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2장 36절 (시체 재활용) 200602b-이근호 목사
강남-누가복음 2장 36절 (시체 재활용) 200602b-이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여러분들 혹시 잔디밭에 앉았을 때에 마침 여러분 눈에 네잎크로바가 보이면 기분이 어때요? 아 오늘 기분 진짜 굉장히 안 좋다. 더럽다. 찝찝해. 이렇게 생각듭니까? 아니면 이게 왠일이야. 네잎클로바가 왠일이야 하고 굉장히 반기지요. 행운의 네잎클로바라고.
자, 왜 네잎클로바하고 세잎클로바하고 그렇게 차이를 주는 겁니까? 그거는 모든 우리가 아까 주위에서 들어왔던 모든 것은 네잎클로바가 행운을 가져다준다. 행운. 행운을 가져다준다 그렇게 우리가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일반적인 것을 뽑아낼 때 선지자가 자기의 기능을 합니다. 일반적인 것이 전부다 세잎클로바라고 합시다. 세잎클로바. 그럼 선지자가 뽑아놨을 때 이건 네잎클로바, 드문거니까 네잎클로바 한다면 이것을 사람들은 기분 좋게 하겠어요? 기분 싫게 하겠어요?
일단은 네잎클로바는 기분 좋지만 여기에 선지자 뽑아낼 때 사람들은 기분 좋은게 아니고 기분 굉장히 나쁘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따라갈 수 없기 때문에. 만약에 선지자가 동원된다면 어떻게든 일반적에서 선지자까지 어떻게 연결돼야 돼요. 계속해서 단절이 없이 나도 그렇게 되면 필히 동일한 결과를 내줄 때 여기에 희망이라는 것이 성립이 된다 이 말이죠.
어떤 사람이 교회에서 은혜 받았다. 어떻게 은혜 받았어요? 금식하고 십일조하고 새벽기도 나오고 성경 다 읽어서 써가지고 성경 일년만에 한번 다 쓰니까 갑자기 하나님께서 복주셨다 한다면 그게 아무리 힘들더라도 고되고 참 하기 힘든 노동이라고 할지라도 희망이 있는 이상은 악바리같이 악착같이 그렇게 하기 마련입니다. 하기 마련이죠.
그래서 사람들은 안나라든지 시므온이라든지 이 사람들을 성경에 나온 이 사람들을 가지고 자꾸 분석해가지고 본받으려고 해요. 특히 어떤 점을 본받으려 하느냐 하면은 여기 36절에 보면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7년 동안은 남편과 함께 살았습니다.
살다가 남편이 죽고난 뒤에 과부된 지 몇 년이라고 했습니까? 84년이죠. 이 84년은 출가한지 7년 됐으니까 포함 91년이죠. 그런데 결혼을 만약에 옛날에는 결혼을 젊어서 했으니까 18세에 했다 합시다. 18세에 했다 하면 이 안나의 수명이 109세에요. 109세. 자기가 송해입니까? 우와. 109세 된 거에요.
그래서 성경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세상에 과부되도 재혼을 안했다는 거에요. 재혼을. 오직 주님만 섬긴다고 바빠 가지고 재혼을 안했다는 거에요. 이게 이런 설교 나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과부도 재혼하지 말고 그냥 교회 와서 새벽기도 밤낮으로 기도하게 되면 나중에 누구 만난다? 예수님 만나는 쪽으로 그렇게 하는 거에요.
그런데 그렇게 하는 목사 본인은요. 사모님 죽어보세요. 6개월도 안 되서 선봐가지고 전부다 다 갑니다. 6개월도 안돼서. 말도 안 되는. 이 안나라는 사람이 84년 동안 재혼을 안 한 이유가 믿음이 좋아서 안 할 수도 있지만 인물이 안 되고 돈이 안 되니까 뭐 전문직업이 없으니까 아무도. 특별히 몸까지 아파버리면 삼위일체. 아무도 찾지를 않아요. 부담되어서 찾지를 않아요.
주께서는 이런 사람을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성경에서 이걸 선지자가 아니고 쓰레기로 봅니다. 쓰레기입니다. 쓰레기에서 복음 나와요. 쓰레기에서. 그러니까 이 안나라는 사람이 그걸 알아요.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별 희망이 없어요. 희망은 오직 선지자이기 때문에 오직 대대로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약속을 쳐다보는 것 외에는 다른 낙이 없습니다. 어떤 낙이 없어요.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쓰시는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에코산업이다 이렇게 해요. 에코백. 쓰레기 재활용. 쓰레기더미에 옷 천 끄집어당겨가지고 그거 가지고 가방 만드는 것. 당나귀를 알아요? 참깨를 짜야 참기름이 나온다고요. 참기름이. 참깨를 짜야.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나대면 안돼요. 우리 하는 그것에 대해서 강력하게 참깨를 짜버립니다. 그럼 우리는 찌꺼기가 돼요. 찌꺼기인데 찌꺼기에서 이게 나올 수가 없어. 복음이 나올 수가 없다고 했는데 이게 우리의 예상인데 내가 뭐 말씀을 지킬 수가 있어요. 어느 하나. 죽은지 7년 동안 뭐 그런거 할 자신도 없지요.
성경을 보면서 우리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차단시켜버려요. 어떤 것도 하고 싶지를 않아요. 성경에 나온 사람들. 소경되었는데 실로암 강가에 가서 진흙가지고 바르니까 소경이 눈을 떴다. 멋있어 보이지요? 한번 소경되어 볼래요? 그러면? 아이고 사양하지요. 믿음 좋은 사람한테 가세요. 저는 안 됩니다. 이런 식이다 이 말이죠.
38년 된 병자. 그것도 1,2년도 아니고 38년 된 거에요. 하지만 예수님 만나서 뭐 나중에 걸었다. 그러면 우리의 생각은 뭐냐 하면 아 처음부터 걷지. 처음부터 걷지 왜 병 주고 약 주느냐 딱 그런 식의 조치가 내가 소망하는게 아니에요. 내 코스에는 그런 원함이 없어요. 나의 소원에 그런거 없어. 나의 희망에 그런게 없다 이 말이죠.
내가 생각하는 그 보따리에 주께서 들추어보시고 “아 이걸 원해?” “예.” “이걸 희망해?” “예 이걸 희망합니다.” 그러면 이 희망없는거 내가 할게 해가지고 다 조사해가지고 수색해가지고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것을 줘버려요. 원하지 않는걸. 그래야 우리가 쓰레기인 것을 인정하지요. 내가 한 모든 것이 죽은 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자, 여기서 또 여러분들이 필히 또 알아야 될게 있어요. 오늘 강의는 이거 하나만 알면 돼요. 갑자기 부담이 확 줄어들죠. 일반자에서 선지자 끄집어내죠. 일반자에서 선지자 끄집어냅니다. 선지자 끄집어내니까 선지자는 개인이잖아요. 개인을 이걸 집단화시킵니다. 방향이.
일반자에서 선지자 끄집어내고 선지자 끄집어낸 것을 집단화시키면 이게 바로 이스라엘 되는 거에요. 그래서 일반자, 일반인들에서 선지자 끄집어낼 때 그 원칙을 여기에다가 집단의 원칙에다가 그대로 제공해 버립니다.
그러면 여기 선지자는 뭐가 되느냐 하면 자기 능력으로 된 거 아니지요? 아기 예수가 언제쯤 온다하면 그거는 안나가 알았어요? 몰랐어요? 사전에. 사전에 아기 예수가 있는지 몰랐지요. 안나가 84년 동안 성전에 있게 하신 것은 누가 있게 하셨느냐 하면은 아기 예수님께서 안나를 그렇게 만든 거에요. 기다리라. 기다리라 내가 갈께가 아니라 그 기다리는 자 되게 한 거에요.
선지자 되게 해서 선지가 값 되도록 선지자라는 그 값에 맞도록 아기 예수님께서 그렇게 조정을 하신 거에요. 그 당시에는 아기 예수님보다는 성령께서 그렇게 하셨다하는 것이 누가복음에 맞아요. 왜냐하면 시므온도 성령의 감동으로 되어 있지요 27절에. 성령의 감동으로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안고 이제 종을 평안히 놓아준다고 했지요.
그러면 시므온이 사전에 어떤 치밀하게 개입하거나 계산된 게 아무 것도 없어요. 시므온이 성전에 가서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도 할 수가 있거든 남편 사별하고 난 뒤에는 그냥 줄곧 새벽기도 해가지고 이 제단, 교회를 지키고 더 교회에서 기도해야 된다라고 목사들이 자꾸 그런 식으로 이걸 적용을 하는데 그러면 코로나 있을 때는 교회 와야 돼요? 말아야 돼요? 코로나 왔을 때는.
코로나 왔어도 손 씻고 마스크하고 이렇게 이렇게 해가지고 하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데 그렇게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이 그 교회에 7868명. 다닥다닥 붙어앉아가지고. “네가 네 집에 가라.” “아냐 내가 부름 받았어.” “내가 시므온이야.” “아냐 내가 시므온이야.” 싸우면 되겠어요? 안되겠어요? 안되겠지요.
어떤 경우도 예상 못해요. 예수님을 언제 느끼느냐 하면은 예상 못할 때 느껴요. 뭐와 동반해서? 내가 죽은 자라는 것을 확인시키는 그 느낌과 같이 동반해서 나타나는게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십니다. 죽은 자라고 해가지고 숨 안 쉬고 그런게 아니고 너 쓸모없잖아. 너 나 만나기 위해서 한 게 있어? 없어? 아무것도 없지? 라는 생각과 동반해서 같이 나타나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기도의 효과 내가 금식의 효과를 노린다면 그것은 무슨 짓을 하고 있느냐 하면은 가짜 예수, 악마죠. 마귀를 부르는 소리하고 똑같은 거에요. 그거는. 그저 훤칠한 키에 인물 잘생긴 그런 예수죠. 거기에 아우라까지 왕왕왕~~ 해가지고 그 성화보면 나오지요. 동그라미 있잖습니까. 동그라미 뭔가 휘황된 아우라와 함께 있는 그런 모습을 보고 싶은 거에요.
또는 그 눈 덮인 곳에 사진을 우연히 찍으니까 예수님의 그 털보사진. 예수님이 무슨 털이 났어요? 예수님은 털이 없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예수 사진은 전부 털이 나와 있다고요. 털보. 미남은 얼마나 미남인지. 내가 생각하는 모든 예수님의 성화는 그레고리 펙 닮았어요. 약간의 턱이 빠져가지고 양악수술 했나. 이빨은 얼마나 가지런한지. 교정받은거 같애.
자꾸 주변에서 했던 그걸 해가지고 자기가 억지로 신자이고 싶어하는 거에요. 왜? 그게 사유니까. 내 생각이 그거니까. 나는 내가 원하는 그 이미지가 나이고 싶어. 그걸 포기를 못해요. 그래야 남 앞에 나는 이런 은혜 받았습니다. 이렇게 나는 신자입니다 라고 꼭 남한테 으스대고 싶은 충동 때문에 그런 거에요.
죽은 자한테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죽은 자 찔러보세요. 죽은 자 찌른다고 깨어나는게 아니듯이 주님께서는 우리는 죽은 자로 간주하시고 일하시기 때문에 어떤 것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님에 의해서 깨워질 때 알아요. 성령이 임해가지고 깨보니까 아 내가 이미 죽은 자구나. 진짜 쓰레기 재활용하듯이 나는 에코백이구나라고 보니까 로고가 있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거는 내가 생각 안 했는데 쓰레기에다가 십자기를 박아놔버린 거에요. 그리스도 어린 양의 인을 거기에다가 박아논거에요. 일방적으로. 본인이 갈 때마다 십자가의 능력이 나오게 되어 있지요. 그게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보고 남들 보기에 걷게 했지요. 아까 우리가 공부한 것에 의하면 첫째 시간 이야기한다면 사람들은 본다. 관찰한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어린애들이 보면 지능은 발달하지 않았는데 완숙된 상태의 기능이 하나 있어요. 그거는 뭐냐? 눈이 본다는 거에요. 눈은 애들이나 어른이나 오히려 어릴 때 눈이 더 좋아요. 엄마는 그냥 지나가는데 애는 요만한 것 티끌하나 다 끄집어내서 엄마한테 보여줘요. 엄마 방에 가시 있어요. 다 보여준다고요.
다른 기능은 완숙되지 못했는데 눈은 태어날 때부터 왜 그렇게 눈이 시력이 좋은지. 그래서 과학자들은 상당히 신기해하는 거에요. 보니까 보여지는 이미지가 있을 것이고 그 이미지는 차곡차곡 안에 계속해서 창고 쌓듯이 계속 누적되는 거에요.
누적되니까 나중에 커서도 소원이 뭐냐 하면 백마 탄 왕자같은 남편 만나야지. 백마 탄 왕자 그런거 네가 언제 들었어? 백설 공주 동화책에. 옛날에 본 동화책이 누적 되서 자아와 이미지와 동일시되는 겁니다. 결국 자기는 죽은 자가 아니에요.
결국은 주님께서 성령이 임하게 되게 되면 주님은 죽은 시체를 재활용한다는 식으로 주께서 사용하시는 겁니다. 사용하실 때 선지자라는 이 개념, 이 개념은 성경에 나오는 개념이지만 일방적으로 안나라는 사람에게 뒤집어씌우기 위해서 안나로 하여금 84년 동안 결혼하지 않고 성전에 출입하면서 금식하도록 주께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그래서 안나가 “나 금식 안했다”가 아니라 하게 해도 “내가 한게 아니다”. 내가 한게 아니다.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아나니야와 삽비라가 헌금해서 죽었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할 때는 차라리 헌금을 안했으면 더 살았을게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한 푼도 안냈으면 괜찮은데 괜히 어줍잖게 반 내다가 걸려 죽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헌금하다가 반 낼려고 하거든 아예 하지 마세요.
아나니야와 삽비라의 문제점은 뭐냐 하면은 헌금을 본인이 했다고 여기는게 문제점이에요. 이게 그래서 죽여버린 거에요. 네가 죽은 자라는 그 규정을 위해서 내가 했다는 요소를 주께서는 허락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이 원칙을 여기서 집어넣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두 번째 시간 어려운거 하나 해봅시다. 어려운거 또 나옵니다. 하게 되면 계시와 뭐와 반대가 되느냐 하면은 역사가 반대가 됩니다. 계시와 역사가 반대가 됩니다. 여기 누가복음 2장 31절, 32절 제가 읽어 보겠습니다.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라고 되어 있지요.
지금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안고 어 아기 예수 여기 있네 끝나는게 아니고 아기 예수를 안고 무엇을 지금 소개하고 있느냐 하면은 이사야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하여튼 성경에 여러 군데 구약에 있는 이 이야기를 하는 거죠. 이 이야기를. 이야기를 할 때 시므온이 이 이야기를 할 때 우리가 보기에는 뭐로 보느냐 하면은 하나의 역사로 보인다면 이것은 잘못이에요. 역사가 아니고 계시의 실현이고 완성입니다.
왜 이게 역사가 아니냐 하면은 계시는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은 예수님에게서 나와요. 계시는 예수님에게서 나옵니다. 존재니까 우리는 존재자고.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것은 계시가 되지만 역사는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은 인간의 이성에서 나와요. 인간의 이성에서. 합리적 구조에서 나온다고. 인간의 시간의식에서 나와요.
인간의 시간의식은 중지가 없어요. 촘촘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걸 지속이라고 하는데. 시간이 끊어집니까? 안 끊어집니까? 시간은 안 끊어지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은 시간을 뭐냐? 강물이라고 해요. 강물. 강물은 칼로 쪼개면 잘라져요? 안 잘라져요? 안 잘라져요. 잘라지게 되면 또 잘라진 그 부분에 강물이 또 흐르기 때문에 시간이란 이처럼 중지됨이 없다고 보는 거에요.
그런데 하나님의 계시는 뭐냐 하면은 이 하나님의 계시를 다른 말로 언약이거든요. 이 언약은 인간의 역사를 기본으로 해서 이걸 중지시켜버립니다. 더 어렵게 이야기할게요. 아담의 속한 일이 먼저 선행되어야 그 다음에 주님의 일이 여기에 개입하는 식으로 또는 공격하는 식으로 주의 일이 나타나는 겁니다. 아담의 일이 먼저 시작 되어야 돼요.
그럼 아담의 일은 뭐냐 하면은 범죄 일이죠. 선악과를 따먹게 해놓고 그 다음에 일이 된다니까요. 선악과 따먹게 해놓고 그 다음에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운다는 약속 있지요? 창세기 3장에서 선악과를 아담과 하와가 먼저 따먹어줘야 돼요. 따먹어줘야 그 다음에 뭐가 의미가 있느냐 하면은 여자의 후손보다 뱀의 후손 다툼이 의미가 있는 겁니다.
인간이 먼저 일을 저질러줘야 돼요. 죄를 지어줘야 돼요. 죄 짓기 전에 주께서 일 안합니다. 죄 딱 지어놓고 누가 이랬어? 하고 들어가는 거에요. 누가 이랬어? 그래서 인간의 죄가 필수적이에요. 주의 일에. 그 죄를 여기서 뭐라고 했습니까? 역사죠. 인간의 역사가 필수적입니다.
한번 정리해봅시다. 계시는 역사와 단절됐다. 역사가 이렇게 엿가락처럼 또는 저는 엿가락이라는 표현보다도 소시지. 길다란 소시지를 한다면 계시는 뭐냐? 역사를 끊어버려요. 끊고 들어갑니다. 끊고 들어가요. 처음에 들어가는 것 노아 언약. 노아 끊어버리죠. 그 다음에 노아 언약 다음에 무슨 언약입니까? 아브라함 끊어 들어가고 이삭 끊어 들어가고 야곱 끊어 들어갑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게 뭡니까? 모세 언약 끊어 들어갑니다.
노아 언약 때 방주에 있는 사람과 그 나머지 사람들이 구분되지요. 나머지 사람한테는 무슨 의식이 있습니까? 시간의식이 있지요? 그들은 시간이 계속 흘러가고 있지요. 그들에게는 시간이 흘러들어가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뭐가 없느냐? 뭐를 못 느끼느냐 하면은 종말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느끼는 겁니다. 종말? 시간이 있는 이상 종말은 없다. 계속 간다.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그때 사람들이 물이 임하기 전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했잖아요. 사람들은 홍수 나서 멸망한다는 것은 그들의 과거시간의 체험과 누적된 지식체계에서는 물로서 홍수난다는 것이 그 당시 사람들한테는 이런 정보가 유투브 어떤 정보에도 이런 정보가 없어요. 아무리 유투브를 찾아도 물로서 홍수난다. 그 당시 유투브 없었지만.
아무리 서로서로 연락취해 봐도 물로써 망한다는 소식은 그들에게는 나올 수가 없어요. 왜? 그들은 믿는 것은 뭐만 믿느냐. 역사와 전통을 믿습니다. 역사와 전통은 개인적으로 어디서 나오느냐? 습관과 습성에서 나옵니다. 관습에서 나오는 거거든요. 이걸 뭐냐? 관습은 어디서 나오느냐? 머리 기억이 아니고 몸의 기억. 내 몸이 기억하고 있는대로 그냥 자연스럽게 무심코 막 나와요. 무심코.
그 착하고 착한 그런 노인네들 평생에 평소에 한번도 나쁜 소리하지 않는 그 어머니께서 늙은 어머니께서 나중에 치매 걸리니까 욕이 막 나오는 거에요. 자식이 다 놀래는거야. 우리 어머니 평소에 욕한 적이 없는데 왜 욕이 나오지? 머리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듣고 본 모든 것이 몸으로 기억해가지고 이게 저절로 두뇌기능이 약화되니까 저절로 막 튀어나오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에요. 어떻게 될지 몰라요. 얼굴 보니까 목사님 욕이 뭐에요? 전혀 못 느끼고 있는거 같은데 이게 건드리면 무슨 욕이 나올지 모르겠어요. 얼마나 놀랬는지 본인이 놀래요. 내가 이런 이야기 들어본 적이 없는데 생뚱맞은 금시초문인 욕이 막 나온다 이 말이죠. 일반성이에요 일반성. 아담에 속했거든요. 역사와 전통에 의해서 누적된 거죠. 이것 가지고 미래를 개발하는 겁니다.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바벨탑, 한 사람이 지었습니까? 여러 사람이 지었습니까? 일취단결해서 같은 생각이 있기 때문에 쌓아올린 거에요. 그 같은 생각이 뭐냐 하면 언어가 통한다는 말은 언어의 의미가 통한다는 뜻, 뜻이 하나가 됐다. 뜻이 한통속이란 뜻이에요. 언어를 그 한통속을 강제로 언어의 다양성으로 전부다 갈라서 온 세상에 다 흩어지게 만든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래서 인간의 종말에서는 이 바벨탑 쌓는 이유가 다시는 물로써 멸망되지 않기 위해서 탑을 쌓되 탑 높이를 어디까지 높이느냐 하면은 하늘높이까지 쌓아올리는 거에요. 얼추 이 정도 해도 세상에 물차도 이정도 되지 않겠다. 세상에 불이 올 줄 아무도 몰랐어요. 한번 물로 하면 다음에도 물로 하는 줄 알았는데 이번엔 불이다. 그래서 불에 대비하면 불 아니고 다른 것도 준비해놨어요.
그러니까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은 오직 믿는 구석은 뭐냐 하면은 인간의 경험과 체험, 자신의 지식과 정보, 인공지능, 누적된 인간들의 지혜, 믿을 것은 오직 그것밖에 없어요. 공부가 제일 쉬워요. 무슨 뜻입니까? 남들이 알고 있는 지혜 습득하는 것이 나한테는 그렇게 쉬운 일이란 뜻이에요. 수학 정석 1,2 쉬워요. 정석 영어 성문영어 그게 쉽단 말이죠.
그런데 쉽다는 애한테 복음 이야기해보세요. 어렵도다. 누가 믿겠느냐. 이게 성경 그대로에요. 무슨 말인지 몰라요. 무슨 말인지. 그걸 원어, 헬라어 한다고 알아듣는게 아닙니다. 맨날 복음 이야기하고 나면 끝나고 난 뒤 하는 이야기가 그러면 목사님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왜 어떻게를 할려고 해. 왜 어떻게를. 죽은 시체가 뭘 해. 죽은 시체가.
에코 사람인데 쓰레기로 살면 되지 그걸 뭘 쓰레기가 손댄다고 이게 건전한거 되는거 아니잖아요. 시체 아닌게 아니라 이 말이죠. 역사와 전통이죠. 노아 이건 물로써 끊어버립니다. 그 다음부터 어떻게 되느냐? 역사가 물로써 작살나지요. 그러면 역사가 새롭게 시작돼요. 역사가 새롭게.
아브라함 때는 인간의 육에서 나온 자식은 내 자식이 아니다. 참 이거 쌩뚱맞는 이야기죠 아브라함 언약. 육에서 나온 자식은 내 자식 아니다. 만약 어느 집에 애가 3명 나왔다. 3명이라고 하면 또 누구라 하겠다. 4명 나왔다. 4명 나왔다. 그중에 내 자식 한명도 없어요. 그러면 왜 낳게 하느냐? 인간이 먼저 일을 저질러야 돼요.
아담이 먼저 선악과를 따먹듯이 인간이 먼저 퍼질러야 돼요. 죄가 뭔지 퍼질러야 돼요. 자식을 낳을 때 이건 수련회 때 하는건데 미리 여러분한테만 특별히 알려드리겠습니다. 자식을 낳는데서 자기의 성욕과 사랑에 넘쳐서 자식을 낳는 경우 하나 있고 기계적으로 자식을 낳는게 있어요. 미국에 미드, 미국 드라마 보면 이런 드라마 있어요.
장로교로 미국을 다스리는 가상적인 그 드라마 세계에 보면 여자는 절대로 욕정이나 성욕이 있어서 남자를 하면 안된다. 이거는 여자는 애 낳는 기계다. 그 기계가 되가지고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여자 관계할 때 되면 수술대와 마찬가지로 하얀 모포로 다 덮어놓고 남자 얼굴도 못 보게 만들고 하체만 내 놓고 일 끝내고 애 키우는 기계. 룻기에 보면 이런게 나와요. 지금은 상세하게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그때 계시가 또 따로 있기 때문에.
아브라함 언약은 뭐냐 하면은 이 세상의 인간으로 태어났느냐? 나는 사람으로 보지 않겠다 이 뜻이거든요.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연관된 자식만이 내 자식이다. 그래서 여기서 나온 원칙이 뭐냐? 잉태치 못해야 내 자식이다. 진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잉태치 못하는데 어떻게 자식이 생겨요? 잉태치 못한 자식이 내 자식이다. 그런 자식만 받아준다. 이게 아브라함 언약.
이삭 언약은 거짓말을 해야 내 자식이다. 황당. 거짓말 안해야 뭐 착하다 윤리적 도덕적으로 하나님께서 성스럽다 이렇게 하는데 거짓말하지 않는 자식은 내 자식 아니다. 그래서 야곱의 형 에서는 거짓말 안 해가지고 어디 갔습니까? 지옥 간 거에요. 거짓말 안 해서 지옥 간 거에요. 쉽게 말해서 나쁜 짓 안 해서 지옥 간 거에요. 더 심하게 이야기할까요? 나쁜 짓 할지 몰라서 지옥 간 거에요.
이 땅에 인간이 태어났다는 것은 내가 왜 죄인인가를 알기 위해서 태어나야 되는데 너무 나쁜 짓을 너무 안했어. 누가 들으면 미쳤다고 하겠다. 이게 다 미친거에요 정말. 나쁜 짓을 할 줄 몰라서 지옥 간 거에요. 지옥 가서 뭐라고 후회하겠습니까? 이렇게 나쁜 짓 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줬건만 본성 자체가 나쁜 짓 덩어리의 본성을 가지고 얼마나 내가 나를 조작했던가. 위선자가 위선을 떨었던가. 이게 바로 이삭이에요.
야곱 언약은 뭐냐 하면은 내가 바로 내가 받은 복은 곧 저주였다 이거에요. 내가 받은 복은 저주였다. 쓰레기였다. 쓰레기 끌어모아 복 받았다고 형한테 이겼다고 좋다고 하다가 복을 원하던 그 내 목숨이 지저분한 목숨인거에요. 주께서 안 받아먹는 불결한 목숨이에요. 얼마나 더러운 목숨이기에 세상에 양과 소와 가축과 자식 번성에 거기에 신경써가지고 그것을 노리면서 살아왔던 거에요. 그게 바로 야곱이였던 겁니다.
이 야곱이 죽고 이스라엘로 살아나지 않으면, 다시 말해서 내가 내 저주를 알고 죽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축복된 사람이 아니다. 이게 야곱 언약입니다. 진짜 이거는 와 왜 이런 노아나 아브라함 이삭과 야곱 이 사람을 왜 내세웠습니까?
그동안 인간들 역사 가운데서 자기를 더 잘살게 하고 자기의 마음에 좋게 좋은 이미지 천사 같은 이미지에 맞는 메시아를 그들의 역사 속에서 꾸역꾸역 고대하고 희망했던게 문제가 된 거에요. 역사가 원하는 것은 스타가 등장하는 거에요. 내가 참아내지 못한 나의 이상적인 이미지와 모델을 등장하려면 우리는 아낌없이 그분을 메시아로 삼겠습니다 하는 그런 의도가 역사 안에 살아있었어요.
왜? 그 역사의 주인공은 마귀기 때문에. 악마가 내세우는 메시아가 따로 있어요. 악마가 메시아 모르는게 아니고 악마가 메시아를 내세우는 거에요. 물론 가짜 예수, 가짜 성령, 가짜 복음이지만 그게 먼저 그 일부터 먼저 퍼질러야 돼요. 그게.
이 세상 모든 인간이 유대인들이 다른 예수 다른 메시아를 기다려줘야 진짜 예수님의 십자가 살해당할 수 있어요. 살해당해야 그 피가 우리 자신을 다시 한번 우리 자신의 본래 모습을 지적질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바로 피가 되는 겁니다. 피를 흘려줘야 이 피가 왠 피냐고 할 수 있지. 피를 안 흘리면 우리는 메시아 섬기는데 바빠가지고 이 섬기는 자체가 죄 아니겠지 이렇게 한단 말이죠.
그러나 뭔가 인간의 죄가 집대성되어 있는 어떤 증거물 피라는 증거물이 나타나줘야 그것부터 해서 거꾸로 역순해서 우리 자신을 내가 몰랐던 나를 그러니까 내가 몰랐던 나, 아까 그 현장에서 포착되지 못한 진짜 존재인 나, 죄인으로서의 나가 십자가를 통해서 알려지는 겁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역사 긴 역사 가운데서 여러 차례 언약이 와서 투입됩니다.
모세같은 모세가 보여준 그것은 뭐냐? 모세의 지팡이가 지시하고 찌르는 데마다 거기서 역사가 종말을 맞이하는 종말의 흔적을 남기는 거에요. 그게 열 가지 재앙입니다. 모세는 권총 들고 설친게 아니고 그건 보안관이고 모세는 지팡이 들고 설치는 거에요. 지팡이 가지고 슬며시 강물에 한번 담궈볼까 보니까 그 강물이 RH+A형 되버린 피가 되버린 겁니다.
지팡이 가지고 모든 것을 지팡이 가지고 해요. 홍해도 지팡이 가지고 간 거에요. 물 없다? 사방을 둘러봐도 물이 없지요. 아까 데카르트의 과학은 뭐로부터 한다 했습니까? 본다는 거에요. 망원경으로 보든지 현미경으로 보든지 뭔가 보임으로서 있음이 되는 거에요. 보임으로서.
그런데 모세가 들고 있는 지팡이는 아무리 봐도 누가 봐도 그건 뭡니까? 뭐로 보입니까? 지팡이로 보이지요? 일개 지팡이에요. 그냥 흔한 지팡이. 낡은 지팡이 쓰레기같은 지팡이에요. 쓰레기같은 지팡이에요. 그런데 그 지팡이를 던지니까 뭐가 되어버려요? 뱀이 됐다 했지요. 주께서 하시는 기능의 내용이 나온 거에요. 주님이 꾸미는 드라마의 각본이 나온 거에요.
지팡이 안에 주의 일의 각본이 거기에 꽉 응축되어 있다 이 말이죠. 지팡이 속에. 그런데 외형으로 보면 그냥 흔한 지팡이에요. 하나님께서 모세 만날 때 떨기나무 만나지요. 누가 봐도 떨기나무에요. 그냥 보통 일상의 떨기나무, 시내산에 있는 그냥 떨기나무의 한부분이에요.
그런데 불이 붙었는데 계속 타요. 119 전화해서 불꺼주세요. 꺼도 안돼. 꺼지지를 않아요. 계속 타요. 유한 속에 뭐가 있다? 유한 속에 뭐가 있겠어요? 무한이 있는 거에요. 우리는 유한 속에 유한 있다고 생각하잖아요. 유한 속에 무한이 있는 겁니다. 초라한 예수님 안에 누가 들어있어요? 하나님이 들어있는 거에요.
그리고 마태복음에서 이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누구한테 한 것이라고 했습니까? 이 작은 자에게 물 대접한 것이 누구한테 한 것이다? 주님한테 한 것이다. 여러분 그게 보입니까? 목사님 한번 보자. 예수님 계신가. 보여요? 해부 한번 해볼까요?
제가 주일날 설교하면서 그런 설교했거든요. 서양동화 이야기하면서 거위가 금계란을 낳으니까 처음에는 한 개 낳으니까 이게 처음에는 좋았는데 감질나거든요. 사람이 생각한게 금계란 낳았다는 말은 안에 금덩어리 들어있으니까 그래서 금덩어리 낳을 것이다 하고 거위 배를 째봤어요. 째보니까 그냥 보통 거위였습니다.
왜 째볼까요? 왜 거위배를 보고 싶어 합니까? 본다니까.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싶어 해요. 내가 볼 것을. 내가 예상한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거에요. 그게 과학이에요. 과학의 실험 방법이에요. 측정방법. 수천번 수만번 실험해서 알아낸 거에요. 지금도 코로나 백신한다고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경쟁적으로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시행착오. 전부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는 거죠.
내가 믿을 것은 내가 먼저 눈으로 확인하겠다 이게 인간의 역사 아닙니까. 인간의 역사. 그래서 이걸 무슨 역사? 간증의 역사. 간증의 역사. 기도하면 응답받는다 말은 좋지요. 교인들이 말합니다. 목사님 보여주세요. 내가 누구를 보고 믿을 만하면 믿고 예수님이고 하나님이고 다 믿겠습니다. 뭔가 실적과 업적이 있으면 믿겠습니다.
이렇게 하든지 아니면 스스로 기도하면서 하나님 70일째 기도하고 있습니다 금식하고 있습니다. 뭔가 보여주세요. 보여주세요. 내 기도가 응답되고 따라서 나는 신자 맞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자꾸 볼려고 하는 거에요. 볼려고 하니까 금식기도 70일이 뭐가 되어버렸어? 두자로 뭐가 되죠? 역사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역사가 계속 이어지는 거에요.
그러면 내 70일 역사로 보겠다는 이것이 시체가 되는 순간 무엇과 무엇의 난입? 무엇의 침입입니까? 십자가의 침입이 되어버리면 주께서 의도적으로 나로 하여금 70일 동안 금식기도 하게 하신 거에요. 뭐와 매치하라고? 주께서 준비해 논 십자가를 알기 위해서 이런 쓰잘데기 없는 짓을 주께서 먼저 일을 벌리신 거에요. 인간의 죄를 퍼질러놓은 거에요.
그래서 십자가 알고 난 뒤에는 내 병 낫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천하 몹쓸 죄라는 것을 알게 되요. 주님께서는 우리를 시체로 보는데 내가 싫어. 내가 시체 싫고 난 몸 건강하고 싶어. 그러니까 이게 얼마나 못되처먹은 사고방식입니까 이게. 얼마나 못된 사고방식이에요.
주께서 규정한 성도가 있는데 그건 주께서 규정한 성도는 싫어. 내가 나를 내가 성도 만들어 내고 싶어. 내가 생각하는 성도되고 싶어. 그러면 내가 생각하는 성도 안에는 뭐가 포함되어 있습니까? 내가 성도되기 위해서 이런 모진 고생했다는 그 자기의 놀라운 희생과 아픔과 찬란한 역사가 다 들어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십자가를 이야기할 때 제가 주일날 설교하면서 십자가 설명한 그 표현방법이 있어요. 뭐냐 하면은 이 영광스러운 그 다음에 뭐라고 했어요? 이 영광스러운 비극. 이게 십자가 아닙니까. 되게 영광스러운데 이 지상에서는 뭘로 보인다? 비극도 이런 비극이 없지요. 그래서 이걸 제가 세자로 뭐라고 했습니까? ‘무모함’. 무모함. 정말 이거는 무모함.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죽어있다는 것. 죽어있다는 말이 우리는 자꾸 숨 안 쉰다는 말은 내가 나를 사유했기 때문에. 내가 생각할 때 죽은 사람과 살아있는 사람과 생각해보니까 공동묘지 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수목장에 지금 재 뿌리고 있는 사람은 산 사람이고 우리가 그렇게 구분하는데 그거는 내가 살아있다는 조건하에 일방적으로 죽음과 삶을 규정한거고요.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십자가가 들어오게 되면 주님께서는 시체 재활용이에요. 죽은 자에게 나는 그리스도와 이미 함께 이미 죽었고 갈라디아서 2장 20절 죽었고 그 안에서 누가 살아있다? 내 안에 누가 산다? 그리스도가 사는 거에요.
그래서 아까 설교자가 죽으려고 하지 않으면 설교 할 수가 없다고 한게 그것 때문에 한거에요. 죽은 자이기 때문에 설교하는 자체가 죽은 자이기 때문에 나오는 설교가 돼야지 내가 살아있어서 설교한다는거 같으면 그거는 그 설교는 해도 소용이 없고 설교해도 죄만 더 지을 뿐이에요. 물론 그 죄를 짓게 하시는 이유도 있겠지만.
우리가 누가복음 2장 쭉 시므온, 안나보면서 자꾸 우리는 뭐로 보느냐 하면은 역사로 보는 경향이 우선이에요. 먼저 역사로. 아 참 시므온은 세상에 좋겠다. 아기 예수 알고 종을 편안히 놓아준다는데 나는 맨날 집에 베개만 들고 자고 있는데 편안하지 않아. 베개에 아기 예수 써서 해도 될까? 또는 어떤 사람은 남편 사별해가지고 예수님 만났다 하는데 나도 남편 사별한지 벌써 2개월 됐는데 아기 예수 소식도 없고.
여러분에게 희망줘서는 안되지만 여러분들이 바로 시므온이고 여러분들이 안나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가 주어지게 되면 일반성에서 그 다음에 뭘 끄집어낸다고 했습니까? 개인성, 개인적인 것을 끄집어내지요. 이 개인을 뭐로 봅니까? 확대하지요.
따라서 안나의 확대가 시므온의 확대가 오늘날 우리가 된 겁니다. 사실은 시므온과 안나는 기껏 아기 예수님만 만났지요. 우리는 뭐냐 하면 십자가 다 이루신 예수를 만났기 때문에 안나나 시므온보다 우리가 더 평안해야 돼요.
시체가 됐으면 이미 우리는 도달할 데 종착점에 다 왔기 때문에 편안 안 할래야 편안 안 할 수가 없어요. 오늘밤에 주무실 때 시체다. 다시 죽은 자가 다시 죽은 자의 폼새로 돌아가는 거에요. 죽자. 안 죽을 수가 있기 때문에 편안하게 이불 피고, 요 덮고 죽자. 죽은 자이기 때문에 죽는 거에요. 살아남는 것을 정상으로 보지 말고 죽는 것을 낼 아침에 깨지 않는 것을 정상으로 보자 이 말이죠.
오히려 내일 아침에 눈 뜨면 어 왠일이야? 왜 내가 눈을 떴지? 이렇게 생각하셔야 돼요. 이렇게. 여러분 좋아라고 눈뜨게 하신게 아니고 주께서 또 죄 퍼지르라고 죄를 퍼질러야 십자가 빛나니까. 또 오늘 하루 살면서 또 내 역사 주장하면서 몸에 있던 습관, 더러운 습관 쏟아내라고 하루 살게 하신 거에요.
그리고 감사한 것은 저녁때 오늘 또 시체로 죽는구나. 날마다 시체로 죽는 거에요. 주기도문에 나오지요. 주기도문에. 주기도문 혹시 여러분 외운 사람 있습니까? 혹시 외운 사람 있어요? 거기에 보면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우리에게 무슨 양식 달라고 합니까? 그냥 양식 아니고 무슨 양식입니까? 일용할 양식. 하루치의 양식. 주여 하루치의 양식을 주시옵소서. 하루치의 양식을 주시옵소서.
그러니까 낮에 뷔페가면 저녁 먹지 말란 말입니다. 괜히 살만 찌지. 하루치의 양식을 주옵소서. 주옵소서라고 되어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은 내가 지금 든든한 직장이 있기 때문에 이번 달 월급 나온다 뭐 이게 아니라 하루치의 양식을 달라는 말은 지금 내가 무슨 상태입니까? 죽어있는 상태. 양식을 달라고 할 권한이 없는 상태.
우리가 뭐했다고 죽은 자가 뭐했다고 양식 달라고 합니까? 주께서 뜻이 있다면 원하신다면 살려주실겁니다 라는 믿음. 주께서 일할 몫이 있다면. 안나로서 또는 시므온으로서 어떤 다른 후배들에게 안나나 시므온이 되려면 그러한 개인적으로 주께서 다루고 있다면 그 일이 필요하다면 주께서 양식을 주실 거에요.
그래서 그 양식을 보통 먹게 되게 되면 그것은 누구 위하여? 주를 위한 양식이지 죽은 시체 살리려고 준 양식이 아니고 나를 위한 양식이 아닙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먹는데 취미가 들어가지고 온 동네 맛집은 다 돌아다니면서 다 먹고 그걸 글로 쓴다 합시다. 그 사람의 직업이 되겠지요. 직업이 되지만 그 먹은 것은 직업이기 때문에 양식은 아니에요. 양식은 뭐냐 하면은 내가 죽어 마땅한데 주께서 살린다에 관한 그럴 때만 그게 양식으로 규정이 되는 겁니다.
조금만 더 하고 마치겠습니다. 이걸 글로 적는다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자신을 알 필요가 없다. 이게 바로 성령 받은 시므온과 안나가 가진 태도입니다. 인간은 나 자신에 대해서 알 필요 없어요. 왜냐하면 나를 안다는 것은 내가 지난 역사를 꾸역꾸역 계속해서 그걸 delete 지우지 않고 계속해서 우려먹는 식이거든요. 자기가 사골입니까? 계속 우려먹고 우려먹고.
이중에 다들 술 입도 안대잖아요. 그런데 사람이 술 취해보세요. 했던 소리 또 하고 했던 소리 또 하고 잠자는 애까지 다 깨워가지고 했던 소리 또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그걸 아침에 하면 되지 왜 자기가 와가지고 다 깨워서 그걸 하느냐 이 말이죠. 뭐냐하면 이 식구들아 내 역사 자랑에 좀 동참해줘. 호응해줘. 그 말 아닙니까?
술을 왜 먹어요? 안 죽으려고 술을 먹는 거에요. 직장 가서 상사한테 얻어터져가지고 이건 나는 산 자가 아니고 죽은 자 되거든요. 꾸지람 들으면요 갑자기 왜 사느냐 싶을 거에요. 차라리 빌딩에서 뛰어내려 죽어버리자. 죽는 대신 퇴근하고 1차 2차 술 먹는다고요. 안 죽었다 이 말이에요. 살아있네 살아있네 안합니까. 그 말이거든요. 객기를 부리고 허세를 부리고 꼬장을 부리고.
이게 뭐냐 하면은 나는 화려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는 거에요. 이게 죄가 아니고 뭐에요. 이게 죄에요. 이거는 어디 직장에서만 그렇습니까? 교회가면 안 그래요? 교회에서 장로 기도하면 기도하는거 들어보지요. 역사와 전통이 있는 우리 교회를 주께서 지켜주시옵시고 어린아이들부터 당회장까지 주께서 축복해주시고 온갖 남북통일부터 해가지고 이야기 다 하지요.
왜 그런 기도합니까? 우리 교회는 뭐가 있는 교회다? 역사가 있는 교회다. 교회란 죽은 시체의 집합체. 죽은 자에요. 주께서 십자가의 능력으로 또는 말씀으로 살려주게 되면 지금 내가 사는 것은 주의 은혜요 선물이고 뜻입니다. 그게 될 때 이미 시작한 천국생활이에요. 죽어서 천국이 아니고 지금 시작해야 돼요.
죽은 나를 늘 이렇게 십자가의 은혜로 살려내시는 주님의 활동이 살려고 하는 나의 활동보다 더 우세한 것, 더 먼저 된 것, 더 강렬한 것, 더 힘이 센 것. 나의 역사를 덮어버리고 주님의 살아계심이 내 지저분한 내 역사 자랑을 입을 틀어막을 때 우리는 예수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양식 주신 것이 나 살아있다는 것이 아니고 주님 살아있음을 나타내기 위함인 것을 이제는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