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9강-YouTube강의(공감과 눈물 로마서12:15)20200421-이 근호 목사
309강-YouTube강의(공감과 눈물 로마서12:15)20200421-이 근호 목사
제309강, 제목은 ‘공감과 눈물’. 공감한다. 얼른 보면 굉장히 쉽습니다만 이 공감한다는 것이 제대로 된 공감은, 인간은 불가능해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자신들의 살아온 세상 경력이 다 다르기 때문에 그래요. 사람이 살아오면서 각인된 그러한 감정이나 체험은 자기만의 고유의 것입니다. 고유라는 것은 이 세상에 둘이 없는 거예요. 오직 자기 거예요, 자기 것.
똑같은 체험을 한다. 예를 들어 야구장에서 한 커플이 둘이 같이 어떤 팀을 응원한다 합시다. 나는 두산, 나도 두산. 어떻게 보면 같은 팀을 응원하니까 공감이 쉽게 되는 줄 알죠? 그러나 그 두 남녀가 야구장에서 같이 야구를 보더라도 그 눈에 들어오고 몸으로 체득이 되는 모든 미세한 감각들은 각자 집으로 돌아가서 오늘 야구장에 갔던 기억을 되살릴 때 절대로 기억이 동일하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현재 똑같은 체험을 하더라도 그 체험을 편집하는 의도는 그 사람이 평생 동안 살아왔던 과거에 준해서 쨀 건 째고 붙일 건 붙이고 느낄 건 느끼고 뺄 건 빼고 그렇게 하게 되어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고유의 것, 자기만의 고유의 것이에요.
그래서 이 세상에 사람들은 하루에도 수백 번 거짓말 한다 하지만 거짓말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거짓말이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 마음과 내 마음이 같습니다.” 이것은 구라죠. 김구라입니다. 이구라, 김구라. 이건 구라입니다. 아부하는 거죠. 상대방에게 아부한다는 것은 언제든지 당신을 배신할 수 있는 여지를 두고 아부를 하게 되어 있어요. 아부한 만큼 대가를 얻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 이 말이죠. 이건 뭐 부부도 마찬가지고 모든 관계가 다 그래요, 모든 만남이.
제가 이렇게 말하면 “설마 성령을 받은, 같은 그리스도 몸의 지체된 사이라도 그렇습니까?” 라고 묻고 싶죠. 세상 사람들이야 뭐 악령이 있으니까 성령 안 받았으니까 자기밖에 모른다고 이해하는데, 천국을 같이 간다고 하고 다 같이 주님 앞에 선택받은 성도끼리도 과연 공감이 되지 않습니까? 그들도 따로 따로 고유의 것으로 남습니까? 이게 이제 궁금하죠.
성경에 마음과 뜻을 같이하여 함께 하라 할 때에, 로마서 12장 15절에 보면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여기 ‘함께’라는 말이 나와요. 그 다음에 16절에 보면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같이’라는 말이 나오죠. 이렇게 할 때에 사람들의 문제는 이걸 기대한다는 거예요. 기대하는 게 잘못이에요.
사람이 뭔가 기대를 하고 은근히 그렇게 되기를 원하고 있다면 이미 그것은 공감과 아무 상관없습니다. 이것은 본래 고유의 것으로 작용합니다.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사람의 현재 모든 감정과 느낌이라 하는 것은 지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자기만의 과거의 것에서 항상 편집한 것이고 조작한 거예요. 구성하고, 조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쉽게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아내가 “여보, 집에 쌀 떨어졌어. 애도 있고 살 길 막막한데 쌀이 떨어졌다.”하고 남편한테 이야기했다 칩시다. “여보, 쌀 떨어졌어.”하니까 남편이 “얼마면 돼? 얼마면 되겠어? 이러면 돼? 쌀 사게 돈 주면 돼?” 이렇게 말하는 것과, “그동안 당신 마음고생 많이 했쪄? 마음고생 많이 했죠. 아이고, 내가 제대로 당신 그런 걱정 안하도록 그렇게 해야 되는데. 아이고, 이 못난 남편 만나가지고 호강하겠다고 기대했는데 호강은 못할망정 세상에 쌀 떨어지게 했구나. 미안해.”
똑같은 상황, “여기 돈 있어.” 똑같은 돈을 주고 쌀 사오라고 돈을 주는 상황이라도 어떻습니까? 돈이 있어 쌀 샀다는 사실은 동일하지만 그 과정이 완전히 다르죠? 남편은 자기 고유의 것을 순간적으로 포기하고 어느 자리에 가느냐면 그 사람이 아프다는, 아내가 마음 아팠을 것이라는 것에, 자기 고유의 것을 포기하고 아내의 것에 겹쳐버립니다.
“당신에게 그런 걱정을 안 끼쳐야 되는데. 당신이 나를 전적으로 의지했는데 이런 걱정하게 해서 정말 미안해요.” 아내는 사과 받으려고 이렇게 했던 것도 아니고 쌀 떨어졌다는 소리만 했는데 남편이 그것까지 계산해서 할 때, 아내가 똑같은 돈을 받아도 기분이 괜찮겠죠? 그만큼 아내가 왜 기분이 좋았을까요?
그것은 순간적으로 남편이 자기 앞에서 자기 고유의 것을 부인하고 부정하는 모습을 보였거든요. 자기 고유의 자기 개성을. “나 잘못한 거 없어. 왜 그 때 돈 달라고 안했어?” 이런 식으로 자기 정당성을 주장한 게 아니고 ‘나는 옳았다, 나는 그르다’는 그 자리 자체에서 잠시 벗어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남편은 자기 자리가 순간적으로 있습니까, 없습니까? 내 자리가 없는 거예요. 그걸 말씀드리는 겁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할 때 이것은 어떤 경우에 이런 생각이 드느냐 하면 인간으로서 자기 고유의 자리를 스스로 아니 성령에 의해서 그딴 거 신경 쓰지 말라는 거예요.
자 이야기를 다시 해봅시다. 사람들이 자기 고유의 개성을 고수하는 것은 무슨 자리가 확보되어 있느냐 하면 과거부터 계속 누적된 나만의 자리, 나만의 것이 유지되어 있으니까 그런 거예요. 그런데 복음을 안다는 것은 십자가를 아는 거죠. 성령을 받게 되면, 십자가의 영을 받게 되면 내 고유의 자리를 하나님 앞에 인정받습니까, 안 받습니까? 인정 안 받죠.
그럼 과거에 내가 야구장에 가든 뭘 하든 간에 그것은 누구의 지시에 의해서 간 거예요? 주님께서 야구장에 가게 하셨고 지금의 내 아내, 내 남편을 만나게 했다 이 말이죠. 내 고유의 것을 주장할 수 없다 이 말입니다 지금, 내 고유의 것을.
성경 말씀에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울라”할 때 이것은 윤리적, 도덕적으로 충분히 이 본문 가지고 자기의 선한 양심과 성품을 과시하는 의미에서 아내 다독거리고 아까 했던 말 있잖아요, 흉내 낼 수 있어요. “나 때문에 고생 많았지?” 말로는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어요. 위로해놓고 좋아서 히히히, 혼자 웃고 있고 얼마든지 그런 이중 플레이를 할 수 있다 이 말이죠.
성경에서는 그거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네가 이 말씀대로 살았느냐를 요구하는 게 아니라, “너 지금 어디를 쳐다보고 있느냐?”를 묻는 거예요, 어디를 쳐다보고 있느냐. 내가 아내에게 이런 위로를 해주면 그 사람은 얼마나 믿음 좋다고 나를 이해할 것이냐 그런 꼼수를 쓰지 말라는 말이에요, 꼼수를. 내가 어떤 말을 하면 저 사람이 내가 아내를 사랑한다는 마음을 알아주겠지 그런 목적성을 두고서 말하고 행동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이 십자가를 통해서도 아무것도 아니지만 15절 말씀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이것은 내 능력으로 이렇게 할 수가 없어요. 그게 할 수 없는데 할 수 없다는 그 모습이 그야말로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는 결과를 낳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결과를 낳는 거예요.
이것은 무엇을 경유했습니까? 주님 십자가 앞에서 내가 아무것도 아닌 죄인이라는 사실을 경유해서, 그 내용을 품고 타인에게, 같은 성도에게 다가설 수 있도록 성령께서 말씀대로 나에게 이런 상황을 만들어줬기 때문에 그래요.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절대로 마음을 같이 안 해요. 그러나 성령이 오게 되면 내 개성, 내 자리가 포기되니까 너도 십자가 바라보고 나도 십자가 바라보니까 십자가로 용서받은 그것으로 주고받으니까 성도끼리는 “미안하다, 죄송합니다” 할 이유가 있어요, 없어요? 뭐가 미안한데? 뭐가 죄송한데요. 그저 주님께 감사하고 같이 만남 자체가 고맙소, 참 고맙소. 이유도 없이 존재한다는 자체가 고마울 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