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200522a 마가복음15장 6-15절(반성적 행위)-이 근호 목사
광주강의20200522a 마가복음15장 6-15절(반성적 행위)-이 근호 목사
마가복음 15장 6절입니다.
6절, 명절을 당하면 백성의 구하는 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전례가 있더니
7절, 민란을 꾸미고 이 민란에 살인하고 포박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
8절, 무리가 나아가서 전례대로 하여 주기를 구한대
9절, 빌라도가 대답하여 가로되 너희는 내가 유대 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10절, 이는 저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러라
11절,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니
거기까지 봅시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해서, 살인사건이죠. 살인사건이 있어서 죽은 자는 있는데 죽인 자가 없어요. 이상한 살인사건이에요. 죽은 분은 있거든요. 예수님이. 그런데 죽인 자가 없어요. 죽인 자를 측정할 수가 없습니다. 유대인 600만 명이 죽었는데, 유대인 600만 명을 죽인 사람이 없어요. 아이히만(유대인 대학살 전범), 본인은 내가 안 죽였다는 거예요. 자기는 가스냄새도 못 맡으니까. 가스실 근처도 안 갔다는 거죠. 자기는 앉아서 결재했기 때문에. 측정할 수가 없어요.
그럴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연루’되었다. 연루됐다고 이렇게 할 수밖에 없어요. 분위기상, 우~~ 하는 식으로 그냥 한 사람을 죽였다, 라고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살인사건이나 모든 일이 그런 식으로 돌아가거든요. 그래서 성경에서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죽인 자를 이렇게 딱 한 사람으로 특정할 수 없게 했어요. 왜 그러냐 하면은 죄가 예수님을 죽게 하기 때문에. 죄! 인간이 아니고. 죄가 예수님을 죽여야 했다. 달리 말해서 예수님은 죄가 죄 되게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자진해서 죽음을 유발했다. 스스로 자기 죽음을 유발하신 거예요.
그러면 죽인 것이 죄가 된다면, 죽임을 유발한 것은 뭐가 되느냐 하면은 의가 돼버려요. 의가 되고, 이게 생명이 돼버립니다. 죽음을 유발한 것 또는 죄를 유발한 것은 의가 되는 거예요. 의의 역할은 죄를 유발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게 되면 이 세상에서 실증에 대해서, 실상에 대해서 필히 무엇이 개입되느냐 하면은 죽음이 개입돼야 돼요. 죽음이 개입되게 되면, 죽음이 개입됐다는 것을 쉽게 말하면 우물에다가, 이런 우물이 있는데 두 사람을 깊은 우물에 집어넣었다고 합시다. 집어넣었을 때, 둘 다 우물바닥에 떨어지면 죽게 되죠. 죽게 되는데, 떨어진 지점이 A지점이 있고 B지점을 따로 구분이 되게 하시는 거예요.
죽음에 들어가지 아니하면 내가 A지점에 떨어질지 B지점에 떨어질지 알 수가 없는 거예요. 이런 예가 바로 다니엘 때에 있었죠. 바사나라 다리오 왕 때 다니엘을 사자 굴에 집어넣습니다. 사자굴이니까 그게 죽음의 굴이죠. 죽음의 굴에 떨어졌는데 다니엘은 멀쩡하게 살았잖아요. 그리고 그 지점에 다니엘을 모함했던 자들을 집어넣으니까 사자들이 얼마나 배가 고팠던지 흔적도 없이 뼈까지 다 발라먹었잖아요. 다니엘의 세 친구도 마찬가지고.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 하면은 사람의 그 진위, 사람의 그 본질은 뭘 해봐야 안다 이 말입니까? 일단은 죽음을 경유케 해서 A지점인지 B지점인지, 같은 죽음이라도 질이 다른 두 영역으로 구분되게 하나님께서는 조치를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었다고 하지만 사실은 모든 인간이 다 죽은 거예요. 예수님만 죽는 것이 아니고 모든 인간은 다 죽는데, 차이점은 예수님이 죽어서 떨어진 곳은 천국이 되고 부활이 되지만, 예수님 외에 모든 인간이 죽는 그것은 바로 죄가 되고 지옥이 되는 거예요. 죄가 되고 저주의 자리가 되는 겁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을 이렇게, 처음에 말씀드린 연루라는 이 말이 맞죠? 살인사건에 모든 인간을 여기다 연루를 시킵니다. 주의 방법은. 살인사건, 십자가사건에 연루를 시키기 위해서 십자가사건을 가지고 점점 더 확대하고 전 영역에, 전 인류사에다가 확대를 시키는 거죠. 사람들에게, 교회 다니는 사람들한테 예수님이 죽었다고 하니까, 모든 사람들의 느낌은 “나 안 죽였어. 내가 안 죽였어.” 이러죠. “내가 안 죽였어요. 나는 그냥 숨어만 있었지, 나는 안 죽였어요. 나는 착실하게 그냥 농사만 지었지, 예수님 죽인 사건에 가담 안 했습니다.” 이래 돼버려요.
그러니까 이 마가복음 15장에 그 당시의 빌라도 나오고 유대인 대제사장 나오고 그 다음에 바라바 나오고 예수님 죽이라고 한 그 민중들 나오고 하는데, 이 사람들하고 자기하고는 별개의 속성과 성질을 갖고 있다고 그렇게 오해들을 하는 거예요. 교회 나왔다. 예수님 십자가이야기 들었다. 처음 교회에 나온 사람이 하는 말이, ‘아이고, 다행이다. 나는 다행이다. 가담을 안 해서 다행이다.’ 이런 생각이 들면 십자가의 의미를 전혀 모르는 거예요. 십자가의 의미를.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이 살인사건을 모든 인류에게 다 연루시키는 방식이 십자가다, 라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연루시키는 방법이 뭐냐, 미리 말씀드릴게요. 논리를 말하면 어렵고 복잡하니까. 살인사건, 십자가사건에 연루되는 방법은, 뭐로 하느냐 하면은 말씀으로 연루를 시킵니다. 말씀으로. 말씀으로 연루를 시키죠. 그런데 사람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아이고, 예수님 참 안 됐어. 그 당시 사람들이 참 못됐어. 그 착한 예수를 왜 죽였어?”라고, 이 말을 한다는 말은 나는 빼 달라, 나는 그 살인사건에 연루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세계 전체가, 어려운 단어를 써서 미안합니다. 인류전체가 단일신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모르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단일신체.
이왕 어려운 거, 뭐 어렵게 나가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산과 들을 보죠. 여러분들이 산과 들을 볼 때에 일방적으로 본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 산과 들이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없죠. 거의 없을 거예요. 더 깊이 있게 생각해보면 내가 산과 들을 본다는 것은, 산과 들이 저기 있음을 나의 신체가 느끼는 세계관에 편입시키는 계기가 돼요. 산과 들을. “가만히 있어봐라. 저 산은 내가 어디서 많이 본 산이야. 맞아! 맞아! 작년에 어디에 가서 저 비슷한 산을 봤어.” 봤다면, 작년에 경상도 어디에 가서 봤다는 그 산을 보면, 산은 그대로 있고 내 몸에, 사실은 보는 순간 내 현실관에 내가 봤던 경상도 그 산은 이미 포함이 되어 있어요. 세상이 나의 세계, 나의 현실이 되는 거예요. 나의 현실이.
만약에 여러분들이 고향이 있다가 서울로 취직이 되었다. 그런데 명절이 돼서 고향집에 왔는데 고향집은 여전히 그대로 있고, 그리고 자기 방 여전히 그대로 있고, 자기가 학교 다닐 때 썼던 책상, 고물라디오까지, 베개까지 그대로 있다면, 그 방에서 한 이틀 밤이나 한 일주일을 자게 된다면, 그동안 잊어버렸던 과거의 일상이 새록새록 생각이 날 겁니다. 왜? 자기가 어릴 때 봤던 그 배치들이 그대로 있으니까요. 거기다가 만약에 금상첨화처럼 친구를 만났다. 그러면 친구 만났으면 무슨 이야기를 하겠어요? 옛날이야기를 하겠죠.
그러면 그 세팅이 다 되는 거예요. 그리고 고향에 와서 그동안 못 봤던 외삼촌을 보게 되면, 외삼촌을 보는 순간 자기의 현실과 인생관은 과거와 단절되지 않고 연속되고 유지되고 있음을 다시 아는 겁니다. “아이고, 야야! 너 많이 컸다.”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그래요. 외삼촌 저 기억나요. 외삼촌이 저한테 용돈 오 만원 준 거 기억나요. 서울서 성공하라고 준 거 기억나요.” 이렇게 하면서, 어느새 과거와 지금의 현재사이가 전부 다, 현재상태가 하나의 영역을, 공간을 형성하는 겁니다. 하나의 지각적 공간을 형성하게 되는 겁니다. 하나의 상상의 공간을 형성하는 거예요.
공간을 형성하게 되면, 그 공간 전부가 뭐냐 하면은 이게 자기세계에요. 자기세계. 신체는 아니지만, 자기 신체성이 적용되는 공간이 되는 겁니다. 내가 외삼촌을 봤지만, 그럼 나만 일방적으로 봅니까? 외삼촌은? 외삼촌도 또 나를 본 거예요. “아이고, 서울에서 온 조카를 만났는데...” 하고서 자기 집에 가서 또 내 이야기를 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 세상 모든 것이 같은 아담의 몸을 지녔기 때문에 서로 통하는 게 있어요. 서로 통하는 것. 이게 만남인데요. 만나는 순간, 만났던 그 모든 기억들이 취소가 안 돼요. 만났으면 그건 또 하나의 내 신체성 확장, 내 영역의 확장, 여기에 다 해당이 되고 하나의 거기에 자료가 되는 겁니다.
이게 여러분들은 듣기는 참 쉽지만 이야기하기는 참 어려워요. 왜냐 하면은, 내 손을 볼 때 우리는 내 손이라고 보잖아요. 내 손을 보는데 똑같은 비슷한 손이 있다면 이것이 내 손인지 아닌지를 우리가 어떻게 알죠? 참 이런 게 어려운 거예요. 뒷짐 지고 이래 있는데, 보니까 내 손하고 똑같은 손이 있다면 이게 내 손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아느냐 이 말이죠. 이 근처에 있으면 이게 내 손일 것이라는 생각을 확장하는데, 이게 확장이라고 하는데, 나의 신체성의 확장. 그리고 학생들이 바지를 입다가 치마를 입고 앉아있는데 어떤 어른이 지나가다가 밟고 지나가면 마치 뭘 밟은 것 같으냐 하면은 내 몸의 일부를 밟는 것처럼 느껴지는 겁니다.
왜냐, 치마를 입은 그 면적자체가 내 신체성의 확장이에요. 내 몸의 연장이에요. 내 몸의 연장. 그것은 내가 눈에 보이는 것을 어디에 이용하느냐 하면은, 내 눈에 보이는 모든 족족 나라는 것을 확장시키는 용도로 전부 다 이걸 집결시키고 모아놓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아는 친척을 친구가 욕하면 내가 화가 나는 이유는 내가 그 친척을 알기 때문에 또 내 몸이 확장되는 거예요. 인간들은 이 사실을 평소에 무심코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서로 통하는 사이 같으면 같은 신체라고 하죠. 같은 신체. 같은 영역, 공간. 신체 공간. 인류전체가 단일신체라고 할 수가 있어요. 인류전체가.
그래서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다. “나는 구경도 못했어요.”라고 하면 안 된다 이 말이죠. 아담이. 그리고 예수님 십자가, “나는 십자가에 안 죽였어요.”라고 할 수가 없어요. 십자가에 죽인 그 사람의 심정과, 계속 그 현장에 있다면 같은 심정이고 같이 대대로 통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바라바이야기 나오고, 죽여야 될 바라바를 죽이지 않고 예수님을 죽임에 넘기는 사건은 결국은 모든 인간은 다 한통속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거예요. 말씀으로 연루된 게 아니고, 인간이 살아있는 그 신체가 개인적 신체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님을 하나님께서 증명해주시는 겁니다.
누굴 통해서? 예수님 한분을 통해서 충분히 증명이 되는 거예요. 이 예수에 대해서, 이 인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라는 이 질문을 통해서 결국 너희들은, 너희들 따로 논다는 사실. 그것도 한통속이 되어서 따로 논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증명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근데 예수님 놓고, 다른 사람 놓고 “너희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이래 묻는 것이 아니고,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죽게 만들어요. 죽게 만들면 질문이 이렇게 바뀝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너희들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새로운 질문지가 만들어지는 거예요. 새로운 질문지가.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를 죽이시거든요. 하나님은 죽은 아들만 만나요. 아들이 안 죽으면 안 만납니다. 만약에 이런 경우는 없지만, 예수님께서 “아이고, 죽을 뻔했는데 왔습니다. 아버지!” 그러면 문 닫아놓고 “나는 그런 아들 둔 적 없다.” 그렇게 될 거예요. 예수님은 죽으셔야 아들다워요. 죽으셔야 아들답다고요. 왜냐하면 죽음을 통해서 예수님이라는 그 신체와 그 외의 모든 신체가 서로 대표신체로서 대비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그렇다면 모든 인간은 서로가 서로 통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어떤 개인적인, 자립적인 어떤 신체를, 유기체를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 결국 생각이 같은 생각이기 때문에 같은 신체라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 살인사건을 통해서 새롭게 살인사건에 연루되게 하시기 위해서 하신 것이 뭐냐 하면은 하나님께서는 신체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하시는 겁니다. 십자가에 대한 계시, 십자가에 대한 적용, 이걸 통해서 하시는 거예요.
십자가를 적용한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죽음을 적용하는 거예요. 죽음을 적용.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가 아니라, 예수님은 인자다, 인자라는 내용 속에 죽음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제자들은 아직 모르니까, 살아있는 인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신 게 아니고 이 죽음에 대해서, 십자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렇게 묻죠. 십자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제가 1년만인가, 반대 글을 접했습니다. ‘주의 이름’이라는 설교 유튜브에 댓글이 달렸는데, 하비루 라는 사람이 단 댓글인데, “교회오빠라는 영화의 평을 쓴 걸 보고 참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했다.”라고, 이런 식으로 시작해서 “어떻게 사람을 죄인이라고 구분할 수가 있느냐, 죄냐, 의냐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데, 당신이 뭔데 저 사람은 죄다, 아니다, 이건 선이다, 라고 이렇게 할 수가 있느냐. 하나님과 예수님에게만 영광 돌리기 위해서는 어느 누구도 그 사람은 죄인이다, 아니다, 라는 판정을 내리지 말라.”라는 식으로 글을 써놨어요.
그래서 아이고, 참 오랜만이다. 오랜만에 몸 좀 풀어볼까, 해가지고 아주 길게 댓글을 달아줬어요.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그 사람이 죄라고 한 게 아니고, 죄가 이것이라고 한 것이다. 죄가 이것이다. 그 사람을 찍어서 죄라고 한 게 아니고 죄가 이런 경우들을, 이런 현상들을 남긴다. 죄가. 그리고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판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은 입 다물라 하는 것이 복음이 아니고, 구체적으로 십자가라는 말을 할 수 있어야만 그게 복음이다. 하나님만이 그것을 아시고 인간은 겸손하게 푹 죽고 아무소리하지 말자. 되게 겸손해보이지만 이런 것은 이슬람교나 유대교도 다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유신론 철학에서 하는 것이고 신학에서 그런 소리하는 것이지, 그래서 끝에 신학 하는 것이 이단이다.” 그렇게 해놨는데.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십자가 죽음사건을 근거로 해서 그 다음에 모든 복음적인 말씀을 던지는 겁니다. 이 말씀이 십자가가 사건에 모든 인간이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통보해주는 거예요. 그런데 십자가 영을 안 받은 사람은,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무엇에 관심이 있느냐 하면은, 나의 지금 신앙은 제대로인가? 옳은가? 그걸 살피고 있는 거예요. 그걸 살피다가 교회오빠 평을 보면서, 제가 교회오빠 평을 다시 봤어요.
영화 내용 그대로 썼고, 평을 달기를 인간은 그야말로 쉽게 말해서 죽어가면서도 자기 잘난 체를 한다. 그런 식으로 썼는데. 그 사람이 화를 내는 이유가 지금 암 4기 걸려서 죽는 사람을 보고 어떻게 그렇게 매몰차게 지적할 수 있느냐, 하는 거예요. 그런 뜻인 것 같아요. 제가 속으로 부아가 나서, 죽음이 유세라. 죽음이 유세야. 암 4기가 아주 유세를 떨어요. 유세를. 뭐 죽는 게 자랑거리입니까? 뭐 죽으면 동정해야 돼요? 참 얼마나 이 세상이...,
그 이야기가 지금 이 대목하고 적합하게 맞아떨어집니다. 바라바라는 죄인이 있다 칩시다. 바라바가 죄인이에요. 군중들, 대제사장들이 있고. 여기에 예수님도 계시다 이 말이죠. 예수님이 계신데, 전부 다 이 바라바, 빌라도, 군중들, 대제사장들, 전부 다 한통속이잖아요. 한통속. 한통속인데, 그들이 비겁하게 뭐라고 호응하느냐 하면은 바라바는 죄인이라는 거예요. 바라바를 죄인이라고 규정하면 자동적으로 자기들은 뭐가 됩니까? 의인이 되죠. 그러니까 나보고, “당신은 교회오빠 그 병든 사람보고 죄인이라고 했기 때문에, 그렇게 판정하는 당신은 잘났나?”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죄인으로 이야기했기 때문에 니는 잘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를 지적하는 그 사람이 평소에 그런 식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거예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내가 어느 정도로 괜찮은 존재냐? 그거 확인차로 인생을 살아가는 거예요. 그거 확인하려고. 내가 과연 신자가 맞는가? 누가 내 사상하고 같은가? 그거 확인하려고 하는 거예요. 십자가는 관심이 없어요. 모든 인간이 예수님의 죽으심에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 사람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을 거예요. 예수님을 죽인 것은 예수님 당시에 빌라도나 이 사람들이 성질 더러워서, 나빠서 죽였지. 나는, 나 같으면 안 죽인다는 겁니다.
지금 오늘 본문은, 그런 허튼소리 하지 말라는 것이 오늘 본문이에요. 그런 허튼소리 하지 말라. 모든 인간은 이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십자가 모르는 사람이에요. 그걸 모르게 되면. 모든 사람이 십자가에 연루되어 있다고요. 왜 그러냐 하면은 바라바를 죄인으로 조치해서, 바라바 조치가 어떤 조치를 했습니까? 바라바를 죽이겠다고 빌라도가 이야기를 했죠. 죽음이잖아요. 죽음. 죽음이죠. 근데 인간들은 이 바라바를 죽임으로서 자기들은 안 죽을 권한이 있다고 우기고 있는 겁니다.
근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죽음에 뛰어들게 했죠. 이 죽음에 뛰어들게 했습니다. 물론 본디오 빌라도는 빼줄라고 했지만, 대제사장들이 거기에 반대를 해서 예수님은 어쩔 수 없이 이 죽음의 사형장에 들어가게 됐는데. 그러면 여기서 예수님을 A라는 죽음이라고 합시다. 이 사람의 죽음을 B라는 죽음이라고 한다면, A라는 죽음이 들어옴으로서 이 B라는 죽음은 어떤 죽음이냐 하면은, 예수님의 그 죽음과 같지 않는 죽음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되살아남으로서 이게 나중에 증명이 될 거예요. 바라바가 사흘 만에 부활했습니까? 아니죠.
죽음에 두 종류가 있다는 사실을 이 대제사장이나 빌라도나 민중들이 알까요? 모를까요? 모르죠. 다시 말해서 이 바라바의 죽음에 하나님께서는 이 민중들과 바라바를 죽이고 살리는 이 결정권에 그들이 다 연루되게 한 거예요. 의도적으로. 이 바라바라는 사형식에서 연루되게 한 겁니다. 빌라도는 “바라바가 죽어야 될 사람이다. 왜냐하면 진짜 살인을 많이 했기 때문에 죽어야 될 사람이다. 거기에 대해서 너희가 동의하지?” 그러한 죄의식과 죄에 대한 죽음, 사형이라는 의식에 대해서 전부 다 이점에 대해서는 의의가 없어요. 사람을 살인했으니까. 사람을 죽였으니까. 어떤 명분이든 관계가 없이 죽였으니까, 법에 의해서 죽는 것은 마땅하다. 그 인간들의 마땅함에다가 예수님이 들어와 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죽음에 이들이 이런 자는 죄인이며, 이런 자는 죽어 마땅하다는 그 의식을 그대로 굳히기에 들어가는 겁니다. 누가? 예수님이 들어옴으로서. 예수님은 자기 죽음으로서 도리어 여기에 연루된 인류 전체를 심판해버린 거예요. “너희들의 죄인식과 그리고 죄에 대한 처벌인식이 과연 옳은가를 내가 보여줄게.” 들어와 버린 겁니다. 들어올 때 말로 했습니까?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했습니까? 예수님의 죽음으로 이야기를 했거든요.
그러면 어떤 논리가 성립되느냐 하면은 이 예수님 사형 당하심 이 자리가 ‘예수님+모든 인간들’ 합쳐서 이게 무슨 자리가 되느냐 하면은 ‘죽음의 실재화’, 죽음의 자리가 성립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으심. 그래서 고린도후서5장에 보면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해서 모든 인간이 죽은 것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해서 모든 인간이 죽은 것이라고 해서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계시를 받고 그렇게 이야기를 했거든요. 그러면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모든 인간은 죽어 마땅하고 죽을 이유가 있다는 말은 모든 인간이 예수님의 죽으심에 연루되어 있다는 말이에요.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루되어 있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죽고 난 뒤에 삼일 만에 부활하셨잖아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죽고 난 뒤에 생명이죠. 사흘 만에 살아나셨으니까. 이거는 생명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뭐가 되느냐 하면은 생명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죽음이 생명. 예수님의 죽음이 생명이 된다면 이 인간들은 뭐가 되느냐 하면은 이 사람들이 생명으로 여기는 것이 생명이 아니고 그 자체가 생명이 될 수 없는 죽음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사형장에다가 아버지께서 의도적으로 성령으로 예수님을 집어넣으시는 이유는,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어디서 나와야 되느냐 하면은, 인간의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온다는 것은, 이건 끊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끊어져있어요.
그러면 인간들이 자식을 낳고 손자를 낳는 이것은 뭐냐 하면은 죽음의 자기 확대죠. 확산. 죽음의 자기확산. 자기번식. 죽음이 번식이에요. 죽음이 죽음을 낳고 죽음이 죽음을 낳고 계속 죽는 거예요. 계속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이거는 생명과는 완전히 단절되고 끊어져 있는 겁니다. 생명과는 끊어져있어요. 그 이유가, 사람들은 이렇게 태어나서 늙어서 죽고, 태어나 늙어 죽고 하는데, 왜 죽는지를 모르죠. 그런데 이제는 예수님께서 가담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왜 죽느냐, 왜 죽느냐 하면은 예수님의 생명과 같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필히 죽어야 된다는 그 내막이 드러나는 거예요. 그 내막이.
제가 옛날에 알던 우리 외가 쪽에 아는 친척 형님이 있는데 마음씨가 그렇게 고와요. 정말 마음씨가 너무 착하고 성질부리지 않고 온화하고 온순하고. 뭐든지 이렇게 마음씨가 순하고 악하지가 않아요. 얼굴도 그렇고 행동도 그렇고. 그런데 그 형님이 자기 집에서는 그렇게 욕을 많이 얻어먹어요. 우리 친척 동생들한테는 그렇게 인기가 좋고 참 훌륭하신 그런 형님이지만 자기 집안에서는 그렇게 욕을 얻어먹는데. 왜 그러냐 하면은 변변한 돈벌이를 못하는 거예요. 옛날이야기니까, 스물 몇이 돼서 돈벌이를 해야 되는데 돈벌이를 할 줄 모르고 그저 착하기만 한 거예요. 착하기만. 꼭 누구라고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만. 돈벌이를 할 줄 모르는데 되게 착해. 그런데 그 형님 집안에서는 속이 터지는 거예요. “누가 착하라고 하더냐? 돈을 벌어와! 돈을 벌어와! 그 나이가 돼가지고. 니 밥벌이는 니가 알아서 해야 될 게 아니냐.”
인간들이 나름대로 굉장히 정의롭고 법인식이 강렬하고 사회의 나쁜 죄인을 대번에 뽑아낼 정도로 굉장히 냉철한 그런 정의감과 질서의식이 있어요. 그런데 그래봤자 지옥에 가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그래봤자 지옥에 가는데. 냉철하고 법적으로 따져가지고 저 사람은 징역 5년이고 4년이라고 낼 줄 아는데, 그래봤자 생명이 아닌데. 그래봤자 생명이 아닌 거예요. 똑같은 선악적인 의식이 다 같이 통하고 있어요. 죽어가는 바라바도 별로 억울하지 않아요. 죽을 각오하고 사람을 죽였으니까. “옳소이다. 판사님. 여기에 동의합니다.” 뭐 이래 되겠죠. 뭐 한통속이니까. 사형당하는 쪽이나 사형시키는 쪽이나 다 한통속이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을 사형시켜놓으니까, 예수님께서는 며칠 만에 부활했다? 3일 만에 부활해버린 거예요. 부활이. 그러니까 이 말은 인간들 세계에서 어떤 윤리도덕이나 관념이나 철학이나 과학이나 아무리 지혜를 끄집어내도, 인간은 죽을 놈이 죽을 판결을 내렸고 죽을 인간이 과학을 만들었고 죽을 인간이 뭐 백신 만든다고 애쓰고 죽을 인간이 뭐 아들 교육한다고 난리고. 교육시켜서 지옥 보내고, 교육해봐야 뭐 전부 다. 그 모든 인간이 한 것이 결국은 본인이 예수님 생명 앞에서 생명이 아님을 폭로시키는 그러한 사항뿐이에요.
그러면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이라고 할까요? 대안이라고 할까요? 이렇게 십자가사건을 말씀으로 확장, 확대시켜나가는 그 근거가 있어야 되죠. 그 근거가 뭐냐 마리아가 예수님을 수태했습니다. 임신시켰죠. 임신시키고 해산날에 해산했습니다. 자 봅시다. 이 마리아가 있는데 배가 불룩해요. 배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예수님이 들어있죠. 자, 예수님이 언제까지 배 안에 들어있어야 합니까? 예수님이 배 안에 있다가 배 안에서 알아서 십자가지시고 이러려고 오신 게 아니잖아요. 더 이상 머물 수 없어 밖으로 나오는 겁니다.
예수님의 영역이 이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바깥으로 나오게 되면 예수님을 받아야 될 새로운 예수님의 환경이 조성됩니다. 여전히 어려운데요. 여전히 어렵다는 말은 인간세계에 예수님이 숟가락 하나 얹으려고 한분으로, 하나로 오신 것이 아니고, 예수님 고유의 자기만의 세계를 가지고 예수님이 활동하면 활동할수록 점점 더 여기서 새롭게 발생이 돼요. 그 대표적인 게 열두 제자들이죠. 어부 된 베드로를 찾아가고. 예수님께서 활동하고 말씀 전하시고, 이게 계시의 확장이고 말씀의 확장인데, 연루시키는 건데, 계속 함으로 말미암아 그 자체가 예수님의 자기 신체성의 확장을 두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베드로서에 보면 교회를 뭐라고 합니까?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죠. 그러면 예수님은 머리가 되시지만 몸에 함께 있죠. 예수님이 머물 수 있는 곳은 예수님 본인이 알아서 만드시는 거예요. 만들 때 뭐로 만드는가? 예수님 자신이 하시는 업적과 성과로 일로서 자기 영역을 만들어나가시는 겁니다. 우리가 이점을 안다면, 나 개인 여기 있고 예수님 여기 있다. 이렇게 생각하지 마시고요. 나는 현재 이 세상에, 단일신체죠. 이 세상 자체가 단일신체죠. 해와 달과 별 다 포함해서. 단일신체에 일부가 되는 겁니다. 일부. 접두어, plan. 이거는 뭐냐 하면은 사과를 칼로 잘라버리면 단면이 나오잖아요.
나라는 것은 이 전 세계의 일부의 조각이에요. 하나의 피자조각처럼 조각에 불과해요. 내 몸이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내 것은 내거다가 아니라, 내가 저 사람을 알고 지내면 저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도, 내 일이 아니라도 내 일의 일부로 이게 들어와 있어요. 만약에 내가 좋아하는 프로그램이 있고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가 있다면 그 드라마에서 일어나는 일이 남의 일이 아니라니까요. 그리고 내가 만약에 삼성 라이온스의 야구팀을 응원하다면, 그러면 스포츠를 볼 때 SK나 두산이나 관심이 없어요. 삼성 야구 또 졌나? 또 졌지. 에이, 끄자. 이게 왜 그래요? 벌써 내가 응원하는, 내가 뭔가 관심이 있다는 말은 그게 나의 일부가 되어 있어요. 일부가.
나는 SK팀 별로 안 좋아하고 삼성 좋아한다고 이래 하다가, 만약에 그 SK복장을 한 사람을 미국에 가서 만나보세요. 어! 대한민국 사람. 같이 또 만나죠. 그게 원호에요. 원호. 내가 여기에 있으면 나라는 것이 어디까지 확장이 되느냐 하면은 내가 어릴 때 보는 눈의 한계가 있잖아요. 어릴 때 보는 것. 엄마, 아빠, 동생, 이 정도. 이건 장난감. 그런데 크면, 두 살이 되면 그만큼 원호가 사방으로 커지겠죠. 여섯 살 되면 더 커지겠죠. 일곱 살 되면 스마트 폰 사달라고 더 커지겠죠. 아홉 살 되면 방탄소년단 좋아한다고 맨날 그거만 보고 있겠죠. 열두 살 되면 나는 공부 안 하고 춤 배워달라고 하겠죠. 자꾸 커지다보면 어디까지 커지겠어요? 자기의 역량이 되는 한, 자기가 알 수 있는 것까지 자꾸 커지겠죠.
그런데 이 자식이 어디 딴 데 가서 북한 스파이한테 납치가 되어서 러시아 벌목꾼으로 갔다고 합시다. 그러면 남한 사람인데 러시아에 가서 벌목꾼으로 일하게 되면, 걔가 만약에 탈출해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면 걔는 무슨 이야기하겠어요? 남한에서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뭐냐 하면은 러시아 아가씨에 대해서, 러시아 풍경 이야기하겠죠. 그러면 본인의 본 한계만큼의 원호, 그만큼 점점 더 넓어지는 거예요. 이거는 계속해서 확대가 된, 그 확대의 끝을 미리 생각해보게 되면 그 끝은 뭐냐, 이건 공간적으로 그 시대상의 끝만 되겠지만. “내가 러시아에 가서 러시아의 종교에 대해서 알았다.” 이러면 러시아의 과거 역사까지 자기 영역 안에 들어오죠.
그러면 이거는 온 인류가 단일신체라는 것을 본인이 이렇게 증명하면서 돌아다니는 거예요. 증명하면서. 심지어 이런 여행을 안 좋아해도 지금 코앞에 있는 것 그것만 좋아하는 거예요. 재난지원금 얼마 줬나? 나는 60만원. 나는 80만원. 다 썼나? 다 썼어. 뭐에다가? 기름 넣는 것으로 다 썼어. 이 화젯거리는 싱가포르나 일본사람하고는 관계가 없는 거예요. 같은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 대한민국 사람들하고나 통하는, 한통속이 되는 겁니다. 한통속이.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따로 있다? 없다? 내가 따로 없어요. 그냥 우연히 만나면 친구가 되던 원수가 되던 전부 다 우리는 한통속이라는 것을, 같은 아담에 속한 인간이라는 것을 평생 우리가 느낄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인간 대 인간은 연속성이 있으면 분절, 단절 된 적은 없는 겁니다. 하지만 그 마리아 몸에서 태어난 예수님은 바로 십자가에 죽을 때만 사람들에게 소외당하고 배제당한 게 아닙니다. 태어나면서도 새로운 신체공간을 확장시킵니다. 예수님이 새로운 신체공간을 확장시켜요. 확장시킴으로써 이 예수님의 새로운 이것만이 생명이고 다른 사람은, 본인도 모르고 있지만 그 사람들은 살아도 소용이 없고 전부 다 죽음인데, 그냥 숨 끊어져 죽는 게 아니고, 이거는 바로 저주 받은,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가담자, 연루자, 십자가와 연루된, 살인사건과 연루된 범죄인으로 간주되어서 그들은 처벌받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7절에 보면 “민란을 꾸미고 이 민란에 살인하고 포박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라고 되어 있죠. 이 바라바라는 자는 살인한 사람이죠. 살인했기 때문에 살인의 대가로서 죽이는 겁니다. 그래서 다시 이야기하지만 이 죽음이라는 것, 누굴 죽임으로서 이거는 죽어야 마땅하고 죽이는 우리는 살아야 마땅하다는 그들의 이 의식 속에, 주님이 여기에 끼어들게 됩니다. 딱 끼어들죠. 언젠가 제가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요. 이걸 들어보면 아는데 생각하기가 쉽지 않아요.
뭐냐 하면은 하나님의 일은 인간이 먼저 벌여놓아야 개입된다. 이거는 성경 보면 뻔하잖아요. 인간이 먼저 일을 벌여놓고 그게 아니다 하는 식으로 뛰어드는 게 하나님의 일이에요. 하나님의 일은 따로 없어요. 인간이 먼저 저질러놓아야 해요. 그걸 하라고 악마로 하여금 일을 벌이게 하는 겁니다. 선악과 따먹게 하시고. 전부 다 악마하고 짝짝꿍 해가지고 마음대로 하라는 거예요. 해놓고 그 인간이 벌인 일에 뛰어들어요. 뛰어들어서 곡해를 받고 오해를 받는 식으로 주의 일이 되는 겁니다. 이걸 뭐 단출하게 이야기해서 죄가 있는 곳에만 의가 있다. 죄가 있는 곳에만 의가 있어요.
그래서 유튜브에서 저를 공격한 사람이 죄, 죄 하지 말고 은혜와 사랑을 언급해야 되지 않겠는가, 이래 이야기하기로, 저주를 발라놓지 않으면 거기서는, 저주가 발라진 장소가 아니면 은혜도 긍휼도 나타나지 않는다고 거기에 제가 댓글을 달아놨어요. 저주가 먼저 기정사실이 되어야 돼요. 교회를 좀 다닌 사람은 십자가를 알아요. 근데 본인이 죄인이 아닌데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본인이 죄인이 아니에요. 본인이 죄인이 아니고 자꾸 하나님의 일을 받으려고 해요. 자기 쪽에서. 그러나 주님의 일이 들어오게 되게 되면 바로 주님의 일은 나의 일과 연속되지 않고,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이걸 우리가.
그걸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 오늘 본문에서 빌라도는 바라바를 죽이라고 하는데 유대인들은 뭘 바랍니까? 바라바 말고 예수님을 죽이라고 하죠. 그런 의도를 갖고 있는 것을, 주님께서는 일부러 그런 상황을 조성하신 거예요.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좋은가, 안 그러면 재해기금 백만 원이 좋은가? 그냥 재해기금 없이 예수님이 좋은가, 싫은가? 할 때는 예수님이 좋습니다. 그런데 재해기금 백만 원이 좋은가? 예수님이 좋은가? 이래 나온다고요. 어떤 노래에는 돈보다 친구가 더 좋다는 말도 안 되는 노래도 있지만.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일을 만들 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로 오게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만들게 해놓고, 거기에 예수님이 끼어들어서 살인사건이 나도록 만들어버려요.
그래야 우리가 십자가에 연루된 사람이라는 것을 뒤늦게 발견할 수 있는 게 아니겠어요? 점잖은 우리가 점잖은 주님을 섬기는 것, 이게 얼마나 쉬워요. 문제는 내 쪽에서 예수님을 차버렸다는 그러한 계기가 일어나줘야 그게 제대로 주님이 방문하신 거예요. ‘아이고, 내가 주님 사랑한다고 해놓고 주님 사랑한 게 아니고 딴 게 있었구나.’ 나는 이 대표신체, 이 세상을, 나를 포함해서 내가 그동안 알고 있었던 그 모든 것, 러시아 역사, 러시아에서 벌목했던 것까지, 나의 고생 많았던 그것을 예수님이야기보다 더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구나, 하는 그것을 까발려지도록 주께서 그렇게 조치를 하신 거예요. 이거 하는데 우리 한평생이 다 소모가 됩니다. 다 소모돼요.
기어이 모든 인간은, 그 당시 사람들 욕하지 말아야 돼요. 지금이라도 바라바냐, 예수님이냐, 할 때는 너라도 예수님을 차버리고 바라바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왜? 타고난 본성이 그렇고, 바라바를 죽여야 자기가 의롭다는 것이 증명될 것이 아닙니까? 죽을 자를 죽이는 것은 나는 절대로 죽을 자가 아닙니다, 라는 것이 티가 날 것이 아니겠어요? 그렇거든요. 교회에서 어떤 법을 정하든지. 모든 법이 다 그런 법이에요. 자기의 정당성을, 자기의 의로움을 증명하기 위해서 나보다 못한 사람으로 꼭 나타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는 이러한 심보.
그러한 심보는 예수님의 생명과 연관 없어요. 관계없습니다. 끊어져있어요. 우리는 아예 생명 같은 것은 기대하지 마세요. 우리는 다 끊어져있습니다. 우리는 한통속이에요. 전부 다 아담하고 같은 편이에요. 같은 편이에요. 생각이 다 같아요. 그러면 주님께서 어떻게 자기의 생명을 확장시켰느냐? 그건 뭐 두 번째 시간에 하겠습니다. 확장시키는 방법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십자가살인사건, 죽음사건을 가지고 나의 죽음과 주님의 죽음의 차이점을 가지고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부활이 있지만 너의 죽음은 부활되지 못하고 죽음이 그냥 죽음이죠. 다니엘이 죽는 것과 다른 사람을 집어넣어 죽는 것과 차이가 나는 겁니다. 모든 게 차이가 나요.
이렇게 십자가로서 주께서 원하는 것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예수님의 새로운 머물 곳을 마련하는, 예수님이 새로운 머물 곳 마련을 위해서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찾아오게 되면 우린 여기서 뭐냐 하면은, 이것도 어려운데요. 보통 십자가 다음에 뭐가 있어요? 십자가 다음에 부활이 있죠.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고 부활부터 먼저 주고 그 다음에 십자가로 인도하죠. 이 부활을 가지고 부활의 영, 성령을 먼저 받고 난 뒤에 십자가로 데려가는 겁니다. 우리는 바로 십자가로 가지를 못해요. 왜? 단절되어 있으니까. 단절된 것을 이미 완료된 것을 가지고 우회해서,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 안에서 예수님과 생명을 공유하도록 그렇게 조치를 내려주시는 겁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