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안양20200416b슥1:3(신기함)-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

안양20200416b슥1:3(신기함)-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에서 천사의 실제성과 인간의 실제성 그 둘 다 언급하면서 경쟁관계에 놓여있어요. 내가 실제냐, 아니면 천사가 실제냐. 내가 너무 실제성이 강해버리면 천사의 존재는 허구가 되어버려요. 그건 동화책에 나오는 실제로 있더라도 우리에게는 아무 영향을 주지 않는 그것이다. 라고 생각하지요.

의자 하나 옮긴다던지 난로 옮긴다고 할 때, “천사님! 옮겨주세요. 도와주세요. 뽀빠이.” 하는 식으로 한다고 해서 난로 옮겨지는 게 아니잖아요. 힘을 써야지요. 우리가 근육적인 힘을 길러가지고 난로를 옮긴다 말이죠. 그러면 아까 첫째 시간에도 언급했지만, 바울과 실라 또는 베드로하고 그 일행이 옥에 갇혔을 때에 누가 옥문을 열었습니까? 누가 옥문이 열리도록 지시를 내려줬습니까? 베드로 같은 경우는 옥문을 열었고, 바울과 실라는 지진이 일어났거든요. 지진을 누가 일으켰어요? 지진을. 누가 지진을 일으켰느냐, 에요. 천사지요.

그러면 왜 인간들은 평소에 난로 옮기는 거 이렇게 힘쓰고 농사짓는 거, 다 내가 했지 나는 가만히 있는데 천사가 와서 전부 다 밭을 갈아주고 그렇지 않다고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여기에 아까 간격이라는 말을 했는데 끊어짐, 단절. 인간의 역사가 진행하다가 끊어지고 난 뒤에 여기에 주님의 일이 본격적으로 개시가 되는 것처럼 예언은 그렇게 이야기되는 것처럼 예언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인간의 역사가 끊어진다는 사실을 인간은 믿지도 않을뿐더러요, 왜? 끊어져도 그 다음에도 시계는 째깍 째깍 가고 있으니까. 하늘의 시계. 해와 달과 별의 시계 가고. 실제 손목시계도 가고 있으니까. 이걸 안 믿었지요. 그리고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일이 온 사람들은 뭘 느끼느냐 하면, 전에는 내가 농사지은 저거조차도 주께서 힘을 주신 힘으로 농사지었다는 것을 알고, 내가 숨을 쉬는 것과 내가 길을 걷는 것도 주께서 힘을 주셔서 살아왔다는 것을 뒤늦게 소급해서 그걸 아는 거예요.

참, 이게 어려운 이야기인데. 참, 어려운 이야기이죠.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이렇게 인간의 일과 하나님의 일이 단절됐음을 이야기해도 그래도 시간은 흐르는 것은 마찬가지가 아니냐, 여기서 여기까지 끝이라 해도 시계는 째깍 째깍 가고 있으니까 시계 중에서 제일 큰 시계가 해와 달과 별이에요. 창세기1장에 나와요. 원래 시계라 하는 것은 해와 달과 별에 맞추어서 그렇게 시계를 만들었기 때문에. 해시계. 물시계 다 그런 거잖아요. 자연자체가 시계 역할을 한다고요.

시간이 멈춘다는 말이 인간들은 이게 진짜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그러나 시간이라는 것은 객관성을 지니고 이게 흐르느냐, 안 흐르느냐 이게 문제가 아니고 누굴 위한 시간이냐. 누구 중심이냐. 누구 중심으로 시간을 의식하느냐, 인간은 자기중심으로 시간을 의식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주의 언약적인 일 중심으로 시간이 진행하게 되어있어요.

언약을 언약답게 드러내기 위해서는 인간중심의 시간이 끊어져야 되지요. 인간중심의 시간이 끊어지고 그 다음의 시간은 흐르는 것은 뭐가 되느냐 하면 의미가 없어요. 무의미가 되는 거예요.

십자가를 설명하면서 십자가 자체가 종말입니다. 그 뒤에 나오는 아무리 연도가 2000년, 3000년 돼도 그건 의미 없습니다. 라고 말을 해도 이 의미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거예요. 베드로후서3장에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고 이렇게 했는데 이게 또 무슨 뜻이냐 하면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 이것은 이미 모든 것이 종말 체제에 들어가 버리면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이것은 예수님 중심에 시간이기 때문에 인간 중심의 시간은 아니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중심의 시간이란 말도 이건 잘못됐어요. 사실은 이렇게 해야 돼요. 예수님의 중심의 시간이라 하지 말고 이걸 합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아까 했지만, 묵시라 해야 돼요. 묵시. 하나님의 예언의 세계 또는 말씀의 세계에요. 관심사를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관심사가 예수님께서 일하실 때는 그 다음부터 예수님 죽고 난 뒤에 몇 년 됐느냐, 여전히 관심이 옛날에 내가 인간들이 인간중심으로 시간을 관심 두는 측정하는 방식 그대로 예수님 중심에도 그렇게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제가 말씀을 드리고 싶은 거예요. 예수님 죽고 난 뒤에 몇 년 됐나, 예수님 몇 년 그거 의미 없다니까요.

예수님이 다 이루신 십자가가 지금 어떻게 작용하느냐, 이게 중요한 겁니다. 어떻게 작용하느냐, 기능하느냐, 예를 들면 성도에게는 예수 믿고 난 뒤에 몇 년 더 사는가, 성도한테는 이게 해당이 안돼요. 왜냐하면 성도라 하는 것은 이미 십자가에 그리스도가 죽었기 때문에 그 안에 사는 것은 성도 본인이 아니고 예수님이 그 안에 살고 있거든요.

빌립보서1장에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니까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왜냐하면 내 안에 사는 것은 그리스도니라. 내 안에 사는 것이 그리스도다. 빌립보서1장21절에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주님께서 “그만 됐네. 죽으라.” 하면 죽는 것도 주님한테 유익이 된다면 그걸로 오케이라는 겁니다.

내가 예수 믿고 난 뒤에 몇 년 살았고, 십자가를 알고 난 뒤에 내가 목 베어 죽으나 사형당해서 죽으나 교통사고로 죽으나 연탄가스 중독에 죽으나 그냥 늙어죽으나 폐렴 걸려 죽으나 그건 의미가 없어요. 왜냐하면 내 것은 내 것이 아니라 값을 주고 산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성도를 어떻게 몸을 어떻게 굴리느냐, 그것만 의미가 있는 것이지, 굴리고 있는 나는 어떻게 되는데? 라고 그렇게 신경 쓰면 안돼요.

그래서 이미 십자가에 있는 사람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사람이에요. 이미 천국이라 보면 돼요. 천국이 뭡니까. 주와 함께 사는 생활이 천국 아닙니까. 사도들이 성령 받고 난 뒤에 자기 목숨 아까워했습니까? 스데반집사가 성령 충만 받고 난 뒤에 저 쪽에서 돌 던지니까, “돌 던지지 마세요. 살고 싶어요.” 그랬습니까? 당신들 세계에서는 돌을 던지면 아파서 근육 터져가지고 세포가 활동이 정지되어 죽는다는 것이 당신들 너희들에서는 그게 굉장히 무섭고 공포스럽고 의미 있는 줄 모르지만,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한테는 이게 의미가 없다 이 말이에요. 왜 더 기쁨이 있기 때문에.

따라서 이렇게 이해하면 돼요. 지금 성도의 상태가 어떤 상태냐를 알리기 위해서 바깥에서 성도가 되지 못한 인간들이 자기 세계를 유지하면서 공격을 하도록 하나님께서 허용하신다. 그리 보면 됩니다.

자, 성도의 세계는 어떤 세계냐, 스데반집사가 어떤 세계냐 하는 것을 성령을 받지 않은 유대인들이 짱돌을 들고 때려 칠 때 그들 입장에서 제일 무서운 게 뭐냐 하면 죽는 게 제일 무서워요. 죽으면 안 무서운데 죽는다는 이 생각이 무서운 거예요. 왜? 평생을 살아오는데 열중했기 때문에. 죽음이라 하는 것은 살아오는데 열중했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것은 거기에 절대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버티고 있는 내부에 힘이 있어요. 그게 악마의 힘인데.

악마의 힘은 계속 더 살게 하지도 못하면서 계속 뭐라고 하느냐 하면, 더 살아야 돼! 살아야 돼! 니가 살면 살 수 있고, 죽으면 죽는 거야. 이런 식으로 악마가 이야기해왔다 말이죠. 그 악마에 속한 사람들이 자기한테 죽음이 부들부들 떠니까 자기에게 무서운 것도 성도한테도 무섭다고 착각하고 오해한 거예요. 그래서 짱돌 들고 때려 친 겁니다.

그래서 스데반집사는 죽었지요. 죽으니까 누가 나타났습니까? 성도는, 스데반집사는 예수님과 함께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그렇잖아요. 이게 성도의 위상입니다. 위상. 현재 처지 형편이에요. 형편. 이런 형편에 있어요. 그럼 우리는 왜 이걸 못 느낍니까. 성령의 충만함이 없으니까 이걸 못 느끼는 거예요. 세상 자기 역사에다가 자기 하는 일에 충만하다보니까 이 성도의 충만함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에베소서5장에 보면 성령 취함을 뭐에 비유하느냐 하면, 술 취함에 비유해요. 술 취함. 술을 안 먹어봤겠지만, 술을 이렇게 취해버리면 기분이 회롱 회롱 좋아져요. 여기가 천국인가 그렇게 생각됩니다. 늘 인위적으로 천국을 만드는 방법은 술 처먹는 방법밖에 없어요. 술 먹는 게 아니고 술 처먹는 방법밖에 없어요. 술 처먹으면 인위적으로 그게 천국이 돼요. 술로도 안 된다. 그러면 마약 해야지요. 약해야 됩니다. 프로포필그거 하지요. 그게 천국인 거예요. 모든 고통이 없어지고요. 헤로인 같은 거 하지요.

성령 취함을 술 취함으로 비유한다고요. 둘 다 공통점이 뭐냐 하면 자아를 나아버려요. 그럼 성령이 충만하지 않다는 것은 자기가 너무 의식될 때, 자기가 자기 사수 방어에 나갈 때, 성령 충만이 없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이거에요. 간격 때문에. 첫째 시간에도 강조했습니다만, 이 간격이라는 것. 크게 쓰겠습니다. 이 70년 간격. 그러니까 16년 동안 성전 건축이 중지된 그 간격. 시간의 간격. 역사와 묵시사이의 간격. 이걸 가지고 고난이라고 합니다. 고난. 같은 말이 뭐냐 하면 고통이지요.

스가랴 선지자는 무엇을 품고 있는 사람인가 하면 바로 이 간격을 품고 있는 사람이에요. 고난과 고통.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주어진 고난과 고통에 합류되어 있는 사람. 하나님의 계시를 받으면서도 같은 인간이기에 백성들의 고난과 고통에 합류되어있는 사람이 스가랴에요.

그러면 고통 받는데서 다른 백성하고 똑같잖아. 다른 것은 뭐가 있느냐, 다른 게 있어요. 뭐냐 하면 선지자는 고난과 고통만 있는 게 아니고 뭐도 있느냐, 하나님의 계시가 있어요.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요. 하나님의 계시 또는 언약, 예언, 이것이 함께 있어요. 고통가운데서 말씀을 전하는 거예요. 고통 없이, 고난 없이 말씀 전하는 게 아니고 고통 가운데 말씀을 전하는 겁니다.

자,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반드시 어떤 예를 들 때는요, 선지자의 예를 들 때는 선지자를 제대로 못했을 때의 예가 확실히 다가와요. 선지자이면서도 도망친 선지자 있지요. 이름이 요나지요. 요나가 니느웨성에서 하나님이 지시를 했는데 하나님의 지시를 안 따랐습니다.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안하고 도망친 이유가 뭐겠어요? 자기한테 말씀이 있고, 계시 있고, 언약이 있고, 하나님의 예언이 있잖아요. 이건 있는데, 무엇을 거부한 거예요? 백성들의 고난과 고통을 거부하고 자기는 산 위에서 그냥 이 니느웨성 망하라고 관람자, 구경꾼으로 있는 거예요. 구경꾼으로.

지난 주 수요일이지요. 수요 설교에 수영강사 이야기했잖아요. 수영강사 이야기가 자기는 수영복을 입고 물속에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는데 그 수영 배우러 온 아줌마들은 집에서 홈드레스 입고 노트하나 들고 와가지고 이론 한다 했지요. 그들은 물에 뜰 마음이 없는 거예요. 자기는 고통과 고난 속에 들어갈 마음이 없어요.

십자가라 하는 것은 이론상 배우고 싶은 거예요. 어떻게 해서 내 죄를 용서 받는가. 머리로 지식으로 이해하겠다는 거예요. 이론적으로 지식이 되어서 지식으로 그 다음에 지식을 현실화 시킬 때는 나의 윤리성과 나의 도덕성과 나의 착함과 나의 양심에 호소해서 성경 말씀이라는 이 이론을 실천을 실천해 보겠다는 거예요. 이건 지금 어디에 어긋납니까? 나의 실천과 나의 윤리, 도덕에 치중하면 이걸 뭐라고 했지요? 이걸 아까 첫째 시간에 뭐라고 했습니까? 이게 역사지요.

그런데 스가랴는 지금 뭘 이야기하는 겁니까? 역사의 반대. 묵시를 이야기해요. 묵시는 본인이 하는 거예요? 천사가 하는 거예요? 천사가 하지요. 오늘날 누가 합니까? 성령님이 하시지요. 스데반 집사가 돌 날아올 때, 이참에 순교하겠다고 지가 노력했습니까? 돌 날아오니까 일부러 들이박았어요? 그렇지 않았지요.

그건 천사의 몫이고, 그건 성령의 몫이에요. 순교하려고 나대는 것도 그것도 행함입니다. 그것도 불신앙이에요. 제가 어느 댓글을 쓴 게 있는데. 오기가 불신보다 난감하다고 했습니다. 천당가려고 막 오기부리는 거예요. 자기 조정하고. 난감하네. 이게 난감한 지경이에요. 차라리 안 믿으면 되는데. 기어이 믿지도 않으면서 자꾸 어떤 자기한테 자기 자신을 자꾸 다독거리고 채찍질하고 때리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신천지에서 무슨 훈련합니까? 겨울에 뭐해요? 훈련하지요. 산악훈련. 몰라요? 이게 무슨 짓이에요? 이게 오기라니까요. 오기. 일반 교회는 안하는 줄 압니까? 부흥회 한다고 해가지고 금식하고. 그렇게 하게 되면 이게 바로 그것이 유대인이 이스라엘이 망하는 이유였어요. 망하는 이유.

신기함이 없이 자기가 신기함을 조장해 내려고 하는 거예요. 신기함을 자기의 행함으로 집중시켜가지고 정신일도하사불성이다. 정신이 하나가 되면 못하는 게 없다는 그런 정신에 의해서 자꾸 신기한 성령의 일을 지가 뽑아내려고 애를 쓰는 거예요. 이건 신앙이 아니고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극기 훈련이라 합니다. 극기 훈련. 그러나 이게 있는 신기함이 있는 스가랴는 선지자는 뭐냐 하면 고통과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 말씀을 함께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 고통이라는 게 뭐냐, 이 고통이라는 것을 생각해봅시다. 고통에 두 가지가 있다고 볼 수 있어요. 선악체계에서의 고통이라는 것은 나에게 해로운 것이 고통이에요. 병이 든다든지. 신종코로나 든다든지. 내 돈을 누가 사기를 쳐서 내가 부도를 난다든지. 내게 스트레스가 되는 그러한 불행이 일어난다든지 이걸 고통이라 해요. 어떤 심리학자가 인간의 고통의 치수를 죽 재봤어요. 어떤 때 가장 심적으로 아프냐 해보니까 제일 큰 게 뭐냐 하면, 바로 배우자의 죽음이었습니다. 배우자의 죽음. 수치가 나와 있어요. 온갖 것 다 있지요. 직장 잃은 것. 짤린 것. 시험에 떨어진 것. 아들이 아픈 것.

제일 아픈 게 배우자의 죽음. 이것이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이 중에는 밑에 가면 이혼도 있지만, 이혼보다 더 아픈 게 배우자의 죽음이었어요. 그러니 노인네들 배우자 죽고 난 뒤에 치매 걸리기 쉽지요. 선악체계에서, 선악체계라 하는 것은 쉽게 말해서 현재 인간들이 느끼는 고통은 뭐냐, 나에게 해로운 것이 고통이란 말이죠.

그런데 생명책에 다시 말해서 선지자의 고통은 뭐냐 하면 백성들이 언약을 위배하는 것. 위반하는 것. 언약을 아주 개무시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이 성경 말씀을 무시하는 것. 이게 가장 고통스러운 거예요.

그러니까 이 언약을 무시해도 잘만 사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다 말이죠. 떵떵거리면서. 온 가정이 하하 호호 밤마다 저녁마다 웃고 행복이 넘치는데 그런데 그 가정에는 복음이 없어. 언약이 없어. 이게 선지자의 고통인 겁니다.

어떤 사람이 있는데 어떤 사람이 음악 성악 하는 사람인데 돈을 사기 당했어요. 104억 사기를 당했어요.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그 사람 결혼도 안했기 때문에 배우자 죽은 건 없지만. 얼마나 고통 당하겠어요. 그러나 성도가 보기에는 뭐가 고통인가, 104억 사기 당해도 복음을 몰라. 이게 더 고통스러운 거예요. 자, 그러면 선지자에게는 고통과 계시가 있다고 했지요. 하나님의 언약이 약속이 있다고 했지요. 그럼 제가 첫째시간에 선지자 안에 누가 들어있다 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있다 했지요.

그러면 이 고통과 계시가 실제로 육신이 되어서 오신 분이 누구였지요? 바로 예수님이잖아요. 그러니까 선지자는 그 하나님의 언약을 위배하는 그 고통을 품고 이 땅에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이. 그 전에 오신 사람들이 선지자고. 그리고 그 후에 나타난 사람이 성도고.

그래서 성도라 하는 것은 세상적인, 선악적인 고통, 그러니 나, 나 중심. 내가 절대자 되어야 되는데 그게 뭔가 방해가 된다. 이것 때문에 고통 하는 스트레스가 아니라 정말 성도한테 근심은 사도바울에게 근심이라 하는 것은 너희가 복음을 거부하는 게 고통이고 근심이 된다. 그리 이야기해요. 선지자에게 이런 계시가 고통이 있습니다.

그 다음 문제. 고통이 있는데, 그러면 이 고통은 누가 당하느냐, 이게 중요해요. 고통은 누가 당하느냐, 이게 굉장히 어려워요. 자, 이스라엘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약을 위반한 그 자체가 고통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건 구원받은 이스라엘이에요. 그런데 지금 포로 잡혀서 고통당하고 지금 못 먹고 살아서 남의 나라 쫓겨 가서 고통당한다는 것은 이건 이스라엘 아닙니다.

그래서 스가랴 선지자가 외치고 외치면서 찾고자 하는 대상자는 누구냐 하면 진짜 이스라엘, 다시 말해서 언약을 처다 보면서 언약을 위반한 당사자가 우리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스가랴를 통해서 언약의 연속성에 의해서 우리가 언약을 위반한 우리마저 죄를 용서해주시고 다시 언약백성으로 삼아 주신다, 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 그 사람을 위하여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 바로 남은 자가 되고 이걸 스가랴에서 순. 봄 되면 가지에 매끄러운 가지에 갑자기 볼그스름하게 연두색 순이 올라오지요. 그걸 순이라고 해요. 순. 순 난다. 순으로 유명한 것이 옛날에 CCC. 순조직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봄철에 순 올라오는 것. 이게 스가랴에서 따온 거거든요. 남은 자에요. 남은 자. 레멘트 남은 자.

남은 자라는 말은 현재 이스라엘이 포로 잡혔다고 다 구원받는 게 아니다, 이 말이죠. 그 속에 추가된 계시. 선지자를 통해서 추가된 이 계시 고통에 합류하는 사람만이 장차 구원될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약속의 땅에서 쫓겨난다고 해서 지옥 가는 건 아니에요. 모세가 가나안 땅에 못 간다고 모세가 지옥 간 거 아니잖아요. 변화산에 나타난 거 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역사적으로 어떤 기능을 할 때, 그 역사적으로는 기능이 일어나요. 하지만, 그 기능 속에서 그 시대 속에서도 자기가 범죄한 가운데서 제대로 언약의 중요성. 하나님은 언약을 통해서 자기 약속을 통해서 반드시 모든 것을 이 세상 우주 질서를 유지하시고 마지막도 언약의 완성으로서 모든 것을 하나님 나라를 만든다는 것을 관심 있는 사람은 비록 그 사람이 범죄 한다 할지라도 그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선지자라고 해서 완전하지는 않으니까요. 선지자 노릇했다고 구원받는 건 아닙니다. 그도 자기 죄를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지신 것은 어떤 인간도 의인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겁니다. 의가 없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안 되지요. 그래서 제가 다시 하겠습니다. 고통은 누가 당하는가, 포로 잡혔다고, 살기 힘들다고 고통당하는 게 아니고 언약에 관심을 두고 하나님의 약속에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의 고통이기 때문에 스가랴와 같은 고통을 공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스가랴의 말씀에 대해서 그냥 순순히 받아들이겠지요. 하나같이 우리 자신이 죄인임을 지적해 주는 그 말씀이 굉장히 고마운 겁니다. 고마운 거예요.

자, 그러면 스가랴에서 추가된 예언이 뭔지를 한 번 들어봅시다. 3절 봅시다.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게로 돌아오라. 적어볼게요. 내게로 돌아오라. 이 말은 여전히 줄이 이어져있다. 내게로 돌아오라는 말은 이 하나님과 너희들 사이에 여전히 줄이 이어져있다. 그 이 줄이 뭐냐 하면 이게 언약이죠. 너희들이 범죄 했다고 언약마저 끊어진 건 아니다. 이 말이에요.

내가 죄 지었다고 주님의 십자가가 무효가 되는 건 아닙니다. 그러니 관심사가 내 죄 지은 거 생각하지 말고 끊어지지 않는 언약에 관심을 두는 자가 주의 백성이고 하나님의 백성이에요. 그러면 언약이 끊어지지 않았다. 끊어지지 않았다. 역시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뭐냐, 역사적으로 아니면, 묵시적으로 어느 게 정답이 되겠습니까. 묵시적으로 끊어지지 않았어요. 왜? 역사적으로 끊어져버리면 아까같이 교통사고 나서 기억상실증에 걸린다든지 교회 다닌 기억도 없어. 성경은 물론 성경은 하나도 모르고. 두뇌에 충격 받아가지고. 치매에 걸린다든지.

또 그런 거 아니더라도 설교 말씀을 하는데 잠이 온다던지 딴 생각해버리고요.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이게 끊어져버리면, 역사적으로 끊어지거나, 이런 것을 문제 삼는 거 아니라는 말이죠. 내가 치매에 걸린다 할지라도, 나, 치매에 안 걸려야 구원받는다고 자기 역사적인 존재에 대해서 신경 쓰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나는 어떤 상태에 머물러 있어야 돼! 라고 자기 싸잡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성도는.

성도는 뭐냐 하면 나는 애초부터 개판이고, 기대할 것도 없고, 내가 믿고 의지하는 것은 주님의 묵시적 언약, 하나님의 약속, 십자가밖에 없음을 이게 성령을 통해서 이렇게 가능한 거예요. 성령이 없으면 자꾸 예수 믿는 자기 자신에게 자기 자신을 싸잡고 그걸 관리하려고 한다. 말이죠. 성령 받지 않는 사람의 특징이 그래요. 자기 관리에 급구해요. 자기 관리. 내 행동을 어떻게 똑바로 관리하느냐 그거에 신경 쓰고 있다니까요.

돌아오라는 말은 줄이 연결되어있다. 아직 돌아가고 돌아오는 연결이 아직도 유효하다. 파이프가 남아있다 이 말이지요. 그 다음에.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돌아오고 돌아가는 그 관계가 그 루트는 아직도 안 죽었다. 이 말이거든요. 스가랴 선지자가 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이점을 구약 유대인들이 알아서 유대인들이 제일 겁을 내는 게 뭐냐 하면 우리 가운데 선지자가 없는 걸 제일 겁을 내요. 유대인들이. 선지자가 없는 것. 그러니 세례요한이 등장했을 때 사람들이 얼마나 반가워했다고요. 선지자가 끝나는 것이 말라기가 마지막 선지자인데 BC415년에 끊어져요. 다리오2세 시대인데, 아직 바사나라 시대에 있어요.

그래서 모든 선지자는 착한 제국, 바사나라에서 모든 선지자는 거의 마감이 돼요. 그 다음에서는 없어져요. 바사나라 그 다음에 헬라나라 되는데, 그 때는 선지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말라기가 마지막 선지자에요. 말라기는 BC435년부터 BC415년으로 20년 동안 활동하는 거예요. 그 다음부터는 말라기 끝나고 부터는 더 이상 선지자 없어요.

우리 가운데 선지자 나타나기를 유대인들이 굉장히 기대했어요. 선지자 나타나야 그 다음에 그 뒤에 메시아 오기 때문에. 그래서 세례요한이 먼저 자기가 메시아 오기 전에 선지자라고 세례요한이 자기를 그렇게 소개해요. 나는 소리다. 장차 뒤에 오실 메시아가 오실 소리다. 참, 신기해요. 그 분은 나보다 뒤에 오지만, 실은 나보다 앞선 자다. 이리 하지요. 역사보다 묵시가 앞선다는 뜻이에요. 역사적으로는 내 뒤에 나이가 적지만, 사실은 그 분은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이다. 이렇게 소개하는 겁니다.

인간의 시간의식으로서는 참 듣기 민망할 정도로 굉장히 황당하지요. 원래 이 성경말씀이 황당해요. 제 정신으로서는 이해도 안 되고 믿을 수도 없어요.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선지자가 없는 것이 가장 공포스러운 이유는 바로 이 선지자의 예언이 인간들에게 구원받을 희망을 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구원받을 희망이라고 제가 언급했는데요. 구원받을 희망이라는 말은 그 전부터 자기가 구원에 대해서 뭐 알고 있다고 지금 자부하는 자에게 해당되겠지요. 줄곧 구원받았는데 뚝 끊어졌다. 뚝 끊어졌으니까 끊어진 이 상태. 이 상태에서 지금 구원을 희망하는 거예요.

아까 스가랴 말씀 전한 게 언제라고 했습니까? BC520년이지요. 성전은 언제 건축되는가, 516년부터 건축되지요. 아직까지 여기는 성전이 완공이 안 된 상태에요. 방해공작 때문에. 성전이 완공이 안 된 상태에요. 학개는 성전 지으라고 촉구를 해요. 그러나 스가랴는 역사의 지평 말고, 역사의 끝을 바라보고 있어요. 역사가 끝났을 때에 그 역사는 누가 만드는가, 누가 인도하는가, 누가 주도하는가, 천사들이 주도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스가랴가 돌아오라. 돌아오면 내가 너희에게 돌아갈게. 라고 했을 때에 그 주체가 돌아오고 돌아가는 그 주체는 누구 손에 달린 겁니까? 인간들 손에 달린 게 아니고 누구 손에 달렸어요? 성신 또는 성령, 천사 손에 달린 겁니다.

4절에 봅시다. “너희 열조를 본받지 말라 옛날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외쳐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길, 악한 행위를 떠나서 돌아오라 하셨다 하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고 내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너희 열조를 본받지 말라 옛날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외쳐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길, 악한 행위를 떠나서 돌아오라 하셨다 하라, 아~~ 이게 참 어려워요. 이게 어렵다고요. 옛날 선지자들이 선조에게 이미 잔소리를 늘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선조들은 그걸 안 들었다는 거예요. 이게 여러분들이 참 쉬워 보이지만, 어려운 이야기에요.

사람은 항상 지난주 수요일에도 이야기했지만, 현재만 보고 있거든요. 현재만. 현재만 보기 때문에 현재 자기가 뭔가 선택하고 결정할 때는 그냥 결정하는 게 아니라 ‘이건 나는 잘못된 선택이야.’ 이러지 않잖아요. 그 많은 선택 중에서 옳은 선택이다. 옳은 선택을 선택해요. 옳은 선택을, 옳은 결정을 한다고요. 그러면 본인이 하는 것은 결코 이게 악한 일이 아닙니다. 악한 일이 아니에요. 자기는 옳은 일이고, 정의로운 일이고, 반듯한 일이라고 자부합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인간에게는 뭘 아느냐, 과거에 체험이 있고 과거에 경험이 있고, 거기서 얻은 정보가 있기 때문에. 인간은 과거에 자기가 했던 것을 그걸 축적된 지식과 경험을 근거로 해서 가장 정답, 가장 옳은 것을 정답으로 결정하고 행동하게 되어있어요. 이렇게 모든 인간이 현재만 보기 때문에 그렇게 삽니다. 현재를 본다는 말은 현재에 주어진 환경과 상황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도록 상황이 그렇게 몰아간 거예요.

예를 들면요, ‘아, 요새 나 라면 먹기 싫어.’ 이거 뭔 뜻이에요? 라면 먹는 거 말고 다른 선택지가 많았다. 이 말이거든요. 그런데 그 사람이 군에 가가지고 한 일주일 굶었다. 그런데 누가 어디서 라면 끓이는 냄새가 난다. 그때는 가장 옳은 결정이 뭐냐 하면 라면 먹는 거예요. 왜? 그렇게 맛있으니까.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나 옛날 욕 얻어먹는 선조들이나 전부 다 그 시점에서는 환경과 상황이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도록 하나님께서 몰아세운 겁니다. 어떻게 몰아세웠습니까? 악한 일을 하도록. 이게 무슨 기능이냐, 이게 바로 율법적 기능이에요. 악한 일을 하도록. 선한 일에서는 인간에서는 나올 수가 없는 겁니다.

사람들은 악한 일을 해놓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큰 글자로 쓸게요. ‘최선을 다했다.’ 나름. 나름 최선을 다했다고 합니다. 최, 해놓고 뒤에 하는 말이 악이에요? 선이에요? 선자지요. 나름대로 옳은 일을 했다는 거예요. 나는 최악을 다했다. 이런 사람 없지요.

어떤 가훈에 보면, 액자에 보면, 최선을 다하라. 이런 거 있잖아요. 가훈에 최악을 다하라. 이런 거 없다 말이죠. 그런데 최선이 결국 자기는 뭘 몰랐어요? 최선이 뭐다? 최악이라는 사실을 모른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몰아세웠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그래요.

옛날 언약을 율법이라 해요. 율법. 내가 예수 믿는다. 그러면 그건 최악이에요. 최악입니다. 진짜 신앙은 이건 뭘로 이해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선물로 이해되지, 내 결정으로 이해된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자꾸 믿으려고 하는데 안면 받쳐서 믿어주지요. 같은 가족끼리. 또는 아는 사이에 또는 혜택을 입었기 때문에, 경제적인 혜택을 입었기 때문에. 혹시 또는 나를 그렇게 사랑하는 눈빛을 보이니까 믿어라. 예, 믿습니다. 믿습니다 해놓고 그게 믿음이 아니에요. 믿음은 신비로움이에요. 이럴 수는 없어! 내가 이걸 믿다니! 오히려 본인이 믿음에 신기해야 돼요. 본인이 본인의 믿음에 신기하다는 말은 본인의 남은 일생도 어떤 일생이겠습니까? 신기하고 가볍고 고맙고 감사한 일생이에요.

신기하다. 어떻게 저런 사람을 만났을까. 진짜 신기해요. 니를 만나서 내 팔자 조졌다. 물어내라. 이게 아니고. 모든 결정은 최악입니다. 최악이 되어야 돼요. 모든 결정은 최악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인간은 이미 범죄 했기 때문에, 이미 범죄 했기에, 죄의 이유를 몰라요. 죄는 짓는데 왜 내가 죄를 짓는지를 이유를 몰라요.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뭐냐 하면 자기가 죄를 뭐로 보느냐, 최선이라고 그렇게 포장하고 변명하고 핑계대고 싶은 거예요.

그러나 이 최선들이 모아서 집대성되어서 이걸 하나로 집대성해서 모든 것을 집대성해서 그 하나의 힘으로서 모아졌는데 여기에 최악이라는 것을 드러난 증거가 뭐냐 하면 바로 누가 죽었어요? 예수님 십자가 피 흘려 죽지요. 예수님이 피 흘려 죽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예수님 죽은 것이 이방민족에게 몽골사람에게 죽었습니까? 일본 사람한테 죽었습니까? 어디 로마사람한테 죽었습니까? 누구한테 죽었어요? 바로 유대인들에게 죽었지요. 유대인들에게. 유대인들은 뭐가 있다고 자부합니까? 하나님의 언약, 율법, 약속이 있다고 하지요. 율법이 있는 유대인에게 있는 그들에 의해서 하나님은 살해당함으로서 예수님은 유대인 지도자보고 너희 아비는 악마라고 이야기한 겁니다.

악마의 정체는 십자가 앞에서만 드러나요. 십자가 빠져버리면 악마의 정체 안 드러납니다. 이 말은 인간이 왜 모든 최선이 최악이냐, 그것은 십자가가 드리댐으로서 비로소 알 수 있는 거예요. 인간은 의로움이 없는데 자꾸 의롭다고 우기고 있는 거예요. 어떤 것도 자기 행함에 대해서 어떤 혜택을 요구할 자격이 없습니다.

뭘 잘했다고 하나님께 달라고 해요. 주는 것도 오감인줄 알아야 되지요. 그래서 여기 말하기를 너희 열조를 본받지 말라, 했는데 그 열조들이 그냥 바보들이고 병신들이 아니에요. 나름대로의 자기의 과거에 축적된 정보와 체험, 경험, 지혜, 이런 것들을 총동원해서 지금 옳다고 생각해서 결정 내렸는데 스가랴 보기에는 그게 뭐가 되었다? 그들이 언약을 위배해서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는 결과를 야기한 악한 일이었다. 라고 결론 내린 겁니다. 누가? 스가랴. 스가랴 본인 뜻은 아니지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요.

너희가 악한 길, 악한 행위에서 돌아오라 했어요. 자, 이것도 어렵습니다. 그들이 악한 길, 악한 행실이다. 라고 일방적으로 규정해 버려요. 악한 행실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지금 성전을 지어야 하는데 지금 뭐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성전을 안 짓고 있다 말이죠. 성전을 536년에 성전 지으라 했으면 벌써 다 지어야 할 텐데. 지금 520년 돼도 아직 안 짓고 있는 거예요. 안 짓고 있어요. 지금.

그럼 10년째 그냥 놀고 있는 겁니다. 물론 예루살렘 가본 사람은 알지만, 그게 돌무더기 큰 무더기 올리는데, 그 돌 기중기 봤지요. 올리는데 얼마나 힘들어요. 그렇게 쉬운 건 아니지만. 그러나 그들은 중단하고 말았어요. 그러면 악한 길이다. 악한 행실로 갔다. 했으면 뭐 악한 길이면 악한 길인 줄 알아야지 뭐. 악한 행실이면 악한 행실인 줄 알아야지 뭐. 이러면 됩니까? 뭔가 이유를 알아야지요.

무조건 악하다 하니 “예, 악합니다.” 이러면 안돼요. 뭔가 이유가 있어야 돼요. 이유가 되려면 그들이 어떤 자리에 있느냐 하면 우리가 이렇게 이방나라에 고난 받는 것이 이게 마땅하고 합당하다는 의식이 있어야 돼요. 우리가 벌 받을 만해서 벌 받는다는 생각이 있어줘야 됩니다.

그러면 그걸 있으려면 선조들은 악한 것도 모르고 악한 길로 갔다면 본인들은 비록 악한 길을 해도 내가 악할 수밖에 없는 어떤 근거, 어떤 바탕의 이유가 제대로 갖춰준 채 역시 나는 악해. 이렇게 되어야 되거든요. 그게 근거가 뭐냐 하는 겁니다. 근거가.

하나님께서 성전을 지으라. 라는 명령을 통해서 그들이 주저하고 성전의 가치와 성전의 고귀함을 다른 더 고귀하고 가치 있는 것 때문에 지금 여기서 이걸 뒷전으로 처리해버린 거예요. 밀어버린 거예요. 그럴 때 도대체 그들이 뭘 생각하느냐, 나는 왜 가장 중요한 것을 가장 중요시 여기지 않고 내 자신의 안일함과 편안함에 몰두하고 있느냐, 그러니까 자신의 안일과 현재의 내 편안함만 생각하는 이것이 꼭 선조들이 갔던 그 길과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음이 이게 들통 난 거죠. 그러면 그들은 뭘 이해 못하느냐 하면 결국 하나님의 뜻을 대변해 주는 선지자, 선지자들의 그 통찰, 그 뜻을 그들은 몰랐던 거예요.

그러면 선지자는 뭐가 다른가, 다시 합니다. 첫째 뭐가 있다고 했어요? 그들에게 뭐가 있다고 했어요? 고통과 고난이 있다 했지요. 두 번째는 말씀이 있다 했지요. 이 선지자의 고통과 고난은 이디서 직수입한 겁니까? 어디서 온 겁니까? 구약의 선지자 고난은? 베드로전서1장11절 이야기했지요. 누구의 고통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과 영광이지요.

그러니까 선지자들은 미리 아는 거예요. 미리. 미래에 아는 게 아니고 미래가 과거를 방문해서 선지자 속에 미리 집어넣어준 거예요. 그러니까 장차 올 예수님의 고난과 영광을 선지자는 알았기에 현 상황이 고통과 고난스러운 겁니다. 이 말은 이미 천국에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고 예수님과 함께 사는 사람이기에 이 세상이 꽃피고 아름다워도 이 세상에 더 눌러앉고 싶은 생각이 없는 거예요.

이 생각이 없는 이 사람이 아는 죄와 그냥 눈에 보이는 이 세상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죄와 죄의 그 클래스가 다르지요. 완전히. 차원이 다른 거예요. 그래서 선지자 스가랴를 통해서 주께서 하시고자 하는 이야기는 이 백성들로 하여금 성전 안 짓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장차 올 예수님 오실 메시아가 어떤 고통을 품고 너희들에게 선지자 스가랴 입을 통해서 너희에게 그 십자가의 심정으로 호소하고 있는지를 그들을 알리기 위해서 이렇게 너희 열조나 너희들이나 마찬가지로 악한 길로 가고 있다고 이렇게 말씀을 해주시는 거예요.

그럼 돌아오라. 돌아온다는 말은 돌아올 지점을 알려주고 돌아와야 될 거 아닙니까. 돌아오라. 너희들은 지금 이 지점에 있어야 할 너희들이 이 지점이 아니고 엉뚱한 데 정신이 팔려있고 관심이 거기에 있고 온 신경을 거기에 쏟고 있다. 돌아오라. 이렇게 할 때, 왜 이 사람들이 관심을 여기 돌아올 자리, 하나님의 언약에 두지 않고 딴 데 왜 둡니까.

이게 재미나거든요. 이게 편하거든요. 이 환경자체가 이래야 사람 사는 것 같고, 숨 쉬는 것 같거든요. 사람답게 사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외로운 거예요.

선지자는 그렇게 돌아오라. 어느 지점에 돌아오라 라는 말입니까. 결국은. 선지자가 있는 지점에 돌아오라 이 말이거든요. 그럼 선지자가 있는 지점은 어느 지점입니까. 선지자에 뭐가 있다고 했지요? 첫 번째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고통과 고난이 있지요. 두 번째는 하나님의 계시가 있지요. 바로 선지자의 고통과 합쳐버리면 뭐다? 십자가.

그러니까 선지자에게는 뭐가 있느냐, 십자가가 있는 그 신기함의 세계. 묵시적 세계로 돌아오라 이 말이에요. 현 그 당시 유대인들이 무슨 재주로 이 묵시의 세계로 돌아옵니까. 그래서 뭐하느냐 하면 천사를 동원하고 또 하나님의 성신 그러니까 성령을 동원하는 거예요.

스가랴에서 나오는 모든 예언은 장차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고 부활해가지고 어디 가느냐 하면 하나님의 오른편에 가요. 하나님의 오른편이 어느 위치냐 하면 자기 백성을 자기 임의대로 선택할 수 있는 선택만이 있는 자리가 하나님의 오른편의 자리에요.

그 말은 그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사람은 내가 예수님을 사랑해서 예수님을 믿어서 내가 구원받고 싶은 열망이 너무 심해서 구원 받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오른편에 있는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나를 “너와! 너는 내 사람이야!” 라고 찍어버린 거예요.

찍었다는 말이 약간의 속된 말 같으면, 찍었다는 말은 속된 말이 아닌데, 약간의 거친 말이 있다면 고상한 말로 하면 인 맞았다. 또는 도장 찍었다. 뭐로? 성령으로. 성령으로 도장을 팍 찍어서 “니는 빼도 박도 못해. 니는 내 사람이야.” 내 사람이라고 팍 찍어버린 거예요.

옛날에 드라마에 그런 거 있잖아요. “너는 왜 내 사람이라고 말을 못해.” 하는 그런 대사가 나오지요. 주님께서는 우리가 원하지 않았는데 주님이 일방적으로 너는 내 사람이라고 꽉 찍어버렸어요. 이거 진짜 홈드레스입고 이론만 하면 안돼요.

꽉 찍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아느냐 하면, 아무리 내가 내 원하는 대로 살고 싶어도 주께서는 내 원하는 대로 해주지를 않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내 일평생 성과보다도 더 우선되고 더 선행되고, 더 귀하고, 값어치 있음을 깨닫는 그 신기함이 성도의 몸을 통해서 성도의 일생을 통해서 발산되도록 그렇게 하는 겁니다. 발산되도록.

그러니 이 스가랴의 내뱉는 모든 것은 묵시적이고 노골적으로 천사의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지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살아가면서 진짜 귀한 것과 귀하지 않는 것도 제대로 분간 못하는 어리석은 저희들 눈이 막힌 저희들, 하나님의 성령이 오셔서 스데반집사처럼 진짜 중요한 게 뭔가를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129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17,942 자유게시판 주일학교 설교 / 열두 제자의 길 / 200510 마태복음 최고관리자 20-05-10
17,941 묻고답하기 주되심 빌립보서 최고관리자 20-05-10
17,940 묻고답하기 Humility 겸손 - 최고관리자 20-05-08
17,939 자유게시판 대전-120강 마태복음26장69-75절(차단효과)20200428-이 근호 목사 마태복음 최고관리자 20-05-07
17,938 자유게시판 40강-호 10장 9-11절(저주안목)200506-이 근호 목사 호세아 최고관리자 20-05-06
17,937 자유게시판 311강-YouTube강의(증거 로마서 10:15)20200505-이 근호 목사 로마서 최고관리자 20-05-06
17,936 자유게시판 310강-YouTube강의(얼굴 요한계시록 1:16)20200505-이 근호 목사 요한계시록 최고관리자 20-05-06
17,935 강의 유튜브강의 (310강, 311강) 얼굴, 증거 200505 요한계시록 최고관리자 20-05-05
17,934 자유게시판 강남-누가복음 2장 1절 (신의 국경에서) 200421b-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최고관리자 20-05-04
17,933 자유게시판 강남-누가복음 2장 1절 (신의 국경에서) 200421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최고관리자 20-05-04
17,932 자유게시판 20200501b 울산강의-레위기 26장 : 표면존재 레위기 최고관리자 20-05-04
17,931 자유게시판 20200501a 울산강의-레위기 26장 : 표면존재 레위기 최고관리자 20-05-04
17,930 묻고답하기 불교와 기독교에 관한 감상-이강진 분의 글 - 최고관리자 20-05-04
17,929 자유게시판 29강-욥기 9장 11~16절(차라리)20200503 이근호 목사 욥기 최고관리자 20-05-03
17,928 자유게시판 11강-빌 2장 1-4절(겸손)200503-이 근호 목사 빌립보서 최고관리자 20-05-03
17,927 자유게시판 광주강의20200424b 마가복음15장 1-4절(길트임)-이 근호 목사 마가복음 최고관리자 20-05-03
17,926 자유게시판 주일학교 설교 / 예수님의 고기 / 200503 - 최고관리자 20-05-03
17,925 묻고답하기 예수의 마음 빌립보서 최고관리자 20-05-03
17,924 자유게시판 광주강의20200424a 마가복음15장 1-4절(길트임)-이 근호 목사 마가복음 최고관리자 20-05-03
17,923 묻고답하기 차이-송민선 성도님의 글 - 최고관리자 20-05-02
17,922 자유게시판 차이 - 최고관리자 20-05-02
열람 ➜ 자유게시판 안양20200416b슥1:3(신기함)-이 근호 목사 - 최고관리자 20-05-01
17,920 자유게시판 안양20200416a슥1:3(신기함)-이 근호 목사 - 최고관리자 20-05-01
17,919 묻고답하기 Testifying to The Cross 십자가 증거 - 최고관리자 20-04-30
17,918 자유게시판 39강-호 10장 4-8절(거짓약속)200429-이 근호 목사 호세아 최고관리자 20-04-29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