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200514b슥1:8(재앙 속에서)-이 근호 목사
안양20200514b슥1:8(재앙 속에서)-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혈육은 물려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수정불가하고요. 관계라 하는 것은 아예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에 우리 손으로 관계를 잇는 것도 이건 소용없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백성에게 천사를 보냅니다. 천사를 보낼 때, 이스라엘이 그 당시에 왕이 없었어요. 대표자가 선지자니까. 선지자 불러다가 천사를 만나게 해 준겁니다. 천사한테 인수 인계받는 게 있어요. 그건 천상회의 계획이라 했잖아요. 그 계획이 뭐냐 하면 언약이라 하는 겁니다. 약속이지요.
약속인데 어떤 약속이냐 하면 일방적 약속이지요. 한 쪽은 못 지키고 한 쪽은 다 지킬 수 있는 거예요. 인간 쪽에서는 지킬래야 지킬 수 없고 약속을 제시한 쪽에서 약속이 다 지켜지는 그런 약속. 그래서 이 언약의 특징은 인간배제입니다. 인간의 행함 배제. 흉내 내지 마라. 모방하지 마라. 그거 엉터리다. 인간의 행함을 배제하고 그 다음에 거기다가 언약을 이루어주신 분. 언약을 이루신 분 여기다가 메시아죠. 메시아가 여기 행함에 집어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배제와 주님의 투입. 주님 행하심의 투입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동시에. 주님이 투입돼서 예수님이 하신 언약의 완성이 투입되고 개입된다는 말은 이건 곧 같은 뜻으로 뭐라는 말입니까? 우리의 모든 행함은 다 바깥으로 배설물로 내버려야된다는 뜻이죠. 나의 행함. 그래서 주님이 들어오게 되면 우리 바깥으로 뭐가 계속 나오느냐 하면 나의 행한 것들의 치사함과 그리고 터무니없음. 얄팍한 소망, 기대. 이런 것들이 그냥 바깥으로 다 배출이 되는 겁니다. 땀구멍으로 땀이 배출되듯이 그게 나오는 거죠. 그걸 사도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이걸 배설물로 하지요. 배설물.
배설물이 나오는 겁니다. 배설물이 나오거든 이걸 이렇게 보시기를 바랍니다. 살아있네! 살아있어! 있잖아요. 우리 행함이 쓰레기로 나올 때 그거 살아있는 거예요. 생명 있기 때문에 이 배설물이 부활의 조건에 부합되지 않는 것은 배설물로 쭉쭉 나오는 겁니다.
이러한 논리구조에 있어서 인간의 행함을 배제하고 주님의 행함을 투입하고 동시적으로 이루어지는데 왜 그러느냐 하면 이 약속 자체가 일방적 약속이라 했지요. 일방적 약속이라 하는 것은 풀이하게 되면 약속을 제시한 쪽이 약속의 완성된 내용을 유일하게 안다가 됩니다. 출제자가 정답을 알지 출제자 아닌 자는 정답을 몰라요. 그리고 이것은 삼손에 보면 이걸 가지고 수수께끼라고 해요. 수수께끼. 이걸 신약에 오게 되면 수수께끼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숨겨진 시크릿, 숨겨진 비밀. 숨겨진 비밀 같은 겁니다.
사실은 구약에도 비밀이 있어요. 아가서를 여러분이 아시지요.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서로 사랑하는 이야기. 아가서에 보게 되면 거기에 가득 가득 수수께끼가 거기에 담겨있어요. 대표적인 것이 남자나 여자가 서로 보면서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아름답다. 세상에 어느 꽃보다도 아름답다. 라고 이야기해요. 이건 미쳤거나 수수께끼거든요. 말로 표현할 수 없도록 아름답다고 본다는 것은 이것은 수수께끼에 해당되는 거예요. 비밀에 해당되는 거예요. 이걸 실습하려고 하지 마세요. 이건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사랑의 교제입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아름답데. 제3자가 봤을 때는 어쩔라고 이렇게 일방적으로 아름답다고 우기는지. 그걸 주관적 미적 감각이라 하는데. 지 주관에 의해서 아름답다. 그럼 다른 사람이 그거 몇 달 가겠느냐, 몇 년 가겠느냐 이렇게 나오지요. 영원토록 시간이 흘러도 변화지 않는 아름다운 사랑인데요. 이 사랑의 아름다운 속성을 아가서에서는 뭐라고 표현하느냐 하면, 이걸로 표현했어요. 죽음.
그러니 죽음이 꼭 부정적인 것만이 아니에요. 죽음이라 하는 것은 뭐를 대변해주느냐 하면 고정된 상태를 표현하거든요. 죽음을. 죽어서 이렇게 관속에 넣어보세요. 오필리아 같은 죽음이 유명한 명화에 그런 거 있잖아요. 죽어있다 말이죠. 죽어있다는 것은 그걸로 더 이상 진척이 없다. 그 상태로 동결됐다. 계속 죽 간다. 이리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남자나 여자나 세월이 지나도 계속 아름다운 거예요. 아름다움에 변화가 변동이 없어요. 이걸 구약 아가서에서 두 자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사랑이에요. 사랑은 뭣과 같아야 된다? 사랑=죽음의 상황과 동일해야 된다는 겁니다. 고정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구약의 아가서에서 그 사랑이야기하면서 야~~ 그 사랑. 어떻게 한 번만 딱 보고 아름답다, 좋다, 사랑한다는데 그것이 세월이 천년이 흘러도 영원토록 계속 유지가 된다면 정말 이건 인간이 기대할 수 있는 어떤 사랑보다 그걸 뛰어넘는 사랑이겠지요. 그 사랑, 구약 아가서대로 신약에 주어집니다. 그게 우리가 받은 주님의 사랑이에요. 주님의 사랑.
우리가 어떤 짓을 해도 무슨 짓을 해도 사랑은 죽음같이 박혀있다. 또는 죽음, 도장같이, 인같이, 인 받아버려요. 인처럼 찍혀버린 거예요. 인처럼. 등기계약서 도장 찍혀있지요. 2년 뒤에 이름이 막 스스로 바뀝니까. 아니지요. 처음에 있던 도장 그대로 박혀있지요. 한결같아요. 차라리 그 옆에 있는 계약서등기 있는 그 장롱은 세월에 이기지 못해서 낡아질지라도 그 도장만큼은 있어줘야 법원에 가서 내 소유가 증명이 될 수 있습니다. 내 소유가. 그건 아주 비닐 포장을 하던지 해야지. 그냥 내던져 버리면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가 서류를 46조각으로 찢을 수가 있어요. 스카치테이프로 붙인다고. 물론 따로 등기소에 있기는 있지만.
변화지 않고 죽음처럼 죽는다는 것은 이미 확정된 신분을 냉동 수준으로 동결시키는 그렇게 되어버리면 세월이 2020년도 신종코로나가 뭐가 오더라도 도리어 변화 있는 환경 속에서 이것만큼 변화지 않는 것을 제대로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세상은 계속해서 변동 일어나도 괜찮아요. 환난이나 핍박 곤고, 어떤 것이 있더라도 세상 따라가지 않는 절대 요지부동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있음을 성령을 통해서 인식하게 알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랑이 아까 했잖아요. 아가서가 주관적이고 사적이 되면 안 된다고요. 우리는 그럴수록 오해해서 해석하면 안돼요. 사적이 아니고 주관적이 아니라면 이 사랑은 어떻게 신약에서 사랑은 어떻게 설명되느냐 하면 온 우주가 망하더라도 유효한 사랑이어야 하겠지요. 그렇지요?
그래서 신약에서는 온 우주를 망해버립니다. 온 우주를. 어떤 아가씨가 남자한테 “뺨이 불그스레 이쁘니까 당신 나 사랑해.” 남자가 “아니야, 뺨이 이뻐서 사랑하는 게 아니야.” 그 소리 듣고 그냥 믿으면 되는데, 이거 아가씨가 지가 뺨를 때리고 김치싸대기를 해가지고 지가 때리고. “자, 이래도 사랑해?” 남자가 “이제 그만해. 니 뺨에 칼질 있다 해도 나는 사랑해.” “그럼 내가 다리 부러져도 사랑해?” “사랑해.” 갑자기 차에 뛰어들어가지고 깁스해가지고 “이래도 사랑해?” 그걸 왜 자꾸 측정하느냐 그 말입니다. 그걸. 사랑하면 사랑하는 거지.
조건을 다는 경우는 어떤 경우냐 하면 조건이 무의미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조건을 달 때만 조건이라고 부합되는 거예요. 사랑 앞에서는. 그러면 주님께서 아가서에 나오는 일방적으로 신랑 되신 주님께서 신부되는 교회를 향하여 나는 완전히 아름답고 사랑스럽다고 할 때는 영원히 고정되고 불변한 어떤 요소가 있어야 되지 않느냐, 그 증거가 있어야 되지 않느냐, 그것이 바로 죽음인데, 죽었다가 부활되는 것.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너희를 꾀냐, 십자가의 죽었다가 살아난 걸 통해서 성령께서는 십자가를 알게 하고 십자가를 부각함으로 말미암아 너라는 인간이 어떤 조건하에 하나님과 통한다는 조건하에 너는 구원받은 거예요. 십자가를 소유하는 게 아니에요. 천주교처럼 십자가 피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중간에 하나님과 죄인사이에 죄를 용서하는 중간 루트가 막히지 않고 동맥경화증 걸리는 게 아니에요. 피가 흐르듯이 막히지 않고 그 파이프가 유지되는 그것이 십자가에요. 유지되는 십자가.
좋다고 하니까 돈 얼마면 돼? 얼마면 되겠어? 사랑하는데 얼마면 되겠어? 이런 식으로 돈 주고 사랑 살 필요 없어요. 그냥 십자가와 주님과의 이미 통한다는 그 사실. 그 사실 안에서 우리는 십자가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십자가가 우리를 소유한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됩니다. 감사는 사유재산처럼 가져서 감사하지 말고 오히려 나를 점령하고 지배했다는 데서 오는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고정적인 약속에 의해서 우리가 구원받은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돼요. 고정적인 것. 전에 주일설교에서 그런 얘기 했지만, 지역화폐는 백화점에서 안 받습니다. 북한 돈은 우리나라에서는 받지를 않지요. 북한이든 중국이든 어디에도 다 통하는 “자! 돈. 상품 내놔! 돈 여기 있어.” 내놓는 것은 이 세상에서 달러겠지요. 기축통화라 하거든요. 기축통화. 전 세계를 통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바탕이 되는 통화. 그건 미국연방국에서 찍어낸 화폐로 찍어낸 달러입니다. 그게 변화면 안 되지요. 변화지 않는 가치.
변화지 않는 가치를 로마서에서는 수치스럽지 않는 소식이다. 그게 뭐냐, 기쁜 소식, 복음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린양의 피만 본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 피. 니가 어디서 무얼 하든 묻지를 않아요. 기축통화를 갖고 있느냐. 십자가의 고정성, 확정성에 대해서 니가 아직도 거기에 대해서 인정하느냐를 묻는 겁니다. 십자가를 가졌느냐가 아니라 십자가에 의해서 십자가의 증인으로서 계속 니가 다루어지고 있는가. 그 십자가를 증거 하는 방식은 바로 천사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거예요.
정리해봅시다. 천사는 공격한다. 뭘 공격하는가, 이 세상을 공격한다. 이 세상을 공격해요. 이 세상은 인간의 물려받은 환경인데, 이 세상을 공격한다. 그러니까 이건 개인적인 소관이 아니지요. 객관적으로 이 세상 전부를 공격하게 되지요. 마지막에는 베드로후서3장에 보게 되면 이 지구가 녹습니다. 이 지구가 불에 타서 녹아버려요. 그래서 우리는 지금 아이스크림 위에 살고 있어요. 7월달 되면 여름 되면 다 녹을 거예요. 여기 이 아파트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스크림이에요. 녹아있는. 다른 말로 하면 배인데 물이 계속 차는 밑바닥에 구멍이 나서 물이 계속 들어와서 침몰하는 배위에 우리가 살고 있어요.
노아의 방주 같은 그런 것은 옛날이고, 지금은 천사가 이 세상을 공격할 때에 드러나야 될 구원으로 드러날 사람은 나고 그렇지 않으면 천국에서 배제될 사람은 배재하라는 그 구분 작업에 우리는 아주 신바람 이박사 되어야 되지요. 원숭이가 나무에 올라가야 신이 나는 것처럼, 신바람 이박사처럼 우리는 신이 나야 돼요. 그래서 이 성경은 성령 받은 사람한테는 이 음울한 책, 침울한 책이 아니에요. 환하게 밝은 책입니다. 아주 신바람이 나는 책이에요. 이미 구원받은 사람의 여유. 이런 식으로. 구원받은 사람의 여유.
사우나탕에 가가지고 사우나 다 하고 나오는 그 여유 있잖아요. 등짝에 근지러운 것도 없이 말끔하게 해가지고 뒤늦게 땀 흘리고 오는 사람한테 ‘아이고, 안 됐다. 고생해라. 니. 나는 이미 깨끗이 씻었다.’ 하고 나오는 그 가벼운 여유. 그런 여유 만만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부터 어려운 것은 뭐냐, 환경이 환경을 공격한다면 그 다음 문제는 ‘나는? 나는 어떻게 되느냐?’그 문제에 들어가겠지요. 여기 공식 들어갑니다. 나x나=나의 제곱이 돼요. 나+나=2나가 나의 2가 됩니다. 나-나=0,가 되고요. 4가지에요. 나-주님=-나가 되어요. 딱 요거 4가지에요.
나x나=나의 제곱이라 하는 것은 뭐냐, 이건 위선자입니다. 진짜 나를 가짜 나를 동원해가지고 이걸 감춰버리는 거예요. 거기에x나하면 3제곱 되겠지요. 계속해서 가짜 나를 너무 많이 사기꾼처럼 가짜 나를 너무 많이 세워가지고 본인도 헷갈려. 내가 어느 게 진짜 나인지 본인도 헷갈려 해요. 그래서 세상에서는 쉽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나x나=2제곱, 이건 주로 뭐하는 사람이냐 하면, 부동산 사업하는 사람이에요. 좋은 개발지 나왔는데 이거 투자해 보실 랍니까. 부동산 사업이나 그냥 사업하는 사람이나 다 있다고 보면 돼요. 개인 사업이던 치킨 집 하던 전부 다 위선자로 사는 거예요. 이거 백종원한테 걸리면 혼납니다. 청소부터 다 시킵니다. 군포에 떡볶기집 청소부터 다하고 영업합니다. 족발집도 청소까지 다 당했잖아요.
그러면 나+나=2나, 이건 뭐냐 하면, 그냥 평소 직장 없이 시집=취직이 되어가지고 그냥 집구석에서 아파트에서 한평생 다가도록 뒹굴고 사는 사람. 젊을 때 나와 지금의 나와 비교하면서 큰 욕심 없이 남편 잘 봉양하고 자식 잘 키우고 나의 근사함을 그냥 유지하는 쪽으로 만족하는 사람. 2나입니다. 3나, 4나. 이 사람은 왜 이러느냐, 밖에 나가 사업하면 위선자가 되기 싫어요. 구라를 쳐야 돈이 되거든요. 남편이 잘 벌어다주는데 구라치면서 까지 나의 존엄함 품위까지 손상해가면서 돈 벌기 싫다. 여름에는 덥다고 못 나오고, 봄에는 바람 분다고 안 나오고, 가을되면 해외 여행한다고 시간 없어서 못 나오고, 겨울에는 춥다고 안 나오고. 일년내내 집구석 앉아가지고 TV나 보고 이찬원이나 보고 트로트나 보고 하는 거예요.
나-나=0은 이건 일반교회입니다. 도 닦는 사람이에요. 부족합니다. 주여! 맨날 부족하데. 맨날 부족하데. 부족합니다. 왜 새벽기도하면서 부족하다고 하느냐 하면 나 하나 희생해서 자식 좋은 대학 들어가라고. 나 하나 희생해서 남편 사업 잘 되라고. 그게 자기 가정 아우바리를 지키는 자기의 거룩한 희생물로 여겨서 내 하나 기도 열심히 해서 교회도 안 나오고, 기도도 안하는 자식들 몫을 내가 다 짊어지고 십자가 졌어. 아예. 십자가해가지고 그래, 니 그렇게 살지만, 내가 대신 두 나 곱빼기나 니 대신 내가 기도할 거 다해주고 헌금할 거 헌금 해주고 충성봉사 다해가지고 주여! 가족들이 하지 않는 충성과 봉사를 제가 했으니까 저 하는 걸 봐가지고 너무 우리 가족들 심하게 안 다뤘으면 좋겠다고 이리 하는 도 닦는 사람. 도인입니다. 날마다 자기를 낮추고 비우기 바빠요. 나-나=0에요. 제로에요.
그냥 자식에게 해주기를 바라고 나 하나 엄마로서 희생하는 것이 엄마로서의 도달할 수 없는 순결의 최고 경지 수준에 그걸 목표로 삼고 내 영혼아,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질주하자. 해가지고 지가 지 맘대로 문제내고 답을 지가 알아서 달려가 가지고 남보다 더 고상하고 훌륭한 성품을 갖추어서 그 상으로 내 가족들이 잘 되고 내 교회가 부흥되기를 바라는 이러한 도 닦는 도인들.
그러니 이 세 가지의 특징은 뭐냐, 잘났어. 정말. 1번, 2번, 3번 전부다 잘났어요. 1번은 돈 빼먹기 위해서 티를 내는 거니까 그 스트레스 때문에 퇴근하고 항상 소주하고 돼지 삼겹살 궈 먹어야 돼요. 본인이 너무 사기 친다고 너무 힘들어가지고. 2번은 이것도 힘들어요. 힘드니까 가끔 동창생 만나가지고 시집 욕하고 시누이 욕하고 풀어줘야 돼요. 풀고, 가끔 해외여행가서 풀어줘야 돼요. 3번 도 닦는 이건 가끔은 집에서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자기의 상태가 너무 예상외로 우수함에 자기 스스로 자가 만족하는 사람이에요. ‘어머, 놀래라, 이렇게 고상할 수가 있나.’ 이런 거. ‘내가 이렇게 우아해도 돼?’ 이런 거. 자기 착각에 빠진 사람.
4번째는 뭐냐, 나에서 주님이 나를 빼버린 사람. -나. 이건 뭐냐 하면, 죄인이에요. 죄인 중에 괴수되는 겁니다. 죄인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아까 천사는 환경을 치는데 환경을 치게 되면 그 결과로 나온 것이 죄인이 등장하는 거예요. 죄인이. 마태복음16장봅시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인간의 인식이지요. 인간의 인식의 한계 또는 인식의 범위를 미리 말씀드리고, 그렇게 너희들이 천기를 잘 분별하면서도 4절에 봅시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 없다.
3절에 보면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시대의 표적. 전체를 보는 주관이 아니고 객관적으로 전체를 다 볼 수 있는 안목은 왜 너희에게 없느냐, 그러면 우리가 전체를 알까요? 알 거 없어요. 왜냐하면 4절에 보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악하고 음란한 정신으로 그것을 공유하고 있는 세대가 그 악하고 음란한 인식으로 인하여 자기가 살고 있는 세상이 참으로 악하고 음란한 세대를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형편에 있다는 겁니다. 그 나물에 그 밥이 되어가지고 진짜 이 세상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너희들 중에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아무도 없어요. 그런 형편에 있는 거예요. 그럼 악하고 음란한 세대 같으면, 그걸 보여주는 표적은, 악하고 음란을 보여주는 표적은, 요나의 표적이지요. 요나가 니느웨성에 뭐라고 했습니까? 너그 40일 지나면 멸망한다 했지요. 멸망. 심판. 멸망에 대해서 언급할 때, 아까같이 아가서에서 사랑. 사랑의 고정성이 있는 사람은 이런 멸망조치에 대해서 반깁니다. 반겨요. “에이, 못 먹는 감 찔러나 주세요.” 이런 식으로. 삼성그룹 내거 아니라면 망하게 하던지. 이런 식으로. 어차피 내거 아닌데 뭐. 챙길 거 다 챙겼으니까 세상이 어떻게 되든 신종코로나보다도 더 센 변종이 오든 말든. 그거 나와 무슨 상관이 있어요. 상관없어요. 멸망하면 멸망해주세요. 이럴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 여유 만만한 태도를 가져야 된다 말이죠.
왜? 본인은 죄인이기 때문에. 사람이 죄인이 되게 되면요, 어떤 것도 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기는 이유는 아쉬울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그래요. 잃을 게 없기 때문에 그래요. 죄인이라면. 죄인이라면 잃을 게 없는 정도가 아니고 여기에 있는 시몬케익부터 해서 전부 다 감사거리지요. 모든 게 하나가 감사거리지요. 시몬케익 이거 지옥에서 단가 얼마 나오는 줄 알아요? 아니 물 한 방울 지옥가면 얼마인지 알아요? 돈 주고도 못 산다니까요. 지금.
그런데 우리는 지옥가도 마땅한 존재가 이 물을 막 마시잖아요. 감사 안할 수밖에 없어요. 정말 고마워하지 않을 수밖에 없어요. 똑같이 물을 주고 똑같이 빵을 줘도 지옥 갈 사람은 지옥 갈 티를 내요. 부활의 요건이 없어요. 그러나 부활될 요건이 있는 사람은 벌써 이 땅에서부터 자기가 죄인인 것을 마이너스인간인 것을 이미 익히 아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미리 침투했기 때문이에요. 마지막 멸망이 있기 전에 미리 침투한 거예요.
언약의 효과는 바로 유월절 출애굽 때에 마지막 열 번째 재앙 때에, 오늘 제목을 이걸로 정하겠습니다. 재앙 속에서 비로소 언약이 빛이 나요. 하나님의 약속이 십자가가 빛이 나고 피 흘림이 빛이 난다고요. 재앙 속에서. 그래서 이 천사는 어디에 향하느냐, 이 재앙을 활성화시키고, 활성화시키기 전에 먼저 예고하고 활성화시킵니다. 작살난다. 망한다. 그렇게 되지요.
그러면 아까 나라고 했는데, 개인적인 나는 이미 육적으로 물려받은 것이 있기 때문에 자기밖에 모르는 거예요. 그런데 아까 1번, 2번, 3번째, 1번은 나 제곱이고, 2번째는 2나였고, 3번째는 제로였고, 4번째는 –나지요. 마이너스 나. 죄인이다 말이죠. 그러면 이 1번, 2번, 3번째는 자동적으로 돼요. 혈육으로부터 물려받은 게 이런 속성이기 때문에 이건 못 고쳐요. 못 고치는데 이 4번째는 특이하거든요. 누가 왔어요? 주님이 찾아와서 나를 죄인으로 삼게 했다 말이죠.
이럴 경우에 여기에 해당되는 장차 부활의 조건이 요 마이너스 나를 통해서 어떤 식으로 형성되느냐, 이걸 이제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부활의 조건이 있어야 되는데 부활의 조건은 주님이 찾아와서 주신다는데 어떤 식으로 우리 안에 부활의 조건을 유발해내고 만들어내고 거기다가 뭘 심고 장착하시는 방법이 뭐냐 하는 겁니다. 그 말씀을 간단히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아들을 통한 아버지 뵙기 또는 아버지 알기. 아버지와 아들을 통해서 이것이 성립됩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육과 영의 차이점은 영이라 하는 것은 신비주의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귀신 뭐 수증기 올라오고 그런 걸 생각하지 마세요. 제가 말하는 영이라 하는 것은 언약입니다. 언약. 구체적인 언약이지 뭐 흐물 흐물 밤에 귀신 나왔다 그런 신비주의를 영이라 하지 않습니다. 그건 귀신의 장난이니까. 거기에 속아 넘어가지 마세요.
육과 영에서 육은 아버지가 아들을 낳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아들이 아버지를 정해버립니다. 정한다. 아들이 아버지를. 위에는 아버지가 아들을 낳는다. 아버지가 아들로, 아들로, 계속 나가지요. 그러면 아들이 부여받은 모든 속성은 이미 아버지 하나로 결정되어있는 겁니다.
그런데 아들이 아버지를 새롭게 정해버리면 이 아들로 인하여 기존의 누구 아버지가 있습니까? 집안 식구 아버지. 육의 아버지 있겠지요. 육의 아버지를 뭐로 하고? 배제해버리고, 배제하는 방식으로, 아버지가 아들을 낳은 것이 아니고 육의 아버지 말고 다른 아버지에 의해서 내가 아들이 됐는데 그 다른 아버지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나 아들을 통해서 아버지가 새롭게 정해지는 방식으로, 나타나는 방식으로 언약은 성립이 되는 겁니다. 이게 무지무지하게 참 어려운 문제지요.
두 문장을 한 번 비교해 보세요. ‘나는 나의 아들이다.’ 이게 상당히 말이 어렵지요. ‘나는 나의 아들이다.’ 같은 말로 ‘나는 아들을 소유할 수 없다.’ 같은 말로 ‘아들이 나를 낳았다.’ 예수님이 만인의 아들로 왔다고 생각해 보세요. 여기서 만인하는 것은 택한 백성의 만인. 모두. 전부. 전부의 아들로 오신 거예요. 아들로 왔다면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 뒤에는 아버지가 따로 있어요. 이 아버지는 숨겨진 아버지고.
인간이 이렇게 있다는 것은 인간에게 누가 먼저 있어요? 아버지가 먼저 있지요. 아버지 아들로서 인자 있잖아요. 그런데 나는 나의 아들이라는 말은, 이 육의 세계에서는 나는 내가 아니고 아버지라는 말을 해도 같은 말이에요. 아버지가 나를 낳았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다. 라고 말을 해도 같은 말이에요. 아버지처럼 높다는 뜻이 아니고 아버지에서 못 벗어난다. 아버지의 육의 범위에서 조금도 이탈할 수 없다. 이미 규정된 조건이기 때문에 이 조건을 내 쪽에서 수정이나 변경할 수 없어요. 나는 성형수술해도 아버지의 피가 흐르게 되어있어요. 아버지 피가 내 안에 흐르는 겁니다. 아버지가 먼저 있고 그 다음 차례에 내가 있다 보니까 나는 아버지의 범주 밖에서 못 벗어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어떻게 오셨느냐, 아들로 오셨거든요. 아들로. 예수님이 사랑하는 아들로 왔다 말이죠. 그러면 육에서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아들 개념 하나와 새롭게 예수님의 아들과 아들 개념이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아들이 등장한 거예요.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아들이 있다는 말은 두 종류의 아버지가 따로 있다는 뜻이에요. 두 종류의 아버지가.
그렇다면 성도에게는 기존에 이미 육의 아버지가 있는 입장에서 예수님이 성도에게 찾아와버리면 이 성도는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의 아버지를 이제부터는 나의 아버지로 아바아버지로 부르게 된 거예요. 로마서8장에. 내 아버지여! 무슨 뜻입니까? “아버지께서 뜻이 있어서 나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가 되는 거예요. 왜 자꾸 복잡하게 이야기합니까? 라고 여러분이 짜증을 내신다면 단독적으로 구원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단독적으로.
내가 도를 닦고 성실하게 산다고 구원이 되는 게 아니에요. 누가 이렇게 접붙임을 해야 돼요. 접붙임을. 로마서11장에 나오는 것처럼. 참감람나무 돌감람나무처럼. 접붙임이 있어야 돼요. 누가 와서 이쪽 노선 말고 내가 알고 있던 노선은 말고, 다른 노선이. 다른 노선이에요. 단독 자가 아니고 다른 노선이 와서 낚아채야 된다니까요. 낚아채야 돼요.
그 유명한 재미있는 영화가 있는데. 퇴역된 특수부대 해병장교가 핵폭탄을 실고 가는 그 범인들의 열차에 뛰어들어서 핵폭탄도 제거하고 범인도 다 빼내는 영화 1,2,3까지 나왔지요. 스티븐 시걸이 했는데. 지금 철도에 기차가 달리고 있는데 여기에 핵폭탄 실은 범인들이 있는 거예요. 위에서 헬리콥터로 해가지고 범인을 처벌하고 빼가는 겁니다. 다른 노선에서 이렇게 덮쳐오는 거예요. 또 다른 노선이 와서 이 노선은 노선대로 그냥 쳐 박도록 그냥 멸망하도록 가버리라는 말이죠. 그 중에서 언더 씨즈의 영화처럼 헬리콥터가 와가지고 해서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거 하기 전에 헬리콥터 타기 전에 이 안에서 막 싸우고 그래요. 자기는 그런 사명이 있는 줄 모르고 조카하고 여행가고 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범인이 이걸 기차를 납치했다고 하고 한바탕 싸우고 창고가 싸우고 화물차에서 싸우고 그러는데 빼내는 거예요. 주님께서 빼내는 겁니다.
그러니까 스가랴에게 누가 덮쳤다? 천사가 왔다는 것은 스가랴의 원래 소속된 노선이 천사를 통해서 모든 앞으로 할 계획들을 미리 앞당겨 제공하는 거예요. 그 제공된 내용이 뭐냐 하면 세상은 망한다. 세상은 망한다, 에요. 환경은 망한다. 이 인간세상은 망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겠다는 약속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봐! 내가 너를 찾아왔다. 스가랴에 받아 적어라. 계시를.”
그러니 이 스가랴가 받은 계시는 뭐냐 빼내주는 절차와 그 방법에 대해서 하나님이 계획한 내용에 대해서 이 스가랴에 표시가 되어있어요. 스가랴 내용대로 누가 그렇게 사시느냐 하면 예수님이 그렇게 사신다 보시면 여러분이 정답은 이미 아신 거예요. 스가랴가 예언대로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는 겁니다.
스가랴를 어떻게 해석할 거냐 하는 것은 예수님이 어떤 활동을 할 것이냐를 보면 돼요. 예수님은 어떤 활동을 하고 천사가 또 어떤 활동을 할 것인가, 제가 아까 잠시 설명하다가 미리 설명을 드렸는데 다시 하면, 접점을 만들고 그 다음에 빠진다. 위로 빠진다.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떠난다 했지요. 접점 만들고 빠져버려요. 누굴 닮았어요? 천사가 이렇게 했지요. 누굴 닮았습니까? 예수님도 접점 만들고 십자가 만들고 하늘 아버지 곁으로 떠나버리죠. “가서 내가 기다릴게. 처소가 마련되게 되면 그 처소에 데려가기 위해서 너를 다시 찾아올게. 데려가마.” 그 처소가 성령이거든요. “성령이 마련되게 되면 내가 다시 올게.” 라고 빼가는 거예요.
여기서 아까 그 나에 주님이 찾아오게 되면 –나가 되지요. 마이너스 나가 된다는 것은 내가 죄인이다. 따라서 죄인의 값은 뭐냐 이 땅에서 죽어야 되겠지요. 먼저 죽는 거예요. 먼저 귀신 되는 거예요. 미리 먼저 죽는 겁니다. 주님을 만났기 때문에 인간의 죽음에 대해서 남은 모르지만 본인은 미리 아는 거예요. 내가 죽는 이유는 나쁜 짓을 해서 죽는 게 아니고 나의 살던 고향이 문제가 있는 거예요. 나의 살던 고향은 문제가 있어~~, 문제가 있는 고향이에요.
그걸 아무도 안 가르쳐줘요. 학교에서도 그걸 가르쳐 준 적이 없어요. 침몰하는 배라는 것을 아무도 가르쳐준 적이 없어요. 예수님이 와서 얘기해 주는 겁니다. 헬리콥터가 와서 빼줄 때에 내가 살던 그 고향에 미련두지 말고 두발 딛고 위로 올라가야 돼요. 헬리콥터에 낚여야 되겠지요. 베드로보고 주님이 하신 말씀이 니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고 했지요. 내가 전에 주일학교 설교할 때 했어요. 사람 낚는 어부가 될 때, 베드로는 어떻게 낚느냐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낚을 때 방법을 사용하신다. 베드로가 낚일 때 베드로가 뭐냐 “제가 죄인 맞습니다.”라고 했지요.
왜 베드로가 그렇게 했느냐 하면, 자기는 미리 고기 잡는 방법을 안다고 했던 거예요. 오른편도 넣어 보고, 왼편도 넣어봤는데 베드로가 오른 편에 딱 던지니까 주님께서 “오른편에 있는 물고기 다 왼편으로” 다 빠져나간 거예요. 없어요. 그물 무게만 덜렁한 거예요. 이번에는 왼쪽으로 던지니까 “왼쪽에 있던, 왼쪽에 있던, 물고기 오른쪽으로 다 빠져!” 못 잡는 거예요. 앞쪽에는 있겠지. 앞쪽에 던지니까 “앞쪽에 있는 물고기, 앞쪽에 있는 물고기 뒤로 빠져!” 밤새도록 했어요. 밤새도록. 밤새도록 내가 살던 고향에서 내가 생존에 생존을 유효하게 했던 그 모든 체험과 경험이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렸어요.
그럴 때 베드로가 뭔가 내가 모르는 세계와 접하고 있지 않느냐는 낌새는 얻었지요. 그런데 주님께서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던지라 했지요. 내가 밤새도록 던졌지만 못 잡았는데 주의 말씀에 순종해서 던지겠습니다. 던지니까 주님께서 “오른 쪽에 있는 물고기, 왼쪽에 있는 물고기 차 빼세요. 왼쪽 있는 물고기 오른쪽으로 전부 집합!” 하니까 고기가 너무 잡혀가지고 배가 침몰할 때, 베드로가 주님하고 동업했습니까? 아니면 죄인이라고 했습니까? 죄인. 죄라는 것은 그 때 사용하는 거예요.
내가 소속되어 있는 세상에서 아무리 몸부림쳐도 내가 죄 안 지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거예요. 인지하는 거. 이 땅에서 내가 철야하고 어떻게 하고 아무리 희생 봉사해도 죄 안 되는 방법은 이 세상이라는 이유 때문에 생기지 않는 겁니다. 오직 처음부터 우리는 죄인이었고, 중간에도 죄인이었고, 끝도 죄인이고, 끝까지 죄인이고. 죄 아닌 방법이 없었는데, 우리는 그동안 선악이라는 그 잣대를 가지고 세상에 통하는 방법으로 하니까 마치 때로는 훌륭하고, 복 받을 짓을 한 것처럼 그렇게 자기를 착각한 거죠. 착각했지요.
사람이 복 받을 짓을 했을 경우에는 갑자기 어디에 미련을 두겠습니까. 와~ 이거 뭐, 내가 인간 되네. 인간답네. 라고 미련 갖겠지요. 화투 치다가 그 노인정에 할머니들 십원뺑이 하자 해가지고 나중에 이십만원 날아간 사람도 있지만. 또 돈 잃으면 나중에 야쿠르트에 농약 넣을 수도 있습니다. 화투 치다가 “에이, 오늘 재수 없다.” 털고 나오는데 마지막 판에서 갑자기 대박나면 다시 주저앉지 않습니까. 이런 일은 우리한테 있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끝까지 죄인 되어야지. 교회 한 30년 다녔다고 갑자기 착한 사람 되고 술 담배 끊었다고 인간되고 이런 거 없어요. 끝까지 우리는 죄인이라는 확인하는 차에 확인하라고 우리는 교회 다니고, 세상 아직까지 안 떠나고 있는 중입니다. 그 방법이 그 주님께서는 그 죄인을 구원하지요. 주님으로 인하여 몰랐던 새로운 감각. -나. 주님보시기에 마이너스 나니까 인간도 아니지요. 인간이라 할 수 없는 죄인에 불과한 것을 주께서는 건지는 식으로 자기 언약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펼치십니다. 새로운 세계를.
아버지와 아들에서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아들은 뭐 없이는 없어요? 아버지 없이는 아들이 없지요. 아버지가 아들 낳으면 아들은 필연적으로 아버지 앞에 좋든 싫던 종속되게 되어있습니다. 묶인다. 묶이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뭐로 봤습니까? 아들로 봤지요. 그런데 이 아들 예수님과 맞출 수 있는, 이 예수님의 아들 됨에 맞출 수 있는 아버지는 이 땅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어머니는 있지만, 아버지는 없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아버지가 어머니보다 더 중요한 거예요. 어머니는 있음이 되니까 기존에 우리가 속해있는 상황과 구별이 안돼요. 엄마 없는 사람이 누가 있어. 다 있지. 그런데 예수님은 성령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아버지가 있어요? 없어요? 아버지가 없어요.
그러면 아들이던, 딸이던 마찬가지에요. 성도는 어머니 소속이 아니고 항상 아버지 소속이거든요. 결국 이 성도라는 말은, 성도라는 신분은 이 세상에 있는 존재가 아니고 없는 존재로서 이 땅에 미리 출현한 거예요. 나타난 거예요. 성도가 없는 존재에요. 성도가. 교인들은 많아도 너무 많아요. 교인들은.
성도라 하는 것은 없는 존재에요. 기적이에요. 이건. 그런데 아들은 뭐를 증거 하기 위해서? 아버지를 증거 하기 위해서 아들이 되었지요. 그렇죠. 없는 아버지 증거 하라고 예수님이 아들 됐다 이 말이죠. 그러면 오늘날 우리가 성도잖아요. 성도는 성령을 받게 되면 아바 아버지라 부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뭡니까? 이 땅에 없는 것을, 없는 것을 인하여, 내가 여기 출생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성도가 되는 겁니다. 이 땅에 없는 것. 이 땅에 뭐가 없어요? 부활이 없지요. 이 땅에서는 영원한 천국도 없고.
그 없다는 것을 없다고 여기는 그것이 “아니야, 있어!” 라고 증거 하라고 우리로 하여금 일찌감치 성령을 우리한테 주신 거예요. 남들은 눈에 보이는 거, 있는 거, 그것을 목표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역사, 철학, 그리고 신학, 과학, 이 세상의 모든 학문들은 눈에 보이는 것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여기서 기대치가 여기서 발생한다는 것이 이건 결정적 엉터리에요. 이 세상에 있는 기대치. 기대치 있는 거예요.
우리 모임에서 모였다 하면 누구나 생각하기를 ‘아이, 숫자 좀 더 모였으면 좋겠다.’ 만약에 그런 생각을 여러분이 안 갖겠지만. 우리 십자가마을에나 우리 이 사람들은 이상한 사람들이여가지고 누구 복음 알면 복음 알지 말라고 아주 닦달 내. 니가 건방지게 복음을 왜 알아. 막 쏘아대면서 내만 알았지 니는 몰라도 돼. 이런 식으로 이상한 단체지만.
여기에 한 10명 됐다 하면 갑자기 하게 되면 좀 시몬케익 좀 준비해가지고 30명 왔으면 좋겠다, 하겠지요. 이게 뭐냐 하면 이미 10명이 눈에 보인다는 뜻이에요. 10명이 눈에 보이는 것보다 20명이 더 낫지 아니 하냐, 이리 되는 거죠. 그게 왜 더 나아야 돼요? 이미 그런 기대와 희망을 계속 갖는다는 것은 아직도 우리가 이 세상에 육을 입고 살고 있다는 배설물이 남아있다는 뜻이에요. 애가 머리를 길었다. 깎았으면 좋겠다. 깎았어. 공부 좀 잘했으면 좋겠다. 공부 잘해. 나중에 의사되면 좋겠다. 의사 됐어. 계속 뭔가 기대, 이 땅을 떠날 마음이 없고 계속 기대치를 부여하고 있다는 것이 뭐냐 하면 미흡하다는 뜻이에요.
이 세상에 기대치를 갖는다는 것은 기대치라는 그 폭이 있잖아요. 지금 기대하는 것과 어떤 도달될 이상적인 모델사이에서 이게 결핍이 생겼다는 뜻입니다. 감사, 기쁨 다 날아가 버리지요. 없지요. 그냥. “주여! 좀 더 힘을 실어주세요. 주님. 기도할 테니까 좀 도와주세요. 제 소망 이루어주시옵소서.” 이러고 있다 말이죠. 이게 뭐냐, 거기서 시간 요소 역사지요. 철학, 신학, 과학, 이 모든 것은 눈에 보이는 어떤 실적과 업적을 내가 눈으로 봤으면 좋겠다고 하는 거예요. 이건 있음에서 있음이죠.
그러나 주님의 성령은 뭡니까? 있음 속에서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있음 있다는 그들이 부끄러워하는 수치스럽게 여기는 바로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 하는 사람이 바로 성도가 되는 겁니다. 너희들은 세상에 보이는 게 전부지만, 주님께서는 나를 점령하사 눈에 보이지 않는 주의 세계. 부활의 세계. 그게 곧 천국이거든요. 그 천국을 증거 하는 증인으로 삼기 위해서 천사가 온 겁니다.
다음 시간에는 이 천사가 적색, 흰색, 그리고 자색, 이런 색깔로 이렇게 오게 되고, 그 다음부터는 뒤에 있는 또 다른 계시까지 이야기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의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를 돌아보게 하옵소서. 어떤 논리가 있어서 십자가 믿은 것도 아니고 납득이 되어서 믿은 것이 아니라 주의 성령에 의해서 십자가로 다 완성되었음을 더 이상 내 인생에 책임질 필요가 없음을 깨닫게 되었사오니 세상에 없는 것을 증거 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