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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200403b 울산강의-레위기 25장 : 값 치름자유게시판레위기

20200403b 울산강의-레위기 25장 : 값 치름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희년의 취지는 하나님에 원래 상속한 땅으로 항상 50년째 되거든 되는 날을 기준해서 돌아가라. 그럼 50년 되기 전에 땅을 팔았으면 어떻게 되느냐? 팔았으면 땅을 산 그 사람에게도 손해 끼치지 말고 값을 쳐주고 땅을 팔아먹었지만 그 땅을 다시 하나님께 상속받은 네 땅으로 돌아오너라.

원래 땅이 하나님 주신 땅이기 때문에 내 땅이 아니고 하나님의 땅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것이 이것이었습니다, 라고 고백을 하란 말이죠. 그게 뭐냐?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하나님의 약속이 포함된 하나님의 기준점이 우리 안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걸 다시 원상복귀 시키는 것을 무른다고 합니다. “물어내라. 내 거잖아. 근데 네가 왜 갖고 있어. 물러 내.” 이럴 때 무른다는 이야기를 하죠.

레위기 25장 23절에 보면 이렇습니다.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그 토지에서 농사짓고 있는 이스라엘은 뭐냐? 레위기 25장 마지막 55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품꾼이 됨이라” 일종에 임대차 계약한 거죠. 품꾼이란 일꾼이지요. 땅주인 따로 있고 남의 땅에 일해서 품삯 받고 빌어먹는 자, 이게 바로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특징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 자체적으로 나는 내가 주인이 아니다. 참 이거. 사람이 자기가 주인 노릇하게 되면 여기서 평가와 판단을 하게 돼있어요. 그때 전제로 깔려있는 것은 나는 주인이다. 어디까지나 계속해서 영원히 나는 내게서 주인이다. 내 인생 내 마음대로 할 권리, 권한이 있다. 그런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이 말은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한다. 내 인생이니까 내가 최종 책임자로서 알아서 하겠다.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내 인생이니까 간섭하지 마라. 그러한 사상이죠. 이걸 나에게는 나밖에 없다. 또는 나에게 있어 내가 최종 의미를 지닌다. 나에게 있어서 내가 제일 중요하다. 도대체 이런 사상 이런 생각들이 지극히 당연해보이지만 성경으로 봐서는 이게 바로 지옥 가는 인간의 모습이에요.

왜냐하면 악마가 인간에게 선악과 따먹을 때 이런 사고방식을 집어넣은 거예요. 옛날에 아담과 하와를 이용했던 뱀을 나는 본 적이 없다. 본 적이 없으니까 나는 악마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고 주장 못해요. 본 적은 없지만 이미 이런 사고방식으로 살아간다는 자체가 네 속에 악마 있고 귀신 있다는 말입니다. 정상이 아니에요. 정신병 환자로 보면 됩니다. 마귀 들린 거예요. 귀신 들린 겁니다. 이렇게 산다는 게.

그러나 모두 다 이렇게 사니까 전부 다 자기가 정상인 줄 알아요. 모든 인간이 이렇게 살아가니까 이렇게 안 살면 정상인 줄 알고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일방적으로 속고 있는데 이것과 달리 이스라엘의 특이성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의 노예라는 겁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라는 겁니다. 빌어먹고 사는 거예요. 그걸 광야에서 이미 배웠잖아요. 체험했잖아요.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고 솜씨가 있고 해도 인간은 만나 없이는 못 산다. 이미 체험한 겁니다. 만나 없이는 못 산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위에서 뿌려주지 않으면 못 산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없이는 우리는 못 산다. 살 수 없다. 그래서 나의 생존은 사실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겁니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내가 살아있다는 것으로 의미를 종결하지 마시고 주님이 계시니까 내가 살아있다고 이해를 해주셔야 돼요.

그래야 성경에서 광야라는 의미가 있지요. 성경에서 보통 기적들이 나오는데 사람들은 기적 따로, 율법 따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주어졌다는 이 자체가 기적의 집대성이에요. 율법=기적의 집대성. 기적을 다 끌어 모으면 바로 율법이 있다, 말씀이 있다는 겁니다.

다니엘서 5장에 보면, 벨사살 왕 때 손가락이 나타나서 글을 쓰지요. 그 글로 인하여 바벨론 나라의 운명이 결정되는 겁니다. 국가의 운명도 주님의 글씨에 달렸어요. 하물며 나의 운명도 하나님의 법에 달려있습니다. 말씀에 달려있어요. 모든 인간은 풀의 꽃 같이 떨어지게 마련이지만 영원히 떨어지지 않고 유지되고 존속되고 실현되는 것은 오직 여호와의 말씀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오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현실로 살아 움직이게 하는 그것이 바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에요. 그 말씀의 완성이 새 언약이고,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고 했고 그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죠. 따라서 성령이 우리에게 일으키는 것은 그 완성된 모든 말씀의 완성상태인 십자가를 계속해서 반복해서 일으키는 겁니다. 나는 죽었고 주님은 살았고, 다음날 되면 또 나는 죽었고 주님은 살았고.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내게 일어나는 모든 현상과 사건들은 내가 의도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유발시킨 일들이 반복해서 일어나는 그런 사건들로 채워지는 나날들, 이게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걸 아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품꾼이라 하는 것은 이 땅에 소유권은 따로 있고 그 소유된 분으로부터 온 혜택을 입으면서 나는 살고 있다, 라고 할 때 인간이 같이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쪽은 이 기준점을 아는 거예요.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기에 주인 됨을 드러내기 위해서 나는 살아있다고 하는 것과 내가 주인이고 내가 알아서 내가 산다고 살아있는 것과 인간들에게는 동일하게 보이지만 동일한 것이 아니고 그야말로 천국과 지옥으로 분리되죠.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은 내어버려두는 것과 그리고 취하는 사렙다 과부를 찾아가듯이 찾아가서 데려오는 그 작업이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기준점이 되어서 계속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레위기 25장 23절을 다시 보게 되면,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이렇게 돼있어요. 토지는 내 것이라 해서 인간이 사적인 자기만의 재산을 갖는 것을 주께서는 부정하지 않습니다. 인정합니다. 그러나 내가 공들여서 얻는 재산이 곧 내 것이라는 건 맞는 말인데 그게 나다, 이렇게 돼버리면 안 된다는. 재산이 곧 나다. 다른 말로 하면, 소유가 있는 것이 나다. 나는 소유를 지닌 채로 나는 나답다. 이렇게 되면 이건 안 된다.

소유의 마지막을 나로 마감시키면 안 되고 소유를 내가 가졌지만 나는 또 누구의 소유다? 주님의 소유가 된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만약에 내가 소유의 마감이 되고 의미의 마감이 돼버리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누구 영광을 위해서? 내 잘났음을 드러내는 증거물로서 활용이 돼요.

“너는 팔십 평생 살면서 재산 얼마야?” “나는 10억이요.” “와아.” “너는 얼마야?” “빚이 5억이야.” 이러면 네 인생 질이 떨어졌구나, 이렇게 이야기한다고요. 그러나 우리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알듯이 거지가 아무것도 없을뿐더러 죽을 때까지 아무것도 없었고 몸도 아팠어요. 하지만 그런 거지조차도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겁니다. 그것을 거지 나사로는 알았고, 부자는 자기의 소유됨이 곧 나가 되는 그걸로 의미가 마감되었어요.

그러니까 부자는 지옥을 알아서 지옥 가는 게 아니고 천국을 몰라서 천국 몰라서 천국 못 가는 게 아니라 천국, 지옥을 아나 모르나 상관없이 모든 의미는 나 좋으라고, 나는 내가 소중하다고 의미가 마감되었기 때문에 지옥 간 거예요. 지옥은 이처럼 지 잘난 척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게 이방민족이고.

그래서 이스라엘한테는 이방민족과 달리 하나님의 이런 소식, 토지는 내 것이다. 팔지 못한다. 너는 품꾼이다, 라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가 될 때 하나님께서는 무엇에 관여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소유로서 의미가 마감되지 않고 소유를 뛰어 넘어서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내 소유가 될 경우에는 인간이 인간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그래서 인간의 소유로서 마감되지 못하도록 그걸 벗어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선 가난한 자, 고아와 과부를 발생시키는 겁니다. 이스라엘 내에서.

발생시켜놓고 소위 가진 자들의 이들을 어떻게 대우하는지 지켜보는 겁니다. 희년이라는 것이 오기 전에 빨리 자기 땅을 되돌리기 위해서 뭔가 전에 토지를 사 간 사람에게 돈을 주고 다시 되돌려 받아서 원래 하나님 주신 상속분으로 와야 되는데 그만한 여력이 있으면 괜찮은데 그만한 여력이 없는 사람은 토지 주인이 50년째에 아무 대가 없이 그냥 돌려줘야 돼요. 이유도 없이.

그것이 바로 25장 후반부에 보면 나옵니다. 47절에, “너희 중에 우거하는 이방인은 부요하게 되고 그 곁에 사는 너희 동족은 빈한하게 됨으로 너희 중에 우거하는 그 이방인에게나 그 족속에게 몸이 팔렸으면 팔린 후에 그를 속량할 수 있나니 그 형제 중 하나가 속하거나 삼촌이나 사촌이 속하거나 그 근족 중 누구든지 속할 것이요” 속한다는 말은 값을 주고 되돌려 받으란 말입니다.

그리고 그전에 35절부터 보게 되면, 동족이 같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난하게 되면 빈손으로 있게 하지 말고, 그 사람에게 이자도 받지 말고. 그 다음에 39절부터 보게 되면, 품꾼이나 우거하는 자가 함께 있을 때는 희년까지 그로 섬기게 하고 희년에는 본래의 곳으로 돌려보내라. 본 땅으로 돌려보내라. 돈 받지 말고 그냥 주라고 이야기해요.

이런 내용이 단순히 하나님께서 소위 여유 있는 사람들에게 지시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의 본래 취지가 이스라엘이 애굽에 있을 때 그들이, 출애굽기 22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애굽에 있을 때 히브리인들이 아무것도 없었어요. 재산도 없었고 있어봐야 소소한 재산이고. 그리고 노예 생활했고. 권력이 없단 말이죠. 국가가 되려면 힘이 있어야 되는데 아무 힘이 없고 다 빼앗겨버렸어요. 물론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렇게 했어요.

왜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의 노예가 되게 했을까요? 그들에게 언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언약이 힘이 안 되게 했을까요? 그 이유는 이 힘이 소유하는 식으로의 힘으로 인간들이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은 힘이 없는 것이 인간 본래의 모습이란 사실은 히브리인들은 알아야 되고, 그리고 히브리인들을 붙잡고 있는 이방민족은 알지 못해서 멸망당해야 되는 겁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 때에 인간이 노동해서 인간을 만든 건 아니잖아요. 아마 인간에게 에덴동산을 인테리어해서 만들라 하면 분명히 거기에 선악과나무를 심을 생각을 안 했을 거예요. 자기한테 해가 되는 나무를 왜 심겠어요. 먹는 날엔 죽으리라, 그것도 아름답게 꾸며놓고 죽으리라고 한 나무를 인간이 의도적으로 심진 않았을 거란 말이죠. 그저 생명나무나 많이 심어놨을 거예요.

그런데 선악과가 있다는 말은 인간 이상의 창조주, 창조주를 위하여 인간이 종속돼야 될 관계가 유지될 때만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생각하고 계시는 겁니다. 이미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는 그것이 인간에게 무시당하는 말이 됐습니다만 진리란 모든 인간에게 반겨지는 게 아니에요. 진리는 핍박받고 배척받고 무시당하고 사람들에게 놀림을 받고 모독을 당하는 모습으로 진리가 나타나지요.

현재 이스라엘 내부니까 그냥 실현되는 것 같이 생각하지만 생각해보세요. 부유한 자가 가난한 자에게 그동안 정당하게 값 치루고 산 모든 토지를 다시 무상으로 되돌려준다는 것은 부유한 사람 입장에서는 아무리 많이 가져도 실현하기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부유한 자에게 주위에 가난한 사람을 배치하는 것은 네가 잘나서 가난하지 않게 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네가 훌륭해서 부자 된 게 아니란 말이죠. 얼마든지 지금이라도 부유한 너를 한 방에 쳐서 가난하게 할 수도 있는데 그걸 안 했다는 겁니다. 왜 가난한 자의 모습의 나의 진짜 모습인 것을 네가 인정하라고 그렇게 하신 거예요. 쉽게 말해서 부유한 것도 주께서 은혜라고 할 것도 없고 부유한 채로 인생을 살라고 그런 기능을 맡겨서 부유하게 됐고, 가난한 사람도 나쁜 짓 많이 해서 가난하게 된 게 아니고 가난한 채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라고 가난하게 된 거예요. 그런 점에서 평등하단 말이죠. 하나님의 기준점이 들어있다는 점에서 평등한 거예요.

그런데 악마가 들어오고 난 뒤에는 인간세계가 어떻게 됐습니까? 지가 복 받아서 부유하다고 그렇게 자기가 다른 사람과 달리 복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광야를 통과하고 만나를 먹고 거지처럼 빌어먹고 살면서도 불구하고 약속의 땅에 들어와서는 자기의 본모습을 감추고 잊어버리는 거예요.

제가 그걸 첫째 시간에 뭐라 했습니까? 없는 존재에요. 없는 존재를 주께서는 그냥 있게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있는 상태로 있는 존재로 만든 겁니다. 그것이 율법 안에 담겨있고 율법을 실행하면서 함축된 율법의 내용이 이스라엘 백성의 실체를 통해서 이게 이스라엘 전체로 퍼져나가서 몸으로 체험케 하는 겁니다. 그러나 체험케 하는 가운데서 얼마나 많은 불만과 불평이 나오겠습니까.

37절에 보면, 가난한 사람에게 이자 받지 마라. 어려운 사람에게. “너는 그에게 이식을 위하여 돈을 꾸이지 말고 이익을 위하여 식물을 꾸이지 말라” 그러니까 그만큼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앞으로 가나안 땅에 살만하다하면 하나님의 기준점을 잊어버리고 이방사람들과 똑같이 힘, 무슨 힘이라 했습니까? 내 소유의 힘을 발휘해서 그것으로 나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이스라엘이 변질될 수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언급하는 겁니다.

그 언급이 레위기 26장부터 계속해서 27장까지 끊임없이 끝까지 계속 나갑니다. 이미 이스라엘이 어떻게 망가져서 어떻게 율법을 위반해서 이방민족과 합류되고 이방민족과 이스라엘이 구분 안 되는지 내다보고 이 말씀을 주신 겁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이 율법을 이룰 수 없어서 저주받아 마땅하고 하나님 앞에 고생해도 마땅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율법을 미리 당겨서 주신 거예요. 율법이 우리 내면이 노출되니까요. 그리고 그 사회의 실상이 노출됩니다.

그 다음에 44절에 보면, “너의 종은 남녀를 무론하고 너의 사면 이방인 중에서 취할지니 남녀 종은 이런 자 중에서 살 것이며” 이방인의 자녀 중에서 종을 취득할 수 있는데 그들은 너의 소유가 된다.

레위기에 방금 여러 가지 희년을 통해서 가난한 자를 이렇게 하고 레위인들은 이렇게 하고 돌려받을 때는 어떤 식의 값을 치루고, 그리고 희년이 되게 되면 가난한 자에게 그냥 무상으로 돌려주고, 이런 이야기, 이방인들은 종으로 삼고 그리고 만약에 이방인에게 노예로 팔린 사람이면 같은 동족 이스라엘 백성이 값을 치룰 때 삼촌이나 가까운 일가친척이 값을 치러서 자기 동족을 이방인 손에서 빼내라는 모든 내용들이 그리고 신약에 오게 되면 구원이라는 것을 설명하는데 작용요소로써 모아지게 됩니다. 집합하게 됩니다.

구원이란 것을 구출이죠. 구출이 되려면 어디에서 구출이 되느냐? 이게 설명이 돼야 되겠지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로부터 구출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라는 것은 뭐가 있기 때문에 그렇지요? 죄가 있기 때문이죠. 그럼 죄는 어떻게 아느냐? 율법이죠. 율법을 통해서 죄가 드러나고 그 죄로 진노 받아 저주받아야 마땅한 그것으로부터의 구출입니다. 구출되면 기쁘지요. 이게 희년이에요.

어떻게 기쁘냐? 율법대로 못 살아서 죄라 하는데 율법대로 살게 되면 기쁘지요. 왜? 율법대로 살게 되면 영생이 되고 의가 되고 천국 백성이 되니까 기쁘지요. 그래서 죄에서 구출할 때는 율법대로 살 게 된 상황 또는 상태가 우리에게 덧입혀지면 되는 겁니다. 율법대로 된 그 상황이 우리에게 덮치면 되는 거죠. 그게 기쁜 소식이죠.

그러면 여기서 율법대로 산다는 게 뭐냐? 율법대로 못 사는 게 뭐냐? 이걸 이번 시간에 생각해봅시다. 그걸 위해서 룻기를 볼 필요가 있어요. 사사기 다음에 나오는 룻기인데 여기 룻기 1장 1절에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이렇게 돼있어요. 사사들이 치리했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그 당시에 율법대로 산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이런 뜻이에요.

율법대로 산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율법대로 못 살게 되면 율법에 준해서 하나님의 백성은 저주를 받는데 그 저주가 뭐냐? 이방나라한테 압제를 받는 식으로 저주를 받아요. 이방나라마저 하나님의 손에 다뤄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사사는 뭐냐? 사사는 그들의 율법을 모르는데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으로 말미암아 일단 건져놓고 그 다음에 너희들이 율법대로 못 살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이런 화가 미쳤다. 너희들이 압제당하는 처참한 경우를 자초했다. 그걸 알려주시는 방식을 사용하는 거예요. 거기에 등장하는 사람, 일방적으로 영문도 모른 채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그냥 하나님의 구원자 노릇을 하면서 율법과 상관없이 어떤 초자연적인 능력을 발휘해서 일단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이방민족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거죠.

그걸 제가 기적이라 했지요. 그런데 기적은 어디에 모아지느냐 하면, 율법의 내용으로 쏠려야 되고 모아져야 돼요. 왜 기적이 필요하냐? 그만큼 죄를 지었기 때문에 기적이 필요한 거예요. 기적이란 것이 필요치 않는 것이 좋은 시절이에요. 왜? 살아있다는 그 자체가 기적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살려주는 것을 알게 되면 이것은 이스라엘에게는 이스라엘이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말씀,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살아있는 나라기 때문에 누가 감히 그 나라를 건드리겠습니까? 안 건드리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혜택은 혜택대로 입고 하나님은 모르고 이방나라처럼 살려고 할 때 하나님의 아주 폭력적인 개입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강압적인 개입이 있을 수밖에 없어요. 그 개입이 일단은 이방민족한테 그들이 살고자했던 모든 걸 다 빼앗기게 하시고 그 다음에 다시 엉뚱한 사사를 통해서, 사사가 훌륭하지도 않아요.

하여튼 사사 본인도 너무 당황스럽고 난감해요. 내가 왜 사사합니까, 할 정도로 엉뚱한 사사를 보내서 아무것도 아닌 율법과 상관도 없는 그 사사가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했다는 말은, 이것은 곧 하나님 자신을 하나님의 은혜를 너희들은 평소에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무심하게 여겼다는 것을 새삼 알려주는 기능입니다. 그래서 사사시대란 말은 다 같이 뭐가 뭔지도 모르고 율법도 버리고 하나님 버리고 살던 그 시절이란 뜻으로 생각하시면 돼요.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흉년이 드는 것이 당연하지요. 사람들이 하나님을 버렸으니까. 풍년이라는 것은 이스라엘 땅에 어떤 생산물이 난다는 것은 인간이 애쓰고 노력한 덕분이란 뜻이 아니고, 그건 이방민족인 경우고요. 이스라엘 땅에서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다, 라는 증거로써 생산물이 나고 그런 생산물이 되기 위해서 적절한 때에 하나님께서 빛과 단비를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시거든요.

그런데 그게 끊어졌다는 말은, 네 본래의 모습은 은혜 받을 가치도 없어. 율법을 위반했으니까 너는 남의 자식과 마찬가지야. 내 백성 아니야, 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흉년이 온 거예요. 흉년이 왔을 때 여기 베들레헴에 살던 엘리멜렉이란 가정이 있는데 그 가정이 흉년이 들어 못 사니까 약속의 땅을 버리고 모압 땅으로 내려갑니다. 모압 땅은 베들레헴보다 이스라엘 남쪽에 있는 거예요.

지중해 있고 이스라엘, 이집트가 있고 홍해 있고 시나이 반도가 있습니다. 여기 암몬, 모압. 갈릴리 바다에서 내려와서 사해에 암몬, 모압. 이스라엘 땅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주시기로 허락하지 않은 땅입니다. 약속의 땅이 아니란 말이죠. 그러니까 엘리멜렉이란 이 가정은 약속의 땅을 버리고 약속의 땅이 아닌 땅으로 갔는데 그것은 내 몸 내가 살기 위해서 갔지요.

살기 위해서 갔는데 죽어요. 남자란 남자는 다 죽여 버립니다. 아들 둘 데려갔는데 아들 둘 다 죽어요. 남는 것은 아내와 며느리 둘밖에 남지 않았지요. 자, 이 이야기와 오늘 희년 이야기와 무슨 관계있느냐? 제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구원이란 의미는 탈출을 의미하는데 무엇의 탈출이냐 하면, 저주로부터의 탈출입니다. 죄로부터의 탈출이에요.

약속의 땅은 죄인은 올 수 없어요. 의인들만 여기 약속의 땅, 천국을 구성합니다. 그런데 인간치고 죄인들밖에 없지요. 죄인밖에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기준점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기준점이 다가옴으로써 그들은 죄인 되었고 기준점에 준하면 이들은 백성이 될 수 없어요. 따라서 하나님께서 기준점을 여기다가 주게 되면 이 사람들이 기준점을 소유하는 게 아니고 기준점에 의해서 기준점을 드러내도록 증거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 그들은 들어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언약대로 움직이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흉년을 줬어요. 흉년을 주는 것은 율법을 어길 때는 저주받는 것이 지극히 율법의 원칙 가운데 있기 때문에 당연한 거죠. 그렇다면 흉년이 오면 백성들이 가만있습니까? 나름대로 몸부림치겠지요. 어떤 행동을 보여주겠지요. 그 행동을 추적하게 되면, 희년의 취지가 거기서 살아나게 되는 겁니다. 그 취지가 땅을 버리고 모압 땅으로 내려간 거예요. 자기 땅은 없는 거예요. 이미 남의 손에 넘어갔으니까.

그런데 룻기 4장에 보면 3절에, “보아스가 그 기업 무를 자에게 이르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관할하므로 내가 여기 앉은 자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고하여 알게 하려 하였노라” 삼촌이나 가까운 친척이 땅을 되돌려 받을 수 있는 권한이 있는데 그것도 서열로 정해져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보아스가 나오미 친척인데 보아스는 모압 여자 룻을 사랑해서 어쨌든 사랑하는 여자가 고생하는 걸 못 보잖아요. 그러니까 죽은 시아버지 땅, 곧 자기 땅이 되겠지요. 그래서 보아스가 그 땅을 되돌려주고 싶은 거예요. 그러려면 땅주인에게 돈을 주고 받아와야 되는데 그것도 순서가 있어요. 그래서 먼저 앞선 순서 가진 사람에게 물어보는 거예요. “네가 살래?” “나, 안 산다.” “그럼 내가 살게.”

그래서 자기가 돈을 내고 그 밭을 사서 나오미의 원래 땅, 엘리멜렉의 땅을 돌려줍니다. 이걸 구원이라 하는 겁니다. 구원에 여기에 보아스라는 기사, 일가친척이 등장해서 뭘 하느냐? 값을 치러요. 값을 치르게 되면 다시 나오미 가정, 그러니까 엘레멜렉의 가정은 하나님이 주신 상속분을 그대로 다시 거기서 살 수 있어요. 하나님의 품꾼의 자리를 회복된 겁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주인이 되고.

구원이란 것은 원래 위치, 원래 관계로 되돌아가는 거죠. 하나님은 나의 주인이시고 우리는 품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덕분에 삽니다. 이게 바로 약속이 주어지게 되면 이러한 의식을 하나님의 백성은 갖게 되는 겁니다. 그럴 때 내 것 건졌다 하지 말고 뭘 알아야 되느냐 하면, 희생의 취지를 알아야 돼요. 희생은 값을 치룬 희생이에요.

왜 값을 치렀다는 말을 해야 되느냐 하면, 너는 전에 네가 빼앗긴 그 주인한테 네 힘으로 빠져나올 수 없었다는 것을 값을 치렀다는 것으로 말해주는 거예요. 인간은 자력으로 현재 마귀한테 속한 형편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12장 2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니까 바리새인들이 논리적으로 시비를 거는 거죠. “바리새인들은 듣고 가로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24절)라고 이야기했어요. 예수님도 귀신을 쫓아내니까 바리새인들 논리의 전제에 의하면 예수님은 이단이거든요. 이건 마귀 들린 자란 말이에요. 마귀 들린 자가 더 힘이 세니까 약한 귀신을 쫓아낸다. 이렇게 논리의 정당성을 폈단 말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어떻게 같은 나라가 분쟁이 일어나느냐. 분쟁하게 되면 그 나라가 무너지게 돼있는데. 마귀 나라가 그렇게 내부적으로 분쟁이 일어나는 나라가 아니다. 마귀 나라는 마귀가 꽉 쥐고 있다. 그걸 먼저 언급을 하면서 진짜 마귀 나라에서 벗어난 사람은 마귀 나라를 이미 이긴 자에게만 그런 능력이 나온다 해서 예수님 자신을 마귀 나라를 이긴 자로 소개합니다.

28절에,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구원을 뭐로 보느냐? 늑탈한다. 강제로 빼내는 걸로 봤어요. 구원은 뭐냐? 늑탈행위에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이 아무리 상상력을 동원하고 아무리 구원을 생각해도 그것은 구원받은 상태를 모르기 때문에 지 나름대로의 구원을 상상한다는 겁니다. 진짜 구원받은 상태에 돌입하게 되면 무엇을 의식하게 되느냐 하면, 내가 빠져나올 수 없는 곳으로 빠져나왔다는 인식이 유지가 돼야 돼요. 그게 발생되는 겁니다.

구원받아놓고 자기가 굉장히 신기해하는 겁니다. 내가 왜 세상 사람과 같지 않지, 생각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은 자기 몸만 제일 중요하고 자기 행복만 추구하는데 어떻게 해서 나는 내 행복 같은 것은 날아가고 주께서 다루고 있다는 느낌이, 왜 이런 생각이 들지. 돈이 있어도 내 것이 아니고, 건강을 잃어도 건강이 원래 내 것 아니고, 건강해도 원래 내 건강 아니고, 아파도 주께서 아프게 하셨고. 모든 것이 주님께서 하게 하셨다는 생각이, 왜 나한테 그런 생각이 들게 되었느냐, 라고 본인을 보면서 본인을 낯설어하고 이상하게 여겨야 됩니다.

이게 바로 늑탈된 사람의 특징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걸 신약에서는 성령 받았다고 해요. 사도행전에 나오는 모든 성도들의 특징이 성령 받았기 때문에 자기의 변화에 대해서 자기가 기이하게 여기는 겁니다. 전에는 내 잘난 맛에 살았고 내 자랑하면서 살았는데 지금은 주님 십자가를 자랑하는 거예요. 왜? 주님의 십자가 희생이 값이 되기 때문에. 주께서 저런 값을 치르지 않았으면 내가 이렇게 천국 못 간다는 걸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구원받은 자로 자처하면서 여기서 또 진짜와 가짜가 갈라지겠지요. 구원받은 자로서 자랑거리가 구원받은 나를 자랑한다면 이건 백 프로 가짜지요. 왜냐하면 인간은 구원받기 전에 소망한 게 있었어요. 아까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구원을 상상한다고. 너무나 세상사는 게 힘드니까 천국이 좋은 곳이라니까 죽어서 어떤 식으로든 가고 싶은 거예요.

예수를 믿든지 예수의 피를 믿든지 십자가 믿든지 어떡하든 간에 구원받는 나를 상상해서 결국 그 사람의 자랑거리가 구원받으려고 애썼는데 구원받았어가 돼버려요. 이 자랑하는 것은 백 프로 가짜입니다. 성령 안 받은 거예요. 성경을 백독을 했다든지 레위기를 봤다든지 기도를 열심히 했다든지 교회에 충성봉사 주님께 찬미를 했다든지 어떤 방식으로든 내가 원했던 것을 내가 가졌다, 이렇게 되면 가짜지요.

구원은 내가 원한 게 아니에요. 내가 상상한 그것조차도 이게 죄가 되고 이게 엉터리라고 인식하는 자가 구원된 자에요. 내가 상상한 천국, 내가 상상한 구원마저도 내가 조작한 것이고 엉터리고 마귀가 내게 시킨 일인 것을 깨닫는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그럼 진짜 구원받은 사람은 뭘 자랑하느냐? 성경에 나오는 말씀대로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지요.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나오지요.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말이 십자가도 자랑하고 부활도 자랑한다는 말이 아니고 ‘외’란 말을 해서 십자가에요. 부활도 아니에요.

그런데 자기 구원받은 사람은 무엇에 잔뜩 기대를 거느냐 하면, 사람이 죽었다가 부활된다니까 자기도 부활되고 싶어서 부활을 부각시키는 거예요. 십자가를 중간과정으로 여겨서 한 번 거친 걸로 끝, 땡, 종쳤다는 거예요. 그건 잊어버리고 결과적으로 부활됐으니까 부활된 걸 자랑하겠다는 거예요.

그러나 진짜 성령 받은 사도는 부활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자랑하고 그것도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해서 이중부정으로 그만큼 강조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외에는, 부활이 아니고 십자가 외에는.

왜 사람들이 자꾸 부활을 강조하느냐 하면, 일반인들이 죽어서 영생하고 싶어 하니까 이건 마귀 들린 모든 자들의 희망사항이잖아요. 그러니까 교회가 사람들은 꼬이기 위해서 십자가를 감추고 죽어도 산다고 부활을 강조하다보니까 자기는 부활에 마음이 뺐기는 거예요. 부활을 자랑한다는 말은 뭐냐? 구원받은 나를 높이고 싶다, 나는 구원받은 나를 자랑스러워한다. 그 말과 같은 말이 되는 거예요.

그러나 사도는 뭐냐 하면, 십자가만 자랑한다는 정도가 아니고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게 없다는 겁니다.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게 없다는 말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주님을 자랑하는 거예요. 값은 내가 치르지 않았다. 나의 봉사나 희생 어떤 것도 내 구원에 대한 값이 될 수 없다, 그런 뜻이에요. 값에 개입될 수 없다는 뜻이에요.

이것을 오늘 레위기 25장 결부시켜 봅시다. 레위기 25장에서 내가 분명히 정당한 값을 치러서 어떤 토지나 가옥을 상가 같은 건물을 매입했단 말이죠. 그런데 후손들 50년 돼서 개인에게 준 것도 되지만 그 가문의 가족에게 그 지파에게 하나님이 상속했기 때문에 아버지는 죽고 자식이 그 땅을 돌리려 할 때 “주인님, 돌려주세요.” 할 때 그 후손이 돌려주겠느냐는 말입니다. 값을 치렀는데. 값을 안 주고 도둑처럼 탈취했으면 돌려주지만 탈취한 게 아니고 값을 받고 줬단 말이죠.

주님은 이야기합니다. 그 값이 무슨 값이냔 말이죠. 인간들은 내 노동의 값, 내 노동 시간이 모아져서 값이 치러졌다고 하지만 주님은 그게 아니고 천국에선 그게 아니라 네 노동 시간이 아니라 주님의 노동 시간이라는 거예요. 주님이 희생했던 그 노동이라는 겁니다. 주님의 희생이 빠져버리면 그거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지요.

희년을 통해서 희년이 있다. 돌려줘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둘려주고 받는 과정에서 인간의 본색, 하나님의 희생의 것을 놓쳐버리고 잊어버리고 이방민족 된 이스라엘의 미래상, 그걸 미리 앞당겨서 레위기를 통해서 보여주는 거예요. 분명히 하나님이 주인인데 어느새 주인이라고 이야기하면서 본인이 주인돼있는 그러한 변화, 그러한 타락, 그것은 율법이 주어지게 되면 타락도 동반해서 그 현장에 드러나게 마련이에요.

다시 말해서 구원이란 하나님이 거저 주는 것 맞아요. 하나님이 거저 주지만 우리는 거저 받기를 원하는 게 있기에 거저 주는 게 아니고 우리에게 받을 것 다 받겠다고 하시면서 거저 주세요. 하나님은 거저 줄 걸, 이런 기대했기에 거저 주는 게 아니고 우리 자신의 것 일체에 대해서 법대로 처벌하겠다는 그 마음에서 나온 거저 주심이에요.

49로서 처벌하겠다, +1. 처벌마당하다고 하는 자에게만 납득이 되고 감사가 되고 기쁨이 되는 그 희년, 이 희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처참하게 망가져야 되고 처참하게 우리 자신이 얼마나 얍삽하고 간악한 완고한 자인 것을 폭로되는 절차가 있어야 되는 겁니다.

희년을 이야기했던 이스라엘, 이방민족과 달리 희년의 율법을 받았던 그 이스라엘이 결국 희년을 증거 하기 위해서 포로 잡혀 갑니다. 약속의 땅에 있을 자격이 못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희년이란 율법이 이스라엘을 힘들게 왔던 그 땅에서 추방시켜버리고 만 겁니다.

이스라엘이 추방되었다. 이것 하고 마치겠습니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추방되어서 애굽으로 앗수르로 온 나라로 쫓겨나갔지요. 그러면 여기는 비어있습니다. 사실은 비어있는 게 아니고 율법이 살아있지요. 율법이 살아있기 때문에 율법에 위반된 백성들은 백성이 아니라고 추방된 겁니다.

그러면 율법이 살아있는 땅이면 다시 모집될 때는 율법이 가서 율법의 완성이 됐을 경우에 율법 완성의 취지로 가서 데려오는 거죠. 이게 바로 희년사상이 되는 겁니다. 기쁨이죠. 우리가 쫓겨나야 마땅함을 알 때 희년의 기쁨도 같이 거기서 제대로 대우를 받는 겁니다. 희년의 기쁨이 체험이 되는 거죠.

그러면 여기서 율법이 완성되었다는 소식은 누구로부터 들려지는가? 바로 예수님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그 소식이 바로 율법의 완성이 되는 겁니다. 49에서 멈추는 게 아니고 +1이 되는 거예요. 1의 시기에요. 그러면 이 49년이 뭐냐? 기준 시간이 되지요. 기준 시간, 공간, 기준점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희년에는 율법이었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뭐였습니까? 인물이죠. 인물이 되어서 예수님이 노동했던 희생했던 모든 율법을 이루신 바는 예수님이시다, 라는 사실이 성령을 통해서 가서 주님께로 가게 하는 겁니다. 아무나 가는 게 아니지요. 그 많은 과부가 있지만 사렙다 과부한테만 가는 것이 성령께서는 백성 되어야 될 사람에게만 가서 성령이 주어져서 성령을 통해서 오직 뭐만 자랑하는가?

그 값 치르심을 자랑하고 그 도착지점은 희년의 세계에 도달했음을 감사하면서 그 다음에 뭐냐? 증거 하게 되는 겁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계셔서 그리스도가 다 이루심을 증거 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의 자랑거리는 나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이 값을 치렀다는 이것이 이 세상의 어떤 것에도 해방할 수 없는 기쁜 소식이다, 라는 것을 말하게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에게 희년 주셔서 우리의 속마음에 마귀의 마음이 들어있음을 폭로시켜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러나 그 폭로 당함이 희년을 위한 필수절차인 것을 또한 감사하게 하시고 기쁘게 되어서 오직 십자가 값만 십자가만 자랑하고 증거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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