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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200608a 부산강의 : [시편]29(18편)-나와 남자유게시판시편

20200608a 부산강의 : [시편]29(18편)-나와 남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18편 40절, “주께서 또 내 원수들로 등을 내게로 향하게 하시고 나로 나를 미워하는 자를 끊어버리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의 원수란 게 성립되려면 하나님이 이 땅을 방문해줘야 돼요. 허공에 설치는 걸 원수라 할 수 없거든요. 구체적으로 원수가 되려면 하늘 쪽에 계신 분이 이 땅에 방문해서 인간에게 당하는 경우가 있어줘야 원수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냥 땅에서 욕한다고 원수가 되는 게 아니거든요.

예를 들면 창세기 4장에서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벌을 주시되 벌을 받을 만한 일이 일어나야 되는데 거기에 등장된 인물이 누구냐 하면, 아벨이 등장하지요. 아벨은 하나님 아닙니다. 그런데 아벨에 여기 있고 가인이 있을 때에 가인은 다른 데서 오는 대표자, 아벨도 대표자, 가인은 땅의 지배자의 대표자, 땅을 지금 장악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세력의 대표자, 아벨은 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땅에 속했다고 알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쪽의 대표자.

대표자끼리 만나서 땅은 자기의 본성을 감출 길이 없어요. 땅의 본성을 누가 건드리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땅의 본성을 건드렸지요. 제사를 안 받음으로 나는 너와 안 논다. 나는 너와 상대 안 한다. 성질나게 만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제사하라 했습니까? 하라 한 게 아니에요. 가인이 먼저 하나님께서 제사 드렸잖아요. 뭔가 내 쪽에서 하나님께 했다는 말은 자기의 내부적 본성이 외부로 발산된 겁니다.

어떤 남자가 자기에게 다이아반지를 준단 말이죠. 그럴 리 없겠지만. 여자가 다이아반지를 집에서 몰래 갖다 버린 게 아니고 다이아반지를 개한테 줘버렸다. 보는 데서 완전히 개 무시한 거예요. 그럴 때 외부에서 보는 본성은, 먼저 종교적 본성이죠. “신이시여, 내 정성을 받으옵소서.” 그 정성을 하나님이 보는 데서 치워버리죠. 건드린 거예요. 땅을 하나님 쪽에서 집적거린 거죠.

다 같이 제사를 안 받으면 성질날 일이 없지요. 인간은 끝났구나. 그런데 나는 안 받는데 아벨을 받아버린 거예요. 이걸 편애라고 합니다. 편애를 창세기 4장에서 보여준 것은 중계지요. 생생하게 중계방송 해버린 겁니다. 일방적인 사랑의 중계방송. 그러면 아벨이 사랑을 받았단 말은 가인은 가만있는데 미움 받은 거죠.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을 진행하는데 있어서 하나님께서 한 원칙은 뭐냐? 누가 뱀의 후손이고 누가 여자의 후손인지 그 원칙은 이미 창세기 4장에 정해졌어요. 한 쪽은 미워하고 한 쪽은 사랑하고. 한 쪽은 사랑하고, 이 말은 다 같이 사랑하는 게 아니죠. 정신 바짝 차려야 됩니다. 다 같이 아니고 어느 한 편이에요. 어느 한 쪽을 사랑한 겁니다, 사랑은 항상 편애에요. 골고루 사랑하는 그런 사랑은 저 절이나 천주교 성당에서나 찾으라 하세요. 그런 사랑은 없어요.

편애를 인간은 감당하지 못합니다. 실제로 하나님이 편애했더라도 본인은 편애 없는 하나님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게 공평하다고 인간들은 그렇게 생각하는데. 하나님께서 편애함으로써 자동적으로 여기서 발생되는 것은 뭐냐? 미움 받은 쪽이 원수가 되는 겁니다. 시편 18편에 방금 보았던 주께서 잠복돼있는 원수를 역사적 수면으로 끄집어내는 거예요.

이렇게 보면 누가 원수고 누가 하나님 쪽에 속했는지는 우리가 결정할 순 없어요. 주님이 결정한 대로 따라줘야 돼요. 거기에 자기가 사랑했던 사람, 자기가 좋아했던 사람이 하나님의 편애적인 조치에 의해서 갈라지더라도 이걸 너무 섭섭해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걸 섭섭해 여긴다는 자체가 문제가 있는 거죠.

그렇다면 첫 번째 나오는 어려운 것 해보겠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과 미움과 하나님이 생각하는 사랑과 미움과 대상이 같겠습니까, 다르겠습니까? 다르지요. 달라야 돼요.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은 역시 나한테 잘해주면 사랑이고 못하면 미움이죠. 내게 속한, 이걸 소유라 하는데 내 소유의 입장에서 사랑과 미움이 결정되는데 내 소유를 힘들게 하면 미움이 되겠지요.

주님의 미움과 사랑은 항상 미지의 요소입니다. 미지의 요소가 중간에 오늘 시편 18편 하니까 보이지 않던 하나님의 뜻이 시편 18편을 통해서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보이는 우리의 뜻과 여기서 만나게 돼요. 그래서 내 사랑과 내 미움이 여기서 박살나야 됩니다. 깨지고 시편 18편의 중재를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으로 이동이 돼야 됩니다.

제가 중재란 말을 했는데 어제 낮 설교시간에 주가 없는 신은 주가 아니라 했지요. 반드시 신이 있어요. 중재자, 중보자가 있어야 돼요. 일반종교에서는 중재가 필요 없지요. 본인 자체가 중재자니까. 내가 드렸고 내가 가인이거든요. 무조건 내가 드렸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이 받아줘야 돼요. 하나님에 대해서 내 마음을 드렸으면 나는 주는 쪽이고 하나님은 아무 소리하지 말고 내 정성을 받아줘야 돼요. 우리가 아는 신은. 하나님, 조물주, 하여튼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신은 이런 신이에요. 중간에 난데없이 끼어들면 싫어요.

내가 만약에 백만 원을 헌금했는데 누가 중간에 끼어들어서 백만 원 그건 무가치하다. 내 피를 받는다. 그것은 기분 좋은 일이 아니고 정의를 무시한 게 되잖아요. 성의를 무시하면 내가 기분 나빠요. 다시 정리합시다. 주님이 끼어들면 누가 기분 나쁘다? 내가 기분 나쁘다. 다시 말해서 주님 없이 중재자 없이 중보자 없이 직접 다이렉트로 하나님과 신과 관계하겠다. 이 신이 바로 우상이란 겁니다.

우상이란 인간이 만든 신이고 인간의 구미에 맞아떨어지는 신인데 그것은 뭐냐? 나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 신은 존재해야 된다. 사랑의 하나님, 산타클로스 하나님, 어떤 하나님이든지 간에 내 기쁨을 위해서 신이 존재한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에게는 예수님 끼어드는 게 거추장스럽고 귀찮은 겁니다. 왜 끼어드는지 이유도 모르지요.

교회에서 부흥되는 방법은 말씀이 아니라 사람들은 뭐하냐? 기도를 하라고 자꾸 기도를 시켜요. 한 맺힘이거든요. 기도를 해서 한을 풀게 되면 그 교회 교인으로서 큰 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기도응답 안 하겠다 하는데 기도하는 건 바보지요. 내가 기도하면 무조건 들어줘야 돼요, 하나님은. 그래야 좋은 하나님이에요.

그렇다면 먼저 신약부터 하는 것이 시편 18편을 이해하는데 도움 될 겁니다. 누가복음 9장 62절에 하나님은 시간 속에 들어오기 때문에 시간 속의 사건 유발이에요. 제가 여러 번, 수십 번 수백 번 했는데 여기서 사람들이 오해하는 게 하나 있어요. 우리가 사건을 펼친다 하니까 뭔가 획기적 사건, 깜짝 놀랄 만한 사건, 이런 사건이어야 사건답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론 그렇지 않아요.

누가복음 9장 62절을 적어볼게요.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여기서 시간 속에 사건을 어떻게 유발하느냐 하면,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선 모든 인간을 뭐라고 규정을 하느냐 하면, 그게 공무원인 되던 바다에서 그물 던지던 집에서 그냥 백수로 살든 관계없이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로 일방적으로 규정해버려요.

그러면 시간 속에 없던 사건이 개시가 돼요. 스타트가 되는 거예요.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라 했을 때 만약에 어떤 사람이 공무원이라면,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네. 이렇게 되면 안 돼요. 또는 학원에서 애들 가르친다고 볼펜을 잡고 있는데,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라 하니까 나는 볼펜 잡았으니까 나한테 해당 없네. 이렇게 되면 안 된단 말이죠.

모든 말씀은 모든 인간에게 일방적 의미가 부여됩니다. 그때부터 사건이 유발되지요. 방금 예를 들면 쟁기를 잡은 자, 나는 볼펜 잡은 자 사이에 여기서 괴리가 발생됩니다. 격차가 발생돼요. 내가 볼펜을 잡았다는 말은 나의 뜻에 의해 내가 구성하겠다는 겁니다. 내가 볼펜 잡는 것은 공무원 시험 합격하겠다는 일방적인 내 뜻에 의해서 내가 구성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라고 규정함으로 말미암아 졸지에 나의 뜻, 내 구성은 방해가 돼요. 이게 가인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그 제사를 받으면 될 텐데 하나님께서 제사를 의도적으로 거부하잖아요. 그러면 가인이 졸지에 제사 드려서 복을 받아내겠다는 기본적인 가인의 뜻은 좌절되는 겁니다. 참을 수 없지요. 반항하지요.

그런데 아벨 같은 경우에는 나는 제사 드려서 형한테 얻어맞아야지. 그런 게 있습니까? 없지요. 그러니까 이것은 아벨도 그렇게 생각 못했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건 일방적이에요.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쳐들어오는 일방성이 바로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간은 일방적이 아니라 내 소망을 품고 있어요. 시간 따로 사건 따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시간 속에 내 뜻을 단절시키는 내 시간을 끊어버리는 그러한 사건이 여기서 개입됩니다. 뭐로 개입되느냐? 언어로 개입돼요. 계시언어로 개입이 돼버립니다.

시간이 흘러가게 되면 하나님의 뜻이 계시언어라 수시로 이 시간을 잘라버립니다. 마치 지나가는 이 시간을 미국 개척시대에 있던 마차 있잖아요. 마차가 달리면 이쪽 산, 저쪽 산, 가는 곳마다 인디언들이 화살 쏘는 그런 장면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이 역마차 속에는 보안관이 타고 있어요. 상대할 수 없어요. 그냥 달려야 돼요. 앞에 마부는 치고받고 있고. 보안관은 달려오는 인디언을 행해 장총을 쏘아대고.

얼마나 신납니까. 인디언 조상을 갖고 있는 사람에겐 서글픈 이야기지만. 미국 개척하는 사람 입장에서 쓰레기 같은 인디언들 쏠 때 영화가 재미있단 말이죠. 그 영화 볼 때 인디언 편이었던가요, 미국 편이었던가요? 미국 편이죠. 왜냐하면 인디언 역사는 끊어졌거든요. 끊어진 역사를 신경 쓸 필요 없지요. 현재 미국 역사가 실제니까.

그러니까 악마는 인간을 싣고 역마차로 달리고 있는데 누가 자꾸 화살을 쏘아댑니까? 바로 하나님의 계시언어가 사건을 유발하는 거예요. 아파트에서 잘 먹고 잘 사는데 갑자기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늘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하면, 하늘나라 가고 싶어 했어요, 라고 우리가 대꾸하지요. 그리고 나는 교회 잘 다니고 잘 살고 있는데 나야 천국 가겠지, 라고 자체적인 변명 같은 게 나타나게 될 겁니다.

그러면 이 사건이 이렇게 돼버리면 사람들의 튕겨나가겠지요. 현실화된다. 제가 문장을 쓸 테니까 어느 문장이 마음에 와 닿는지 여러분들이 생각해보세요. 심리테스트는 아니고요. “사람 두 명 죽인 인도 호랑이가 갱생 실패하여 철장신세”라는 기사 제목이 나왔어요. “야생서식지에 집어넣었는데 주택가 배회하다가 체포” 이런 기사가 있다면, 여러 가지 단어들 있잖아요. 사람, 갱생, 철장, 어느 것이 가슴에 와 닿느냐 하면, 제 이야기부터 먼저 할게요. 이겁니다. 배회.

배회란 뭘 할 일 없이 어슬렁거리는 거죠. 인도 호랑이가 야생, 산에 살아야 될 것이 자꾸 사람 사는 주택가에 나타나는 거예요. 사람 두 명을 죽였거든요. 그래서 인도당국에서 그냥 호랑이 죽여도 되는데 갱생한다고, 그러니까 갱생한다는 의미도 강해요. 갱생하는데 그 다음에 중요한 의미가 갱생이 어떻게 됐습니까? 실패한 거예요. 이게 호랑이 이야기가 아니고 인간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갱생에 실패했다. 앞에 교회를 갖다 붙이면 멋지지 않습니까. 교회 다니면서 자기가 스스로 갱생하려했는데 교회 다녀봤자 뭐다? 실패다. 교회 다녀봤자 갱생이 안 되는 겁니다. 야생 호랑이처럼 우리 인간이. 그래서 안 됐다는 걸 어떻게 아느냐? 야생, 이 세상에 있는 호랑이가 자꾸 주택가에 배회하지요. 해운대 주택가를 빌딩숲을 배회하지요. 이게 갱생 실패한 상태란 말이죠.

사람이 호랑이를 볼 때 너는 네 자리로 가란 말이죠. 인간 자리에 오지 말란 거잖아요. 그러면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의 자리가 어디지요? 우리의 자리는, 아벨의 자리가 사랑받는 자리에요. 사랑받는 자린데 인간이 스스로 무엇에 실패하는 하면, 갱생에 실패하고 스스로 하나님 사랑받고 하나님 사람 되려는 마음에 의지는 있어요. 교회 다녔으니까. 이건 소용없어요.

맨날 어딜 배회해요? 주택가, 평소에 살던 내 행세, 지금까지 살아왔던 내 삶의 본성, 생존에 대한 욕구, 그 동네에 계속 배회하는 겁니다. 잠시 교회 왔더라도 다시 세상적으로 살고 싶고. 결국 이건 갱생 실패란 말이죠.

이 이야기를 왜 했는가? 시간에서 사건으로 갈 때 필히 단절돼야 돼요. 지금 단절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아무리 해봐도 인간은 갱생 실패하는 거예요. 분명히 인도당국에서 단절시켰지요. 단절시켰는데 기회를 줬지요. 네가 이 동네 살지 말고 산 속에 살아라. 토끼나 잡아먹고. 그런데 주택가를 어슬렁거리니까 인도 호랑이를 철장에 집어넣고 사진을 찍어서 철장신세를 공개했단 말이죠.

하나님께서 인간의 시간에서 사건으로 넘어가는 것은 단절돼있다. 그러니까 교회와도 갱생은 된다, 안 된다? 갱신이 될 리가 없습니다. 제가 단절이란 말을 강조하는 이유는, 바로 땅과 하늘의 연속성은 있을 수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개입의 자리 마련이 중요하기 때문에. 주님이 개입했다는 것은 연속성을 가만두지 않고 단절시키는 거예요. 그래야 여기서 사랑과 미움은 따로 구분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에서 시간에 속한 나를 애써서 천국 가려는 모든 시도는 가인처럼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한다는 것은 분명히 아셔야 됩니다. 그러면 시편 18편은 실패한 자에게 이 말씀을 주셨다는 거거든요. 그렇다면 성공한 사람은 어떤 식으로 성공하게 되는가? 그 방법이 있어요.

단절을 다시 볼게요. 이 논리가 어렵진 않은데 좀 생소하게 느껴질 거예요. 단절을 키웁니다. 단절 불가능이죠. 불가능함을 계속 키워나가는 거예요. 성급하게 구원받았다고 하면, 이건 착각이 될 수 있어요. 자기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오인하게 됩니다. 매일같이 살면서 불가능함을 키우는 거예요. 불가능함을 키우게 되면 이렇게 돼요.

첫 번째 나오는 중요한 겁니다. 나는 남이 될 수 없다. 이 원칙이 중요한 거예요. 여기 남에다 예수님이라 봅시다. 나는 때려죽여도 예수님과 하나 될 수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나기 때문에. 그리고 남이기 때문에. 남은 나가 아니고 나는 남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나는 예수님 속에 들어갈 수 없고 천국에 들어갈 수 없고 예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거예요. 이걸 분명히 해야 돼요. 내가 나라고 생각한 이상은 절대로 예수님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될 수 없는데 인간은 가만있는 게 아니고 단절을 키우라 했잖아요. 하나님은 단절을 말씀으로 키우는 거예요. 이게 답답하니까 여기서 자꾸 상상을 하는 거예요. 상상을 하게 되면 오인이 일어나는데, 잘못 생각하는데, 왜곡이죠. 이 상상은 현실을 상상하는 목적이 아니라 현실 상상을 통해서 누굴 상상하느냐 하면, 나를 오인해버려요. 내가 구원받지 않았음에도 구원받은 것으로 오인하는 거예요.

그래서 교인들이 목사한테 자기가 구원받았다고 오인하는데 협조해달라는 겁니다. 모든 설교가 거기에 소위 긍정적 마인드가 들어가지요. 내가 신자가 아닌데 신자 아니지만 성경에 보니까 천국 있고 성도만 간다 하니까 좀 목사가 돼서 날 속여 달라는 거예요. 쉽게 말해요. 내가 신자 아니더라도 신자라고 속여 달라. 속여 달라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위로해 달라, 사랑을 베풀어 달라. 그래야 이 사람이 계속 교회 올 마음이 드는 거예요. 거기 가니까 이상하게 위로받는 느낌이 들더라.

다시 말해서 내가 생각한 현실의 나와 성경에 나오는 천국 갔다는 성도와 이게 일치가 안 되거든요. 왜냐하면 주님께서 단절을 키우기 때문에. 주님이 없는 신이면 쉬워요. 그냥 성경말씀과 나를 동일시하면 끝나는 문제입니다. 내가 성경말씀을 믿기 때문에. I believe나는 믿습니다. 성경에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니까 까짓것 돈도 안 드는 걸 왜 안 해요. 믿습니다, 하는 거예요.

누구 보고 하는 거예요? 그게 가면 갈수록 자기 자신을 오인하거든요. 다른 말로 하면, 내가 계속 속이고 싶은 나를 내가 만들고 싶어요. 물론 못 나려고 속이는 게 아니고 잘 나려고 속이는 거예요. 내가 괜찮은 걸로 속고 싶어. 내가 나를 속여서라도 내가 되고 싶은 것이 있고 싶어. 그것 없이는 인생을 힘들어 못 살겠어.

나로부터 연속성을 갖는데 단절 빠지고 주님 빠지고 내가 되고 싶은 것을 신이 도와주는 그런 신과 더불어 살고 싶어. 그게 상상이고 현실인 동시에 그 현실 속에서 나는 오인이 된 채 일시적인 만족감에 숨이라도 쉬어보자.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마스크로 코 다 막혔는데. 상상도 못하나. 상상할 자유도 없나. 상상 좀 해보자. 죽으면 천당 간다고. 그런데 상상도 반복이 되면 현실인 줄 알고 착각해버려요.

그런데 어느 교회에 진짜 복음 아는 목사가 와서 여러분, 그것은 당신이 당신을 속이는 겁니다, 라고 바른 소리하니까 아무리 진리로 자유하는 교회라 해도 그 교회 싫어. 왜 내가 되고 싶은 것을 목사 네가 뭔데 사람을 억하심정으로 만들고 부정적 마인드 집어넣어서 나의 긍정을 다 깨느냐, 이 말입니다.

찬송가 중에도 좋은 노래 있잖아요. 저 장미꽃 위에 이슬, 얼마나 아름다워요. 장미, 이슬. 그 찬송가는 부담이 안 되는데 십자가 지고, 피 흘리고. 이러면 짜증나. 정육점에 온 것도 아닌데 갑자기 피를 남발하는지. 목사가 찬송가 고를 때도 좀 아름다운 노래 있잖아요. 이런 노래 불러야지 험악한 노래 부르면 교회 분위기 왜 이래?

레퀴엠, 진혼곡이란 게 있지요. 장송곡. 슬픈 노래 그런 것은 지양하고 밝고 예쁘고 신나는 노래로 대체해달라는 요구가 있을 거란 말이죠. 다시 말씀드립니다. 성경말씀은 주님에 관한 이야기에요. 모든 성경은 누굴 이야기한다? 나에 대한 게 아니에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거예요. 주님이 하는 일은 단절을, 우리의 시간, 아름다움, 미래를 상상하고 있는 우리의 본성적인 그러한 가능성 시간대에 사건을 집어넣어요.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늘나라에 합당치 않다. 얼마나 부정적 발언입니까.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 못 간다. 벌써 못 간다, 안 된다. 그 자체가 얼마나 부정적이에요. 나는 남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남이 될 수 없지만 내가 단절이 빠지고 연속성이 되는 그런 예수, 예수님은 남이죠. 예수님이든 하나님이든 나는 아니니까. 하지만 그 남과 하나가 돼야 구원받는다고 하니까 믿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런 식으로 억지 춘향처럼 억지로 예수님과 내가 하나인 것처럼 내가 상상력을 동원해서 자신을 속이고 싶은 거예요. 이게 본성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여러분들이 주님이라 합시다. 이런 인간이 있다. 그런데 이 인간이 주님 보시기에 구원받기로 작정된 인간이라면, 사랑받기로 작정된 인간이라면 무슨 조치부터 내려야 되겠어요? 문제가 어디 있느냐 하면, 내가 있으니까 나를 자꾸 상상하지요. 그러면 나를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나를 아예 없애버리지요. 그걸 아예 오늘 제목으로 정했습니다.

오늘 제목은 청소. 집에 오실 때 청소하셨어요? 치워버리는 거예요. 놔두면 자꾸 자길 긍정하기 때문에 자기 긍정하면 자기변명이 또 나와요. 왜냐하면 나에게는 불가능이 있으면 안 되고 항상 가능만 나와야 그게 나답고 여기기 때문에. 단절보다 연속성을 인간은 추구하기 마련입니다. 일단 제목을 청소라고 정해놓고, 나중에 바뀔지 모르겠습니다만.

청소는 세 가지만 하면 돼요. 첫 번째는 방법은? 사실 방법이라 하지만 두 번째가 더 중요해요. 왜? 세 번째는 누가? 보통 언제 어디서는 시간과 공간에 관한 문제기 때문에 사건 앞에서 관계없어요. 사건은 시간이나 공간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이게 뉴욕인지 런던인지 서울인지 관계없이 주께서는 자기 백성을 건지기 때문에 시간, 공간은 별 의미 없어요.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왜 어떻게 할 때 무엇은 청소라고 정해놨기 때문에 세 가지만 하면 돼요. 사실은 첫 번째 방법보다도 왜, 누가 인데 왜 그러면 첫 번째에 방법을 썼는가? 이 방법을 통해서 왜가 드러나고 누가 청소하는가가 등장해요. 방법은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예수님 십자가 죽으심으로써.

또는 구약 때 언약에 의하면 어린양이 이스라엘 진영 한 복판에서 매일같이 아침저녁으로 죽지요. 그냥 양이 아니고 흠 없는 어린양이 계속 죽음으로써 흠 있는 네가 용서받는다. 다시 말해서 약속의 땅의 젖과 꿀의 혜택을 그들은 계속 누릴 수 있다고 하는 거예요. 이건 노선 바뀜인데 노선이 바뀌는 거예요. 전라도 갔다가 경상도로 철도노선이 바뀌는 거예요. 방법은 죽음인데 죽어야 노선 교체가 일어납니다.

어제 낮 설교에서 녹물 나오다가 생수 나온다고 파이프 수도관 교체 이야기했지요. 죽음 앞에 뭐가 붙어요. 우리가 자살하면 안 돼요. 흠 없는 죽음이 방법이에요. 흠 없는 죽음이니까 이 땅에서 흠 없을 찾을 수 없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냥 상대적으로 흠 없는 것, 인간보다 상대적으로 흠이 없다 할 수 있는 게 뭐냐 하면, 양 또는 염소, 암소나 수소, 그런 희생제물 또는 식물성 가루, 제물이라고 규정을 한 게 있어요. 이런 것을 규정함으로써 성스러운 또는 정결한 제물이라 한 거예요.

창세기 7장 봅시다. 2절 읽어보세요.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 됐습니다. 하나님께서 짐승을 둘로 일방적으로 나눴어요. 중간지점은 없습니다. 정결한 것 아니면 부정한 것. 정결한 것은 쓸데가 있어요. 창세기 8장 끝에 보면, 방주에서 노아식구가 나와서 제사 드릴 때 부정한 것을 제치고 정결한 짐승을 잡아요.

그러면 노아 자체 내에서, 6일에 인간 중심으로 짐승들이 창조되었지요. 그러면 인간이 짐승을 볼 때 짐승 이름 짓는 것도 좋지만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 하면, 저건 더러운 것 부정한 것, 이건 깨끗한 것, 그런 인식을 인간 자체가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정결한 것은 제물용이에요.

제물용이란 하나님 있고 인간 있을 때 그냥 못 만나고 정결한 제물이 중재자 역할 해야 인간과 하나님 관계는 유지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정결, 부정으로 구분된다는 것은 여러분 생각하기에 창조 때일까요, 아니면 인간이 범죄 하고 난 뒤일까요? 범죄 하고 난 뒤겠지요. 인간이 범죄 하고 난 뒤에 관계가 끊어졌음이 분명해졌을 때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이건 정결한 것, 이건 부정한 것이란 지시, 규정, 그 하나님의 계시가 장차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거예요.

이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은 전부 다 그리스도, 주가 누군지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 주변에 배치돼있고. 그 짐승과 인간 사이를 연결시키고 그 다음에 그 짐승과 하나님 사이가 연결되게 되면, 다리가 두 개지요. 하나님이 계시고 인간이 있다면, 우선 여기에 정결함이 있다면 인간과 정결함이 구성돼야 되고, 그 다음에 정결함과 하나님이 구성돼야 되고. 이 두 가지의 관계로 인하여 하나님의 창조가 완성되는 겁니다.

주님이 계시면 그래요. 그런데 일반인들은 아까 처음에 인간들은 뭘 필요로 하지 않다? 골치 아프게 이게 왜 필요하냐? 그냥 하나님이여, 내 정성 받아주소서. 그러면 끝나는 문제지 정결, 부정이 왜 들어가야 되느냐. 니가 왜 거기 있어요. 왜 니가 거기서 나와서 나를 귀찮게 하느냐 말이죠. 나는 내가 보기에 깨끗한데. 나는 남보다 죄 그렇게 많이 안 지었어. 얼추 이 정도 깨끗하면 천국에 들어가는 건 기본이고 천국 가도 높은 자리 앉을 거야. 예수님 앞에서 장차 보너스로 싸웠던 대목이잖아요.

그러니 제자들의 하는 행세를 보면 어찌 오늘날 일반인들을 그대로 반영해주는지요. 도대체 주님은 완전히 빠져버렸어요. “교회 왜 안 나오겠습니까?” “열심히 하겠습니다.” 누가 열심히 하래? 그건 연속성인데. “앞으로 헌금 좀 할게요.” 누가 헌금하래요? 열심히 하고 헌금하고 바르게 살고, 그런 것 하겠답니다. 이웃사랑하고.

이웃사랑 같은 것 말고 당신이 어디서 오인하고 있는가? 당신 자신이 오인하고 있다는 거예요. 뭔가 속고 있다는 겁니다. 속이는 전문가는 악마잖아요. “아이고, 손자 키우느라.” 손자 키우는 건 아는데 코로나 누구 보냈고 손자 누가 보냈어요? 주께서 보내셨잖아요. 다시 말해서 신종코로나 없을 때 자기는 기본 신앙이 있는 신자라고 여겼지요. 그런데 신종코로나 덮치고 아들, 며느리 회사 다니고 손자 누가 키울 거야? 할머니가 해야지 어떻게 하겠어요.

서울에 큰 교회가 정부시책에 따라서 이 미터씩 띄워 앉고 인터넷 동영상으로 했단 말이죠. 정부시책에 맞춘다고 한 달간 그랬어요. 그 다음부터 더는 못 맞춘다고 교회 오라 했거든요. 교인들 반이 안 오는 거예요. 왜? 편하거든. 처음에는 하나님의 모든 일의 중심은 예배라 해서 예배참석 안 하면 지 하는 사업이고 가정이고 파탄 날 줄 알고 예배가 중심이다. 목사는 맨날 예배가 중심이래.

예배중심으로 모여야 된다고 그렇게 강조했는데 한 번 집에서 하니까 얼마나 편한지. 이건 진짜 화장실에서 용변 보면서 예배할 수 있어요. 막 나오려고 하는데 어떻게 하겠어요. 파자마는 기본이고요. 침대 누워서 하든지 다리 꼬고 예배 보고. 큰 교회가 문제가 몇 명 참석 안 한 것보다 더 큰 문제가 헌금이 얼마나 나오느냐? 헌금이 반 토막 났답니다. 교인들은 교회 안 나오니까 차 기름 값이 절약이 되지요. 교회 안 나오니 꼴 보기 싫은 집사 안 보니 좋지요.

그리고 예배드릴 때는 만사 제쳐놓고 예배드렸는데 자기 몸이 집에 있으니까 자기는 예배드린다 하는데 전화는 왜 그렇게 오고 할 일은 왜 그렇게 생기는지. 너 교회 안 가고 집에 있지. 시아버지 병원에 있는데 등등 왜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많은지. 전에는 교회 간다는 핑계대고 내 시간 가질 수 있었는데 그게 또 안 돼. 그러니까 교회 위기라는 거예요. 원래부터 위긴데 그것도 모르고.

뭐냐 하면 안 가보니까 예배중심이 돼야 복 받는다는 이것이 그동안 내가 날 속인 거예요. 사실은 목사가 속이도록 했지만 이제는 목사 핑계대지 말고 내가 편해. 어떤 경우라도 편한 맛을 보면 내가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다는 사실. 그러니까 내가 한 시간 동안 내내 이야기한 게 뭐냐? 인간은 자신에 대해서 안다, 모른다? 전혀 모르는 거예요.

왜 주님께서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하는지, 이건 뭐냐? 인간은 항상 뒤돌아보게 돼있다는 사실을 주님께서 내게 알려주는 거예요. 그래야 내가 제거가 돼요. 그러나 우리는 내가 제거되는 것을 참을 수 없고, 내가 잘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순종하면 되잖아요. 말씀 지키면 되고 예수님 십자가 믿습니다, 하면 되지 않습니까. 자꾸 출발 스타트를 일단 나는 있고 나부터 출발하면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정성과 순종을 받겠지, 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누구처럼? 가인처럼.

시편 18편의 이야기는 나를 지적하면서 나를 지적하는 것에 멈추는 게 아니고 전적으로 내 책임으로 돌리는 게 아니에요. 환경이 문제다. 우리가 온 이 땅, 이 세상 자체가 주님으로부터 저주받은 환경이라는 것을 모르고 세상 환경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고 자기 몸 하나 편하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너무 안일하게 자기 자신을 속여 온 겁니다. 속이려고 속인 게 아니고 진실이 없으니까 속일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 갱생이 안 됩니다. 아무리 말씀해도 역시 몸은 세상이 좋아서 세상을 배회하게 마련이죠. 그쪽으로 이끌리게 마련입니다. 첫째 시간 결론은 뭐냐? 내가 없어져야 돼요. 그냥 죽으면 자살하면 안 돼. 나를 죽이는데 흠 없는 제물과 연합해서 죽으면 돼요. 그게 주님의 청소 방법을 출애굽 할 때 어린양의 피 바른 것부터 시작하는 거죠.

피 흘린 주체가 이 집의 주인이라고 해서, 내 집에 들어오는 문설주, 문지방에 내 피를 바르는 게 아니고 내 피 바르면 자살이죠. 내 피 바르지 마시고 어린양의 피를 바르는 거예요. 그러면 놀랍게도 사람 잡아 죽이러 온 천사가, 아예 나를 만나지도 않아. 내가 앞장세운 어린양의 죽음만 보고 그냥 돌아가요. 그것을 약속이라고 이야기해요. 언약이라 하는 겁니다.

정결하다, 부정하다 하나님이 나누신 이유는 노아방주에 노아식구와 함께 정결한 것으로 정결한 짐승은 노아를 위해서 대신 죽어야 될 제물로 동승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언약의 주인공이 노아겠습니까, 정결한 짐승이겠어요? 정결한 짐승이죠. 그래서 노아방주에서 나오고 난 뒤에 그 노아의 후손들은 누가 정결한 짐승을 앞장세우느냐의 여부에 따라서 하나는 축복을 받고 하나는 저주받는 노선이 새로 갱신해서 개시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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