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05a 울산강의-레위기 26장 : 미완료
20200605a 울산강의-레위기 26장 : 미완료
(강의:이근호 목사)
레위기 26장 시작하겠습니다. 율법을 위반했을 때 벌칙이 레위기 26장의 내용입니다. 창세기 4장에 가인과 아벨 이야기가 나왔을 때 현대적 인식으론 상당히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 나오는데 창세기 4장 10절에 보면, 보통 살인사건이 일어났을 때에 목격자 없으면 완전범죄 되어 그냥 넘어가게 돼있는데 가인이 아벨을 죽일 때는 10절에 보면,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땅에서 호소를 하는 거예요. 누구한테? 하나님에게 여기에 사건이 터졌다. 무슨 사건? 형이 동생을 죽인 사건. 이렇게 되는 거죠. 그러면 형이 동생을 죽였을 때 이미 죽은 아벨은 죽었으니까 피해자가 될 수 없고, 누가 피해자냐? 가해자는 나와 있지요. 가인이 가해자인데 가인이 죽였을 때 죽은 당사자 외에는 피해자가 없을 줄 알고 있는데 땅이 하나님께 호소한다는 말은, 이 땅에서 일어나지 않아야 될 살인사건이 일어났다고 땅이 하늘에 호소해요. 하나님에게 호소한다고요.
이것은 무엇을 이야기하느냐 하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인간이 책임져야 한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러면 이 땅은 어떤 땅이냐? 선악과 따먹고 하나님께 범죄 하고 난 뒤에 땅은 어떤 땅이냐? 복수가 일어나야 될 땅, 또는 복수가 감행되어야 될 공간, 이게 땅이에요. 누가 누구한테 복수하나?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범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복수가 감행되는 땅이 진짜 땅이 있는 이유가 되겠습니다. 땅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저 인간 대 인간의 문제가 아니란 말이죠. 하나님이 거기에 땅에 개입하고 있다는 겁니다.
인간들은 땅이 왜 있는지 생각 안 하고 자기 생각만 하고 있어요. 땅이 만들어졌어요, 인간이 먼저 만들어졌습니까? 땅이 먼저 만들어졌지요. 인간은 자기가 없다는 이유 때문에 마치 그 땅을 자기의 소유라고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그걸 좀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있다. 내가 있다는 말을 이런 뜻으로 생각해요. 내 땅이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내 땅이 있다, 에요.
그러면 여러분은 머리 좋으니까 그 다음 제가 문제 낼 수 있잖아요. 네가 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문제 너무 쉽다, 이거. 내가 있다는 것은 내 땅이 있다는 뜻이고, 네가 있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네 땅이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있는 곳에 네가 오게 되면 뭔 뜻이냐 하면, 내 땅에 네가 왜 여기 침범하느냐? 이렇게 되는 거예요.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에요. 여기 내 땅이야. 내 땅에 네가 왜 들어와? 이렇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 잘 아는 사도행전 9장 5절에, 사울이란 사람이 기세등등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잡아 죽이려고 다메섹으로 내려가는 도중에 그때 나귀 타고 가는데 예수님이 등장했지요. 사울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주여 누구십니까, 물은 거예요. 사울은 지금 사람 대 사람으로 상대하는 거예요. 그리고 땅의 주인이 누군지는 계산에 안 넣고 있습니다.
그냥 눈에 보이는 사람으로 상대해서 내 구역과 네 구역만 생각해서 내 구역에서 예수 안 믿는 구역인데 네가 왜 예수 믿어? 그래서 나는 땅의 권세자, 그러니까 그 당시 유대교 지도자의 권한을 입고 이 땅에는 예수 믿는 사람을 살려주지 않는 땅으로 간주해서 기세등등하게 예수 믿는 사람을 체포해서 죽이기로 한 거예요.
그러면 이 땅은 누구냐 하면, 사울을 비롯해서 그 당시 지도자들이 내 땅이라고 내 권세가 있고 내 권력이 작용하는 땅이라 생각하겠지요. 거기에 누가 불쑥 튀어 들어왔습니까? 예수님이 들어오신 거예요. 그러자 주여 누구십니까, 라고 묻는 겁니다. 누구세요란 말은, 오늘 강의를 누구세요로 시작하겠는데요.
누구세요, 라고 묻는 것은 기존에 무엇을 염두에 두느냐 하면, 이곳은 내 땅이고 이곳은 내 집이고 이곳은 내 공간이다. 이걸 먼저 염두에 둔 질문이겠지요. 그렇지요. 내 공간이고 내 영역이다. 그러면 인간이 산다는 것은 우리가 아는 상식으론 내 몸이 사는 게 산다가 아니라 여기서 오늘 레위기 26장을 하는데 레위기 26장에서 그 범위를 넓히는 거예요.
내 몸이 심장이 뛰는 걸 산다고 하는 게 아니고 내가 그냥 살 때 어떤 땅을 점유하고 사는 거예요. 내가 땅을 점유하면서 그 땅은 누구 땅이다? 이건 내 땅이라고 하는 거예요. 점유하고 있는 내 땅이라고 보는 겁니다. 내 땅에는 내 허락 없이는 못 들어오는 거예요. 그래서 이 말씀은 참 흔히 말하는 유행가 가사라고 하지만 이 가사가 정말 중요한 가사에요. 얼마나 중요한지 그냥 웃으며 넘어갈 게 아닙니다. 적어볼게요.
“네가 왜 거기서 나와.” 다시 말해서 너는 내 땅을 공유해야 될 사람이 엉뚱한 곳에서 내가 예상 못한 거기서 나오느냐는 겁니다. 교회 간다면서 절에서, 교회 간다면서 나이트클럽에서 왜 나오느냐는 그런 내용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다시 할게요. 내가 여기 산다는 것은, ‘내 몸+땅’이 구비될 때 산다고 할 수 있어요. 나는 내 땅이 없고 내 집이 없고 내 공간이 없으면 이건 사는 게 아니에요. 반드시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내가 점유한 땅과 집과 공간이 구비돼있다는 걸 전제로 하는 겁니다.
오늘 레위기 26장은 땅 이야기라고 제가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레위기 26장에서 하나님 말씀은 이 땅은 네 땅이 아니고 누구 땅이란 말입니까? 이게 하나님 땅이란 거예요. 여기서부터 사단 난 거죠. 내가 아파트 사고 부동산을 구입하고 토지를 구입할 때 내 돈 주고 내가 구입했다. 그래서 전에는 남의 땅이지만 내 돈으로 구입했기 때문에 이제는 내가 지배하고 있는 내 공간이다. 그래서 산다는 것은, 이 정도 구역 안에 내 것이라는 조건 하에 살고 있다. 이렇게 본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창세기 4장에서 이 땅을 누구 땅이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 땅으로 보는 겁니다. 내 땅이면 내 집에서 어떤 짓을 해도 상관없지요. 마치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처럼. 어떤 짓을 해도 내 땅에서 내 마음대로 하는데 네가 왜가 돼요. 그런데 내 땅이라 여기고 무슨 짓을 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처벌을 할까요, 처벌을 안 할까요? 처벌을 하는 겁니다. 내 땅에서 왜 그런 짓을 하는데? 그게 어떻게 네 땅이야. 하나님 내 땅이지.
땅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보복, 복수가 감행되는 공간, 이게 땅이에요. 레위기 26장에서 그게 땅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 대해서 어떤 복수를 감행하는 거예요. 복수를 한다는 것은 누가 피해를 입었다는 뜻이거든요. 피해 없으면 복수할 이유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 땅인데 인간들이 자기 땅이라 할 때 하나님께선 그 인간들을 밀어낼 수밖에 없어요. 그 밀어내는 방법이 복수해서 죽이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복수한다는데 상당히 생뚱맞은 이야기인데 도대체 무슨 근거에 의해서 이유가 뭔데, 왜 복수하시는데? 우리가 궁금할 수밖에 없지요. 출애굽기 4장 20절에 보면, 이스라엘은 내 아들이라고 돼있어요. 그러면 이 원칙에 의하면 그냥 아들만 있겠어요, 땅도 있겠습니까? 땅도 있겠지요.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끄집어낼 때 이스라엘은 내 아들이다. 그 다음에 추가될 하나님의 작업은 뭐냐 하면, 내 아들에게 적합한 땅 줄게. 이건 당연히 따라오는 겁니다. 그러면 레위기 26장에서 여기 있는 땅은 누굴 위한 땅이다? 애굽에서 빼내준 자기 아들의 땅이에요. 그런데 만약에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이 아들답지 못하다면 그 땅에서 살겠습니까, 못 살겠습니까? 당연히 못 살지요. 당연히 못 사는 거예요,
골로새서 1장에서 천국이 뭐라고 묘사돼 있느냐 하면, 아들이 나라라고 돼있어요. 골로새서 1장 13절에,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아들의 나라로 갔단 말이죠. 그럼 아들의 나라로 갈 사람은 천국이란 공간, 새 하늘과 새 땅에 가려면 아들의 나라기 때문에 아들다워야 되겠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시는 일은 뭐냐 하면, 아들 아닌 자를 아들 만드는 작업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 아들 만드는 작업의 기준은 뭐냐 하면, 아버지가 인간이 사는 이 땅을 향하여 보복하고 복수할 때 그 취지에 동의가 되는 사람, 그래야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죠. 로마서 8장에 보면 성령을 받았을 때에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지요.
말로만 아버지라고 부르짖을 게 아니고 아버지가 하실 일에 동조하고 공감을 나타내야지요. 그 취지에 대해서 고개 끄덕일 줄 알아야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려면 우리 마음에 아들의 마음, 예수의 마음의 들어와야 돼요. 그래야 아버지가 하시는 일에 대해 공감을 할 수 있어요. 만약에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틀어졌다. 그러면 아들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지요. 아버지께서 만든 나라에 들어가려면 아들다워야 되지 아들이 돼서 아버지에 반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지 않습니까.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가 누구 때문에 퍼졌는가? 왜 퍼졌는가? 그건 성경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신종코로나가 퍼져야 될 이유가 있어요. 땅은 저주받아야 돼요. 왜냐하면 이 땅은 하나님이 복수하는 땅이에요. 마귀가 지배하기 때문에 세상 신이 지배하고 거기에 인간들이 전부 다 한 통속이 돼있기 때문에 이 땅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과 복수가 가득 차야 될 땅이란 말이죠.
하나님이 자기 복수를 감행하겠다는 말은 결국 뭐냐 하면, 이 땅의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가시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땅이 먼저 있고 인간은 나중이니까 이 땅이 악마의 지배로 말미암아 저주받아야 되고 심판될 땅입니다. 따라서 이 땅에서 출생한 모든 인간은 이 땅의 성질과 더불어서 같이 죽음으로 몰아가셔야 되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뜻인 겁니다. 이게 아버지의 취지거든요. 하나님은 다 계획이 있어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 동조를 해줘야 돼요.
아주 쉽게 말해서 우리가 아버지의 뜻을 안다면 이 땅에서 살고자 해야 되겠어요, 안 그러면 죽고자 해야 됩니까? 죽고자 하면 돼요. 지난 수요일에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성도의 사명이라 하는 것은, 이 땅에서 사라지는 거예요. 사명 감당하기 참 쉽지요. 그냥 아파서 늙어 죽어서 사라지면 그 하나하나가 다 사명이에요. 할 수 없이 죽는 게 아니고 원대하고 엄숙한 진지한 사명 받들어서 죽자, 이 말입니다.
옳은 일을 하면서 죽으란 말이 아니고 죽음 자체를 귀하게 여겨서 받아들이자, 이 말입니다. 마스크 할 문제가 아니고 부지런히 죽이는 그 하나님의 고상하고 엄중하고 고귀한 그 뜻을 길이 받들자, 이 말입니다. 오늘도 죽여주시니 감사합니다, 하고 찬미하고 찬양 드리자, 이 말입니다. 왜? 보이지 않는 주님이 일을 하시는데 그걸 우리가 어디서 찾겠어요?
아침에 눈 뜨면 여기에 기미 끼고 주름살 늘어날 때 이게 주의 일 아닙니까. 뭐 이제 화장해도 잘 먹히지도 않고 화장발 떨어지고, 뭘 먹어도 밥맛도 없고 잠도 안 오고 이러다 시들시들 죽는 것 아닌가? 그걸 섭섭해 여기지 말고, “참 부지런하다, 주님. 새벽부터 일어나 날 죽이시네. 아이고, 참. 주님의 현존을 이렇게 느낄 줄 상상도 못했네.” 하고 그 취지에 대해서 공감을 나타내야 돼요. 그래야 하루를 살더라도 감사히 살지요. 하루를 살더라도 고맙게 살아야 되지 않습니까.
주께서 복수하시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아들은 어디 있느냐? 진짜 약속의 땅에 사는 아들은 어디 있느냐, 하면 죽음 뒤에 와요. 죽음 다음에 아들의 모습이 나타난다 이 말이죠.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한테 매일같이 무슨 일을 시키느냐 하면, 어린양을 잡도록 했어요. 아침에 한 마리, 저녁에 한 마리, 안식일엔 성대하게 잡고. 계속 엔진에 휘발유를 넣는 게 아니고 엔진에다 어린양의 피를 집어넣어서 엔진이 계속 가동되게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아들은 그냥 태어났다고 아들 되는 게 아니고, “죽었는데 어, 사네? 하나님의 복수가 감행되는 저주가 있고 심판이 있는 이 땅에서 멀쩡하게 살아남았네? 웬일이지? 어린양의 피가 그들을 계속해서 용서해줬구나.” 그런 아버지의 취지를 간파할 때 그걸 알게 될 때 그걸 아들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아들.
살아 있는 몸뚱이 더 살겠다고 싸대는 게 아들이 아니고 죽음에 넘기기 때문에 목숨 넘기고 생명 얻고. 세상에 이런 수지맞는 장사가 어디 있어요. 목숨 넘기고 생명 얻는데 이 목숨은 아무리 용을 쓰고 돈을 벌어가면서 살려고 애를 써도 아픈 몸을 어떻게 말릴 수가 있어야지. 늙어가는 목소리를 무슨 수로 바뀔 수 있습니까? 인간 말고 세상 모든 만물은 하나님에 의해 쇠퇴함과 무너짐에 고분하게 순종하는데 인간만큼은 악마와 한 짝이 되어 죽기 싫다고. 죽으라고 죽이는데 죽기 싫다고 닦달 부리는 거예요.
만약에 우리가 이스라엘과 내통하는 하나님의 취지나 약속을 모르게 되면 우리는 이 땅에 왜 사는가? 이 땅에서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 살아요. 만약에 어떤 사람이 술집을 운영한다 합시다. 당신은 술집을 왜 운영합니까? 돈 벌기 위해서 합니다. 그러면 손님들은 당신에게 뭘 가져갑니까, 물으면 그들은 내가 제공하는 술을 통해서 즐거움을 가져갑니다. 이게 얼마나 정확한 표현이에요.
골프장 왜 개설했습니까? 골프 치는 사람에게 뭘 제공한다? 즐거움을 제공하는 거예요. 강남 대치동에 영어 학원을 왜 문 엽니까? 영어를 배우게 되면 돈을 더 벌 수 있고, 돈을 벌게 되면 나한테 즐거운 거리를 돈으로 살 수 있는 여력을 내가 확보한 게 돼요. 우리가 이 땅에서 왜 삽니까, 물으면 즐거움을 위해서 사는 겁니다.
즐거움을 위해서 사는데 그 즐거움을 유지하려면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는 거예요. 그리고 나이 들면 그 즐거움도 그만 시시해져요. 어떤 분들이 저한테 그런 이야기해요. “목사님, 재미있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드라마도 재미없고 골프 쳐도 재미없고 남 재미있다 하는 해외여행을 가 봐도 갈 때부터 싸우기 시작해서 올 때까지 피곤해서 뻗어서 드러누워 있고. 비행기 타는 것도 짜증나고. 모든 게 집 떠난 순간부터 고생이잖아요.
도대체 즐거움아, 너 어디 있는 거야? 거기에 대해서 구약 전도서에 보면 나와 있어요. 솔로몬 왕이 세상에 즐겁다는 즐거움은 다 해 봤어요. 특히 남자들의 즐거움의 끝은 어디냐? 솔로몬은 천 명의 여자를 거느려 봤습니다. 솔로몬에게 즐겁디? 아니. 천 명의 여자와 많은 지식을 얻었고 정원을……
요새 전원주택, 자연인 해서 도시는 스트레스 받아 지긋지긋하다 촌에 가련다. 촌에 가서 양지 바른 곳에 강냉이 심고했는데 심어봤자 그놈에 잡초를 왜 그렇게 나오고 모기파리는 왜 그렇게 많은지. 촌에 가는 것도 사십 대, 오십 대 이야기지 육십 넘어서 촌에 가야. 매사가 놔주려하니까 보기에 엉망진창이고 손댈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죠. 즐겁기 위해서 시작한 일이 짜증 지대로가 돼요.
또 어떤 부부는 아기 낳는 것이 즐겁거든요. 내가 알기론 우리나라에서 열세 명이 신기록인데 열세 명까지 낳았어요. 아기 낳는 게 재미있으니까. 아기 낳으면 힘드니까 하나둘 낳고 그 다음에 뭘 하느냐? 고양이, 개, 도롱뇽, 무슨 새, 희귀한 아프리카의 짐승들, 브라질의 식인물고기까지 계속 키운다고요. 어떤 치매 걸린 할머니는 아파트 안에 개 다섯 마리가 똥오줌 싸고 해서 민원 들어오고.
누가 말립니까? 계속 허탈한 거예요. 땅은 있고 내가 있고 뭐가 빠졌느냐 하면, 즐거움이 빠진 거예요. 그 즐거움을 성경에선 허무라고 이야기해요. 그게 고통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고통당하고 허무하게 죽어가면서도 이방인, 지옥 간 사람은 뭘 모르느냐? 왜 내가 즐거움을 얻어도 오래 안 가고 왜 내가 죽어야 되는지를 도대체 그 내력과 이유를 몰라요.
계속 즐거움을 추구하려면 돈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돈 벌어서 이번 주말엔 어디 가서 놀아야지. 계속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 돈은 버는데 이 즐거움이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나이 들면 놀지도 못해. 돈이 있어도 놀고 싶어도 재미 하나도 없어요. 밥도 혼자 먹으면 하나도 맛없어요. 같이 먹어야 되는데 같이 있는 인간이 나를 괴롭히네?
그럼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어쩌란 말이야. 뭔가 이상해. 그러니까 이 땅이 나를 위한 땅이 아니고 이 집은 나를 안락케 하는 집이 아니고 공간이 나를 위한 공간이 아니라 집과 공간, 땅이 뒤에 하나님께서 칼을 숨기고 있어. 심판의 칼, 저주의 칼을 숨기고 있는 겁니다. 이게 레위기 26장이에요.
레위기 26장은 뭐냐 하면, 땅은 하나님이 복수하는 건데 다른 민족은 모르지만 이스라엘 너만큼은 알아야 돼. 왜 네가 꼭 죽어야 되고 땅에서 고생 고생해야 되는지를 고생하더라도 이유나 알고 죽더라도 죽는 이유를 알게 되면 너는 내 백성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죽는 이유, 왜 죽는가? 그건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제사를 드리게 만듭니다.
제사를 드리게 해서 너희들의 그렇게 기피하고 멀리하는 죽음의 자리가 도리어 너희들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는 힘이 나오는 그 죽음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죽음에 두 종류가 있어요. 하나는 꼴까닥 죽는 죽음이 있는 반면에 또 하나 죽음은 분명히 죽어야 되는데 죽어 있는 자를 생명 있는 자로 바뀔 수 있는 효력이 나오는 죽음, 효과가 나오는 그 죽음을 하나님께서 레위기 26장을 통해서 계속해서 암시하고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레위기 26장에 나오는 이 땅, 레위기 26장이 굉장히 깁니다. 이게 46절까지 있지요. 레위기 26장에서 땅은, 너희들이 만약에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이 죽이는 취지를 알 것이다. 따라서 나중에 너희들이 이 땅에서 참 백성이 되려면 하나님이 알고 있는 원리를 같이 공감할 수 있는 마음을 이 땅으로부터 부여받게 되는 예언적인 기능이 이 땅에서 시작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목숨을 생명으로 교체시켜주는가? 26장 1절에 보면,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지니” 여기에 바로 지금까지 설명한 너희, 누가 너희냐? 당연해보이지만 당연한 게 아니에요. 질문이 하나 나와야 되겠지요. 누가 너희냐? 답변은 제가 하겠습니다. 율법의 수용자가 너희가 돼요. 율법을 부여받은 자가 너희가 되는 겁니다. 율법을 지키는 자가 너희가 아니고 율법을 부여받은 자가 너희가 돼요.
선생님께서 중간고사 친다고 시험지 나눠줄 때 그런데 “너희들 누구지?” 너희들 누구냐고 묻는 거예요. “쌤이요, 우리 이 학교 학생 아닙니까.” “그렇지, 맞아.” 그러니까 이 학교의 학생이라는 것, 그러한 관계(관계성)기 때문에 시험지를 나눠주는 거예요. 그러면 백 점도 나오고 빵점도 나오고 20점도 나오겠지요.
하나님께서 아무나 율법을 주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조건 하에 율법을 줘요. 그러면 시험지를 나눠주고 30점을 맞던, 율법을 10% 지키던, 20% 지키던 관계없이 율법의 수혜자, 율법을 받은 자기 때문에 너희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겁니다. 백점 맞아도 아들이 되는 게 아니고 그냥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거예요. 그걸 언약백성이라고 하는 겁니다. 율법이 모세언약이거든요. 모세로부터 주어진 언약을 받는 자들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겁니다.
제가 아까 말씀드렸죠. 출애굽기 4장에서 이스라엘은 내 아들이다. 그러니까 너희라는 것이, 지금까지 했으니까 머리 좋은 사람은 제 질문에 답변할 수 있을 거예요. 주관식이 아니고 객관식으로 하겠습니다. 너희가 뭐냐? ①내 몸이 주께서 말하는 너희다. ②너희라는 것은 없다. 없는데 하나님께서 애굽에 있던 자기 백성을 끄집어내는 사건이 첨부되어 있는 사람, 사건이 덮여져있는 사람이 너희다. 몇 번이겠어요? 2번이죠.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 된다는 것은, 저 아들 될게요, 라고 손들고 자진해서 나온다고 아들 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어떤 작업에 엮여 들어가야 돼요. 애굽에서 나오는 그 사건에 휘말려 들어가야 돼요. 제가 이렇게 강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할게요.
내가 여기 있는데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구원받음이 너희가 아니라 천국 가고 말고는 내 소관도 아닌데 어떤 사건이 와서 그 사건이 나를 덮쳤어요. 나는 이 땅에서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 돈 벌고 거기에 치중했는데 하나님께서는 난입, 내 인생에 쳐들어와서 하나님의 법, 율법, 성경말씀, 복음을 드러내는데 완전히 비빔밥 되게 하는 휘말리게 해서 우리를 집어넣어서 반죽을 만드는 거예요.
어렵게 생각할 것 없고요. 모세가 시내 산에서 돌 판 받았잖아요. 그러면 모세가 돌 판 들고 있으면 돼요. 하나님과 둘이 있으면 되는데 하나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돌 판 들고 내려가게 만들었어요. 여기서부터 밀가루반죽이 시작되는 겁니다. 아래로 내려가니까 거기에 깨끗한 인간들이 있었어요, 뭔가 수상한 인간들이 있었습니까? 40일 만에 내려가니까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어요.
애굽에 있는 황소를 섬긴 겁니다. 금송아지를 섬기고 있었던 거예요. 우상인데 그들은 애굽에서 끄집어낸 여호와라고 섬긴 거예요. 좀 인자하게 생기면 신이라고 알고 있는데 신은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모양새, 형상으로 나타나는 게 아니에요. 관계로 나타나요. 십계명이라는 모세 율법이라는 관계, 그걸 포괄적으로 말해서 언약이라는 관계입니다.
노아언약, 아브라함언약, 이삭언약, 야곱언약, 언약이란 말이 어려우면 하나님이 주신 일방적인 계약에 의해서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드러내거든요. 그래서 하나님을 계약의 하나님이라 하는데, 계약의 하나님이란 뭔 뜻이냐 하면, 일체 인간들 쪽에서 멋있어 보이고 그럴싸해 보이는 모든 신은 신이라 할 수 없다고 거부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의 신앙생활하면서 하나님을 어떻게 내가 감지하고 하나님의 현존을 어떻게 느낄 것이냐, 할 때 하나의 방법은 뭐냐 하면, 내 쪽에서 이해가 되는 것들은 전부 다 치워보는 겁니다. 여기 책상에 매직이 두 개 있거든요. 분명히 두 개인데 하나님께선 세 개 있다고 하는 거예요. 내가 보기엔 두 갠데 세 개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 좋습니다. 두 개인지, 세 개인지 누가 맞는지 해봅시다. 하나요, 하고 매직 하나 치웠어요. 두 개요, 하고 매직 하나 치웠어요. 우리는 없잖아요, 할 때 주님께선 거기에 없는 그것이, 바로 없음이란 그것이 하나님의 계약이라는 겁니다. 너무 어렵게 해서 죄송합니다.
사람이 뭐가 있어버리면 없는 제3의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에만 줄곧 내 것으로 삼으려고 해요. 집에 통장, 부동산, 자식, 남편, 아내, 교회 있음, 전부 다 있다는 것은 나를 살리는데 필요한 것이 있다고 보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돼버리면 하나님이 주신 것이 가려져버려요. 하나 치우고 둘 치우고 그러면 여기에 뭐가 있느냐 하면, 갑자기 매직 보다가 책상이 보이는 겁니다.
인간 같으면 부도나서 집 날리고 직장 날리고 자식 죽고 가족들 다 떨어졌을 때 내 몸도 아파서 암 4기니 해서 죽을 때 결국 있는 게 뭡니까? 그때야 뭐가 보여요? 새소리가 들리고 별이 보이고 달이 보이고 땅이 보이고 니들이 왜 거기서 나오지, 니들이 왜 거기 있지? 바로 우리가 그동안 있다고 한 것은 내 것과 관련된 것만 있다고 평생토록 거기다 미친 사람처럼 거기에 완전히 매료된 거예요. 우리가 빠져버린 거예요. 내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집착을 하게 된 겁니다. 그 집착이 우리를 정신병 환자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주님께선 말씀하시기를 세상에 달과 해를 보라. 거기에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있다, 할 때 정말 달과 해를 보세요. 거기에 인자하심이 느껴집니까? 안 느껴져요. 어떻게 됩니까? 인자하심이 달에 있고 별에 있다 할 때에 눈 벌겋게 떠서 달을 보라고요. 인자하심이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보인다 하면 진짜 거짓말쟁이지요. 그게 안 보여요. 솔직합시다. 윽박지른다고 보인다 하면 안 됩니다.
뭐가 보이느냐 하면, 인자하심이 있다고 했는데 그 말씀이 별과 달과 연계해서 비로소 떠오르게 돼있지요. 내가 보기엔 달과 별에는 인자가 없는데 주님이 있다고 한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내가 달을 볼 때 그냥 본 게 아니고 내 신세와 연관 지어서 달 보고 해 보기 때문에 그래요. 내 신체를 연관 지어서.
애는 다 컸는데 직장에 잘렸다. 하도 신세가 서글퍼서 거제도 바닷가에 몽돌인지 해수욕장에 갔다고 칩시다. 어떤 생각 들겠어요? 한 열 발자국만 들어가면 죽을 수가 있는데 하나, 둘, 나 죽으면 다 편하겠지. 골치 아픈 빚이 20억 되는데 내가 있으면 아내도 나 때문에 고생하고 자식도 내가 있으면 빚 갚는다고 내가 너의 걸림돌이고 나 때문에 너희 인생 가로막았구나. 내가 비켜줄게. 쓸데없는 물건 치워줄게. 바닷물 속에 들어갈 수밖에 없지요. 거제도라 차비가 많이 들면 한강에 마포, 여기도 가까운데 간절곶 있잖아요. 부산 같으면 오륙도 보이는 태종대. 태종대 자리 좋데. 뛰기에 좋아요.
그런데 똑같은 몽돌 바닷가인데 어제 사법고시 합격통지서 받았어. 그때 바닷가에 서 보세요. 기다려라. 그렇지, 하면 된다니까, 내가. 나, 이런 인간이었어. 어머님, 고생 끝, 행복 시작이에요. 요샌 연수원 없지만 옛날 같으면 연수원에 가서 돈 있는 좋은 재벌 집 딸 해서 벌써 장인 덕으로 집 사드리고 변호사로서 성공하겠습니다. 그때 그 파도가 얼마나 인자한지 몰라. 파도치는 소리가 너무 아름다워. 내가 이 맛에 산다, 파도야. 물방울들아, 이 맛에 산다.
바닷물 H₂O는 뭐야 저 인간은? 저 인간은 죽으려고 달려들고, 저 인간은 왜 저래? 모든 것은 이 지구 이 땅이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그렇게 착각을 일으키는 정신병 환자에요. 그래서 교회 가도 마찬가지지요. 누가 너희냐? 자, 여기 너희가 누굽니까? 너희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율법이 뭔지 알리기 위해서 도구 택한 민족이 바로 너희에요. 택했단 말이죠.
구원은 생각하지 마세요. 이들을 택했을 때 그들의 역할은 뭐냐? 율법이 과연 율법 안에 뭐가 들어있느냐? 그것 이방세계에 보여주고 자기 이스라엘에 보여주기 위해서 어떤 역할을 맡은 거예요. 사명 하면 거창하니까 쉽게 해서 역할을 맡은 거예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는 말씀처럼 어떤 역할을 맡은 거예요.
너희들 보기에 내가 있어 보이나? 내가 있는 게 아니고 주님께서 일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는 겁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자진해서 하라 하면 할 사람 아무도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나밖에 모르기 때문에 맨날 내 땅이다. 내 땅 넓히세, 이것 밖에 모르기 때문에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해서 도와주느냐? 26장 3절 봅시다. “너희가 나와 규례와 계명을 준행하면” 자, 율법이 투입됩니다. 관계성이니까요. “내가 너희 비를 그 시후에 주리니 땅은 그 산물을 내고 밭의 수목은 열매를 맺을지라”라고 돼있지요. 어떤 조건입니까? 네가 열심히 호미 들고 싸대면 복 주는 게 아니고 열매 맺는 게 아니고 그전에 뭐예요? “규례와 계명을 준행하면” 했잖아요. 문제는 규례와 계명이 안 보인다는 뜻이에요. 안 보이는 게 문제에요. 보이질 않아요.
네가 해를 보아라.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함께 있다 할 때 해는 보이는데 뭐가 안 보인다 했지요? 인자하심이 안 보이는 거예요. 그러면 인자하심이 안 보이면, 해와 하나님의 관계 자체를 보려면 저 달과 해와 별을 내 이익을 위해서 생각했던 그러한 나라는 존재를 끊어버려야 돼요.
그것은 뭐냐? 내가 죽어간다는 것을 인정하고 죽는 것을 기쁜 사명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해와 달에 있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눈에 들어오는 겁니다. 내가 멀쩡하게 살아 내 이익만 챙긴다면 해와 달 그런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아요. 바쁜데 언제 별 볼 일이 어디 있습니까. 진짜 별 볼 일 없지요.
그런데 만약에 여기에 레위기 26장 14절 봅시다. “그러나 너희가 내게 청종치 아니하여 이 모든 명령을 준행치 아니하며” 그 다음에 어떻게 되는가? 여기 16절에 재앙을 내리는데 어떤 재앙이냐 하면, “놀라운 재앙을 내려 폐병과 열병으로 눈이 어둡고 생명이 쇠약하게 할 것이요 너희의 파종은 헛되리니 너희의 대적이 그것을 먹을 것임이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체적으로 이익인지 손해인지 그런 것을 아예 생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율례가 도대체 뭐기에 율례를 어겼을 때 바로 이런 혹된 고초를 겪게 되고 율법이 뭐기에 율법을 준행하게 되면 이런 복을 받느냐, 그 두 가지 양상만 보여주는 되는 겁니다. 우리의 역할은, 울산에 사는 여러분의 역할은 그거에요.
그게 무슨 역할이냐 하면, 바로 중간자 역할이에요. 중간자란 서로 대립되는, 모순되고 대립되는 두 개의 가치 사이에서 둘 다 알고 있는 틈새의 유일한 중간자로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기 아들이라고 그렇게 간주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점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진짜 하나님의 아들은 누구십니까? 마태복음 3장에서 요단강 세례 받을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했지요. 예수님 오셨지요.
예수님 오셔서 폼 잡고 자기 능력만 행하다가 하늘로 훌쩍 가버렸습니까? 예수님의 마지막 마무리 작업이 뭐였습니까? 병 고침이 아니고 십자가 죽음이죠. 버림받음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을 뭘 아느냐 하면, 아버지께 버림받음이 뭔지 아버지께 인정받음이 뭔지를 중간자 입장에서 둘 다를 보여주신 거예요. 십자가를 통해서 죄의 결과는 이렇다, 이렇게 버림받는 것이라고 보여주고, 미움 받는 거죠. 그게 버림받는 거니까.
또 하나는 뭐냐?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아버지께 사랑을 입은 자는 이런 혜택을 입는다, 목숨 대신 생명, 목숨은 없어져도 생명은 얻는다. 이 둘 다를 보여주는 거예요. 예수님이 중간에서 다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 작업을 이미 구약 때 레위기 26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작업을 부여했다는 사실을 우리가 생각해야 돼요.
다른 민족은 제쳐두고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의 집단적 아들이라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율법과 만나게 해서 율법을 위반했을 때 얼마나 너희들이 예상 밖의 혹독한 시련을 당하는지 보게 하시는 겁니다. 또 율법을 준행했을 때 얼마나 너희들은 아무 대가도 없이 공짜로 얻을 수 있는가를 이스라엘을 중간자 입장으로 내세워서 양쪽 차이점을 다 보여주는 겁니다. 옳다와 아니다의 그 중간 값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면 중간 값을 유지하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걸 봐야 돼요. 이건 내용상 빨간 걸로 써야 돼요. 피 값. 피 값을 늘 주목해야 됩니다. 피 값이란 추하고 불결하고 정화되지 못하고 더럽고 율법을 통해서 계속해서 그 조항을 늘여나가요. 시체를 만진 자는 더럽고, 시체를 만진 자가 만진 그릇도 더럽고, 제사장은 이런 사람과 혼인해선 안 되고, 문둥병은 더럽고, 또 여자나 남자나 그 몸에서 나오는 배설물들은 전부 다 더럽고.
인간 안에 하나님 보시기에 꼴 보기 싫은 게 있는데 피부조직이 그걸 가로막고 있거든요. 그런데 구멍이란 구멍을 통해서 바깥으로 나오면 그것은 네가 근원적으로 더러운데 내가 봐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라고 해서 하나님께서 더러운 것이 나오도록 만들어놓고 그 다음에 거기에 대해서 그것과 상응하는 율법을 자꾸 만들어요.
여자가 해산했을 때 아들을 낳았을 때는 33일, 딸을 낳았을 때는 66일, 그렇게 엄마 몸에서 아기가 나오는 경도가 더럽다는 거예요. 레위기 12장에 나오는 이야기네요. 딸을 낳으면 아들을 낳을 때보다 곱빼기로 더러워요. 그러면 남자 쪽에서 기 산다고 하지 마세요. 더러움이 어두움이 깊으면 깊을수록 그만큼 그쪽이 하나님의 죄 사함을 더 또렷하게 보여주는 역할로 보시면 돼요. 대충이 아니라 정말 주님 아니면 이 목숨은 기한이 다 있거든요. 나중에 한도가 있어요. 밧데리에 줄 세 개, 둘 하다가 아슬아슬하잖아요.
이처럼 하나님이 하시는 그 연결점, 또는 관계성은 잘난 사람한테는 그게 잘 안 보여요. 이 땅에 수난 받고 억압당하고 고난당하고 상대적으로 핍박당하는 그런 대상 쪽에 예수님이 그쪽 편에 서있어요. 세리와 창기 그쪽 편에 서있다고요. 그래야 그들은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에 본인의 역할이 주님을 또렷하게 드러낼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