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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200413b 부산강의 : [시편]27(18편)-악마의 제안자유게시판시편

20200413b 부산강의 : [시편]27(18편)-악마의 제안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합시다.

선악체계와 생명체계를 생각해 볼 때 이 대자연을 움직일 때 선악체계로 움직여지느냐, 아니면 생명체계로 움직여지는지 따져보면 쉬워요. 예를 들어서 내가 윤리적으로 산다. 그러면 달의 궤도 바뀝니까? 내가 바르게 산다. 그러면 해의 궤도가 바뀔까요? 달이 어두워지고 밝고 별이 떨어지고 새로 생기고 합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이 바르게 산다, 선악적으로 옳게 산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대자연과 연관성을 지니고 있어야 돼요. 연관성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선악체계는 안 된다는 겁니다. 이 대자연이 인간의 선악체계에 동조하거나 연계된 협조는 없다는 거죠. 그럼 뭐냐? 대자연과 우리 운명을 같이 하는 것은 선악체계 말고 생명체계로 나아가게 되면 비로소 대자연과 우리 인간과 하나가 되어서 움직일 수 있다는 겁니다.

이 이야기는 과학적으로 아무리 설명해도 안 됩니다. 과학적으론 도무지 이런 발상이 나올 수 없어요. 내 아들이 결혼한다고 하늘의 별이 갑자기 밝아지거나 어두워질 리는 없다 이 말입니다. 옛날 고대시대에 비가 오지 아니하면 임금이 자기 아들 바쳐서 비 내리게 하겠다고 억지를 쓰는데 그것이 바로 선악체계지요.

왜냐하면 임금, 왕, 이 사람들은 메시아가 아니에요. 메시아는 대자연과 하나님을 연결시켜주는 분이거든요. 인간이 속한 대자연과 하나님나라가 뜻이 하나로 움직이도록 해주는 것이 중간에 메시아에요. 메시아는 다른 말로 기름 부은 자. 기름 부은 자 메시아가 이렇게 하나님 마음과 지상의 마음을 하나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그분만이 하나님 약속대로 실행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말라기 보겠습니다. 구약성경 제일 마지막 말라기 4장 6절에,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구약 마지막이 땅을 치는 것, 하나님의 폭력, 잔인한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끝나지요. 구약 마지막이.

그러면 그전에 대책은 뭐냐? 대책은 엘리야가 오는 거예요. 엘리야가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 엘리야에요. 예수님은 선지자의 완성이니까. 세례요한도 엘리야로 왔지만 온전한 엘리야가 아니었습니다. 참된 엘리야는 예수님이 됩니다. 그 엘리야는 모세가 명한 율례와 법도를 다 지킬 수 있는 분이 되어야 이 대자연과 하나님의 뜻이 하나가 되는 겁니다.

이걸 로마서 3장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화해 또는 화목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로마서 3장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이 말을 요즘 상황으로 바꿔 말하면, “모든 인간이 코로나에 걸렸으매” 그러니까 직업이라든지 남녀 성별 관계없이 바이러스가 들어가면 다 병에 걸린다 이 말이거든요. 모든 사람이 죄라는 바이러스에 걸렸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개인적으로 저 사람보다 착합니다, 저 사람보다 죄가 많습니다. 나는 N번방에 들어가 보지 않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인간과 인간의 차별할 수 있는 여지는 하나님 앞에서 통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선악체계는 통하지 않는 거예요. 선악체계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3)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화목이란 화해한다는 거예요. 하나님과 대자연이 화해한다는 것은 버스를 같이 해서 같이 움직인다는 뜻이에요.

제가 지난 어느 설교에서 경리사원 이야기를 했습니다. 경리사원이 자기 처지가 덫에 걸린 것처럼 답답하고 해결점이 없을 때에 어떻게 살았으면 좋겠느냐 할 때 욥 이야기를 하면서 하나님의 달과 내가 경리사원으로 있는 것과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일생을 보내야 된다. 해와 달과 별과 모든 것은 한 통속으로 움직이는 거죠.

그런데 해와 달과 별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만 생각한다면 자기만 억울한 것 같아. 맨날 억울한 것 같고 자기만 이 세상에서 고생 제일 많이 한 것 같고 자기는 고생 안 해야 될 존재가 하나님께서 뭔가 실수를 해서 자기한테만 구박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것처럼 그렇게 오해하게 되는 겁니다.

달의 표면은 곰보처럼 분화구가 많아요. 그렇다고 달의 은토끼가 불평하던가요. 나를 왜 이렇게 분화구고 화산이 터졌습니까, 이런 식으로 불평 안 하지요. 달은 달대로 별은 별대로 지구는 지구대로 있는 그대로가 하나님의 자비와 하나님의 화목의 뜻을 담고 있는데 유독 인간만큼은 악마의 제안을 받고 선악과 따먹어서 선악에 대해서 지가 안다고 해서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불평하고 반발하고 불만을 드러내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의 불평과 불만, 반항기 어떻게 되겠습니까? 없애야 되겠지요. 죽여 버려야 되겠지요. 전부 다 제거돼야 되겠지요. 제거하는 방법은 인간을 죽이면 되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선 고맙게도 하루씩, 하루씩 죽어가게 만듭니다. 없애버립니다. 죽을 때까지 반항하겠지만 그래도 없애버립니다.

인간이 두 개 겹쳐있다고 봅시다. 한 인간이 있고 뒤에 점선으로 돼있는 다른 분이 계시다고 봅시다. 인간은 점선으로 돼있기 때문에 다른 분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가 나라는 존재가 너무 강해요.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지요. 인간은 현존재가 있어서 자기 자리가 있다고. 타고나면서 자리가 있고 그 자리는 어떤 여망이 있다는데 여망, 기대는 누구의 자리를 탐낸다 했어요? 아버지의 자리를 탐내는 거예요. 이게 종교적이에요.

탐을 내면서 미안해하고 미안해하면서 또 탐내고. 감사하면서 또 미안해하고. 그러면서 아버지 자리를 포기 안 하려하고. 항상 목표가 거기 가서 자기보다 강한 것을 탐내지요. 어떤 사람 소원이 부장 자리가 탐이 난다. 자기에겐 아버지가 되겠지요. 어느 날 부장 되었다. 끝입니까? 부장 다음에 임원이 또 자기 아버지가 되는데. 임원 다음에 사장, 회장, 끝도 없어요. 인간의 욕망이란 계속 아버지 자리가 새롭게 생겨나면서 그게 탐심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인간이 신이 되고자 한다. 그렇다면 계속해서 신이 되더라도 멈추질 않아요. 악마가 제안한 것의 한계가 되는데 인간은 자기 자신에 너무 집착하고 사력을 다하여 자기 자신의 가치와 자존심을 지키려다보니까 뒤에 계신 주님의 존재를 느끼질 못하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방법은 뒤에 계신 분이 이쪽을 밀어버리죠. 무가치하다고 앞에 있는 것을 밀어버리는 겁니다.

밀어버릴 때 이게 만약에 주님 앞에 달이 있고 별이 있고 해가 있다면 달을 밀고 해를 밀고 별을 민다면 그들은 아무 소리 안 하지요. 그런데 유독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서 밀어버리면 인간만이 자꾸 불평, 불만을 하는 겁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오지요. 대구강의에서도 그런 것 한 적 있는데.

로마서 8장 17절에 보면, 성령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후사요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서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된다는데 왜 영광 받기 위해서 고난 받아야 됩니까? 18절에,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영광을 주려면 곱게 주지 왜 고난이란 걸 거쳐 가야 되느냐 말이죠.

그것은 하나님의 목표가 내가 신이 되는 게 목표가 아니고 내 뒤에 고난 받은 분이 계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이 땅을 고난 받게 하는 겁니다. 내가 신이 되는 것은 악마의 제안이에요. 하나님께선 우리가 신이 되는 걸 원하지 않아요. 예수님이 주가 되는 걸 목표로 하지 내가 주의 자리에 앉는 건 아니란 말이죠.

그런데도 우리는 악마에 의해서 예수님을 죽이고 가짜 예수를 그 자리에 심어놓는다든지 나를 예수님 자리에다 걸쳐놓겠다는 악마의 요구에 우리는 부응해서 내 잘난 맛에 내가 살아가는 거예요. 나는 점점 좋아지는 것으로 변화된다. 그 잘난 맛에 살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이걸 떠밀고 없애기 위해서 대자연을 동원해서 우리로 하여금 허무한데 굴복케 해버려요.

19절에,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허무한데 굴복한다는 것은 허무가 우리보다 더 세다는 뜻 아닙니까. 우리가 허무해야 된다는 말이죠. 허무하다고 해서 우리가 신자가 아닌 게 아니고 마땅하게 허무한 것을 아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주님한테 있음을 아는 성령 받은 성도가 되는 겁니다.

21절에,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썩어짐에서 해방된다는 말은 썩어짐이 당연하다는 뜻이고, 당연하다 할 때 그냥 당연하다하지 말고 이유를 알아야지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주님만이 옳습니다, 라고 고백할 때 앞에 뭐가 붙어야 돼요? 그냥 주님만이 옳습니다, 하면 주님만이 옳다고 주장한 나도 옳아져버리잖아요. 이런 건 아니란 말이죠. 이러면 생명체계가 아니고 선악체계에요.

앞에 뭐가 붙느냐 하면, 나는 아니고, 이게 있어야 돼요. “나는 아니고 주님만이 옳습니다.” 이렇게 돼야 되거든요. 나는 아니란 말은, 나는 악마로부터 출발했고 선악체계로부터 출발했는데 그것은 틀려먹었다, 아니란 뜻에서 고백하는 거예요. 나는 아니고 주님만이 옳습니다. 그러면 나는 아니라고 할 때 그러면 우리가 흉내 낼 수 있잖아요. “주님, 저는 아니고요 주님만이 옳습니다.” 하면 주님 뭐라고 합니까? “네가 왜 아닌데? 잘난 네가 왜 아니라고 하는데. 혹시 네가 이런 꼼수를 쓰는 게 아닐까?”

나는 아니고 주님만이 옳다고 하면 혹시 나는 이 고백으로 구원받는 게 아닌가, 라는 구원받는 근거를 만들기 위해서 내가 연출하고 연기하고 있지 않은가. 그럴만한 것이 인간이거든요. 나는 아니고 나는 부인돼야 되고 주님만이 옳습니다, 하는 식으로 결국 내가 나를 건지려고 하는 그런 얄팍한 수작을 부리는 거예요, 인간이.

그러면 달은, 그러면 해는, 별은 운명은 어떻게 되는데? 그러면 이런 수작부리는 나는 달과 별과 해에 대해선 모르겠고 그건 내 소관 아니고. 이렇게 돼버리는 거예요. 성경에 로마서 8장에서 말하는, 그리고 오늘 본문 시편 다시 봅시다. 시편 18편에서 이야기하는 여기에 다윗 하나 건지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대자연을 총동원시키는 겁니다.

어떻게 신기하지 않습니까? 참 신기한 이야기지요. 성경을 보게 되면 참 신기해요. 18편 8절에 보면, 그 입에서 불이 나오고 불의 숯이 피고 그리고 하늘을 드리우고 강림하시고 천사들도 동원되고 바람까지 불고. 15절에 아까 이야기했듯이 꾸지람과 콧김을 인하여 물밑이 드러나고.

여기 17절에 보면, “나를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지셨음이여 저희는 나보다 힘센 연고로다” 그러니까 원수가 나보다 더 세니까 나는 어떤 노력을 해도 원수 바깥으로 못 빠져나오고 같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음을 다윗은 고백하고 있는 거예요.

사태를 왜 이런 식으로 봐야 되느냔 말이죠. 아까 이야기한대로 성경을 이용하려하지 말고 성경 속으로 들어가세요. 시편 18편 속에 들어갑시다. 속에 들어가게 되면 바깥에서 보면 내가 여기 있고 해 있고 별 있고 달이 있다. 산이 있고 짐승이 뛰어놀고 같은 사람들이 있다. 건물이 있다. 집에 오면 자식들 있고 친구들 있고 교회 있고. 끝이잖아요.

제가 물을 테니 보시길 바랍니다. 자, 우리가 그냥 보게 되면 달, 별 있고 자연 있고 나 있고 친구 있지요. 그럼 묻습니다. 여기에 나의 원수가 어디 있습니까? 여기에 악마가 어디 있어요? 악마 없지요. 그러니까 인간들의 성경을 보면서 성경 속에 들어가야 되는데 성경을 그냥 대상으로 보니까 성경에서 악마라 하니까 도대체 자기가 생각하는 자기가 구상한 세계 속에는 악마는 없어요.

악마 같은 인간은 있겠지. 나를 해롭게 하는 건 있겠지만 악마가 없다니까요. 하나님의 원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이상해. 성경에는 원수가 어디 있다는데 내가 본 성경은 이 세상은 악마가 없고. 뭐가 잘못된 거야? 본인이 잘못됐지요. 본인이 잘못된 거예요. 성경 속으로 들어가야 돼요. 성경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어느 정도 어려우냐? 마치 거울 속으로 들어가는 것만큼 어려워요. 거울 속에 들어가기 전에는 내 잘난 모습만 보이겠지만 거울 속에 들어갔다면 하나님의 진노 안에 들어간 거죠. 하나님 세계 안에 들어간 겁니다.

물어봅시다. 천국은 내 세계입니까, 주님 세계입니까? 주님 세계지요. 내 세계 아니지요. 그러면 천국 가기 전에 내가 만든 현실은 내 세계에요, 주님 세계에요? 이게 주님 세계 되려면 악마가 있어야 되고, 내 세계라면 악마가 없어야 돼요. 주님의 원수가 없어야 된다고요. 그런데 우리는 평소에 악마를 못 느끼고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게 필요한 것만 챙기니까 이게 주님이 계신 것이 아니고 내가 있는 곳이죠.

따라서 성경 속으로 들어가야 된다 이 말이죠. 성경 속으로 들어가면 천국은 내 세계가 아니고 주님의 세계기 때문에 천국 가기 전에 내 세계는 박살나야 되지요. 나를 위한 세계, 내가 잘났다고 나를 칭찬해주는 세계는 천국 가기 전에 박살나야 되지요. 그래서 베드로가 주님을 배신한 겁니다. 그게 코스에요. 정 코스입니다.

박살나는데 내가 내 가슴을 칠까요? 아니요. 대자연이 나를 쳐줍니다. 대자연 배후는 천사가 있고 천사 배후에는 하나님이 있고. 그중에 하나가 신종 코로나에요. 내 세계에서 신종 코로나는 없었어요. 작년까지 신종 코로나 없었습니다. 중국의 우한에 나타날 때까지는 신종 코로나 몰랐어요. 어떤 과학자도 몰랐어요. 그래서 과학자들이 한계가 있는 거예요. 있는 것만 알지 없는 것은 모르는 거예요. 그러던 것이 점령하니까 내 세계 속에서 신종 코로나에 대해서 그렇게 반항하고 고함지르고 못 살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나 만약에 시편 18편에 들어가 있다면, 신종 코로나가 됐던 아까 같이 우박이 내리든 그리고 하늘에서 불 심판이 내리든 그것은 너무나 당연지사에요. 너무나 자연스러워요. 이 세상에 별이 빛을 잃고 달이 빛을 잃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 그건 너무 이상한 일이 아니고 성경 내용대로 한다면 당연히 일어날 일입니다.

아담 때문에 같이 망했다는 겁니다. 우린 모르는데 별이 알려주고 달이 알려주고 신종 코로나가 알려주는 거예요. 너, 문제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선악체계에 있다는 자체가 망했다는 거예요. 죽어 마땅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 위주로 개인적 위주로 하나님을 거론하고 예수님을 거론해선 안 된다는 이야기를 제가 드리고 싶네요.

여기에 17절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나를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지셨음이여 저희는 나보다 힘센 연고로다” 여기 경리사원이 있었고 달이 떴다고 합시다. 지금 이 사람은 반항하고 반발하지요. 달은 반발하지 않습니다. 달은 자기가 무너지고 빛을 잃고 망한다는 것을 이미 알아요.

피조세계는 아담이 범죄 함으로 아담이 악마의 말을 들음으로 이 우주 자체가 마땅히 망해야 된다는 것을 달도 별도 알고 코스모스도 알고 날은 날에게 지식을 전하고 밤은 밤에게 다 정보를 알고 있어요. 인간만 악마에 찌들어 모를 뿐이지 다른 덴 다 알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언약이 왔다. 하나님의 성신이 임했다.

그러면 나 자신이, 첫째, 망해야 마땅함. 두 번째, 그 원인은 바로 주의 원수가 그런 짓했음. 세 번째, 나는 주의 원수를 내 힘으로 이길 수 있다, 없다? 없다. 정신 차리세요. 집중하세요. 나에겐 주의 원수를 이길 수 없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시편 18편 17절의 말씀이에요. 못 이기는 거예요. 이길 수 없어요.

그리고 네 번째가 중요합니다. 악마한테 이길 수 없잖아요. 악마한테는 못 이기는데 아직까지 밥은 먹고 산다. 그럼 이건 어디서 온 겁니까? 주님의 은혜에요. 주님의 선물이고 주님이 살려줌이에요. 주님한테 고맙지요. 우리가 자기 자신이 이 정도로 무능함을 알아야 모든 것이 감사가 되고 기쁨이 되는 거예요.

자기 잘난 맛에 살게 되면 주님께 돌아갈 모든 영광과 찬양을 본인 잘난 맛에 살아간다니까요. 주님을 증거 하는 게 아니고 주님께 구원받았다는 본인 자신을 맨날 집착하고 그걸 증거 하다보니까 그게 뭐냐 하면, 악마의 술책이고 악마의 전략이거든요. 왜? 주님의 공로를 가리기 위해서 지 잘난 맛에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이 말이 화나면 화내세요. 오히려 화 안 나면 안 내면 돼요. 주의 원수, 악마한테는 못 이깁니다.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시편 18편 17절에 의해서 우린 못 이겨요. “저희는 나보다 힘센 연고로다 저희가 나의 재앙의 날에 내게 이르렀으나 여호와께서 나의 의지가 되셨도다” 재앙의 날에, 그러니까 해와 달과 모든 것의 초점이 하나님께서 잔인하고 폭력적으로 이 세상을 아주 망치려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은 뭐냐? 이 세상이 망하는 거예요. 간단하지요. 쉽지요.

노아 홍수 때 언약이 왔다. 언약이 왜 왔겠습니까? 이 세상 망하려고 온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언약이죠. 무슨 뜻입니까? 이 세상 망했다는 겁니다. 이제부터 망할 수순에 들어간다는 겁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그걸 보여주는 거예요. 그게 요한계시록입니다.

19절에 보면, “나를 또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심으로 구원하셨도다” 여기서 구원 앞에 붙는 중요한 단어가 나와요. 구원을 빨간 걸로 쓸게요. 구원 앞에는 이게 나와요. 주님의 기쁨. 이미 우리는 악마한테 못 이깁니다. 악마한테 못 이기는 것을 변명이나 핑계대면 안 돼요. 우리는 조상부터 못 이기기 때문에 못 이긴 거예요. 망해야 되는 것 맞아요.

그런데 구원, 다른 말로 구출이지요. 구출이란 무엇이 들어와야 되느냐 하면, 주님의 기쁨이 들어와야 구출이 돼요. 주님의 기쁨이란 나의 기쁨이 아닙니다. 구원받고 난 뒤에 내가 기뻐하는 것은 구원받은 나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기쁨이 쓰레기 같은 내 안에 들어와서 주님의 기쁨이 드러나니까 그것이 나의 기쁨으로 보이는 것이지 내가 만약에 기뻐한다면 처음부터 노리는 바가 있어요.

“나 비록 죄인이지만 구원돼야 돼.” 이게 말이 됩니까? 내가 죄인 되었으면 망해야 되지요. 어떻게 죄인 되었는데 구원돼야 돼. 어떻게 이 공식이 성립됩니까? 이 공식은 성립 안 돼요. 별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죽었으면 몰라도 하나님이 살아 계신데 죄의 값은 저주인데 저주받아야 되지 어떻게 저주받아야 될 인간이 구원을 기대합니까?

이 죄란 분명히 생명체제가 아니고 선악체제에서 나오는 악마의 발상이란 말이죠. “죄인 되었지만 뭔가 봐줄 거야.” 이런 것 있잖아요.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고요. 죄인 되었으면 죽어야 되는데, 그렇다면 아까 공부한 걸 다시 해봅시다.

죄인 되었으면 죽어야 되는데 인간이 주님의 기쁨으로 기뻐하지 않고 내 구원받은 걸 기뻐한다면 처음부터 뭔가 내가 안 죽고 내가 죽어야 돼, 지옥 가야 돼, 그런 생각은 그냥 폼으로 위선적으로 내뱉은 말이고 사실은 인간이 뭘 노리고 있다? 아까 신의 자리, 영원한 구원받을 자리를 은근히 노렸는데, “하나님께서 주의 원수를 이기고 십자가로써 구원해준데. 그렇지. 그럴 줄 알았어. 하나님이 그렇게 착한 분인 줄 알았어.”

이렇게 돼버리면 이거는 처음부터 노렸던 내 노림수가 통했다는 이야기 밖에 안 돼요. 이것은 나의 노림수에 대한 나의 찬양입니다. 나의 의도에 대한 찬양이에요. 마치 악마가 집어준 체계, 논리적 시스템이 맞아떨어졌다고 지가 좋아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인간의 모든 시스템, 사고의 프레임 모든 것은 우리 것이 아니고 악마가 집어넣어준 겁니다.

다시 말합니다. 인간의 모든 논리는 악마가 준 거예요. 악마가 준 프레임이에요. 체제, 시스템이란 말이죠. 그 시스템에서 하나님께선 화를 내지만 언제까지 화내겠어. 봐줄 것은 봐줄 거야, 라고 악마가 부추긴 겁니다. 그러한 꼼수에 우리 주님이 놀아나지 않습니다. 내가 언젠가는 잘된 날이 올 거라고 기대한다는 자체가 전적으로 내가 죄인 건 아니야. 선악과 따먹었다고 생명나무에서 추방된 것은 너무 심한 거야. 선악과 따먹어도 다시 구원될 날 있을 거야. 선악과 따먹어도 생명나무 따먹을 거야.

지가 지 마음대로 지어낸 있지도 않은 이론을 끄집어내서 언젠가 생명나무 따먹는다는 것은 악마의 수작이고요.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가는 길 막았잖아요. 인간이 스스로 그러고 싶은 거예요. 왜? 악마의 마음이니까. 인간은 악마로부터 출발해야 된다고 했지요. 악마의 마음이 죄인이지만 구원될 거야, 라고 기대하니까 종교가 발생된 거예요. 그 종교가 뭐냐? 신이 누리는 좋은 자리를 내가 뺏고 싶은 거예요. 라이벌로 여기면서.

주님의 기뻐하심으로. 주께서 나를 보고 기뻐하신 거예요. 19절에. 그러니까 이것은 전적으로 기뻐하지 않아도 되는데 기뻐해주시는 그 고마움에 화들짝 놀랐다고 할까요, 충격이라 할까요, 이것은 예상 못한 일이죠. 악마에 눌려서 맨날 하는 일이 하나님께 반발하고 불평하는 일밖에 안 하는데 그런 인간을 버려도 되는데 하나님께서 구원을 해줬기 때문에 자기가 윤리적으로 얼마나 착하냐, 그런데도 신경 쓸 여유가 없지요. 오직 천하의 죄인을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찬미할 뿐입니다.

여기 20절에,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좇아 갚으셨으니” 여기서 나란 다윗이지만 동시에 뭐가 되느냐? 장차오실 예수님이 되는 겁니다. 이것도 약간 설명이 필요한데 구약의 다윗 입장이나 오늘날 우리 입장이나 똑같아요. 아까 그림을 다시 해보겠습니다.

내가 여기 있고 점선으로 주님이 함께 있어요. 우리는 육신에 있어요. 주님도 육신에 있지만 같은 육신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19장에서 나를 만지지 말라 했으니까 같은 육신이 아닙니다. 전혀 달라요. 우리가 주님 만나면 죽듯이 다르단 말이죠. 다윗도 마찬가지에요.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 다윗이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다윗 속에 있는 그리스도께서 다윗을 통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보기에는 다윗 본인 이야기인데 성경적으로 보게 되면 예수님 본인의 이야기를 앞당겨서 예수님 오시기 전에 다윗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예수님 자신의 계획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예수님도 구원받아야 돼요. 예수님도 죽었잖아요. 이 땅에 오게 되면 예수님도 구원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아버지께서 사흘 만에 예수님을 구원했습니다. 그게 성립돼야 그 계통으로만 그 방식으로만 우리가 구원돼요.

죽어야 구원되지요. 죽을 뻔해서 구원되는 게 아니고. 아이고, 혼났다. 이래서 구원되는 게 아니고 정말 죽어야 정말 부활돼요. 그럼 우리가 자살할까요? 자살할 필요 없어요. 왜냐하면 선악체계 자체가 이미 죽음이기 때문에.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 자체가 이미 죽어있다는 증거입니다. 내 몸을 챙겨서 나를 악한 사람 말고 선한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시도, 내가 선한 사람 꼭 되고 말리라. 그래서 그 선의 극치, 신이 되고 말리라. 점점 신에 가까이 가고 있다. 나는 기분 좋다. 이 자체가 이미 죄로 인하여 죽은 티를 내고 있는 거예요. 이 자체가 죽은 모습이다.

생각해보세요. 자기가 선하기 때문에 만약에 어떤 사람은 코로나 때문에 보조금 주는데 사십만 원 갖고 있고, 그리고 어떤 사람은 의료보험료 구만 오천 원 냈다고 못 받을 때 기분 좋다. 그것도 못 받느냐. 이게 기분 좋아할 문제 아니잖아요. 왜 나는 마땅히 돈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남은 죽더라도 나는 살아야 될 가치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이게 뭐냐? 남보다 내가 선하다는 의식이 깔려있기 때문에 이런 생각 드는데 남보다 선하다는 게 나쁘다는 뜻이 아니고 그 선악프레임, 그 시스템 안에서 놀고 있다는 자체가 악하다 이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비행기에서 낙하산 지고 뛰어내릴 때 초짜는 혼자 뛰어내리는 게 아닙니다.

이벤트 성으로 뒤에는 진짜 낙하전문가가 있고, 행글라이더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사람이 한 조가 되어 뛰어내리지요. 뛰어내릴 때 뒷사람이 낙하산 펴주고 다 해줘요. 그러면 내가 낙하산 핀다고 설치면 자칫하면 뒷사람이 분리될 수가 있어요. 분리되면 나 혼자 죽어버리잖아요. 그래서 주님께서 딱 붙어서 할 때는 선악체계 자체를 우리 힘으로 못 떼어내요. 원수가 우리보다 세기 때문에 이 사고방식에서는 우리 힘으로 안 떨어져나갑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 자체를 죄라고 지적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잘난 나 말고 주님의 덕분으로 주님께서는 보조금 사십만 원을 안 주게 하셨다. 또는 주게 하셨다. 하루하루 살게 하셨다. 이런 것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주님이 주신 기쁨이에요. 주님께서 일 해놓고 주님이 한 상을 우리 상으로 넘겨주는 겁니다. 한 몸이기 때문에.

21절에, “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하게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다 예수님 이야기에요. “그 모든 규례가 내 앞에 있고 내게서 그 율례를 버리지 아니하였음이로다 내가 또한 그 앞에 완전하여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지켰나니” 전부 다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에요. 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선악체계 자체가 죄기 때문에 스스로 선악체계를 못 벗어나기 때문에 벗어나신 분은 예수님 밖에 없는 거예요. 구약에 시편 18편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갚으시되 그 목전에 내 손의 깨끗한 대로 내게 갚으셨도다”(24절) 누가? 하나님께서.

처음에 했던 이야기를 다시 해보겠습니다. 강의 오래하면 잊어버리니까. 언약이 통한다는 말은 생명나무와 통하지요. 이제 이 논리가 들어올 거예요. 언약에 위반되어서 하나님이 진노한다는 것은 생명나무가 아니고 선악체계지요. 그러나 인간의 시작은 무엇으로부터 합니까? 인간의 시작은 생명으로부터 못하지요. 쫓겨났으니까.

선악체계로 시작하니까 인간이고 모든 피조물은 자연적으로 쓰러질 수밖에 없어요. 후패할 수밖에 없어요. 썩어짐에 종노릇할 수밖에 없어요. 저주 아래 있어요. 보조금 받으나 안 받으나 사는 게 힘들어요. 신종 코로나 물러가면 더 센 게 와요. 사는 게 힘들어요. 죽지 못한 게 한이 맺힐 정도로 힘들어요.

그런데 생명나무는 어떻게 얻느냐 하면, 그냥 주는 게 아니고 어떤 분이 오셔서 여기 있는 선악체계를 다 이루고 난 뒤에 율법을 다 이루고 난 뒤에 생명나무로 가요. 왜? 생명나무를 만드신 분이 주님이기 때문에. 생명나무의 의를 다하기 위해선 예수님은 여기서 필히 어떻게 되느냐 하면, 선악과 따먹으면 죽으리라 했으니까, 필히 죽어야 되는데 어떤 죽음이냐 하면, 죄 없이 죽는 거예요. 의인인 채 돌아가신 거예요.

의인이 돌아가시니까 언약의 원리는 의에 대해서 죽이는 것이 아니고 살리는 것이 생명나무의 원칙이기 때문에 살려주시는데 여기에 예수님과 같이 한 통속이 된 성령을 통해서 하나 된 사람은 선악체계에서 같이 통과하다보니까 그 사람도 생명을 얻고 영생을 얻는 겁니다. 의인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지만 남의 이야기는 아니지요. 예수님의 이야기가 우리한테 전가되는 선물로서의 예수님이기 때문에 이 예수님이 곧 누구 이야기냐? 우리가 받은 선물, 혜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25절 봅시다.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슬리심을 보이시리니” 이렇게 할 때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슬림이 보이죠. 주님 살아 계시지요.

그럼 앞에 시편 18편에 하나님의 진노는 무엇이며, 13절에 뇌성과 우박을 내리시고, 15절에 여호와의 꾸지람과 콧김이 뭐예요? 이건 누구한테 하는 거예요? 사특한 자에게 하나님이 거슬림을 나타낸다면 결국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진노와 꾸지람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겁니다. 그러면 깨끗하지 않은 자에게 이미 악마의 제안을 넘겨받아 더럽게 된 선악체계로 자기가 인간이라고 우기는 더러운 악마의 품성을 갖고 있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거슬림을 나타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네가 고생하고 아프고 늙어죽고, 그것은 당연하다는 겁니다. 굶어죽고 병들어 죽는 것은 당연한 거예요. 망대가 무너져서 18명 죽는 것, 너무 억울해하지 말라는 거예요. 세월호 지 자식 빠져죽은 것 너무 억울해하지 말란 말이죠. 대자연의 실수라는 그런 소리하지 말란 말이죠. 당연한 거예요. 성경에 보면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기 때문에.

그 다음에 27절 보겠습니다.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에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 넘나이다” 전부 다 이건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하셨던 일이고 우린 그 혜택을 입을 뿐이에요. 따라서 나는 십자가만 믿는다 하지 마시고 도대체 주님께서 무슨 일을 지금 벌이고 있는가? 이런 일을 하신 거예요. 완전한 일, 깨끗하게 하시는 일.

30절 봅시다.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정미하니” 정미란 정확하고 빠짐이 없이 요소요소에 다 개입하시니, 이런 뜻이거든요. 어느 경우라도 주의 말씀과 무관한 경우는 없어요. 해가 뜨나 달이 뜨나 경리사원이 어렵게 쳐하나 어떤 경우라도 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 되게 하기 위해서 꼭 일어나야만 하는 일을 우리가 지금 겪고 있습니다.

32절에, “이 하나님이 힘으로 내게 띠 띠우시며 내 길을 완전케 하시며” 이 말씀을 설명해야 되겠습니다. 지금까지 한 걸 복습해볼게요. 인간은 성경 속으로 들어가기 전에는 홀로 돼있어요. 그런데 성령을 통해서만 갈 수 있는데 성경 속으로 들어가 보니까 성도한테는 홀몸이 아니고 옆에 점선으로 누가 계시다 했습니까? 주님이 계시지요.

주님이 계시니까 우리도 한 고집하지만 주님은 우리보다 더 세지요. 왜? 우리보다 더 센 원수로부터 이겼으니까 주님은 우리를 장악하는 악마보다 힘이 더 세요. 그래서 주께서 우릴 인도할 때 어떻게 하느냐? 완전한 길로 인도해요. 완전한 길이 뭐냐 하면, 주님의 길이죠. 주님의 길은, 주님 가신 길, 무슨 길? 십자가의 길.

빌립보서 3장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내 가는 길에 뭐가 보인다 했습니까? 십자가가 보이지요. 참 성령 받은 사도 바울이 십자가만 보인다 하는데 어떻게 성령 받았다고 우기면서도 십자가 말고 딴 게 변화된 잘난 자기 자신이 보인다 하니까 이게 어떻게 주께서 인도하는 길인지. 그건 아니거든요.

완전한 길은 내가 착한 게 완전한 길이 아니고 내가 얼마나 철저하게 죄인인가를 날마다 더욱 더 느끼는 길이 완전한 길이에요. 높아지는 게 아니고 낮아지는 것, 뚝 떨어지는 길이 완전한 길이에요. 나는 인간도 아니었구나. 그 점을 나만 몰랐네. 천사도 알고 주님은 아는데 나만 내가 잘난 줄 알았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욥의 경우를 봅시다. 욥이 처음에 자식 열 명 있고 부자 되었고 착하다고 하늘나라에 소문났지요. 그런데 욥이 중간에 고통 속에 들어가지요. 욥이 고통 속에 있으면서 하나님께 불평과 불만을 하지요. 욥은 혼자 있는 거예요, 지금. 그런데 혼자 있는 게 아니고 같이 있다면 나중에 욥에게 하나님이 나타날 때 욥은 뭘 느낍니까? 내가 그런 자식 죽고 재산 날아가는 길이 무슨 길이다? 그게 바로 제대로 된 길이고 완전한 길이에요.

이걸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에 보면, 범사에 감사한다. 또는 같은 말로 무시로 감사한다. 시도 때도 없이 감사한다, 기도한다. 이게 같은 말입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가 살면서 감사가 나오거든 주께서 인도한다보고, 불평이 나온다. 뭐 떡국에 만두를 안 넣었냐는 식으로 불평이 나오면 이거는 또 정신을 같이 다이빙하는데 주님은 안 보고 낙하산을 지가 조종하려고 설치는 거예요.

왜 인간은 자기 인생 길 자기가 갈까요? 그동안 살아온 모습이 선악체계 속에서는 남들이 나를 뭐가 선하고 뭐가 악하다고 평가하고 비평하는 보는 눈들을 의식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은 뭘 보느냐? 아버지의 자리, 신의 자리가 탐이 나는데 다른 사람들이 아버지 자리에 대해서 갖고 있는 높은 자리, 귀한 자리를 탐하다보니까 남들이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어요.

나, 이 정도 됐는데 아버지 자리에 앉은 것 맞지? 나, 무시 안 당해도 되지, 라고 자꾸 남한테 묻고 남들은 그걸 또 어떻게 평가하는지 기대하고. 이게 바로 주님 품 안에 있는 탕자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예요. 탕자가 왜 아버지의 재산을 미리 빼돌려서 가출했습니까? 그건 되고 싶은 것이 집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집밖에 있기 때문에 집밖에 지 마음대로 혼자 살고 싶은 거기가 좋은 세상인 줄 알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와보니까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이 원래 좋은 것이라는 것을 함께 있을 때는 몰랐는데 가출했다 오니까 아는 거예요. 완전한 길이란 십자가의 길입니다. 이게 좁은 길이에요. 그 십자가 가는 길 증거는 뭐라 했습니까? 범사에 감사하는 거죠. 그러니까 고맙습니다, 란 말,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는 거예요.

그렇게 감사하고 하니까 그 다음에 살아가는 것이 펄펄 납니다. 33절에 보면, “나의 발로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전사가 되지요. 하나님의 싸움꾼이 되는데 이제는 날아다니며 싸움을 해요.

“주께서 또 주의 구원하는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들고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내 걸음을 넓게 하셨고 나로 실족치 않게 하셨나이다”(35,36절) 실족치 않게 하셨다는 말은 늘 실족을 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나 혼자. 늘 실족을 하는데 뒤에 주님께서 실족한 것에서 빼내주니까 나를 실족치 않게 하신 공로가 주님한테 있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애초부터 실족치 않는 게 아니고 늘 실족케 하는 감사가 없고 불평케 하는 일들을 대자연을 통해서 일으키시는 겁니다.

그 다음에 37절에 보면, “내가 내 원수를 따라 미치리니 저희가 망하기 전에는 돌이키지 아니하리이다” 원수를 공격한다 이 말이죠. “내가 저희를 쳐서 능히 일어나지 못하게 하리니 저희가 내 발 아래 엎드러지리이다”(38절) 여기서 원수에 대한 감각이 생깁니다. 악마가 어떤 존재인지 성도만 알지요. 이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악마의 정체에 대해서 첫 번째, 선악체계로 악마를 아는 것과 두 번째, 생명체계 안에서 악마를 아는 것과의 차이점을 보겠습니다. 선악체계에서 주인공은 누굽니까? 나지요. 나를 해롭게 하면 다 악마에요. 내 돈 사기 치고, 우리 가족을 힘들게 하고, 내 자식을 왕따 시키고, 학교폭력으로 자식이 죽을 때는 악마로 보이는 겁니다.

참 이게 모순되는 게 어떤 아저씨가 있는데 젊을 때 나를 평생 먹고 살도록 좋은 회사에 취직시켜줬어요. 어떤 분이 저한테 왔는데 제가 물었어요. “집사님, 직업이 뭡니까?” 나이가 50 중반 쯤 되어보여서 잘리지 않았는지 했는데 자기 회사 너무 좋다는 거예요. 사장님도 너무 좋다는 거예요. 부동산회사 다녀요.

어떤 아저씨가 있는데 나를 좋은 회사에 취직시켜줬어요. 그 때문에 가족 네 식구가 평생 경제적 어려움 없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저씨가 자전거 타고 가던 내 아들 팔을 부러지게 했다. 자, 계산 들어가지요. 그러니까 선악체계는 뭐냐 하면, 이게 계산이 가능해요. 평생 취직시켜준 것을 80으로 본다면, 그리고 아들 팔 부러진 것은 20이라면, 80-20이니까 아직도 60만큼은 은혜가 남아있는 거예요. 수치적이고 수량적으로 계산되는 게 선악체계에요.

어느 게 선이냐? 나한테 잘되면 선이고, 나한테 못되면 악이기 때문에 만약에 어떤 사람이 돈 백만 원 빌려줘 놓고 내 아들을 폭행했다면 그것은 백만 원 빌려준 선은 30이라면 내 아이 때린 것은 50으로 빼면 그 사람이 싫은 거예요. 그 다음부터 나의 악마가 돼버려요. 선악체계는 항상 감사하라 고맙다는 것을 계산으로 따져서 취직까지 시켜줬는데 아들 다친 것, 그냥 넘어가자. 그 할아버지가 평생 먹고 살게 했다. 이렇게 되면 넘어가는 거예요. 그 할아버지는 악마가 안 돼요. 그러나 선이 넘쳐버리면 악마가 돼버리는 겁니다. 이게 선악체계의 악마에요. 그러니까 얼마나 엉망진 악마에요.

그러나 생명체계는 뭡니까? 이런 계산이 안 돼요. 무조건, 무조건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나에게 빼앗아 가면 그게 뭐가 돼요? 악마가 돼요. 내가 내 악마에요. 내 불평과 내 불만이 주님의 십자가, 내 옆에 낙하산 쥐고 같이 나를 완전한 길로 인도하시는 주님을 발로 차고 때리고 주님 때문에 망했습니다. 이게 바로 내게서 뿜어 나오는 악마의 정체가 되는 겁니다.

다윗으로 머물지 않아야 될 이유를 알겠지요. 시편 18편은 다윗에 머물지 않습니다. 다윗의 예언대로 다윗의 말씀대로 고백대로 오실 분이 와야 돼요. 다윗이 메시아가 아니라 예수님이 시편 18편대로 움직이는 메시아가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시편 성경 속으로 들어가게 해주옵소서. 성경을 이용하려고 하지 말고 그 안에서 악마가 있고 주님이 있음을 발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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