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강남-누가복음 1장 71절 (존재의 흐릿함) 200407b-이근호 목사자유게시판누가복음

강남-누가복음 1장 71절 (존재의 흐릿함) 200407b-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자, 마리아를 통해서 예언이 살아난다 했습니다. 마리아가 죽던 말던 그건 관계없고 마리아는 원래 조용히 왔다가 조용히 갈 뿐이에요. 더는 욕심내면 안돼요. 마리아가 예수님 임신했다고 배불러서 자랑해도 안되고 나 구원받았다 그거 자랑해서도 안되고요 그냥 마리아는 그냥 조용히 왔다가 갈 뿐이에요. 예언이 살아나는게 중요한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하나 공식 하나 해봅시다. 예언이 살아남는 것이 곧 뭐가 되느냐? 곧 현실이 된다. 현실이고 이게 다른 말로 하면 이것이 곧 역사다. 예언이 살아남는 것이 곧 현실이고 역사다. 현실이다 또는 역사다.

여기에 누가복음 1장 71절부터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이라.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맹세라”. 아까 저는 예언이라고 했지요. 맹세라. 예언이라.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여기 보면 73절에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맹세라.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예언이라.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현실이라.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역사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더 나아가야 돼요. 이게 뭐냐 하면 역사다 현실이다에서 멈추면 안 됩니다.

뭐냐 하면 예언이 곧 살아있는 현실이다 역사다에서 더 나아가서 이렇게 됩니다. 현실은 곧 해석이다. 현실이 곧 해석이다. 진리를 풀어내는 해석이다 또는 증표다 또는 시그널이다. 시그널. 시그널이다. 다 같은 말이 되지요. 현실은 해석이다 증표다 시그널이다. 현실은 그냥 이렇게 살아있다를 다른 말로 하면 꿈틀거린다. 꿈틀거린다. 꿈틀거리는 해석이다 그렇게 보면 돼요.

자, 다시 보겠습니다. 인간은 보잘 것 없다. 맞아요. 인간은 보잘 것 없습니다. 보잘 것 없다. 인간은 흙에서 흙으로 간다. 맞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듯 조용히 왔다가 조용히 간다. 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 플러스 뭐가 있어야 되느냐 꿈틀거림이 있어야 돼요. 꿈틀거림. 이게 중요한 거에요. 보잘 것 없는 건 맞는데요.

접시가 좋은 접시에 좋은 음식 담기겠지만 음식은 좋은데 접시 나쁘다고 음식 안 먹는 사람은 별로 없을 거에요. 접시 보고 먹는 거 아니잖아요. 음식보고 먹듯이. 빈 접시에 접시라고 하지 맙시다. 로마서 11장에 나오는 하나의 그릇이라고 할까요? 어떤 그릇이 있는데 나쁜 그릇 좋은 그릇 있는데 그릇이 있는데 우리는 그릇이에요 그릇인데 여기에 뭔가 꿈틀거림이 있어요. 꿈틀거림.

그게 뭐냐? 예언이 되겠지요. 그럼 우리는 뭐냐? 우리자신은 꿈틀거림을 보여주는 합쳐서 이게 하나님의 해석이 되는 겁니다. 이러한 예가 마태복음 13장 그건 볼 필요도 없어요. 하도 유명하니까 13장에 나옵니다.

씨가 있고 그 다음에 밭이 있고 그 다음에 열매가 맺힌다. 씨가 있고 밭이 있고 열매가 맺힌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이 비유에서 뭐가 없느냐 하면 인간, 사람 이런 거 다 없어요. 인간, 사람 다 없습니다. 마음도 없어요. 그냥 씨, 밭, 열매 그리고 또 하나 추가한다면 씨 뿌리는 자.

결국은 이 세상에 인간이 현재 77억이거든요. 인구가. 77억이 있든 말든 간에 성경에서는 단촐하게 해석구조를 제시합니다. 뭐냐 하면 씨 뿌리는 자가 씨 뿌리면서 자기의 예단, 예상, 예측 곧 예언이죠. 자기 예언대로 씨 뿌려서 열매 맺는 것. 세상은 밭으로 사용하는 것. 끝. 끝이죠.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를 이야기할 때 그 당시 사람들에게 이단으로 몰렸다는 것 감안해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귀신들렸다는 소리 들은 것은 감안해주시기 바랍니다. 인간들이 거기에 대해서 이것이 무슨 뜻인지를 나도 해석하는데 그 사람들이 해석 못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해석했어요. 문제는 그 해석이 기분 나쁜 해석이라서 문제가 되는 거에요.

왜 이 해석이 예수님이 씨 뿌리는 자이고 본인의 작업장으로써 세상을 사용한다는 것. 이게 왜 이게 기분 나쁘게 들리느냐? 그게 누가복음 1장 71절에 읽어보시면 나오지요. 우리, 그다음에 뭐라고 되어있습니까? 우리? 원수에게로. 여기 원수 나오지요. 원수. 아까 제가 악마라고 했지요. 악마. 인간이기 때문에 뭐한다고요? 반항한다.

그래서 악마는 인간을 조종한 거에요. 인간이기 때문에 반항하는 거에요. 인간만이 반항할 수 있는 겁니다. 악마의 앞잡이로써. 인간은 어떤 존재다? 반항하는 존재다. 따먹지마라 했는데 어떻게 했습니까? 따먹었지요. 반항하잖아요.

무슨 뜻이냐 하면은 인간이 만약에 에덴동산을 구상해보세요. 에덴동산에 선악과 심었겠어요? 안 심었겠어요? 심을 리가 있습니까. 세상에. 만약에 자식을 부모가 알아서 자기가 예단해서 사전에 애기를 낳는다면 자식을 어떤 자식을 낳겠습니까? 정말 대단한 자식을 예상할거에요. 맘에 안 드는 자식을 낳을 생각을 안 할 겁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사는 동네, 에덴동산을 인간은 뭐라고 착각하느냐 하면 내가 사는 동네. 내가 사는 동네로 착각한 거에요. 선악과 따먹고 보면서. 그러나 내가 사는 동네가 아니고 누가 사는 동네입니까? 주님이 사시는 동네.

처음에는 주님이 사는 동네에 내가 있을 수가 있었어요. 있을 수가. 조건 때문에. 선악과 따먹지 않는 조건 때문에 살 수가 있었던 거에요. 그런데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여기서 추방이 된다는 말은 안 받아준다는 뜻이에요. 주님이 사는 동네에 대해서 존경심이 없으면 그런 인간은 안 받아준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천국이란 뭐라고요? 주님 홀로 영광 받는데 대해서 시큰둥하거나 기분 나쁘거나 내 것 안 챙겨줬기 때문에 화가 나는 사람은 절대로 천국에 그 못 들어갑니다. 그래서 지금 인간이 만든 이 종교, 이 기독교, 이 교회 여기서 천국이란 개념은 뭐냐 하면은 누구 만족이냐 하면은 사실은 주님만족이여야 될 이 천국이 인간 자기만족의 어떤 이상화, 추상화 그걸 상상해서 만든 세계가 천국이에요. 그러니까 교회가 천국을 반항하는 동네이지요.

본인이 무엇에 해석이 돼야 되는데 인간은. 현실, 인간이 누구의 해석이 돼야 될텐데 본인이 해석이 아니고 본인이 본인 자체가 아주 정답이라고 딱 단정하고 시작하는 거에요. 무조건. 자기만족이 정답이라고. 그렇다면 이 원수가 나의 원수가 누가 되느냐하면 주님이 되고 주님의 원수가 내가 되는 겁니다. 그런 현실구조가 됨을 주께서는 감안하시는 겁니다.

자, 그 다음에 누가복음 1장 다시 한번 돌아와서 1장 여기에 1장 52절에 “생각이 교만한 자를” 그 다음에 나오는 단어가 뭐냐 하면 “흩으셨고”, 그 다음에 “권세있는 자를” 그 다음에 “내리쳤으며”. “흩으시고 내리쳤으며”. 그 다음에 부자를 공수로 보낸다. 부자의 희망을 좌절시킨다 이렇게 되어있다 이 말이죠.

계속해서 우리가 자꾸 깊이 들어가는 겁니다. 빈털터리죠. 빈털터리로 보내고 내리쳤고 그 다음에 흩으시고. 이것이 마리아의 몸에 임신한 예수님이 하실 일이 되는 겁니다. 흩으시고 내리쳤고 공수로 보낸다. 그런데 이 작업과 아까 했던 씨 뿌리는 자는 씨를 뿌리고 밭에 씨를 뿌리고 열매 맺는다.

이거 지금 씨 뿌리는 자가 씨와 밭과 열매 이것만 생각한다면 이 작업이 아주 고요한 가운데 진행되는 것처럼 생각될 수가 있어요. 농사가 씨 뿌리면서 꼭 앰프 틀어놓고 쾅쾅 음악 틀어놓고 누구와 싸우면서 그럴 필요 없잖아요. 그냥 조용한 시간에 나와서 밭에 씨 뿌리고 열매 맺으면 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런 작업을 하시면서 실상은 실제에서는 흐트러버리고 모아진 것들 결집 된 것들을 흩어버리시고 내리치고 다 폭력이죠. 빈털터리 되게 하고. 강제성을 띄고 있지 않습니까. 강압적이다 이 말이죠.

그러면 해석을 할 때 어떻게 해석을 하느냐? 해석은 두 가지다. 이것을 흩으시고 내리치고 빈털터리 되게 하는 이 폭력성, 이 폭력성을 절차로 생각해서 결론은 예수님이 홀로 다 하셨다 이런 결론 내리면 그게 온전한 해석되는 겁니다.

자, 중간에 폭력적인 것을 빼버리면 해석이 안 됩니다. 현실은 두 가지 요소가 여기 다 겹쳐져 중복되어 있다 이 말이죠. 현실이라고 하는 것은 곧 해석인데 해석하는 과정에서는 이런 폭력적인 것이 주어져 있습니다.

십자가 자체가 인간이 예수님한테 폭력인 동시에 주님이 인간을 폭력 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 거에요. 쳐라! 그럼 그 다음에 내가 칠테니까. 때려 때려. 너 때렸지? 그 다음에 너 맞을 차례야라고 폭력 대 폭력을 주고받을 수 있는 상황으로 주님께서 몰아넣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57절에 봅시다. “엘리사벳이 해산할 때가 되어서” 여기 67절에 보면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여 이르되. 사가랴가 누구냐 하면 세례 요한의 아버지입니다. 아직 세례 요한이 출산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례 요한이 출산 전이거든요. 아 출산했네요.

엘리사벳이 이미 출산하고 난 뒤에 부친이 사가랴가 성령에 충만해서 찬송합니다. 예언하여 이르되 그래서 제가 아까부터 예언을 강조한 거에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여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이렇게 되어있죠.

여기에 보면 69절을 한번 봅시다.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구원의 뿔”, 역사지요.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이라” 이렇게 되어 있다 이 말이죠.

자, 첫째 강의부터 지금까지 간단하게 흐름을 한번 보겠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임신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원했던 건 아니고 예언이 왔습니다. 제가 강조했던 건 존재를 박차고 나온다고 했지요. 존재를 찢어버리고 박차고 나온다는 말은 힘 있는 능력이 임해야 가능해요.

51절 봅시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힘으로 때리지 않으면 우리 속에서 우리 존재라는 이 강력한 이 덫에서 굴레에서 우리가 못 빠져나옵니다. 성령이 힘 있게 때려 쳐버리면 거기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는게 아니고 우리 속에 예언이 말씀이 살아나오게 돼요. 나오게 되면 그 자체가 뭐냐 하면 이 현실에 대한 해석이 되는 겁니다. 이래도 잘 이해 안되지요.

봅시다. 현실은 현실에 대해서 인간들 생각에 현실은 인간이 아는 현실은 이건 뭐 논할 필요 없어요. 이야기할 필요 없어요. 왜? 우리가 현실이 곧 현실이기 때문에. 역사이기 때문에. 그런데 역사에서 해석이 나오는 인간의 해석이 나오겠지요.

그러나 현실에 강하게 때려버리면 여기서 뭐가 나온다고요? 주님에 대한 해석이 나온다. 주님의 예언에 대한 해석이 나온다. 인간세계는 곧 악마의 세계는 그걸 가로막기 위해서 철저하게 봉쇄했는데 너무 힘이 세가지고 해석이 나와요.

그렇다면 인간이 가로막는 최후의 힘은 뭐냐? 죽음의 힘이죠. 그런데 기쁨이라는 것, 찬양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죽음도 개의치 않고 튀어나와버리니까 예수님의 죽음 예수님께서 우리 죽음의 굴레마저도 뛰어넘어서 진정 예언이 예언답게 되었다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찬양과 기쁨이 나오도록 그렇게 우리를 해석으로 사용하신다 지금 그 이야기를 제가 하고 있습니다.

61절을 보겠습니다. 61절을 보게 되면 아들을 낳았습니다. 세례 요한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세상적으로 뭐 재산 좀 있었습니까? 좀 어떤 점에서 세례 요한이 우대를 받겠어요? 우대 받을 요소가 없지요. 심지어 죽을 때는 비참하게 죽지 않습니까?

세례 요한이라는 사람이 태어나서 하는데 그 세례 요한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라고 묻는 것은 예수님의 해석이 세례 요한이니까. 세례 요한이 어떻게 살았느냐하는 것은 예수님이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이냐를 세례 요한을 통해서 미리 보여줬다 이렇게 보여주면 되시는 겁니다.

평행이론이죠. 세례 요한에게 일어난 일이 예수님께 일어나고 예수님께 일어난 일이 사도 베드로에게. 베드로에게 일어난 일이 사도 요한, 사도 바울에게. 이 사도행전 보면 자꾸 같은 걸로 되풀이 반복해서 일어나고 오늘날 성도에게 동일하게 일어나는 겁니다.

여기에 62절에 보면 “친족 중에 요한이라 할 것이라 하매 그들이 이르되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한 이가 없다 하고 그의 아버지께 몸짓하여 무엇으로 이름을 지으려 하는가 물으니”. 말을 못하니까 그 당시에 사가랴가 말을 못해요. 그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을 요한이라 쓰매 그 말을 쓰고 난 뒤에 비로소 그 입이 열렸다.

여기서 입이 열렸다라는 말을 설명 더 해드리겠습니다. 입이 열렸다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그동안 잠시 사가랴가 말을 못했어요. 그러면 이게 현실입니다. 현실 위쪽에는 말의 세계에요. 말의 세계. 언어의 세계다 이 말이죠. 서로 인간과 인간의 의사소통이 되는 세계. 의사소통이 되는 세계.

그런데 이 밑에는 말없는 세계. 말해도 못 알아듣는 세계. 말 없는 세계죠. 말 없는 세계를 세례 요한 아버지 사가랴가 미리 딱 보여주니까 이 말없는 사가랴가 말이 없다가 기존의 말에서 뛰쳐나와서 잠시 이 밑으로 말없는 세계로 왔다가 그 과정을 다시 말 있는 세계로 오게 되면서 기존의 해석을 뒤엎어버리는 겁니다. 전복해버리는 겁니다.

인간들이 알고 있는 그 세계와 그 해석은 잘못된 해석이다. 새로운 해석으로 바뀌어야 된다. 교체되야 된다는 것을 여기서 강조하는 겁니다. 말이 없다가 새로 있음으로서 기존의 이 세계가 이 세계를 심판한다. 심판해버리는 거에요.

말로써 예언으로써 이 현상의 역사를 심판하는 기능을 세례 요한이 하게 되고 거기에 따라서 이제는 예수님도 그 평행이론의 의해서 따라서 같이 심판한다. 오늘날 사도들도 성도들도 그렇게 살게 되어있다 이 말이죠.

이건 단순히 뭐냐 하면 개인 구원문제 아닙니다. 개인 구원은 왜 아니냐 하면은 개인만족이기 때문에 안돼요. 나 죽어서 천당 간다 이건 개인 만족이기 때문에 이거는 애초에 예언이 없습니다. 인간은 그냥 조용히 왔다가 조용히 갈 뿐이지요.

입이 열리고 65절에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 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더라”. 그리고 66절에 보면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골에 두루 퍼지매 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이르되” 그 다음 말이 재미있어요.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꼬”. 예단하고 예상하지요. 인간들도 나름대로의 예상하고 예단해요.

그걸 좀 설명해보면 이렇습니다. 인간들은 지금 자기 있는 것이 뭐냐 하면 지금 이 순간 moment, now. 지금. ‘현재’. 현재라 하는 것은 무엇의 축적이냐 하면은 과거의 축적이에요. 뜀틀 있지요? 뜀틀 제일 윗편에 뭡니까? 이게 현재라면 그 아래쪽에 뭐가 있어요? 과거가 있지요. 그러면 여기서 뜀틀 윗쪽을 예상한다. 예상한다, 예단한다는 말은 뭐냐?

과거에 왔던 것과 어긋난다는 뜻이에요? 그냥 유지된다는 뜻입니까? 계속 이어져나가는 것이지요. 인간들의 예단과 예상은 항상 이어져나가는데 이 현재 안에 무슨 의지가 살아있느냐 하면은 지금껏 과거라는게 있잖아요. 과거가 이걸 이렇게 스폰지 쫙 줄으면 물은 빠지고 스폰지는 남잖아요. 압축시키면 뭐냐 하면은 이게 나와요. 나는 그동안 살아왔다.

그러면 현재 이거는 뭐냐? 살아왔다 과거지요. 나는 살아있다. 그러면 미래는 뭐겠습니까? 미래 어떤 이야기를 하고 세례 요한이 어떻고 나라가 어떻고 나중에 벚꽃이 언제 피겠느냐 지겠느냐 그 하는 이야기의 토대는 뭐겠어요? 이때도 나는 살아남고 싶다. 살아남고 싶다.

이 예단이 어디서 끝납니까?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은 어디서 박살납니까? 세례 요한의 처참한 죽음, 예수님의 처참한 죽음, 그 죽음을 사람들은 모르는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의 예상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이 처참한 인간의 죽음을 십자가를 영원한 현재로 만들어버립니다. 십자가를 영원한 현재로 만들어버려요.

그러면 십자가를 영원한 현재로 만들어버리면 십자가 오기까지 십자가 죽음이 오기까지 모든 과거는 나는 그동안 살아왔다가 아니고 뭘로 바뀌어야 되겠습니까? 뭘로 바뀌어야 되겠습니까? 나는 죽어왔다로 바뀌겠지요. 그리고 미래는 뭡니까? 십자가 나는 영원히 죽어 마땅함이 된다는 걸로 바뀌겠지요. 이것이 바로 내 이름은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천국의 질서가 되는 겁니다.

한번 정리하지요. 예언은 스스로 현실이 된다. 현실의 끝은 미리 와 있다. 십자가. 죽음. 그런데 예언이 없는 상태에서는 뭐냐 하면 인간들의 예단이 있고 예상, 예측이 있지요. 예측은 내용이 뭐라고 했지요? 나는 살아야겠다. 현실은 살아있다. 십자가 없고 나는 영원히 산다. 이것이 바로 이게 악마의 세계에요. 이게 악마의 세계.

이왕 살려면 힘이 있어야 되겠지요. 권세, 부자, 권세 이런 것을 사람들이 부러워하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죽기 위해서 이 땅에 죽음으로서 죽음 위해서 하는 거에요. 죽음은 십자가 복음을 담고 씨를 뿌립니다. 이 씨를 뿌려서 세상의 밭에 뭘 맺는다? 있지도 않는 열매를 맺는다. 아까 한 것 기억나지요?

여기에 교만한 자. 부자, 권세 맞은편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 아무도 없어요. 그러나 예언이 오게 되면 여기에 실현되지요. 예언에 의해서 새롭게 발생되는 사람들이 여기 등장하게 되는 겁니다. 그것을 뭘로 하느냐? 성령을 통해서 하는 거에요.

그래서 세례 요한도 애기 못 낳는데 세례 요한 태어나고 예수님도 마리아의 자식 예수님도 이 땅에 없는 분인데 오신 거고 항상 없던 곳에서 새롭게 발생되는 이것이 바로 성도다 이 말입니다. 그 다음에 계속 봅시다. 67절에 보겠습니다.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여기에 누가복음 1장 1절에 보면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이렇게 되어있지요. 지금 보고 계십니까? 그럼 사도행전 1장을 봅시다. 사도행전 1장에 보게 되면 1장에 뭐냐?

“데오빌로여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먼저 쓴 글이 누가복음이고 나중 쓴 글이 사도행전 되는 거에요.

이 말은 둘 다 누가가 썼는데 여기서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뭐냐 하면 바로 사도행전에 내려왔던 그 성령, 오순절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누가복음에 나온 이야기가 성령에 의해서 쓰여진 글이고 오직 성령 받은 사람만 이 성경해석을 할 수 있다. 성경의 내용을 무슨 말인지를 알아들을 수 있다. 거기에 초점 맞춰서 내가 글을 쓴다 설명하면 되는 겁니다.

따라서 여기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예언을 할 때에 성령 받은 사람만이 이 본문을 여기 나온 예언을 찬송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찬양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느냐 우리 성경에서 표현하고 있느냐 하면 한줄 내려 쓰죠. 성경에 보면 한줄 내려쓰게 되어있다고요. 한줄.

여기도 찬양할 때 한줄 내려 써서 하고 있어요. 한줄 내려 써서 해석을 함으로서 하나님의 이것은 예언성을 띈 찬양입니다. 하나님의 예언입니다 라고 하는 거죠. 그러면 예언이 우리 아는 상태에서 예언은 뭐냐? 예언은 뭐냐? 지금은 아니나 나중에 된다.

이게 우리가 아는 예언입니다. 예언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아니다라고 하지 말고 지금은 없다. 나중에 된다가 되는데 나중에는 있다 하면 되겠지요. 그럼 지금, 나중을 지우겠습니다. 없다. 없는데 있다. 이렇게 되겠지요? 거기에 예언을 집어넣는 거에요.

없는데 없어요. 없는 거에요. 천국도 없고 지옥도 없는 거에요. 아무것도 없는 거에요. 없는데 문제는 없는게 없어야 되는데 우리 인간들 그러니까 종교도 없고 하여튼 뭐 이렇게 인간들만 사는 성령을 안 받은 사람에게는 없는 것은 없는 거에요. 없는 것은 없는데 이게 있다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참 이 성령받은 사람은 핍박받지 않을 수밖에 없어요.

없는 것은 없고 있는 것은 있다 해야 되는데 없는데 있다고 이야기하니까 지금 당신은 왜 장차 예수님이 재림한다고 하십니까. 아무런 재림이 없는데. 맞아요. 없어요. 그런데 재림한다는 뭐가 있습니까? 약속 다른 말로 예언. 재림한다는 약속이 있으면 이거는 있는 거에요? 없는거에요? 이건 나중에 있는 거에요.

주께서 구름타고 오신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달릴 때 그런 이야기했을 때 사람들 안 믿었거든요. 그 당시 체포할 때 그런 이야기했어요. 마지막에 내가 구름타고 온다. 바리새인들이 안 믿었습니다. 그럴 리 없다는 거에요. 맞아요. 그들이 맞아요.

예수님이 구름타고 이 앞에 있는 허름한 옷을 입은 이 자가 하늘 구름 타고 오지 않아요. 맞아요. 그런 사실 없어요. 없는데 그 말을 예수님이 하셨다는 사실로 인하여 그게 없는데 있게 되어 버린 거에요. 예언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예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면 성도는 앞으로 어떻게 사느냐? 성도의 삶이란 그냥 하나님의 예언의 현실을 발견하는 거에요. 성도의 삶이란 예언의 현실을 발견하는 거에요. 자, 어떤 식으로 발견하느냐 하면 임영웅 미스터트롯에서 1등 했지요. 1등 했지요. 여기서 한번 봅시다. 상금이 100만원이다. 100만원이다 합시다.

자, 어떻게 이 프로가 이 TV프로가 조선TV프로가 하나님의 예언에 의해서 주어진 거에요. 왜? 현실이니까. 이거 모르면 첫 번째 강의 다 까먹으신 거에요. 세상에 모든 것은 숨겨진 것이 전복되어서 나타난 겁니다. 예언을 위해서 있는 거에요. 하나님의 예언을 위해서 현실이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조선TV에서 미스터트롯 방송을 했다 이 말이죠. 이 어려운 시기에. 신종코로나 어려운 시기에. 노래자랑하는 거에요. 트롯트 노래자랑을 했다 이 말이죠. 1등이 임영웅이다. 그런데 보니까 상금이 100만원이다. 100만원이 아니고 100만원 같으면 아이고 고생했다. 그러나 별로 부럽지 않아요.

그런데 1억이다. 아! 저 노래 불러도 살수가 있네라는 생각이 들지요. 갑자기 무엇이 자극받습니까? 내 몸의 용도. 내 몸이 갖고 있는 이 용도를 어디다 쓸 것인가? 트롯트 잘해서 1억 버는데 쓸 것인가? 고생해서 그냥 100만원 손에 쥐는데 쓸 것인가?

갑자기 내 용도가 자극을 받아가지고 소위 교만한 자, 부자, 권세 있는 자를 지향하도록 현실이 그렇게 우리를 부추겨주는 겁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원수가 더 이상 숨어있지 못하고 들썩들썩 거리니까요. 그러니까 TV프로를 보면서도 뭐를 발견합니까?

성도의 삶이란 것은 뭘 발견하면 돼요? 이 세상 이 망하는 세상보다 무엇이 더 중요하다? 세상은 뭐대로 간다? 예언대로 움직인다는 것을 발견하는 거에요. 그래 저걸 부러워하는거 누구에요? 내가 그걸 부러워한다면 내가.

나는 별로 부럽지도 않아요 사실은. 한 트롯트하기 때문에 별로 부럽지 않은데 정말 트롯트를 부르고 싶은 사람한테는 이 사람들이 너무 좋은 거에요. 갑자기 나의 몸의 용도가 주 예수님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고 나로 인하여 기뻐하는 용도로 자극을 받아서 자기의 본색을 드러내게 되는 거에요.

그럴 때 예언은 이러한 세상에서 핍박의 대상이 되고 무시와 외면당하는 대상이 된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십자가 드러나는 하나의 환경이 되고 장이 되는 거에요. 참 쉽죠 잉?

세상의 모든 것을 보면서 뭔가 성도라는 것은 없는데 그 1등한 가수가 1억을 받으면서 저렇게 노래 하나 불러서 1억 받는구나. 부럽지? 아 나 부러운데. 내 몸에 대해서 부러워하는 몸이 내 몸을 내가 믿어서는 안 된다. 내 의지 여기에 몰입해서 안 된다하는 이것이 옛날에 성령받지 않았을 때는 몰랐던 내가 새로운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는 겁니다.

아 ‘나’라는 것은 세상 사람과는 다른 몸이 되었구나. 저게 분명 부러운 거 맞아. 나도 부러워. 부러운데 그게 바로 예수님 지는 계기가 되었음을 연관지어서 생각한다는 것이 그 시대의 세례 요한같은 사람이다. 이게 바로 성령 받은 사람 세례 요한이죠. 세례 요한 그리고 오늘날 성도들도 세례 요한보다 더 위대한 선지자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자, 그 다음에 한번 보겠습니다. 여기 69절 보겠습니다. 여기 보면 “그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라고 되어 있지요. 이거 설명이 필요해요. 이건 꼭 설명이 필요한데 무슨 설명이 필요하냐 하면 다윗과 다윗의 집의 차이가 나요. 다윗의 집이라고 하는 것은 다윗은 쉽게 말해서 다윗은 다윗부터 시작한 다윗, 솔로몬 이렇게 나가고요. 다윗의 집이라고 하는 것은 장차 예수님부터 시작해서 거꾸로 차고 들어가는 거에요. 거꾸로 차고 들어와요. 거꾸로. 다윗에게로.

그러면 이 노선이 솔로몬 다윗, 다윗 솔로몬은 육적인 계통이지만 예수님부터 다윗까지 갈려면 육적인 계통 말고 단선 말고 복선 있어요. 다른 선이 또 있어요. 다른 선이 있어가지고 이 계통으로 가버리면 언약계통인데 이것은 누구냐 하면은 바로 솔로몬의 아버지가 누구냐 하면은 우리아잖아요. 밧세바의 아내. 죽은 우리아가 되는 겁니다. 솔로몬의 아버지가.

이것은 마태복음 1장 6절에 나오지요.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다윗은 남자지요. 그 다음에 밧세바가 안 나오고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더 쉽게 해서 이진주는 이근호에서 임영웅의 아내에서 이거와 똑같은 거에요.

남편이 둘 되어 버리는 거에요. 아버지가 둘 되어 버리는 거에요. 솔로몬의 아버지가 둘. 둘 중에 어느 것이 진짜냐 이 말입니다. 다윗은 조용히 왔다가 그냥 조용히 사라지는 거에요. 그러나 이 방향이 대단한 솔로몬을 낳았다고 대단하면 안돼요. 솔로몬을 거꾸로 해버리면 주님이 대단해서 다윗같은 아무 것도 아닌 인간도 천국 가는 겁니다.

그게 해석이에요. 이게 언약적 해석, 성령의 해석입니다. 예언의 해석이에요. 예수님부터 시작해서 거꾸로 보는 거에요. 내가 예수 믿어야지가 아니라 ‘주님이여 왜 주님께서 저를 믿게 하셨습니까? 고맙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에요.

내가 믿어서 믿은게 아니라 주께서 주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있지도 않은 나를 태어나게 하셨고 어느날 성령 보내서 믿게 하신 거에요. 방향을 반대로 가져가시면 되는 겁니다. 이게 다윗과 다윗의 집이에요. 다윗의 집의 모든 목표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다윗의 집이에요. 다윗의 집을 다른 두자로 하면 ‘성전’이라고 합니다.

다윗의 집은 혈육계통이지만 혈육 이상의 초과되는 혈육. 다윗은 그냥 혈육이고. 다윗은 그냥 죄인이죠. 하지만 죄인을 의인되게 하는 것은 다윗의 집안에서는 다윗도 의인되는 겁니다. 다윗의 집에 속하는 거죠.

마치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은게 아니고 이삭이 아브라함을 아브라함되게 하신 거에요. 이삭이. 없는 이삭이 없어야 되는데 생긴 이삭이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바꾼 겁니다. 모든 것이 이렇게 거꾸로 되는 거에요.

그 다음에 72절 보겠습니다.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라고 되어 있는데 이 조상 구원받은 조상은 없습니다. 나중에 예수님 오셔야 구원받아요. 이게 요한복음 8장에 나오지요. 아브라함이 예수님 보기를 기다렸다가 예수님 보고 난 뒤에는 기뻐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 하는 말이 당신이 어떻게 나이 50도 안됐는데 어떻게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할 때 예수님 하신 말씀이 아브라함 있을 때 내가 있었느니라. 이거는 이만희보다 더 한 사람입니다. 이순신 있었을 때 내가 있었다하고 똑같은 거에요.

참 이 성경이 엄청나요. 착하게 살자와 성경은 그거하고 아무 상관없습니다. 하나님 믿고 바르게 살면 천국 간다 그거하고 아무 상관도 없어요. 요한복음 8장 56절에 너의 조상 아브라함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아브라함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예수님이 했다하니까 욕 안 먹지만 내가 했다하면 욕 되게 얻어먹을 거에요.

누가복음 1장 73절 봅시다.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맹세 하신 맹세라”. 여기 맹세 아까 처음부터 한 예언. 예언이 나오잖아요. 계속해서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서 예언이 살아있는 것 말씀이 살아있는 거에요. 물론 제가 이렇게 호소한다고 해서 믿을 수 있는 내용은 아닙니다.

신천지 이상의 신천지가 되어야 가능한 이야기인데 그걸 제목대로 하면 흐릿한 존재, 또렷한 예언. 뚜렷한 것이 아니고 또렷한 겁니다. ‘또렷한 예언’. 존재의 흐릿함 또는 예언의 또렷함. 이것을 계속해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계속 유지를 해줘야 해요. 쉽게 말해서 마리아가 임신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예수님 임신한 마리아 입장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 다음에 76절 보겠습니다.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예비했다”. 아 참 이거 설명하려면 많이 걸리지만 아주 간단하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지극히 높으신 자’ 이거 없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자, 인간세계에는 없어요. 없는 겁니다. 인간세계에서 인간이 만날 수 있고 접할 수 있는 것은 지극히 높으신 자의 뭐가 되느냐 하면 선지자에요. 구약에 그 많은 선지자가 있었지만 다 한결같이 욕 얻어먹고 핍박받은 이유가 사람들은 신을 믿어도 신은 항상 관념이고 추상에 불과해요.

왜냐하면 또렷한 것이 뭐냐? 내 몸이 또렷하기 때문에. 내가 여기 있음이 너무나 또렷하고 하나님이 있다 신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흐릿해.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자기만족과 하나님의 만족이 투쟁한다고. 이거는 주의 예언과 그리고 오늘날 우리의 몸이 늘 투쟁하고 있어요. 존재와 내 존재와 예언과 그 또렷함과 경쟁하고 있다고요.

옛날 선지자부터 선지자들은 고생을 되게 하는 이유가 바탕이 선지가가 안 오게 되면 그들은 자기가 굉장히 건전한 사람인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지자가 와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런 식으로 말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자가 나에게 계시, 나에게 예언했다하는 순간 그 다음부터 와락 달려들어 죽이자 밟아라. 특히 왕 같은 사람이 밟아라 죽여라 이렇게 되는 거에요. 선지자라고 하면. 와락 밟는 거에요. 내 존재의 또렷함을 네가 뭔데 흐릿하게 만드느냐. 그러한 것이 분노가 일어나서 화가 나서 밟아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이 짧은 본문이지만 깊은 내용이 있어요. 지극히 높으신 자는 없는 겁니다. 지극히 높으신 자는 없고 현장에 나타난 것은 선지자에요. 그런데 선지자는 그냥 어떻게 된다? 아까 한 거 또 할까요? 선지자는 하나님의 원수 같은 세상 속에서 그냥 폭력적으로 폭력적인 은사를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선지자 누굽니까? 여기 나온 선지자는 세례 요한이죠. 세례 요한의 은사를 어떻게 사용했는가는 마태복음 3장에 보면 잘 나와 있어요. 얼마나 욕쟁이인줄 알 수 있지요. 3장에 보게 되면 “이 독사의 새끼들아”. 자식들아 되어 있는데 순화한 거에요. ‘자식들아’.

그 다음에 쉽게 말해서 지옥가거라 똑같은 거에요. 너희 지옥가. 오지마. 너 여기 오지마. 그냥 지옥가. 네가 진노를 피하려고 와? 임박한 저주를. 네가 뭐 아브라함 자손이라? 에이 돌들도 아브라함 자손 될거다. 도끼가 너에게 적절하다. 도끼가. 조폭같애. 도끼 갖고 설치니까.

그리고 이렇게 합니다. 내가 너희들 위해서 불을 준비해놨거든. 너희는 짝퉁이고 가짜고 너희는 껍데기이기 때문에 쭉정이이기 때문에 너희들은 뭐가 적당하냐? 지옥불이 적당하다. 사람보고 저한테 뭐 돈 빌려받은 것도 없는데 무슨 감정이 있어가지고 왜 그런 심한 말을 해요. 세례 요한이.

우리가 세례 요한은 성경에 나온 선지자다 그런 인식이 있잖아요. 그거 빼고 이야기합시다. 그거 제외하고 그냥 보통 아저씨고 그 아저씨 앞에 어떤 아저씨들이 쭉 나왔다고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평생 그렇게 살아가니까. 우리는 예언같은거 생각 안하잖아요.

평소에 살아가는데 말다툼이 일어난거 보니까 한쪽은 어느 쪽이 점잖은가 보니까 점잖기는 바리새인이 점잖아. 누가 더 독하고 정신 이상하나 보니까 세례 요한이 더 정신 나갔어. 복장도 이상하고. 이거는 욕을 안 얻어먹을래야 욕을 안 얻어먹을 수가 없어요. 이 선지자는.

그런데 뭐라고 합니까? 선지자가 그렇게 독해보이고 악해 보이고 나쁜 남자처럼 보이지만 뒤에 오실 분은 더 하다는 거에요. 세례 요한은 선지자인데 뒤에 오시는 분, 뒤에 오시는 분을 드러내기 위해서 먼저 길을 예비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보는 거죠.

여기 76절에 “이 아이여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라고 되어 있지요. 자, 물어봅니다. 길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선지자 오기까지는. 길이 없지요. 길이 없는데 선지자가 외치면 그 자체가 길이 되는 거에요.

그러면 이 세례 요한보고 네가 잘났나? 제가 하는 말이 아니고 그 당시 바리새인이 한 말이에요. 세례 요한 네가 어느 정도 잘났어? 어느 신학교 나왔어? 이렇게 하니까 세례 요한이 하는 말이 뭐냐 하면 나는 소리다. 나는 길이다. 다시 말해서 나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 말이 정답이에요.

왜냐하면 나는 조용히 왔다가 이 땅에 조용히 갈뿐이니까. 나 붙잡고 닦달하지 마라. 내 뒤에 오시는 분이 중요하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누구냐하면 바로 예수님이죠. 세례 요한이 선지자라는 이유는 본인이 선지자라고 해서 선지자가 아니라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예수님 이야기하니까 선지자가 되는 거에요.

78절에 봅시다.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긍휼’. 긍휼을 뭐라고 하느냐?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돋는 해가. 그러니까 여기서 긍휼을 뭐로 표현했느냐 하면 긍휼을 어두움의 깊이 잠겨야 마땅한 세상. 이 경우를 수용해야 비로소 긍휼을 이해한다는 겁니다. 어두움에 깊이 잠겨야 될 세상.

그 세상 가운데 누구도 포함됩니까? 우리 자신도 포함되지요. 우리 자신이 어두움 우리가 속해 있는 이 세상이 어둡다고 보십니까? 정상이라고 보십니까? 대부분은 밝고 문제없다고 보지요. 그런데 선지자가 등장하게 되면 선지자 뒤에 오시는 예수님 등장하게 되면 이 자체가 어둡다는 인식으로 바뀌게 됩니다. 성령의 인식으로.

그러면 어두운 자에게 뭐가 있느냐? 긍휼을 주시고자 하는 예언, 예언의 완성 긍휼, 사랑이 사랑답게 우리에게 기쁨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이제 다 되가지요. 이제 1장하고 마치겠습니다.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 얼마나 세상을 부정적으로 봅니까? 참 이런 이야기를 하는 세례 요한이 쟁반에 목 잘려 죽을만하지요. 일관돼요. 선지자가 세례 요한이 항상 죽을 때까지 끝까지 이 세상에 대해서 좋게 보지않고 있습니다.

어둡고 사람이 죽어서 죽는게 아니고 죽음의 그늘이라고 했으니까 죽었다는 것은 그것은 사실이지만 그 그늘이 이미 다 덮여있는 태어날 때부터 생일축하 부를 때부터 돌 할 때부터 이미 죽음의 그늘이 덮여있다고 보는 거에요. 누구 안목에서? 선지자의 안목에서. 선지자는 뭐로 충만되어 있으니까? 하나님의 예언이 존재를 박차고 뛰어나온 사람.

그 예언에 의하면 예언은 죽음을 근거로 해서 세상을 다시 보기. 죽음을 근거로 해서 세상을 다시 보게 하는 겁니다. 자, 노량진 거기에 학원가, 경찰 공무원, 검찰 공무원, 일반 공무원 노량진 학원가 있잖아요. 학원가에 애들이 빽빽이 강의 듣고 있습니다.

여기 세례 요한이 앉아 있다고 봅시다. 어떻게 보겠어요? 강사가 노량진에서 뭐 헌법이라든지 이런거 역사 이렇게 강의하고 있으면 앉아서 뭐라고 하겠습니까? 노량진 여기에 뭐가 드리웠다 하겠어요? 죽음이 드리운거죠. 시험치지 말라는 거에요? 아니에요.

공무원 시험, 경찰 공무원 시험, 소방 공무원 모든 시험이 주께서 예언을 보여주기 위해서 여기에 침투되는 거죠. 열심히 공부해서 공무원 되야 되는 거죠. 열심히 공부해서 소방 공무원 되고 되야 되죠. 주께서 그렇게 하라 하시면 그렇게 하셔야 되는 거죠.

그러나 기본적인 안목은 바뀔 수가 없지요. 예언이 존재를 박차고 나오니까. 존재가 소방관이니 경찰관이니 공무원이니 관계없어요. 어쨌든 존재를 박차고 어느 자리에 있든 소방 공무원 국장이 되든 경찰국장이 되든 항상 그거는 뭐냐 하면 바로 그건 하나님의 예언이 존재를 박차고 나와야 된다는 현상이 그 다음에 80절 “심령이 강하여지며” 계속 일어나는 겁니다.

자, 정리하겠습니다. 이 누가복음에 나왔던 이 모든 내용이 일차적으로 세례 요한에게 주어졌지요. 그 다음에 누구한테 주어지겠어요? 이 모든 내용이. 바로 예수님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빈 들에 있으니라”. 이건 누구 이야기냐? 이건 세례 요한 이야기입니다.

빈들에 세례 요한 있는데 빈들에 세례 요한 왜 갑니까? 아파트촌에 안가고 빈들에 왜가요? 빈들에 누구 기다리는 겁니까? 누구의 호명을 받아요? 바로 뒤에 오시는 분의 예언적 호명을 받는 거에요. 왜? 자기 본인이 예언자이기 때문에. 이렇게 해서 누가복음은 1장을 끝냈습니다.

지난번에 강남강의 하면서 제가 한 거 여러분 기억나지요? 세례 요한은 누구와 같다? 누가복음은 뭐와 같다? 텔레토비 같다. 보라돌이 있지요? 잔디밭 위에 공동묘지 위에 뛰노는 어린애들처럼 낯선 이방 외계인 모습을 한 보라돌이처럼 보라돌이 말고 또 무슨 돌이 있지요? 있잖아요. 그처럼 우리 성령받은 사람은 세상을 죽음의 공동묘지라고 보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반항하는 본성 때문에 내 몸 중요한줄 알아서 주님의 사명을 가리우진 않았습니까. 주님의 예언이 우리의 강한 존재를 늘 박차고 튀어나올 수 있도록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130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17,917 자유게시판 28강-욥기 9장 1~10절(인간의 한계)20200426 이근호 목사 욥기 최고관리자 20-04-26
17,916 자유게시판 10강-빌 1장 28-30절(십자가증거)200426-이 근호 목사 빌립보서 최고관리자 20-04-26
17,915 자유게시판 주일학교 설교 / 위험한 출생 / 200426 - 최고관리자 20-04-26
17,914 묻고답하기 겸손 - 최고관리자 20-04-26
17,913 묻고답하기 The Fruit of The Gospel 복음의 열매 - 최고관리자 20-04-24
17,912 자유게시판 38강-호 10장 1-3절(두마음)200422-이 근호 목사 호세아 최고관리자 20-04-22
17,911 자유게시판 309강-YouTube강의(공감과 눈물 로마서12:15)20200421-이 근호 목사 로마서 최고관리자 20-04-22
17,910 자유게시판 308강-YouTube강의(하나님의 낭비 마태복음13:4)20200421-이 근호 목사 마태복음 최고관리자 20-04-22
17,909 강의 유튜브강의 (308강, 309강) 하나님의 낭비, 공감과 눈물 200421 마태복음 최고관리자 20-04-21
열람 ➜ 자유게시판 강남-누가복음 1장 71절 (존재의 흐릿함) 200407b-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최고관리자 20-04-20
17,907 자유게시판 강남-누가복음 1장 71절 (존재의 흐릿함) 200407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최고관리자 20-04-20
17,906 자유게시판 27강-욥기 8장 16~22절(영원한 거처)20200419 이근호 목사 욥기 최고관리자 20-04-19
17,905 자유게시판 9강-빌 1장 27-28절(복음의 열매)200419-이 근호 목사 빌립보서 최고관리자 20-04-19
17,904 자유게시판 주일학교 설교 / 요나의 사명 / 200419 - 최고관리자 20-04-19
17,903 묻고답하기 은혜와 고난 빌립보서 최고관리자 20-04-19
17,902 자유게시판 서울의존강의20200416b 베드로전서4장 2절(뭉개짐)-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최고관리자 20-04-19
17,901 자유게시판 서울의존강의20200416a 베드로전서4장 2절(뭉개짐)-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최고관리자 20-04-18
17,900 묻고답하기 The Specificity of Grace 은혜의 구체성 - 최고관리자 20-04-17
17,899 자유게시판 대전-119강 마태복음26장63-68절(뒤바뀐 재판)20200331-이 근호 목사 마태복음 최고관리자 20-04-16
17,898 자유게시판 37강-호 9장 15-17절(현실착오)200415-이 근호 목사 호세아 최고관리자 20-04-15
17,897 자유게시판 20200413b 부산강의 : [시편]27(18편)-악마의 제안 시편 최고관리자 20-04-14
17,896 자유게시판 20200413a 부산강의 : [시편]27(18편)-악마의 제안 시편 최고관리자 20-04-14
17,895 자유게시판 8강-빌 1장 25-26절(은혜의 구체성)200412-이 근호 목사 빌립보서 최고관리자 20-04-12
17,894 자유게시판 26강-욥기 8장 11~15절(분석) 20200412 이근호 목사 욥기 최고관리자 20-04-12
17,893 자유게시판 주일학교 설교 / 다니엘의 고난 / 200412 - 최고관리자 20-04-12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