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2장 36절 (시체 재활용) 200602a-이근호 목사
강남-누가복음 2장 36절 (시체 재활용) 200602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2장 36절부터 39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주의 율법을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이르니라. 아멘.
여기 아셀 지파에 있는 안나라는 선지자 이야기가 등장하지요. 우리가 이 본문을 보면서 그 현장에 우리가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 현장에. 그 현장에 있으면 안나라는 할머니하고 같이 옆에 안나라는 할머니하고 꾸준히 같이 있었다고 봅시다.
그러면 이것은 뭐냐 하면 밋밋한 일상이 주는 답답함. 이것을 사람들은 참 견디기 어려워요. 성경을 보면 대단히 요란한데 막상 우리가 현실 속에서 살게 되면 그 요란함이 없이 밋밋한 일상의 반복일 뿐이죠. 밋밋한 일상의 반복.
그래서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그 자기 일상을 신앙적인 일상 또는 믿음의 생활이랍시고 뭘 집어넣느냐 하면 자기가 거기에다가 계율을 집어넣지요. 나는 9시에 잘 때 나는 기도한다. 기도할 때 3분 기도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그 시편에 보면 새벽을 깨운다 했으니까 교회까지는 못나가고 집에서 새벽을 깨워서 나는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이 계율이거든요. 법령이죠.
법령을 감행하게 되면 얼추 신앙생활하는 것같이 느껴져요. 물론 갑자기 바쁘면 못하지만 그때는 하루에 성경 3장 읽고 주일날은 5장 읽는다. 그러면 1년에 365일 정하면 성경 다 뗀다. 그렇게 자기한테 숙제를 주게 되게 되면 그 다른 사람과 차별화된 나만의 신앙인 것처럼 차별화되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성경에서 안나 할머니 이야기가 나오니까 우리가 이 사람이 칭찬받으니까 같이 그 현장에 내가 같이 있어서 그 안나 할머니가 하는 것을 우리가 지켜본다면 저절로 거기서 어떤 신앙적인 것이 나올 거라고 생각하지요.
옆에 그 현장에 할머니하고 같이 있어보세요. 지루하지요. 역시 밋밋해요. 답답하기 짝이 없습니다. 획기적인 것이 없어요 어떤. 패턴이 멋있어 보이는데 하게 되면 이게 패턴화되가지고 별로 새로운 것이 없어요.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훅 불면 훅 날려가요. 견딜 수가 없어요.
분명히 하나님의 성도라면 매일 일상 뭔가 획기적이고 새로운 것이 터져야 신앙생활할 맛이 나는데 전혀 변화될 조짐이 보이지않을 때 참을 수가 없는 거에요. 산다는 것이. 구역예배 가가지고 전부다 돌아가면서 자기 신앙 자랑질하는데 나는 지난 화요일날 은혜 받았어요.
나는 목요일날 하나님의 기적을 느꼈습니다 이러고 있는데 그러면 집사님 차례는? 나 그때 코로나 마스크 사러갔어요. 일상의 이야기밖에 할게 내놓을게 그거밖에 없다 이 말이죠. 그럴 때 다른 사람들이 에이~~우~~ (속으로만). 우우~~~ 뭐 믿음 좋은 줄 알았더니만 전혀 하나님께서 은혜를 안주시는 모양이군요. (속으로). 속으로 그렇게 하지요.
그러면 소위 인도하고 지도한다는 전도사님이나 부목사님께서 집사님은 더욱 기도에 열중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짜릿한 은혜를 주십니다. 남들 보세요. 짜릿하잖아요. 그래 그 사람들이 짜릿한 것은 짜릿한 것을 본인이 억지를 부려서 그걸 규정해서 그래요. 여러분들한테 짜릿한 은혜를 제가 한번 방법을 알려드려요? 아침에 QT책 나오잖아요. 매일 그거 해가지고 일기 쓰듯이 쓰면 돼요.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하니까. 얼마든지 조작하거든요.
신앙이라는 것은 다른게 아니고요 성경에서 안나가 여기에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이거 안나의 일상입니다. 성전을 떠나지 않고 84년동안 주야로 금식하는 것 그걸 루틴, 패턴 자기 패턴이에요 그냥 일상이에요. 답답한 일상이에요. 주야로 금식하는 것도 일상입니다. 본인의 일상입니다. 그러면 뭐냐?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뭐냐?
현장에 아무리 옆에 있어도 카메라 CCTV찍고 그 사람이 하는 것 그대로 24시간 다 CCTV 찍어도 찾을 수 없는 것이 포착된 거에요. 없는 것이. 현장에 부릅뜨고 눈뜨고 안나가 하는 모든 행동을 다 따라가면서 카메라를 찍어도 나올 수 없는 현장에 없는 것이 포착이 된 겁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이 안나처럼 다른 사람 다른 할머니가 똑같이 한다고 해도 안나라는 할머니하고 똑같이 해도 새로운 것이 나오고 안 나오고는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낼 수가 없습니다. 현장에 없는 것. 이 현장에 없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예상하지 못한 것. 예단하지 못한 것. 생각지도 못한 것이 포착이 되어야 돼요.
그럼 생각하지 못한 것이 포착한다는 말은 아까 율례, 규례를 집어넣는다 했지요. 여기 이렇게 나오지요. 안나가 84년 동안 주야로 금식하고 기도하고 이걸 다른 사람이 흉내낸다고 되는게 아니거든요. 기도하고 금식할 때에 누구나 기도하고 금식하면서 이렇게 기도하고 금식했기 때문에 성전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뭔가 있을 것이라고 예상을 하는 겁니다.
그 예상한 것과 전혀 상상도 못한 것이 포착이 될 때 비로소 이 안나의 이야기는 누가복음에 들어올 자격이 되는 거에요. 누가복음에 들어올 자격이 돼요. 그러니까 성경의 계시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얼추 예상, 나도 하면 되겠다는 것은 성경에는 일체 없습니다. 인간은 그냥 하란 말이야. 네가 평소에 하던대로 하라 이 말이야. 금식을 하든지 아니면 뷔페에서 음식을 더 많이 잡수시던지 맘대로 하세요.
하는데 그 하는 행위와 주께서 주는 것과 연결이 되지 않는 것이 있어줘야 이 성경에 담기게 되는 겁니다. 그래야 인간을 배제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전에 개혁주의 신학회라는 그 교수들 모아놓고 제가 논문을 발표할 시간이 있었어요. 앞자리에 오용희 목사님 앉아계시고 반응들 보고 막 화내고 있었어요.
그 논문에 머리말에 뭐라고 되어있느냐 하면 성경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쓴 책이 아니고 반대로 인간이 구원받지 못하기 위해 쓴 책입니다라고 썼어요. 머리말에. 분위기 쎄~~했어요. 벌써부터. 그들의 신학들이 모조리 다 소용없게 되어버렸어요.
어떻게 하면 성경 가지고 원어 해석하고 조직적으로 논리를 끄집어내서 사람에게 딱 갖다드리면 사람이 그걸 받아들이면 구원을 받는다 지금 그거 하겠다는 것이 소위 신학 박사들이나 목사들이 하는 일이 그 일이거든요.
성경은 사람을 구원하는 책이 아니고 구원받지 못하게 하는 책입니다. 왜그러냐 하면 이미 인간들이 자기 구원을 죽어서 천국 가겠다는 것을 인간들이 전부다 누구나 예상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기대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기대가 만약에 꺾여버리면 그 동안 그 목표, 죽어서 천국 가겠다는 그 목표가 좌절되어 버리면 그 생각만 좌절되는 것이 아니고 평생을 살아왔던 모든 인생도 허송세월한 거에요. 허송세월. 허송세월 무슨 뜻인지 아시죠? 허송세월. 헛발질했다 이 말이에요. 헛발질. 허송세월한거에요. 허송세월하게 되면 본인을 어떻게 여기겠습니까?
살아도 소용없네 이렇게 되겠지요. 살아도 소용없네를 줄여서 이야기하면 뭐가 되느냐 하면 나는 죽은 자라는 뜻이에요. 나는 죽은 자란 뜻이에요. 죽은 자가 돼야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효과를 나타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라는 것은 일단 죽어야 돼요. 살아서 깝죽대면 안돼요. 살아서 이거하고 저거하고 금식하고 성전 왔다갔다하고 이러면 안돼요. 일단 죽어야 됩니다. 물론 성전 안 한다고 해서 구원받는건 아니고.
성전에 다니고 84년 동안 주야로 금식하되 안나가 느꼈던 것은 내가 하는 행위와 그리고 내가 맞닥뜨리게 된 상황이 이게 매치가 되지 않아야 돼요. 그래야 내가 하는 모든 행위의 집대성 집어넣어도 주께서는 거절해줘야 그래야 내가 있으나마나한 죽은 자가 됩니다. 시체가 되어야 돼요. 복음을 이야기하려면 둘 다 시체가 돼야 둘 다 복음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쪽은 시체인데 한쪽이 멀쩡하게 살아있으면 복음 이야기 나오는 것이 아니고 내가 살아서 이것저것 했다. 이것저것 했다가 나와버려요. 그러면 두 사람 사이에 대화는 복음적 대화가 될 수가 없습니다. 목회자가 설교할 때는 죽으려고 해야 돼요. 이미 죽었는데 또 죽을 어떤 타이밍을 또 허락하셨다.
그래서 설교할 때 이 설교에서 내가 이미 죽은 자로서 또는 죽으려고 죽은 자인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서 죽으라는 기회를 하나님께서 허락했다고 생각하고 설교를 해버리면 설교자가 어떤 예상을 할 수가 있느냐 하면 내 설교 듣고 몇 명 은혜 받았느냐 생각이 그게 안 나올 거잖아요. 설교하고 죽었는데 그 뒤에 몇 명 은혜 받았는지 자기가 그거 알아서 뭐할건데.
이미 죽었는데. 귀, 코, 눈 전부다 막혀버렸는데 죽어버렸는데. 내 팬이 몇 명이고 그런거 생각하겠어요? 안하지요. 그런데 설교하고 난 뒤에 몇 명 은혜 받았는가 그거 계산하고 전도사 뒤에 시켜가지고 오늘 몇 명 왔는가 다 숫자 세게 하고 전도사는 또 사회성이 있어요. 200명 왔는데 또 250명 해줘야 그다음 계약 때 계약이 다시 재계약이 가능해요.
곧이곧대로 200명하면 이건 짤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거 헤아려서 뭐할건데? 죽은 자가 무슨 구경할게 있다고. 그러니까 죽는다는 말은 설교자가 억지로 죽는 것은 이건 또 연기하는 거구요. 주님에게 관심을 둬버리면 다른데 관심 둘 여력이 없어요.
주님에게 꽂혀버리면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가 어디까지 퍼졌나 그것도 신경 안 써요. 한곳에 꽂혀버리면 다른 곳은 필요치 않잖아요. 죽어도 좋다고 되는 죽어도 좋을 정도가 되는 뭔가가 있다면 나머지 것은 신경 쓸 그러한 필요치 않지요. 비교 대상이 안 되니까.
만약에 다른데 신경 쓰고 또 교회 와서 주님에게 신경 써버리면 이거는 어떻게 되어버리느냐 하면은 내가 진짜 신경 쓰고 싶은 것이 잘되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용한 셈이 되는 겁니다. 그거는 보험사기죠. 보험사기에요 그거는. 차에 부딪히지도 않았는데 부딪힌 척하는 이유가 보험금 타내려고 그렇게 하잖아요.
내가 예상하는 나의 구원이라는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서 교회 와서 은혜 같지도 않은데 주여 하고 눈물 흘리고 따라하구요 부흥회해가지고 주여 주여 해가지고 침 다 튀어가지고 바이러스 다 날리고. 왜 그렇게 모방 짓을 하고 남 흉내를 내느냐? 주님이 좋은게 아니고 자기가 원래 목적하는 바가 있어요. 목적하는 바가.
믿음으로 구원받고 살아서 기도해서 복 받고 이런 목적한 바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목적한 바가. 이것은 결국은 구원받는 것도 일단은 내가 살아있어야 된다는 전제조건하에 구원이고 복 받는 것도 복을 받을 수임자가 복을 얻을 자가 남이 아니고 나여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기 때문에 그래요. 실컷 기도했는데 옆에 사람이 복 받았다. 그거는 미치지요.
주님이여 행정착오가 있었습니다. 주님보고 따질 거에요. 십일조를 내가 냈는데 왜 십일조 내지 않는 김집사가 왜 복을 받습니까? 이거는 뭐 잠깐 서류 좀 봅시다. 뭐 행정착오 잘못된 거 아니에요? 30, 60, 100배 저 사람한테 왜 가느냐 하는 식이죠. 결국은 이거는 죽지도 않으면서 죽은 체하면서 하나님을 상대로 장난치고 있는 겁니다. 본인이 사기치는 거에요.
자, 그러면 이렇게 인간이 사기 치는 이유 그걸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지금부터 미리 말씀드리지만 어려워요. 어렵다고 벌써 수백번 해도 어렵다 해도 하나도 안 어렵더라라고 여러분 했는데 좀 어렵습니다. 생각을 ‘사유’라고 합니다. 사유의 세계와 존재의 세계가 이게 같지 않아요. 달라요. 같다고 본 사람 있었습니다.
누구냐 하면 데카르트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여러분 어디서 많이 들어본 적 있지요? 존재한다고 생각했어요. 생각과 존재를 같이 본겁니다. 왜냐하면 이 데카르트 이 사람은 뭐하는 사람이냐 하면 과학자였어요.
과학자의 특징은 눈으로 보고 있는 사람 관찰하는 사람이에요. 내가 어디 있지? 여기 있네. 이게 과학이에요. 내가 어디 있지? 여기 있네. 내가 보니까 내가 여기 있다는 거에요. 그래서 내가 보는대로 내가 여기 있다고 하는 거에요. 여기 있다고 내가 생각하는 것 그러면 나는 곧 있는 것이다 ‘존재’, 나는 여기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굉장히 일리 있어 보이지요?
이 주장을 누가 거역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제가 오늘 강의하면서 뭐라고 하던가요? 그 현장에 없는 것을 포착하라고 했지요. 그 현장에 없는 것. 이 데카르트 생각, 이 과학적 생각에 대해서 어떤 철학자가 강력하게 반대했어요. 반대한 철학자 이름이 네 자입니다. 독일 철학자인데 누구냐 하면 하이데거라는 사람이에요. 하이데거라는 사람. 이 사람이 뭘 봤느냐 하면 데카르트가 과학자를 대표한다고 보면..
별을 볼 때 망원경으로 별이 보지이죠. 달이 이동하면 혜성 이동하면 보이지요? 혜성이 언제쯤 지구와 충돌할 것인가 연구하지요? 관찰이죠? 눈으로 보고 있다 이 말이죠. 이동한다. 우주로켓을 쏴 올렸다. 뜬다. 그걸 컴퓨터로 보고 다 보는 겁니다. 가고 이 땅에서 보인단 말입니다. 여기서 그게 거짓이 아니라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는데 하이데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뭘 생각하느냐 하면 이 과학자는 이 데카르트는 뭐를 몰랐냐하면 존재자와 존재를 이게 차이난다는 것을 몰랐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에요. 제가 아까 어렵다 했지요? 존재자와 존재를 구분을 못해서 이런 주장을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이데거 이 사람의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존재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것을 인하여 우리 자신이 내가 여기 있다고 생각한다 이 말입니다. 내가 생각한다 할 때 내가 생각함으로써 여기 있다 할 때에 그건 내가 있는게 아니고 내 생각해보니까 거울로 보니까 마주 보니까 뭐가 거울 앞에 내 모습이 보이니까 저기 있다고 그거는 내 생각이 그렇게 생각, 내 생각으로 생각 속에 있는 그러한 존재라고 여겼던 겁니다. 잠시 침묵..
지금 하이데거는 말하기를 사람이 왜 죽음을 생각 못하느냐 하는 이야기죠. 나는 죽는다. 고로 나는 죽는다. 이렇게 되는거 돼요? 안 되지요? 내가 죽는다고 하게 되면 이건 죽는 겁니까? 살아있는 거죠. 왜? 죽는다는 생각을 하는 자체가 살아있다는 것.
그러면 사유와 존재가 같으면 내가 죽는다하면 내가 없어져야지요. 또 없어지게 되면 내가 죽는다는 생각도 하지 말아야 되지요. 그러니까 이게 죽음 앞에서 이게 맞지가 않는 거에요.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미운데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한다 이쁘다 이쁘다 하면 그 사람이 이뻐집니까? 안 미워져요?
말만 해가지고 다 이뻐질 거 같으면 다 이 세상에 가정법원 있을 필요 없고 법원 자체가 있을 필요가 없지요. 내 땅을 남의 땅이라고 한다. 그런 나는 너를 나는 용서한다하면 용서가 되던가요? 집사님 용서되던가요? 안 되지요? 안 되지요?
생각한다는 것은 이게 왜 그러느냐 하면 생각한다는 것이 누구를 자꾸 옹호하고 누구를 응원하기 때문에 그래요? 생각하면서 목적이 있어요. 나는 이랬으면 좋겠다 하는거 있잖아요. 나는 이런 사람이면 좋겠다라는 그 상상한 것을 자기가 독려하고 격려해요. 너무나 일방적이에요. ‘일방적’.
그리고 하이데거 이야기하기를 네가 다른 사람 있는데 네가 보태준거 있어? 없어? 없지요. 보태준 것도 없으면서 간섭한다고요. 인간이 생각하는 모든 것은 다른 사람이 있다. 내가 있다. 개가 있다 존재의 일반이 아니고 내가 여기 있다로 모든게 쏠리게 되어있어요. 내가 여기 있다. 그러니까 내가 있다는 이 존재자에요.
이 존재자라 하는 것은 나만 여기 있는 걸 존재자라 합니다. 그리고 여러 모든 다 있음을 합쳐서 존재라고 이야기해요. 그래서 하이데거가 그런 이야기해놓고 하이데거는 현상 또는 실존주의자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그 뒤에 나온 사람들이 방금 하이데거의 반박을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생각이라는 것은 어디서 가져오느냐? 그것은 사람이 언어를 생각하면서 생각이라는 것이 굳어졌다. 그런데 언어는 어디서 나왔는가? 언어는 바로 타인에서 나왔다. 남에게 나왔다. 그런데 타인, 언어, 생각 이 모두가 뭐냐 하면 현재 눈에 보이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 느껴지는 것, 귀로 들려지는 것이라고 본 거에요.
그렇다면 인간에 있어서 남들이 요구하는대로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인간은 어떠냐? 내가 생각하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 그런 충동같은 것 내가 생각 못한 욕망같은 것이 살아가면서 생각하지도 못한 욕망이 계속 나오게 되어있어요. 생각하지도 못한 욕망이.
그 전에 어떤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했는데 2살 3살 된 애가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니까 자기는 치마입는게 소원이라는 거에요. 그러면 애가 갑자기 나는 휴대폰 사주세요 그러면 이건 두 살 애가 할 이야기가 아니지요. 하지만 애가 치마 입혀주면 그걸로 끝나는게 아니에요.
세월이 지나가면 계속해서 뭐가 생겨납니까? 바로 휴대폰 갖고싶어요 이러다가 서른살 넘으면 아빠 엄마 집 사주세요 이게 막 나오지요. 아빠 엄마. 무슨 집? 아파트 사주세요. 분당에. 뭐 이런 식으로 막 나온다 이 말이죠. 4살 먹은 애가 분당에 아파트 사주세요 이런거 봤어요? 없지요? 몰라요 조숙하면 모르겠지만.
자꾸 집 사달라고 하면 네가 알아서 사라. 돈 모자라요. 돈 보태주세요. 이러고 있다 이 말이죠. 이거는 본인이 예상 못한 거에요. 자기가 예상 못한건데 어디서 왔어요? 왜 아파트라는 말을 이게 언어잖아요. 언어. 단어를 어디서 들어봤으며 아파트라는 언어와 일체되는 그 있음, 눈에 보이는 아파트는 그 아이가 누구한테 배운 거에요? 남들에게 온 거에요. 남들에게.
아파트 20층짜리 50층짜리 세워놨는데 우리 주변에 내가 아는 사람이 500명인데 어느 누구도 아파트에 들어간 사람이 한사람도 없다면 아파트 사주세요라는 말을 본인이 그런 욕망을 안 해요. 아파트 30층 50층 있는데도 왜 안 들어가느냐?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걸어서 50층까지 걸어서 올라가야 된다. 그러면 아무도 안 들어가겠지요?
관리비가 한달에 500만원입니다 하면 누가 들어가겠어요. 안 들어간다 이 말이죠. 아파트 지어놔도 안 들어가잖아요. 아파트 엘리베이터 해놨는데 정전되가지고 걸어서 올라간다. 거기에다 물건까지 있다고 해봅시다. 양쪽에 바케스에 물 들고 올라간다 해봅시다. 평양에 모란봉인가 평양에 그 거리에 아파트 지어놨는데 정전되서 엘리베이터 가동 안되면 그 아파트 누가 살겠어요? 살다가 아파트 무너지면 누가 살겠어요?
이건 뭐냐 하면은 타인의 욕망, 남들의 욕망이 우리에게 뭐로 전달됩니까? 말로 대화로 전달되는 거에요. 대화로 전달되니까 내가 생각하지 못한 여분의 생각이 계속 유입되는 거에요. 나 저 사람처럼 되고 싶어. 저 사람 되고 싶어. 저 사람 되고 싶어 그게 뭐냐 하면 하이데거에 의하면 그게 존재가 아니고 존재자가 되는 겁니다. 계속 남 따라가는 거에요. 남 따라.
교회에서 찬송 부르고 은혜로우면 그걸 눈으로 봤잖아요. 눈으로 봤으면 그 다음부터는 자기 찬송 부를 때 조용하게 안해요. 갑자기 그 사람 따라한다고요. 복면가왕이라는 그 프로그램에서 사회자 아나운서가 사회를 보는 사람이 마지막 점수 공개할 때 뭐라고 하느냐 하면 “바로~~~~” 이렇게 한다고요. 여러분 그 프로 안봤지요? 후딱 한번 보니까 그런게 있어요.
“바로~~~” 하니까 거기 참석한 사람들이 그거 다 따라해요. “바로~~~” 다 따라해. 만약에 그 사회 보는 사람이 이름 뭐지? 김성주 그 사람이 바로 안하고 그냥 바로 했으면 다 안해요. 혼자 열 내서 “바로~~~~~” 하면 다 “바로~~~” 하잖아요. 인간은 본인도 모르게 옆사람한테 행동이 전염받게 됩니다. 오염되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개인적으로 개성 있지만 그게 다수가 되게 되면 그걸 일반성이라고 하는 거에요. 개인적으로는 개성 있어도. 하나 하나 놔두면 개인적으로 다 개성 있어요. 집에 개들 보면 개들마다 개성 있지요? 하지만 우리나라 등록할 때는 개로 등록해요. 전부 똑같은 개입니다.
한국에 행정관에서 개로 등록했다면 하늘나라에서 우리 인간을 볼 때에 뭐로 보겠어요? 하나의 개성을 살려서 보겠습니까? 적을 때 뭐라고 보겠습니까? 아담에 속한 자. 끝나는 거에요. ‘아담에 속한 자’. 아담 봤습니까? 안 봤지요? 아담 안 봤지요. 눈에 띄지 않잖아요. 눈에. 아담 안 봤는데 하나님께서는 무슨 언어를 사용합니까? 너는 아담에 속했다는 언어를 사용하지요.
그러니까 성경의 언어는 우리를 구원받으라고 하는 거에요? 우리를 존재자가 구원받는 것을 밀어내고 존재가 구원받는 것을 구원받기 위해서 성경이 있는 겁니다. 이 존재자를 우리 개인으로 보고 이 존재를 유일한 존재가 누구냐하면 예수님이에요.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모든 성경은 누굴 증거한다? 예수님 증거하는 겁니다. 예수님 증거하는 거에요.
그러면 말씀이 살았다는 말은 죽은 자에게는 계시나 말씀과 매치되는게 안 나와요. 우리가 십계명을 못 지키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우리가 십계명 출제위원이 아니기 때문에. 출제위원이 아니에요. 모세가 십계명을 하나님과 머리 맞대고 이건 조항에 넣읍시다. 아 저건 빼야 되는데 안돼요. 이렇게 의논해서 십계명 만들었습니까? 일방적으로 부여받은거죠.
자기는 하나의 택배기사 하나의 전달자에요. 하늘의 뜻을 땅에 전달하는 전달자에 불과하단 말이죠. 세례 요한도 마찬가지고요. 제가 지난 낮 설교하면서 세례 요한을 ‘소리’라고 했지요. 그냥 소리라는 말은 주님 앞에서 내가 여기 있다는 내 존재를 내세울 수가 없어요. 내가 주님하고 상대해서 구원받는 그런 법은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그런 법을 준 적이 없어요.
예수님은 하나의 대상이 되고 나는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그런 이야기는 없어요. 성경에 용납을 할 수가 없어요. 주님의 존재되심, 주님의 존재되심에서 분출된 그 계시에 의해서 흡수, 통합될 때에 구원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우리가 시체 되어야 돼요. 시체 되게 되면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능력이 뭡니까? 죽은데서 살리는 능력이죠. 성령께서 그렇게 하셨잖아요. 예수님께 성령이 임하니까 죽은 예수도 성령에 의해서 죽은데서 살아났지요. 로마서 8장 9절에서 11절.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에게 임하면” 너희에게 임하면 그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죽은 너희 몸도 살리죠.
그럼 우리는 어떤 상태가 돼요? 죽은 몸이 되어야 돼요. 죽은 자가 되어야 돼요. 죽은 자가 될 때만 복음이 나오게 되어있어요. 죽은 자가 될 때만. 목회자가 설교한다는 것은 이미 죽은 자에요. 죽은 자를 설교해야 된다는 그러한 타이밍 때문에 주께서 성령을 통해서 설교라는 일을 맡겨주게 되면 그 목사는 그 설교를 통해서 내가 살았다가 아니라 설교를 통해서 주님이 살아 여기 계십니다를 증거하고 설교 끝나고 난 뒤에 꼴까닥 죽으면 되지요.
설교하고 꼴까닥 개거품 물고 죽었는데 목사님 상담 좀 합시다 하면 깨서 다시 부스럭 부스럭 일어나가지고 합시다 하고 또 일어나고. 이게 살아있는 눈에 보이는 그 현장 이거는 내 생각에서 나온 겁니다. 내 생각에서. 눈에 보이는대로 내가 여기 있다고 하는 거에요.
그러나 그 나는 나의 전부가 아니에요. 내 전부가 아니다 이 말이죠. 내가 여기 눈에 보이면 거기에다가 무엇을 채우느냐하면 남들은 어떻게 살았지? 남들이 살아가는 모든 재료를 가지고 나에게 전부다 퍼부어버려요. 혹시나 될까싶어서. 혹시나 그렇게 될까싶어서. 다 퍼부어버린다고요.
자, 지금까지 여러분 어려운거 해서 잘 모르겠지요? 그럼 새로 다시. 두 종류가 있다고 했습니다. 생각에서 나오는 나. 생각에서 나오는 나와 그 다음에 무슨 나라고 했던가요? 존재에서 나. 생각에서 나온 나는 이거는 눈에 보이는 타자 또는 타인.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나왔던 그것이 언어를 통해서 나한테 다 모아지는 거에요.
그러면 나를 쪼개면 전부다 누구 생각이 들어있어요? 어릴 때부터 부모 생각부터 누구 생각? 남들의 생각입니다. 남들의 생각이 내 안에 그대로 다 들어있어요. 그런데 이것은 생각에서 나온거죠. 생각에서. 그러면 내가 태어나서 생각하기 이전에 생각하기 이전에 알 수 없는 누구의 생각에 의해서 지금의 내가 된다면 나는 어디로 가야되느냐 하면은 결국은 그 물음표. 누구에게로 소환되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겁니다.
자, 여기에 하나님이 주신 언어가 있지요. 그 언어를 가지고 말씀 또는 계시라고 합니다. 계시. 자, 이 계시하고 흔히 눈에 보이는 이 문자로 된 원어 히브리어 헬라어 막 우기면서 어떤 사람은 막 공부하는데 오늘 아침 뉴스 보니까 어느 기독교 집회에 신부도 참석했데요. 신부가 왜 참석하지? 나중에 알고 보니까 원어 연구하는 곳. 원어 연구해가지고 코로나 15명 걸리고.
세상에서의 원어 연구 헬라어 히브리어 연구해서 성경 문자 공부합시다. 해서 뭐하는데요? 문자 공부하는 것은 이게 목적이 뭐에요? 내가 생각해놓은 내가 이상적인 내가 목표하는 이상적인 바른 목회자 상 되겠지요. 주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닮은 하나님의 성도. 하여튼 뭐 어떤 것을 상상해도 내가 생각하는 상상으로 향하여 전부다 다시 여기에다가 쏠리는 거에요.
그럼 이것은 성경 보면서 이미 예상이 돼요? 안돼요? 예상이 되겠지요? 성경에 나오는 오늘 본문에 안나 나오지요? 나도 안나처럼 되었으면 좋겠다. 안나처럼 됐으면 좋겠다. 뭐 이런다고요. 왜? 안나가 성경에 나오니까. 그리고 지난 시간에는 누구였습니까? 안나 말고 시므온. 아 성경에 시므온처럼 됐으면 좋겠다. 시므온처럼 됐으면 좋겠다.
그러면 그전에는 누가 나옵니까? 마리아. 마리아처럼 되겠다. 마리아처럼 되겠다. 마리아처럼 임신 한번 해볼래요? 예? 그것도 결혼 안한 사람이 한번 배불러봐야 정신차리겠습니까? 그다음에 아 나도 세례 요한, 세례 요한 아버지는 완전히 말도 못했는데요. 벙어리 되었는데요.
사람들이 성경을 보면서 의도가 있어요. 뭐냐 하면 내가 목표로 한 나답기 위해서 이 성경이라는 이 문자가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성경 문자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러나 이쪽에 내려오게 되면 나는 뭐가 된다고 했습니까? 나는 뭐가 되는 조건하에 구원돼요? 나는 뭐가 됩니까? 내가 시체가 되겠지요.
아담에 속한 모든 자는 존재가 아니고 존재자에요. 자기밖에 몰라요. 자기밖에 모르는 존재자가 여기서 말씀 위에서 뭐가 됩니까? 시체가 되지요. 에스겔 37장에 보면 인자가 인자라고 불리는 에스겔이 하나님이 데리고 성신에 의해서 데리고 어디로 가지요? 어떤 골짜기에 가지요.
아골 골짜기에 가니까 그 골짜기가 뭐만 소복이 있습니까? 해골만 소복이 있어요. 6.25 전쟁이 일어났나? 해골만 소복이 있는 거에요. 해골만 소복이 있는 거기 가서 그 하나님이 에스겔에서 묻습니다. 에스겔아 이 자들이 살겠느냐? 이렇게 이야기했다고요. 이 자들이 살겠느냐?
그 해골 그 구석진 곳에 우리가 거기에 해골로서 거기에 같이 이렇게 뒤엉켜있다고 섞여있다고 비좁은데 같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럼 이미 우리는 죽은 자에요. 죽은 자는 내가 어떻게 됐다는 뭘 못하느냐 하면은 사유, 생각을 못해요. 나는 이런 인간이 되어야지. 이런 남자가 이런 여자가 되어야지 이런 가정을 꾸려야지.
이런 행복을 꿈꿔야지 나는 이렇게 해서 우리 애가 공부 잘하고 뭐 어떻게 잘되고 나라의 일꾼이 되고 교회의 일꾼이 되는 그런 자식을 낳아야지. 교육시켜야지. 그런 생각 자체 없다니까. 그런 생각 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제가 어제 주일날 낮 설교하면서 끝부분에 이런 이야기했지요.
주의 말씀은 탄력성 공처럼 공을 한번 튕겨놓고 내 키를 훌쩍 넘어가버려요. 눈치코치도 없어. 훅 넘어가가지고 나는 주의 말씀이 나 유리하라고 나 이익 달라고 오늘도 눈 이렇게 뜨고 있는데 그 공이 무슨 공인지 테니스공인지 튕겼다가 키를 훌쩍 넘어가요. 나는 너하고 안 논다는 식으로. 그럼 목도 같이 돌아가야 돼요.
저게 어디로 가는거야? 가보니까 나의 날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날로 간다고 했잖아요. 그리스도의 날로 가버려요. 성경 말씀은 나를 위한 말씀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로 가게 하는 거에요. 튕겨 올라갑니다. 그러니 결국은 성경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주의 일에 누가 방해자다? 바로 내가 방해자 되기 위해서 내가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노래는 불러줬지만 사실은 뭐냐? 주의 일의 방해자로 태어난 거에요.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부질없는 인간, 아무 헛짓하는 인간, 뭘 해도 아무 소용없는 인간으로 만들어서 우리의 기대나 목적 자체를 완전히 작살내버리죠.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시체와 다를 바 없는 인간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내 행함이 주의 일과 연결이 않도록. 그래서 이런 이야기가 결론 내리면 성경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밀어내는 구원받지 말라고 밀어내는 책이 바로 성경책입니다.
성경을 네가 상고해봐라. 거기서 네가 영생을 얻는다는 그 대목이 디모데후서 3장인가? 3장 16절인가 나오지요(15절)? 거기에 나오는 이야기가 성령에 의해서 되는 거에요. 성령에 의해서. 왜냐? 성경은 성령이 되는 거에요. 그러면 성령은 어디서 어떤 경우에만 나오느냐 하면 내가 죽었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만 성령이 비로소 성령 활동이 느껴지는 겁니다. 내가 죽어 있을 때.
죽어 있을 때는 못 느끼고 죽었는데 성령이 와서 그만 자고 일어나라 툭 두드리죠. 에베소서 5장에 잠자는 자여. 뭐 이렇게 할 수도 있고 잠자는 자여 이렇게 할 수도 있고요. 잠자는 자여 깨어서 일어나라. 그걸 죽은 자가 그 말씀을 자기가 실행에 옮길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옮기잖아요. 나중에 깨어나 보니까 깨어나서 사후 일이 처리되고 보니까 내가 죽은 시체라는 것을 아는 거에요.
다시 에스겔 이야기해서 에스겔 골짜기에 보면 뼈다귀가 있는 거에요. 이 데카르트 과학적 이론에 의하면 과학적 사고방식에서는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의 창조, 모든 생물의 창조 이 모든 창조에 대해서는 처음에는 이 지구상에 뭔가 축축한게 있었다고 본거에요.
축축한게 있어가지고 그 축축한 것에서 자동복제가 되는 DNA의 원시적 원래 DNA가 하나 나와서 DNA가 DNA를 복제해가지고 그래서 오늘날 이렇게 우리 인간이 되고 해파리가 되고 지렁이가 되고 코끼리가 되었다 이렇게 주장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이 스스로 자기 자신의 그 존재자의 가치와 이상을 그걸 그 포부를 갖고있으니까 과학을 해도 항상 누구 위주에요? 누구 좋아라고 누구 긍정하라고 과학을 하는 거에요? 인간 좋아라고 과학을 하는 거에요. 어떤 분이 저한테 글을 보내 왔어요. 목사님 이 글이 맞습니까하고 보내왔는데 그 사람이 뭐냐 하면 신학교 교수가 쓴 글인데 자기한테 보내줬다는 거에요.
신학교 교수가 무슨 글을 보여줬느냐 하면은 코로나 문제가 신종 코로나 문제가 그 사람 신학교 교수에요. 소위 스스로 신자라고 자부하겠지요. 그 사람이 하는 말이 하나님께서 지켜줘가지고 쉽게 말해서 이 악마 같은 코로나에서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고 믿습니다라고 이런 식으로 쓴 거에요. 그래서 그 글을 받은 집사님이 아무리 봐도 수상하거든요. 뭐라고 반박해야 되느냐. 뭐라고 대꾸해야 되느냐.
저한테 물어가지고 제가 답변을 해줬어요. 인간이 쓰레기인 것을 알리기 위해서 일부러 하나님께서 코로나를 보냈다는 것. 인간이 죽은 존재라는 것. 살 가치가 없다는 것으로 보냈다는 것으로 왜 이 세상을 볼 줄 모르느냐? 왜 인간 위주냐 말이죠. 신학을 했다면서도 계속 인간위주에요. 그러니까 코로나가 뭐냐? 악마같은 존재가 되어버리죠.
그러면 코로나 누가 만들었습니까? 코로나 누가 만들었지요? 하나님이 만들었지요. 주님이 만들었잖아요. 주님의 십자가에 근거해서 만들었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이 결국은 또 인간에서 핍박을 또 받네. 신자라는 입을 통해서 또 예수님께서 또 핍박을 미움을 받아요. 잘해보자는데 왜 코로나 보내십니까? 이러고 있단 말이죠.
참 인간 위주로 생각하는게 참 이게 뭐냐? 자신이 시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살아있는 인간을 더 멋있게 자기의 소원대로 살고 하다보니까 계속해서 이천년 신학이 교회 설교가 다 전부다 그런 식이에요. 여러분 좋게 해줄테니까 그냥 돈이나 교회에 내세요. 지금 이런 식이에요. 예수가 하나의 상품화되고 말았어요. 좋은 예수가, 사랑의 하나님이.
남양주에 가면 허경영이란 사람이 있거든요. 그 사람이 강연을 하는데 강연할 때 입장료가 10만원이에요. 10만원 주고 강연 들으러 오는데 아마 제주도에서도 오고 비행기타고 오고 그렇게 다 온답니다. 끝나고 난 뒤에 그 사람하는 게 기를 부어가지고 병 치료하는 그걸 해요.
끝나고 나서 상담을 하는데 질문자가 이렇게 질문합니다. 저 허경영 총재님 지금 우리 아버지가 요양병원에 계시는데 질문자체가 이래요. 보통 우리 질문은 뭐냐? 우리 아버지가 언제쯤 퇴원하겠습니까? 이게 보통 하는 질문인데 그 사람은 이렇게 해요. 언제쯤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시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돌아가시겠습니까?
하니까 허경영 답변하기를 지금 당신이 하는 일이 안 되는 이유가 아버지가 지금 막고 있어서 그렇다. 아버지가. 이렇게 하면 아버지 빨리 돌아가신다. 그렇게 상담을 해주는 겁니다. 왜냐하면 허경영 입장에서는 그 아버지 본적도 없고 자기한테 온 고객 아닙니까. 고객은 돈 빼내면 되는 거지요. 뭐 다른 목적이 아니라 돈만 빼면 되는 거에요.
교회가 돈을 빼내면 되는 거에요. 목사님 어떻게 기도하면 우리 애가 공부를 잘하겠습니까? 기도 빡시게 하세요. 마치 동네 내과 병원에서 환자 오게 되면 처방전 써주는 거에요. 이 약 하시고 앞에 가서 약 받아가시고 식후 30분 후에 하루 3번 일주일 잡수시면 됩니다. 처방전을 원하는 거에요.
인간들이 처방전을 왜 원합니까? 누구 좋아라고 원합니까? 예수님 좋으라고 원합니까? 내게 이익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거에요. 내게 이익이 없으면. 그러니까 성경을 보면서 이거는 성경을 보는 그 자체가 죄가 되버린 거에요. 주님이 하시는 일을 진짜 마귀 종이 되가지고 막는데 일조를 하고 있어. 일조만 하면 말을 안해. 이조 삼조. 계속해서 하는 거에요.
왜냐? 주님 이용해서 나 살기 힘든 이 세상을 더 한번 멋있게 씩씩하게 한번 살아보자는 겁니다. 성경은 그렇게 하지 않고 십자가의 복음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우리가 일단은 무슨 자다? 일단은 죽은 자가 되어야 돼요. 죽은 자가 된다는 말은 내가 어떤 짓거리 선교, 전도, 헌금, 예배 참석, 무슨 찬양 뭘 해도 이게 아무 하나님의 일이 되지 않는 그런 상태로 네가 놓여 있음을 알려 주는게 성경이에요. 놓여 있음을.
제가 이렇게 하면 어떤 분은 이렇게 해요. 그러면 아무것도 안하고 놀까요? 놀아도 안돼. 놀아도 안돼요. 가만히 노끈가지고 묶고 가만히 있어도 안돼요. 왜? 생각하니까. 심지어 노끈 묶었으니까 천당 가겠지. 이런 희한한 생각을 한다니까요. 아무것도 안했으니까 복 받겠지 이런 생각한다고요. 자기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때는 어떻게 하느냐? 주님께서 하시는 것이 이거에요. 일반성, 일반성에서 따로 하나를 뚝 하나를 뽑아내요. 그 뽑아낸 것이 오늘 본문에 여기에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36절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있지요? “선지자”.
일반성을 다 묶어놓고 선지자도 일반성에 포함됩니다. 그렇고 그런 사람이에요. 백날 패턴대로 금식하고 철야하고 성전에서 머물고 철야해봐야 그거는 남들이 얼마든지 흉내낼 수 있고 남 따라하는 것 누구나 다 할 수 있어요. ‘일반성’.
할 수 있는데 선지자라는 것은 주님의 일반성의 반대말, 보편성의 반대말은 특수성이고 일반성의 반대말은 다양성이라 했지요. 주께서는 이걸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보는데 주님께서 이걸 보편적으로 봐버리면 선지자는 특수성이에요. 특수성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께서 십자가의 능력, 성령의 능력이죠.
성령의 능력으로 이 안나를 뭐로 보느냐? 이 안나를 죽은 자로 봐요. 죽은 자로 봐놓고 안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안나의 일이 아니고 이거는 예상 못한 살아계신 주님께서 안나로 하여금 선지자 되게 하시는 작업을 주께서 친히 하시는 겁니다. 이게 선지자의 기능입니다. 그 선지자의 기능의 근거는 뭐냐? 하나님의 약속에서 계약에서 언약에서 나오는 거에요.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