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강-호 10장 4-8절(거짓약속)200429-이 근호 목사
39강-호 10장 4-8절(거짓약속)20042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 10장 4절에서 8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265페이지입니다.
호세아 10:4-8
“저희가 헛된 말을 내며 거짓 맹세를 발하여 언약을 세우니 그 재판이 밭이랑에 돋는 독한 인진같으리로다 사마리아 거민이 벧아웬의 송아지를 인하여 두려워할 것이라 그 백성이 슬퍼하며 그것을 기뻐하던 제사장들도 슬퍼하리니 이는 그 영광이 떠나감이며 그 송아지는 앗수르로 옮겨다가 예물로 야렙 왕에게 드리리니 에브라임은 수치를 받을 것이요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계의를 부끄러워할 것이며 사마리아 왕은 물 위에 거품 같이 멸망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죄 된 아웬의 산당은 패괴되어 가시와 찔레가 그 단 위에 날 것이니 그 때에 저희가 산더러 우리를 가리우라 할 것이요 작은 산더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리라.”
호세아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이것은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되는 멸망의 모습처럼 간주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8절에 보면 “……그 때에 저희가 산더러 우리를 가리우라 할 것이요 작은 산더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리라.” 하는 이 말씀이 나중에 신약에 와서 요한계시록 6장 16절에 보게 되면 온 지구상에 그것이 다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누가복음 23장 30절에 봐도 “그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것은 무슨 뜻이냐? 이스라엘에게 일어났던 그 일이 나중에 온 지구상에 다 파급이 되는 그 사실이 일찍이 이스라엘에게 먼저 일어나고 그 다음에 지구상 전체에 다 퍼지게 되는 겁니다.
마치 우한에 신종코로나가 처음 번졌을 때는 ‘중국사람 잘됐다.’ 하고 신나했는데 그것이 온 세계로 퍼져버린 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이스라엘에게 발생된 일이 왜 전체로 퍼지느냐 하면, 이스라엘만이 유일하게 하나님과 먼저 관계를 먼저 맺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진짜 하나님이 계시고 그 계신 하나님이 어떤 원칙에 따라서 일을 하느냐 하는 이것은 이스라엘 말고 다른 나라에서는 모르게 되어 있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어떻게 다루느냐의 그 원칙이 지금 현실이 진행되는 유일한 원칙입니다.
누가복음 21장 34절에 보면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여기 ‘모든’이라는 것은 이스라엘뿐만 아니고 이방민족까지 다 합쳐서 그렇습니다.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전체성이라 합니다. ‘general’ 이지요. 모든 것을 다 덮는 전체성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 호세아를 보게 되면 10장 8절에, 북이스라엘의 단순한 지역만 호세아 선지자가 이야기한 것 같은데 거기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예언이 온 지구상에 파급이 될 모델로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충분하게 드러낸 겁니다.
하나님의 뜻은 뭐냐? 전체 모든 인류의 역사, 모든 것에 다 해당이 되는 상황을 미리 앞당겨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찾을 것은,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렇게 보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왜 이렇게 하나님께 심하게 당하는가? 거기에 대해서 10장 4절에 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저희가 헛된 말을 내며 거짓 맹세를 발하여 언약을 세우니.”라고 되어 있어요.
이 말은, 하나님의 언약은 따로 있고 하나님만 언약을 세우는 것이 아니에요, 인간들도 인간들 나름대로의 약속체제 언약체제를 이미 갖추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여기서 밝혀집니다. 인간들이 자기들끼리 약속체제를 가지고 서로 언약을 맺으면서 살아온 그 언약체제가 하나님의 언약체제에 의해서 여지없이 아주 박살이 났다, 그 말입니다.
인간들이 인간들끼리 서로 언약하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에 부응하지 못하고 호응하지 못한다, 그런 뜻이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이 언약을 맺을 때는 어떤 원칙에 준해서 인간세계의 언약을 맺는가? 그것은 굉장히 사적입니다. 개인적이에요. 이 땅 인간들은 어떤 약속을 할 때, 언약을 맺을 때 본인이 죽겠다고 언약 맺고, 죽겠다고 약속 맺는 법은 없어요.
살기 위해서 남과 계약서를 쓰잖아요. 혼인계약부터 해서 모든 언약을 맺는데 그것은 무슨 뜻을 갖고 있느냐 하면, ‘나는 이 땅에서 반드시 살아야 되고 살만한 가치가 있음을 이 계약이 이 약속이 나를 증명해준다.’ 그런 목적으로 계약을 해요. 그게 국가단위까지 올라가면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사법체제라고 이야기합니다.
개인과 개인이 맺은 그 사적인 약속도 나중에 국가가 그것을 인정해줘야 민사재판에서 보상이라도 받고 하는 것이지 자기들끼리 말로 해서 나중에 국가에 재판을 걸어봐야 판사는 “계약서 봅시다. 계약서 어디 있습니까?” 그거 없으면 소용없는 거예요.
회사를 다니다가 코로나 때문에 그만뒀다. 그러면 나라에서 재해보상을 해준다. 그 때 나라에서 “놀았어요? 그러면 돈줄 게요.” 그런 법은 없거든요. 약속체제, 사법체제, “법으로 지정된 양식을 가져오세요.”라고 이야기하지요.
그렇게 보게 되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어요. 인간세계는 그냥 있는 현실이 아니고 나름대로의 법적인 체제를 갖춰서 현실의 질서를 유지하고 있다고 보면 되는 겁니다. 혼인신고 안하고도 같이 살 수 있어요. 동거인으로서. 그러나 나중에 자식 낳고 유산 남기는데 있어서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하나의 가정도 인간의 약속, 언약이 있어줘야 대외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어 있고, 당연히 교회도 마찬가지고, 회사도 마찬가지고, 국가도 마찬가지고,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이란 말로 만나는 것이 아니고 어떤 계약서나 맹세나 약속이나 그런 것이 문서화되어 있어야 인간세계는 현실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약속가운데 현실을 살아가는 이유는 뭐냐? 나는 이 땅에 살 가치가 있음을 그런 법적인 것 가지고 남 앞에 증명하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오늘 호세아에서는 뭐냐? 세상에 살려면 그런 질서가 있어야 되고, 우리 인간들끼리는 너무나 합당하고 합리적인 일이라고 생각하는 그 언약체제가 하나님의 언약체제와 맞닥뜨리고 마주치니 어떤 결과를 낳았느냐?
8절에 “그 때에 저희가 산더러 우리를 가리우라 할 것이요 작은 산더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리라.” 이런 결과를 야기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내 딴에는 난 살 가치가 있다고 여겼는데, 막상 그런 맹세와 질서체제 푹 젖어 사니까 갑자기 여기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맹세가 쳐들어와버리니 이것은 무거운 산 밑에 깔려죽어도 시원치 않은 존재임이 노출된 겁니다. 들통 난 거예요.
특히 이스라엘 같은 경우에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잖아요. 하나님을 믿으면서 모세가 줬던 율법 가지고 사해공동체 유지하려고 얼마나 적재적소에 하나님의 율법을 집어넣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하나님의 언약의 진짜 본 내용이라고 일체 인정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로마서 3장에도 나오는데, 율법을 주신 것은 율법대로 살면 네가 살 수 있다는 그러한 목적이 아니고, 내가 그냥 태어나고 사니까 나는 사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그 안일함, 살아 있는 것이 마땅하다는 그 안일함, 그 안일함에 대해서 하나님의 율법은 추궁하고 있다고 보시면 돼요.
사람이 그냥 사는 것이 아니고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내가 살기 위해서 남과 거래하고 계약을 맺고 하잖아요. 우리는 그것을 무심코 한 거예요. 그런데 그 무심코 한 모든 사법체제 밑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나는 기어이 살아 있는 것이 마땅하다는 그것을 당연한 것처럼 여겼던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 앞에서는 어떤 인간도 살았다는 소리를 못한다는 것이 율법을 주신 취지입니다. 따라서 호세아 말씀대로, 우리가 세운 인간 사이에서의 계약과 모든 사법체제가 다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정말 제대로 아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사람이냐 하면, 오늘본문대로 하면 이렇습니다.
미리 무거운 산, 지리산이나 팔공산이 너무하다 싶으면 앞산이나 뒷산정도 해서 그 산에 끼어죽는, 완전히 눌려서, 완전히 짜부라져서 눌려죽고 난 뒤에 오늘 호세아 10장 4-8절을 보시면 비로소 그 사람에게서만 이해가 돼요. ‘아, 그렇지. 하나님의 율법에 의하면 우리는 산에 눌려서 완전히 납작하게 죽어야 되지. 암 죽어야 되고말고.’
이미 벌써 죽은 사람만이 이 호세아 10장 4절에서 8절에 대해서 동의하고 납득을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약 때 이야기, 신약 때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자에 한해서 그렇습니다. 율법이라 하는 것은 우리를 죽이는 무거운 짐이니까요, 그 짐에 우리가 깔려 죽는 거예요. “주여, 저는 죽어 마땅합니다.” 이런 사람에 한해서만 오늘 본문이 이해가 돼요.
그렇지 않고 살려고 하는 사람은, ‘인간 대 인간이 계약하고 약속하는 그것이 뭐가 문제냐?’ 이렇게 의아해 할 겁니다. 벌써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서 깔려죽고, 하나님의 예언에 의해서 깔려죽은 사람은 뭘 아느냐 하면,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 할 때에 자기자신의 그 믿음이 엉터리 믿음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돼요. 인간은 절대로 내가 나를 믿는 것처럼 남을 믿지를 않습니다. 이게 인간이에요.
인간이 내뱉은 생각이나 모든 사고방식이나 행동은 나를 수호하고, 나의 잘남을 높이고, 나를 옹호하기 위한 용도로서 바깥에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난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을 믿습니다.” 개 코나! 거짓말이에요. 절대로…… 부부가 서로 사랑한다. 물론 그것은 안 믿지요.
그거 말고 다른 사람하고 계약서 쓰고 해도요, 나 자신을 포기하고 ‘나는 당신 앞에서 지금 앞산에 깔려죽어도 마땅합니다.’ 그런 자세로서 절대로 계약서 쓰지 않습니다. ‘당신은 죽을지언정 나는 절대로 안 죽을 겁니다.’라는 마음에서 계약서 쓰는 거예요.
참 누구 말대로 인간의 사적인 약속이라 하는 것은 바람에 날려버리는 맹세 같은 겁니다. 첫눈이 오는 날 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었거든요. 새벽부터 눈이 왔다고요. 무릎까지 눈이 찼는데, 안 오면 안온다고 말이라도 해줘야 되는데, “새벽부터 오는 눈이 무릎까지 덮는데 안 오는 건지 못 오는 건지 대답 없는 사람아 기다리는 내 마음만 녹고 녹는다.”
안 오는 것인지 못 오는 것인지 아무 연락이 없네요. “바람에 날려버린 허무한 맹세였나.” 그래 허무한 맹세였어요. 안동 역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너무 안 오는 거예요. 우리가 한 맹세는 바람에 날리는 허무한 맹세였나. 그걸 왜 진즉에 몰랐어요? 원래 허무한 맹세였어요.
제가 옛날에 어느 교회 부교역자로 있을 때 당회장으로 온다는 목사가 하는 말이 “제가 오게 되면 1년 내에 3백 명 모으겠습니다.” 장로들이 그 말을 믿고 그 목사를 당회장으로 세워놓은 거예요. 바람에 날리는 그 허무한 맹세를 믿고. 어떻게 그 말을 믿나, 그 말이지요.
“저는 5년 전에 주님을 영접해서 그 때부터 은혜를 받아왔습니다.” 그거요. 믿지 마세요. 절대로 믿지 마세요. 진짜 믿을 것은 “나는 거대한 히말라야 산 그 산맥 밑에 깔려죽어도 마땅합니다.” 그 말도 믿어야 될지 말아야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주님께서, 산더러 나를 가리우라, 할 정도로 율법이 제시하는, 북 이스라엘뿐만 아니고 모든 지구상에 있는 인간들에게 율법이 지향하는 최종적인 하나님의 약속, 율법은 언약이거든요, 하나님의 마지막 약속, 인간에게 들이미는 요구조건은 뭐냐? 산에 깔려 죽어라, 그 말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구원이란 죽은 자가 된 상태에서 그 다음에 구원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방식이고 다른 방식은 하나님이 사용하지 않습니다. 죽여 놓고 구원하는 거예요. 일단 죽여 놓고. 죽을뻔 한 것? 아니에요. 죽을뻔뻔 한 것? 아닙니다. 거의 다 죽었다? 아닙니다. 완벽하게 죽어야 돼요.
그 인간 죽을 때 그동안 나만 믿던 나도 같이 산에 깔려 죽는 거예요. 그리고 내가 죽을 때 나에게 일말의 미련, 조금의 미련이 있는 것도 내가 산에 깔려 죽을 때 같이 그 미련도 깔려 죽는 겁니다. 나의 소망도 깔려죽고, 나의 믿음도 깔려죽고, 나의 사랑도 깔리고 모든 것이 다 죽은 거예요. 그래서 성도는 그 사람 어깨가 무거운 산에 깔려 있지 않거든 말 함부로 섞지 마세요. 산에 깔린 사람하고만 이야기하세요.
왜냐하면 산에 깔렸다는 말은 그 사람에게 진짜 하나님의 율법, 하나님의 말씀이 함께 있다는 뜻입니다. 무거운 산만큼이나 무거운 것이 뭐냐? 율법이 주어지는 무게에요. 율법의 무게, 하나님의 말씀의 무게가 그 정도입니다.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그 정도에요. 그래서 이것을 이렇게 설명할 수 있어요.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말씀의 깊이는 인간의 존재의 깊이만큼 깊다.”
이걸 달리 말하면, “인간존재의 깊이는 곧 말씀의 깊이만큼이나 깊다.” 왜냐?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본다면 그 사람이 대하는 성경말씀도 너무나 가벼워요. 자기가 자기내부를 깊이 있게 들어가지를 못했으니까 말씀 보는 것도 전부 다 자기 이익, 자기 복 받는 것, 자기 잘난 것, 나풀나풀, 너무나 가벼운 해석만 나와요.
그런데 산에 깔려가지고, 그것도 뒷산 정도에 깔려가지고 헥헥거리는 사람은 성경을 보게 되면, 이 모든 성경이 나를 죽이려고 주신 말씀이라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여요. 왜냐하면 내가 아직도 선악과 사고방식 가지고 나 살고자, 나 잘났다는 것을 목표로 성경말씀을 들추고 있다는 이 죄의 깊이를 율법이 찾아와서 그걸 무거운 산으로 눌러버리거든요.
“이제 알았나? 너라는 인간이 얼마나 죄가 깊은지를.” 그러면 “알았나이다. 제가 이 정도 죄인입니다.” 하거든요. 하지만 아직 멀었어요. 죽을 때까지 멀었어요. 하루 이틀 더 살아보면 그것보다 바닥을 더 쳐요. 더 내려가요. “이 정도로 내가 죄인이었습니다.” 점점 내려가는 겁니다. 죽을 때까지.
그러면 뭐가 나오는가? 나를 이렇게 눌러대는 하나님의 예언과 말씀의 그 폭이 내가 죄인이면 죄인일수록 더 엄청난 양으로서 말씀의 증언, 주님을 증언할 수 있는 증거자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일단은 우리라는 존재가 산에 무너져야 되지요. 밑에 깔려버리면 우리가 죽은 자가 되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미 죽은 자를 구원하실 때는 하나님께서 산자로, 죽었는데 산자로 부활시키는 것 맞지요?’라고 죽은 것은 대충이고 다시 사는 그것에 희망을 갖고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겠지요. 에스겔 37장의 경우에 골짜기에 바짝 마른 뼈들만 있는데 말씀이 오니까 말씀이 꽂힌 사람만 살아나서 그 사람은 하나님의 군대 이스라엘이 된다는 그 내용이 나와 있거든요. 하나님의 구원방식이 그래요. 다 죽여 놓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이 여기서 놓치면 안 되는 것이 있어요. 필히 알아야 될 것이 뭐냐? 죽을 때는 존재로 죽지만 우리가 살아날 때는 이것이 사건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건이 뭐냐? 사건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창세기 1장 14절부터 19절까지를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또 그 광명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에 비취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사 큰 광명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으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에 비취게 하시며 주야를 주관하게 하시며 빛과 어두움을 나뉘게 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네째 날이니라.”
상당히 길었지요? 길지만 간단히 말씀드려서, 하나님께서 해와 달과 별들을 만들어놓고 주야로 나뉘게 했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가 여러분에게 질문을 할 테니 속으로 답변해 보세요. 창세기 1장 3절에 첫째 날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고 넷째 날에 하나님께서 해와 달과 별을 만드셨거든요. 그러면 “해도 없고, 달도 없고, 별이 없는데 어떻게 빛이 있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입니다.
빛은 첫째 날에 만들었고, 해와 달과 별은 넷째 날에 만들었는데 어떻게 해와 달과 별도 없는데 어떻게 우리가 빛이라는 것을 받을 수가 있느냐는 그 말입니다. 우리의 과학적인식이. 그래서 사람들은, 창세기는 비과학적이고, 다른 말로 해서 미신이고, 옛날 동화고, 과학이 발달되어 있지 않았을 때의 사고방식, 옛날 사고방식의 동화다, 그런 식으로 아주 무시를 해버리지요.
그러면서도 본인들은 인간이 어디서 나왔는가는 전혀 모르고요. 전부 더 엉터리 같은 소리만 하고 있고요. 우주는 137억년, 지구는 42억년, 시간 늘이기에 바쁘지 살아봤어요? 42억년을? 52억년이니 42억년을 살아봤습니까? ‘성경을 믿을 수 없는 것이, 해와 달과 별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빛이 지구를 비추게 되는 이것이 합리적이고 정상적이지 어떻게 해와 달과 별도 없는 빛이 있을 수 있느냐?’ 이런 의식, 사고방식이 바로 본인들이 얼마나 자기중심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지요.
여기서 이것을 영어로 하면 빛은 ‘light’라고 하고 해와 달과 별을 ‘lightgiver’라고 해요. 빛이 있고 그 다음에 빛을 받아서 그것을 나눠주는 기능, 빛은 먼저 만들어져서 따로 있고 그 빛을 받아서 나눠주는 기능만 하는 것이 해와 달과 별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해와 달과 별이 있다. 해라는 것이 존재, 달이라는 것이 있으니까 달이 존재한다. 달이 있다. 별이 있다. 별이 존재한다.’ 이렇게 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들의 기능은 존재를 위한 기능은 아닙니다. 주야를 주관하게 하셨다. 여기서 ‘주야’, 낮과 밤으로 되어 있는데 사실은 밤과 낮이 옳아요.
19절에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네째 날이니라.” 밤이 되고 낮이 되고, 밤이 되고 낮이 되고. 그러면 밤과 낮의 그 사이, 틈이 있겠지요. 틈은 존재가 아니고 사건입니다. 사건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해와 달과 별이 있는 거예요. 그걸 우리나라 말로 하면 더 명확한데요. 우리나라에서는 옛날부터 어둠을 검다고 했어요. 그리고 낮을 밝다고 했어요. ‘검밝’, ‘검밝’, 오늘날의 ‘깜빡깜빡’이 거기서 나왔거든요.
라는 노래 아시지요. “깜빡깜빡…….” 계속해서 이 세계는 어떤 사건을 이야기하고 싶어서 사건, 사건만 이야기하고 싶은 거예요. 누가 여기 있다는 것은 그 사건을 받아서 사건을 남에게 표출하기 위한 잠시 있다 없어지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지 정말로 존재하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이 우주는 하나님이 계심을 증명하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임을 증명하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이니까.
천지를 만들 때 주님이 계시고, 존재하시고, 우리는 주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깜빡거리는 사이존재, 사이니까 사건, 사건으로서 이 땅에 태어난 거예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긴긴세월을 보내는 것 같지만 죽고 나면 우리는 한순간에 불과합니다. 한 사건에 불과해요.
어떤 사람이 태어났는데 어떤 사람이 죽었다. 한 사건이에요. 폭이 굉장히 좁아요. 꼭 틈에서 나온 것 같아요. 틈을 비집고 그냥 잠시 숨 쉬다가 돌아가신 것 같아요. 장차 모든 인간이 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살아생전에 뭘, 무슨 사건을 보여줬느냐 그게 중요하거든요.
그것을 오늘 본문 호세아 10장에서는, 하나님의 언약의 진척과정, 시작과 끝을 보여주는 것 그게 바로 이스라엘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이스라엘이 존재하는 이유는 존재 그 자체, 이스라엘이 여기 있다, 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냐, 하는 것을 이스라엘사건을 통해서 보여주는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것을 모르고, 사건을 보여줘야 되는데 그들은 ‘이스라엘은 여기 있다. 하나님은 저기 계시다. 저기 계신 여호와께서 여기 있는 존재, 여기 있는 나를 존재케 하셨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내 존재가 정당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맹세하고, 계약을 맺고, 언약을 맺고, 사법체제를 이루면 하나님께서 설마 이것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 안 무너뜨릴 거야. 영원히 존재하게 될 거야.’ 이런 고집을 부린 것이 바로 호세아 본문에서 문제라고 하는 거예요.
창세기 1장에서 해와 달과 별, 그들마저도 ‘lightgiver’, 매체에요, 매체, 이동하면서 빛을 그냥 보여주는 것뿐이에요. 이스라엘이 되었으면 하나님의 언약이 무엇인가를 보여줘야 될 텐데 그들은 그것을 받아서 독자적으로 자기가 영원히 버티려고, 자기 잘남을 과시하려고 하나님이 아닌 왜곡된 다른 신을 보여준 거예요.
다른 신을 보여준 이유가 뭐냐? 자기를 사건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기가 잘 먹고 잘 살려고 한 그것이 문제가 된 겁니다. 그래서 그들이 세운 하나님제단을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느냐? 5절에 보면 “사마리아 거민이 벧아웬……”
벧아웬은 벧엘입니다. 벧엘은 북쪽 이스라엘의 제일 남쪽, 유다와 가장 가까운 국경선에 있어요, “벧아웬의 송아지를 인하여 두려워할 것이라” 벧엘에 우리를 애굽에서 구원한 여호와 하나님의 표상으로 송아지를 만들었어요. 그것을 만들고 북쪽 ‘단’이라는 곳에도 만들어서 여호와의 형상이라고, 여호와종교라고 한 겁니다.
그게 북이스라엘 여로보암 1세 때입니다. 열왕기상 12장에 나오는데 그 자체적으로 전체성을 구성한 거예요. 전체성을 구성했다는 말이 잘 이해가 안 되시면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교회에서 권사를 새로 뽑는데 “우리 교인 가운데 출석교인 3분의 2이상의 표를 받아야 권사가 될 수 있습니다.”라는 법 체제를 약속이라고, 계약이라고 내놨을 때 그것이 뭐가 문제가 되느냐?
왜 3분의 2가 되어야 되느냐, 라고 이유를 묻게 되면 ‘그래야 우리 교회라는 전체가 번창하고 안정되고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건 뭐냐? 우리 교회는 살아 있어야 되고 존재해야 된다는 것을 목표로 그러한 약속과 계약을 교인들끼리 정해놓은 겁니다. 그래놓고 말을 하기를 하나님께서 도우셨다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 뜻이라는 거예요.
우리교회가 오래 머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서 우리교회는 오래 가야 된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내가 속한 내 위주의, 나는 존재하는 것이 정당하고 당연해야 된다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서 산에 깔려서 죽어 마땅한 대상이라는 것을 전혀 몰라요. 사람이 존재가 되면 협박의 대상이 됩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오늘 뉴스에 천주교추기경이 하는 말이, 불교에서 부처님 오신 날, 대체 언제 왔다갔다는 건지 모르겠는데, 하여튼 “부처님 오신 날 연등행사를 신종코로나 때문에 취소한 것은 대승적 안목에서 참 잘한 일이고 박수 받을 일입니다.” 그 이유가 뭐냐? “모든 종교는 하나니까요.” 천주교가. 제가 천주교는 불교라 했지요.
천주교 우리나라 대표가 모든 종교는 하나래요. 모든 종교는 하나를 추구하기 때문에 어느 종교가 더 나은 종교는 없고 어느 종교를 믿든 상관없이 그것은 진리가 되고 구원받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나라 천주교 수장되는 추기경이 왜 그런 소리를 하느냐 하면, 이 천주교만큼은, 이 성당만큼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오래 있어야 된다는 것을 기조로 깔고 그것을 목적으로 해서 그런 발언이 나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이 자기들 딴에 여호와형상이라고 해서 송아지를 세웠지만 하나님보시기에 그걸 가짜 신으로 규정하는 거예요. 가짜신, 가짜여호와, 요새말로 하면 가짜 예수, 가짜 교회, 가짜 삼위일체, 가짜 성령, 가짜 성부, 아무리 신학적으로 정통신학을 해도 그 신학을 하는 이유가 뭐냐? 당신이 예수 믿는 목적이 뭐냐? 나 잘되기 위해서. 그것은 전부 다 가짜입니다.
주님의 모든 말씀은 나를 완전히 찌그러뜨려서 죽이는 거예요. 죽여야 돼요. 죽이고 난 뒤에 그 다음에 하나님의 방식으로 구원하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의 방식은 뭐냐? 자기가 안 죽어야 돼. 살아야 돼. 꼭 살아야 돼. ‘하나님이 이 살아야 되는 나를 어떤 방식으로든 구원해보세요.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이것이 인간이 끄집어낸 가짜 언약이고 가짜 맹세에요. 바람에 날려갈 허무한 맹세입니다. 백날 안동역 앞에서 기다려보세요. 오는가. 주님 안 오셔요. 왜? 허무한 맹세기 때문에. 자기구원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냥 살다 죽으면 되는데. 살다 죽어도 괜찮아요. 왜? 주님 계시잖아요. 참 오랜만에 바른 소리 합니다. 내가 살다 죽어도 괜찮아요. 왜? 주님 계시잖아요.
요한복음 1장에서 말씀이 먼저 있고 생명은 그 다음이라니까요. 순서가 바뀌면 안돼요. 제가 컴퓨터 사용해서 워드 치다가 가끔 순서를 엉터리로 하는데요. 영어로 치다가 그 다음에 한글로 바꾸려 하면 언어 변환키를 쳐야 되거든요. ‘한/영’, 자판에서 이 키를 치고서 타자를 쳐야 되는데 바쁘다 보니까 그냥 치면 한글이 아니고 영타가 계속 찍혔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변환키 ‘한/영’ 누르고 치니까 한글이 죽죽 나오는 겁니다. 순서가 뭐냐 하면, 변환키 누르는 그것이 먼저에요. 구원은 주님의 언약에 속하는 것이 먼저에요. 기존의 내 중심의 내 언약가지고 아무리 “천당 보내주세요. 하나님 섬기겠습니다.” 해 봐도 그것은 하나님께 먹혀들어가지를 않아요.
주님의 언약변환 키가 뭐냐 하면, 십자가에서 같이 죽는 겁니다. 십자가는 율법의 무기잖아요. 예수님마저 죽인 것이 율법이거든요. 율법대로 죽으신 거니까. 그 율법의 무기에 우리는 앞산의 무게처럼 다 깔려죽는 거예요. 율법의 무게에 죽는 거예요. 그 다음에 하나님의 구원방식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멀쩡하게 내가 살려고 애쓰면서, 내가 천당 가려고 온갖 애쓰면서, 성경을 천 독, 몇천 독 하면서 ……, 어떤 사람은 성경 다 외우는 사람이 있다는데 나는 아직 안 믿어요. 그런 식으로 자기 구원받으려고 변환키 ‘한/영’ 그 키도 치지 않고 자기 살겠다는 그 노선을 유지하면서 내 존재, 내 존재, 마치 하나님이 자기 존재를 위한 시다바리입니까?
뭐가 우선인지를 몰라요. 하나님이 우선이지 내 구원이 우선이 아니잖아요. 죽어봐야 이 말이 이해되지요. 앞산에 진짜 깔려봐야 ‘아, 내가 존재가 아니고 하나의 사건이구나.’ 사건용도로 태어난 거예요. 어둠과 빛 사이에, 무엇이 어둠이고 무엇이 빛인가를, 주님이 빛이고 세상 모두가 어둠이라는 것을 증거 하기위해서 주님께서 죽은자를 성령을 줘서 살려내는 겁니다.
따라서 성령 받은 사람은 존재라고 우기지 않고 사건이라고 하지요. 주께서 함께 하셔서 세상은 지옥이고 주의 나라만 천국이라는 사실, 마땅히 온 산이 뒤집어지고 모든 것이 언약에 의해서, 율법에 의해서 마땅히 징벌 받아야 되는 세상에서 우리가 태어났음을 성령 받은 사람만 증거 할 수 있는 겁니다.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사건으로 태어나는 거예요. 그게 다시 태어나는 겁니다. 사람은 절대로 개과천선 못합니다. 개과천선한다는 것 믿지 마세요. 하나님께서는 죽고 난 뒤에 사람을 불러내시는 그 방식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방식은 자기가 수작을 부려서 자기가 자기자신을 건져내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합니다.
여러분이 물에 빠졌는데, 여러분이 운동화를 신은 채 물에 빠졌는데 자기 팔을 내밀어서 자기 발에 있는 운동화 끈을 잡아당기면 자기 몸체가 물에서 나올 수 있습니까? 다리만 번쩍 들리겠지 물에서 빠져나갈 수 있겠어요? 자기 살겠다는 식으로 예수를 거론하고 하나님 거론하는 것, 그게 바로 기존의 이스라엘이 몰랐던, 그래서 하나님에게 지적받고 멸망의 대상이 되었던 이스라엘의 사고방식과 동일한 사고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개인하고 약속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전체성, 일단 전체성으로 조져버립니다. 사적으로 손들면 “손 내려 가만있어. 그냥 죽기만 해. 율법으로 말미암아 입 다물고 저주받기만 해. 딴소리 하지 말고.”
그 다음에 살려내는 방식은, 일단 죽여 놓고 내가 살려낼 때 그래서 살아났거든, 아, 나는 나를 위한 존재가 아니고 살려주신 주님을 증거 하기위해서 빛과 어두움, 천국과 지옥, 그 사이, 그 차이성을 증거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새롭게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었다는 사실, 이걸 신약의 입장에서 다시 호세아를 볼 때 그렇게 느긋하게 볼 수 있는 안목이 성령 받은 사람에게만 해당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자기의 우상성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율법이 원하는 대로 모든 사람은 율법에 의해서 저주받아야 마땅함을, 이미 성령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그 조치를 반길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