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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서울의존강의20200416b 베드로전서4장 2절(뭉개짐)-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베드로전서

서울의존강의20200416b 베드로전서4장 2절(뭉개짐)-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에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마태복음 16장 1절에 되어 있거든요. 거기에 예수님을 시험한다, test한다는 말이 뭐냐 하면 테스트를 제시하는, 문제를 제시하는 우리한테는 의미가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 당신이 우리는 이렇게 의미 있다는 것을 보조하고 보탤 수 있고 증명할 수 있는 인물인가 한번 보자라는 식으로 테스트를 한 겁니다.

그게 표적을 구하는 건데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보고 표적을 구하는 이 상황은 상당히 중요한 상황입니다. 왜냐하면 이게 반대로 바뀌거든요. 1번-예수님을 증거하는 표적, 어떤 강의에서는 이것을 ‘흔적’이라 했는데, 표적과 2번-바리새인, 그 바리새인에다가 ‘나’를 넣으면 나를 증거하는 표적. ‘나’라고 하는 것은 그냥 ‘나’가 아니겠죠? 첫째시간 강의에 의하면 의미 있는 나 또는 노골적으로 이야기해서 “나 천국 가는 사람 맞지요, 그치요? 나 죽으면 천국에 도착하는 그런 사람 맞죠?”하는 그렇게 가치 있는 나를 증거하는 표적으로서 둘을 구분할 수 있는데 2번 표적이 되면 예수님이 우리의 욕망을 이루시는 하나의 진짜 표적이 되어 버려요. 예수님이 오히려 나 잘남을 증거하는 수단이 되어버리죠.

그런데 2번처럼 바리새인들이 자기 잘남을 증거하기 위해서 예수님께 질문을 하는 이 방식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무엇이 구원이냐 하면 예수님이 증거하는 표적으로 바꾸어지는 이것이 바로 주님의 구원계획입니다. 따라서 창세기 22장에 보면 아브라함을 시험하는 대목 나오죠? 바로 이게 바꾸어지는 대목이에요.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일하심을 증거하는 표적으로써 이 아브라함이 차출된 겁니다. 뽑힌 거예요.

그러면 뽑힐 때 수단이 된다 하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달랑 사용하시면 된다. 이 육체를 사용하시면 되겠네” 이렇게 하잖아요. 바로 육체라는 이 개념 자체가 우리는 영 또는 영혼 말고 이 근육덩어리를 육체라고 보지만 주님은 이 육체를 그렇게 보지 않아요. 죄 속에 잠겨있는 육체, 죄의 집에서 못 벗어나는 육체. 말을 하든 행동을 하든 그야말로 신종코로나 치료제를 개발하든 연구팀이든 간에 그가 어떤 짓을 하든 그것이 죄가 되는 그러한 대상이 육체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6장에서 너희들이 날씨는 알고 날씨는 예고할 수 있어도 네가 속해 있는 이 세대가 얼마나 악하고 음란한 세대인 줄은 왜 모르느냐 이 말입니다. 왜 모르느냐? 모를 수밖에 없죠. 그것은 지금 예수님께서 인간을 닦달내시는 게 아니에요. “똑바로 해” 이게 아니라 인간 자체가 이미 죄 속에, 악마 속에, 악마의 손아귀에 놓여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모를 수밖에 없지요.

이 문제를 좀 더 쉽게 하기 위해서 제가 출애굽기를 찾아보겠습니다. 출애굽기 12장 12절,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을 내가 심판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이 대목 보셨습니까?

자, 이 대목이 어떤 질문에 유용하냐 하면 어떤 분이 저한테 이런 질문을 했어요. 하나님께서 애굽에 있는 히브리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열 번째 했던 재앙이 뭐냐 하면 바로 애굽에 있는 모든 장자, 맏이를 다 죽였잖아요. 그런데 그분 질문이 뭐냐 하면 처음부터 그 방법을 사용했으면 어땠겠느냐? 처음부터. 처음에 뭐 지팡이가 뱀 되고 그런 거 말고, 뱀이 지팡이 되고 강물이 핏물이 되고 그런 거 말고 아예 10가지 재앙, 메뚜기가 오고 파리떼가 덮치고 흑암이 되고 악질이 생기고 구차하게 그런 과정 다 생략하고 초장부터 막쳤으면 어땠겠냐는 말이에요. 참 좋은 질문이에요. 사실은 그런 생각을 누구나 했었어야 되는 겁니다.

그 답변이 출애굽기 12장 12절 말씀이에요. 그렇게 질문하시는 분은 뭐냐 하면 애굽에 있는 애굽 사람들이 애굽 나라에 산다. 이렇게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첫 번째 강의 때 뭐라고 했습니까? 이미 인간은 악마의 지배아래 있죠? 특히 아까 첫 번째 강의에서 물세례라 하는 것은 인간이 물속에 잠겨있는 상태라 했죠? 출애굽기 12장 12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애굽의 신을 상대하는 거예요, 신을.

그리고 애굽 사람들은 애굽의 보이지 않는 신, 악마죠, 악마의 아바타, 가면, 마스크, 악마의 졸개로써 애굽 사람이 있다는 그러한 구조로서 하나님이 보시는 겁니다. 그래서 애굽 사람들은 뭘 섬겼느냐 하면 10가지 재앙 가운데 1~9가지 재앙에 이르는, 모든 뱀부터 강물부터 메뚜기부터 모든 것이 뭐냐 하면 애굽인들이 섬기던 신들이었어요. 애굽의 신들입니다.

그러면 이는 결국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인간은 빠져라. 누구하고 싸우겠다? 하나님과 악마와 싸우겠다는 거예요. 신과 신의 싸움이에요, 성경 전체가. 성경 전체가 그 싸움이에요. 하나님은 싸우지 않습니다. 누가 싸웁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이름, 독생자 주님이 악마와 싸우게 되게 되어있어요. 하나님은 누구하고 싸우시는 분이 아닙니다. 싸움을 유발하시는 분이죠.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편에 서서 마귀와 싸우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이 시편 110편에 보면 나오는데요. 그 대목도 한번 보시면 중요하죠. 시편 110편에 보면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원수와 싸우는 것은 여호와께서 주라고 하시는 또다른 하나님이 있어요.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말씀하시기를 또는 주님이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주가 되게 하시는 것이 이 만유를 향한 하나님의 스케쥴이고 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다 계획이 있어요. 예수님을 주로 만드시는 거예요, 자기 아들을. 모든 것이 주로부터 시작하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가는 것. 이게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여기에서 인간은 빠져야 되는 겁니다. 인간은 들어갈 수 있는 역량이나 여지가 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가만히 옆에서 구경하면 되겠네? 차출되죠, 차출.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하나님이 만드는 모든 프로젝트, 그 계획에 우리가 뽑혀 들어가는 거예요. 이게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계획이 아니에요. 그들의 소망이 아닙니다. 히브리인들은 빠져야 돼요. 빠지고 하나님께서 현재 이스라엘 사람을 볼모로 잡고 있는 악마, 그 악마의 정체를 폭로하면서 그 전리품으로, 노예물이죠, 전쟁하면 얻는 거 있잖아요. 그 얻는 용도로 누굴 하느냐? 이스라엘을 형성합니다. 만들어내는 거예요. 이 뜻은 뭐냐? 이스라엘 사람은 또는 히브리인들은 옛날에 어디에 사로잡혔다? 하나님의 적들에게 사로잡혔다. 두 번째는 스스로의 힘으로 적들에게 벗어난다, 못벗어난다? 못벗어난다 이거예요.

모세가 혈기왕성할 때에 자기가 주먹으로 애굽 사람을 치게 되면 자기백성들이 자기를 후원하고 호응해 줄줄 알았죠. 호응 아무도 안해줬어요. 권력이라 하는 것은 그렇게 센 겁니다. 세 번째 뭐냐 하면 모세는 삐쳤죠. 나 안합니다. 삐졌죠. 그러니 모세가 적들에게 사로잡혔고, 모세가 나서서 하는 것은 소용없었고 빠지고, 모세가 스스로 자기의 어떤 계획이라든지 모든 게 철회되었을 때 그 때 이 모세를 사용하신다. 사용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모세를 사용한다는 말은 이 모든 아이디어가 인간이 노려서 나온 아이디어가 아니라는 겁니다. 모세는 인간이잖아요, 인간인데 오늘 본문에서는 인간이라 하지 않고 인간을 뭐로 봅니까? 인간이라 하지 않고 육체로 보죠. 육체는 무의미해요. 무의미한 것을 차출시켜가지고 거기에서 인간이 알 수 없는 새로운 의미를, 모세를 통과해서 모세의 행동과 말을 통해서 무의미한 세계에 진짜 의미 있는 일들을 우리 주님께서 벌이신 거예요. 이게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애굽에 일어났던 모든 10가지 재앙들은 뭐냐 하면 인간이 신봉하던, 애굽 사람들이 신봉하던 신들이었어요. 자, 그러면 그다음 문제. 왜 애굽 사람들은 이런 자연에 있는 것들을, 해와 달, 별 이런 것들을 신봉했을까요? 특히 마지막 재앙 바로 직전 재앙이 무슨 재앙이죠?

두 가지 재앙을 해봅시다. 제일 마지막 재앙이 맏이가 죽죠. 맏이가 죽는다. 가정의 맏이가 죽는 재앙이 마지막이고 그 전의 재앙이 뭡니까? 3일 동안 깜깜한 흑암이죠. 뭐가 없어졌어요? 해가 없어졌죠, 해가. 태양이 없어진 거예요. 애굽의 모든 신들 중의 최고 신은 뭐냐 하면 바로 태양신입니다. 신이 없어졌어요, 신이.

자 그러면 제가 묻는 것은, 사람들은 태양을 그렇게 신성시한 이유가 뭐냐? 태양을 위함입니까, 자기를 위함입니까? 어느 쪽이죠? 자기죠. 의미가 본인한테 있다니까. 본인의 생존에 있어요, 본인의 생존. 본인 집안의 가문, 가정 여기에 있다 이 말이죠. 이것은 악마가 인간을 그렇게 부추긴 거예요. 네가 잘되는 것이 만사가 잘되는 거라는 겁니다. 너 잘되면 만사가 잘되고 너 못되면 만사가 잘못됐다는 거예요, 이 세상이. 이상하다는 거예요.

인간이 ‘나에게만 의미 있다’를 가지고 확대시켜나가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마지막 신까지 높아지는데 이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실존범주의 확대’라 하는 겁니다, 실존범주. 인간이 자기가 의미 있다는 것은 자기 실존의 범주, 여기 있음에, 실존, 있음이죠, 진짜로 여기 있음의 범주, 카테고리 또는 범위, 경계 그것을 확대시켜 나가는 식으로 우리는 악마에게 길들여져 있는 거예요. 실존, 내가 여기 있다 이 말이에요. 내가 여기 있는 게 실존이잖아요. 그러니까 실존에 대해서는 묻는 게 아니에요. “너가 왜 거기서 나와?” 이렇게 묻는 게 아닙니다.

자식들이 아버지보고 하는 말이 “아버지 왜 저를 낳았습니까?” 이렇게 묻는 게 아니에요. 실존은 그냥 있음이고 있다는 거고, 있음은 마치 수학에서의 공리와 같아서 아니 있는데 뭐 여기 있는데 있는 게 시작점이지 있는 걸 가지고 왜 있느냐고 묻지 말라는 거예요. 있는 것이 어떻게 잘먹고 잘살고 행복하느냐 그거나 묻지 여기 왜 있느냐를 왜 묻느냐 이 말이에요. 이것이 바로 악마의 철학입니다. 악마의 사고방식이에요.

그러니까 교회라는 것이요, 교회가 구원을 도와주는 곳인지 방해하는 곳인지 잘 생각해봐야 되요. 교회는 구원을 방해하라고 만든 거예요. 왜냐하면 사람들이 예배당이고 교회가 있어버리면 교회가 있잖아요. 교회 있음은 무엇과 경쟁상태에 있느냐 하면 말씀이 있음과 경쟁상태에 있어요. 말씀으로 구원받습니까, 교회로 구원받습니까? 말씀이죠. 그런데 사람은 교회에서 말씀 가르친다고 해가지고 말씀보다 교회 있음이 더 우선되는 거예요. 왜 그런 본성을 가지고 있느냐? 왜 그런 습관이고 버릇이 있느냐 하면 본인이 그 교회 다니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있음이 최종적인 의미거든요. 모든 마감은, 최후의 지점은 내가 여기 있음이에요.

내가 그냥 있습니까, 악마가 시키는 대로? 내가 있는데 어떻게 있다? 선악을 가르치고 판단할 정도로 선악을 초월한 입장에서 나는 여기 있다. 선악을 초월한 입장에서 나는 있다. 선악과, 그 까짓것 따먹지 뭐. 자 보세요. 악마가 보기에 신이다/ 신 아니고 피조물이다 차이점을 뭐로 봅니까? 선악과 따먹을 수 있는 것은 신밖에 없고 선악과 못따먹게 하려는 식으로 피조물과 신을 경계, 갈라놨다. 그러니까 악마가 인간보고 뭐라고 합니까? 따먹어라. 따먹으면 경계선 자체가 소멸되기 때문에 인간은 뭐가 된다? 신이 될 수 있다. 이 생각입니다. 이게 악마의 생각이라는 말이죠.

“악마의 생각이 이겁니다.”라고 말하면 어떤 사람은 “성경이라는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이고 옛날 소설책에 나오는 거고 실제로 우리는 선악과 안 믿습니다.”이렇게 하거든요. “그러면 당신은 왜 있습니까?” 이렇게 질문하게 되면 “그런 질문은 하는 게 아니죠. 왜? 나는 신이기 때문에.” 본인이 신이라는 말을 하지는 않죠. 하지만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내게 중요한 존재니까” 그게 바로 신이에요, 그게. 그게 신이라고요.

그러고 난 뒤에 이 실존범위를 넓혀가게 되면 이게 뭐냐? 이걸 세계관이라 하죠. 이 세계관을 넓히는 거예요.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 행동, 태도, 모든 지향점, 목표, 이것은 나를 기점으로 해서 나의 실존범주를 확대시키고 넓히려는 수작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께 묻는 대목이 나오는데 한번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1장 6절에 보면,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물었어요. 예수님의 답변은 이겁니다. “그거 왜 묻느냐? 그거 왜 물어? 너 묻는 의도가 뭐냐? 그런 질문한 의도가 뭐냐? 누구 좋으라고 묻느냐?” 그런 뜻이에요. 그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 있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제자들이 이걸 왜 묻습니까? 언제 회복합니까? 본인이 이스라엘에 속해 있다고, 본인의 실존범주가 이스라엘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걸 묻는 거예요.

내게 좋은 것, 나의 나다움에 필요하다 싶어서 예수님께 질문을 던지는 거예요. 내가 그런 질문을 할 자격이 있다, 없다를 아직까지 몰라요. 없는데. 자꾸 하나님의 일에 자기가 관여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에 인간은 빠져야 되요. 인간은 천당을 가든 지옥을 가든 구원이 되든 구원이 안되든 거기서 인간은 발을 빼야 돼요.

그것은 주님과 악마에 속한 일이지 인간 본인에게 속한 일이 아니에요. 내 구원받고 천당 가고 지옥 가고 그런 문제는 내 문제 아니고 주님 문제라니까요. 아이고, 이걸 언제쯤 깨달을까. 우리는 피조물로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그 뿐이지 구원 문제에 대해서 내가 그렇게 신경 쓸 문제가 아니다 이 말이죠.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예수님 부활하고 난 뒤에 제자들이 삐쳤죠. 삐져가지고 아이 참, 이럴 것 같으면 예수님 왜 따라다녔나 싶어가지고 지금이라도 내 실존범주나 넓히자 해가지고 자기들끼리 일곱 제자인가, 베드로와 디두모라고 하는 도마, 가나안 사람 나다니엘, 세배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있어가지고 고기 잡으러 갔어요. 갔는데 거기에 누가 등장했습니까? 예수님이 등장했죠.

자 여기서 봅시다. 7명인지 8명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일단의 제자들이 있다. 이게 일반 소설책 같으면 그냥 제자들이 있는 거예요, 그냥. 고기 잡았다. 끝이에요. 고기 잡아서 그날 저녁 맛있게 갈치 구워먹었다. 그러면 끝나는 문제에요. 그런데 여기에 누가 등장합니까? 예수님이 등장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게 뭐냐 하면 졸지에 인간이 이 세상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인간이 인간세계 또는 나의 세계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그 갈릴리 바다에서도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주인공이 아니에요. 아마 설교하는 사람이 평생 싸우는 것이 교인들하고 이거 싸우는 거예요. 내가 내 주인공이 아니다 이 말이죠. 왜냐하면 예수님이 여기 계시잖아요. 부활했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지금 여기 계신 거예요. 나타나고 싶으면 나타나는 거예요. 지금은 성령께서 나타나시지만. 성령이 증거하기 위해서.

아까 보셨죠? 성령이 나타나신다는 말은 예수님이 나타나시는 거예요. 예수님이 나타나시면 졸지에 내가 나의 주인공이 아닌 겁니다. 그러면 인간이 하는 모든 실존범주의 확대, 이것은 좌절되어야 되겠지요. 이것은 좌절되고 시시한 문제고 사소한 문제고 이것은 무의미한 문제에요, 인간의 자기 실존범주 확대는요. 제목을 이걸로 할까? 자기 실존범주의 확대. 후보감으로.

자 아까 재앙에서 아홉 번째 재앙이 태양이 없어지는 거죠. 열 번째 재앙은 뭡니까? 자기 아들, 자기 대를 이을 아들, 맏이가 죽죠. 보세요. 인간이 태양을 섬긴다 할 때 태양이 좋아합디까? 태양은 섬겨도 신이 아니에요. 진짜 신은 뭐냐? 왜 태양을 섬기느냐? 내 가정, 내 후손이 잘되기 위해서 태양을 섬기는 거예요. 내 아들 잘되기 위해서. 인간의 수명이 안 기니까 죽고 난 뒤에 내 아들이라도 있어줘야 내 아들 속의 DNA에 내가 있잖아요. 나의 50% DNA 유전자가 살아있다 이 말이죠, 내 자식한테. 부부 같으면 50%+50%에요. DNA는 그렇고 나타난 현상은 엄마를 70%닮고 뭐 그런 게 있지만 이건 나타나는 현상이고 실제로는 50%, 50%가 맞아요.

자식 잘되기 위해서 태양 섬기고 메뚜기 섬기고 강 섬기고 뱀 섬기고 그랬던 겁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10가지 재앙을 통해서 서서히 이 땅에서 무엇이 너에게 문제거리냐? 네가 너한테 문제거리다, 너가. 네가 거기 있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 일을, 작업을 방해하는 악마의 장애물로 살고 있는 것이 바로 너 자신이라는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 태도, 내가 과연 인간이냐 아니면 육신이냐 똑바로 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차출된다고 했는데 아까 첫 번째 강의한 것과 연결시켜 봅시다. 선악을 갱신한다고 했지요, 주님께서. 갱신한다는 것은 계속 선악의 개념을 바꾸어가면서 어디까지 이어집니까? 지옥과 천국까지 이어지죠. 자, 갱신을 하는데 갱신을 하는 장소가 어디냐? 장소가 바로,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셨잖아요. 이 예수님이 입었던 육체처럼 여기에 차출되서 부름받은 사람들이 있어요. 그 사람들을 성도라 합니다.

성도는 인간이 아닙니다. 성도의 육체는 선악의 그 개념이 갱신되는 과정을 발산하고 보여주는 사람이에요. 그러면 성도는 뭘로 되어 있느냐? 성도는 곧 구조적이다. 성도는 그 구조를 말하는 겁니다. 내가 여기 있음으로 말하는 게 아니고 주님에 의해서 나타나는 구조를 보여주는 겁니다.

성도의 구조가 뭐냐? 선악에 대해서 인간이 알고 있는 선악적 관점에서 세상보기도 갖고 있고 성도 안에는, 그 다음에 생명나무 관점에서, 생명나무는 아예 선악을 뭉개버리니까 완성을 시키니까, 생명나무 관점에서 보는 예수님의 그 관점. 생명나무의 관점과 선악적 관점 둘 다를 구비하고 그것이 내부적으로 정신적으로 구조화된 마음, 이것이 바로 성도의 마음입니다.

곧 이것이 바로 주님의 마음이라고요. 선악적인 관점도 알고 생명나무 관점도 알아서 이 둘 사이를, 구조화된 이것을 바깥으로 발산하고 보여주는 것이 성도의 마음입니다, 성도의 마음. 그것이 곧 예수님의 마음이고. 이걸 하나하나 과정을 밟아나가는데 과정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결론부터 먼저 말씀드리고 이 결론에 어떻게 도달되는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결론부터 먼저 말씀드리면 에베소서 3장에 나옵니다. 에베소서 3장 17절, 18절, 19절.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해서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시고. 이런 뜻이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사랑 가운데, 생명나무 관점이죠. 사랑은 모든 걸 용서하니까. 사랑, 긍휼, 불쌍히 여기심, 죄씻음. 다 사랑입니다. 사랑의 관점이 나오죠.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것은 곧 사랑의 관점이 새로이 들어왔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전에는 뭐밖에 없다? 선악과 따먹었으니까 선악적 관점밖에 없는 이 마음에 예수님의 생명나무의 관점이 들어오신 거예요. 들어오게 되어가지고 무엇을 키우는가 한번 보세요.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한번 적어 볼께요. 네 가지가 나오는데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 이것을 알게 함이라.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완전히 성도의 마음을 창고로 사용하는 거예요, 창고. 보통 3차원이죠. x, y, z. 3차원이거든요. 선은 1차원이고 면적은 2차원이고 부피는 3차원이잖아요, 부피는 3차원. 선, 그 다음에 면적, 그 다음에 높이까지 되면. 여기에 뭘 더했습니까? 깊이까지 더하죠, 깊이까지. 깊이는 무엇의 반대말이냐 하면 높이의 반대말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전부 다를 말해요.

성도 자체가 전에는 선악이 주도했거든요. 오늘 강의가 어렵기 때문에 복습하는 의미에서 다시 해 볼께요. 선악체계가 인간을 장악했죠? 아까 물세례 했잖아요, 물세례. 물에 집어넣어서 죄밖에 없고 인간은 보이지 않는다고. 그러나 들어가 보면 인간들이 우글우글 구더기처럼 전부다 죄에 빠져 있다고요. 선악체계에 있었어요. 똑같지요? 선악체계의, 선악지식의 넓이와 깊이와 높이와 길이, 이것으로 무장되어 있는 세계였어요, 전에.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는, 성령 오시기 전까지는.

1번, 2번을 보면 선악체계부터 먼저 따져 봅시다. 이미 했기 때문에 이건 쉬워요. 선악체계의 깊이와 높이가 있다는 말은 이미 그 구조자체가 무슨 구조냐 하면 나는 신이다. 왜냐? 선악과를 따먹었으니까 신이 되었잖아요. 선악을 위에서 따질 수 있다는 거예요. 이것은 선이고 악이고 따질 수 있다는 것은 선악체계를 자칭 초월했다고 보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일에 인간은 빠지죠?

그러면 인간이 선악체계를 갖고 있다는 것은 계속해서 이것을 상상하는 거예요. 자기가 이걸 상상하는 거예요. 선악체계를 깊이와 높이가 있다 하게 되면 모든 개념에다가 모든 언어에 뜻과 의미와 개념에 대해서 선악체계로 풀어낸다 또는 해석한다면 그 해석의 결론은 뭐겠습니까? 결론은 뭐였죠? 아까 우리가 공부했잖아요. 선악체계의 모든 결론은, 모든 최종의미의 마감은 뭡니까? ‘나는 잘났다’에요. 나는 잘났다. 나는 우수하다. 나는 훌륭하다. 나는 신이다. 나는 절대적이다.

이것은 인간이 신이 되기 위해서 높이와 깊이, 모든 것에다가 선악체계, 그러니까 윤리와 도덕을 집어넣었어요. 그러면 윤리, 도덕의 특징은 윤리라 하는 것은 대인관계에서, 도덕은 자기자신과의 관계에 있어서 선함을 추구하죠. 그러면 여기서 필수적인 것이 뭐냐 하면 반성이죠. 반성, 회개, 자책, 심사숙고. 동물처럼 되지 말고 이성을 가지고 자기 자신에 대해 판정을 내리는 거예요. 판정을 내릴 때 선악을 가지고 판정을 내리는 거예요. 스스로 자기를 부정하고 그 부정을 통해서 스스로 자기가 보다 더 완전한 자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정(正)이 있고 반(反)이 있고 반(反)에서 합(合)이 되는 겁니다. 이것을 변증법이라 하죠? 변증법이라 하는 것은 고대 그리스철학에서 반대되는 의견을 하나 더 해가지고 보다 더 완전한 진리내용을 구상하겠다는 논리체계를 변증법이라 하는 거예요. 변증법이란 증명한다는 뜻인데 이건 뭐냐 하면 다른 반대되는 의견을 모아서 보다 더 나은 진리에 부합되는 결론을 도출하는 거예요. 이게 변증법이거든요. 정반합으로 되어있다. 헤겔의 변증법이 나중에 더 유명한데 정반합으로 되어 있어요. 이 반(反)이라 하는 것은 반성한다, 회개한다 그런 뜻이죠.

모든 논리체계가, 이렇게 하는 이유가 ‘모든 인간은 신이다’ 이걸 증명하는 거예요. 인간이 곧 신이다. 절대자이다. 모든 의미는 인간에게 유리해야 되고 인간이 인간으로서 왜 신이냐를 증명한 그것이 바로 인간세계에 통하는 유일한 도덕이고 철학이고 윤리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아까 요한복음 21장에 누가 등장했습니까? 예수님이 등장했죠, 그렇죠? 그때 예수님이 오셔서 베드로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네가 나를” 뭐라고 했습니까? “사랑하느냐?”라고 했어요. 사랑이라 하는 것은 스스로 여기서 못빠져 나와요.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내가 신인데 어떻게 신을 양보합니까? 이것은 죄이죠, 죄. 그런데 사랑은 무엇의 씻음? 죄 씻음이거든요, 죄 씻음. 예수님이 죄 씻었다는 증거가 뭡니까? 진짜 우리 죄를 씻었다는 증거가 뭐죠?

요한 일서 1장 7절에 보면,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되어 있어요.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것이 요한일서 4장에 보면 이것이 바로 사랑이라 했습니다. 요한일서 4장 10절에 보면,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사랑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해서 화목 제물을 주심으로써 이게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그냥 말로만 사랑이 아니라 증거가 있어야 돼요. 증거가 뭐냐? 피라는 겁니다, 요한일서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피가 사랑이라는 거예요. 피는 죄 씻음이기 때문에 피가 있는 곳에는 항상 뭐가 나오겠어요? 죄가 나오죠. 죄가 뭡니까? 이런 선악체계. 우리가 선악체계에서 못빠져 나온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들추어주는 그러한 은혜가 주어지는 겁니다. 점점 어려워집니다. 어려워지는 것은 여러분이 참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이거 감당해야 돼요, 어려운 것도.

은혜를 주신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이 무섭다는 뜻이에요. 이게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값없는 은혜를 주셨다. 그냥 은혜, 값없이 은혜를 주셨다는 말은 하나님보다 더 무서운 분이 없다는 뜻이에요. 또는 하나님보다 우리 사정을 더 꿰뚫어보시는 분이 하나님 외에는 없다는 겁니다. 왜? 은혜를 주시니까. 은혜가 뭐에요? 선물이죠.

선물을 주신다는 말은 우리 사정을 너무 잘 아는 거예요. 어떤 사정입니까? 우리는 뭘 해도 까불거리면서 뭘 해도 누구 잘난 체 합니까? 우리 잘난 체 하죠. 모든 게. 그런데 그 잘난체한다는 그것이 뭐가 되느냐? 죄가 되겠죠. 죄가 된다는 말은 죄가 있는 곳에 뭐가 있느냐 하면 심판이 있죠. 저주가 있죠. 이걸 충분히 아시는 거예요. 아시면서 뭘 줬다? 은혜를 준 거예요. 그러면 은혜를 줬다는 말은 뭐냐 하면 “아이고 인간아.”이런 뜻이다 이 말이죠. 그게 얼마나 무서운 말이에요?

무섭다는 말로 왜 표현하느냐 하면 우리가 남들하고 사귈 때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입니까? 날 사랑해주고 위로해주고 날 돌봐주면 좋은 사람이죠. 갓난애에게 엄마, 아빠가 제일 좋은 사람이죠. 갓난애가 있는데 아무리 아빠, 엄마랑 친하다고 “우쭈쭈쭈, 과자 줄게.” 그래도 아이들이 으앙 울죠. 왜 웁니까? 한 아이가 무섭다고 하잖아요. 무서워서 그런 거예요. 친숙하지 않은 거예요, 무서워서.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가 잘 아는, 내가 필요한 걸 주시는 게 아니고 얼토당토않은 값없이 은혜를 주셨다는 말은 정말 무서운 분이 하나님이신 거예요. 은혜를 주신 게 무서운 거예요. 제가 무서운 하나님, 심판의 하나님 이야기하니까 사람들은 그걸 굉장히 듣기 싫어해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인데 왜 그렇게 진노의 하나님, 저주, 지옥을 왜 그리 강조하느냐. 그게 최고의 은혜기 때문에 그래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인간이 이렇게 은혜가 없으면 뭘 한다 했어요? 반성해요. 반성하는 것은 인간에게 친숙한 겁니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정도로 시건 있다는 거예요. 내가 그 정도로 막돼먹진 않았다는 겁니다. 끝까지 인간은 자기한테 어떤 기대나 가능성을 봐요.

자꾸 인간은 누구한테 도움 얻습니까? 기도를 누구한테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 하죠. 여러분 기도하는 자세 보세요. 기도하는 자세 어떻습니까? 웅크리잖아요. 물론 이렇게 서서 팔 쫙 벌리고 기도하는 사람들 있는데 이건 선지자들이 하는 기도고, 항상 웅크려요, 웅크린다고. 안 들킬라고. 겸손한 척, 굴복당하는 척, 굉장히 불쌍해 보이는 척. 사실은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난 다음에 스스로 내가 어느 지점에서 잘못됐는가를 본인의 힘으로 잘못된 것을 파악해서 그걸 본인의 힘으로 처리하려는 악마의 본성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그 짓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께서 그냥 은혜를 주셨다는 말은 나는 니가 한 짓거리 안본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너는 하나의 전리품이고 노예물이지 니가 하는 행동보고 하는 게 아니다 이 말이죠. 마태복음 8장에 보면 백부장이 하는 말이 “주께서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하는 그 대목 있잖아요. 그 대목이 정말 주님께서도 칭찬했지만 세상에 이런 믿음 처음 봤다고.

믿음이란 그런 거예요. 본인이 본인을 처리하는 것을 포기하는 거예요. 내 인생 내가 갈구고 관리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이 믿음하나 갖고 있어야지’ 이런 짓도 하면 안돼요. 값없는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받는 거예요.

그런데 은혜는 너무너무 이게 무서워요. 세상에 은혜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어요. 가장 무서운 거예요, 은혜가. 그러니까 스데반 집사님은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너무나 주님이 무섭기 때문에 아낌없이 자기 목숨도 그냥 내놓은 거예요. 왜? 그 무서운 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에.

주님이 선악을 갱신한다 했는데 갱신하는 이유는 이미 인간들이, 악마가 알고 있는 선악체계를 바꾸는 거예요. 뭐로 바꾸느냐 하면 예수님 중심으로 예수님 믿으면 선이고 안 믿으면 악이 되도록 그렇게 바꾸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예수님이 선악의 기준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이게 갱신입니다.

여기 선악갱신에 자기백성인 성도를 참여시킵니다. 참여시키는데 출애굽기 3장 1절에 보면,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나시니. 모세한테 사명을 주는 대목이죠.

그러니까 모세가 하나님의 선악갱신에 참여하게 된 겁니다. 참여하게 되었다. 참여하게 될 때 여기 떨기나무가 있죠. 하나님이 나타나시고 여기 모세가 있습니다. 중간에 뭐가 있죠? 하나님이 나타나시고 모세가 나타날 때 중간에 뭐가 나타났습니까? 떨기나무가 있죠. 그냥 떨기나무가 아니고 불붙은 떨기나무죠. 그러면 불붙은 떨기나무를 보고 모세가 이런 이야기를 해요. 이상하게 불은 붙었는데 타지 않는다.

타지 않는다는 말은, 보통 세상에서는 불 에너지가 나오면 나올수록 재료가 되는 것은 소진되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소진되지 않고 불은 계속 있는 거예요. 소진됨이 없이 불은 계속 있다. 그러면 결국 이 말은 뭐냐 하면 이 떨기나무가 하나님과 인간이 같이 만날 때에 같이 만났다는 증거로서 떨기나무가 모델로 나타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그 에너지가 소진되지 않는 것. 그러니 인간은 소진되는 인간과 소진되지 않는, 닳지 않는 인간.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는 겁니다.

떨기나무가 타지 않는 것, 불은 붙었는데 그 재료가 점점 닳아지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모세가 이상하게 여기고 궁금하게 여길 때에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떨기나무가 타지 않나? 하는 동시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시고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로되 “모세야 모세야” 불러대요. 그러면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그냥 소진되는 인간이에요. 자기가 계속 소진된다는 말은 선악자체가 갱신이 안되는 겁니다. 갱신 실패자에요.

다시 말해서 선악을 안다고 해서 신이 되는 게 아니고 그냥 이것은 죽어야 될 인간이란 말이죠. 하나님께서 그 모세를 떨기나무 같은 그런 용도로 사용해버리는 겁니다, 모세를. 그것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같이 함으로써 소진되지 않는 인간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오늘날 무슨 모습이냐? 성령 받은 성도의 위상입니다. 성도의 위상.

성도란, 아까 했죠? 선악적인 요소와 생명나무 요소 둘 다를 구비함. 구조화되었다 했죠. 제가 구조화되었다는 말을 하는 이유가 아까 나왔어요. 장미는 장미다워야 된다 이 말입니다. 또 장미로서 있다. 이 말은 장미같은 특징이 없는 것은 장미가 아니라는 뜻이거든요. 사람은 또는 성도는 ‘성도로서 있다’는 말은 나는 성도라고 우긴다고 성도가 아니고 성도의 구조를 보여야 성도가 되는 거예요.

따라서 구조가 먼저고 성도는 나중이에요. ‘나는 성도다’ 할 때는 어떤 구조를 보이고 난 뒤에 이야기하란 말이죠. 그게 바로 모세가 그냥 모세가 아니고 떨기나무같이 다루어질 때 이게 모세가 모세다운 겁니다. 이게 나중에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다운 거구요. 이스라엘로서 하나님이 함께 있는 겁니다.

자, 이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에요. 어떤 사람이 개인적인 생각을 한다 또는 개인주의적이다. 할 때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이 사람이 너무 개인주의고 자기밖에 모른다고 할 때 나와 이 사람과 비교해서 ‘이 사람은 개인주의적이다. 그래서 내 요구도 안 들어준다’ 보통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뭐로 보느냐면 이 사람을 주께서 육체로 사용한다면 주님과 함께 있어요. 그러면 주님의 형제한테 대항하고 대들고, 주님의 형제 앞에서 개인적인 것으로 대하는 것은 곧 누구한테 대드는 겁니까? 주님의 일에 반항하고 대드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 이제야 베드로전서 들어가 봅시다. 이것 이야기하기까지 이만큼 길었어요. 베드로전서 4장에 보게 되면 육체의 고난을 받는데 육체의 고난을 누가 줬냐 이 말이에요. 예수님이 당한 육체의 고난을 성도가 같이 받는 이유가 떨기나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보통 고난 받으면 좌절하고 지쳐가지고 제 풀에 주저앉습니다. 나 이러면 천국 안가. 그렇게 되는 거거든요. 제자들 7명인가. 예수님 부활하고 난 뒤에 고기 잡으러 갔잖아요. 주님께서 안 찾아오셨으면 어떻게 됩니까? 소진되는 거죠. 열심히 해볼라 했는데, 주님 섬길라 했는데 야, 안되네. ‘안되네’로 끝나버려요, 소진되어버려요. 그런데 누가 나타났습니까? 주님이 나타났잖아요. 사랑 줬지요. 그게 바로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이 뜻이다 이 말이죠.

뭔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까? 베드로전서 4장 2절 있잖아요.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이 말을 이런 식으로 설명 안하면 어떤 식의 해석이 되느냐 하면 나 예수 믿는다. 예수의 십자가 피를 믿는다. 이제부터 예수님 피를 믿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람답게 나쁜 짓 안하고 착하게 윤리 도덕적으로 바르게 살아서 전에는 이 육체를 내 탐욕과 욕심에 따랐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성경공부해서 알고 이 뜻에 따라서 내가 열심히 남은 때를 사는 것이 사도베드로가 나한테 시키는 일이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이게 무슨 주의가 돼요? 개인주의가 돼요, 개인주의가. 이게 바로 악마의 모습이다, 악마의 주장이다 이 말이죠. 의미가 자기 의미로 귀결된다 이 말입니다. 본문 보세요. 그 본문이 그렇게 해석 안되겠어요? 해석될 여지가 많지요. 바리새인들이 하는 짓거리를 예수 믿는다는 명목으로 또다시 반복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모세가 왜 등장했습니까? 베드로는 왜 등장한 거예요? 무엇이 육체의 고난입니까? 바로 성도 내부의 구조를 보여주는데 구조가 주님과 함께 있는 구조를 보여주는 반면에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 이용해서 자기 구원받겠다는, 그래서 최종의미를 끝까지 ‘내가 천당 간다. 나는 믿는 자다. 나는 성도다.’ 이 자체에 최종의미를 두고 있다는 그 탐욕, 그 욕심 그게 바로 선악과 따먹은 티를 내는 거예요. ‘나는 신이다’ 하는 소리나 ‘나는 악마다’ 하는 소리가 같은 소리란 말이죠.

모든 인간이 그럴 수밖에 없지만 주님이 함께 하면 주님께서 왜 피를 흘렸는가? 왜 사랑을 주셨는가? 왜 은혜가 그렇게 무서운 것인가? 그걸 보여주는 그 구조로써의 성도. 모세같이 떨기나무 같은 사람과 기존의 사람들이 교회 와서 성경공부해가지고 지가 완전한 스타가 되고 신이 되고자, 지 힘으로 천국가고자 하는 시도의 차이점을 제가 오늘 말씀드린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최종의미가 우리한테 있지 않는데 우리는 여전히 성경과 하나님을 이용해서, 말씀을 이용해서 내가 되고 싶은 신이 되고자 하는데 보탬 되고자 시도하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백부장처럼 주께서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는 그것이 바로 주님의 육체에 합당한 고난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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