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200424a 마가복음15장 1-4절(길트임)-이 근호 목사
광주강의20200424a 마가복음15장 1-4절(길트임)-이 근호 목사
마가복음 15장 1절부터 보겠습니다.
1절,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로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주니
2절, 빌라도가 묻되 네가 유대 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 말이 옳도다 하시매
3절, 대제사장들이 여러 가지로 고소하는지라
4절, 빌라도가 또 물어 가로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저희가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소하는가 보라 하되
5절, 예수께서 다시 아무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빌라도가 기이히 여기더라
천국이야기를 하시는데 있어서 그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천국관을 고려할 필요가 있죠. 유대인들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고발하고 고소할 때 뭔가 자기들 생각하고 다른 생각이 있기 때문에 고소하는 거죠. 자기들 생각과 다른 것이 있기 때문에. 모든 점에서 예수님과 공통점이 없었다 이 말이죠. 모든 점에 있어서. 그러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의 천국이라고 하는 것은 우선 하나님 나라니까, 이것은 무슨 나라는 아니냐 하면은 인간나라는 아니겠죠. 그리고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어떤 하나님이냐 하면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에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유대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유대인들이.
천지라고 하는 것은 지구로 말하면,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지구 바깥에, 대자연바깥에 어딘가 하나님 나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왜 그런가 하면은 사람들 보기에 이 대자연은 곧 눈에 보임, 눈에 보이거든요. 해와 달과 별이 지금 눈에 보인다 이 말이죠. 그런데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만 누구는 안 보입니까? 하나님은 눈에 안 보이잖아요. 인간들이 생각하는 하나님나라라고 하는 것은 이 대자연 보다 더 위에, 하나님나라를 지상에 있는 장소개념으로 따지면 하늘나라가 되겠죠. 하나님나라, 하늘나라, 천국, 전부다 이 대자연 말고 따로 계시는 곳에 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나라가 딴 데 있다면, 이 대자연에는 자연도 있고, 산에는 사슴도 있고, 풀도 있고, 그런 게 있겠죠. 인간도 있고. 인간+자연, 이게 하나의 공간이 되고, 하나님나라는 하늘나라니까, 이 공간 바깥에 다른 공간이 되겠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하늘나라는 이 세상 바깥에 따로 있는 게 되죠. 이게 유대인들의 생각이고. 이걸 제가 유대인들의 생각이라고 이렇게 언급하는 것은, 제가 처음에 강의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유대인들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에는 같은 게 없었다. 공통점이 없었다. 그런 이야기가 되죠. 그러면 제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천국이 뭐냐, 라고 운을 떼면서 이렇게 설명한 겁니다. 지금 이 생각을 그냥 우리가 고수하고 있으면 누구하고의 생각과 공통점이 없느냐 하면은 바로 예수님의 생각과 우리가 공통점이 형성이 되지를 않습니다.
자, 예수님께서 이 생각이 잘못됐고, 이거는 엉터리고, 이거는 가짜다, 라고 한다면, 만약에 예수님께서 이 생각 전체가 잘못되었다고 규정을 한다면, 그 잘못됐다는 규정을 받고 난 뒤에 그 유대인들이나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이나, 본디오 빌라도도 마찬가지죠. 이 사람들이 여기에서, 인간과 자연이 있는 이 공간에서 고쳐야 될 게 뭐가 있을까를 생각해보겠죠. 여기서 고쳐야 될 게. 하늘나라는 눈에 안 보인다. 따라서 눈에 보이는 세상 말고 따로 존재한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세상은 인간도 보이고 자연도 보이고 사슴, 코끼리, 뭐 바다에 있는 고기도 보인다. 그리고 하늘나라는 여기 따로 있다.
자, 여기서 뭐를 고쳐야 예수님과 의사가 통하겠는가? 한번 틀린 그림 찾아보는 식으로 고쳐보세요. 못 고칩니다. 고칠 수가 없어요. 자연과 인간이 함께 있는 이 공간과 그리고 하늘나라는 다른 공간이라는 이런 생각. 이런 생각에서 어디를 고쳐야 하는가, 그 고치기 작업을 위해서 마가복음 15장이 있는 겁니다. 이걸 인간은 못 고쳐요. 그러나 주님은 고칩니다. 자, 뭐부터 고쳐야 되느냐, 이것만 고치면 됩니다.
“공간이란?” 다른 말로 하면 “자리란?” 공간이란 무엇이냐, 공간이란 인간이 인간을 만나서 만든 것이 공간이다, 자리라고, 인간들은 이런 생각을 하지를 못했던 겁니다. 공간이라고 하는 것은 대자연과 우리가 그냥 있다고 생각했지, 이러한 생각 자체가 인간 대 인간이 만나서 자기들의 편리, 자기들이 이해가 되는 식으로 만든 공간이고 자리라는 생각. 이건 순전히 인간적인 생각이라는 생각을 인간들이 못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생각하는 이 천국, 예수님이 생각하는 공간은 뭐냐, 인간 대 인간이 만나서 공간이라는 자리를 생각하는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데, 그 이유가 뭐냐 하면은 인간 대 인간의 만남 자리에 누가 왔다가 누가 배척받았죠. 누가 배척받았습니까? 바로 주님이, 예수님이 배척받은 거예요. 인간 대 인간이 어떤 합의가 되게 되어 있어요. 그걸 보통 이성적 합의라고 하는데, 합리적 합의라고. 인간의 이성적으로 합의를 해가지고 옳지! 오케이! 오케이! 해서, 그렇게 생각해서 만든 이 자리에 주님이 끼지를 못하고 거부당한 겁니다.
그러니까 오늘 유대인들, 제사장들이 예수님을 고소한 거예요. 인간 대 인간으로의 만남으로 인한 그 의식이 무슨 거리가 되느냐 하면은 예수님을 고소할 거리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의견이 합치가 되지 못하니까, “너는 옳지 않아. 너는 고소감이야”라고 인간들은 고소했고. 바로 인간들이 예수님을 고소하게끔 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 본인의 뜻은 결코 인간 대 인간으로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거기에 주님의 생각과 일치되는 것은 전무하다. 하나도 없음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는 겁니다. 자, 이런 이야기는요, 진짜 영어로 정리하기가 힘들 것 같아요. 한번 예를 들겠습니다.
씨름판이 있는데, 씨름대회가 있다고 합시다. 씨름대회의 운영위원회에 대회에 필요한 돈이 한 오십 만원이 들어왔어요. 들어왔을 때에 운영위원회에서 어디에다가 사용하는지를 여러분들이 한번 맞춰보세요. 1번, 새로운 모래를 사와가지고, 40만원 모래를 사고 10만원 일꾼 들 여서 고운 모래로 깨끗하게 판을 정비하는데 50만원을 썼다. 2번, 씨름선수 생계비지원용으로 씨름 선수 한 사람당 10만원씩 다섯 명에게 지불했다. 자, 운영위원회에서 어느 쪽을 하겠어요? 1번 하겠어요? 2번 하겠어요? 운영위원회에서. 1번을 해야죠. 2번은 “10만원 받고 나는 수입이 안 돼서 씨름선수 도저히 못하겠습니다.”라고 할 수가 있기 때문에. 은퇴하겠다고 이럴 수 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50만원만 씨름판을 깔아버리면, 이거는 뭐냐 하면은 씨름대회를 계속하겠다는 것이거든요. 씨름대회라는 것, 씨름게임이라는 것을 계속 하겠다는 의지인 반면에, 2번째 씨름선수에게 10만원씩 주겠다고 하는 이것은 뭐냐 하면은, 그냥 용돈이나 쓰라고. 은퇴하든지 말든지 니 맘대로 하라는 식으로 그냥 돈을 날리는 셈이 되는 거예요. 지금 이 예가 왜 들어가느냐 하면은, 인간 대 인간에서의 만남에서 의논하고 있는 모든 생각들은 무슨 판을 지속시키려고 하느냐 하면은 인간세상을 지속시키려는 의도가 강렬해요.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고소한 거예요. 이 판을 깨기 싫다는 거예요. 아까 인간이 여기 있고 인간의 눈에는 뭐가 보이고? 대자연이 보이고. 하늘나라는 어디에 있다? 우리가 죽으면 가는, 육체는 죽어도 영혼은 따로 가는, 하늘나라가 따로 있는 그곳에 합류하게 되면 우리는 영생을 얻는다. 그 판, 그 게임판, 그 공간, 그게 납득이 되니까. 그게 합리적으로 이해가 되거든요. 그렇게 하나님이 따로 그 공간에 계셔버리면 인간들이 어디에 주눅 들지 않느냐 하면은 이러한 틀을 만들어놓은, 프레임을 짠 우리에게는 어떤 하자 같은 것이 노출되지 않겠죠. 내 잘못이 지적받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인간들이 모여서 이야기하고 의논하는 이 모든 생각의 기저, 바탕에는 뭐냐 하면은 인간이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지적받거나 정죄당하지 않을 범위 내에서 우리는 최선을 다하자. 그렇게 되죠. 하나님을 충실하게 복종하고 섬길 테니까 하나님도 우리를 너무 나무라지 마시기 바랍니다, 라는 의식이 이게 전제가 되어 있는 거예요. 이것을 공식화시키면 이래 됩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악마는 인간을 무시하지 않는다. 악마는 인간을 꼭 쥐고 있어요. 앞잡이니까. 자기의 아바타니까. 가면이니까. 악마는 인간이 자기 잘난 체를 해야 악마가 신이 나요. 악마의 일을 계속할 수 있다고요. 인간이 자기가 정당성이 될 때,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원칙은, 이건 무시가 되는 겁니다. 그거는 희석이 되겠죠. 그거는 실제화되지 못하고 그냥 무효화돼버리겠죠.
악마는 인간을 무시하지 않는다. 이걸 다른 문장으로 옮기면 이렇습니다. 악마의 일은 필히 인간의 의미와 가치를 경유한다. 살리면서 경유한다. 악마의 일은 반드시 인간에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인간에게 무슨 가치가 있느냐, 인간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이게 인간에게 어떤 실익이 있느냐, 라고 하는 그 내용을 같이 합세하면서 모든 일이 굴러가도록 그렇게 악마는 일을 해요. 만약에 어떤 남편이 아내에게 당신도 복음을 받아들이면 어떻겠느냐? 라고 했을 때, 그 복음을 안 받아들이는 아내가 남편에게 그 복음을 받아들이면 우리한테 무슨 이익이 있는데? 이렇게 되겠죠.
또 복음을 아는 어떤 친구가 안 믿는 친구한테 복음을 전할 때, 안 믿는 친구가 하는 말이 “니 이상한 교회에 다니네.”라는 말을 흔히 많이들 들었죠. “니 이상한 교회에 다니네.” “니 이상한 기독교 믿네.”라고 할 때에, 왜 복음을 전하고 십자가를 전하고 죄인이라는 그 이야기를 했는데, 왜 그쪽에서의 반응이 “니 왜 기존의 교회에 안 다니고 이상한 교회에 가서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느냐?”라는 말을, 왜 그런 말을 할까요? 그들에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화내게 하는 요소가 될까요? 바로 뭐든지 좋은 것은 나에게 일단 오라 이 말이죠. 나에게.
나에게 와서 내가 검사를 하겠다. 이것이 나한테 이익이 될 거냐, 손해가 될 거냐, 검사하겠다 이 말이죠. 검사해서 나한테 손해가 되면 그거는 거부하고, 옳다 싶으면 그거는 받아들이겠다.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 “오케이. 그거는 믿을게.” 그런데 도중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우리는 죄인이다.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 이 소리가 딱 와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인간은 거기에 대해서 “니 어느 교회 다녀? 이상한 교회에 다니네.”라고 거부하겠죠.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인간은 맹탕이 아니다 이 말이죠. 인간은 뭐가 있어요. 인간은 뭐가 있다고요.
어떤 영화에 보면 이런 대사가 나와요. 아주 의미 있는 대사가. 종교영화인데요. 귀신영화인데. 거기에 종교인들이 모여서 이렇게 하니까, 거기에 의식이 깨어있는 젊은 종교인이 소위 종교지도자급이 되는 사람들에게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장사 냄새 많이 나요.” 장사 냄새 많이 난다고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종교라고 하는 것은 진리만을 외쳐야 될 건데, 진리를 안 외치고 진리를 빙자하면서 뭔가 얻을 것을 얻는 거예요. 뭐를 경유하죠? 이렇게 진리를 전하면 우리 교회, 우리 절간, 우리 성당에 뭔가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게 있을 때에, 이게 영화니까, 순수를 추구하는 그 젊은 성직자가 하는 말이 “장사 냄새 많이 나요.” 조심스럽게 그런 이야기를 하거든요. 장사 냄새라고 하는 것은 영업이거든요. 영업. 영업 냄새 난다는 거예요. 손님들에게 호객행위를 하는 거예요. 호객행위.
그러면 이거는 뭐냐 하면은 아까 씨름판을 이야기하면 뭐 어떤 진리, 성경의 어떤 복음이라도 무슨 판을 유지하고 싶다? 이 교회라는 장사판은 그냥 지속시키고 싶은 거예요. 유지하고 싶은 거예요. 계속 끌고 가고 싶은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순수하지 않고, 맹탕이 아니고, 빈 게 아니고 뭔가 있어요. 뭔가 있는데, 인간들은 인간 대 인간의 만남에서 뭔가 자기는 순수한 만남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만나는 거예요. 왜? 둘 다 똑같은 인간들이니까. 서로 잘 통해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본디오 빌라도, 막힌 게 없습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그들이 기대하는 바는, 이 로마 원로원의 입장으로 볼 때에는 이 유다지방이 평화롭게 계속해서 세금을 갖다 바치기를 원하고 있죠. 지속하기를 원한다. 지금 로마의 통치가 지속되기를 원해요.
AD70년에 유다나라가 망하죠. 열심당원 3000명인가 도망을 갑니다. 어디로 가느냐, 마사다라는 요새로 도망을 가요. 유다 예루살렘이 있고 여기 사해가 있고 여기 마사다라는 뾰족 솟아오른, 옛날 헤롯의 별장이었습니다. 높이가 한 300미터인가, 여기에 물탱크에 물도 저장까지 하고 비둘기 사육까지 해서 단백질을 보충하면서, AD70년에 공격했는데 여기서 무려 3년을 버팁니다. 나중에는 애들 빼놓고 다 자결했죠. 다 자살해서 망하죠. 아주 유대인들이 고집이 셉니다. 자, 이걸 제가 방금 고집이라고 했죠. 고집이라고 하는 것은 지키고 싶은, 지탱하고 싶은 것이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환난과 곤고와 어려움이 있을 때 지탱하고 싶고 지키고 싶은 것이 있는 거예요. 제가 수요설교 때에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치유나 치료가 아니고, 그리고 얽히고설킨 그러한 관계를 그냥 핀셋으로, 족집게로 하나하나 들추어내는 거예요. 안에 뭐 있나 함 보자~ 뭐가 있어가지고 이렇게 구원을 요구 하는지 함 보자~ 도대체 누가 무슨 목소리를 내어가지고 감히 구원받을 자격이 있는, 자아는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고 억지를 쓰고 우겨대는 이 웬수, 웬수덩어리 어디에 있나 함 보자~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그래, 꽃이 피어라. 내가 찾아낼게. 하나하나 들추어내는 거예요. 하나하나.
내가 구원받아야 의미가 있다는, 뭔가 의미가 있어요. 뭔가 가치 있는 것을 꿈치고 있었다고요. 이걸 안 들키려고 포장을 했지만, 주의 영광을 위해서, 오직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하늘나라는 좋아요. 주님만 있으면 좋아요. 그런 헛소리를 하지 말고. 그런 찬양, 그런 고백을 함으로써 도대체 니가 처음부터 뭘 얻고자 하느냐, 어떤 본성에서 그런 위장술이 나왔는가를 한번 보자는 말입니다. 장사 냄새 많이 나요. 예수 믿습니다, 라는 그 발언 속에서. 너의 진원지, 너의 원천이, 니가 아는 것, 니가 알고 있는 원천, 그러나 그거는 니 원천을 니가 몰라도 너무 모른다 이 말이죠.
성령께서 성경을 쓰실 때는 어느 정도로인지, 첫째 이 성경은 아무도 모른다. 내용을. 그리고 두 번째는 아무도 안 읽는다. 이것을 전제로 해서, 극한의 깊이를 담아서 성경을 쓴 거예요. 아무도 안 보고 아예 안 읽기 때문에 성경에 모든 내용의 깊이를 거기에 다 담을 수 있는 겁니다. 애들이 혼자 장난감을 가지고 놀 때에, 다섯 살 여섯 살 먹은 애들이 혼자 중얼중얼 거리죠. 뭔가 할 말이 많아요. 그런데 엄마가 다가와서 “얘야! 방금 무슨 이야기했지?”라고 물으면 입을 다물어요. 왜? 듣는 사람이 있을 때는 내 쪽에서 편집이 시작되는 겁니다. 편집이. 다가오는 타자의 응시에 의해서 그 타자 앞에서 내가 손해를 볼 것이냐 이익을 볼 것이냐를 계산을 하면서 그 엄마한테 전달할 내용은 자체적으로 조정을 하고 편집을 해가지고 자기한테 손해가 안 될 것만 해서 주죠. 그런데 엄마가 떠나고 난 뒤에는 혼자 또 중얼중얼 거려요. 뭘 잘하다가도 자리 펴면 안 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이 성경말씀은 아무도 몰라요. 내용에 대해서. 인간은. 그리고 인간이 읽어도 모를뿐더러 읽지도 안 해요. 그다지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읽지도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온갖 말을, 창세부터 마지막까지의 모든 계시를 성경에다가 담을 수가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게 되면, 성경을 이렇게 성령의 인도함을 보게 되면 성경의 내용을 한꺼번에 다 알 수 있는 게 아니에요. 현재 인간이 처해있는 그 분량만큼 성경을 압니다. 그리고 다시 또 봐요. 보면, 전에 봤는데 새로운 것이 또 나와요. 그 다음에 봐도 또 나와요. 왜? 극한의 깊이의 내용이 다 들어있기 때문에. 극한의 깊이가.
그래서 사람들이 처음에 성경을 볼 때 선입견이 뭐냐 하면은, 나 구원받아야지. 구원받으려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하는데 뜻이 어디에 있지? 아, 성경에 있구나. 그러면서 뜻을 따르고, 그 다음에 그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면 나 구원이 된다고 성경을 보는 거예요. 그게 성경의 뜻이 다겠습니까? 점점 깊이 들어가면 내가 구원받아야지, 라는 것 자체를 누가 지적하고 누가 공격하느냐 하면은 성경이 공격해요. 성경이. 내가 구원받아야 되겠다는 이것이 무슨 생각이냐 하면은 너무나 인간적인 생각이에요. 인간적인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누구 생각입니까? 사람의 일= 누구의 일입니까? 악마의 일이죠. 베드로에게 이야기했잖아요. 악마적이다.
악마적인 의도를 가지고 성경을 보니까, 볼 때 그 뜻을 가지고 보니까 나중에 나오는 것도 뭡니까? 이래서 나는 구원받았구나, 라는 것이 나오는 거예요. 터무니없죠. 그래서 제가 아까 인간+인간의 생각, 그래서 유대인들이 수천 년 동안 정리한 것은 뭐다? 눈에 보인은 세계 말고 하나님나라, 하늘나라라는 단어를 써서 하나님은 하늘나라에 계시고 인간은 인간세계에 있어서 우리가 죽으면 우리의 몸은 죽어도 우리의 영혼은 어디에 간다? 하늘나라에 간다. 이분설, 영혼과 육으로 되어 있다. 또는 워치만니처럼 영과 혼과 육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올라간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원어를 분석해가지고, 감히 원어가 없는데, 원어를 분석해가지고 지 생각이 옳다고 정리하는 거예요. 히브리인들하고 한국 사람하고 누가 원어를 잘 알아요?
원어를 안다는 것은 사전적 의미가 아니라 그 민족 단위의 역사와 전통과 문화가 거기에 다 녹아져있어요. 민족단위의. 그러면 히브리인들이 원어를 아느냐? 히브리인들 본인들도 몰라요. 마치 한국 사람이 한국에 대해서 알아요? 모르잖아요.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한국 민족이라는 단어까지 계산해서 다 알겠습니까? 모르죠. 다만 어떤 외국인이 한국에 온지 3년 정도인데 한국말을 잘하면, “아! 저 사람 정말 한국말 잘합니다.”라고 하지만, 그 사람이 한국 사람처럼 잘한다는 뜻이 아니고 예상 밖에 잘한다는 뜻이지. 진짜 한국말 잘한다는 뜻이 아니에요. 근데 그 외국사람이 연세대에 가가지고 한국어 공부를 한다면 진짜 한국 사람보다 어휘력이 더 많아질 수가 있죠.
봉준호 감독의 통역사 샤론 최(성재), 샤론의 백합, 샤론 최가 영어를 한번 쓰는 것을 보세요. 영어. 그리고 우리나라 가수 중에 박정현. 박정현의 영어 구사력. 컬럼비아 대학에서 영어 석사학위를 받은 사람이에요. 박정현이는. 보통 사람이 아니죠. 여기 십자가마을에 함00 집사님이 계시지만. 일반인들이 쓰는 단어를 넘어서죠. 아무리 넘어서도 성경에 있는 내용은 인간이 히브리어를 하던, 뭘 해도 인간의 이성의 능력으로는 뽑아낼 수가 없어요. 왜? 주님은 인간하고 안 노니까. 놀지를 않으니까. 이 생각 자체가 뭐냐, 주님과의 단절이에요. 단절. 어떻게 아느냐, 고소하니까. 고소.
유대인들,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그 당시 학문적으로 깊이 있는 사람들입니까? 예수님이 말 한마디만 하면 그 단어 전부 다 분석합니다. 내린 결론은 뭐냐 하면은 공통점이 하나도 없느니라. 예수님하고 공통점이 하나도 없어요. 고소할 때 좀 더 알아서 내뿜으려고 고소한 게 아니거든요. 이미 결정을 내린 거예요. 우리 편 아니다. 근데 우리 편 아니다, 라고 끝나는 게 아닙니다. 아까 했죠. 인간은 지속하고 싶은 게 있어요. 이 전통, 이 역사, 이 질서, 이 체제, 거기에 예수님은 반대된다는 것을 이미 결론으로 내린 겁니다. 이제 남은 것은 구실만 뽑아내면 돼요. 이리저리. 구실 뽑는 것이 여기에 나오죠. 3절에 보면 여러 가지가 있어요. 여러 가지로 고소한다. 또 4절에 보면 얼마나 많은 것으로 고소한다. 많은 것. 여러 가지.
그러니까 이거는 예수님에 대해서 고소하고 고발할 때는 뭐 한두 가지 제목이 아니고 모든 게 다 다르다. 모든 게. 모든 게 다 달라요. 틀린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점을 섭섭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의도하신 거예요. 왜 의도하느냐, 하늘나라는 여기에 있고 인간은 지상에 있다는 이러한 모든 공간, 다른 말로 하면 자리, 이 공간과 자리는 뭐냐 하면은 인간 대 인간의 만남에서 나오는, 유발된 결과라고 이래 보는 거예요. 인간의 만남에서. 예수님께서는 이걸 호의적으로, 내 다리를 여기에 끼고 싶지 않다. 발을 빼는 겁니다. 발을 뺄 때 그냥 빼는 것이 아니고 완전히 전체 다를 부정하면서 발을 빼겠다는 의도로 주께서는 기꺼이 십자가 재판에 참여하신 겁니다.
너희들의 자리에는 천국은 없다. 너희들의 자리에는 천국이 왜 없는가? 하나님인 나, 예수님을 밀었으니까. 예수님을 밀면서 인간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하늘나라 생각을 하고 있다고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빠진 하나님 나라가 그게 하나님 나라겠습니까? 그게 천국이겠어요? 아니죠. 애초부터 예수님이 빠져버리면 그들이 아무리 천국과 지옥을 논해도 하나님을 논해도 전부 다 헛것이 되는 겁니다. 그 공간 자체가. 그러면 왜 인간들은 예수님을 밀치면서도 그들은 왜 아무 문제가 없다고 여기는가, 그들은 이 사실을 몰랐어요. 인간의 형상은 죽음의 형상이라는 이 사실을 몰랐던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죽음을 생각 안하고 ‘살아있는 인간의 형상은~’이라고 나온 거예요.
살아있는 인간의 형상이니까 뒤에는 어떤 내용이 나오든, 하나님의 영광, 예수그리스도를 본받는 것, 거룩, 아무리 해도 기본적으로 무슨 요소가 계속 여기에 박혀있는 거예요? 인간은 살아있을 만하다. 인간에게는 의미 있다, 가치 있다가 계속 살아있다. 살아있는 인간의 형상은 이 자체를 보여 주는, 살아있는 생명이나 목숨, 이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보여줘서 인간의 형상이라고 이렇게 하는 거예요. 오늘날 이천년 교회 역사 신학에서 인간의 형상을 뭐로 봅니까?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죠. 하나님은 죽은 하나님입니까? 살아있는 하나님입니까? 살아있는 하나님 형상과 인간의 형상은 서로 통하는 데가 있다고 이렇게 본 겁니다. 체인, 연결되어 있다. 그렇게 보는 거예요. 이게 바로 유대인들의 생각이에요.
그 어느 누구도, 제가 알고 있는 신학자들 중에서 어느 누구도 칼바르트, 칼빈이라든지, 루터도 마찬가지고. 하나님의 형상이 죽음을 묘사하기 위해서 인간이 있다고 생각한 사람을 저는 아무도 본적이 없습니다. 인간의 형상을 뭐라고요? 죽음이죠. 왜? 예수님이 곧 인간이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죽었잖아요. 얼마나 간단해요. 성경내용이. 근본적으로 살아있어야 된다는 것을 고집을 부리니까, 신앙이고 진리고 다 엉망진창이 돼버린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나를 못 빠져나와요. 내가 나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이게 불교고 천주교고 그렇습니다. 기독교도 마찬가지지만. 계속 도를 닦아. 계속 도만 닦고, 자기를 믿으며 순수를 믿으며 뭐 그런 거 있잖아요. 순수를 믿으며 정의를 찾고.
이게 뭐예요? 순수 밑에 깔리는 게 뭡니까? ‘어쨌거나 저랬거나 나는 죽으면 안 돼.’ 이게 깔려있다고요. “살아있는 것은 손대지 마세요. 주님. 살아있을 때 제대로 제 값어치하고 살아있으면 되잖아요. 그러니까 제발 죽이지는 말아주세요.” 이러한 게, 뭔가 맹탕이 아니고 깔려있어요. “인간을 죽이는 것은 주님의 실수입니다.”라는 게 깔려있다고요. “주님은 인간의 솜씨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이런 게 깔려있다 이 말이죠. 노아의 홍수나 장차 불심판이나 그런 거 생각도 안 해요. “그냥 살아있는 거나 주께서 기쁘게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재롱을.” 뭐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 이 말이죠.
그래서 아까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이라고 하는 것을 다시 해봅시다. 인간 대 인간의 만남, 그 앞에 하나 붙인다면, (산)인간+(산)인간+산낙지, 뭐 이런 거. 산인간과 산인간의 만남. 살아있네~! 하잖아요.“오, 형님 살아있네!” 영화 ‘범죄와의 전쟁’에서 나오죠. “어~ 너그 사장하고 우리 형님하고 사우나 가고. 어~” 살아있다 이 말이죠. 살아있는 인간과 살아있는 인간, 거기다가 살아있는 하나님과 같이 동업을 하고자 하는 겁니다. 장사냄새 많이 나요. 영업냄새 굉장히 많이 나요. 살아있는 우리가 살아있는 하나님께 기도하자. 기도는 뭐다? 숨 쉬는 거다. 살아있어. 기도는 숨 쉬는 것이다. 얼마나 많이 들었습니까? “구원을 받으려면 바퀴가 두 개가 있어야 되는데 하나는 말씀이고 하나는 기도다. 디모데전서를 봐라.” 뭐 이렇게 나오죠. 바퀴 둘 다 확 빼줘야....,
예수님을 추방시킨 그 세계를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 누구의 소망이냐 하면은 악마의 소망입니다. 악마가 계속해서 그것을 뒤에서 부추겨준 거예요. 그래서 이렇기 때문에 산 인간 속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죽은 나가 여기서 나올 수 있는 논리는 다 끊어집니다. 한때는 죽지만 다시 부활해서 살아있는 나. 이걸로 가요. 그러니까 좀 더 자세히 하면 나는 지금 살아있지만 나이 한 90이 넘으면 나는 죽는다. 하지만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죽은 우리를 다시 살려내잖아, 라고 하거든요.
그러면 제가 묻죠. 죽는다면서요? 예. 죽죠. 인간은 누구나 죽습니다. 그러면 누가 죽이십니까? 심술궂게 제가 묻죠. 누가 죽이십니까? 아이고, 하나님이 죽이시죠. 하나님이 죽일 때는 다 이유가 있을 건데 왜 죽이십니까? 아휴, 우리가 죄인이라 죽죠. 그러면 일부 선이고 일부 죄가 있는데, 일부 있는 죄 때문에 죽이십니까? 아니면 몽땅 죄기 때문에 죽이십니까? 몽땅 죄 때문에 죽이시죠. 그러면 내가 살아있다는 이것도 죄에 속할까요? 이게 선에 속할까요? 라고 한다면, 실례지만 어느 교회에 다니세요? 이상한 교회에 다닌다고 나오죠. 논리가 이렇게 되는 거예요.
죽는다는 것을, 내가 죽어도 주님이 부활하셨으니까 죽어도 내가 다시 산다는 이 생각을 할 때, 나라는 인간이 엄연히 죽어서는 안 돼, 라는 어떤 잘못된 선입관에 박혀 있는 인간관을 가지고 이런 아이디어를 끄집어내는 거예요. 유대인도 마찬가지에요. 그들이 다니엘서 12장을 아는 이상 부활을 안 믿는 게 아니에요. 뭐 사두개인들은 안 믿지만.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믿었잖아요. 다니엘서 12장에 나오죠. 죽은 자가 부활된다고. 시편에 나온다 이 말이죠. 부활시키는 메시야를 믿는 거예요. 근데 그들이 말하는 부활의 메시야는 뭐냐, 살아있는 나를 불쌍히 여겨서 부활시키는, 인간의 운명이니까 인간은 운명에 살다 죽는다. 이래 보는 것이지. 누가 죽이는가? 뭣 때문에 죽이는가? 이걸 몰라요. 단지 하나님이 죽이고 살린다고 본 겁니다.
그런데 아니에요. 예수님이 죽이죠.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내가 살다가 죽고 다시 부활되어 천당에 가야돼.’라는 생각 때문에 죽임을 당하신 그분이 바로 죽이고 살리고 하시는 그분의 소관이시잖아요. 그분 소관. 그러니까 신학이라는 것이 얼마나 사람들을 지옥에 보내는지 몰라요. 차라리 신학도 모르고 교회도 안 다니는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좋아요. 아는 게 문제라. 아는 게. 하나의 예를 들면 독일군하고 연합군하고 전쟁하는 2차 대전 배경 영화들이 굉장히 많았어요. 제가 어릴 때 그런 영화들이 굉장히 많았는데. 독수리요새라든지 나바론요새라든지. 그 영화 진짜 재밌다니까요. 그때 보면 독일군들은 싸움을 하나도 못해. 총만 쏘면 다 죽어.
그 영화 할 때 시나리오가 어떤 시나리오냐 하면은 교도소에 있는 말썽꾸러기 사형수나 강도 경력이 있는 사람, 그런 사람들을 뽑아요. 인생 막장인 사람들을 뽑아가지고 아주 훌륭한 지략이 있는 소령이나 장교가 진짜 헌신적으로 훈련을 잘 시켜요. 시켜놓고, 그 사람들로 하여금 이번 작전에 투입되어 성공만 한다면 너의 모든 죄는 다 면제가 된다. 이참에 조국을 위해서, 너의 형기를 끊어내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싸워라! 해서 싸우는데, 자기 개인적으로도 성질이 더럽지만 국가이름으로 나가서 독일군 쳐부수는데 이렇게 용맹스러울 수가 없어요. 자, 물어봅니다. 그 사람이 애국자입니까? 특수훈련 받은 죄수들이 나중에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면 죄수입니까? 죄수가 아닙니까? 니가 이런 법을 지키면 너의 모든 형기를 면제해주고 다시 자유의 몸으로 해주겠다는 조건이죠.
그런데 성경은 반대로 나갑니다. 법이 살아나야 죄가 살아난다. 법은 바로 인간들이 감추고 있고 모르고 있는 죄를 살려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로마서 7장 8절을 한번 읽어보세요.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네, 말을 바꾸겠습니다.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이다. 잠잠히 있다 이 말입니다. 죄가 죽은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은 법이 나타나게 되면 죄가 살아나겠죠. 그런데 법이 나타났을 때 인간의 태도가 뭡니까? 야, 법 지키면 천국에 가겠죠? 예수 믿으면 천당 간다는 법을 지키면 나는 구원받겠죠? 라는 태도죠. 그 전체가 뭐가 되는가 하면은 그게 바로 죄가 되는 거예요. 이 법이 없으면 죄가 죽지만 법이 나타나면 죄가 살아나죠.
그러면 법의 완성은, 법의 최종상태가 누구냐 하면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등장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음으로서 모든 게 죄라는 것이 같이 살아나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의 자리에서 구상했던 천국과 지옥 이 모든 것은 바로 가짜입니다. 죄가 되는 겁니다. 인간의 구상은 모든 게, 그게 거짓이 되죠. 왜냐하면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남으로서, 인간이 짐작하고 있는 모든 짐작은 그저 인간 대 인간, 자기들끼리 모여서 입 맞추고 생각 맞추어서 일방적으로 그게 옳다고 여겼던 것들이에요. 예수님 빼놓고 자기들끼리 옳다고 여기는 결론이 오늘날 신약입니다. 인간 구원 못 시켜서 아주 환장을 했어요. 사람들 구원 못 시켜가지고. 교회부흥 못 시켜서 환장을 했어요.
분명히 성경에서 교회라고 하는 것은 누가 와야 돼요? 성령이 와야 되는데, 성령이 안 온 상태에서 교회에 오려고 하니까 얼마나 이게 장사 냄새가 많이 나는지. 그러니까 성령이 와야 된다고 하니까 이번에는 뭘 가지고 하느냐 하면은 성령이 오라고 윽박지르기 시작합니다. 성령이 오라고. 성령이 시다바리인가? 뭐예요? 성령이 보기에 같잖지도 않죠. 성령이여 오시옵소서. 노래도 있죠. 성령이여 강림하사~~ 두 손을 들고 흔들면서 부르죠. 인간은 폭파시점으로 향하고 있는 폭탄을 장착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빵하고 터지면 그 자리에 누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르게 다 날아가요. 신발 하이힐만 두 짝만 남아있고 나머지기는 없어요.
인간 자체가 없어요. 왜? 인간 자체가 폭탄이기 때문에. 인간 자체가 죽음의 형상이니까. 인간이 죽음을 짊어지는 것이 아니고 인간 자체가 죽음이에요. 인간이 죽음의 형상이고, 죽음이라는 것이 안 보이잖아요. 그러니까 죽음의 모양으로 나타난 게 인간이라는 겁니다. 인간. 창세기 5장에 죽었더라, 죽었더라... 아무리 오래 살아도 결국은 죽음이에요. 그러면 죽어야 될 인간끼리 의논해봐야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들을 가지고 카페에 모이는 거죠. 커피 한잔하고. “니 뭐할래?” “아메리카노” “니 뭐할래?” “라떼” 라떼를 하든 뭘 하든 죽은 자들이 이렇게 모인 겁니다. 죽은 자들이. 수술해서 죽으나 원산 돌아다니나, 김정은이는 이미 죽었다.
살아있는 인간들이 자기가 살아있다는 것을 위해서 뭐라고 표현하느냐 하면은 직업으로 표현해요. “니 하는 일이 뭐냐?” 자, 그러면 한번 물어봅시다. 예수님의 직업이 뭐죠? 예수님의 직업이 뭡니까? 혁명가는 직업이 아니에요. 이거는 만약에 어떤 약사가 일제시대 때 민족을 살리기 위해서 가마니에 돈을 상해 임시정부에 보낸다든지, 안 그러면 약사가 총을 들고 테러한다 할지라도, 그 사람의 직업은 약사가 아니고 혁명가죠. 그렇죠. 그러면 정작 그 사람이 하는 일은 약을 팔면서 목적이 뭡니까? 우리 조선민족을 일제에서 해방하려는 혁명가 역할을 한다 이 말이죠.
따라서 성도에게는 직업은 의미가 없어요. 직업 없습니다. 애들 밥해주는 거 직업 아니에요. 혁명가죠. 혁명가. 근데 이 세상은 뭐냐 하면은 인간 대 인간의 몸에서는 인간들 세계에 기여를 해야 돼요. 보탬이 되어야 된다고요. 보탬이 되려면 백수는 안 돼요. 백수는 미워해야 돼요. 무슨 일을 해야 돼요. 무슨 일을 해서 인간세계 문명발전에 도모가 돼야 돼요. 혁명이 되어야 돼요. 그래서 세례요한한테 바리새인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묻는 게 뭐였습니까? “니 직업이 뭐니? 선지자냐?” 라고 물었잖아요. 제사장이야? 뭐야? 예수님보고는 니 어느 학교, 신학교 어디 나왔냐고 묻고. 모든 것은 직업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는 주체자리가 마련되는 겁니다.
직업+자기이름, 인간 대 인간에게 있어서는, 홉스가 이야기했죠. 이 세상은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라고. 인간 대 인간의 싸움으로 적자생존, 될 놈은 되고 도태될 놈은 도태되는 것이 진화의 원리다. 원칙이다. 이렇게 봤거든요. 인간 대 인간의 싸움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뭐냐 인간의 이름(직업) 대 무엇의 싸움이냐 하면은 하나님의 이름. 사실은 인간하고 싸우는 것이 아니고 인간 배후에 악마하고 싸우죠. 악마는 실체가 없으니까. 하나님의 이름과 인간의 이름의 싸움. 그 싸움을 주님께서는 쭉 계시해서 오셨고 끝까지 그 싸움을 진행시켜 오시는 겁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