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2장 9절 (죄의 증상) 200505b-이근호 목사
강남-누가복음 2장 9절 (죄의 증상) 200505b-이근호 목사
첫째 시간 마지막에 제가 이런 말씀 드렸지요? ‘심판을 즐겨라’. 심판을 견디라가 아닙니다. 심판을 견디게 되게 되면 아직도 내가 스스로 자기를 자평하려는 그것을 유지하려고 애를 쓰게 되요. 그러나 심판은 아빠가 패겠다는데 견디게 되면 그 관계가 남남이 되어버려요 정말.
정말 남남이 되어 버리니까 심판의 이유가 있을 거에요. 그 이유를 알면 돼요 때릴 때. 심판을 즐기면 되는데 그 심판을 즐기는 방식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은 11절에 나옵니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오늘 강의 제목이 다윗의 동네라고 정해봤습니다. ‘다윗의 동네’. 오늘 제목은 다윗의 동네에요. 다윗의 동네니까 여기는 일단은 여기는 뭐냐 하면 베들레헴이겠죠. 베들레헴.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남서쪽으로 6km지점에 있어요. 여러분 가시면 아주 굉장히 검문소가 많아요. 거기에 장벽이 쳐져있고 거기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지금 살고 있고 자치구가 되어 있어요. 자치구가. 물론 우리 외국사람들은 왔다갔다 할 수 있어요.
그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이 태어났고 예수님이 태어났던 거기에 거대한 성당이 지어져 있습니다. 아기 예수가 태어난 그곳은 바위로 되어 있고. 다윗의 동네에 베들레헴에 태어났을 때에 이게 뭐냐 하면은 이게 주의 동네에요. 주님의 country다. 주님의 country를 이 지상에다가 임시적으로 만든 겁니다. 한시적으로. 왜? 이게 사건이니까. 존재가 아니고 사건이니까. 있다가 없어지니까. 임시적으로 빤짝할 때 번개칠 때 거기에 주께서 임시적으로 만드신 거에요.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신축성 있는 시공간이다. 신축성이란 말은 뭐냐 하면은 늘어났다가 줄어들었다가 할 수 있는 공간. 시공간이 시간과 공간이 신축성 있다는 말은 이거는 우리한테 뭐를 이렇게 혼란시키느냐 하면은 시계 있잖아요. 시계. 날짜 있잖아요. 이게 변동이 있을 수 있다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내가 있는 이 땅이 땅이 아닐 수가 있고 꺼질 수가 있고 없어질 수가 있다라는 것을 미리 예상하라는 거에요. 이게 신축성이에요. 내 땅이 발판인데 발판이 졸지에 날라가 버릴 수가 있다 말입니다. 이 신축성 있는 시공간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시공간은 이거는 다른 세계를 마련하게 되면 여기서 이 시공간으로 말미암아 안과 밖이 이렇게 구분됩니다. 안과 밖.
다윗의 동네라는 것은 예수님의 동네를 보여주는 징후, 사건이고 그 다음부터는 예수 안에 있는 사람과 예수 바깥에 있는 사람의 그 경계선을 천사가 내린 사건에 준해서 내가 정하겠다. 사건에 준해서 거기에 준해서 정하겠다는 거에요.
여러분들이 예배당 크게 지어놓고 어린애들이 그 강대상 올라가게 되면 거기 청소하는 사찰 집사가 막 나무라지요. 이거는 거룩한 공간이기 때문에 네가 가서는 안된다. 구약 성경에 보게 되면 제사장들이 드나드는 공간 따로 있고요 다른 사람들은 못 들어가는 공간이 따로 있어요. 그걸 가지고 성과 속. 성, 속을 구분하는 겁니다. 거룩한 공간과 속된 공간을 구분 짓는 겁니다.
왜 속된 공간을 구약에 있어서 구분 짓느냐 하면은 한마디로 말해서 더럽기 때문에 그래요. 속된게 더럽기 때문에. 더럽다. 더럽다, 지저분하다. 이걸 성경의 초반에서 이걸 부정 탄다 또는 부정스럽다. 깨끗지 못하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이 그래서 정말 이 성경이 어려워요. 얼마나 어려운지 제가 한번 예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창세기 7장에 보게 되면 창세기 7장에 거기 노아방주 이야기하면서 방주에 7장 2절에 보게 되면 얼마나 어려운지 제가 질문을 던져 볼게요. 제가 일단 읽고 질문해볼게요.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데려오며” 그렇게 되어 있지요?
그럼 저의 질문은 이겁니다. 부정한게 뭣 때문에 부정하다는 겁니까? 그 부정하다는 기준이 뭡니까? 제가 여러분께 질문 던졌습니다. 답변해보세요. 도대체 부정하다는 것이 무엇에 근거해서 부정하다는 거에요? 여러분 답변 못하지요? 답변 못하지요? 같은 질문입니다. 무엇에 근거해서 정결하냐? 답변 못하지요? 답변할 수가 없어요.
왜 답변을 못하느냐 하면 신축성 있는 시공간 때문에 그래요. 인간의 세계는 해는 해대로 달은 달대로 늘 일상적으로 해 떴다 내일도 뜰 것이다 모레도 뜰 것이다. 인간의 시공간은 이거는 뉴턴적 시공간이라고 해가지고 이미 고정적 확실히 정해진 거에요. 거기에 맞추어서 시공간이 맞추어서 태양은 늘 태양이고 달은 달이고 여기에 맞추어서 모든 생활을 안전성 있게 우리는 계획을 짤 수가 있고 우리는 살 수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시공간 뒤틀려버리면 무너져버리면 소용없지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없는 상태에서는 우리가 얼마든지 해외여행 가는 스케줄을 짤 수가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연휴 때 해외여행 일본여행가고 미국 여행가고 어디 다른데 여행가는 스케줄을 누가 망쳤습니까? 문재인? 아니지요. 김정은? 누가 망쳤어요? 신종 코로나가 망쳤어요. 이건 예상 못한 거잖아요.
우리가 요청하지 않은 타인이잖아요. 내가 요청하지 않은 타인. 내 인생을 내 인생에 허락 없이 내 인생에 침노했잖아요. 우리는 내것 안에는 내것을 기준으로 해서 나와 함께 있는 것 안, 그 바깥에 있는 것을 타인. 내가 요청 안 한 타인. 이렇게 규정하는데 그 기준이 신축성 있게 무너진 겁니다.
천사가 없는 세계가 우리 세계에요. 상식적이야 이거는. 너무나 상식적이고 초등학교 때 천사 안 배웁니다. 천사 배웁니까? 천사 몇학년 때 나오지요? 교과서에. 천사 나오면 악마 나와야돼요. 천사, 악마 몇학년 어느 교과서에 나옵니까? 안 나오잖아요. 천사 없는게 당연한 거에요. 천사라 하는 것은 과학적이지 않을 세계관.
그러니까 이걸 미신, 미신이라 미신. 천사 있는 것은 미신이고 천사 없이도 돌아가는 세상을 설명할 수 있는 과학적이라면 천사를 대체해야 되는 다른 개념으로 대체되는 거죠. 그게 진리고 그게 정답이고 과학이 진리가 되는 거에요. 모든 것은 과학의 힘으로 인간의 지혜로써 미래를 개척하고 발달해나가고 고난 역경이 있으면 그걸 극복하고 넘어서는 것이 인간이 사는 이유고 존재의 가치가 거기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갑자기 천사가 쳐들어와버렸으니까 우리는 생각하기를 아 시공간이 있는데 천사가 여기 들어왔겠지. 아니거든요. 그거 아니거든요. 천사 고유의 자기 세계의 시공간을 우리에게 강요하는 바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시공간이라고 했으니까 시공간은 뭐냐? 시간+공간이에요.
시공간 공간에서 천사의 시간은 시간이 흐르지 않아요. 이거 아주 환장할 일이에요. 시간이 흐르지 않아요.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니까 딱 기분 좋은 말이 뭐냐? 늙지 않는다는 뜻이겠지요. 늙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제가 또 질문해보겠어요. 아담과 하와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 몇 살 얼굴이겠어요? 아담과 하와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 몇 살 얼굴입니까? 2살? 3살? 닭이 먼저에요? 달걀이 먼저에요? 그 질문하고 똑같은 질문이에요.
시공간이 인간의 시공간에는 닭이 달걀이 있어야 닭이 되고 또 달걀이 생긴다는 서로 물리고 물려서 짝이 없으면 관련성이 없으면 서로의 존재가 깨지는 그런 관계가 되는 거에요. 서로 질문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질문이 되고 답이 되는 그런 물려있는 상태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들 때는 그러한 모순점이라는 것이 모순점이 없어요. 닭이 뭐냐? 달걀이 뭐냐? 모순점이 있다는 것은 인간은 피조된 상태라는 뜻이에요. 내가 인간이 만들 때 모순되게 만들 일은 없을 거 아닙니까. 만들어졌기 때문에 모순점이 발견되는 겁니다.
여러분 죽으면 어디 갑니까? 이 질문하고 똑같은 거에요. 죽으면 어디 갑니까? 선악과 왜 심어놨어요? 그 해로운 선악과를. 이거하고 똑같은 질문이에요. 질문을 하는 내뱉는 질문자가 질문을 한다는 것은 이미 질문 속에 해결될 수 없는 미지의 것이 모순된 것이 불가능한 답변이 담긴 채 질문이 나오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질문하는 본인도 해답이라고 얻어봤자 그 해답이 내가 원하는 해답이기 때문에 그건 해답일 수가 없지요. 내 자체가 문제가 있는데 문제 있는 내가 납득이 된다하면 그게 문제가 있는거죠. 납득이 안되야 문제가 있는거 아니겠습니까. 논리적으로.
따라서 여기에 천사가 신축성 있게 온다는 말은 지붕이 그냥 무너진 거에요. 그 순간. 지붕이 무너지게 되면 목자에 있어서의 인생은 내가 자본주의 내가 돈 벌고 살겠다라는 것이 내 인생의 의미고 목적이 안 되고 이게 무너진거 깔려버린거에요. 그 시공간에.
그 시공간에 12절에 보면 뭐냐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너희에게 뭐가 된다? “표적”, 영어로 sign. sign이 된다. 따라서 목자의 존재하는 이유는 구주가 태어난 것과 관련성이 있다는 겁니다. 내가 이 땅에 왜 태어났을까? 돈 벌고 밥 먹고 살기 위해서. 그거는 우리의 시공간이고.
천사가 뭉개버린 시공간에서는 뭐가 생겼느냐 하면은 인간이 왜 살아야 하는가? 아기 예수 그리스도가 천지를 창조한 그 세계 중심으로 천국이 짜여진다는 사실을 징조로서 싸인으로서 알리기 위해서 사는 거에요. 목자가. 그 알알이 된 거에요. 우연한. 사건을 통해서. 내 시공간을 다른 시공간이 밀고 들어와버린 거에요. 신축성있는 밀고 들어와버린 거에요.
그럼 그 세계에 들어갈 때 말로 하지. 점잖게. “목자야 이리 오너라. 나 천사거든.” 애들 동화책에 보면 애들이 천사 보면 놀랍니까? 안 놀랍니까? 안 놀래요. 애들에게 천사라고 하는 것은 텔레토비, 보라돌이 정도에요. 뽀~하는 것도 있고 세 명 있지요? 보라돌이 정도밖에 안돼요. 같은 친구 같은 사이에요. 사자나 양들도 돼지도 친구가 되는 거에요. 애들 세계에서는.
애들 세계에서는 뭐를 모르기 때문에 그러느냐 하면은 구주께서 이 땅에 오셨잖아요. 구주께서 이 땅에 오실 때에 구주 이 땅에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안과 밖 사이에서 그 경계선에서 뭐가 있느냐 하면 죽음이 있다는 사실을 애들이 몰라서 그래요. 우리도 모르고.
우리 세계에서 우리 시공간에서 주님 시공간 가려면 필히 죽음을 감당해야 돼요. 그건 감당할 수 없어요. 죽어야 돼요. 죽게 되면 뭐도 죽느냐 하면은 ‘나 죽어서 천국가야지’라는 소망도 같이 없어져야 돼요. 사라져야 돼요. 왜? 우리가 상상한 거니까. 내 중심이니까. 내 중심이 되게 되면 나 중심의 안과 밖이 유지되기 때문에 그거는 기존의 시공간이 아닙니다.
예수님 중심의 시공간 되려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아버지한테 갈 때에 어떤 절차와 과정을 밟고서 갔느냐를 주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은 어떤 절차를 밟아서 아버지께로 갔습니까? 일단 십자가 죽으시고 그 다음에 사흘만에 부활했잖아요. 이거 상상한 겁니까? 아니면 팩트 입니까? 이거는 팩트잖아요. 신은 상상한 거고 하나님 천사 다 상상하지만 남겨진 증상은 팩트에요. 팩트의 증상이 남겨요.
그게 뭐냐 하면은 죽었다 사흘만에 부활한다. 그래서 사도들은 사도행전에서 이걸 잘한거에요. 예수님 어떤 분이 죽었는데 사흘만에 살아났습니다. 그런 위인 있으면 다른 사람 있으면 오라해요. 그런 사람 없어요. 죽을뻔한 사람 있지만 죽었다가 완전히 죽었다가 다시 사흘만에 살아날 사람 그 사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왜 그렇게 하는가? 시공간이 다르기 때문에. 이쪽 시공간에서 저쪽 시공간으로 가려면 필히 죽어야 됩니다. 필히 죽을 때 늙어 죽으면 안 되느냐? 안됩니다. 어떻게 죽어야 되느냐? 심판 받아야 돼요. 그래서 심판을 즐기라는 거에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버지께 받은 심판이기 때문에.
한번 정리해보겠습니다. 다윗의 동네라고 하는 것은 주님의 동네를 미리 보여주는 한 싸인인데 하나의 사건이 일어난 겁니다. 어떤 사건? 목자나 어떤 평범한 인간이 평소에 자기가 돈 벌고 살고 자기 가족끼리 사는 것이 이게 인간의 할 도리고 이게 전부라고 생각했던 목자에게 하나님께서 어떤 네가 존재한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네가 싸인으로서 존재해야 된다.
네가 일생이 하나의 싸인을 보여주는 일생이여야 한다는 식으로 그 싸인의 본래의 내용은 빨리 달려가서 베들레헴에 있는 강보에 쌓인 구유에 뉘인 아기를 봐라. 그 아기하고 너하고 너의 미래하고 관련성 있다는 말입니다. 이 관련성이 있다는 거에요.
천사가 와서 이렇게 안내를 해주는 이유는 인간의 힘으로 이런 내용을 알 도리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천사가 사는 동네는 주님의 동네거든요. 천사가 와서 목자한테 광채를 비추니까 목자는 놀랬고 무서워했고 내가 살던 나의 나와바리, 나의 영역, 나의 아우라에서는 있을 수 없는 어떤 사건이 터져버렸지요.
그 사건을 통해서 자기 자신에게 새로운 소속이 새로운 신분이 주어졌습니다. 그 신분은 뭐냐 하면은 바로 아기 예수와 관계가 끊어졌는데 아기 예수의 관계를 천사가 와서 이어주는 거에요. 이어줄 때 그냥 이어주는 것이 아니고 이쪽 세계, 인간의 세계에서 저쪽 세계에 가려면 그걸 간다는 길이 있는데 그 길이 어떤 길이냐? 예수님이 몸소 보여준 길인데 죽어야 사는 거에요. 죽어야 사는거.
그럼 우리 쪽에서 준비할 것은 번개탄이나 이런거 다량의 수면제, 밧줄 뭐 그런거 준비하면 천국 갑니까? 내가 나를 죽여버리면 천국 갈 수 있겠어요? 내가 나를 심판해버리면 안돼요. 내가 있는데 내가 나를 심판한다, 심판한다 거창하게 이야기했지만 제가 첫째시간에 이걸 뭐라고 했느냐 하면 이렇게 아주 순하게 이야기했어요. ‘자평한다’.
자기가 자기를 스스로 평한다. 나는 지금 괜찮은 인간인가? 이 정도하면 얼추 욕 안 얻어먹지. 남한테 뭐 칭찬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남한테 환영 정도는 받지 뭐 이런 식으로 자평할 수 있는 거에요. 자평한다는 것은 심판한다는 뜻인데 인간이 자기를 심판할 때 뭐로 심판하느냐 하면 내가 알고 있는 선과 악으로 심판해요. 선과 악으로.
이게 창세기 3장에 보면 이게 뭐냐 하면 이게 악마와 한패 먹었다하는 증거입니다. 인간은 선과 악으로 자기를 평가하고 측정한다면 그것 자체가 이거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인간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우리 보고 하는 이야기가 너는 창조자가 아니기 때문에 너는 너에 대해서 창조한 적이 없기 때문에 창조 평가를 해도 내가 평가하지 네가 너 자신을 절대로 평가하지 말라는 뜻으로 너를 만들어놨다 이 뜻이에요. 만들어놓은 거에요.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따먹었다 이 말이죠. 선악을 따먹으면서 악마가 이야기한 것은 뭐냐 하면 이제 독자적으로 자율적으로 내가 선이 뭐고 악이 뭐냐를 내가 알아서 그 선과 악의 기준에 의해서 나를 악한 쪽이 아니라 선한 쪽으로 나를 만들어내게 되면 하나님께서 나를 선한 인간이라고 선한 천국에 넣어줄 것입니다라는 아이디어를 악마가 우리한테 계속해서 세뇌해가지고 심어준 거에요. 끊임없이 교회 목사 설교를 통해서.
착해야 영광 돌리고 착해야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는 자가 되고 착해야 거룩한 자가 되고 거룩한 자가 되야 거룩한 자만 모이는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우리 자신을 윽박지르는 겁니다. 그게 악마 짓이라는 사실을 모르죠. 왜? 인간에게는 두 자. 양심이라는게 있잖아요. ‘양심’. 양심 없다 짐승, 양심 있다 인간. 이렇게 되거든요. 도덕적, 윤리적으로.
세상에 양심 있는 인간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해. 어떻게 양심 갖고 N 제곱의 방, N 세제곱의 방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느냐. 그 얼굴 까! 이렇게 하지요. 얼굴 까봐야 그 얼굴이 아담얼굴하고 내 얼굴하고 똑같은건데 뭐. 얼굴 까라! 저 낯짝 보자 부끄러운 줄 모르는 인간들 보자. 이렇게 하는데 어떤 분이 제 동영상에 평을 댓글을 이렇게 달아놨어요. 유투브에. 김정은이 왜 죽어야 돼 내가 죽어야지. 댓글 다신 분이 있어요. 그 말이 맞아요.
우리가 선과 악을 논할 때에 도대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본인이 스스로 자기를 속이고 있어요. 나를 이쁘다하면 선이고요 나를 미워하면 악이에요. 이게 내 중심이라니까요. 내 중심. 남들은 그렇고. 본인 개인적으로 선은 뭐냐 하면 유쾌한게 선이고 악은 뭐냐 하면 불쾌한게 악이에요. 불쾌한게 악이에요.
온도15도, 풍속0, 습도35 이거 선입니다. 그런데 아마존 유역에는 습도90%, 온고 47도 아마존 유역에서 백날 있어도 그거는 짜증나는 악이 되는 거에요. 몸의 컨디션. 아무리 착해도 이빨 아프면 그거는 악이에요.
나를 괴롭게 하면 무조건 악이고 나를 좋게 하면 무조건 선인데 그 좋다 나쁘다의 그 양은 과거가 본인이 과거 동안에 내가 어떤 식으로 나 다움을 유지했느냐의 레벨에 따라서 선과 악의 천태만상, 노래가 또 나와요. 천태만상 모든 것이 사람마다 개성이 있어가지고 무엇이 선인지 악인지 가치가 다 달라요. 다 달라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뭐 조그만 차타고 가게 되면 차 없는데서 조그만 차 갖고 있으면 아후 차 너무 좋아 너무 좋아 이러고 있는데 이미 어릴 때부터 고급차 타던 그 재벌집 애가 작은 차 타게 되면 나보고 죽으란 말이야 이러고 있다고요. 자기가 불쾌하다 이 말입니다. 물론 차도 작은 차도 작은 차 나름이지. 미니같은 건 또 괜찮아요. 나 조그만 차 타. 뭐타? 미니. 상당히 잘 사는 사람이죠.
인간이 자아를 구성하는데 있어서 그거는 과거가 결정하는 겁니다. 과거가 어떤 환경 속에서 자라왔느냐에서 결정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인간은 환경을 못 벗어난다. 다른 말로 인간은 자기가 살아온 시공간을 못 벗어난다. 재벌 3세보고 목자 하라고 하면 하겠어요? 내가 죽으면 죽었지 이런 짓 못한다. 밤에 잠 안자고 무슨 짓이야? 이렇게 하겠지요. 나보고 죽으란 말인가 이렇게 하겠지요.
그러나 목자는 하잖아요. 왜? 자기 레벨에서는 이것도 자기가 선이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께서 하는 말이 왜 인간에게 왜 아무것도 안 받느냐하는 이유는 인간이 나빠서가 아니라 인간이 아담이 형성된 그 인간의 세계 자체가 부정, 더러워서 그래요. 인간끼리는 안 더러워요. 인간끼리는 착한 사람은 깨끗하고 나쁜 사람은 더럽고 그래요.
대구에 있는 경북여고가 있는데 경북여고의 교훈이 뭔지 알아요? 진선미에요. 진선미. 경북여교 출신들이 한국의 정권을 꽉 잡았어요. 이순자 여사부터 해가지고. 서울, 강남에 좀 산다는 아줌마들은 60대 이상의 아줌마들은 전부다 경북여고 출신이라고 보면 되요. 경기여고 경북여고 둘 중에 하나로 보면 돼요.
옛날에는요 남자 고등학교 경기고등학교, 서울고등학교 그 다음에 경북고등학교였어요. 경북고등학교 그 다음에 부산고등학교 이랬지. 어디 다른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는 취급도 안했다. 세광고등학교 이런 건 취급도 안했다.
옛날에 우리는 클 때 서울에 있는 유명한 대학은 서울대, 연고대하고 한양공대 외에는 대학 취급도 안했습니다. 성균관대 우끼지마라. 뭐 동국대 동국 따라지. 동국대 나온 사람한테 미안합니다만. 전부 다 서울 다 가버리니까는 다 일류가 다 되고 말았어요. 왜냐하면 이거는 사람은 환경이라는 것을 벗어날 수가 없어요.
우리 형님 의사 우리 형수님도 의사 다 의사인데 나는 노래 부른다. 이건 망한 거에요. 이 집안에 이런 농땡이가 나오다니. 그러나 노래하는 가수 되기 위해서 수만명이 지금 하고 있는데 뜨는 것도 얼마나 힘든데 그거는 어느 정도 갖춘 사람한테는 그거는 진짜 농땡이라고 보는 겁니다.
자기의 주어진 환경에 의해서 자기가 조작된 거에요. 인간은 늘 조작되게 살아가는 거에요. 조작되길 원하고 있고 또. 서로 위장하고 있고. 따라서 하나님의 새로운 시공간, 다윗의 동네 주의 동네는 인간의 선악을 일체 고려하지 않습니다. 묻지 않습니다.
다시 쉽게 말해서 목자야 너 양치면서 나쁜 생각했지? 이런거 묻지 않아요. 목자야 양을 분명히 45마리 맡겨놨는데 너 한 마리 잡아먹고 44마리 너 주인한테 삥쳤지? 이런거 안 물어요. 그냥 묻지도 따지지도 않아요. 그냥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찾아오는 거에요. 그게 심판이고 곧 그게 강요된 사랑입니다. 심판은 강요된 사랑이에요.
본인이 요구한 사랑이 아니고 찾아온 사랑이 심판입니다. 나 너 죽일란다. 너 죽는다고 너무 섭하게 생각하지 말아라. 너의 구세주도 이 동네에서 죽었어. 너와 같이 죽었어. 너를 구원하는 구세주가 잔소리해서 구원하는게 아니야. 네가 살라고 살라고 애쓰는 너를 위해서 철딱서니 없는 너를 위해서 내가 대신 죽음으로써 그 피 값으로 대신 치뤘다는 그 피 값, 현찰이죠.
그 피 값으로서 우리를 죄를 다 치뤘다는 것으로 간주해서 우리를 건져주시는 거에요. 그걸 대구강의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갉아먹는다고 했지요. 주께서 우리의 죄를 갉아 먹어서 자기 것으로 만들고 자기 안에서는 그 갉아먹은 죄를 의로 바꾸어 놓고 그 의로 바뀜으로 말미암아 그 갉아먹힌 나는 그 의로 바뀐 그 일부가 있다는 이유 때문에 나는 주 안에서 의인된다는 그러한 절차를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그런데 여기서 이렇게 죽음이라는 말은 일체 안 받는다는 좋은 의미로 받아들이세요. 너를 죽인다는 말은 일체 너의 것은 네가 봉사, 충성, 헌금, 십일조 일체 안 받아요. 찬미고 뭐고 안 받습니다. 그거는 그냥 맹숭맹숭 미안해가지고 해보는 거고 그런거 없이 구원돼요. 그런거 없이. 착하냐 교도소 몇 번 갔다 왔느냐 N번방 N의 제곱 세제곱 그런거 묻지 않고 그냥 찾아와서 구원하는 거에요. 찾아와서.
왜냐하면 하나의 물방울, 기침방울이니까. 기침방울에게 무슨 의미를 주겠어요. 기침 본인이 주님이 있는데. 주님이 기침하고 주님께 튀어나오는 하나의 싸인이거든요. 표적이 된단 말이죠. 표적 붙들고 목 조르고 똑바로 하란 말이야. 이렇게는 없단 말입니다. 자기 쪽에서 내놨으니까. 이게 바로 그렇게 될 때 우리가 그 심판을 즐기는 거에요.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내가 아무것도 아님을 즐기는 거에요. 나를 기대 거는 사람, 나에게 뭔가 은근히 희망 거는 사람이 있는걸 아는데 적어도 이 정도라면 이렇게 해야지 이렇게 바르게 살아야지 기대하는거 아는데 그거 무시하고요. 그거 개무시하고 우리는 내가 아무것도 아님을 즐겨야 돼요. 그게 바로 성경에 있는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과 형제우애 같은게 바로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에요.
지난 제 낮 설교의 본문이 뭐였습니까? 서로 성도가 서로 한마음 된다고 했지요. 한마음이 무슨 마음이었어요? 한마음이 나는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사람이다로 한마음 또는 성도가 서로 만나면 나를 제발 되도 않는 영어 썼지요. 플리즈. 제발 나를 죽여주옵소서.
이 본문 할 때 내가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십자가 마을이나 성도 만날 때 죽이라고 온 말에 대해서 반겨야 돼요. 나를 제발 나한테 좋은 조언을 해주시옵소서. 나가 죽어 인간아. 이것보다 더 좋은 조언이 없어요. 왜? 그걸 즐기자 이 말이죠.
내 자체로서 우리는 자꾸 스스로 잘난 사람으로 포장을 하니까 내가 원치 않는 타인이 와가지고 나를 밟아줘야지요. 상당히 메조키스트적인 면이 있습니다만은 밟아줘야지요. 인간도 아닌데 자꾸 인간 행세하려고 하니까. 그런데 이러한 기쁜 소식을 이 세상에 아까 예수님이 죽어야 떠난다 했지요.
그러면 여러분한테 질문해볼까요? 예수님께서 왜 곱게 떠나지 않고 왜 죽어야 떠나지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으면 아기 예수 태어나서 나중에 어른 되어서 십자가 지시고 가실 때 왜 곱게 안가시고 왜 처참하게 사람들에게 못에 찔리고 이렇게 처참하게 죽어야 될 이유가 뭡니까? 그 이유가 뭐지요?
아까 이 세상이 전체가 뭐라고 했습니까? 아까 더럽다 부정탄다 했지요? 부정이라고 했지요. 부정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인간들이 이 세상을 뭐냐 하면은 하나의 보험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보험의 특징은 뭐냐 하면은 동조자 모집이에요.
보험과 복음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은 동조자는 내가 의지할만한 사람들을 계속해서 모집하는 거에요. 동조자. 오늘 보람상조 안 오셨잖아요. 이게 보험이거든요. 보험이라고 하는 것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이면 얼추 그만큼 사는데 유리하고 안심이 된다는 겁니다. 안심이 된다는 거에요.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복음 들으면 그래 뭐 내가 이목사 말대로 막 살고 죄 막 짓고 죄 짓는 즐거움으로 산다는 것을 믿겠습니까? 이런 소리하니까 나도 이제부터 나도 실컷 죄나 짓자. 그래도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있으니까 나는 마음 놓고 지금 오늘 죽어도 천당이다.
이렇게 할 때 이게 가만히 들어보면 뉘앙스가 꼭 보험 들어놓은 기분. 복음이 아니고 뭔가 든든한 보험 들어놓은 기분들지요. 또 신천지처럼. 이게 뭐냐 하면은 내가 나를 아끼고 내가 나에게 보호하되 뭐하느냐? 은신처를 만드는 거에요. 은신처.
이번 신종코로나 난 뒤에 미국에서 감당한 부동산이 뭐냐 하면은 지하벙커였어요. 지하벙커. 요한계시록에 마지막 때를 대비해가지고 지하벙커에 수십만 달러를 주고 사가지고 3년 동안 버틸 수 있는 생수부터 심지어 기관총까지 준비해놨어요.
기관총을 왜 준비하느냐 하면은 다른 벙커에서 양식 떨어졌다고 오면 쏴죽이려고 기관총까지 다 마련해가지고 그 안에 모든 샤워시설부터 수영장까지 다 마련 그런 시설을 마련한 이유가 뭐냐 하면은 은신처를 마련하는 거에요.
인간은 은신처라고 하는 것은 결핍을 의미하고 결핍은 욕망에 충족되지 못한다는 뜻이거든요. 뭔가 무섭다는 거에요. 무서우면 돈 있는 사람들이 그 무서움을 대비하기 위해서 은신처를 실제로 마련하고 실제로 혼자 돈 안 되면 여럿이 부족, 여럿이 투자, 돈 모아가지고 그런 벙커를 만드는 그것도 안산홍 집단에서 하고 있어요. 지금 신천지는 이것 때문에 못하고 있는데 앞으로 신천지도 할 거에요.
우리끼리 괌에 터 사가지고 대한민국 6.25 전쟁나면 못 사니까 빨리 비행기타고 배타고 물 건너 배타고 물 건너 비행기타고 와가지고 괌에 와가지고 자기들끼리 이상적 공동체 건설합시다하는 것. 그런 아이디어들이 사람을 어떻게? 현혹케하는 거에요. 이게 하나의 보험이고 이걸 동조자 모집하는 겁니다. 교회가 크게 교회 크게 하고 싶다. 결국 이런거거든요.
이론적으로 논리적으로 그냥 추상적으로 그런거 하지 말고 실질적으로 내 도피성 돈 내라 이 돈이 내 몸을 마지막 때에 주님 재림할 때 환란 때 버틸 수 있는 손에 쥘 수 있는 부동산 이렇게 해준다면 그 교회 다닐께요라고 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교회에서 교육관에다가 심지어 학원까지 만들고 모든 구비시설 해가지고 마지막 때 대비해가지고 우리끼리는 살아야 되지 않겠느냐하고 자기가 자기한테 처방을 내리는 겁니다.
그런 방식. 은신처 마련. 이것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이거 이야기하면 안 되는데 누구보고 이야기하는거 같아서 미안한데 자신을 노출할 자신이 없다. 자신을 노출할 자신이 없어요. 은신처에 계속 숨어 있으니까. 저 사람이 나에게 도움될까? 도움 안될까? 이익이 될까? 이익이 안될까? 그거 계산해가지고 지금에 있는 시공간에서 유지하면서 노출 안되고 숨어 자꾸 기어들어갈려고 하는 거에요. 우리 끼리.
이 고산 바닥에 우리끼리 아는 사람끼리 유력한 여자들 모여서 여우회인가 만들었지요? 부부의 세계라는 드라마 보면 나와요. 드라마 안본 사람은 이야기할 것도 없고. 고산 바닥에 김희애 넣어 주냐 안 넣어주냐 하면서 사격하면서 하잖아요. 자기들끼리 자기 레벨 맞는 사람끼리 부족, 부족하면 서로 상부상조죠. 그렇게 해서 하는 그걸 가지고 교회 다니는 것도 그렇고 뭔가 자기를 보호하려는 시도 그것은 바로 보험이지 복음이 아닙니다.
이거는 인간이 타고난 거에요. 내가 나 보호하는 것, 나 방어하는 것 이거는 타고난 것이기 때문에 이거는 못 고칩니다. 아까 선과 악의 선이 뭐라고 합니까? 선은 자기를 좋게하는 거죠. 자기 보호하는게 선이에요. 종교 이런거 묻지 않아요.
무조건 나한테 위로하고 잘 대해주고 나를 격려하고 나의 말 친구 되어주면 무조건 선이고 아무리 복음 알아도 나한테 시비걸면 악이 되고 이게 인간의 선악 자기 중심의 선악이 있기 때문에 결국은 아무리 십자가 복음 어떻다 해도 나 좋은 쪽으로 그것을 일방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할 뿐이다 이 말이죠.
그러면 보험의 반대말이 뭐냐 하면은 이게 뭐냐 하면은 복음이에요. 보험은 은신처, 숨지요. 복음은 반대로 숨는 것의 반대말은 뭐가 되겠습니까? 노출이죠. 노출. 드러내는 겁니다. 노출할 자신 없지요. 숨어있는데. 복음은 노출하는 거에요.
뭐냐 하면 아쉬울 게 없는 사람이 이기는 거에요. 아쉬울 게 없는 사람이 이기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하고 다른 사람하고 이렇게 막 말싸움하고 할 때 결국은 큰소리하는 사람이 이긴다하지만 결국 가만 따져보면 누가 이기느냐 하면 아쉬울 게 없는 사람이 이기는 거고 그걸 가지고 어른이라고 해요 어른.
나이와 관계없이 어른이에요. 이태가 있어도 이태가 어른일 수 있어요. 아쉬울게 없는게 어른입니다. 결핍이 있으면 아무리 어른이라도 아이에요. 공포에 휩싸입니다. 나이가 서른 중반쯤 37살쯤 되었으면 그냥 점잖게 양복입고 서른 몇 살 해야 될 걸 배는 자기 할아버지처럼 배는 이만큼 키우고 머리는 이상한 듣도 보도 못한 스타일로 해가지고 안경 끼고 뒤뚱뒤뚱 이렇게 걷고 왜 그렇게 해야 됩니까? 이게 무섭기 때문에. 결핍이 너무 많아서 그래요.
두렵기 때문에 세상이. 언제 옆에서 나타나서 총 쏠지 모르고 겁이 나서 그런 짓하고 있는 거에요. 겁이 나서. 아쉬운게 없는 사람이 이기는 거고 그 사람이 어른이에요. 뭐 아쉬운거 없지요? 애 셋이나 있으니 뭐 아쉬울게 있습니까.
그러니까 복음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은 이 뒤틀린 시공간 속에서 하나님에 의해서 주님 안에 있는 사람은 이 더러운 구정물 세계 속에서 빠져나왔기 때문에 그 자체가 어떤 행동을 하든 거룩한 사람이 돼요. 이 거룩함은 거룩함을 노출시키는 겁니다. 이 세상에.
그래서 성도를 빨리 안 죽게하는 거에요. 이 땅에 어떤 것에 대해서 아쉬운 것이 없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은 본인이 본인을 지켜야 돼요. 아무도 나를 대신할 수가 없습니다. 누구도 나 대신 머리 감겨줄 수 없고요 누가 나 대신 이빨 아플 수도 없고 누가 나 대신 암에 걸릴 수도 없어요.
암에 걸려도 내가 걸리고 머리 깎아도 내가 깎아야 돼요. 그 누구도 나를 대신할 수가 없습니다. 이게 실존주의라는 거에요. 샤르트르의 실존주의가 이겁니다. 옛날에 샤르트르가 오기 전에 샤르트르는 프랑스 철학자 오기 전에는 존재라고 해가지고 같은 인간이니까 서로 사랑하자.
존재 위주로 철학을 했다면 샤르트르는 자본주의를 조사하면서 인간은 더불어 있어도 그건 위선과 위선의 모임이지 실제로는 인간은 궁극적으로 자기가 최고의 의미를 둔다. 인간은 자기밖에 모른다 이걸 실존주의. 내가 여기 있다는 것.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고 내가 이 상황 속에서 나만 여기에 진짜 있다는 의미를 나에게만 부여할 수 있지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이나 가족한테도 내가 부여할 필요가 없다는 거에요.
가족은 왜 있느냐? 가족을 위해서? 아니. 나를 위해서 가족이 있다. 실존입니다. 그게 왜 샤르트르가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샤르트르만 그런 생각 갖고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인간들이 바로 그런 시공간 속에 정신 속에 우리가 놓여있는 겁니다. 실패하기 싫은 거에요. 남이 저 사람 인생 조져놨대. 그 소리하기 싫은 거에요.
저 사람 저렇게 살다가 결국은 망했대. 이 소리가 듣기 싫은 거에요. 남들 앞에서. 그래서 잘되면 노출하고 못되면 숨어버리고 은신하고. 노출할거냐 은신할거냐는건 본인이 선택하는 거에요. 본인이 어느 것이 선하냐 악하냐를 따져서 선택하는 거에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못난 목자를 통해서 베들레헴에 가서 거기에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하고 여기 16절 봅시다. 16절에 보면 그 아기 예수가 태어난 것을 봤거든요. 한 2,2km쯤 돼요. 제가 차 타고 가봤는데 2.2km 쯤 되는데 들판에서 목자길이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팩트이기 때문에 사실이기 때문에 말하는 거에요.
“마리아가 듣고 전하여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그러니까 목자가 천사에 의해서 어디에 말려들었느냐 하면은 하나님의 계시에 합류가 된 겁니다. 목자가. 포함이 되어버렸어요. 목자의 행적같은 모든 것이.
자,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 어려운게 남아있어요. 진짜 이거 어려운데 왜 그러느냐 하면은 다윗의 동네를 아직 설명 안했어요. 다윗의 동네. 오늘 제목은 다윗의 동네인데. 다윗의 동네라는 말은 다윗은 이미 죽었지요? 그럼 다윗의 동네는 무슨 동네냐 하면은 죽은 다윗에게 약속한 분의 동네. 다윗에게 약손한 분의 동네가 다윗의 동네입니다.
그러면 다윗이 메시아입니까? 메시아 아닙니까? 구원자입니까? 구원자 아닙니까? 다윗은 구원자가 아니에요. 구원자는 누구냐 하면은 다윗의 후손이 구원자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후손이 구원자라는 말은 다윗과 다윗 사이에 여기에 똑같은 공통적인 원리와 원칙 질서가 똑같이 이어집니다.
그 질서가 뭐냐 하면은 질서를 위해서 다윗은 뭘 했느냐하면은 다윗은 간음해야 했어요. 밧세바. 자기 부인 말고 다른 부인을 건드렸습니다. 이게 밧세바죠. 밧세바. 그 다음에 다윗은 그 밧세바 그 부인이 남편이 있었어요. 남편도 아주 망나니 맞바람 피는 남편이 아니고 충실하게 하나님을 잘 섬기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남편이었어요.
하나님을 잘 섬기는 남편은 집에 주의해야 한다. 집에 아내 때문에 자기가 죽는 수가 있어요. 하나님만 섬기는 이 사람이 다윗에 의해서 살해당합니다. 살해당하는데 뻔뻔스럽게도 나는 그 사람 안 죽였다고 발뺌할 수 있는 알리바이를 마련해놓고 죽여버려요. 알리바이를. 내가 안 죽였다. 적군이 와서 죽였지. 자기는 등을 밀어놓고. 제일 가까운데 가라고 명령해라.
가까운데 가니까 그 적들의 화살이 뭐 하나님의 천사의 도움으로 피해가고 그런거 없었어요. 그냥 죽였어요. 왜? 우리아 장군이 그냥 죽어버렸어요. 간음했던 여인 남편이 장군이거든요. 장군인데 장군 부인은 다윗이 차지하고 그 남편은 다윗에 의해서 자기의 범죄 흔적을 지워버리기 위해서 그 남편을 살해해버렸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누구의 아들이라고요? 바로 이분의 아들이에요. 예수님이. 이 말은 예수님 안에 뭐가 있다? 이러한 다윗의 범죄가 예수님 안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왜 죽었습니까? 죄 때문에 죽었지요. 누구 죄 때문입니까? 다윗의 죄 때문에 죽었지요.
그러면 다윗의 죄는 다윗은 시편 51편에서 다윗은 본인이 죄 지었다고 합니까? 뻔뻔스럽게도 누구의 죄 때문에 그렇다고 합니까? 시편 51편에 아시는 분 이야기해보세요.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시편 51편 한번 읽어보세요. 시편 51편에 거기에 성경에 분명히 뭐라고 되어 있어요? 크게 한번 읽어보세요.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편 51편 5절에 보면 내가 그러니까 이게 다윗이 뭐냐 하면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에 나단 선지자가 와가지고 당신이 바로 범인이라고 지적을 딱 하니까 나단은 수사반장 최불암이에요. 최불암. 파~! 있잖아요.
최불암이 와가지고 지적을 딱 했을 때 하는 말이 했을 때에 나 안했다고 딱 당신이다. 이미 하나님은 다 알고 있어. 당신 찍었어. 당신 죽었어 딱 하니까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거는 내 죄 맞는데 이거는 내 죄가 아니고 누구의 죄다? 나도 인수인계 받은 죄라는 거에요. 인수인계 받은 죄다. 이게 무엇을 뜻할까요?
어떤 인간도 다윗이 지은 죄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아직 환경이 그런 상황이 안 왔기 때문에 그런 죄를 안 지었을 뿐이다 이 말이죠. 이걸 가지고 성경에서 로마서 5장에서 만남, 만남의 장소에요. 아담의 속성과 예수님의 속성이 바로 십자가에서 만나는 겁니다.
한쪽은 죄로 등장하고 한쪽은 그 죄 때문에 희생되는 의. 희생된다는 의미에서 의. 죄와 의의 만남에서 거기서 시공간에서 시공간을 기존의 시공간에서 소속이 바뀌는 새로운 시공간으로 넘어갈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그 길이 뭐냐? 예수님이에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다시 말해서 너희들은 올 수 없는 곳에 내가 죄를 대신 처리해줌으로써 내가 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이에요. 예수님 안에서 다윗 죄가 살아 있는 겁니다. 자, 다윗의 죄가 뭐냐? 여러분들의 실력을 무시하지는 않지만 물어봅시다. 1번이야 2번이냐 객관식입니다. 쉽습니다. 둘 중에 하나에요.
다윗의 죄는 뭐냐? 1. 자기 죄를 뻔뻔스럽게 자기 엄마한테 핑계 대는 죄. 이거 1번. 2. 자기 어머니가 모친이기 때문에 자기가 어쩔 수 없이 죄인으로 태어났다. 2번. 어느 것이 다윗의 죄입니까? 둘 중에 하나. 어느게 죄에요? 2번이에요 2번. 증상이라니까 죄의 증상이에요. ‘죄의 증상’.
갑자기 제목을 바꿀라. 내가 여기 다윗 말고 우리가 여기 있다는 것은 우리가 결국 늙어죽는다는 말은 우리 자신이 뭐다? 이 세상이 더럽고 죄 증상, 싸인으로서 표적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거에요. 사는게 곧 죽는 일이에요. 열심히 살려고 하는 그것이 살거나 안 살려고 하는 것 관계없이 내가 살아간다는 그 자체가 왜 우리가 죽어야 할 이유를 계속 생산해내는 일입니다.
이걸 어떻게 하자? 새롭게 여기자? 짜증난다? 뭐 그딴 소리 있느냐? 그게 아니고 뭘 하라? 즐기자. 즐기자. 나한테 어떤 책임도 나한테는 없다. 이걸 즐기자라는 거에요. 내 인생이 이렇게 꼬이고 어렵게 된 것은 내가 잘못을 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또 잘한다고 해서 이게 회복될 가능성도 없고 꼬이는게 풀릴 가능성은 없어요.
결국 우리가 남아있는 것은 결국 우리가 언제 죽을지도 모르지만 신종코로나로 죽을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결국 정해져있어요. 우리 가는 길은. 100세 살았다고 자랑하면 안돼요. 결국은 죽습니다. 죽는데 죽는 이유를 알고 죽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말씀을 오늘 목자 이야기를 결론 내린다면 목자는 죽은 자고 그 죽은 자를 천사가 복음으로 살려내는 이야기, 이게 바로 오늘 이야기입니다. 이게 오늘 이야기에요. 우리 보기에 목자가 아까 뭐 자본주의 돈 해가지고 자기 밥 먹고 살고 아르바이트하고 그런 이야기 했지요. 그런 복잡한 이야기할게 아니고 그 자체가 죽은 거란 말이죠. 기존의 인간의 시공간. 모든 공간. 하지만 거기에 천사가 침투해서 그걸 뭉개버릴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자, 끝으로 누가복음 2장 13절 한번 보겠습니다. 2장 13절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갑자기 숫자가 많아졌어요. 숫자가 얼마나 되었습니까? 허다해요. 하나 둘 셀 수가 없어요. 이걸 셀 수 없는 것을 수학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무한이라고 합니다.
무한이 아닌 숫자가 헤아리는 연속성과 무한의 연속성의 차이가 있어요. 무한의 연속성과. 새로 책 나올 책 이름을 잊어버렸다. 에스더 책이 나오는데 그 책에 보면 무한에 관한 수학 무한에 관한 내용이 나올 거에요. 무한은 셈하기가 안돼요. 하나 둘 이렇게 셈하기가 안된다 이 말이죠.
허다한 천사가 왔다는 말은 이 땅의 시공간에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허다한 천사가 와서 하는 말이 14절 뭐라고 합니까? 다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자, 땅에서는 기뻐하는 자입니까? 기뻐하심을 입은 자 수동태에요? 수동이에요? 피동이에요? “기뻐하심을 입은 자”에요.
우리 자신이 아무것도 기뻐할만한 것이 없는데 인생 꼬이고 뭐 이래가지고 짜증나는데 주님께서는 주님의 스스로 기뻐함을 여기다 덮쳐버린 겁니다. 마치 소스를 탕수육에다가 소스를 붓듯이 그냥 일괄적으로 기뻐하심을 부어버리니까 그 다음부터 우리 인생은 기뻐하심, 기뻐하심을 계속 생산해내는 식으로 계속 끌고가시는 거에요. 우리 꼬라지가 엉망이라도 계속 주님께서는 그 자체가 기뻐하심이에요.
이게 바로 우리 한순간 순간이 이게 우리가 측정해서 되는게 아니고 우리를 계산해서 하는게 아니고 이거는 하나의 증상, 재채기, 기침. 오늘 제목을 뭐라고 하려고 했지. 다 잊어버렸다.‘죄의 증상’. 하나의 우리가 이 땅의 죄의 증상을 다윗은 즐겼어요. 내가 죄인됨을.
그러니까 자기가 핑계대듯이 엄마 핑계댄게 아니고 비로소 내가 몰랐던 사실. 내가 이쪽세계만 알았지 저쪽세계는 몰랐잖아요. 내가 잘못해서 죄 지은게 아니고 죄 지을 수밖에 없어서 죄인이라는 점을 하나님 만나고 난 뒤에 선지자 만나고 난 뒤에 비로소 나한테는 책임감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그렇게 기뻐한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속였는지 아니면 누가 속였는지 우리가 아는 것은 남들과의 서로 눈 마주치면서 긁어모았던 그런 정보에 불과한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 다른 세계가 있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