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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38강-호 10장 1-3절(두마음)200422-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호세아

38강-호 10장 1-3절(두마음)20042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 10장 1절에서 3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264페이지입니다.

호세아 10:1-3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아름다울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 저희가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죄를 받을 것이라 하나님이 그 제단을 쳐서 깨치시며 그 주상을 헐으시리라 저희가 이제 이르기를 우리가 여호와를 두려워 아니하므로 우리에게 왕이 없거니와 왕이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리요 하리로다.”

호세아의 말씀은 예언의 말씀입니다. 예언이 전해주는 그 시대에는 그 말이 진실 된 것을 모르고 있다가 그 예언의 말씀을 이스라엘이 위반했을 때 자신들이 위반했다는 사실과 더불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어떤 방해나 어떤 시도에도 불구하고 주의 말씀은 멈추지도 않고 필히 말씀대로 성취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성경말씀이 말씀대로 되도록 하나님께서 조치하셨다는 그 내용으로 인하여 그 내용 안에 들어 있는 우리는 ‘아 정말 위반했구나. 우리가 말씀을 안 지켰구나.’라는 것을 뒤늦게 발견하게 되지요. 호세아가 예언이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역사가 아니라는 뜻은 초역사라는 뜻은 아니고요.

역사라 하는 것은 지난 이야기거든요. 흘러가게 되면 다 그만이지만 단순히 역사가 아니고 예언이 되어버리면 지나간 이야기라고 여겨졌던 그 원칙이 지금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예언의 말씀으로 똑같은 원칙을 가지고 우리를 향하여 지적합니다. 옛날에는 이스라엘을 지적했던 그 지적이 오늘날 우리보고 지적을 하게 돼요.

이렇게 말씀드리면, ‘우리한테 무슨 이익이 있느냐?’라고 생각할 것인데 ‘우리에게 이익이냐 손해냐’가 아니라 예언이 예언답게 되게 되면 그게 오케이고 말씀이 말씀답게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것이 드러나면 그것으로 우리는 족한 겁니다. 내가 말씀 지켜서 얼마나 손해를 안보고 유익을 취했느냐, 그게 목표가 아니에요.

‘과연 인간의 모든 영광은 풀과 같이 다 사그라지는 것이 당연하고 그렇다 할지라도 말씀이 말씀대로 영원히 살아 있으면, 생생하게 그게 완성이 된다면 더는 소원이 없다. 역시 말씀이 최고입니다.’라는 마음자세를 가져야 돼요. 태초에 말씀이 있었잖아요. 우리가 있기 전에 말씀부터 먼저 있었어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러면 그것으로 족하지요.

그거 증거 하라고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신 거예요. 성도로 만드신 겁니다. 성도가 되기 전까지는 내 이익을 챙기다가 성령이 와서 성도가 되고서는 “나보다 말씀이 우선인 것을 찬양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고맙고 고맙습니다.” 그렇게 되는 거지요. 성도의 사는 목적과 성도가 아닌 사람의 목적이 이처럼 차이 나지요?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사람에게 호세아가 던져준 예언의 말씀은 그 당시 사람들이 알아듣는다는 것이 아니에요. 결국 그 당시 이스라엘사람들은 망하도록 정해진 길입니다 코스가 망하는 쪽이에요. 망하고 난 뒤에 방금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호세아 선지자가 한 말씀은 빈말이 아니고, 헛방이 아니고, 지나간 과거역사가 아니라 말씀이 말씀대로 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이용했구나.’

이스라엘사람들이 그 정도만 알고 있다면 그 이스라엘사람은 구원된 이스라엘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기 형편이 얼마나 힘들고 어렵다 하는 그것은 고려하지 마세요.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것이 힘들고 어렵고 가난하다.’ 그런 것은 생각하지 마세요. 내 몸에서 말씀이 발산된다면 그것으로 성도의 역할은 다한 겁니다.

이걸 구체적으로 한다면, 내 몸에서 언약이 발산된다면, 내 안에 있는 언약에 바깥으로 발산 해가 햇빛을 비추는 것처럼 언약이 나온다면 그 사람은 속에 언약 있음이 확정되기 때문에 언약의 사람이고 언약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멸망의 길로 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언약완성이 나와야 돼요.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호세아의 말이 먹히지 않겠지요. ‘호세아 네가 뭔데?’ 그렇게 나올 거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호세아 이 본문을 이해하려면 우리가 일단 이렇게 하면 편합니다. “이스라엘 망했다. 말씀대로 망했다. 자, 망한 시점에서 이 호세아를 다시 보자.” 그 말입니다.

다시 보게 되면, 이스라엘은 열매 맺도록 되어 있는데 그들은 열매 맺었다고 우겼습니다. 첫 번째 그들의 잘못이지요. 가나안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의 열매란 뭐냐? 젖과 꿀이 열매라고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그러나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었다는 겁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잘못된 줄도 몰랐고 심지어 멸망직전까지라도 그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서 잘 먹고 잘살았으니까 ‘이거라도 만족하지 뭐. 하나님 고맙습니다.’ 하고 그것으로 때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열매가 가짜다. 이것은 틀렸다. 그것은 내가 원하는 열매가 아니야.”라는 그 열매가 역사적으로 2절에 나옵니다. “이제 죄를 받을 것이라 하나님이 그 제단을 쳐서 깨치시며 그 주상을 헐으시리라.” 그들 나름대로 “하나님 고맙습니다.” 하고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렸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생각하는 열매는 내가 기대하는 열매가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열매라는 것은 그 당시 이스라엘사람들은 몰라요. 자기가 잘 먹고 잘살고 행복하면 그게 하나님이 주신 복의 열매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보통 교회에서 복 받았다 할 때 그 이미지가 뭐예요? 복 받은 이미지가, 빌어먹고 자기 인생 망가진 그것을 누가 복이라고 하겠습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으며 십자가로 가는 그것이 복이다.” 그것은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주장한 거잖아요. “나를 위해서 핍박받는 것이 복이다.” 그게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이야기지 일반인에게 복이라 하는 것은 자기중심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열매도 아닌데 본인들은 하나님이 주신 열매라고 해서 감사의 제단을 쌓고 감사의 제사를 드린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그 제단 치워버려라. 더럽다. 그것은 열매 아니야. 왜? 너희들이 두마음을 품었다.”는 겁니다. 두 마음이 뭐냐? 그들이 기대하는 것과 현실이 괴리되었다. 따로따로라는 겁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복이고, 내가 기대했던 복이고 그게 현실화되었다고 자부했는데 그러나 우리가 이스라엘이 망하고 난 뒤에 보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야구방망이를 가지고, 여기서 방망이라는 것은 앗수르를 말하는데 물론 야구는 없었지요, 방망이를 가지고 이스라엘을 개 패듯이 패는, 죽어라고 패는 그게 현실성이에요.

그들은 그들이 잘 먹고, 잘살고, 생존하는 그것을 현실성으로 봤는데 주님은 그들의 현실성을, “이것은 열매가 아니야. 이것은 열매가 아니라고, 하고 때려 부수는 그 현실을 너희는 왜 모르느냐? 왜 너희는 한치 앞을, 너희 미래를, 너희 운명을 왜 모르느냐? 너희 장래를 너희는 왜 모르는가? 내가 팬다는 것, 내가 부순다는 것, 앗수르라는 몽둥이를 가지고 너희를 친다는 것 그것을 너희들은 왜 몰라?”

bc722년에 이스라엘이 망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망할 줄 몰랐지요. ‘하나님 믿고 약속의 땅에 왔고 잘 먹고 잘살고 뭐, 그게 사는 거지. 인생 뭐 있어?’ 그게 전부잖아요. 라는 tv프로그램이 있어요. 어떤 사람이 집 구해달라고 신청하는 거예요. 방송국이 발이 넓으니까 그 가격에 전세든 자택이든 구해달라고 하는 거예요.

서너 군데 집 소개를 하게 되면 허름한 집에 사는 사람은 정말 부러워 죽지요. ‘아, 나는 언제 돈 벌어서 저런 좋은 집에 살아보나.’ 좋은 집 구해주면 이사비용까지 대주니까 좋다고 환호성을 올려요. 사람들은 그것을 가지고 사는 재미 사는 보람, 사는 열매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몽둥이 가지고 홈, 그 집을 다 때려 부수는 것이 열매라는 생각을 감히 못하지요.

그들은 ‘내가 행복하고 싶다.’가 현실로 이어질 때 내가 기대한 것, 행복하고 싶고, 편하고 싶고, 여유롭게 살고 싶다는 기대성, 그 마음이 현실로 이어지는 그 마음, 이 두마음이 늘 하나이기를 소원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은 두 마음이 아니고 사실은 한 마음으로 이미 굳어진 겁니다. ‘내가 잘되는 것이 하나님의 복이다.’ 거기서 나를 빼지를 못해요.

나 빼고 나를 부수는 것이 하나님의 복이라는 생각을 못하고 나를 꼭 거기에 집어넣고 ‘나 잘되고 내가 천국 가는 그것이 복이다. 누구한테? 나한테.’ 이것은, 하나님께서 내가 그런 열매 맺으라고 약속의 땅에 집어넣은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약속의 땅에 집어넣었다는 말은, 이스라엘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그 땅에 먼저 살고 있던 원주민들, 그 사람들이 어떤 것을 기대했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요. 가나안 토착민이라 하는데 성경에서 열 족속이라 합니다.

아브라함족속이 하나님의 힘에 장악되어서 애굽에서 탈출해서 광야를 지나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이 전에 내내 가나안 땅에 살던 토착민들, 원주민들이 있잖아요. 그들이 어떤 것을 복이라고 여기고 어떤 것을 삶의 보람으로 여겼겠습니까? 본인들이 잘되는 거예요.

이스라엘과의 차이를 보자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약속의 땅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들어가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언약이 있어요. 그 언약이 있는 하나님이 여호와 하나님이에요. 언약을 앞장세우고 그것을 실현해나가는 하나님이 여호와 하나님인 반면에 토착민은 언약이 없으니까, 하나님이 하늘에서 주신 계시가 없으니까 출발을 내가 편하고 내가 행복한 것이 모든 생각, 모든 마음가짐의 출발점이에요.

‘나만 잘되면 어떤 신이라도 내가 헌금 드리고 충성할 용의가 있다. 일단은 내가 원하고 내 기대에 부합하는 현실로 나에게 돌아온다는 조건하에 내가 그렇게 해준 신에게는 잘할 용의가 있다.’ 이것이 바로 토착민들의, 언약이 없는 일반인들의 사고방식이에요. 그걸 이방민족이라 합니다. 이방민족이 믿는 종교가 바알종교에요.

지금 호세아 내내 지적하는 것은, 그 차이점을 알라는 겁니다. 여호와와 바알과의 차이점을 너희들이 모르면 안 된다는 거예요. 모르면 몽둥이 가지고 다 팬다는 겁니다. “여호와의 이름이 있어야 될, 언약이 있어야 될 이 약속의 땅에 언약도 모르면서, 언약도 위배하면서 계속 거기에서 발붙이고 살겠다는 것은 나는 용납 못한다. 나가라 전부다. 다 꺼져버려라. 열매도 없는 민족들 나는 용납 못한다.” 이게 오늘 호세아의 내용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두 마음을 품었다는 말은, 그들은 몰라요. 자기가 좋은 것이 곧 하나님이 좋은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들은 잘 먹고 잘사는 것을 구원으로 봤기 때문에 그들은 몰라요. 그러면 두 마음은 어떻게 아느냐?

두 마음은, 하나님의 언약을 모르는 그 백성에게 몽둥이로 내려치는 것도 하나님의 계획된 스케줄이었고 결국 그들이 나중에 ‘우리는 언약이 없어서 망하는 특수한 민족이었다. 그게 언약 있음의 특수성이다. 다른 민족과의 차이점이다. 다른 민족은 내 몸뚱이만 있으면 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언약이 장착되는 이것이 근본요소다.’ 하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아, 그 때 우리는 두 마음을 품었구나.’ 하고 그제야 호세아가 두 마음을 거론하는 이유를 알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두 마음’이라는 것을 그들이 멸망하고 난 뒤에 왜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시는가 하면, 사람들은 자기중심이 되어버리면 두 마음이 아니고 마음이 현실과 결핍되더라도 그래서 기대성과 현실성으로 마음의 괴리가 있지만 그걸 좁혀보려고 애를 쓰지요.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내 소망과 현실을 일치시키기 위해서 노력을 하는데 그게 뭐냐?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내가 악을 줄이고 선을 키워서 내 소망하는 것이 곧 나의 행복으로 되돌아오기를, 그게 참된 현실이기를 소망하고 기대하는 겁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과연 내가 착한 일을 하면 복 받고 나쁜 짓 하면 벌 받는다는 그 증거 수집을 다른 사람들에게서 찾기 시작합니다. 다른 사람, 방송이나 신문에 나오는 죄짓는 사람을 보게 되면 ‘저건 반드시 망해야 돼.’ 그리고 착한 사람 같으면 ‘저 사람은 반드시 복 받아야 돼. 이 원칙은 하늘이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이 와도 이것은 옳다. 이것은 반드시 맞고 옳은 이야기고 진리다.’ 라고 간주하고 잘된 사람이 얼마나 착하냐, 그리고 못된 사람은 얼마나 벌을 받는가의 그 잣대를 가지고 남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거예요.

왜 그런가 하면 본인이 그 원칙을 고수하고 싶어서, 나도 그렇게 살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그게 선악과원리입니다. 그런데 백날 그렇게 해봤자 결국 죽잖아요. 죽음이라는 것, 왜 죽는지 그것은 빼돌리고, 죽음이라는 것을 살아 있을 때부터 생각해야 되는데 그것은 나중일로 미뤄버리고 그저 영원히 사는 것처럼 여기면서 내가 사는 동안 행복해야겠다고 버티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마다 평가하기를 저 사람은 덜 나쁜 사람, 저 사람은 더 나쁜 사람,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그리고 내가 욕했던 사람의 죄를 내가 짓고 있다면 그 사람 벌 받는 것 보고 ‘나도 동일한 저주를 받겠지.’ 하고 벌벌 떨고 있어요.

사람은 어디에 속고 있느냐 하면, 사람이 아무리 죄를 지어도 네모난 죄, 세모난 죄, 동그라미 죄, 오각형 죄, 그 나물의 그 밥이에요. 사람이 인물이 다 다르지만 세모난 얼굴, 네모난 얼굴, 동그라미 얼굴이 있어도 만나보면 똑같은 인간이듯이 이 세상의 죄는 다 그렇고 그런 수준의 죄, 똑같은 죄에요. 그 모든 죄는 그렇고 그런 한 종류의 죄밖에 안됩니다.

이 죄가 두 종류의 죄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서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저주받는다’는 이 복음의 내용, 십자가의 내용을 보면서 아, 이 세상의 모든 죄는 두 종류로 나눠진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성령 받은 성도만 알아요.

주님께서 세모난 죄, 네모난 죄, 동그라미 죄 때문에 지옥 보내는 것이 아니고 기본적으로 주를 믿지 않는 자, 주를 사랑하지 않는자가 지옥 가는 거예요. 이것이 이미 성령 받고 주님을 아는 자에게는 얼마나 든든한 지원군인지 몰라요. 이것보다 더 기분 좋은 말이 없어요. 제일 기분 좋은 말은 뭐냐 하면, 세상 사람들이 지옥 간다는 사실.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고. “가거라. 지옥으로! 이 인간들아.” 세모 가라, 네모 가라, 세모와 네모, 저 사람은 죄를 더 짓고 나는 적게 짓고, 세모나 네모나 작대기나 다 똑같아요. 그렇고 그런 죄에요. 오직 하나님이 찾는 죄는 이것 하나밖에 없어요. 십자가로 죄 씻음 받지 못하고, 십자가의 피의 효과를 모르는 죄, 이것이 바로 영원히 지옥 가는 죄입니다. 이거 자부심 가져야 돼요. 신종코로나 속에서 자부심 가져야 됩니다.

‘바이러스 오너라. 그래도 나는 천국이다.’ 그래 되어야지. ‘주여, 우리 민족이 왜 이렇게 죄를 지어서 바이러스를 보내셨습니까?’ 새삼스럽게 무슨 죄를 거론합니까? 처음부터 그렇고 그런 종류의 죄밖에 안되는데. 서로가 잘났다 못났다, 서로 자기들끼리 비교한다고요.

서로 비교해서 ‘아이고 부자 되었구나. 착하구나. 나는 죄 지어서 가난한가? 주여. 착하게 살아서 부자 되게 하옵소서.’ 맨 날 교회 와서 내놓는 기대감, 그 기대감이 현실이 되어야 하니까 그 마음이 두 종류의 마음이 된 거예요. 두 마음이 된 거예요. 기대와 현실, 기대 따로 현실 따로. 두 마음이 독사의 혀처럼 둘로 갈라져버린 거예요. 하나로 통합이 안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언약위주인데 이스라엘백성들이 바알신을 수입하다 보니 출발점이 내가 잘되는 것부터 출발한 거예요. ‘얼마나 착하면 부자 되겠습니까?’ 이것부터 출발하니까 그 자체가 현실과의 괴리로 갈라지는 겁니다.

이렇게 된 원인은 선악과나무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고 두 개의 나무가 있었어요.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 나무가 두 개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인간이 이미 선악과를 따먹다 보니까 이미 따먹은 나무의 열매, 그 안에서 갇혀 사는 거예요. 모든 삶의 원리원칙이 선악, 선악, 선악, 그 안에 멈추는 거예요. 바깥으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슬그머니 딱 생명나무 원리를 갖다 대버리면 ‘아하, 마음에는 두 종류의 마음이 있었구나.’ 이게 한 종류인데 진짜 두 마음이 되려면 선악과에 기초하지 않는, 하늘에 있는 생명나무의 마음으로 하나가 된 그 분이 이 땅에 출현해야, 등장하셔야 이 세상에는 딱 두 종류의 마음밖에 없지요. 선악과에 갇혀 있는 마음과 생명나무로 이동시킨 마음, 딱 두 종류밖에 없는 겁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새마음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의 마음, 생명나무 마음을 가진 사람을 “새마음을 가져라. 곧 예수의 마음을 가져라.” 그 말입니다. 예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사형당해도 괜찮다는 겁니다. 십자가에 죽어도 괜찮아. 마음자체가 생명나무의 원리가 통하는 마음이기 때문에.

그래서 선악적입장에서는요, 이 마음을 추스를 생각하지 마세요. 마음을 자기가 조절하거나 관리해서 평화로운 마음을 가질 생각을 하지 마세요. 아예 마음을 주님 앞에 줘버리세요. 자기가 다스리려고 하지 말고. 선악자체가 이게 고장 난 거거든요. 우리 마음이 바이러스 걸린 거예요. 마음에 상처가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자체가 상처에요. 마음자체가 짐이에요.

자기 마음을 생각하지 마세요. 줘버리세요. 줘버리게 되면 우리 마음은 상처기 때문에 예수님의 마음으로 이동하다 보니까 예수님의 마음이 상처의 모습으로 내 마음이 거기에 가 있음을 우리가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의 마음 안에 나로 인한 상처가 있는 마음, 그게 십자가지신 마음이에요. 그게 용서의 마음이고 긍휼의 마음이에요. “너는 죄인인데 내가 용서한다. 네 죄를 내 마음에 품었다. 네 상처가 아니라 이제는 예수님 내 상처로 품었다.” 그 마음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 안에 수입된 겁니다. 우리 안에 예수의 마음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 2절에 “하나님이 그 제단을 쳐서 깨치시며 그 주상을 헐으시리라.” 이것은 뭐냐? 현실이거든요.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특히 기독교 잘 모르는 사람, 기독교 잘 알지도 못하고 교회 나오는 사람들에게는 성경이 참 낯설게 들리는 이유가 어떻게 그 말씀이 현실로 되어지는가, 그게 납득이 안돼요. 교회 오래 다녀도 별반 다를 것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몽둥이로, 앗수르라는 그 강대국으로 패는 그 현실이 마음에서 나왔다는 그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왜 놀라운가 하면 예수님의 마음이 그냥 마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이 지구상의 운명이고 곧 현실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평소에 살아가기를 현실 따로, 내 마음 따로, 이렇게 되지요. 현실 따로 내 마음 따로니까, 사람들이 신종코로나가 범람한다 하니까 산속에서 자기혼자 도 닦고 있지요. ‘세상은 돌아가라. 내 마음은 순수하다.’ 마음 따로 현실 따로 분리할 줄 아는 거예요.

그러나 성경은 처음부터 현실 속에 수상한 마음이 있었음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현실은 수상한 마음이 오늘날 더러운 현실, 우리가 고통 받는 현실을 야기 시킨 거예요. 물론 우리 마음이 아무리 기도해도 현실은 안 바뀝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이 곧 현실의 모든 것을 다 바꿔 놓지요. 이 세상을 불구덩이로 만들어버립니다. 그것은 곧 예수님의 마음이, 생명나무 마음이 이제는 최종적으로 등장했다는 뜻이거든요. 따라서 우리가 이 세상을 살 때 성도는 ‘내 마음은 챙기지 뭐. 내 마음은 추스르지 뭐.’ 이렇게 수비형으로, 수동적으로 도망치고 피할 생각하지 마세요.

공격적으로, aggressive, 공격적으로 나서야 돼요. 어떻게 공격적으로 나서는가? 형사가 연쇄살인범을 잡기 위해서 증거를 수집하는 그 마음자세로 공격적으로 나서야 돼요. 연쇄살인범이 있어요. 모든 인간을 죽음에서 죽음으로, 너도 죽고 나도 죽고 결국 모든 인간 다 죽어요.

한때 임 영웅이 노래 잘했지만 결국은 죽어요. 이 찬원도 죽고 김 호중도 죽고. 어떤 사람은 이 사람들이 누군지 잘 모를 거예요. 모든 사람은 죽어요. 연쇄살인범이 있어요. 그걸 잡자는 말입니다. 신앙생활 그만큼 오래했으면 범인을 잡아야 될 것이 아닙니까? 잡으려면 증거를 수집해야 되지요.

왜 현실이 이 모양이 되었는가? 공격적으로 나서야 됩니다. 그 연쇄살인범이 아담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담의 사모님이 계셔요. 그 아담부부가 연쇄살인의 범인입니다. 우리는 형사고. 그들이 남긴 자국이 세상을 완전히 지옥으로 만들어놓은 거예요. 아담과 하와가 연쇄살인범이 된 이유가 내가 세상의 주인공이라는 겁니다. 이게 아담에서 발견되는 배후조종자 악마의 윤곽입니다.

악마는 우리로 하여금 ‘네가 주인공이다. 현실 돌아가는 것은 너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니 노력해라. 세상이 다 네 마음먹은 대로 돌아가도록. 기도하든지 선교를 하든지 헌금을 하든지 어떤 수단으로 노력을 하든지 세상 돌아가는 네 앞길이 네 마음먹은 대로 될 수 있도록 할 수 있다. 네가 세상의 주인공이니까.’ 이것을 악마가 계속 시키다 보니까 그 아담과 그 후손들은 연쇄살인범이 된 겁니다.

연쇄살인범이라는 그 감각은 이미 예수의 마음을 품지 않으면 그걸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그게 죄라는 사실을 깨닫지를 못합니다. 그렇다면 아까 이야기했듯이 우리의 그런 마음, 내가 주인공이라는 마음이 과연 현실로 이어질까요? 성경은, 하나님은 언약이 있고 말씀이 있는 한 그걸 용납을 안 하지요.

그러면 왕을 찾는 인간들, 우상, 성경에서는 우상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그들은 신이에요, 여호와라는 이름의 신, 바알이라는 이름의 신, 그 신이라는 것, 나 잘되기 위해서 믿는 그 신, 오늘날 삼위일체, 예수, 성령, 이름을 뭘 로 바꿔도 상관없이 그것은 다 우상입니다.

왜? 우상은 공식은 나를 위하여 신이 존재하기 때문에. 또는 신이 있는 것은 나를 위해서. 평소에 내가 주인공이고 싶은데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내가 주인공이고 싶은 이 기대감에 후원해주고 부응해주는 고맙고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 이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바로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겁니다.

그 우상의 종교, 우상의 교회에서 주장하는 구원이라는 것은 “구원이란 여러분의 심령을 치료하는 것이다.”라고 하거든요. 그게 악마의 거짓말입니다. 악마가 유포한 거짓말이에요. 구원은 우리를 치료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은 우리에게 덮여 있던 그 세세한 관계들이 펼쳐지는 거예요.

도대체 어떻게 해서 태어나면서부터 나는 내가 주인공이고 세상은 나 중심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는 이 말도 안 되는 그 오기, 어떠한 관계들에 의해서, 어떤 변수들이 엮여서 나로 하여금 그런 연쇄살인범이 되게 했는가? 우리 조상만이 그런 것이 아니고 어떻게 그것이 나까지 전달되었는가? 그 관계를 핀셋으로 하나하나 뜯어내는 것 그게 바로 구원입니다.

뜯어내서 내가 죄인 중에 괴수인 것을 들춰내는 이것이 구원이에요. ‘아, 내 마음은 썩었구나. 내 마음은 썩은 마음이구나. 얼마나 썩었으면 내가 평소에 내 마음가짐이 내가 주인공이라는 썩은 마음이 들었을까?’ 이게 생명나무 원칙이 아니고 선악적인 원칙에 준하거든요.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3절에 “저희가 이제 이르기를 우리가 여호와를 두려워 아니하므로 우리에게 왕이 없거니와 왕이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리요.”

사고방식, 그 정신, 태도, 마음가짐 보세요. 왕이 우리한테 해준 것이 뭐가 있느냐는 말이지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이제는 못 믿겠다.’ 하나님을 못 믿겠다는 말은, ‘하나님이 세웠다는 왕도 못 믿겠다.’ 이 말은 곧 무슨 뜻이냐? ‘하나님이든, 왕이든, 신이든 전부 다 그게 옳은 신이다 나쁜 신이다, 하는 것은 내가 결정한다. 나를 위해서 해준 것이 뭐가 있느냐?’ 그 말이지요.

그게 인간이 악마의 앞잡이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에요. 악마하고 다 단짝이에요. 우리는 형사로서 그걸 가만 두면 안 됩니다. 체포해야 되지요. 신앙생활 그만큼 오래했으면 이제 악마정도는 쉽게 체포할 수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어떤 아가씨가 부잣집에 시집을 갔는데 시어머니가 하는 말이 “나는 너를 며느리로 생각하지 않고 내 딸처럼 생각한다.” 말도 안 되는 입에 발린 소리.

부부싸움해서 남편이 삐져서 자기 엄마한테 일러요. 아내가 잔소리해서 못살겠다고. 그러면 부잣집 시어머니, 그냥 시어머니는 용기가 없어서 못하고 부잣집 시어머니는 종용히 부르지요. “시집올 때 너 혼수 뭐 해왔다고 지금 내 아들을 닦달하느냐? 네가 한 것이 뭐가 있다고?” “어머니는 뭐 저를 딸처럼 여기신다면서요?” “딸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이 집안은 내가 주인공이야. 내가 주인공! 너는 내가 주인공임을 입증하기 위해서 너를 며느리로 우리 집에 들인 거야.”

그 며느리 자리에 여호와 하나님을 집어넣어 보세요. 예수님 집어넣으세요. ‘예수가 나에게 해준 것이 뭐가 있다고? 하나님이 나한테 해준 것 뭐 있다고? 하나님이 왕을 세웠다고? 왕이 나에게 해준 것 뭐 있다고.’ 이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이사야의 경우에 우상은 헛것이라는 거예요. 악마가 거짓말 했다. 악마는 거짓말을 했는데 더 정밀하게 말해서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고 속인 거예요. 악마는 인간을 속인 겁니다. 속였다는 말은, 실제로는 아무것도 없는데 마치 뭐라도 있는 양 은폐하는 것을 속인다고 하는 거예요. 개뿔도 아무것도 없는데, 그래서 우상은 헛것인데 마치 뭐가 있는 것처럼 위장술을 벌인 그것을 두고 속인다는 겁니다.

방탄소년단 부른 노래 라는 것이 있어요. 영어로 fake라는 말이 적당해요. 속이는 거예요. 왜 속이는가? 없거든. 헛방이거든. 아무것도 없거든요. 인간은 마음이라는 것이 없어요. 마음은 악마가 줬어요. 악마가 준 마음이다 보니 악마는 하나님에게 독립선언을 한 천사거든요.

‘네가 뭔데?’ 이렇게 하나님이 지배가 싫어서 가출했다는 말이지요. 그 악마를 그대로 빼다 박았어요. 늘 마음속에는 ‘하나님 네가 뭔데? 잘해주면 나도 잘해줄게.’ 이거예요. 그래놓고 아부한다고 사랑의 하나님, 자비로운 하나님, 디모데전서 2장 4절에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는 하나님, 성경구절은 어디서 들어가지고,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한대요.

그러면 전도를 왜 하나, 가만있으면 다 구원받지. 왜? 사랑의 하나님이니까. 사랑의 하나님이 무슨 불구덩이 지옥을 만들어놨어요? 지옥불은 왜 만들어놨습니까? 들어갈 사람아무도 없는데 왜 지옥 불을, 어차피 아무도 안 들어갈 지옥을 왜 만들어놨겠어요? 바로 그게 악마가 장악한 지옥이고 악마가 장악한 천국이에요.

천국가도 계속 자기가 주인공이고 싶어해요. 문제는 그게 현실이냐 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현실이냐를 단정 못하고 앞으로 세월 지나면 내가 마음먹은 대로 모든 것이 된다는 겁니다. ‘인공지능도 나오고, 화성에도 새로운 기지를 만들고, 지금보다 과학이 더 발달하면 지금은 미흡하지만 언젠가는 신종코로나 치료제도 만들어서 어떤 전염병도 겁내지 않는 세계가 올 것이다. 그러니 조금만 기다리자. 기독교 없어도 복음 없어도 우리는 현실을 만들어가는 주체적 존재기 때문에 우리는 가능하다. 과학이 더 점점 발달하면…….’ 이러거든요.

제가 말하는 것은, 그 현실 말고 죽었다 살아난 그 현실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죽었는데 사흘 만에 살아났어요. 우리가 전하는 것은 그 현실 외에는 다른 현실은 없어요. 그게 최종현실이에요. 사도행전에서 사도가 전했던 복음은 그거예요. “누군가 죽었다 살아났다. 그분이 주님이다.” 그게 최종현실의 마감이에요. 그분이 그 생명나무 차원에서 선악과를 아는 모든 것은 몽둥이로 패는 그것만이 미리 당겨서 알 수 있는 유일한 현실입니다.

내 마음 아닙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인하여 발생된 현실이에요. 따라서 내 마음 추스를 필요 없고 내 마음 관리할 필요 없어요. ‘아, 내가 이런 죄를 지었구나. 주여, 내가 못됐어, 못됐어. 때찌! 죽어라, 죽어. 주여, 죽여주옵소서.’ 김 정은이나 죽지 우리는 안 죽어요. 왜 자기 마음 다스리는데 하루 종일입니까? 매일을 자꾸 자기 마음 다스린다고 난리도 아니라.

본인이 악마의 사주 협박 공갈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주님께서는 열매를 원합니다. 십자가 자체가 열매에요. 마태복음 7장 20절에, 열매를 통해서 그들을 안다.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이것은 이 땅에 오신 분의 이야기에요. 이 땅에서 상상한 하나님 이야기가 아니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입에서 나온 말씀이에요.

무슨 말인고 하면, 내가 제시한 열매하고 너희들이 사는 열매하고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겁니다. 그 열매가 바로 십자가로 확연하게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마음 다스리고 그런 짓 하지 마세요. 그것은 fake입니다. 스스로 엉터리이면서도 아닌 척 하는 거예요.

로마서 7장 19절에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 사도바울이 성령의 칼로 좍 째서 자기 마음을 갈랐습니다. 원래 이 마음은 아담에게 전수받은, DNA로 받은 마음이기 때문에 자기 마음 아니에요. 태어날 때부터 이 마음은 아담이 쏙 집어넣은 마음이에요. 연쇄살인범의 마음이 자기 안에 있는 거예요.

가인이 살인했다 해도 가인만 살인한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남이 미울 때 그것은 곧 살인한 거예요. 여러분이 방송이나 신문에 정치하는 사람들 나올 때 또는 김 정은 볼 때 ‘아 저거 안 죽나. 수술로 끝나지 말고 죽었으면 좋겠다.’ 댓글 막 달리지요. 그게 살인이에요.

또 드라마 보면서 ‘저 탤런트 안 나왔으면 좋겠다’ 또 자기 아들 운동회 하는데, 자기 아들이 2등 하는데 1등 하는 애가 너무 잘 뛰거든요. ‘자빠져라. 자빠져라. 자빠져라.’ 그거 살인입니다. 가인만 살인한 것 아니에요.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 십계명 나오지요. 그 말씀 지키려면 이 세상에 여자가 단 한 명뿐이어야 돼요.

다윗이 이웃의 아내를 탐냈잖아요. 마음속으로도 이미 그것은 간음이에요. 동그라미 죄, 네모 죄, 오각형 죄, 그 밥에 그 나물 죄에요. 진짜 죄는 십자가마음 안에, 내 마음에 있던 상처가 그 쪽에 이동했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그것이 죄입니다. 나는 주님 안에 상처로 들어가는 거예요. 주님을 상처 내는 그 상처로 들어가는 거예요.

‘나는 네모다.’ 이제부터 이름을 바꾸세요. ‘나는 상처다. 주님을 상처 내게 하는 상처다.’ 그 마음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누가 알겠습니까? 그래서 사도바울이 기쁨으로 말하는 거예요. 20절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리고 23절에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불능한 사람이다. 나는 선을 키우는 것이 아니고 선을 키운다는 이름의 악을 키우는 사람이다. 그 정도로 선의 추구가 선악과, 선악체계 단 하나밖에 없는 그 안에서 몸부림치는 것밖에 안돼요. 생명나무로 선을 넘은 것이 아니고 선악과 안에 계속 갇혀서 나 자신의 이러한 모습을 감추기 위해서, fake, 속이기 위해서 남을 지적질하는 거예요. ‘n 제곱의 방이 뭐야? n 번방, 나쁜 놈, 그건 공개해야 돼.’ 지는 마스크 쓰고 돌아다니면서.

남 욕할 것 없이요. 다 같은 똑같은 단일한 그 마음, 악마의 마음을 우리는 다 같이 분배받은 거예요. 언제 그 마음이 나올지 우리는 그 때와 시를 알지 못합니다. 몽둥이로 패듯이 고맙게도 주님께서 우리의 육신을 패서 흙이 되게 하시는 이 고마움, ‘자, 보자. 네 안에 언약이 있는지.’ 우리 안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다 이루심이 우리 안을 장악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내세울 열매는 오직 십자가밖에 없음을 이제는 새삼스럽게 깨닫게 해주시고 그동안 누가 우리를 힘들게 하고 우리 마음을 흔들어댔는지 이제는 그 범인을 우리가 체포하게 해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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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130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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