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01a 울산강의-레위기 26장 : 표면존재
20200501a 울산강의-레위기 26장 : 표면존재
(강의:이근호 목사)
레위기 26장부터 하겠습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지니” 1절에 그렇게 돼있지요. 성경 볼 때 믿음이 있다고 보시면 안 되고 믿음의 전혀 없다고 보셔야 돼요. 현재 나한테는 믿음이 없다. 인간에게는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귀한 것이기 때문에 귀한 믿음을 인간이 갖고 있으면, 경상도 말인지 상스런 말인지 호작질한다고 하지요. 갓난아이한테 수표나 오만 원짜리를 주게 되면 걔들은 호작질하게 되지요. 어린아이한테 볼펜 쥐어주고 수표 있으면 입에 들어간다든지 찢어버리든지 하겠지요.
평소에 성경을 볼 때 인간을 성경을 볼 능력도 없고 권한도 없고 자질도 없어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씀을 준다든지 성경을 준다든지 믿음을 준다는 일은 없습니다. 줘봐야 그 가치를 모르니까요. 그래서 구원받는 것은 내가 가질 믿음이 없는 것으로 통해서 구원을 받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믿음 가지고 구원받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구원받을 때 믿음 없는 채로 구원을 받게 돼있어요.
그 이유가 있어요. 쉬운 예로 고기가 낚싯대에 걸려서 잡힐 때 낚싯바늘과 낚싯줄은 고기 쪽에서 만듭니까, 아니면 낚시꾼에 의해서 제공된 겁니까? 낚시꾼에 의해서 제공된 거죠. 세상에 어느 고기가, “나 물에 살려니까 너무 추워서 안 되겠어. 따뜻한 선실에서 배 위에서 살아볼까? 내가 낚싯줄을 혼자 수작업으로 만들어서 자기 목에 꿰어서 잡아당기세요.” 이런 고기 없잖아요.
낚싯줄은 고기가 스스로 만드는 게 아닙니다. 믿음이란 인간이 만들어내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 낚시꾼이 고기한테 낚싯대를 던질 때 이런 식으로 고기한테 이야기하지 않아요. “고기야. 내가 낚싯줄 던질 테니까 네가 알아서 목에 걸든지 묶든지 알아서 내가 건지기 좋도록 해라.” 그렇게 이야기하는 어부는 없지요.
바다에 고기가 입을 벌리고 있는데 배에서 낚시할 때는 낚싯줄이 목에 걸리지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관계 또는 관계성이라 하는 겁니다. 이 낚시꾼과 고기 사이의 관계, 이게 믿음이에요. 믿음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게 아닙니다. 가지고 있어봐야 우리는 호작질한다니까요. 이건 중요하지 않고 그보다 더 중요한 돈이 있는데 믿음으로 뭐 하려고요? 우리한테는 믿음이라는 게 아무 쓸모가 없어요.
인간이란 평소에 하던 행세가 있어요. 하던 습관이 있다고요. 그건 뭐냐 하면, 자치단체에서 주는 상품권으로 재래시장에서 물건 사는 것, 그것 잘해요. 돈 주고 마트에서 물건 사는 것, 그걸 잘하지 마트에 가서 믿음 내고 빵 사고 소고기 사고 그런 것 못해요. 믿음은 돈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한테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믿음은 돈이 아니에요. 여러분, 믿음이 귀합니까, 돈이 귀합니까? 묻는 내가 나쁘다, 정말. 내가 너무 못돼먹었다. 이거는 묻는 게 실례지요. 무례한 짓이 되는 겁니다.
믿음이란 낚싯대와 같아서 딱 걸리도록 돼있고 걸린 사람이 구원받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는 말이, 네가 이제부터 고기 잡는 어부가 되지 말고 뭘 낚으라고 합니까?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고 이야기했지요. 이것은 구원받는 사람이 자기 믿음을 조작하거나 소유하거나 만들어 내거나 그렇게 할 수 있는 자질과 능력은 전무합니다. 전혀 없습니다. 그냥 걸린 거예요. 낚싯대에 그냥 걸린 겁니다.
고기가 낚싯대에 걸리면 반항합니까, 좋아서 어쩔 줄 모릅니까, 어떻게 됩니까? 반항할까요, 좋다고 구원받은 걸 기뻐할까요? 반항합니다. 왜냐하면 이 믿음 속에 믿음이란 내용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 다음에 성령이 와서 믿음을 줬거든요. 따라서 믿음 안에는 뭐냐 하면, 내가 이 땅을 빠져나올 때 죽을 것처럼 너도 이 땅에서 나올 때 나와 같이 죽어야 산다. 이 내용이 들어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믿음 안에는 죽으라가 들어있어요. 그런데 우리의 평소의 삶은 죽음의 정반대로 살자. 경상도 말로 우짜기나 살자. 살아남아보자. 신종코로나한테. 살아남은 자가 승자다. 그런데 하나님의 믿음은 죽어라, 이놈아. 이러니까 여기서 강력한 반발이 나오고 강력한 반항이 나오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고기들은 낚이게 되면 점잖은 신사 같지 않고 정말 온 사력을 다하여서 바닷물을 치면서 내가 살던 곳으로 다시 돌려놓으라고 반발합니다. 고기가 살던 동네가 어딥니까? 바다지요. 나는 요트 생활 싫어. 육지 생활보다도 나는 바다 생활이 익숙해. 다시 말해서 인간은 믿음 없는 생활이 익숙합니다. 믿음 없는 생활이 반항할 이유도 없고 반발할 이유도 없어요. 평소에 살던 대로 살면 됩니다.
우짜기나 살자. 우짜기나, 이걸 표준말로 뭐로 번역하면 좋겠습니까? ‘어쨌든’ 일단 내가 살고 내 가족이 살고. 그걸 합치면 어쨌든 내 가족부터 살아보자. 두 식구 의료보험료 팔만 원 되면 칠십 만원 받고 삽니다. 네 식구 되면 이십삼 만원 아래로 떨어져야 혜택 받는다는 거예요.
그 소릴 들을 때 나라에서 돈 준다는 소리를 듣고 강력하게 반발하면서 빨리 죽어서 천국 가려는 사람에게 왜 이렇게 나를 괴롭게 하느냐고 청와대 앞에서 시위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저 사람 부자인데 돈 왜 주느냐고 나오지, 나는 죽고자 하는데 날씨는 점점 더워지는데 왜 자꾸 살게 만드느냐, 정말 짜증난다. 그런 사람 없습니다.
그래서 다시 이야기합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건 없습니다. 구원받을 때 믿음 없음을 들통 내면서 구원하십니다. 나한테는 믿음을 가질 권한도 없고 줘봐야 호작질이나 하고. 이 호작질을 표준말로 고쳐야 되는데...... 호작질이라는 게 옛날 마적들의 불 지르는 게 아닌지 모르겠어요.
그야말로 어린아이가 돈의 가치를 모르고 찢어버리고 수표 가치를 모르고 그걸 훼손하는 것처럼 우리의 본성은 믿음을 유지하거나 갖고 있을 위인들이 아닙니다. 뭔가 이질적인 것이 들어오게 되면 반발하게 돼있어요. 몸에 바이러스 들어오면 반발하듯이. 그걸 면역체계라 합니다. 평소에 나와 안 맞는 게 들어오면 본능적으로 거부하게 돼있어요.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이 예수님을 거부햇서요.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게 뭐냐 하면, 네가 믿음이 없는 채로 성경을 봐라. 그렇게 성경을 보게 되면 고맙게도 내가 믿음이 하나도 없구나, 라는 것을 밝혀줄 것이다. 성경이 그걸 이야기해주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의 상식은, 우리나라 기독교 들어오고 교회에서 이런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반대 이야기를 했어요.
여러분들 믿음 없으면 지옥 갑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믿음을 주시면 그 믿음으로 사시면 천국 갑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어느 교회든 어느 강사 목사가 부흥회를 하든 어느 교회에서 헌신예배를 하든 항상 내뱉는 것은 뭐냐? 여러분의 믿음을 잘 관리하셔서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보너스로 천국 가시기 바랍니다. 행함이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갑니다. 그런데도 있고 행함으로 간다고 하는데도 있고. 어쨌거나 당신은 구원받아야 되지 않습니까? 그게 남는 겁니다, 라는 식으로 이야기하지요.
성경은 오늘 본문 1절에 의하면 그걸 우상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명칭이 예수가 됐든 하나님이 됐든 명칭은 신경 쓰지 마시고. 1절을 다 같이 읽어볼까요.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됐어요. 거기까지만 하면 돼요. 나를 위한 신, 나를 위한 예수, 나를 위한 삼위일체 하나님 다 우상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진짜 믿음이 오게 되면 내가 신을 찾을 위인이 아닌 것을 알려주게 돼있는데 이게 진짜 신이 없으면, 모든 신은 오직 나를 위해서 존재해야 그것이 사랑의 하나님이고 좋으신 하나님이라고 누가 판정하는가? 내가 판정하거든요.
그러니까 오늘 강의를 어디서 출발했느냐 하면, 믿음 없다는 게 어떤 것인지로 출발하는 거예요. 믿음 없다는 게 어떤 거냐? 그것부터 출발해야 돼요. 오늘 강의뿐만 아니고 우리가 평소에 성경 볼 때 “하나님, 저는 믿음 하나도 없습니다. 믿음 하나도 없는데 그래도 구원받겠습니까?” 이렇게 시작하란 말이죠.
믿음이란 게 없는데, 좀 뻔뻔스럽지요. 뻔뻔스러워도 좋아요. 믿음이 없는데 어떻게 천사가 있다는 주님이 가신다는 하늘나라에 갈 수 있겠습니까, 라고 보자는 겁니다. 주께서 하신 말씀이, “네가 뭔 일이야. 네가 믿음 없음을 어떻게 알게 되었어. 그러니까 네가 구원받는 거야.” 믿음 없음을 안다는 자체가 뭐냐 하면, 내 믿음보다도 주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가 더 유일무이한 확실한 구원의 근거라는 사실을 알아챈 사람이에요.
이건 아이큐 190 돼도 몰라요. 좋은 대학 나와도 몰라요. 희한한 사람입니다. 자기 믿음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 자기 믿음도 없이 천국 간다고 할 때 다른 사람이 얼마나 그 뻔뻔스러움에 기가 차겠습니까. “개코나 믿음도 없는 게 천당을 간다고? 그래 너는 뭘 믿고 천당을 가느냐?” “나는 아무것도 나한테 기대할 게 없다는 그걸 믿는다, 왜?” 이렇게 나와 주셔야 돼요.
거기에 비해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뭐가 되느냐 하면, 항상 조건을 따져요. 감사하라 하면 조건 따져서 감사가 나옵니다. 조건이 있을 경우에만 감사하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조건이라는 것은, 내가 지금 근사하고 잘났다는 것에 대해서 주님께서 지적질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이만큼 사는 것도 내 나름대로 얼마나 공들이고 애를 썼는데 지금 나에 대해서 하나님이랍시고, 너 그렇게 살면 되겠느냐, 라고 지적질하게 되면 내가 하나님 떠나겠습니다. 그렇게 잔소리 듣고 그렇게 천당 가고 싶은 마음 없어요, 라고 지가 삐져서 나가버리죠.
인간이 원하는 하나님은 뭐냐 하면, 나에게 지적질 안한다는 조건 하에 나에게 착하다, 훌륭하다, 대단하다, 참 네가 성실하구나. 인간이 어떻게 그렇게 마음 낮아졌지, 라는 칭찬 일색으로 나를 위해주는 조건 있다면, 그리고 나 하는 모든 일에 기도 응답해주고 잘한다고 격려해준다면 그 조건부로 감사하고 하나님을 모실 의향이 있습니다. 이렇게 나오겠지요.
그렇다면 그 사람은 레위기 26장 1절부터 벌써 핀트가 안 맞아서 다른 성경을 찾고 있는 사람입니다. 1절에 보면,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지니” 만들지 말라는 것은 이미 네 평소에 습관과 삶의 모든 방식은 너를 위하여 네가 존재한다는 식으로 일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고 주께서 지적하시는 겁니다. 이 말씀이.
내가 감추고 있던 것을 들춰낼 때에 고마움과 감사가 어차피 일어나야 돼요. 고맙소, 참 고맙소. 누가 노래 부른 것처럼. 정말 주님 아니면 내가 이렇게 살아간다는 것을 누가 지적하겠습니까. 고맙습니다. 나는 나만 위해서 삽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한 신은 그게 여호와든 예수든 다 가짜요 우상이었습니다.
제가 이 말씀 드리는 것은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일단은 내 쪽에서 천국 갈 시도는 안 하셔야 됩니다. 하실 필요가 없어요. 뭔가 천국 가려고 나서면 내 쪽에서 조건을 걸기 때문에. 이번 소송사건만 잘 되면 예수 잘 믿겠습니다. 이런 것. 우리 얘가 난치병이 있는데 이 병만 고쳐준다면 제 목숨 바쳐서라도 주께 충성하고 교회에 충성하겠습니다. 자꾸 조건을 걸어요.
그렇게 조건 걸 것 같으면 처음부터 아예 하나님 찾지 마세요. 우리가 백날 조건 걸어봐야 조건 걸어서 나온 결과마저도 누구에게 좋은 결과겠어요? 나 좋은 나를 위한 조건이잖아요. 그래서 일단은 우리가 구원받기에 아무것도 할 게 없다는 말씀을 거의 20분 동안 해드렸습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 관심 있는 것, 아무것도 내가 시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천국에 보내준다는 거예요. 믿기지 않지요. 왜 믿기지 않느냐 하면, 평소에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경험상 결과를 낼 때는 내 쪽에서 설쳐야 된다는 그것이 체험적으로 당연한 거거든요. 설치지 않으면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가 그런 식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구원받는 우리의 운명이다, 미래에 결정타를 날리는 미래의 문제에 있어서 내가 손 놓고 있을 정도로 참을성이 있을까요, 우리가? 그렇게 배포 있게 나갈 수 있을까요? 성경을 보게 되면 우리가 손을 놔도 괜찮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어떻게 보느냐 하면, 땅이 있지요. 땅에다 이불을 덮어요. 땅이라는 이 범주 또는 더 넓은 범위의 이불을 깔아버립니다. 이불의 크기가 땅을 다 덮기 때문에 인간이 생각하는 땅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아요. 이 이불이 율법입니다. 또는 말씀입니다. 말씀으로 땅을 덮어버리면 이 땅에 사는 우리가 땅을 밟을 때마다, 이불을 덮는다고 제가 이야기했는데, 만약이 눈이 많이 오는 노르웨이 폭설이 내려서 온 지역이 하얀 솜이불처럼 덮였다고 봅시다.
그러면 노르웨이 주민들이 아침에 나와서 자기는 땅을 밟는다고 하지만 그것은 무엇을 먼저 밟은 셈이 되지요? 눈을 밟지요. 울산바닥에 율법이 쫙 깔려있고 말씀이 깔려있으면 우리는 한 걸음 두 걸음 밟을 때마다 무엇과 마주치고 무엇과 만나느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말씀, 율법과 마주치게 돼있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전략이에요.
집에서 혼자 자가 격리해서 성경연구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라면 하나 사려고 집에 나설 때 마스크 하고 모자 쓰고 마트 갈 때마다 우리는 이미 모든 율법과 말씀과 마주침이 성사되게 하나님이 그렇게 조치하신 겁니다. 마치 공기를 마셔야 사는 것처럼 말씀과 마주치게 돼있어요. 이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방식입니다. 먼저 모든 약속의 땅에다 율법을 다 깔아버려요.
오늘 아침에 뉴스 보니까 스웨덴 나라에서 방역을 하는데 천주교 축제가 있어서 삼만 명이 모인데요. 스웨덴 당국에서 흩어놓을 재주가 없어서 닭똥을 뿌려서 닭똥 냄새 때문에 못 모이게 했답니다. 멋진 방법이죠. 주께서 닭똥 대신 말씀을 뿌려놔서 혼자서 집에서 성경 공부한 것 아무 소용없어요. 평소에 누굴 만나고 누구와 이야기하고 물건 하나 사고 차를 타고 운전한다든지 어느 지역에 가든 그 현장에 하나님의 말씀이란 조건과 대나무 숲처럼 촘촘한 말씀의 숲에서 우리 자신이 지적받게 돼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해도 관행상 나를 위해서 하게 돼있어요. 기도를 해도 나를 위해서 헌금을 해도 나를 위해서 교회 다녀도 나 천당 가려고 오지요. 예수 믿어도 우리 집안 잘 되라고 오지요. 오늘 교회 가운데 신종코로나 물러가라고 철야 기도하는 교회 있겠습니까? 아무리 교회가 엉터리라고 해도 그런 교회 있겠어요? 있다고 칩시다. 있을 가능성 많아요. 절에는 그렇게 하지만 교회마저 그렇게 할 것인가. 또 아이가 수능 가까이 되면 엄마가 수능 잘 치게 해달라고 새벽기도 하겠지요.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는 하나로 묶어버려요. 네 자신을 위해서 이 세상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오해했다, 모든 말씀이 네 자신을 위해서 있는 것처럼 했다. 그게 바로 우리의 믿음 없는 바닥을 들춰내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살게 하십니다.
그러면 정리해봅시다. 믿음 없다는 것은 방금 잘 들으셨으니까 어려운 표현도 감당하리라 싶습니다. 믿음 없는 생활은 단독자 의식, 다른 말로 하면, 개별자 의식, 이렇게 어려운 표현으로 할 수 있습니다. 믿음 없다는 것은 모든 것을 나로 출발해서 나 밖에 모르는 것, 그게 믿음 없는 생활이에요.
왜 이렇게 정리해야 되느냐 하면,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믿음 있는 것은 무엇이냐? 믿음 없는 세상과 반대라고 쉽게 정리할 수 있기 때문에 제가 믿음 없는 것부터 먼저 정리해드린 겁니다. 믿음 없는 것은 단독자고 개별자라면, 믿음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집단적이고 전체적이에요.
집단적이고 전체적이란 그 안에 너나 할 것이 공통적인 다 담겨있다, 공통 조건이 담겨있다. 너나, 남녀노소, 직업을 불문하고 구원받은 자의 특징은 뭐냐 하면, 너한테 하나님이 주신 것과 나한테 하나님이 주신 것이 나의 노력과 성과와 재질과 자질 전혀 관계없이 무관하게 그냥 주시는 거예요. 그냥 똑같은 주시는 거예요.
그럴 때 너와 나 사이에 경쟁이란 게 성립이 안 되지요. 우리 집과 저 집과 경쟁이 안 되지요. 저 집 얘 좋은 대학 가고 우리 집 얘 떨어지고, 이게 천국에서는 그런 걸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저 집은 늘 아프고 우리 집은 건강하고, 이런 것으로 인생 성공 했니 못 했니 비교가 안 돼요. 할 수가 없어요.
믿음이 있는 집단은 개별자가 죽습니다. 개별자 의식을 용납하지 않아요. 독단적이고 단독적인 것을 용납하지 않아요. 사람이 단독적이 되면 남과 비교하고 경쟁하는데 온 혼신의 노력을 거기다 집중해서 평생을 살아도 옆집 아저씨 이기려고 살아요. 참 정말 치사하게 살아가요. 기껏 저 인간 이기려고 아등바등 평생을 허비한 거예요.
저 인간이 나보다 바둑을 잘 두고 얘도 성적이 내 얘보다 낫고 사위를 봤는데 그렇게 멋있고 우리 집 사위는 엉망이고 눈 뜨고 못 보고 저쪽은 눈 바짝 뜨고 보고. 이게 버릇이다 보니까 다른 사람 볼 때도 그 사람과 또 비교한다고요. 사는 보람이 뭐냐 하면, 남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게 있는 것이 오늘의 기쁨이 되는 양 살아가고 있어요.
그런데 옆에 나와 비교되는 아저씨가 만약에 오늘 아침에 음주운전 걸려서 죽었다. 그러면 누가 허탈하겠어요? 길가에 죽어있는 인간과 쓸데없이 경쟁했던 자기의 애씀이 헛발질했다고 느낄 때 도대체 나는 왜 사냐 하는 생각이 들지요. 그래놓고 다른 사람과 또 경쟁을 시작하는 겁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의 특징은, 남을 이기는 데서 내 존재 의미를 찾는 식으로 살아갑니다. 얘가 하나 밖에 없는 동생이 태어났다. 동생이 태어나면서 언니나 오빠는 새로운 자기 사는 의미가 생기지 않습니다. 왜 아빠, 엄마는 나한테 사랑을 듬뿍 줬는데 동생 생겼다고 자기한테 소홀하고 뭘 달라 해도 안 주고. 속으로 미워 죽겠다고 동생 죽으라 하고, 동생 생각만 해도 짜증난다는 식으로 그럴 정도로 인간은 자기 밖에 모름을 타고났습니다.
방금 타고났다고 했지요. 제가 타고났다고 할 때 무슨 뜻이냐 하면, 고칠 생각 마시란 말입니다. 타고났는데 어떻게 고칩니까. 기도한다고 고쳐질 줄 알아요, 성령 받는다고 고쳐집니까? 안 고쳐집니다. 타고났다니까요. 타고난 것은 죽을 때까지 가져가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말하지요. 예수 믿고 개과천선했다고. 믿지 마세요. 사기입니다. 그런 사람은 또 남을 속이려고 하는 음흉한 계략이 들어있어요. “나, 예수 믿고 새 사람 되었다.” 그럴 때 이렇게 하세요. “너, 지금 무슨 짓하고 있는지 네가 아느냐? 어디서 내 앞에서 사기를 쳐. 목사님 말씀 들어보니까 타고난 것은 고칠 생각 말라는데.”
남한테 양보 좀 한다고 개과천선 된 것 아니에요. 그냥 양보했을 뿐이지요. 환경 바뀌면 본색 나오게 돼있습니다. 지금 환경에 따라서 위장을 잘해요. 자기조작에 능하다니까요. 인생을 오래 살았다는 말은 사기에 능한 기술을 그만큼 획득을 잘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젊은이들은 그게 좀 어색하고 연세 많은 이는 그게 숙달되어 잘 안 들키는 것뿐이지 인간은 달라지지 않았어요.
언제부터 예수 믿었다고 주여, 주여. 하여튼 입에서 내놓는 종교적인 용어나 주여 믿습니다, 라는 단어 남발, 그것 다 흉내 낸 거예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인정하는 것은 개인을 두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고 네가 집단에 속했다는 것을 보고 규정해주시는 거예요.
서울에 회사가 있는데 휴가내서 대구를 다녀왔답니다. 그 다음부터 회사에서 책상을 빼낸 거예요. 대구 갔다 왔다고. 그 사람이 개인적으로 얼마나 착하냐, 성실했느냐, 그동안 회사에 충성한 것 묻지 않고 대구 갔다 온 것 때문에. 왜냐하면 대구 갔다 온 사람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집단적으로 규정을 받아요. 개인적 단독적이 아닌 집단적으로 규정을 받아요.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집단적으로 규정됐기 때문에 구원받는 거예요. 개인적인 솜씨를 발휘해서 구원받는 그런 건 없어요. 집단적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인 개별자, 단독자에서 이 집단의 단일화, 집단 전체를 하나의 개인처럼 단일화시켜서 구원하는데 이 집단의 단일화를 이스라엘,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렇게 보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벌을 받아도 단체 벌을 받아요. 아간이 하나님께 대드는 행동을 했더라도 벌은 다른 사람이 다 받아요.
대구 청정지역이거든요. 그런데 한 사람, 31번 신천지 아줌마 때문에 전부 다 벌 받은 거예요. 우리교회 어떤 분은 부산에 일하러 갔는데 대구 출신이라고 계약파기 됐어요. 대구출신이란 게 아무 상관도 없는데. 일체 모든 단독자, 개별자 요소를 다 빼는 거예요. 내가 열심히 행하겠습니다, 바르게 살겠습니다. 필요 없어요.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것 다 제거돼버립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26장 2절에 나옵니다.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나의 성소를 공경하라” 안식일은 시간이지요. 시간인데 그냥 시간이 아니고 시간의 단일화에요. 그 다음에 성소란 공간이지요. 공간의 단일화입니다. 단일화란 것은, 개별적으로 단독적으로 이건 믿음 아니라 했지요. 개별적으로 단독적으로 갖고 있던 고유한 공간과 고유한 본인만의 시간 같은 것을 전부 다 주께서는 의미를 제거해버린다는 뜻입니다.
개별적인 공간이란 자기가 살고 있는 아파트나 집을 의미하겠지요. 교회라면 교회. 여기 무슨 동입니까? 학산동이라는 동네에 교회가 있잖아요. 새순교회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 개인적으로 있고 다리 건너 쪽에는 새순교회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인정하지 않는 거예요. 아파트가 있다면 저쪽에는 내 아파트가 없지요. 그러니까 개인적인 공간은 인정받지 못합니다. 그리고 시간이란 개인적인 추억이에요. 개인적인 기억. 개인적인 추억과 기억이 그 사람의 시간을 형성하는 겁니다.
개인적으로 20대에 얼마나 잘 나가고, 30대에 얼마나 잘 나가고, 주께선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개별적이고 단독적인 시간과 공간은 무엇을 위해서 이것이 날아가야 되냐 하면, 집단적인 시간과 집단적인 공간을 위해서 이런 것들은 다 제거대상이 되는 겁니다. 이걸 축출하고 다 없애버려요. 이걸 다 제거해버리는 겁니다.
제거할 때 쉽게 제거 되겠습니까? 안 되지요. 단독자란 아까 했잖아요. 타고났다고요. 인간이 자길 위해 사는 건 타고난 거고 이걸 중간에 고친다, 못 고친다? 안 고쳐져요. 어느 교회 가도 자기 교회 자랑하고 어느 단체 가면 자기 단체를 자랑하고 어느 회사 가면 자기 회사를 자랑하다가 거기서 잘리면 욕한다고. 새로운 회사 가면 또 칭찬하고. 모든 것은 전부 다 현재 내가 있는 공간과 내가 있는 시간이 최우선이에요. 이걸 어떻게 고칩니까? 못 고치지요.
평양 살다가 코로나 도니까 지도자란 인간이 어디로 내뺐느냐? 원산으로 내뺐잖아요. 보세요. 지도자 동지부터 해서 자기 밖에 몰라요. 우리가 만약에 북한의 지도자급이라면 평양에 남겠습니까, 원산으로 빠지겠습니까? 우리도 역시 원산으로 빠지지요. 그러니까 남을 욕할 것 하나도 없어요. 타고난 것은 우리 힘으로 고쳐지질 않아요. 다만 제거대상이에요.
제거할 때 어떻게 하는가? 잔인한 처단. 다른 말로 하면 과도한 잔인성, 이것이 동원됩니다. 레위기 26장 27절부터 보겠습니다. “너희가 이같이 될지라도 내게 청종치 아니하고 내게 대항할진대 내가 진노로 너희에게 대항하되 너희 죄를 인하여 칠 배나 더 징책하리니 너희가 아들의 고기를 먹을 것이요 딸의 고기를 먹을 것이며”
세상에 아들딸보다 더 귀한 게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보다 더 귀한 게 내 아들딸인데 내가 살려고 아들의 고기를 먹고 딸의 고기를 먹는다면, 그리고 그 앞에 17절에 보게 되면, “너희가 너의 대적에게 패할 것이요 너희를 미워하는 자가 너희를 다스릴 것이며 너희는 쫒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리라 너희는 그렇게 되어도 내게 청종치 아니하면 너희 죄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칠 배나 더 징치할지라” 20절에, “너희 수고가 헛될지라”
이 땅에서 살아보려고 어쨌든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다 깨지고 집구석은 파탄 나고 모든 가족은 아프고 뿔뿔이 헤어지고 교통사고로 죽고 병들어 죽고 완전히 산산조각 날지라도, 23절에, “이런 일을 당하여도 너희가 내게도 돌아오지 아니하고”라고 돼있어요. 그러니까 레위기 하나님 말씀을 보게 되면 하나님의 처단이 너무 잔인하지요. 우리 보기에 과도한 처벌이라고 느껴질 겁니다. 왜 이렇게 과도한 처벌을 내리느냐 하면, 우리를 어르고 달랜다고 우리가 새 사람 될 위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자, 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이라고 하면서 너무 차갑고 너무 잔인하게 처단하고 처벌하시는가?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을 포기 안 하기 때문에 그래요. 아까 물고기 비유를 드렸잖아요. 온갖 반항을 다 해요. 나는 나만 잘되길 원할 뿐이다. 줄곧 그런 식으로 살아왔다. 여기서 지적질하면 하나님이라도 가만두지 않겠다. 이런 본성이 매일같이 터져 나와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 그래 누가 이기나 보자, 하고 매일같이 쳐버리죠. 매일같이 이 땅의 삶이 궁하게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신종코로나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나오겠지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심하게 다루어서 도대체 하나님이 얻고자 하는 게 뭡니까? 그것이 레위기 25장 제일 마지막에 보면 나와요. “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품꾼이 됨이라” 품꾼이니까 주인은 따로 있지요. 누가 주인입니까? 하나님이 주인이 된다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종, 품꾼이 되는 관계가 이뤄지는 겁니다.
품꾼이 된다는 말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인데, 하나님의 일이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모든 시간을 단일화시키고 공간을 단일화시키는 이 말이거든요. 안식일이란 뭐냐 하면, 하나님이 홀로 일해서 창조를 완성시키는 겁니다. 따라서 시간의 단일화는 시간의 중지, 시간이 중지된 것을 뜻해요.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그대로 가는 거예요.
시간의 중지=영구화. 영원히 만들어서 이걸 단일화시킵니다. 안식일의 영원함. 영원한 안식. 시간이 흐르지 않고 그 자체로 정지돼있으면서 그 자체가 완성이 되는 그 안식의 때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개인적인 시간, 개인적인 기억과 추억 같은 것, 사진첩, 앨범, 그런 것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안식일이 얼마나 지독한지 1234567 그 다음에 8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8이 없어요. 꼭 모래시계 같아. 다하면 거꾸로 돌리듯이 끝나면 또 다시 1234567, 끝나면 또 1234567. 그러니까 1부터 7은 천지창조가 완료될 때 7일 만에 완성됐거든요. 7일 만에 완성됐다는 이 조건이 단일조건이 돼버렸어요.
여러분 아시다시피 천지창조 할 때 1부터 7까지 할 때 인간이 한 게 뭐가 있습니까? 하나님 창조할 때 인간이 도운 게 있어요, 없어요? 도운 게 없지요. 그 원리가 천국의 원리에요. 천국의 원리가 뭐냐 하면, 내가 한 것도 없이 혜택 누리는 상태가 천국이 되는 겁니다. 한 것도 그냥 혜택 입었다는 조건을 유지하려면 내가 조금이라도 이 정도 했잖아, 라는 요소를 그냥 방치하겠어요, 그걸 제거하겠습니까? 제거하지요.
그런데 왜 그렇게 잔인하게 제거하느냐? 잔인하게 제거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인간이란 모든 것을 자기 위주로 하는 것이 타고났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뭘 하나 봐도 저건 내가 열두 살 때 한 것, 저건 내가 서른네 살에 했던 것, 내가 이십 년 동안 적금 부어서 0순위 되어 산 집. 자꾸 뭘 하나 볼 때에 그 기념물이 무슨 기념물이냐? 내가 이만큼 살기 위해서 애썼다는 것이 전부 다 있는 거예요. 그것 폭탄 맞아버립니다. 폭발해버립니다.
내가 애써서 아파트 샀는데 사기 당해서 홀라당 다 날릴 때 우리는 뭘 느끼겠습니까? 주께서 참 천국 넣어주려고 이런 복까지 주셨구나, 이런 생각하겠어요, 안 그러면 그동안 예수 믿은 보람이 없구나. 오늘부터 교회 빠이빠이다. 목사님, “왜 나오십니까?” “집에 일이 있어서.” 집에 일이 있어서 못 나오겠다는 거예요. 빠이빠이에요. 이런 식으로 해서 그 다음에 뭐가 틀릴지 알 수 없거든요. 집을 가져가는 하나님이 딴 건 안 가져가겠어요? 내 건강 안 가져가겠습니까? 그러면 나한테는 남는 게 없잖아요. 나한테 남는 게 없는데 미쳤다고 교회 다녀?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안식이라는 시간의 단일성, 이걸 고정성, 고정성과 성소의 영원성을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뭘 하셨느냐? 그냥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어서 안식일을 완성했고, 안식일의 주인이니까, 죽어서 성소를 영원화시켰어요. 예수님의 방식이 우리로서는 엉뚱하다는 거예요. 너무 극단적이어서.
주님이 죽으셔야 이게 된다 말이에요. 그런데 주님이 자살하신 게 아니고 오자마자 베들레헴에 태어나자마자 번개탄 피워놓고 돌아가신 게 아니고 율법대로 사시는 방식으로 그러니까 인간이 지킬 수 없었던 율법을, 안식일이고 성소고 모든 율법을 자기한테 다 집어넣으니 그것이 뭐가 되었다? 그게 하나님의 희생제물이 되었다는 겁니다. 바로 십자가에 담긴 의미가 그 의미에요. 인간이 지킬 수 없었던 것, 그래서 인간은 버림받아야 되는 것 그걸 대신해서 주님께선 모든 율법을 자기한테 다 쏟아 붓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뭐라 하느냐? 아까 땅에다 이불했지요. 이불을 뭐라 했습니까? 율법이죠. 이 율법을 하나님께서 완성을 시키는데 율법을 율법대로 남기는 것이 아니고 그걸 인격화시키는 거예요. 성소에 있는 단일 제사가 그걸 의미합니다. 성소에 있는 제사만이 제사로 인정받아요. 그 말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써 바쳐서 일반 집단이 단체로 용서를 받아요. 개인으로 용서받는 게 아니고. 믿음으로 죄 용서 받는 것이 아니고 집단 이름으로 단체로 용서받는단 말이죠.
이해 안 되시면 쉬운 말로 이렇습니다. 콜센터 여자 직원들 같아. 콜센터 위에 사장, 회장단에서 무슨 일을 정해놓으면 밑에 있는 여직원들은 그 소식을 알릴 수밖에 없어요. “예예예예. 대구생명보험인데 이제부터 보험료 올리겠습니다. 이번에 회사방침이 바뀌어서, 윗사람이 바뀌어서 알립니다.” 이게 바로 품꾼이란 말이죠.
품꾼이란 자기가 모든 기획을 하는 것이 아니고 윗사람, 하나님이 정해놓은 그 계획과 프로젝트를 우리는 세상에 나가서 증거하는 거예요. 이 관계, 일은 위에서 정하고 우리는 밑에 말단 여직원이에요. 그냥 전화 걸어서 고객들에게 알려주는 거예요. “이제부터 대출이자 올린 것 통보해드립니다. 앞으로도 신한은행 계속 이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5월부터 대출이자를 0.2% 올리고 예금이자는 마이너스고. 이런 식으로.
그러면 “신한은행 왜 그래.” 하면, “저 보고 이야기하지 마시고요. 우리 회사 방침이 이렇게 되었습니다.” 하고 그냥 통보하는 거예요. 집단 단일체계가 우리는 다양성으로 하늘의 이야기를 지상에 증거하라고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 성령을 받은 겁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