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11a 부산강의 : [시편]28(18편)-주체 창조
20200511a 부산강의 : [시편]28(18편)-주체 창조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18편 25절,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니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 이렇게 돼있지요.
오늘 강의 제목은 주체의 창조입니다. 인간이 있는데 주체는 인정하지 않겠다, 내가 새로 만들겠다는 거죠. 보통 인간은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는 육체는 없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주체를 창조하는데 그 계획, 그 방식, 그 환경이 시편 18편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냥 하늘에 계시지 않고 지상의 일에 나섰다는 겁니다. 곱게 계시는 게 아니고. 예를 들어서 cctv에 하나님이 찍혔다고 해봅시다. 상상을 해보는 거예요. 그래서 며칠 후에 cctv를 보니까 거기에 하나님이 잠시 나타났다 이 말이죠. 그런 걸 상상해보세요. 하나님의 실존이 주님의 실존이 확인 되었을 때 이 땅에 하나님이 같이 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을 경우와 확인되지 않을 경우 사이에 나의 삶에 어떤 변동이 있겠습니까?
변동이 당연히 있어야 되지요. 창조주가 내 집 바로 옆에 이사 온 것과 하나님이 확인되지 않은 것과의 차이는 확연히 다르죠.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이 확인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확인될 때까지 어떻게 사느냐 하면, 내 위주로 살 수밖에 없어요. 내가 최종 어른이니까. 그런데 만약에 옆집에 하나님이 이사를 왔다. 떡 나누다가, “이사 오신 분은 누구십니까?” “나, 하나님인데요.” 이럴 때 “어이. 농담도 잘하시네요.” “농담 아닙니다. 진짜 하나님입니다.”
이럴 때 내 삶이 어떤 식으로 변화될 수 있느냐를 제가 묻는 겁니다. 옆집에 하나님이 이사를 왔는데 아무리 봐도 사람 아니에요. 그럴 때 내 인생의 삶이 변경되겠지요. 누구 눈치 보겠습니까? 옆에 이사 오신 하나님 눈치 보게 되겠지요. 그러면 내 목적과 의미가 수축될 가능성이 있어요. 마음대로 활개치고 내 뜻대로 살다가 옆에 하나님이 치고 들어왔을 때에 내 삶이 약간 조심스럽게 되는 거예요.
저는 이걸 주체의 수축이라고 보는데, 쪼그라드는 주체가 조심스럽게 되는 걸 말합니다. 그런데 옆집에 하나님이 아니고 보통 이웃 사람이 이사 왔다. 그러면 내 삶이 수축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필요 없지요. 너는 너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살면 되지요.
오늘 제목이 뭐라 했습니까? 주체의 창조. 창조란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게 창조에요. 하나님이 들어쓰실 주체를 창조한다는 말은, 눈 씻고 봐도 하나님 뜻대로 살 사람이 없다 이 말입니다. 없는데 없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내가 필히 있게 하겠다,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는 주체를 있게 하겠다, 하나님과 연결돼있는 하나님과 서로 통하는 주체, 하나님과 관계가 이어진 주체를 없는데서 만들어내겠다는 거예요. 시편 18편의 주제가.
그러면 그동안 우리가 만들어낸 주체란 것은 하나님과 연결이 됐다는 겁니까, 안 됐다는 겁니까? 연결되지 않았지요. 주체란 말을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주체란 그냥 주인공이라 하면 돼요. 주인공 알지요. 드라마의 주인공, 소설의 주인공, 영화의 주인공. 그동안 주인공이 누구였단 말입니까? 내가 최종 주인공의 마감인물이란 말이죠. 내가 나의 인생에 마지막 인물, 모든 의미와 가치가 나로 완결이 돼요. 모든 것이 거기서 종결이 된다 이 말입니다.
링컨이 이야기했잖아요. 나로 인해서 나로 말미암아 나의 세계, 이걸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함으로 말미암아 국가는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은 진짜 이건 바른 말이에요. 왜냐하면 세상이 그것 때문에 망하거든요. 망할 때까지 안 사라져야 되지요. 망할 때까지 인간을 위한 세계는 이 세상이 불로 망할 때까지 절대 망하면 안 돼요. 왜냐하면 망하는 이유가 그것 때문에 망하기 때문에. 인간이 자기를 위한 삶이 망하기 때문에.
그걸 저는 주체, 어렵지요. 그럼 주인공으로 바꾸잔 말이죠. 내가 내 인생에 주인공이란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런데 이런 세상을 하나님이 왜 심판하느냐 하면, 심판하는 이유가 그걸 천국으로 간주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어렵지 않지요. 굉장히 간단하지요. 그러면 우린 묻고 싶지요. 하나님이 생각하는 천국은 뭡니까? 내가 주인공 돼야 된다는 겁니다. 내가 어른이 돼야 된다는 거예요.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것처럼 내가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는 그러한 관계가 되는 그런 식으로 시스템이 운영되는 그 나라만이 천국으로 간주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신약에서 말하는 천국은, 하나님이 인정하는 나라, 천국이란 무슨 나라냐 하면, 골로새 1장 13절에 나오는 아들의 나라에요.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심어놓고 박아 넣은 거예요. 심어놓고 박아 넣을 때 아들은 천국의 주체가 되지요. 주인공이 되지요.
그럼 이 주인공이 곱게 박히겠습니까, 아니면 치열한 싸움이 일어나겠습니까? 주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아까 우리 옆집에 하나님이 이사 왔다 했지요. 우리가, “하나님, 이사 오셨네요. 같이 지냅시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갑자기 위축되는 거예요? 위축되지요. 위축된다는 말은 그동안 우리가 하나님이 없이 사는 것이 습관화돼버린 거예요.
이 주체의 창조를 앞에 뭐 하나 더 붙입시다. 하나 더 붙이면 확실해지는데, (믿음)주체의 창조. 또는 소망, 사랑 주체의 창조. 창조란 없는데서 있는 것으로 제가 말씀드렸지요. 결국 뭡니까? 믿음, 소망, 사랑은 하나님의 연결구조인데 믿음, 소망, 사랑의 주인공이 이 땅에 없다는 말이죠. 없다는 것은 믿음, 소망, 사랑을 가지려고 애쓰지 말라는 뜻이에요. 없다는 말은 없는 거지, 내가 믿음, 소망, 사랑의 주체로 나서겠다고 하지 말란 말이죠. 그렇게 되면 천국이 나의 나라가 되지 아들의 나라가 안 되는 거예요.
지금 시편 18편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굉장히 단순해요. 자기 아들을 박아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에베소서에 보면 때가 되매, 또는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 때가 되면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다. 그걸 믿는 게 믿음 아닙니까. 믿음이 뭐 어려워요. 내 옆집에 예수님 보내셨다 이 말이에요. 창조자 보내셨다 이 말입니다. 오라 하지도 않았는데 우리가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요새 진성이란 가수 아십니까? 이란 노래가 있어요. 안동역에 노래비가 있을 거예요. 하도 유명해서. 다음에 제일 히트한 노래로 돼있는데 그 노래 부른 진성의 노래 중에 이런 노래가 있어요. 내 인생에 태클을 걸지 마. 옆집에 하나님이 이사 오면 졸지에 가만있어도 내 인생이 갑자기 위축되면서 축소되면서 내 인생에 태클을 거실 거라는 생각이 들지요.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이 옆집에 이사 오지 않았더라면 나는 뭐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과 연관돼있는 주체가 창조 되지 않았던 겁니다. 내 인생에 태클을 걸어줘야 나는 기존에 나를 포기하고 새로운 내가 되는 거예요.
시편 18편이 많이 길어요. 50절까지 있거든요. 그 전체 흐름을 제가 말씀드리는 겁니다. 흐름을 이야기하면서 하나님께서, 그때는 아들의 안 나오지요. 자기와 관계, 연결돼있는 주체를 창조하면서 이 땅에 박아 넣은 겁니다. 박아 넣은 이상 곱게 오셨다고 곱게 가실 상황이 아니에요. 인간은 이미 자기 자신이 주인공이 된 입장이기 때문에 나는 주인공이다, 나는 인간이다. 곧 인간이다 고로 나는 내 인생의 주인공이다. 이런 문장형식이 성립되거든요.
그러면 인간이 있다. 있다는 말은 아까 창조의 공식에 의하면, 있는 것은 창조가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지요. 창조는 없다가 돼야 돼요. 없다가 돼야 있다가 되거든요. 있음의 없어져야 창조란 사역이 의미 있게 다가오는 거예요. 그러면 성도가 뭐냐? 성도란 내 속에 있음을 가지는 거예요, 없음을 가지는 거예요? 없음을 가져야 되지요. 내 한 가운데에 없음을 지니고 있어야 돼요. 그 없음은 기존에 내 있음이 함부로 그걸 접수하거나 거기에 끼어들거나 할 수 없어요.
이걸 그림으로 그리면, 인간의 신체를 그렸다고 물리적인 신체가 아닙니다. 신체가 아니고 주체를 그린 거예요. 한 가운데 구멍이 나요. 공백이 있어요. 그렇다면 폭탄 터져서 구멍났다는 뜻이 아니고 주체입니다. 주체란 말을 몇 번이나 하는지, 주체를 세 자로 옮겼지요. 뭡니까? 내가 ‘주인공’입니다가 주체입니다. 어렵지 않지요. 그런데 주인공 한 복판에 구멍이 난 거예요. 이게 바로 주님과 통하는 믿음이라는 겁니다.
어제 오후 설교에 언급했는데 쉬는 시간에 이야기하다가 어떤 사람이 공사하는 감독 이야기를 했어요. 제가 오후 설교시간에 물었지요. 그럼 그 공사를 감독하는 본인은 누가 감독하지요? 사람이 내게 감독자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인간은 태어나면서 안 갖고 있어요. 남을 이용할 생각하지 제게 지시해주셔야지요. 이런 생각을 안 갖고 있다니까요.
만약에 목사님이 제가 뭘 해야 되지요, 라고 하면 지나가던 사람이, 당신 지금 어디 보느냐, 라고 의아해 할 거예요. 그러면 지시도 안 받고 살아요? 감독자 없습니까? 인생 감독자 있어요? 지시자 있어요? 여기에 구멍이 안 나니까 몸과 내 정신세계가 딱 합치되는 거예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예요. 놀고 싶으면 놀고 일하고 싶으면 일하고. 오늘 점심에 뭐 먹을까. 이건 “주여, 오늘 떡볶이 먹을까요, 칼국수 먹을까요?” 이걸 왜 지시받느냐? 그걸 왜 지시받아요.
그래서 에베소서 설교할 때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남자는 지시할 사람이 없는 게 불행이고, 여자의 불행은 남편 눈치 보고 사는 게 불행이다. 남자의 불행은 여자에 지시해서 갑질하는 게 대단해 보이지만 진짜 자신을 지시해줬으면 좋겠어. 그런데 그 지시를 받을 수 있는 연결, 접속 고리가 전혀 형성돼있지 않아요. 특히 남자들은. 타고나서도 그렇고 환경적으로도 남자는 어른이 돼야 된다고 주변에서 자꾸 세뇌시켜놓으니까. 남자는 평생에 딱 세 번만 울어야 된데요. 태어날 때 울고 부모 돌아가셧을 때 울고 조국을 잃었을 때 울어야 된답니다. 요새 남자들은 드라마 보며 울게 됐지만. 강한 척하기 때문에 점점 위선자로 돌변해버리는 거예요.
결국 해답은 뭐냐 하면, 아무도 나를 지시할 수 없다는 것이 난감한 상태가 되는 겁니다. 아파트 경비원이 유서 남기고 자살했어요. 유서에 하소연할 데 없어서 죽는다는 겁니다. 자기가 너무 억울한데 하소연할 데 없어 죽는다는 거예요. 이 유서를 분석해봅시다. 여러분, 어제 뉴스 아시지요. 아파트 경비원이 아파트 주민과 서로 싸웠잖아요. 서로 주차관리를 왜 제대로 하느냐, 안 하느냐 하고. 밀었느니 때렸느니 코뼈 부러졌느니 하는데. 결국 그 경비원이 자살했어요. 그것도 유서 남기고 자살했다고요.
하소연할 데 없어 자살한다. 경비원이 여자가 아니고 남자 경비원입니다. 그러면 그동안 자살 안 할 조건은 뭡니까?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을 조건이 어떤 조건이냐 하면, 하소연할 자를 부지런히 끌어모은 거예요. 친구들 있고 가족들 있겠지요. 그럼 여기서 우리가 두 가지를 나눠봐야 돼요. 고독과 외로움의 차이. 야, 어렵다.
외로움이 고독이고 고독이 외로움 아니냐고 생각하는데 이게 차이가 나요. 고독은 뭐냐 하면, 스스로 홀로 살 능력을 갖출 때는 고독이 되는 겁니다. 취미가 뭡니까? 나는 고독. 이건 고독을 즐기는 거예요. 그런데 외로움은 못 견디는 겁니다. 외로움은 막연하게 기다려야 돼요. 뭘 기다리느냐? 하소연할 자를 끌어모으는 거예요. 가족이 있어야 되고 친구가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또는 배우자를 찾는 거예요. 남편, 아내 결혼할 상대자를 찾는 거예요.
그러면 하소연할 자를 끌어모을 때 자꾸 찾아다니고 지가 알아서 오고. 교인들의 일요일에 교회 가지요. 교회 가는 이유 중에 하나가 하소연할 사람 찾는 거예요. 그러면 하소연하는 것은 사랑입니까, 아닙니까? 사랑 아니지요. 믿음 아니에요. 소망 아닙니다. 이건 자기의 정신구조 안에 공백을 남겨두지 않으려고 자꾸 채우려고 하는 거예요. 하소연으로 외로워서. 외로워 외로워서 못 살겠어요, 라는 노래가 있듯이 외로워서 못 견뎌서 하소연할 사람을 계속 찾는 거예요.
그런데 이 사람은 그동안 친구가 있었는데 하소연할 사람이 없다 할 경우에는 뭘 한다? 내가 살아서 뭐하나 하고 죽어버린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차라리 사는 게 죽는 것보다 못하다는 뜻이에요. 이 세상에 왜 내 편이 하나도 없어. 왜 내 사연과 내 아픔과 내 속마음에 대해서 보통 들어줄 사람 없다 하는데 들어줄 사람을 원하는 게 아니고 이걸 위로해줄 사람을 찾지요. mbc라디오프로그램 에서 사연 다 들어줍니다. 그것 말고 내 편 되 줄 사람, 내 편으로 이 공백에다 박아 넣어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이런 사람이 주인공이 누굽니까? 본인이 주인공이죠. 본인이 목숨을 끊었다는 것은 자기 주인공 됨을 포기 못하겠다는 거예요. 이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 교회 나가서 예수 찾고 하나님 찾고 삼위일체 찾고 성부 찾고 성령 찾고 성경 찾고 다 찾는다. 이것 믿음입니까? 믿음 아니지요. 자기가 자기에게 지시내리는 거예요. 나 이것 모자라고 결핍됐기 때문에 만약 이것 안 되면 죽을 거야.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한 현상 하나 끄집어낼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자살을 유예하고 있는 중이다. 그럼 왜 지금은 자살 안 하느냐? 지금은 일가친척 가족 교우들이 있기 때문에 지금 자살을 미루고 있는 거예요. 만약에 내가 친정엄마인데 자식이 냉대한다면 나는 이 땅에 살 이유 없다.
살 이유가 없다는 그것도 헛말이고요.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힘들어서 못 살겠다는 거예요. 이유니 뭐니 고상하게 찾을 것 없니 내가 사는 게 힘들어서 못 살겠다. 돈이 없느냐, 밥을 못 먹어서? 아니에요. 먹을 것 있어요. 최저생계비 얻잖아요. 긴급재난지원금 받았습니까? 그것 있잖아요. 그러나 인생은 그렇게 사는 게 아니에요. 돈이 이 공백을 메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돈이 먹힐 수 있는 것은 개나 돼지 사료 먹이면 사는 것과 똑같지요.
개, 소, 돼지는 주체가 없어요. 뼈, 근육, 신체구조는 있는데 뭐가 없다고? 주체가 없다고. 주체는 하나님의 형상과 관련돼있기 때문에 인간에게만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것을 죽었다고 한 거예요. 우리가 죽었기 때문에 자꾸 죽음을 유예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 없으면 나 죽어버린다. 주식투자했는데 떨어지면 나는 자살할 거야. 이 말은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무리 유예하고 몇 년 더 흘러가도 넌 죽은 거다.
외로워서 결혼했습니다. 그러면 이혼하게 되면 죽어버려요. 결국 인생이란 죽는 이유를 만들어내는 업무를 수행하는 게 인생입니다. 인생은 내가 왜 꼭 죽어야 되는지 그 이유를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떻고 인생은 어쩌고저쩌고 하는데 인생은 다른 게 아니고 내가 꼭 죽어야 될 이유를 내가 알아채는 기간, 그게 우리의 삶입니다. 어찌 기쁘지 아니하리오. 왜 기쁘냐 하면, 해답을 알았으니까 기쁘지요. 사람이 오늘 죽더라도 해답을 알고 죽어야지요. 진리를 알고 죽어야 되지 않습니까.
시편18편에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육체가 진리가 아니라 주님의 육체가 진리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는 게 진리입니다. 그것은 인간은 그동안 악마에 속아서 본인의 신체, 본인이 사는 것을 진리라고 그동안 줄곧 우겨왔습니다. 이 내부가 없음으로 있어줘야 돼요. 왜냐하면 없음으로 내부가 장착되어서 주님의 지속적인 창조가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없는데서 있게 하고, 없는데서 있게 하고, 계속해서 없는데서 있게 하고 있는 것은 다 없애버리고 다시 없음으로 바꾸고. 하나님이 없는 것을 있게 하고 있는 것을 없음으로 바꾸고. 이런 겁니다.
참새가 한 끼 먹었다고 그것은 인생 끝나려고 합니까? 아니지요. 참새를 누가 키웁니까? 매일같이 키우듯이 인간도 매일같이, 참새도 들풀도 기르시나니 너희일까 보냐. 하나님께서 우리를 참새와 들풀처럼 키우시는 거예요. 그 키우신다는 증거가 마음에 있어야지요. 내가 알아서 단도리하면 누가 키우는 거예요? 도대체 누가 누굴 키우는 겁니까? 내가 나를 키우는 거예요. 아닙니까? 그건 옆집에 하나님이 이사를 안 온 거예요. cctv에 하나님 존재가 확인 안 된 상태에서는 이 세상에 나를 키울 것은 나밖에 없다가 이게 완전히 정설처럼 단정적으로 진리처럼 내 몸이 그걸 받아들인다니까요. 아시겠지요.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이 이 땅에 와서 주체가 되느냐? 그 문제를 생각해봅시다. 아직까지 시편 18편 본문은 안 들어가고 있어요. 이것 정리돼야 들어갈 수 있어요. 예를 들어서 여러분 자체가 인공지능을 장착한 하나의 움직이는 로봇이라고 생각합시다. 그런 영화 있었지요. I will be back. 다시 돌아온다는 영화, 마지막에 보면, 폭탄으로 쏴버려요. 그럼 터미네이터가 산산조각 다 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이 있어요. 터미네이터의 사지가 완전히 박살나서 사방에 흩어져있어요. 머리를 또 따로 있고.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터미네이터가 슬그머니 흩어진 자기 육신을 긁어모아요. 왜 긁어모읍니까? 긁어모아서 통일적인 신체모습을 갖추었을 때 제대로 활동하거든요. 이걸 보고 제가 느낀 것은 어떻게 인간이 사는 평소 행동과 똑같으냐 말이죠. 인간은 자기 두뇌가 생각하기를 괜찮아 보이는 것들을 긁어모으는 식으로 평생을 살아갑니다.
손이 심심하다 했는데 보니까 보석상 지나가다 내 손가락에 저 보석이 어울린다 싶으면 카드 긁어버리죠. 그래서 손가락에 끼웁니다. 바지를 스키니로 입을까? 옷가게에서 옷 하나 구입하지요. 봄에는 어떤 모자가 좋을까? 봄바람 휘날리며~ 벚꽃 날릴 때 어떤 모자가 폼나지? 인생이란 게 뭘 자꾸 긁어모으는 거예요. 그리고 자기 아들 또래의 아이가 똑똑하고 4개 국어를 하게 되면 갑자기 그 애를 아들 삼고 싶어. 또 긁어모으고 싶고. 그리고 총각이 연예인들 나오면 나는 저런 타입의 아가씨와 결혼하면 소원이 없겠다, 라고 또 긁어모아요.
그러니까 인공지능을 갖춘 흩어진 사지를 본인이 통일성 있는 신체를 상상해서 계속 주변을 긁어모으는 식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함이 좀 모자란다 싶으면 교회 가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이런 조건에 맞는 여자와 결혼하게 하옵소서. 이런 직장을 갖게 하옵소서. 하소연 다시 해봅시다. 멋진 예다. 사람은 죽었지만.
이 하소연한 이 경비원은 나름대로 통일성 있는 신체를 원했다? 물었습니다. 아니죠. 통일성 있는 신체를 원한 게 아니고 통일성 있는 주체를 원한 겁니다. 자화상. 통일성 있는 주체는 뭐냐 하면, 경비원 몇 푼 되지 않지만 나름대로 그 나이에 따박따박 월급 받아서 자기 인생의 미래와 목적을 설계하고 희망을 갖는 거예요. 내가 소망을 갖는 거예요. 가족들도 아버지가 안 노는구나. 역시 존경스러운 아버지, 주변의 가족들로부터 존경받는 아버지, 존재감 있는 아버지로서 살아갈 수 있었는데 그게 주민과 싸워서 얻어터져서 얼굴이 엉망 되었다. 그럴 때 자살했잖아요. 왜? 하소연할 데 없다. 자존심 상해서 더 이상 못 살겠다.
여기서 물어봅시다. 자존심 상하면 왜 못 살지요? 자존심 상하면 왜 마음이 심란하고 괴로워하죠? 자존심 상했는데 손에 뭐 났습니까, 찢어져서 피 나는 겁니까? 자존심 상했는데 엉덩이 쪽에 상처 입었어요? 뭡니까? 보니까 자존심만 상했지 다리에 종기 나고 그런 것 없지요. 그런데 왜 죽지요? 멀쩡한데. 자존심 상했는데 갑자가 앞에 접시에 반찬이 다 날아갑니까? 앞에 반찬 있어요, 국 있어요, 밥 있어요. 이 사람 자살할 때 아침에 밥 먹고 죽었어요. 낮에 죽었다니까요. 낮인지 밤인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낮에 죽었다 치고.
왜 먹을 것 있고 신체 멀쩡한데 왜 죽지요? 그 사람의 죽음을 통해서 지금 우리가 어떤 식으로 어떤 바탕, 어떤 정신으로 살아가는지 논리를 형성할 수 있어요. 도대체 이 자존심이 진리입니까? 자존심은 누구한테 진리냐 하면, 자존심은 주체적 통일성, 정신적 통일성을 자존심이라 해요. 이 통일성을 이 세상 환경이 도와줍니까, 방행합니까? 해운대 앞에 파도치는 것이 내 자존심을 도와줍니까, 방해할 수 있어요? 이 세상에 해가 뜨고 달이 지는 모든 것이 내 자존심을 위한 활동입니까? 아니지요.
그런데 왜 우리는 억지를 부립니까? 세상은 내 자존심을 키워준다고 그렇게 고집을 부리고 억지를 부리는 이유가 뭐예요? 그 이유를 아십니까? 모르죠. 그래서 인간은 도대체 나를 이렇게 망가뜨리고 죽게 하는 그 이유에 대해서 모르는 거예요. 모르기 때문에 시편 18편 성경이 있는 겁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자존심 세우면서 살아가는지 그 이유를 모르고 또 자존심 있게 되면 긴장상태에 들어가요. 바짝 자존심 지키기 위해서 조심하게 됩니다. 여기 마스크 있는데 차에서 남들 다 마스크 쓰는데 혼자 답답하다고 벗어버렸다. 그런데 주위 사람들이 가만있어요. 그럼 아직 내 자존심 유지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오지랖 넓은 한 사람이 와서 당신 때문에 우리 다 죽이려고 하느냐, 우리 또 경찰 조사받아야 돼, 이렇게 했을 때는 옳고 그름이 아니에요.
자존심의 특징은 진리가 아니고, 네가 뭔데 내 것 건드리느냐? 이 문제에요. 모든 사람의 보편적 진리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인간은 보편적 진리 아는 맛에 사는 것 아니에요. 자존심 하나 지키기 위해서 사는 거예요. 저와 여러분을 누가 그렇게 시키던가요?
시편 18편 17절 봅시다. “나를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지셨음이여” 이게 하나님의 자존심을 지키는 환경, 하나님이 주체기 때문에 하나님이 만든 주체자를 이 땅에 보낸 거예요. 장차오실 예수님이고 여기서는 선지자 또는 다윗이 되겠지요. 보냈을 때에 거기에 무슨 단어가 나오느냐? 원수가 나오지요. 하나님께서 다윗에 성신을 보내서 장차 하나님이 하실 계획을 미리 알려줬습니다. 그러자 다윗을 건드리는 사람들의 많이 나타났어요.
시편 18편 1절 앞에 어떤 말이 나와 있지요. “여호와의 종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여호와께서 다윗을 그 모든” 그 다음에 뭡니까? “모든 원수”지요. 하나님께서 원수를 창조하는 거예요. 인간은 지금 내 원수가 누군지 무지한 상태, 모르고 있는 상태라니까. 내가 왜 내 자존심을 위해 사는지 그걸 모르고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모르지, 모르지, 알려줘, 해서 하나님의 성신을 다윗한테 보냅니다.
그러면 다윗이라는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된 주체를 품고 있는 자가 등장해요. 다윗이. 그것이 언약 사람, 그러니까 다윗은 노아, 아브라함, 이삭, 그런 계통이에요. 그 사람들은 전부 다 옆집에 하나님이 이사 온 사람들이에요. 옆집이 아니라 아예 자기 속에. 그러니까 하나님에 의해서 자기 마음대로 아담대로 못 살고 악마가 사주한 대로 못 살고 옆에 있는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사는 특이한 사람, 언약 맨인데 그 사람이 시편 18편에서 다윗이죠.
다윗 앞에 누가 등장합니까? 다윗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원수가 곧 누구의 원수가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원수를 알리기 위해서 다윗의 원수를 만들었는데 그 원수의 이름이 나와 있지요. 원수 이름이 사울로 돼있지요. 짝을 맞추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대전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어요. 사울 없는 다윗 없고, 다윗 없는 사울 없다고요. 이게 장갑의 짝처럼 붙어있어야 돼요.
나 예수 믿습니다. 그런데 악마는 안 믿습니다. 이건 말이 안 되지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악마를 믿는 게 되는 거예요. “목사님, 제가 예수도 믿고 악마도 믿습니다.” 그럼 제가 질문하지요. “악마가 누굽니까?” 악마가 누구냐고 할 때 악마를 단독적으로 설명하면 안 되고요. 반드시 예수님이 하신 일과 결부시켜야 돼요. 예수님의 십자가 효과를 모독한 게 악마입니다. 악마는 예수님과 결부돼있어요. 악마는 우리의 친구니까 악마는 인간 편에서 일하거든요.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 힘에 종속돼있어요, 에베소서 2장에 보면?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누구 지배 아래 있습니까? 이 세상 신 아래 있다고 돼있거든요. 에베소서 2장 초반에 보면 나와요. 우리는 이 세상 신에 지배받고 있다. 사울이 사도 되기 전에도 마찬가지고요. 악마에 의해서 지배받고 있는 인간들이 자기가 주체니까, 정신적 주인공이니까 안에 없음이 아니고 있음으로 꽉 차있는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악마의 모습은 가장 악마 아닌 모습이 되겠지요. 왜냐하면 악마의 사주를 받고 만들어낸 악마의 이미지니까 악마와 가장 안 닮은 악마가 된다 이 말이죠.
그래서 요한복음 7장(마태복음 12장)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율법을 위반한 너는 마귀다. 너는 귀신의 오야봉이다. 예수님 보고 바리새인이 그렇게 한 거예요.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그렇게 평했다는 말은, 평소에 예수님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들을 날렸다는 것이 드러나죠. 예수님의 평소에 모든 말씀과 행위는 인간모독입니다. 인간의 자존심을 공격하는 거예요.
공격하니까 인간은 이유도 모른 체 뭘 위해 살아간다? 자존심, 자존감으로 살지요. 공격 이유도 몰라요. 내가 왜 내 자존심 지키기 위해서 자살까지 하는지 내가 왜 그런 인간이 됐는지 몰라요. 남들 다 그러니까 물어볼 수도 없어요. 다들 그렇게 사니까. 예수님이 모든 말씀이 내 자존심을 건드리니까 여기서 방어체제가 가동되어서 공격하겠지요. 그러면 그 순간 예수님의 원수임이 발각되는 겁니다.
시편 18편 17절에 “나를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지셨음이여” 원수 앞에 ‘강한’이란 말을 했지요. 아주 강렬해요. 강렬하다는 말은 평소에 하나님의 신이 오지 아니하면 우린 이길 수 없다는. 악을 이길 수가 없어요. 우리한테는 일종에 원수라는 게 없어요. 원수 없는 세계, 인간세계는 원수가 없어요. 일시적인 원수는 있지만 영원한 원수는 없어요. 지금의 원수도 나중에 동지가 될 수 있는 겁니다. 원래 정치판이 그렇잖아요.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단독으로 달렸습니까? 그때 십자가가 총 3개였지요. 예수님은 가운데 있었지요. 가운데 있으면서 둘 중 누가 구원받았는지는 성경에 안 나오니까 모르겠고요, 구원받은 강도에게 적이 누굽니까? 구원 안 받은 강도에요. 십자가에 의미는 그거거든요. 원수를 만드는 거거든요. 그런데 그 원수가 평소에 같은 강도라면 동지가 되지 원수가 아닌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한쪽에만 주님이 사랑을 베푸니까 저쪽은 자동적으로, 자동적입니다. 자동적으로 저쪽은 예수님한테 사람을 못 받은 자가 되지요. 사랑을 못 받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에 미운 자가 돼버려요. 예수님이라는 주체에 의해서 새롭게 형성된 의미의 시스템입니다. 의미의 구조에요. 그 의미는 예수님을 박아 넣어야 의미가 해석이 되지 예수님 빼놓고 우리가 알아서 해석하면 전혀 해석이 안 되는 것이 성경 전체에요. 성경 모든 단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박아 넣지 않으면 해석이 전혀 안 돼요. 십자가 빠져버리면 뭐로 활용되느냐? 내 자존심 키우는 용도로 성경이 활용되게 돼요. “주여, 저도 십사만 사천에 넣어주세요.” 이런 식으로 말이죠. 십자가를 박아 넣어야 해요. 이게 하나님의 계획이니까. 지금까지 여러분들의 너무 잘 아는 표정들이기 때문에 그 다음 진도 나가겠습니다.
그린다고 육체로 생각하지 마시고 주체를 정신적인 통일체, 이 주체에 하나님이 관여하게 되면 이 주체의 주인공이 뭐가 되느냐 하면, 말씀이 돼요. 계시가 돼버립니다. 그러면 나의 신체+주체는 하나님 말씀을 둘러싼 껍질, 껍데기가 되지요. 껍데기가 자살할 권한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이 안에서 주님께서 주신 말씀만 활성화되면 그만이지 내가 왜 껍데기 됩니까? 이것은 공백, 빈자리에 말씀이 와서 채워지는 거예요. 시편 18편이 이 안에 채워져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내가 어떤 행동할까, 뭘 할까 하는 것은 말씀으로 오신 주님의 지시가 있어야 돼요. 내가 진라면 끓일까요, 신라면 끓일까요, 안성탕면 할까요? 지시받고 하세요. 왼발부터 나갈까요, 오른발부터 나갈까요? 지시받고 하세요, 그냥. 그럼 지시가 없으면 어떻게 되느냐? 지시가 없으면 이건 꽉 차있기 때문에 이상하게 자존심으로 꽉 차있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신라면, 진라면 중에서 어느 것이 내 자존심에 도움이 될까? 결국 자존심에 도움 되는 쪽으로 행동하게 돼있단 말이죠.
마스크 써라, 마라가 아닙니다. 지시에 의해서 쓸 때 있고 뺄 때 있고. 낄끼빠빠라 합니까?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지고. 이걸 남들 그대로 해도 성도는 누구 지시받고 하는 거예요? 주님의 지시받고 그대로 하란 말이죠. 교회 오든 말든 그건 주님 지시받고 하란 말이죠. 본인이 알아서 할 때 본인이 뭡니까? 지 자존심 문제에요.
아까 이야기했지요. 자존심은 뭐와 관련돼있다? 지연된 자살이죠. 나 이것 안 되면 죽어버린다. 맨날 죽어버린데. 그리고 살아있을 때에는 자존심 키우기 위해서 허겁지겁 인공지능 장착된 그 로봇이 다 깨진 로봇이 본인의 자존심에 합치되는 통일적인 주인공, 주체를 만들기 위해서 이것도 해야 되고 저것도 해야 되고. 돈 좀 있으니까 골프 취미 들이고. 남들 하는 해운대 앞바다에 요트 사서 다녀봐? 그런 식으로. 이 나이에 트로트 연습해서 미스터트롯에 나가 봐?
이런 식으로 계속 파편화된 욕망의 대상들을 긁어모아서 그 욕망으로 괜찮게 하나로 구성된 그래서 내 자존심을 키우는 방향으로 인간은 행동하게 돼있단 말이죠. 뭐가 없으면? 주님의 지시가 없으면. 그 사람에게 왜 지시 안 받고 혼자 합니까, 하면 하나님이 cctv로 확인 안 됐으니까 없다고 보니까 내 마음대로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건 인정하는데 하나님이 실제로 이 땅에서 일한다는 것은 cctv에 안 찍히니까 실존성이 없으니까 하나님은 알아서 하시고 실존적으론 나밖에 없으니까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라는 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죽고 싶을 때 죽는 거예요. 입주민한테 나이 젊은 놈한테 욕 얻어먹었다고 자존심 상했다고 죽어버린 거예요. 그 모습이나 아직 안 죽고 있는 우리 모습이나 둘 다 똑같아요. 자존심 하나에 목숨 걸고 살아가는 모양새는 전혀 다를 바 없습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