내가 원인이 되고 내 나름대로 결과가 따로 존재한다고 보는 거예요.
그런데 그들 사이에서 달려들게 하고 주님께서 내 영, 내 마음에다 직접 다투게 되고 공격하게 되면 바로 이 소자한테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누구한테 한 것이다? 주께서 힘들게 하시고 또 주께서 원해서 하신 일이란 사실을 내 쪽에서 깨닫게 됩니다. 깨닫게 되면 이게 바로 계시언어가 되죠. 내 안에 주님의 말씀이 들어오게 되는 겁니다. 나는 껍데기에 불과하고 말씀이 계속해서 나를 그리스도의 일을 하도록 하는 겁니다.
그렇게 된 우리 자신이 주의 사람이 되면, 이 주의 사람이 누굴 만나겠어요? 또 악귀가 들린 사람을 내가 원하던 원치 않던 접촉하도록 주께서 주선을 해요. 이게 전도입니다. 전도는 내가 뭘 하는 게 아니고 그냥 만남 자체에요. 만나게 되면 저쪽에서 주님은 안 보이니까 불신자가 나한테 퍼붓겠지요. 그럴 때 내가 날 방어에 나서면 이건 가짜 신자지요. 그런데 저쪽에서 공격하는데 나는 뭘 느끼느냐 하면, 주께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나를 공격했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어요. 이거는 내가 생각했던 옛날의 내 마음이 아니에요.
전에 있던 내 마음은 내가 나를 지키는 마음이에요. 그런데 그 마음에 성령이 와버리면, 성령이 온 걸 어떻게 아느냐, 남들이 날 공격할 때 그 공격도 그 사람 탓이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 주께서 나로 그 사람의 공격을 받게 하신다는 거예요. 이걸 둘 다 이해하는 겁니다. 이해하시겠어요? 이해 안 됐어요.
뭐가 빠졌느냐 하면, 방금 공격이란 말 했지요. 공격이란 말 안의 내용이 뭐냐 하면, 신세계백화점에서 루이비통 가방 사주는 것, 여러분 이게 공격이라고 생각 되십니까? 이게 공격이에요. 우리의 모든 만남이 공격이라고요. 겉으로는 고맙다고 이야기해야 지요, 인간적으로. 하지만 그 사람한테 미안하지만 이것 누가 하신 거예요? 주께서 하게 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공격이란 것은 비참하고 피 흘리고 얻어터지고 이것만 생각하지 말고 세상의 모든 만남이 공격이에요. 만약에 그 사람이 불신자기 때문에 나한테 도움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주님께서 진짜 어려울 때 집에 물이 안 나온다든지 갑자기 타이어 펑크 났는데 목사도 그냥 지나가고 집사도 그냥 지나갔는데 여호와증인이 와서 도와줬을 때 여호와증인이 정통이란 말이 아니고 누가 했단 말입니까?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건데, 누구한테? 나에게? 아니지요, 아니지요, 이건 아니지요. 이런 말이지요. 복음을 위해서 그 사람이 그렇게 한 거예요. 복음을 위해서 루이비통을 사준 거예요. 복음을 위해서 주께서 해외여행도 가게, 모든 것이 복음을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는 그 안에 악마가 심어준 뭐가 제거되었다? ‘나를 위해서’는 제거된 거예요. 세상만사가 다 그렇게 된 겁니다.
그러면 시편 18편에서는 이런 기능을 누가 하느냐? 다윗이 하게 됩니다. 어떻게 하느냐? 다윗이 기름부음 받아서 그렇지요. 50절 누가 읽어보세요. “여호와께서 그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부음 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기름부음 받은 자가 요한일서 2장 29절에 보면 성령 받은 걸로 돼있지요. 성령을 받은 자에게는 노아처럼 언약적 기능을 하는 겁니다.
노아가 역시 자기 믿음을 바라보겠습니까, 정결한 짐승을 바라보겠어요? 노아가 방주에 있으면 정결한 짐승을 바라볼 때마다 너는 나중에 홍수 끝나면 미안하지만 내 대신 죽어줘야 돼, 하지요. 그러니까 성령 받았다는 건 뭐냐? 내가 있던 그 자리에 내 대신 죽은 분이 그 죽음이 옛날에 있던 내 자리를 차지하는 거예요.
그럼 나는 이미 죽은 자인데 왜 아직도 살아 있느냐? 죽은 자가 살아 있음을 증거 하라고 우리로 하여금 살아 있으면서 루이비통, 구찌, 온갖 다이아 이런 것들을 세상으로부터 다 받는 거예요. 왜? 복음을 위해서 쓰시라고. 루이비통에 성경책 담아가든지. 물론 교회 갈 그것 들고 가는 사람 없겠지만. 자랑질 할 게 있어야 들고 가지.
이 순간 상황이 종결된 거예요. 종결됐는데 주께서 새로운 누굴 만나게 하시죠. 만나면 지 자랑하다보니까 또 다툼이 시작돼요. 계속해서 이 세상에 시간이라 하는 것은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말씀이 계속해서 소낙비처럼 주어지는, 원칙을 적어볼게요. 시간이란 사건을 보여주는 바탕이다. 시간만 줄곧 쳐다보면 안 됩니다. 시간이란 뭐냐? 사건을 찾아주는 거예요.
이미 너는 구원되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을 보여주기 위해서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있는 겁니다. 49, 50, 59, 60, 61, 계속 시간이 가는 것은 사건인데 주께서 무슨 사건? 종결 사건. 모든 것이 주님이 이겼고 나는 졌다는 사건. 사실은 정확하게 주님의 영이 이겼고 내 속의 악령은 주님한테 진 거예요. 만약에 악령이 이기면 내가 원인이 되고 성령이 이기게 되면 주님이 원인이 되어서 난 결과에 불과하고.
만약에 악령이 이기게 되면 내가 원인이 되어서 세상 것을 이용할 권한을 가지고 나 잘되기 위해서, 내 이익을 위해서, 난 죽으면 안 된다. 이건 악령이 하는 일이고, 성령이 이기게 되면 주님이 승리하게 되는 겁니다. 주님이 승리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내가 이겼잖아요, 하면 안 돼요. 왜냐하면 나라는 것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나는 껍데기에 불과하고 내 안에 계시는 주님이 승리한 거예요.
그래서 주님은 내 안에서 주님의 것을 찾고 바라보시는 겁니다. 아까 마태복음 10장에서 선지자의 상 있지요. 선지자의 상 또는 제자의 상, 의인의 상, 그리고 예수님의 상, 이것은 전부 다 나한테 없는 거고 예수님의 것을 내 안에 심어놓고 예수님이 심어놓은 그것을 우리에게 찾으면서 주님의 상을 허락하신 겁니다. 내 상을 너희와 같이 공유하자, 같이 누리자, 하고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청소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다윗은 왕이 되고 왕은 기름부음이 오지요. 기름부음은 어디서 오느냐? 위에서 오는 겁니다. 위에서 아래로 청소를 해요. 청소는 반드시 완료가 됩니다. 청소를 하게 되면, 방법은 십자가 죽음이고, 이유는 뭐냐? 정결한 것을 만들어내고, 그 다음에 누가? 그것은 바로 다윗시대에는 다윗의 모습으로 오지요.
깨끗하게 청소를 하는데 여기에 누가 청소해요? 예수님이 청소하지요. 무엇을? 나를 구원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것으로서 우리를 새롭게 만들어내서 예수님의 것을 자기가 가져가는 것이 바로 청소가 되는 겁니다. 주님의 것을 가져가시는 거예요. 어차피 우리는 못 삽니다. 여러분 앉은 자리도 몇 십 년 지나면 없어지고, 모든 게 없어져요. 없어지게 하십니다. 왜냐? 청소기 때문에 없어지게 해요.
그러나 있는 자들은 바로 예수 믿는 자들을 이 땅에 계속해서 세상 끝 날 때까지 남기게 될 겁니다. 내가 있다, 없다. 내가 산다, 죽는다 하는 것은 내게 전혀 문제 되는 게 아니고 주의 복음의 출몰한다는 것, 그것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이 더러운 내 안에 주의 복음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죄 용서된다는 복음이 출몰될 때 이거는 사람의 힘이 아니고 주님의 능력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하신 일을 저희들이 원했던 건 아니고 이미 시작한 일이 저희에게 덮쳤습니다. 내가 살아야겠다는 이것을 늘 꺾어서 주님이 살아 계심으로 이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