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서울의존강의20200416a 베드로전서4장 2절(뭉개짐)-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베드로전서

서울의존강의20200416a 베드로전서4장 2절(뭉개짐)-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4장 1절~2절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예수님이 개입한다. 다들 알고 계시죠? 예수님이 개입했을 때 예수님이 취했던 것, 예수님의 환경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을 때 육체가 없었죠. 육체가 없는데 이 땅에 오시면서 ‘육체를 가졌다’ 또는 ‘육신을 입었다’ 또는 ‘죄의 육신으로 오셨다’ 그렇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이 세상이라는 구역으로 들어왔을 때 주님께서 본인의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떤 의미에서 타인의 것이죠, 그 세상이라는 환경이. 주님은 이 세상에 살 필요가 없기 때문에. 하늘나라 계시던 아들,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께서 이 땅에 오실 때에 여기에 대비하고 있고 준비하고 있던 것이 바로 세상이라는 이름의 환경이었습니다.

이 환경 가운데 뭐도 포함되느냐 하면 육체, 또는 육신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시는 조건이 예수님이 육신을 입는 조건 하에 이 땅에 등장하신 거예요. 분명히 성경에 육체라고 되어 있고 육신이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에 뭐가 없느냐 하면 인간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인간을 뭘로 보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육신과 육체로 보는 거예요.

왜 인간이라는 말을 해서는 안되는가? 그 정답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가 정답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입으신 그것이 사람을 입은 것이 아니고 ‘육체를 입었고 육신을 입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거예요. 인간들이 내뱉은 개념이라는 용어를 우리가 고집하게 되면 이것은 무엇과 틀려지느냐 하면 예수님의 세상보기의 관점과 다른 관점이 되어버려요. 이게 관점이 틀려져버립니다.

그럼 “관점이 좀 틀려지면 뭐 어때? 괜찮잖아.” 하지만 관점이 틀려져버리면 뭐가 틀려지냐 하면 태도, 내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져요. 태도가 달라진다. 내가 나를 인간으로 본다면 굉장히 고상해보입니다. 품위 유지해야 될 것 같고 품격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가 나를 육신 또는 육체로 봐버리면, 내가 단독적으로 세상 산다는 것은 그 자체가 바로 저주라는 사실이 밝혀져요.

내가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곧 “나는 저주받아야 마땅합니다” 라는 그러한 입장에 놓이게 되는 거예요. 나는 분명히 육신이고 육체인데 그걸 거부하고 ‘나는 인간이 되고 싶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그게 예수님이 하는 일과 틀어지는 거예요. 예수님이 세상을 보는 태도하고 다른 태도를 유지하는 바가 되는 겁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았다 할 때에 예수님은 육체의 고난을 받았고 우리는 육체보다도 인간이라고 이렇게 되어버리면 주님께서 우리와 매치(match)하는 것을 우리 쪽에서 강력하게 거부하는 의사표시가 되어버리는 거예요. 벌써 좀 난해하죠?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인간이라는 용어를 써야하고 인간이라고 자부하고 있는, '우리는 고상하다' 뭐 그런 생각 갖고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왜 육신과 육체를 고집하느냐?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했잖아요. 인간은 선악에 대해서 개입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너는 선악을 몰라야 된다는 이야기죠. 선악에 대해서 너는 손을 떼라는 뜻입니다. 그게 참된 인간이, 참된 하나님의 형상이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태도에요.

그런데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했는데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말은 선과 악에 대해서 고안할 수 있는, 그걸 규정할 수 있는 분은 누구밖에 없다는 말입니까? 누구밖에 없어요? 하나님밖에 없는 거예요. 하나님은 선과 악을 이미 고안하신 분이에요, 만들어내신 분입니다. 만들어냈기 때문에 선과 악의 그 결말, 최종 결론도 선과 악을 만드신 하나님이 갱신하는 거예요. 갱신하면서 그 결말에 이르십니다. 갱신이라는 말 아시지요? 카드 갱신하는 거, 바꾸는 거예요.

선과 악이라는 그 개념이 인간들의 개념에 후달리지 아니하시고 거기에 대해서 시달리거나 흡수하는 게 아니라 따로이 하나님께서는 선과 악을 갱신하는데, 선과 악을 갱신해야 되는 이유는 악은 악대로 선은 선대로 나타나야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선과 악을 갱신하는데 있어서 기존의 인간들은 본인 나름대로의 선과 악을 내세우면서 자기가 선과 악 사이를 판단하고 평가하려고 하는 겁니다.

아시다시피 악의 결말은 지옥이죠. 선의 결말은 어디죠? 천국이죠. 선은 악이 아니고 악은 선이 아니라는 것을 거기서 분명히 구분지어 놨어요. 그런데 인간에게 와서는 선과 악 둘다 인간에게는 악이 되는 겁니다. 왜? 따먹지 말라 했으니까. 다시 말씀드려서 따먹지 말라는 것은 선과 악의 그 과정과 결말에 대해서는 인간이 거기에 손대서는 안된다, 인간이 거기에 관여할 바가 못된다. 너는 관여해서는 안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악마가 인간에게 부추긴 거예요. 관여하라. 선과 악을 관여하라. 관여해야 네가 신으로부터 독립해서 너 자체적으로 신이 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악마가 인간에게 유혹을 한 겁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중요한 것 했습니다. 선과 악은 하나님이 고안한 것이지 인간이 고안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고안한 하나님의 선과 악의 갱신의 중심은 누구겠어요? 예수님의 행하심이죠. 예수님의 행하심에 거부하는 게 악이고 예수님의 행하심을 받아들이는 게 선이 되겠죠.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 중심이란 말이죠.

그러면 인간들이 말하는 선과 악의 판정기준은 누가 되겠어요? 본인이, 인간들이 하는 거예요, 인간들이. 인간들이 선악 기준을 관여하면 안되는데 악마의 유혹을 받아서 관여하면서 선과 악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인간은 결국 무엇을 원합니까? 결국 선과 악의 최종 의미, 최종 마감을 누구한테 두겠어요? 인간 자신에게 소환시키는 겁니다, 모든 의미를.

성경에서 ‘시험받았다’ 하는 게 다른 게 아니에요. ‘시험받았다’ 하는 것은 무의미가 의미 있는 것처럼 행세하는 게 시험받은 거예요. 의미 없는데 자꾸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악마의 시험, 유혹을 받아서 그런 현상이 드러나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설명했는데 흔히 교회에서 시험받았다, 유혹했다는 말을 사람들은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나는 또 범죄했다, 타락했다’로 그렇게 생각하는데 아니 범죄한 인간이 범죄하고 이미 타락한 인간이 뭐 새삼스럽게 타락하죠? 이미 범죄하고 타락했는데.

이 말이 뭐냐 하면 인간은 이미 의미 있다, 의미 없다? 인간은? 의미 없는 거예요! 관여하지 말라는데 관여했잖아요. 선과 악을 만들어내시고 그걸 완성시키는 것은 예수님의 몫이지 인간 몫이 아닌데 인간이 거기 자꾸 끼어든 거예요.

방앗간에 기계가 휙휙 하고, 발동기가 돌아가잖아요. 돌아갈 때 만약에 어떤 사람이 큰 철도침목 같은 거 있잖아요, 그 굵다랗고 긴 나무토막을 발동기 돌아가는 한복판에다가 쑤셔 넣어보셔요. 그럼 발동기 돌아갑니까? 돌아가다가 끼익, 하고 안돌아가죠. 안돌아간다고요. 악마가 그 짓 한 거예요. 선과 악에 대해서 결말을 누가 짓느냐? 하나님, 예수님이 짓는데 마귀는 하나님이 만든 인간을 가져다가 침목 넣는 것처럼 돌아가지 못하도록 중간에 끼워 넣어버린 거예요.

주님께서 그러면 죽는다 했잖아요. 그래서 아담은 죽잖아요, 우리가 죽는 이유가. 그런 말 있잖아요, 요새 말 사자성어로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진다. 낄끼빠빠라 합니까?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져야 하는데 분간도 못하고 지옥과 천국 만드는데 인간이 왜 끼어듭니까? 마귀는 이미 지옥이라는 게 자기를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나만 죽을 수 없다 해서 하나님이 만든 인간을 꼬셔가지고, 다시 말해서 시험들게 했죠. 의미가 없는데 의미 있는 걸로 의미를 장착시켜가지고 하나님 일에 “나도 독자적으로 의미 있습니다. 예수님만 다합니까? 나도 인간입니다” 해가지고 같이 끼어들어서 방앗간 운영 못하게 만들려고 했죠.

인간이 선과 악을 할 때는 무슨 중심이라 했습니까? 자기중심이에요. 자기중심이라는 것은 마감이 뭐냐? 모든 의미는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의미 있다. 역시 나는 의미 있는 존재야.’ 이 말은 나도 의미 있다고 겸손하게 이야기하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나만 의미 있는 거예요. only me. 나만. 나만 의미가 있고 다른 건 다 의미 없다. 나보다 다 의미가 부족하다. 이런 식으로 절대적인 신으로 자처하고 있는 겁니다.

그게 처음부터 이야기하게 되면 인간은 어디를 봐도 나는 인간이라는 거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인간을 뭐로 봅니까? 육신으로 본다했지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낼 때 인간이 되게 한 게 아니고 바로 육신이 되게 하고 육체가 되게 한 거예요. 그러니 육신이다, 육체라 하는 것은 그 자체적으로 의미가 없어요. 자체적으로 의미도 없고 어떤 용도, 쓰여지는 용도가 더 중요한 겁니다.

그러면 인간이 이미 선과 악을 안다고 악령이 있어가지고 이렇게 날뛰고 있는데 지가 나도 선과 악에 대해 안다고 자기중심적으로 윤리적, 도덕적으로, 양심적으로 산다고 우기고 있는데 이걸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셔가지고 자기 백성한테는 이것을 제거해야 되거든요. 그 제거하는 방법이 어떤 방법일까요? 우리가 예수님이라면 아이디어 한번 끄집어내보세요.

의미의 최종 도착지점이 자기에요. 내가 선하고 내가 안다고 내 중심적으로 선과 악을 결정짓습니다. 그리고 결정짓는 그 기준은 뭐냐 하면 이러나 저러나 나는 정당하고 나는 옳고 나는 바르게 살고 나는 훌륭하다. 남은 죽어도 나는 죽어서는 안된다. 남은 지옥가도 나는 천당 가야된다. 이걸로 모든 의미가 다 소환된단 말이죠. 거기에 다 집중이 되어 버리는데 이런 미친 존재, 이건 완전히 미쳤죠. 모든 인간은 다 미친 정신병자에요, 자기밖에 모르니까. 이걸 어떤 식으로 어떻게 치료할 수 있고 다시 예수님 중심으로 돌릴 수가 있을까요? 환자가 자기 병을 치료한다는 것은 어렵지만 아이디어를 끄집어내면 어떤 게 있을까요?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쉬운 예로 이런 예를 들면 돼요. 어떤 할아버지 둘이 자기 방에서 장기를 두고 있다. 장기를 두는데 나이가 많아서 하다 보니 정신 집중이 잘 안돼 가지고 잘못 뒀어요. 그 때 한 할아버지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한 수 물어줘”, “못 물어준다”, “한번 물어줘. 우리 친구 사이 아니가? 물어줘”, “아무리 친구라도 친구는 친구고 사적인건 사적이고 공적인건 공적이다. 못 무른다. 이거 한판에 돈 만원인데 물어주고 내가 돈 잃으면 안되잖아” 서로 싸우고 있어요.

한번 분석해봅시다. 왜 장기 둘 때 왜 물어달라고 합니까? 잘못했다고. 그것은 나는 원래 잘못 두는 사람이 아닌데 잠깐 실수해서 잘못 뒀으니까 이걸 물러주게 되면 나는 도로 의미가 나한테 소환되죠. 어떤 의미로 소환됩니까? 역시 나는 장기 잘 두는 존재로 소환되겠죠? 그걸로 마감되겠죠? 그래서 물어달라는 것은요, ‘내가 장기 너보다 못 둔다’에 대해서 본능적으로 그게 짜증나는 거예요. 평소에는 장기 이기고 뭐고 간에 내가 실수한 그 실수에 대해서 내가 나를 비난하고 싶은 거예요. 뭔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까? 이런 뜻이죠.

사람이 자기에게 반성을 하고 자기 자신을 책망하고 닦달내고 자책하는 이 모든 이유는 자기가 진정 못났다는 이야기에요, 아니면 잘났는데 잠깐 실수했다는 이야깁니까? 어떤 뜻입니까? 자기가 잘났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빨리, 후딱 회복해야 될 상황이기 때문에 봐달라는 거예요. 봐 달라. 장기 둘 때 한번 실수한 거 봐달라는 거예요. 왜? 봐주면 어떻게 됩니까? 봐주면 나는 도로 괜찮은 존재로 유지되거든요.

그러니 처음부터 나는 괜찮은 존잰데 괜찮은 존재가 장기 두다가 실수했다. 그러면 반성하고 회개하고 책망하고 닦달내고 스스로 자기에게 자책하면서 또는 남한테 부탁하고 사정하고 구걸하고 옹색하게 하면서 “그냥 봐 주세요”, 왜? 나는 그다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 처음부터 이 사람은, 장기 둘 때부터 자기는 그다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 있는, 그게 의미 있는 거예요, 의미 있는 것부터 이미 시작이 된 겁니다, 의미 있는 것부터.

내 남편이 실수해서 당신 남편 못살렸는데 봐 달라. 왜? 나는 임신했고 뭐 어떻고 드라마에 그런 내용이 나오잖아요. 그게 왜 그렇게 합니까? 무릎 꿇고 봐 달라 해도 안봐 주니까 도로 화를 내고 이렇게 하는 이유가 내가 사는 이유는 바로 내 중심이잖아요. 선과 악을 안다는 것은 선과 악을 초월했다는 뜻 아닙니까? 선과 악을 초월했다. 쉽게 말해서 선과 악은 누가 만든다? 인간들이 생각하기에 누가 만든다? 내가 만들고 내가 결정하고 내가 규정하고 선과 악은 내가 판단한다. 그럴 때 그게 신이 신 행세를 한다고 우기고 싶은 거예요.

어떤 사람들은 교회 가는 이유가 남보다 세상을 더 높게 알고 많이 알기 위해서 가는 거예요. 그거는 자기부인이 아닙니다. 평소에 잘나 보이는데 교회 와서 하나님 말씀까지 알았으니까 더 잘나 보일 수 있고 남을 내려다 볼 수 있고 남한테 기 안죽고 많이 안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서, 듣고 싶어서 그 다음에 최종적인 의미는 뭡니까? 그래서 나는 잘났다. 그래서 나는 역시 잘났어. 그게 최종 마감이다 이 말이죠. 교회 가는 이유도 그런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잘난 사람 설마 지옥 보내진 않겠지, 천당 보내겠지. 그래서 난 천국 갈 정도로 나는 괜찮고 괜찮고 괜찮은 존재다. 이걸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선악에 대한 뭐라고 했죠? 두 자로, 예? 갱신. 선악을 갱신하는 거예요. 선악을. 선악은 붙어있기 때문에요, 선만 갱신되는 게 아니에요. 선하면 선할수록 남들한테 더 악해진다는 것이 면면히 많이 드러나니까 선도 많이 알면 악도 덩달아서 아니까 선악이 갱신된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 선악에 대해서는 우리 중심이 아니라 누구 중심이라 했습니까? 예수님 중심이죠. 자, 예를 들어 봅시다. ‘장미는 장미로서 있다’ 이런 문장을 생각해봅시다. ‘장미는 장미로서 있다’ 또 ‘코스모스는 코스모스로서 있다’ 또는 ‘코끼리는 코끼리로서 있다’. 뭐 당연해 보이는 말이죠. 그런데 여기에 이 문장을 분석하게 되면 많은 것을 분석할 수 있어요. 뭐냐 하면 장미는 그냥 있는 게 아니고 장미다워야 비로소 ‘있다’는 말을 할 수 있다 이 말이에요, 장미가. 장미는 뭐냐 하면 고유 기능이에요, 고유 기능 또는 용도.

‘장미는 장미로서 있다’라고 할 때 ‘인간은 인간다워야 인간이다’와 같은 말이라고 보신다면 이러한 문장의 제일 최초의 것이 뭐겠어요? 원조가 뭐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장미에다가 예수님을 집어넣는 거예요. 예수님은 뭐 다워야 된다? 예수님은 ‘예수님으로서’ 있는 거예요. 그러면 성경에서는 예수님을 뭐로 보느냐 하면 심판주로 보거든요. 또 예수님을 뭐로 보느냐 하면 구원주로 본다 이 말이죠. 구원주 또는 구원자. 그걸 합쳐서 ‘주님’이라고 하는데 주님은 심판주, 구원주 이 두 가지의 용도가 다 포함된 분을 ‘주님’이라 합니다. 왕으로서 심판하시고 왕으로서 구원한다 그런 뜻이에요.

제가 왜 ‘장미는 장미로서 있다’고 하냐면 장미가 ‘장미로서’를 정할 수가 없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에요. 하나님이 하나님다울 때 장미를 장미로 만들어내시는 거예요. 그 때 장미는 장미답게, 장미로서 있는 겁니다. 코끼리는 코끼리로서 있는 거예요. 그런데 장미가 스스로 나는 장미다워야 돼. 코스모스가 스스로 코스모스다워야 돼. 이렇게 노력하면 되겠어요, 안되겠어요? 장미가 스스로 장미답게 되어버리면요, 장미를 장미답게 하고자 하시는 주님, 하나님의 기능은 여기서 날라가 버려요. 관계가 없는 게 되어버린다고요. 그게 바로 지옥이잖아요.

사탄이 뭡니까? 사탄은 천사는 천산데 어떤 천사입니까? 하나님의 간섭을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최종 하나님이 되겠다고 나선 천사가 타락천사, 사탄이죠. 그렇죠? 그러면 악마를 분석해보자. 악마의 의도는 뭡니까? 악마는 악마답다. 악마가 스스로 악마라 하지 않겠죠. 악마는 자기가 신이라 하겠죠. 신은 신답다고 악마가 주장할 때 이때 하나님이 보시기에 뭐가 문제냐 하면 피조물 주제에 무슨 관계와 결별한 거예요? 창조주의 간섭과 관여를 피조물이 스스로 강력하게 거부해버린 거예요.

자, 내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아이고 목사님 그건 악마한테 해당되는 것이고” 이렇게 불평할 수 있는데 그 악마의 심정이 우리 인간의 조상 아담에게 주어졌습니까, 안주어졌습니까? 주어졌어요, 안주어졌어요? 주어졌지요? 주어졌다는 정답은 뭐냐면 뭘 따먹으라했습니까? 선악은 누가 고안하고 누가 결정하고 누가 판단하고 누가 완성시키냐 하면, 선악은 하나님이 판단해요, 지옥이고 천국이고.

그런데 인간이 거기에다가 아까 그 방앗간에서 철도침목 집어넣듯이 집어넣어버리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결별시켜버리고 시작점을, 선악의 출발점을 누구로 시작하느냐 하면 피조물 된 인간, 본인부터 출발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본인이 선악을 관장하는 신이 되기 때문에 인간인 이상 모든 의미는 어디로 소환된다? 어디로 다 귀결된다? 나한테 귀결되는 거예요. 내가 “나의 결정은 옳았다” 그걸로 다 귀결되는 거예요. 나의 결정은 옳았다. 오늘 참, 어려운 것 합니다. 방학이 너무 길었으니까 어려운 거 해야죠.

문장을 한번 적어 볼게요. ‘나의 결정은 옳았다’ 이렇게 되죠. 이것이 인간이 아니고 육체의 본성이죠. 죄악 된 육체의 본성입니다. ‘육체’라고 표현한 것은 주님이 인간을 볼 때 육체로 봤던 그것이 시작점이 되어야 돼요. 인간이 육체를 봐버리면 육과 영을, 혼을 나눠서 안돼요. 이 자체가 이단적이에요. 인간이 결정했기 때문에. 육체의 영과 또는 육, 혼, 영을 인간이 결정하기 때문에 이게 반칙인 거라는 말이죠. 성경에 이게 있다고, 데살로니가전서에 육과 영과 혼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이 개념을 안다고 하면 안돼요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 주님이 개입해야지 본인이 개입해버리면 본인의 의미가 역시 ‘나는 잘났다’로 마감, 귀결되어버려요. 결론지어진다고요.

자, 이제 어렵습니다. ‘나의 결정은 옳았다’ 이것이 마귀적 생각이라 했죠, 그렇죠? 그러면 지옥가기 싫고 천국가고 싶어서 사람들은 뭐라고 합니까? 나의 결정은? 이걸 반대로 뒤집는 거예요. 나의 결정은 옳지 않다고 하겠죠. 나의 결정은 옳지 않다. 나는 옳지 않다. 나의 결정 또는 나는 옳지 않다고 주장하면, 그러면 천국 갑니까? 이게 아까 이야기한 반성, 회개, 자책, 책망, 내가 내 스스로 나의 문제점을 지적한다고 해서 그것으로 인해서 천국 가는 게 아니에요. 어떤 고백을 해야 천당 갑니까? 그런 고백은 인간에게는 없다는 말이죠.

이건 그야말로 꼼수 쓴 거죠. “나는 옳지 않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묻죠. “니가 무슨 근거로 옳지 않다고 하느냐? 왜 ‘옳다, 옳지 않다’를 니가 결정해? 왜 니가 결정하는데?” 아까 장기 이야기 다시 해봅시다. “장기 한 수 물어줘.” 그러면 상대방 할아버지가 물어주면 친구가 뭐라고 하느냐면 “‘아이고 당신은 훌륭한 친구야’ 내가 이렇게 이야기해줄게. 그러니까 한 수만 물어줘.” 이러거든요. 그러면 물어준 친구는 훌륭한 친구 됩니까? 둘 다 자기끼리 판단을, 선과 악을 자기들끼리 판단한 거예요.

그럼 해답은 뭐냐? 대형 비행기가 장기 두는 그 방에, 집에 던져져 주저앉아서 둘 다 죽으면 되는 거예요. 오늘 강의 결론 쉽죠? 선과 악의 해결점은 뭉개버리는 겁니다, 뭉개버리는 것. 이거 잘 기억하세요. 오늘 제목입니다. 뭉개짐. 제목 . 지금 둘 다 장기 두면서 내 의미, 네 의미, 자기가 잘난 의미를 고수하고자 지금 장기를 두는 거예요. 장기를 이기면 나는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러니 모든 인간은 자기한테 의미를 되찾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데 신학에서는 특히 통일교 같은 경우에는 통일교 신학이 무슨 신학이냐 하면 이 신학이에요. 회복신학이에요. 회복신학을 통일교가 주장하지만 모든 현재 한국교회에서 이 회복신학을 다 이야기한다고요. 회복하자. 회복 왜 해야 되는데요? 이 회복하자는 게 뭐냐 하면 잃어버린 의미를 되찾겠다는 하나의 몸부림에 지나지 않아요. 종교적인 몸부림이에요.

이거는 복음도 아니고 신앙도 아니고 이거는 그냥 악마의 몸부림이에요. 악마가 부여해준, 악마가 나한테 심어준 그 본성을 최대한도로 이끌어 내가지고 내가 원하는, ‘나는 의미 있다’, ‘나는 정말 가치 있다’ 이걸로 되돌리기 위해서 어떤 목표로 잡은 것이 뭐냐 하면 회복하자는 거예요. 손상도 회복되고 부상도 회복되고 전부다 상처도 회복되고. 상처도 회복된다는 그걸 뭐라고 합니까? 치유. 영어로 하면 care라고 하죠, 케어.

도대체 치유를 왜 해야 됩니까? 중풍병자가 새치기해가지고 지붕 뚫고 예수님께 중풍병 고치러 갈 때에 예수님께선 네가 지금은 중풍병 들었지만 회복되었다고 이야기한 거예요? 예수님이 뭐라고 얘기합니까, 마태복음 9장에서? 회복되었다고 이야기해요?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되어있죠 (마태복음 9장 2절). 이 죄 문제. 죄 문제라고 할 때에 예수님의 근거는 뭡니까?

선과 악, 그리고 의미 있음과 의미 없음 이 모든 것을, 선과 악을 알게 된 너 자체를 주님께서 뭉개버리는 겁니다. 아예 그것은 무시해버리죠. 선과 악. 네가 선과 악가지고 게임하지 마라. 인간에게 회복이란 없습니다. 그냥 뭉개버리고 죽이는 것이지 회복이라는 게 없어요. 하여튼 이단치고 회복 주장 안하는 이단이 없어요. 통일교도 그렇고 워치만 리도 그렇고 전부다 회복입니다.

인간의 욕망이 무슨 욕망이냐 하면 바로 악마의 욕망이에요. 악마의 욕망은 뭐냐? 최종 의미자 또는 최종 가치 있는 존재로 본인을 설정해 있습니다. 본인이 최종 지점이에요. 모든 의미와 모든 가치의 최종은. 따라서 인간들은 자기가 의미 있고 선하기 위해서 굉장히 조심스럽게 살고 자숙하고 스스로 자기를 낮추기도 하고 거기에 필요한 어떤 교훈 같은 것을 참조로 사도바울의 편지,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보이는 것부터 해가지고 성경 마태복음, 산상설교부터 해가지고 모든 의롭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것은 다 끄집어내어서 최종적인 목표는 뭐냐 하면 바로 본인은 의미 있고 본인은 가치 있는 존재로 증명하기 위해서 그런 노력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인간의 욕망이 바로 악마의 재탕입니다. 인간은 악마의 아바타이다. 인간은 악마의 아바타. 악마의 페르소나, 악마의 가면. 악마의 인격체, 이게 인간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게 아니고 죄 있는 육신으로 오신 거예요. 육체로, 육신으로 개입한 겁니다. 독생자 예수님께서 육신이 없었어요. 여기는 인간이 될 이유가 없었어요. 그러나 내려오시면서 이쪽 환경이 있잖아요, 이 엉망진창 환경을 그대로 입었습니다.

자, 이 예가 바로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는 장면이 나오거든요. 그것도 좀 복잡한데요. 세례요한은 분명히 얘기했어요.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오시는 분의 소리다. 스피커, 엠프다. 그냥 소리일 뿐이지, 마이크일 뿐이지, 진짜 본질, 실체인 예수님 오심이 중요하지 나는 중요하지 않다고 했거든요. 그러나 실제로 세례요한과의 만남에서는요, 세례요한이 단순히 비서가 아니에요, 외침이 아니에요, 마이크가 아니에요. 오히려 주도권을 세례요한이 쥐고 예수님에게 물세례를 줘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세례요한이 그걸 거부했습니다. “제가 예수님에게 물세례 줄 그런 위인이 못됩니다.” 그렇게 하니까 예수님께서 “해라. 나한테 세례 줘라.” 그러니까 세례요한의 뜻은 뭐냐 하면 물세례라 하는 것은 씻을 수 있는 죄가 있는 사람에게만 물세례를 줘서 깨끗케 정화하는 것이 물세례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은 죄가 없다 이 말이죠. 죄가 없는데 죄 씻는 행위를 한다는 것은 이건 앞뒤가 안맞는, 모순되는, 연결이 안되는 모순점이다 이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세례요한의 뜻을 아시고 그래도 나한테 세례 주라는 말은 바로 인간은 죄 아래 있다는 표시가 물세례거든요. 예수님께서 죄 없으신 분이 죄 아래 오셨다는 그러한 증표로서 물세례 받으신 거예요. 죄도 없으면서 죄가 받는 모든 저주와 그 처벌과 결과를 주님께서 바케스에다가 물 붓듯이 그냥 죄를 뒤집어 씌워버린 거예요. 그게 물세례에요.

그리고 예수님의 피 흘림도 물세례의 연장선이죠. 죄가 있는 곳에 처벌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 죄 때문에 하나님께 저주받을 때 흘렸던 피잖아요. 그리고 그 사실이 바로 예수님이 주님이 되시는 완성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물+피+성령께서 모든 하는 일이 동등하다. 물 뒤에다가 세례 붙여봅시다. 물세례와 피세례와 십자가, 성령세례 이 모든 것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전부 다 같이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한 일이다 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요한일서 5장에 나오죠. 잠시 보겠습니다.

요한일서 5장 6절에 보면 예수님이 임했다는 말은 뭐냐? 물이 임했다. 예수님이 임했다는 말은 피가 임했다. 예수님이 임했다는 말은 성령이 임했다는 거죠.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예수님을 물로 임한 분으로 보고 또 예수님은 피로 임한 분이라고 보는 거고 지금은 성령으로 임한 분이라고 보는 거예요. 그러니 물과 피와 성령이 주 내용이 아니고 그 안에 누가 다 들어있다? 예수님이 들어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보고 싶다. 물을 보고 피를 보란 말이죠, 물세례, 피세례. 그래서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 ‘3’이라는 다양성으로 나타났지만 그 다양성의 배후를 좇아가보면 그것은 한분, 예수님에게서 나왔다 이 말이죠.

이 이야기를 왜 하냐면 예수님 보입니까, 안보입니까? 예수님은 안보이죠. 안보이지만 성령께서 뭘 증거한다? 물과 피를 증거하는 이가 성령이시니 물과 피를 증거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물세례와 예수님이 피 흘려 죽으신 것을 봐서 진짜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일을 다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려준다는 겁니다.

인간들에게 있어서 가장 거부하고 싶은 게 뭐냐 하면 자기가 선악과를 따먹었고 선악을 판정할 수 있다는 말은 본인은 선악을 초월한 존재라는 것을 자꾸 그런 식으로 증명하고 싶은 거예요. 나는 이것은 선하다, 이것은 악하다. 이건 누구 마음대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자기 마음대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선과 악을 판단해서 나는 반성한다. 반성은 누가 합니까? 본인이 하는 거예요. 반성해서 뭐하려고? 반성할 정도로 나는 착하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모든 의미의 마감이 본인에게 굳혀져 있으니까 그 인간을 거부하는 게 뭐냐? 물의 증거요, 피의 증거라는 겁니다. 너는 그렇게 판정할 권한도 없고 권리가 없다는 거예요. 물이라 하는 것은, 물세례라 하는 것은 다 죄로써 물에 빠져 죽어야 된다는 거예요. 세례요한이 물세례 줄 때 물 이렇게 찔끔 뿌리고 한 게 아니에요. 그냥 물속에 머리랑 다 집어넣어버려요.

지금도 침례교에서 그렇게 하고 있잖아요. 그리고 지금도 요단강, 세례 주는 데, 요르단 쪽에서 세례 주는 데와 이스라엘 쪽에서 세례 주는 데, 두 군데가 있거든요. 서로 마주보고 있는데 보니까 한 5m도 안 돼요. 마주보면서 세례주면서 옷 빌려주고 돈 2만원인가 받던데 옷 빌려주면서 세례 받는데 보면 목사가 세례 받고자 하는 사람을 집어넣어버려요. 교회에서 세례 받는 거 필요 없어요. 진짜 요단강에서 예수님 세례 받는 데에서 한다고 여행가서 하는데 우리도 한번 해야 되는가 모르겠다만 물속에 그냥 집어넣어요. 수장하는 거예요. 죽여 버리는 거예요.

죄를 씻는다는 말은, 그 전에는 죄가 물처럼 또는 피처럼 또는 하나님의 지옥불처럼 우리보다 죄가 더 우세하고 우리를 덮고 있다는 그 표시를 하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는 죄를 짓는다고 하는데 우리가 죄를 짓는 게 아니고 죄가 우리를 사용하는 거예요. 뭘 해도 죄가 되는 거예요. 참 이것만 알아도, ‘뭘 해도 죄가 된다’ 이것만 해도 성도라 할 수 있습니다. 뭘 해도. 그 티가, 그 sign이 예수님의 물세례요 피세례란 말이죠. 십자가라 이 말이죠. 물의 완성이 십자가니까. 물로 시작했다가 십자가로 끝나잖아요. 피 흘림으로 끝나잖아요, 예수님께서.

그러니 사람을 가지고 물에다가 이거는 진짜 세숫대야 말고 수조하나 있어서 폼을 한번 내야 되는데, 수조에다가 사람을 집어넣어버려요. 푹 집어넣으면 물에 잠기겠죠. 그럼 바깥에서 보잔 말이죠. 바깥에서 보면 물이 보입니까, 사람이 보입니까? 사람은 안보이고 뭐만 보이겠어요? 물이 보이겠죠. 그 물을 뭐로 보느냐면 죄로 보는 거예요. 하늘나라에서 보기에 인간세계는 죄만 보이지 인간이라는 것은 안 보인다. 인간은 죄 속에 그냥 녹아져 있는 거예요. 용해되어 있는 겁니다. 없는 거예요, 인간은.

그래서 주님께서 풍덩하고 죄 속에 들어온 것이 예수님의 물세례고 그걸 누가 시켰다? 비둘기같이 성령이 오심으로써 성령께서 시키는 대로 죄 없으신 분이시지만 죄의 처벌이 기다리고 있는 죄의 세계 속에 들어가 버린 겁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은 뭘로 남습니까? 예수님의 피 흘림으로, 죄값을 치른 피 흘림으로 빠져나와서 하늘나라, 천국을 이루신 거예요.

세례요한이 실제 인물입니까, 귀신입니까? 실제 인물이죠. 그러면 세례요한이 했던 물세례가 실제로 한 겁니까, 아니면 그냥 상상으로 폼으로 한 겁니까? 실제죠. 드라마 아니죠? 영화 아니죠? 픽션 아니죠? 소설 아니거든요. 그렇다면 이 세상은 세례요한 관점으로 봐야 되고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관점으로 세상을 봐야 되요.

참 그런 의미에서 예루살렘에 아직도 십자가 지신 흔적이 있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 자리에 가서 아, 내 자신이 이것밖에 안된다는 것을 알 때 오는 그 희열과 그 기쁨. 아, 나는 없구나. 죄만 있구나. 이것을 알게 했다는 것은 성령이 임했기 때문에 피의 의미도 알고 물의 의미를 아는 거예요. 그게 바로 내가 나를 보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나의 결정은 옳았다. 이것의 반대는 뭐냐 하면 내 결정은 옳지 않다가 아니라 ‘예수님의 결정은 옳습니다’ 이렇게 하는 게 옳단 말이죠. 예수님의 결정은 옳다. 나의 자리를 예수님으로 바꾸는 거예요. 예수님의 결정은 옳습니다. 자칫 내가 옳지 않다고만 나와 버리면 옳지 않은 것이 자기 의가 되어버려요. 스스로 자기가 반성해서, 반성한다는 말은 최종의미가 나는 반성했으니까 나는 옳다는 자기 옳음으로 마감이 될 가능성이 높아요. 가능성이 높은 게 아니고 뭐 마땅한 거죠.

그래서 예수님은 옳습니다. ‘예수님은 옳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떤 분이 말하기를, “그러면 나라는 존재는 어디 있습니까?” 이렇게 하겠죠. 나라는 것은 ‘예수님이 옳습니다’를 발산하는 수단이 될 뿐이에요. ‘예수님이 옳습니다’ 하는 것을 발산하는 수단. 그게 아까 뭉개버림입니다. 제목도 ‘뭉개짐’이잖아요. 그냥 장기 누가 이긴다, 진다 관계없어요. 그냥 뭉개버리는 거예요.

자, 그러면 아까 장기판 이야기했는데 또 다른 예를 들께요. 이 사람은 몸이 아픕니다. 몸이 아파서 몸에 뭐도 많이 나고 아파요. 또 한 사람은 나이 90이 되도 팔팔하고 90되도 자전거타고 다닙니다. 우리 보기엔 누가 부러우냐 하면 건강한 이 사람이 부러워요. 평생 안아프고 건강하고 잘 살고 행복하고. 부러워요. 그런데 여기에 진짜 대형 비행기가 이 두 사람 있는데서 그냥 추락해가지고 뭉개버리면 둘 다 의미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의미가 있어요, 없어요? 의미 없지요. 이걸 가지고 사소한 일이라 합니다, 사소한 일.

자, 이번에는 이쪽에 있는 남자애가 22살인데 뭐 n방을, n²방인지를 했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이걸 고소하는 검사입니다. 남들 보기에는 이 사람은 참 공부 열심히 해서 동네에 플랭카드 걸려가지고 우리 아들 검사됐다고 자랑질하고 얘는 온 우사되겠죠. 우리 인간들 보기에는 아, 이 사람은 인생 끝났어. 무기징역이야. 또 한사람은 검사됐으니까 이제 검사장 될거야. 부러워하지만 대형 비행기가 와가지고 뭉개버리면 둘 다 의미 없어요. 다 이거 이러한 비교는 사소한 비교. 니 가치, 내 가치, 니 의미, 내 의미. 다 사소한 거예요.

문제는 이 사소한 의미 없음인데 의미 없음을 의미 있는 것처럼 조작하는 걸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의미 없는데 의미 있는 걸로 자꾸 있는 걸로 조작하는 걸 아까 뭐라고 했어요? temptation, 유혹이죠. 시험 든다. 유혹 들어서 그래요. 시험 들어서 그래요.

자, 그렇다면 오늘 베드로전서 이제 이해됩니다. 예수님께서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죠. 그러면 예수님께서 육체의 고난을 받았다는 것은 뭐냐 하면 이 육체라는 것은 이미 죄 있는 육체에요. 이것은 이 세상에서는 이미 시험들 수밖에 없는 육체입니다. 주님이, 죄 없으신 분이 그런 육체를 가졌으니까 여기서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하면 고난을 받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예수님께서 스스로 자기를 때린 게 아니고 성령께서 그렇게 몰아세우신 거예요.

이해를 돕기 위해서 성경 한 구절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6장 3절 봅시다.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 되어 있죠.

자, 여기서 한번 생각해봅시다.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날이 흐리겠다”라고 사람들이 하는데 주님께서는 이 자체가 틀렸다는 말입니까, 옳았다는 말입니까? 이게 틀리다, 옳다 그 자체가 아까 처음에 그랬잖아요. 의미가 없는 거예요.

인간들이 지금 한국에서 신종코로나, 그 유전자 전체를 다 밝혀냈다 이 말이죠. 한국의 천재 두뇌들, 서울대학교 생명과학연구소에서 그걸 밝혀냈거든요. 주님께서 하지 말라는 이야기에요? 그 과학적인 탐구를 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까? 아니거든요. 천문대가 내일 아침 일기예보를 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아니다 이 말이죠. 너는 그걸 하지마라. 그게 틀려먹었다. 그게 네 죄야. 그걸 바로 지적하는 것이 아니고 그게 의미가 없다는 거예요.

신종코로나 DNA 아니고 RNA거든요. 보통 바이러스는 DNA로 되어있지만 신종코로나는 중심이 RNA인데 RNA구조를 밝혀 내었다. 그런 짓하지 마라가 아니라 코로나 치료제를 개발하지 말라가 아니라 그런 것을 개발할 줄 알면서도 니가 어떻게 이 세상 자체가 얼마나 악하고 음란하다는 그것은 왜 모르냐 이 말이죠.

뭐 인간이 운전하지 말라, 등산하지 말라, 연구하지 말라, 수학공식 내지 말라 그런 뜻이 아니라 아무 학문도 하지 말고 그냥 도나 닦아라, 기도하라 그런 뜻이 아니라 그게 의미가 없다 이 말이죠. 최종의미가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모든 발명품들은 최종의미가 어디로 모여집니까? ‘역시 인간은 위대하다’로 모여지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는 기존의 학문과 철학으로 아무리 해도 주님이 하는 일을 못알아보는 이유가 이미 인간에게 의미 있다고 우기기 때문에 그 태도가 잘못된 거예요, 그 태도가.

10분 쉽시다.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130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17,917 자유게시판 28강-욥기 9장 1~10절(인간의 한계)20200426 이근호 목사 욥기 최고관리자 20-04-26
17,916 자유게시판 10강-빌 1장 28-30절(십자가증거)200426-이 근호 목사 빌립보서 최고관리자 20-04-26
17,915 자유게시판 주일학교 설교 / 위험한 출생 / 200426 - 최고관리자 20-04-26
17,914 묻고답하기 겸손 - 최고관리자 20-04-26
17,913 묻고답하기 The Fruit of The Gospel 복음의 열매 - 최고관리자 20-04-24
17,912 자유게시판 38강-호 10장 1-3절(두마음)200422-이 근호 목사 호세아 최고관리자 20-04-22
17,911 자유게시판 309강-YouTube강의(공감과 눈물 로마서12:15)20200421-이 근호 목사 로마서 최고관리자 20-04-22
17,910 자유게시판 308강-YouTube강의(하나님의 낭비 마태복음13:4)20200421-이 근호 목사 마태복음 최고관리자 20-04-22
17,909 강의 유튜브강의 (308강, 309강) 하나님의 낭비, 공감과 눈물 200421 마태복음 최고관리자 20-04-21
17,908 자유게시판 강남-누가복음 1장 71절 (존재의 흐릿함) 200407b-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최고관리자 20-04-20
17,907 자유게시판 강남-누가복음 1장 71절 (존재의 흐릿함) 200407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최고관리자 20-04-20
17,906 자유게시판 27강-욥기 8장 16~22절(영원한 거처)20200419 이근호 목사 욥기 최고관리자 20-04-19
17,905 자유게시판 9강-빌 1장 27-28절(복음의 열매)200419-이 근호 목사 빌립보서 최고관리자 20-04-19
17,904 자유게시판 주일학교 설교 / 요나의 사명 / 200419 - 최고관리자 20-04-19
17,903 묻고답하기 은혜와 고난 빌립보서 최고관리자 20-04-19
17,902 자유게시판 서울의존강의20200416b 베드로전서4장 2절(뭉개짐)-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최고관리자 20-04-19
열람 ➜ 자유게시판 서울의존강의20200416a 베드로전서4장 2절(뭉개짐)-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최고관리자 20-04-18
17,900 묻고답하기 The Specificity of Grace 은혜의 구체성 - 최고관리자 20-04-17
17,899 자유게시판 대전-119강 마태복음26장63-68절(뒤바뀐 재판)20200331-이 근호 목사 마태복음 최고관리자 20-04-16
17,898 자유게시판 37강-호 9장 15-17절(현실착오)200415-이 근호 목사 호세아 최고관리자 20-04-15
17,897 자유게시판 20200413b 부산강의 : [시편]27(18편)-악마의 제안 시편 최고관리자 20-04-14
17,896 자유게시판 20200413a 부산강의 : [시편]27(18편)-악마의 제안 시편 최고관리자 20-04-14
17,895 자유게시판 8강-빌 1장 25-26절(은혜의 구체성)200412-이 근호 목사 빌립보서 최고관리자 20-04-12
17,894 자유게시판 26강-욥기 8장 11~15절(분석) 20200412 이근호 목사 욥기 최고관리자 20-04-12
17,893 자유게시판 주일학교 설교 / 다니엘의 고난 / 200412 - 최고관리자 20-04-12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