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강-YouTube강의(증거 로마서 10:15)20200505-이 근호 목사
311강-YouTube강의(증거 로마서 10:15)20200505-이 근호 목사
제311강, 제목은 ‘증거’. 뭔가 증거한다. 증거한다는 것은 본인이 주인공이 아니다.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겁니다. 세례요한이 대표적인 사람이죠. “너는 누구야?” 할 때 세례요한의 답변은 “나 아니야”. 질문하는 사람의 질문과 답변이 서로 비껴가고 있는 거예요.
세례요한보고 “너 누구야?”라고 질문하는 사람은 무슨 뜻이냐면 나는 제사장인데 나는 이런 사람인데, 나는 항상 내가 누구냐에 대해서 항상 신경을 바짝 쓰고 살아가는데 너도 마찬가지 아니겠어. 그러니 나는 이 정도인데 ‘너는 누구야?’라고 묻는 거예요. 사람이 질문할 때는 자기에게 구축된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서 질문하지 않거든요.
나는 이렇게 살아가는데 너는 누구야? 나는 지금 신종코로나 겁나서 마스크 쓰는데 너는 뭔데 마스크 안 써? “마스크 쓰세요.”라는 말은 뭐냐? ‘나는 쓰고 있는데 너는 뭔데 안 써?’ 그런 뜻이거든요. 그러니 인간은 뭔가 질문할 때는 ‘나는 이런 식으로 인생을 이렇게 정리했는데 이 정리에 준해서 너는 누구야?’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나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범주 안에 없어. 나는 아니야.”라고 이야기해요. 세례요한은 ‘나는 ~이다’에 ‘아니야’가 들어가 버린 거예요.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은 ‘나는 이렇다’라고 자기가 이미 여기에 있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해서 이렇다고 하는데, 세례요한은 나는 있어도 나는 없다고 여기고 그렇게 나를 보라는 겁니다.
답변이 참 엉뚱하죠? 나는 여기 있는 줄 너희들이 알지만 나는 여기 있는 나를 증거하기 위해서 여기 있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에게 안 보이는 분을 증거하기 위해서 여기에 내가 있다는 겁니다. “나는 그 분의 소리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세례요한이. 세례요한이 그렇게 얘기할 때 누가복음 같은 데에 보면 성령에 의해서 그렇게 한다고 되어 있거든요.
그러면 성령, 성령,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참 성령 언급을 많이 하는데 성령은 무엇이냐? 성령은 ‘아니다. 나는 자체로서는 아무것도 아니다’를 증거하는 것이 성령이고 그것을 매개로 해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거예요. 말씀 잘 들어야 돼요.
성령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앞에 전제되는 것이 있어요. ‘나는 ~이다’가 아니다 를 시발점으로 해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거예요. 따라서 ‘나는 ~이다’ 해버리면 누가 가리워지느냐 하면 예수님의 증거가 다 실패하는 겁니다. “나는 누구다. 나는 목사다” 이러면 예수님의 증거가 실패하는 겁니다.
“너 신학교 나왔지? 너 나중에 목사 되지? 너 목사 맞지?”, “나 목사 아니거든! 주님께서 목사 되게 하셨거든.” 그래서 주님을 증거하는 거예요. “너 요번에 강원도 고성에 산불나서 집 홀랑 태웠지?” 물으면 “내 집 안태워졌거든! 주께서 주님의 집 태워버렸거든. 내 집 아니었거든. 주님의 집인데 주님의 집을 홀라당 산불 내서 다 태워버렸다.” 그러면 집 태우고 주님 증거하고. 주님은 남는 장사고 나는 집 홀라당 다 태우고. 그게 바로 세례요한이 가는 길이었습니다.
자 세례요한의 주님과의 관계를 확장시켜 봅시다. 범위를 넓혀봅시다. 로마서 10장에 나옵니다. 로마서 10장 15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와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이 말은 보내심 없이 제대로 주님 증거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둔 적이 없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했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 증거한다고 성령 받아서 주님 증인이라고 나대는 거, 나는 그런 인간을 둔 적이 없다는 겁니다.
아까 세례요한 이야기 다시 해볼까요? “나는 아니다”할 때 로마서 10장에서는 그걸 뭘로 바꾸느냐 하면 보내심을 입었다고 표현하는 거예요. “나는 아니다”와 같은 말은 “누가 나를 보냈다. 보내심을 입었다”.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자, 그럼 보내셨다는 말의 반대말은 뭐냐? “나는 누구다”라는 말과 똑같은 말이 돼요.
여기 나라고 하는 것을 분석해보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과거가 쌓이고 쌓인 거죠. 과거에 지금의 나를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공들였습니까? 참 누구라도 자기 과거 이야기하라고 하면 소설책 10권 이상 나옵니다.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대하장편소설 나와요. 어느 누구도. 골목식당의 족발집 하는 사람도 술 한잔 먹고 자기 과거 이야기하라고 하면 책10권 나옵니다.
인간은 누구나 남한테 자기 과거 이야기하고 싶어서 환장을 했어요. 사람을 왜 만납니까? 왜 술 한잔 먹고 만나서 밤늦도록 이야기합니까? 지 과거 이야기하는 거예요. 결국 그걸 압축해보면 뭡니까? “나는 누구다.”이거에요. 지금도 장날에 그런 게 있는지 모르겠는데 옛날 저 어릴 때 장날이나 길에 보면 쌀을 동그란 데에다 집어넣고 압축기로 누르면 편평한 피자판같이 나오죠. 이게 자아에요. 과거를 압축해버리면 지금의 자아가 되는 겁니다. 이건 누구 증거하겠어요? 그 압축된 거 증거하겠죠. 나 이렇게 고생했다 저렇게 고생했다.
TV 아침 드라마 보세요, 전부다 그 이야기 아닙니까? 죽었다가 살아 돌아오고 희한한 일 벌어지는데 전부다 자기 과거 이야기에요. 과거 이야기 듣고 또 눈물 흘리네. 눈물 흘리면서 그래 아버지 혼자, 일찍이 아내 죽고 아들하나 참 잘 키웠다. 세상에 어떻게 저리 잘 키웠노. 자기 아버지는 파주에서 미용사 하는데 아이고 이번에 트롯트 우승해서 1억타고 차타고 신발 200켤레 타고. 이제 장사가 너무 잘 되가지고 오지 말라고 미장원 잠시 그만두고.
이 전부다 무슨 이야기에요? 과거 이야기에요. 누굴 증거합니까? 자기 증거하는 거예요. 참 예배당 이쁘다. 세상에 그 목사님이 개척교회해서 새벽기도마다 전도한다고 얼마나 고생했노. 그러면 그거 누구 증거하는 거예요? 교회라는 것을 통해서 자기 잘났다는 것을 증거하는 겁니다.
그런데 보내심을 입은 사람에게는 그 보내심이라는 계통에서 누가 내려오느냐 하면 아까 세례요한이 성령 받았다 했죠. 성령님이 누구를 그대로 반복시키냐 하면 예수님의 생애를, 보내심을 입은 사람에다가 그 줄을 타고, 호스를 타고 그대로 집어넣어버려요. 그렇다면 보낸 분이나-예수님이죠- 보내심을 받은 자나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 예수님의 고난과 환란과 아픔을 반복하는 거예요.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제가 이렇게 말하면 “그렇게 고생해서 주님의 증인되면 나한테 돌아오는 이익은 뭡니까? 도대체 뭘 주시려고 나를 그렇게 고생시키셨습니까?” 그렇게 이야기하죠. 여기 로마서 10장 15절에 보면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그러면 복음 전하는 사람에게 나이키 한 벌씩 준다는 뜻이에요? 안그러면 태국, 중국 발마사지 가끔씩 해준다는 뜻입니까? 아름답다는 의미가 뭐냐? 그것은 여기 10장에서는 안나오고 15장에 나옵니다. 15장 21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와요. 상당히 어려운 말씀인데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야, 이게 바로 성과에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이런 생각합니다. ‘저 사람 내가 복음 전해봐야...저 사람 복음 받아들이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이런 거. 마치 요나가 니느웨에 복음 전해놓고 ‘너희들 구원 안받을거야’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복음을 받아들일 때 바로 말씀대로 진행되는 거예요. 말씀이 뭐냐?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누굽니까? 저와 여러분 아닙니까? 언제 우리가 예수 믿으려고 환장했습니까?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그 다음에 “깨달으리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을 우리는 몰라요. 그러나 주님은 아시거든요. 주님이 오셔서 그 사람에게 꽂아버리는 거예요. 미션 임파서블이라, 정말. 미션 임파서블. 뭐 높은 건물 타고 내리고 온갖 거 하지만 가서 돌아올 성과는 뭐냐 하면 지옥 갈 사람이 주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것을 통보함으로써, 알려줌으로써 안들을 사람이 들어버리는 놀라운 변화.
거기에 우리가 동원된다는 겁니다. 동원 예비군처럼 우리가 동원되는 거예요. 뽑힌 거예요. 사적으로 우리가 챙길 수 있는 나이키 한 벌도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없어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참여하게 된, 그것이 우리에게 주신 귀한 상이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